프레너미

나를 좋아하는 너

54천자/231029 대운동회-[프레너미/강산+주신이]

주신이

0.

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난 다음 주,

녀석이 전학을 갔다. 정확히는 미국으로 유학을. 아마도 성인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한다. 녀석은 떠나기 전까지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소문만 녀석과 나 사이를 떠다닐 뿐이었다. 두둥실, 진위가 확실한 녀석의 감정만을 담고서….

강산이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 대상이 나라는 것 또한 그랬다. 오히려 소문이 늦었다. 한 번이라도 유심히 관찰한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티를 잔뜩 내고 있었으니까. 녀석이 자각하기 전부터,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강산만 몰랐을 뿐이었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요란한 녀석이었다.

1.

강산은 전학을 온 당일부터 파란을 일으켰다. 주림고등학교는 전국에서 손에 꼽히는 테니스 명문고다. 스포츠와 관련 없는 진학반 학생들도 등교할 때마다 교문과 체육관에 걸린 테니스 대회 입상 관련 현수막을 본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에도 서너 번에 한 번꼴로 테니스부 얘기가 나왔다. 전반적으로 테니스가 익숙한 이 학교에, 세계 랭킹 20위 내에 드는 프로 선수의 아들이자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신예는 한창 잘나가는 연예인과 다름 없었다.

강산이 왔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학교는 시끄러워졌다. '그' 강산이 맞냐는 물음, 교문을 통과한 포르쉐와 교무실로 향하는 모자를 보았다는 증언, 교장실을 훔쳐보다 야단맞고 쫓겨난 녀석들의 영웅담, 사물함에서 강산이 나온 잡지를 꺼내 품에 안고는 싸인을 받을 거라며 수줍게 말하는 여자애, 강산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공부하기 싫던 차에 술렁대는 분위기에 편승한 놈들까지. 이번 학기 들어 최대 이벤트가 아니었나 싶다. 오히려 테니스부 부원들은 차분했다. 어차피 오후의 부활동 시간에 강산을 만날 예정일뿐더러, 테니스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주니어들은 국내 대회에서 강산에게 무참히 깨진 전적이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강산의 재능을 시기 질투하고 앙심을 품은 녀석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 녀석들에게 강산의 등장은 달갑지 않을 터였다.

나는 들뜨지도, 그렇다고 가라앉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강산과 나는 사는 세계가 달랐다. 같은 학교 학생이 되었지만 잠깐일 뿐이다. 1학년 말, 이제는 진지하게 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였고, 테니스 유망주 같은 건 나의 관심사 밖이었다.

강산은 3반에 배정됐다. 종일 녀석 얘기뿐이라서 알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귀에 들어왔다. 모르는 새에 1반부터 3반까지 교실 벽을 허물고 통합됐는지 강산의 일거수일투족이 실시간으로 전달됐다. 강산이 맨 뒤 창가 자리에 앉았대(주인 있는 자리를 뺏은 것 같았다), 책이 없어서 짝이랑 같이 봤대, 입고 온 사복 브랜드가 어디 꺼더라, 글씨체가 자유분방하더래, 쉬는 시간 되자마자 누구한테 물어서 매점부터 갔다더라…. 안 그래도 기말고사만 지나면 겨울방학이라고 어수선하던 학교가 시장통 뺨치게 시끌벅적했다. 이어폰을 꽂고 MP3 볼륨을 최대로 올려도 재잘대는 수다가 노래를 뚫고 들어왔다. 물 한 모금 마셔도 이야깃거리가 될 것 같아 유명인의 삶도 피곤하겠다 싶었다. 애들이 하루빨리 익숙해지거나 강산이 학교에서 사라지지 않으면 이 소란이 계속될 게 뻔했다.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 철에 쓸데없는 정보를 억지로 주입 당하는 내 삶도 덩달아 피곤해졌다.

내 일상은 늘 똑같았다. 대한민국의 고등학생이라면 다들 그렇듯이, 아침 8시쯤 등교, 밤에 하교, 집에선 밀린 숙제 처리 후 씻고 잠, 초등학생 때 그렸던 원형 시간표로 그린다면 과반을 학교로 표기하는 일정이었다. 다만 다른 애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후 수업 이후에 학교에 남아 자습하거나 학원을 가는 대신, 방과후 활동으로 테니스를 쳤다.

나도, 테니스를 했다. 테니스 명문인 주림고에서. 그러나 의미는 없었다. 학교에서는 엘리트반만 신경 썼다. 취미반은 구색 갖추기에 불과했다. 테니스 전용 체육관이 있을 정도로 환경은 좋았지만 프로 지망생을 위한 시설이었다. 수업일정을 통째로 빼고 훈련에 매진하다 대회에 나가 실적을 쌓을 수 있는 주니어들. 학교 일정이 끝난 후에야 혼자 공을 치는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러니 재능과 환경을 모두 갖추고 앞으로 탄탄대로를 달릴 일만 남은 강산과, 나 사이에 테니스라는 공통분모가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하늘 아래 사는 수많은 사람의 세계가 천양지차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강산이 나를, 좋아하기 전까진.

2.

언제부터였을까? 호감은 본인보다 훨씬 빨리 알아챘으나 시작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눈치 볼 일 없이 살아와서 그런지 강산의 감정은 있는 그대로 표정에 드러나서, 순간순간의 생각은 머리통이 활짝 열려있는 것처럼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러나 강산이 왜, 나를 좋아하게 됐는지는 전혀 짐작이 안 갔다. 모자람 없는 왕자님과 엮일 거라곤 상상 한 번 해본 적 없으므로. 물론 바란 적도 없었다.

녀석의 감정을 처음 깨달은 때는 두 번째 합동 체육 시간이었다. 기억하기로 강산과 나의 접점이 하굣길에 잠깐 스쳐 지나간 것까지 모두 합해서 여섯 번째가 되었을 시점이었다. 횟수를 센 건 자의가 아니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강산은 어딜 가든 시선을 긁어모았다. 키 때문이 아니다. 평균 키보다 약간 클 뿐이었으니까. 대신 입시에 찌든 학생들에게 없는 게 있었다. 외적으로는 떡 벌어진 어깨와 굽지 않고 곧은 상체, 남들과 다른 교복 핏, 그런 것들. 덕분에 170cm 후반의 키로도 남들보다 머리 반 개는 커 보였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어렸을 때부터 쌓아온 승리와 자기 확신은 어느 때나 자신만만한 태도를 뒷받침했다. 다소 건방져 보일 수 있는 비뚠 입매도 납득하게 만드는 분위기였다.

그 때문에 전학해 오고 보름이 지나서도 강산이 나타나면 주위가 술렁였다. 매일 같이 봤을 3반 녀석들마저도 강산의 이름을 속닥댔다.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 있으면 알 수밖에 없었다.

1반과 3반의 두 번째 합동 체육 수업, 그때도 강산은 대다수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체육복 차림이 더없이 잘 어울렸다. 태어날 때부터 입고 있었던 것처럼…. 체육 선생님의 부탁대로 도열 한 학생들 앞에 선 강산은 배드민턴 라켓을 휘두르는 시범을 보였다. 어깨 뒤로 넘어갔던 팔이 시위에서 풀려난 화살처럼 앞을 때렸다. 옷 위로 드러날 정도로 근육질이면서 고무줄처럼 탄력 있는 몸이었다. 운동선수로서나 남자로서나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자애들은 강산의 라켓이 허공을 붕 붕 가를 때마다 입을 틀어막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어서 체육 선생님과 셔틀콕을 주고받을 땐, 몇몇은 아예 삼삼오오 무리를 짓고 자리에 앉아 속닥댔다. 상기된 얼굴들을 바라보는 남자애 몇은 착잡해 보였다. 그러나 질투하기엔 강산이 너무 잘났다. 솔직히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멋있었다. 테니스 라켓보다 훨씬 가벼운 배드민턴 라켓을 쥔 녀석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훨훨 날아다녔다. 처음엔 다른 애들과 시범을 보일 때처럼 설렁설렁 콕을 넘기던 선생님도, 녀석이 한 번도 놓치지 않아 랠리가 길어지자 점차 진심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선생님이 어느 쪽으로 쳐내든, 녀석은 혼자 공기 저항이 없는 세상에 사는 것처럼 코트를 종횡무진하며 콕을 팡팡 쳐냈다.

스포츠 명문인 주림고등학교의 체육 교사답게 은퇴한 선수 출신인 선생님의 실력은 좋았지만, 한창 전성기에 돌입하는 주니어에겐 밀릴 수밖에 없었다. 프로 데뷔를 목전에 두고 있고, 데뷔하자마자 세계권에 진입할 거라는 평을 듣는 유망주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심지어 녀석은 자기가 낼 수 있는 파워의 절반도 꺼내지 않았다. 기껏해야 40% 정도? 훔쳐봤던 엘리트반 서브 연습 기준이라 어쩌면 그보다 더 낮을 가능성도 있었다.

한 번의 랠리가 끝이 나질 않았다. 뒤로 갈수록 선생님은 정색하고, 강산은 웃었다. 입가에 걸린 어슷한 미소가 짙어졌다. 관중에겐 매력적이었지만 상대에겐 도발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이 자리에 있는, 강산과 시합해봤던 주니어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작게 비아냥거렸다. 보통 학생이라면 앞으로의 관계를 위해서나 겸손 때문에 져줄 만도 할 법한 상황이었지만, 강산의 성격상 그럴 리가 없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까지 올라오는 내내 강산의 플레이는 오만했고 성격 또한 그랬으며, 그럴 만한 실력이 있었으니까.

십 분가량 이어진 랠리는 결국 선생님의 리시브가 네트를 넘기지 못하며 끝났다. 뒤로 후퇴한 이마 선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선생님이 애써 웃으며 강산을 칭찬했다. 녀석은 얄밉게도 여전히 멀끔한 낯짝이었다. 강산의 등을 쓰다듬는 선생님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사실 나는 시합이 시작되고 콕이 두어 번 오갔을 때부터 길어질 것 같아 진작에 앉아 있었다. 네트 봉에 등을 대고 구경하다 보니 점점 자세가 불량해졌다. 결말이 뻔히 보여서 조금 시시했다. 강산이 전력을 다하면 훨씬 무거운 라켓으로도 시속 200km가 넘는 서브를 날려대는 걸 알고 있으니 경쾌하게 콕을 쳐내는 몸놀림이 약간은 기만 같았다. 테니스 코트 위의 강산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언제든 게임을 끝낼 수 있으면서 일부러 이어가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강산의 폼은 분명히 깔끔하고 절도 있었지만, 왠지 강산의 중학 시절 대회 비디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타고난 힘이 넘쳐서 적수가 없던 나머지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공을 날리던, 상대는 안중에 없는 테니스를 치던 녀석이. 처음에는 허공을 오가는 콕을 따라 좌우로 흔들리던 아이들의 고개가 점차 한 곳에 붙박였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 콕을 톡, 쳐내는 강산에게로.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면 대성공이었다. 나 역시도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강산만 보게 될 정도였으니까. 그때쯤엔 자세가 완전히 무너져서,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아 한쪽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삐딱하게 턱을 괴고 녀석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랠리는 말했듯 예상했던 대로 강산의 승리였다. 선생님은 강산을 안아주면서 간신히 스포츠맨십 정신을 보여주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애꿎은 학생들을 들볶았다. "일어나라, 뭐하나!" 그러거나 말거나, 강산은 후련한 표정으로 씨익 웃으며 관중을 둘러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강산과 눈이 마주친 게. 미소를 머금고, 선생님의 호통에 궁시렁대며 일어서는 아이들을 한 바퀴 둘러본 녀석은 곧, 정확히 내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우연이 아니었다. 나는 누구도 착각할 수 없을 만큼 동떨어진 곳에 혼자 있었다. 쏘아보는 눈빛이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 같았다. 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다 엉겁결에 녀석의 눈초리를 받으며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굳고 말았다. 내가 뭘…잘못했나? 그것보다 쟤는 나를 알기나 하나? 왜 저러는 거지?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체감은 최소 1분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실제로는 몇 초밖에 되지 않았던 시간이 흘렀다. 믿기지 않게도 다른 녀석들이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짧았다. 혼란스러워하는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 강산이, 갑자기 만개하듯 웃었다. 큼직한 눈을 초승달처럼 휘면서 이를 드러내고 만면으로 웃었다.

내 첫 감상은 이러했다. 저 새끼, 미쳤나?

그 생각은 녀석의 붉어진 귓가에 시선이 닿으며 더욱 강화됐다. 강산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자리로 돌아갔다. 꺄, 꺄, 거리는 작은 비명을 귓등으로 흘리며 나는 선생님에게 혼나기 전까지 한참 동안 내가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강산은 나를 보고 웃은 게 맞았다.

대체 왜?

3.

그날 이후로 동선이 겹치기 시작했다. 지난 1년 동안 이 학교가 좁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강산과 마주치는 빈도가 늘수록 의심이 들었다. 사실 나만 모르는 비밀 통로가 있나? 신관에서든 구관에서든 체육관까지 바로 이어지는…. 같은 학교의 학생이니까 일정이야 뻔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만날 수 없는 시간대에 자꾸 출몰하니 합리적인 의문이었다. 분명히 3반은 과학실 수업이랬는데, 어떻게 수업이 끝나자마자 체육관에 나타날 수가 있지? 걸으면 십 분, 뛰어도 오 분은 걸리는 거리를.

나중에 듣기론 강산이 종종 수업 끝나기 전에 먼저 나왔다고 한다. 선생님들이 제지할 만도 했는데, 특별 대우인지 한 번도 막은 적이 없단다. 하긴 강산은 공부하지 않아도 미래가 보장된 엘리트였으니 별다른 잡음을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동 수업 교실이 이어지거나 방과 후 체육관에 가는 길이라거나, 아니면 전혀 연관 없는 때조차 강산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딜 가든 시선을 몰고 다니는 녀석답게 내가 아무리 관심을 끄려 해도 신경을 건드렸다. 성가셨다. 게다가 이미 나는 강산이 배드민턴 시합 후에 보였던 웃음 때문에 머릿속 한구석에 녀석의 진의를 밝혀내려는 고민이 자리잡힌 상태였다. 나를 보고 웃었던 녀석과 자꾸 마주친다. 교내를 천리마처럼 질주하는 취미가 있는 게 아니라 특정한 목적이 있다면, 높은 확률로 그 이유는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확신했다. 도끼병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했다.

기껏 마주쳐도 강산은 내 쪽에 한두 번 시선을 줄 뿐, 별다른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아는 체를 하지도, 전처럼 웃지도 않았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매번 주시하는 대상이 바뀌어도, 나는 고정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강산에게 관심 쏟고 싶지 않았다. 녀석이 먼저 그러니까 나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 강산의 존재감이 큰 탓이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한 달이 지나자 가는 길에 강산이 있는 게 익숙해졌다. 녀석은 가능한 한 끊임없이 주위를 맴돌았다. 내가 들은 강산의 성격이라면 이런 식으로 답답하게 굴기보다 말을 뱉고 볼 텐데, 코트 위의 독불장군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강산이 하도 찾아오니 묘한 말이 돌기 시작했다. 1반에 강산이 좋아하는 애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 잘못 없으면서 괜히 제 발 저려서 소문을 찾아들었다. 다행히 나에 관련된 건 아니었다. 1반에서 제일 인기 많은 여자애가 하나 있는데, 강산이 매번 그 애를 보러온다고 했다.

나보다 머리 반 개는 작은 키에 조그만 체구의 여자애였다. 단발 앞머리에 맨날 색색깔 핀을 꽂고 다녔다. 별명은 다람쥐였다. 동그란 눈에 동그란 볼이 별명의 생물체를 닮기는 했다. 쉬는 시간만 되면 그 애의 주위로 남자애고 여자애고 모여서 시답잖은 얘기를 떠들어댔다. 수다의 파도 속에서 그 애의 웃음소리는 유독 잘 들렸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런 소문이 돌만도 했다. 실제로 강산은 1반의 수업이 막 끝난 교실에 오거나 합동 수업 교실에 먼저 오면 그 여자애가 주로 앉는 자리에 앉았다. 그 애는 즐거운 운동회에서 계주 바톤 터치를 하듯 까르르 웃으며 자리를 비워주었다. 대신 바로 가지 않고, 책상에 살짝 걸터앉아 강산과 오 분씩은 떠들었다. 종알종알, 작은 입에서 끊임없이 노랫소리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산은 테니스계에서의 이미지와 달리,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들을 줄 알았는데 말수가 많지는 않았다. 보통 두세 마디나 대꾸하나. 그래도 여자애에겐 그걸로 충분한 듯했다. 강산이 짧게 대답할 때마다 얼굴이 옅은 복숭아색으로 물들었다. 강산을 좋아하는 아이들의 대부분이 그러듯이.

강산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교내의 연예인 같은 강산과의 교류 자체로도 짜릿했을 것이다. 희귀한 일이라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으니까. 그 애는 겉껍데기는 멀쩡한 강산을 좋아했고, 녀석과 떠들 때의 다른 애들의 시선도 좋아했다. 선후 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숨기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지만 이따금 손가락으로 가리고 웃는 눈에 우월감이 비쳤다. 강산이 몰랐을까? 글쎄, 그건 회의적이다.

근거 있어 보이는 소문이 기정사실화되어, 가끔 수업 끝난 후에 정리하느라 아직 안 나간 선생님이 강산 더러 누굴 보러 그렇게 급하게 왔냐며 농담할 때도 있었다. 강산은 그냥 웃어넘겼다. 제법 성숙한 태도여서 경청과 더불어 의외였다. 내가 아는 강산이라면 거만 떨 법도 했기 때문이었다.

애들도 선생님들도, 하다못해 코치도 믿는 소문이었지만, 강산은 딱히 정정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들 거라 여겼는지, 아니면 당사자들만 사실을 알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한 달 내내 별다른 액션이 없었다.

내가 바란 건 아니지만 강산의 짝사랑의 당사자는 나와 강산이었다. 적어도 그 중 하나인 나는, 헛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강산은 솔직해서 생각이 손에 잡힐 듯 훤했다. 그리고 강산은, 적어도 자기의 감정에 한해서는 상대방이 헷갈리게 굴지 않았다.

녀석은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계속.

4.

강산은 나를 좋아한다.

나는 속단하는 편이 아니다. 오히려 돌다리를 두들기고 건너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 무수히 많은 요인을 전부 고려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선택지가 한정적인 코트 위에서와는 다르게, 일상에서 사람의 심리를 넘겨짚는 건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필패의 길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입학한 이래 처음으로 단정 내릴 수 있는 명제가 생겼다. 강산이 나를 좋아한다는 문장이다. 아마도 녀석이 자기 감정을 알기 전부터, 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토대는 강산이 행동으로 보여준 방증 50%와 나의 뚜렷한 근거 없는 직감 50%였다.

평소의 나였다면 직감을 그리 믿지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피지컬과 직감에 의존하는 건 강산이나 할 법한 일이다. 그러나 감정의 원천이 강산이라서 그럴까? 다른 애들과 떠들거나 자기가 무슨 고독한 늑대가 된 것처럼 볕 잘 드는 자리에 앉아 딴청 피우다 슬쩍 나를 쳐다볼 때마다 시선이 그대로 느껴졌다. 물리적인 속성을 띠고 있는 것처럼, 존재할 리 없는 열기가 내 뺨이나 등을 달궜다.

눈이 마주칠 때도 있고 마주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강산이 내 시야 범위 내에 있을 땐 뭐가 못마땅한지 입을 꾹 닫고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시선뿐인 현 상태가 제일 좋았다. 혹여라도 말이라도 걸어오면 벌어질 일련의 일들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저 좋다는 애들 많으니 나한테선 흥미를 잃어주길 바랐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강산은 자기 좋다는 애 골라서 사귈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애랑 사귀기를 원하지. 강산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닌데 단언할 수 있는 까닭은 강산이 원래 그런 타입이라서 그렇다. 플레이를 보면 어느 정도 성격 유추가 가능하다. 강산 같이 본인 감정에 솔직한데다 자기 강점을 유일한 무기로 써도 통한다는 자신감이 넘치는 유형은 나무가 고꾸라질 때까지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도끼를 휘두른다. 쟁취하고 싶기 때문이다. 인생이 너무 쉬운 부류라 난제에 오히려 불타오르고 만다.

문제와, 근사치의 답을 알아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문제의 난이도를 낮춰 주기? 강산한테 선고백이라도 갈기라는 얘긴가? 기각. 강산한테 나를 좋아하지 말라고 직접 얘기하기? 긁어 부스럼 만들 일 있나? 기각. 강산을 떨궈 내려면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가만히 웅크리고 녀석의 관심이 사그라들 때까지 견뎌야 했다. 내 의지와 관련 없어서 괴롭지만 버티다 보면 지나갈 일이었다. 어차피 강산이 남은 2년 내내 이 학교에 남아있을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견디는 건, 내가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5.

강산이 전학 오고 한 달이 지난 후, 양상이 조금 바뀌었다. 그러니까 유학 가기 한 달 전, 소문나기 3주 전의 시점이다. 녀석은 여전히 우연을 가장해 주변을 맴돌았으나 빈도가 확연히 줄었다. 하루에 서너 번에서 한두 번으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었으므로, 그나마도 감지덕지였다.

대신 아침마다 내 사물함에 이물질이 생겼다. 첫날은 조그만 사탕이었고 둘째날은 엄지손가락만 한 초콜릿이었다. 누가 넣었는진 물어볼 것도 없이 명명백백했다. 아무런 표시 없이 과자만 떨렁 넣어둔 게 강산다웠다. 아마도 녀석은 자기가 간식거리를 좋아하니, 좋아하는 사람인 내게 좋아하는 걸 갖다주면 좋아하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내게는 그 호감 꺼주는 게 더 좋은 선물이라는 것도 모르고…. 안다고 해서 마음 접을 녀석도 아니었지만….

단 걸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건강에 좋지 않다) 혹시 누가 보고 달라고 귀찮게 굴 수도 있으니 그대로 가방에 담았다. 날이 서늘해서 다행이었다. 들고 온 과자는 집에서 가방을 정리하며 꺼내서 서랍에 넣었다.

누군가에게 코칭을 받은 걸까? 사흘째부턴 포장지가 추가됐다. 과자 모양대로 겉을 감싼 포장지는 굉장히 엉성해서 투명 스카치테이프 틈으로 내용물이 보였다. 포장된 첫 과자는 빼빼로였다. 바스락대는 포장지를 뜯지 않고 그대로 가방 속에 쓸어 담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포장 실력이 갈수록 늘었다. 강산이 내 사물함에 선물을 넣다 다른 애들한테 걸리기 전까지, 3주 내내 각양각색의 과자가 아침마다 배달됐다. 서랍 하나로 모자라서 하나를 비우고 마저 넣어야 했다.

버리지는 않았지만 먹지도, 누군가에게 나눠주지도, 심지어 포장된 건 뜯어보지도 않았다. 단순히 보관만 할 뿐이라면, 녀석의 성의가 내게 닿았다고 할 수 있을까? 조금은 미안했다, 미안해야 했고. 나는 녀석이 마음을 접어주기만을 바라고 있는데, 녀석은 어떻게든 시도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 맘에 보답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여태까지 그래왔듯 각자의 세계로 분리되어 살아가길 바랐다.

이뤄지지 않을 게 뻔한 꿈을 계속 꾸는 건, 쌓아 온 성공 경험으로 인한 자만감의 오류일까? 손에 넣고 나면 푸쉬식 식을 게 뻔한 오기일까?

어느 쪽이든 나와는 맞지 않았다.

6.

돌이켜볼수록 의아하다. 어떻게 강산이 전학 가기 전까지 내게 말 걸지 않았는지. 눈으로, 행동으로, 선물 공세로, 제발 자기를 봐달라며 호소하던 녀석이 유학 가는 그때까지 끝끝내 육성으로 고백해오지 않았는지.

강산의 1일1선물과 엘리트반의 대회 준비 시작 시기는 비슷했다. 즉, 녀석과 마주치는 빈도가 줄어든 건 강산의 스케쥴 탓도 있었다. 대회 때문에 시간이 빠듯해지지 않았더라면 그대로였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랬어도 녀석은 내게 고백하지 않았을 것 같다.

여기서부터는 내 생각일 뿐이다. 자기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망아지 같은 강산이 내게 고백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내가 곤란해할 것 같아서, 였을 것 같다는 생각. 앞선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힘만을 믿고 밀어붙이는 녀석답지 않게도, 아마 그것 때문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7.

강산이 내게 목소리를 낸 적이 딱 한 번 있다. 선물 공세 3주차 월요일…3교시 전 쉬는 시간. 바로 다음 주의 대회에 참가할 예정인 주니어 선수들은 오후 내내 훈련하고 있어서, 강산이 1반 교실에 올 수 있는 시간대는 오전뿐이었다. 나보다 1반 애들과 더 친해진 강산은 아무 빈자리나 앉아 그 여자애들 무리와 시시덕대곤 했다. 그날은 하필 빈 곳이 내 옆자리였고 나는 얼마 남지 않은 기말고사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있는 상태였다. 원래도 말이 많지 않은 녀석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과묵해져서 강산의 목소리보다 다른 애들의 목소리가 훨씬 많이 들렸다. 특히 그 여자애 특유의 구슬 굴러가는 듯한 웃음소리가 평소보다 도드라졌다.

방해됐다. 그러나 괜한 분란에 얽히고 싶지 않아 잠자코 가방에서 mp3를 꺼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맨들맨들한 mp3를 쥐고 버튼을 조작하자 곧 요란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즐겨 듣는 노래는 아니었지만 소음을 덮기에는 제격이었다. 풀다 만 문제집을 펼치며 곁눈질로 옆을 흘깃 봤을 때, 녀석은 의자에 엉덩이를 걸쳐 앉아 다리를 쭉 뻗고 양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로 수다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무슨 얘기인지 약간 심통이 난 것 같았으나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다. 양심적으로 말하자면 꽤…나쁘다. 앞에서보다 뒤에서부터 세는 게 더 빠른 등수…. 이제 남은 길은 공부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의무와 의욕과 결과가 항상 같은 방향으로 향하지는 않는다. 이제 두 해도 남지 않았다는 압박감과 설정한 목표와의 괴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공부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제일 큰 문제는 다들 그렇듯 재미가 없다는 부분이다. 왜 이런 걸 배워야 하는지, 전혀 관심 없는 분야도 내 머릿속에 넣어야 하는지,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회의감이 솟았다. 그나마 할만한 과목은 물리와 생물이었다(복잡한 수학 공식이 들어가는 부분은 여전히 어렵다). 그 둘의 성적도 썩 좋은 편은 아니니 남은 과목들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제일 취약한 건 영어다. 국어는 그럭저럭 하겠는데, 영어는 읽는 것도, 듣는 것도, 말하는 것도, 모두 쥐약이다. 리스닝을 위해 mp3에 음원 파일을 다운로드해서 시간 날 때마다 듣고 있는데도 특정 분야에만 빠삭해지고 있다. 팝송도 그 일환으로, 가사 받아쓰기를 시도했던 흔적이나, 전혀 들리는 게 없었으므로 지금은 소음 차단용으로 쓰고 있다.

나는 펜을 돌리며 문제집을 내려다보았다. 옅은 상아색은 종이고 적·청·흑색은 글자다. 그건 안다. 1번부터 막혔다. 문제의 첫머리부터 마지막 물음표까지 몇 번을 읽어도 무슨 소린지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는다. 확실한 건 문제 번호 1번 옆의 [난이도 하] 뿐…. 아, 하기 싫다, 그래도 해야 했다.

괜히 애꿎은 mp3 버튼만 딸깍딸깍 눌렀다. 전주들이 짤막하게 뚝뚝 끊기며 곡이 전환됐다. 몇 곡을 지나치다 익숙한 곡에서 멈췄다. 여러 대의 바이올린이 중첩해서 내는 음, 왠지 사람을 들뜨게 하는 멜로디, 잘 못 알아듣겠지만…L과 R 발음이 많아서 어감이 좋은 가사. 반복 재생을 설정한 뒤 음량을 두 칸 높이고, 다시 문제집으로 돌아왔다.

느는 건 펜 돌리는 실력뿐일지도…. 빙그르르, 착. 빙그르르, 착. 빠르게 회전하고 원래 자리로 깔끔하게 복귀하는 펜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느샌가 한쪽 턱을 괴고 문제집 대신 검정 볼펜만 보고 있었다. 1번 문제에 겹쳐 그은 밑줄 말고는 폈을 때와 달라진 게 없는 책. 노래 박자에 맞춰 펜을 돌렸다. 빙그르르, 착. 빙그르르, 착…….

노래가 한 바퀴 돌 때까지 펜을 구경하다 잠시, 소란할 옆자리를 힐끔 봤다가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아까의 심드렁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구경하고 있던 녀석이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카메라 인물사진 모드를 켠 것처럼, 펜만 보이고 문제집은 흐릿했던 아까처럼, 강산의 눈만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정확하게는 카메라 렌즈같이 나를 담아 비추는 녀석의 갈색 눈동자가. 또다. 이 순간들 때문에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몇 초도 안 되는 시간이 늘어지며 녀석의 집중력에 내가 휘말려 들어가는 순간들이, 강산이, 나를 좋아하기 시작한 때부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있었다. 내가 담긴 맑은 눈동자부터 점점 시야가 확장되면, 마른 들판에 불을 지른 것처럼 화다닥 붉어지는 녀석의 귀 끝과 뺨이 보였다.

나는 강산도 같은 경험을 하고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끌어들인 주범이 녀석일진대 그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런데 내가 어떻게, 강산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있겠어.

잠깐 정신을 팔았다고 엇, 하는 순간 펜이 튕겨 나갔다. 내 손을 떠난 펜이 허공을 날아 슬로우모션 화면처럼 천천히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부딪히려는 찰나, 커다란 손이 불쑥 난입했다. 먹이를 낚아챈 독수리처럼 펜을 챈 녀석은 마찬가지로 손을 불쑥 내밀었다.

잠시 늘어졌던 노래가 다시금 들려왔다. 후렴구였다. 웅장한 악기들의 합창을 들으며, 자기가 뭘 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이 얼떨떨한 표정의 녀석에게서 펜을 돌려받았다. 펜 정도야 나도 주울 수 있었지만…,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 녀석의 얼굴을 쳐다봤는데 녀석의 시선은 아래쪽을 향해 있었다. mp3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뭘 듣고 있는지 궁금했던 걸까.

펜을 내려놓고 mp3를 들어 올리자 녀석이 덩달아 고개를 들었다. 멍하니 발간 얼굴로 나와 mp3를 번갈아 보는 녀석에게, 쥐고 있는 것을 불쑥 내밀었다. 건전지로 작동하는 아이리버 mp3의 곡명과 가수 이름이 떠 있는 작은 화면을 읽을 수 있도록 돌려서. 한 줄로 나열된 알파벳을 훑은 녀석이 그대로 잠시 굳었다가 고개를 팍 쳐들었다. “아, 아…,” 입 밖으로는 말이 되지 못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며 부분적으로 발갰던 낯이 죄다 뻘겋게 달아올랐다.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녀석의 뒤에 서 있던 그 여자애가 보였다. 헤실헤실 웃던 평소와 달리 싸늘하게 식은 얼굴이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눈치챘을까. 아마도.

강산이 던진 돌멩이에 출렁이던 일상에 큰 파도가 몰려오는 환상이 보였다. 아서라, 주신이. 같이 들뜨면 어쩌자는 거야. 스스로 다그치며 표정을 지우고 녀석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려 녀석은 꼬리에 불붙은 송아지처럼 부리나케 교실을 빠져나갔다. 다행이었다.

8.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 애에게 들킨 지 며칠 만에, 근 두 달간 꽁꽁 숨겨온 사실이 전교생에게 퍼졌으니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한다면 내가 없을 때 벌어졌다는 것 하나뿐일까.

아침 여섯 시에 체육복 차림으로 학교에 와서 내 사물함에 선물을 넣던 강산을, 마침 주번이라는 명목으로 통상적인 주번 등교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이르게 등교한 여자애와 그 애의 친구들 몇이 보고 추궁했다고 한다. 그 애를 좋아한 게 아니었냐고 캐묻고, 여자애의 마음을 갖고 놀았냐며 길길이 날뛰고, 그런 음침한 애(나를 칭하는 말이었다)가 뭐가 좋냐며 화내고, 착각한 거 아니냐며 윽박질렀다고 했다. 당사자인 여자애는 말없이 울었다. 우는 여자애를 본 친구 한 명이 꼭지가 돌아버려서 선을 넘었다. 강산이 들고 있던 선물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밟았다고. 포장이 터지며 안에 들어있던 과자가 바스라지고 편지가 찢어졌다고 했다.

강산은 이마와 목에 힘줄이 선 상태로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지만, 난장을 부리는 여자애들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도, 고함을 치지도 않았다. 그저 여자애들이 난생처음 들어보는 무서운 목소리로, 처음부터 자기가 좋아했던 건 이 사물함 주인이었다고 시인하고 박살 난 선물을 주워 들고 교문을 빠져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유학을 갔다, 미국으로.

9.

여기까지가 지난주까지의 이야기.

강산이 사라진 학교는 예전으로 돌아왔다. 기말고사가 곧이었다. 호통치는 선생님들과 급식실에서도 단어장을 들고 중얼중얼 외우는 아이들 덕분에 간만의 면학 분위기였다. 여자애는 내게 약간의 악감정을 품은 듯했지만 정작 강산이 없으니 며칠 안 가 심드렁해졌고, 나도 평온한 일상을 되찾았다.

강산이 벌였던 일을 전해 들었을 땐 조금 싱숭생숭했으나 그래봤자 그 녀석은 이제 여기 없었다. 두 달 동안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느낌이었다. 태풍은 바람이라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나버리지만 땅 위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에 있는 것처럼, 내 일상은 계속 이어졌다.

아닌 척하면서 쫓아다니던 녀석이 없어져서 허전하지는 않았다. 헛된 생각에 빠질 시간에 단어 하나, 공식 하나를 더 봐야 했으니까. 공부와 진로에 대한 압박과 두려움은 여전했다. 내겐 이 길밖에 없다고 내내 되뇌면서도 뚜렷한 목표는 없었다. 보통 그렇듯 그저 모든 건 성적에 달려있었다. 선택지를 넓히려면 성적을 올리는 수밖에는.

한 가지 달라진 건 있었다. 여태 시험 기간에는 방과 후 테니스를 자제했지만 이번 시험 기간엔 그러지 않았다.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테니스 연습 시간을 빼지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공부도 체력이 받쳐줘야 하니까 하루 한두 시간의 운동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오히려 이득이었고.

운동과 야자를 마치고 집에 오면 한밤중이었다. 못다 한 숙제를 마무리하고 씻고 잠자리에 들면 금세 등교 시간이 됐다. 늦게 잘수록 다음날이 피곤했다. 강산이 없어도 쏜살같이 며칠이 흘렀다. 기다리던 일상으로 복귀했으나…,

지금 시각 오후 11시 21분. 책상 서랍 문을 죄다 끄집어내 둔 채로 갑자기 상념에 잠긴 까닭은 별 거 아니다. 숙제하다가 밤의 적막이 맘에 들지 않아 mp3를 꺼냈고, 켜자마자 우연찮게 익히 아는 노래가 재생돼서 녀석에게 곡 이름을 보여줬던 그때가 생각났을 뿐이다.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 상승하는 첫 소절을 듣자마자 녀석과 눈이 마주쳤던, 녀석의 눈 안에 내가 들어가 앉았던 그 순간이 떠올라서, 아닌 밤중에 이미 이 땅에 없는 녀석의 흔적을 더듬을 뿐이었다.

서랍 두 개를 꽉꽉 채운 열세 개의 선물을 받은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조그만 사탕과 초콜릿에서부터 각양각색으로 포장된 선물들까지. 이음새가 터져서 내용물이 고스란히 보이는 빼빼로부터 제대로 봉합은 됐으나 다 구겨진 연두색 봉투와 엉성하지만 가로세로는 맞춘 갈색 상자와…마지막에 받은, 선물 포장 서비스를 받은 것처럼 각 잡힌 납작한 선물 상자. 우측으로 갈수록 깔끔했다. 녀석의 선물 포장 실력 변천사를 전시해둔 것만 같았다.

나는 숨을 깊게 내쉰다. 옆구리 터진 빼빼로부터 집어 들었다. 포장지를 뜯기 전, 엄지손가락으로 선물 둘레를 빙 둘러 문질렀다. 역시, 단차 있는 부분이 있다.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한다. 터진 부위에 검지를 넣고 천천히 배를 가른다.

이내, 선물이 서서히 열린다.

빨간 빼빼로 상자를 들자, 손바닥만 한 종이가 보였다. 단어장을 뜯어낸 것 같다. 조심스레 손끝으로 잡고 들어 올렸다.

강산이 들켰던 그 날 여자애의 친구는 과자를 부수고 편지를 찢었다고 했다. 강산이 줬던 선물에는 아마도 첫 이틀을 제외하곤 모두 편지가 들어있었을 것이다. 녀석이 준 과자들을 수거하면서, 나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뿐…. 초반은 포장이 엉성해 모를 수 있었지만, 뒤로 갈수록 과자 모양에 딱 맞게 포장되어 카드 모양으로 톡 튀어나온 부분이 있었음에도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것으로 치부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도.

지금 내 앞에는 강산이 전했던 말들이 있다. 나를 좋아하는 녀석은 말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계속 전했음에도 눈을 감고 귀를 막은 내가 있었다. 녀석이 없는 지금에서야, 나는 오감을 연다. 초겨울의 서늘한 밤공기를 들이키던 숨을 멈추고 첫 쪽지를 뒤집는다. 강산의 삐뚤빼뚤한 첫 마디가 이제야, 나에게 닿았다.


안녕 주신이!



강산

1.

이상한 놈을 만났다.

나를 잘 알면서 나한테 관심이 없는 놈을.

아니, 당연히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고!

그치만 한국에서 테니스 하는 고딩이 나한테 관심이 없을 수가 있나? 이건 근자감이 아니라 지당한 얘기다!

아버지는 한국을 빛내는 테니스 세계 랭킹 15위 프로 선수에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누나도 빠른 속도로 랭킹을 올리고 있고 나 본인은 ITF에서 주목하는 두 신예 중 한 명!

프로로 데뷔하면 바로 세계권에 진입할 거라는 기대를 받는 나, 강산을, 테니스계에 있으면서 어떻게 무시할 수가 있냔 말이다!

그런데 그놈은 그랬다. 완벽하게!

2.

놈은 첫인상부터 별로였다.

그놈을 처음 본 날은 주림고에 등교한 첫 날이었다. 조회 시간에, 놈을 봤다.

내가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니다. 볼 수밖에 없던 거지!

상상해봐라. 전학 간 학교의 강당에서 전교생에게 나를 처음으로 소개하는 강단에 올라 몇백 명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는데, 흰 교복 셔츠를 입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는 하얀 얼굴들 천지에서 한 놈, 딱 한 놈만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인다면?

교장 선생님이 내 화려한 수상 경력을 줄줄 늘어놓는 시간 내내 그 고개를 절대 들지 않는다면?

흰 티에 튄 김칫국물, 새 운동화에 묻은 진흙, 손톱만큼 벗겨진 라켓 칠처럼 눈에 밟힐 수밖에 없다.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것처럼 까슬까슬 거슬릴 수밖에 없다고!

환영 박수가 끝나고 내가 강단에서 내려올 때까지 놈은 진고동색 정수리만 보여줬다. 뭐야? 내가 보기 싫은가? 나 싫어하는 놈들은 많지만 저렇게 구는 놈은 처음 봤다. 예전에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타조가 생각났다. 무서운 적을 피한답시고 땅에 고개를 처박는 장면 말이다. 내가 계단을 다 내려오자 놈의 고개가 스르륵 올라왔다. 기가 찼다. 뭐 하는 놈인지 궁금해서 얼굴을 봐뒀다. 주근깨가 잔뜩 박힌 음침한 얼굴이었다. 표정조차도 다른 놈들과 달랐다. 나를 보며 눈을 빛내는 주변 애들과 딴판으로 완전히 죽은 명태 눈깔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대회에서 싸웠던 놈인가? 기억에 없다. 흐릿한 인상만큼이나 플레이도 별볼일 없었든지 안 만났든지 아니면 테니스 치는 놈이 아니든지 셋 중 하나일텐데, 세 경우 다 따져봐도 저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마치 나를 알고 있으면서 엄청나게 피하고 싶어 하는 눈치?

왜??? 내가 뭘 했다고?!?

…한 게 많기는 한데, 쟤한테 뭘 한 기억은 없었다!

3.

놈은 놀랍게도 테니스를 치는 놈이었다. 등교 날 오후에 체육관에서 놈을 발견했을 땐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웃기지도 않은 취미반 소속이랜다. 나를 아는 건 확실한데 취미반이면 나랑 붙어봤을 리가 없다. 보통 이런 경우엔 날 우러러보는데 놈은 최대한 내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내가 대체 지한테 뭘 했다고!

취미반은 저 구석에 몰아놓고, 코치가 테니스부 엘리트반 놈들 앞에서 나를 한 번 더 소개한 후 훈련을 시작했다. 의외로 한국 고등학교 치고 시설이 괜찮아서 기분이 좀 풀렸다가, 넓은 체육관에서 코트 하나만 나눠서 쓰는 취미반 놈들 사이에 있는 그놈을 보고 도로 팍 상해버렸다. 진고동색 머리카락에 운동선수치고 작은 키와 체구, 놈이 확실했다. 실수로라도 절대 이쪽을 보지 않겠다는 건지 나를 등지고 있었다. 왜?!

어쨌든 훈련은 해야 하니까, 코치가 시키는 만큼 라켓을 휘두르고 자리로 돌아왔다. 나를 싫어하는 게 얼굴에 뻔히 써있는 엘리트반 놈들의 열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싫은 건 싫은 거고 내 자세 좋은 건 좋은 거다. 주니어 사이에선 이런 구경 쉽게 못 한다고? 취미반 놈들 몇몇도 목을 쭉 빼고 이쪽을 쳐다본다. 그래, 저게 정상이지. 그런데 놈은…아예 벽을 보고 서서 몸을 풀고 있었다.

나한테 안 좋은 감정 있는 놈들 무시하는 거야 누워서 껌 씹기지만 이런 놈은 처음이라 그런지 성가셨다. 내가 똥이야? 더러워서 피하냐? 눈도 안 마주치고 싶고 절대 엮이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팍팍 느껴졌다. 어이가 없었다. 고작 한국 학교의 취미반 놈이 나를 저렇게나 필사적으로 피하는 게!

계속 눈에 밟혀서 더 짜증나!

팔다리를 쭉쭉 당기며 스트레칭한 놈이 라켓을 들었다. 색도 꼭 지 닮은 초록색이다. 초록색은 독, 뱀, 뭐 그런 거 아니냐고. 뱀. 뱀? 왠지 놈이랑 딱이다.

지는 얼마나 잘하는지 보려고 눈 부릅뜨고 놈의 등짝을 노려봤다. 토스, 무난하고, 트로피…깔끔하네. 슬롯…뭐, 유연한 건 인정. 임팩트…팡! 라켓에 맞은 공이 날아간다. 파워는 별로다. 저 정도 근육으로는 힘을 낼 수가 없지.

전체적으로 자세는 좋지만 힘이 딸린다. 에이, 역시 질툰가. 내 파워는 이미 탈주니어급이라고들 하니까, 자기한테 없는 걸 내가 가진 거지. 그래서 질투 나니까 아예 나를 안 보려고? 그런 건가?

찝찝했던 게 풀리려던 때에 놈이 다시 라켓을 휘둘렀다. 두 번, 세 번, 네 번…이어질수록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되어갔다. 서브 도달 위치가 똑같다. 처음부터 계속 같은 자리에 공을 때려 넣고 있다.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저게 가능한 일인가? 기계야? 어떻게 저렇게 오차 없이 한곳을 노릴 수가 있지? 저건 취미반 수준이 아니잖아?

주위를 둘러봤다. 얼굴 기억나는 놈이 없어서 대충 봤던 놈들은 그럴 만한 실력이었다. 엘리트반은 프로를 노리는 주니어반이랬는데 한숨 나올 정도로 시시한 놈들 뿐이다. 오히려 저기의 저놈이 더 그럴싸해 보이는걸.

왜 고작 취미반에 있는 거지? 왜 저놈을 고작 저기에 두는 거야? 코치놈들은 뭐하는 거야? 파워는 없어도 애큐러시accuracy는 여기서 제일 낫잖아! 눈이 없나?

아니, 근데 저런 놈이 날 왜 저렇게 노골적으로 피하는 건데?!? 나, 아무것도 안 했잖아!

놈의 실력을 보고 나니 더 억울해졌다. 대회에서 만났으면 몰라. 아마 내가 압승했겠지. 테크닉을 파워로 압살하는 파워 테니스의 시대다. 그래도 만났으면, 만났으면, 내가 분명히 기억했을 텐데! 한 번도 나랑 붙어본 적 없는 놈이 왜, 나랑 1mm도 얽히기 싫어하는 거야?!?

뭔데???

4.

성가신 놈이 자주 보이기까지 한다. 모기장 안의 모기 새끼도 아니고 앵앵 성가셔죽겠네! 신경 끄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윌리를 찾아라 처럼 멀찍이서 놈을 발견하면 놈은 어깨를 내리고 가방끈을 잡고 앞을 보며 힘없이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좀 가까운 데서 마주치면 얄짤없이 땅만 쳐다본다. 이거 백프로잖아. 이 새끼 알고 이러는 거잖아!

게다가 어째서인지 체육 수업을 같이 듣는다. 나는 3반, 놈은 1반. 합동 수업이랜다. 뭔데, 이거. 왜 이렇게 내 앞에서 얼쩡대는데?

놈이 몇 반인지 전혀 관심 없었다고! 지가 내 눈앞에서 얼쩡대잖아! 아, 짜증나!

체육 수업하는 강당에서도 놈은 실내 테니스 코트장에서와 다를 바 없이 굴었다. 나를 쳐다보며 속닥대는 애들 사이에서 지 혼자만 등 돌리고 바닥 아니면 천장만 보고 있었다는 소리다. 이렇게까지 온몸으로 나한테 관심 없고 엮일 생각도 전혀 없다는 티를 내는 놈은 처음이다. 차라리 딴 놈들 하듯이 질투를 하라고…! 배 아파하라고! 네놈한테 모자란 걸 내가 다 갖고 있으니까! 날 보면서 짜증이라도 내란 말야!

정작 짜증은 내가 저놈을 보면서 내고 있다. 그 사실에도 짜증이 난다. 어떻게 나한테 이래?

왜 저러는지 알아야겠다. 그런 다음에, 놈이랑 시합할 테다. 나를 절대 무시할 수 없도록 만들어주지. 두고 보자고!

5.

못 찾겠다…….

아니, 대체 뭐 하는 새끼야? 사람이 이렇게까지…친구가 없을 수 있어? 아니 뭐, 나도 친구는 없지만 나 아는 놈들은 많다고. 놈의 이름은 주신이. ‘주신이’다. 성이 ‘주’, 이름이 ‘신이’. 한 번 들으면 안 잊어먹을 것 같은 특이한 이름이다. 엘리트반 놈들한테 물어봤더니 “주신이? 그게 누군데?”가 주된 반응. 아니, 10월이면 최소 6개월은 어쨌든 같은 장소에서 훈련했을 텐데 이렇게까지 모를 수가 있나? 물어볼 놈을 잘못 골랐나 싶어서 취미반 놈들 잡고 물어보니 “주신이? 걔 맨날 혼자 훈련해. 시합도 절대 안 해. 서브 연습만 주구장창 한다니까?”랜다. 서브 연습만 할 거면 뭐 하러 테니스를 치지? 시합을 왜 안 하냐니까 그건 모르겠댄다. 일단 취미반에서도 독고다이, 혼자 노는 놈인 건 확실했다.

등하교 시간에 맨날 혼자 우중충하게 걷고 있는 거나 지난 체육 시간에 혼자 떨어져 있던 거 보면 교실에서도 어울리는 놈이 없는 것 같고..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면 말 걸고도 무시당할 것 같아서 그건 싫다. 다짜고짜 가서 나 왜 무시하냐고 물어볼 수도 없잖아. 나는 관종이 아니라고…. 좀 현타 온다. 정말로 신경을 끄고 싶다, 정말로! 집에서도 놈 생각이 났다. 그 정수리, 강당에서 혼자 고개 숙이고 있던 그 정수리가!

6.

놈을 안 지 일주일 좀 넘었던 그 날엔 하루종일 놈을 못 봤다. 외부 트레이닝 센터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턱을 괴고 심드렁하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웬 놈이 옆에 왔다. 안경을 쓴 키가 멀대같이 큰 놈이었다. 놈은 달리는 버스 안에서 의자를 잡고 서서 나를 내려다봤다. 안경알 아래로 비치는 파란 눈이 차가웠다. 그 안에 담긴 건, 숨기려는 것 같지만 확실한 적의와 같잖음이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나는 사람을 꽤 잘 보는 편이다. 특히나 네거티브한 감정은 더더욱. 너무 잘난 죄로 하도 많이 당해봤거든.

“뭐야?”

당연히 좋은 반응이 나갈 리가 없었다. 내가 호구도 아니고, 눈에 불 켜고 온 놈한테 굳이 듣기 좋게 말할 필요가?

놈은 잠깐 당황하더니, 이내 주먹을 꾹 쥐고 한숨을 가볍게 쉬어내고는 말했다.

“너, 주신이에 대해 캐묻고 다닌다며.”

“근데?”

“무슨 속셈인진 모르겠지만 그만둬.”

“니가 뭔데?”

“…사정도 제대로 모르면서 들쑤시고 다니지 말라고.”

꼴에 자존심을 세우려는 모습이 웃겼다. 그러니까 내가 모르는 주신이의 사정을 지는 알고 있고, 내가 그걸 알고 싶어 하니까 배알이 꼴렸나 본데. 정말로, 지가 뭐라도 되길래? 멀대놈과 주신이가 같이 있는 걸 한 번도 못 봤다. 친구는 절대 아니고 자기만 아는 정보를 앞세워 나한테 존심이나 챙기러 온 듯했다.

몇 마디 하고 보낼까? 적의에는 적의로 갚아줘야지. 어렸을 때랑 달리 지금은 F-word 없이 욕하는 방법을 안다.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놈을 아는 놈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절대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마음속에서 저울이 와리가리했다. 한쪽에는 주신이에 대한 호기심과 괘씸함, 다른 쪽에는 내 자존심과 짜증이 얹혀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결단 내리고 옆 좌석에서 내 가방을 치웠다.

“앉아.”

호기심 WIN이다.

이를 꾹 악물었던 놈은 어쨌든 자리에 앉았다. 앉은키도 제법 컸다. 이 정도면 서구권 주니어들이랑 비벼볼 수 있을 만한 키였다. 스포츠계에서는 신체 스펙도 재능이다. 주림고 엘리트반에 있을 정도면 프로를 노리는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그 외의 재능은 별로 없나 보다. 흥미가 식었다.

나는 턱을 까딱하며 다시 물었다.

“걔한테 무슨 사정이 있는데?”

본론이나 얘기하고 꺼지라고. 놈 안에서도 저울이 양쪽으로 기우는 것 같았다. 이마에 핏줄이 솟은 놈이 주먹을 여러 번 폈다 쥐었다 했다. 안경을 고쳐 쓴 놈이 씹어 뱉듯이 말했다.

“걔는 더 이상 테니스 칠 수 없어.”

“뭔 소리야? 테니스부잖아.”

“연습 시합도 못 하는? 거기까진 알고 있지?”

“빙빙 돌리지 말고 제대로 얘기해.”

“주신이, 걔도 주니어였다고. 너랑 나랑 같은.”

왜 나를 너랑 한데 묶냐? 잠깐 욱하고 튀어 나가려던 성질을 간신히 가라앉히고 놈을 노려보자, 놈의 얼굴에 웃음기가 서서히 퍼졌다. 놈은 팔을 약간 벌리고, 마치 연극 하듯이 과장된 몸짓을 하며 중얼거렸다.

“부상 때문에 이제 절대 시합에 나갈 수 없어. 다치지만 않았어도 너랑 시합했을 수도 있겠지만, 뭐, 불가능한 얘기지. 네가 어떻게 주신이를 알아봤는진 모르겠지만 뭐든 꿈 깨라고.”

뭐라는 거야? 황당했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놈을 쳐다보자, 놈은 확실하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신이가 무리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신이의 어머님께 ‘특별 부탁’을 받은 사람이고.”

마지막까지 덧붙이는 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저렇게 의기양양해 하는 거지? 왜 물어보지도 않은 얘길 하는 거지? 근데, 주신이가 나랑 같은 주니어였다고? 프로를 노렸던? 부상은 또 무슨 말이고? 테니스부에는 왜 들어와 있는 건데?

정보가 필요했다.

7.

하루종일 인터넷에 놈의 이름을 검색했지만 얻은 게 없었다…. 테니스 부상, 주신이 테니스, 테니스 주니어 부상 등등 떠오르는 키워드들을 죄다 검색해도 엄청 시끌벅적했던 큰 사고들에 대한 기사만 나왔다. 놈의 이름 단독으로는…온갖 기도문이 잔뜩 떴다. 이름이 왜 이따위라서 검색하기 힘들게 하냐고.

결국 포기하고 핸드폰을 내던지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의미 없이 천장 무늬를 쳐다보면서 멀대놈한테 들었던 얘기를 다시 떠올려봤다. 나처럼 프로를 노리는 주니어 선수였는데 부상을 당해서 연습 시합도 못 하게 됐다는 거지? 딱히 아픈 것 같지 않던데. 파워가 부족하긴 했지만 컨트롤은 좋았고. 적어도 주림고 놈들 중에선 제일 나아 보였어.

만약에 놈이 부상 때문에 테니스 프로 선수의 꿈을 접었다면 내가 꼴 보기 싫을 수도 있겠지. 다른 놈들은 고만고만했잖아. 취미반 놈보다 못 치는 주니어 선수라니 웃기지. 근데 나는 프로 데뷔가 확실하고 엄청나게 잘 치니까…싫을 수는 있겠네. 이해는 좀 됐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티 내는 건 아니라고 보지만.

아, 찝찝하게 이게 뭐냐고! 괜히 머리를 쥐어뜯었다. 차라리 눈에 띄지나 말지! 놈이 이상하게 구니까 알게 돼서 찜찜해져 버렸잖아!

이게 이유라면 놈과의 연습 시합은 물 건너갔다. 부상 때문에 꿈 접은 놈이랑 어떻게 시합하겠냐. 그런 양학은 이기고도 기분 나쁘다고.

어쨌든 수수께끼가 풀렸으니까 신경…끌 수 있겠지?

…왠지 안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놈이랑 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8.

마녀가 놈을 봤다.

학교에서 집까지 뛰어서 10분 걸린다. 가벼운 운동 삼아 뛸 만한 거리다. 겨울 와가는 가을 날씨라서 땀도 안 나고 좋다. 주림고를 고른 건 테니스 명문이고 시설 좋은 게 큰 이유였지만 가까운 거리도 한몫했다.

그런데 그날은 굳이 마녀가 나를 데리러 왔다. 마녀는 내 누나 강하늘로 아빠처럼 테니스 프로 선수다. 나보다 몇 살 더 많다고 쪼끔 일찍 데뷔해서 랭킹포인트를 쓸어 담는 중이다.

온다는 말도 없이 교문 앞에 차를 대고, 밖에 나와서 차에 기대 서선 자동차 키를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리는 마녀를 보자마자 한숨이 나왔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지가 연예인인 것처럼 선글라스까지 끼고 왔다. 집 가던 애들이 누나를 보면서 수군댔다. 쪽팔려. 관심종자야? 평소였으면 뭐라고 한 소리 해줬을 텐데 그날은 그럴 힘이 없었다. 그렇게 자주 보이던 주신이놈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종일 멀대놈이 했던 말만 계속 생각나서 엄청나게 다운돼 있었다고.

“타!”

마녀가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며 윙크했다. 우웩. 아, 기운 없어…. 대꾸해주기도 귀찮아서 그냥 차에 탔다. 마녀는 김샌다는 듯이 입을 삐죽거리며 운전석에 앉았다.

“뭐야?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몰라….”

“어디 아파?”

“그런 거 아냐.”

“왜 그러는데?”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너, 힘 빼면 시체잖아. 말해봐. 학교에서 무슨 일 있어?”

꼬치꼬치 캐묻는 마녀 목소리도 듣기가 싫었다. 걱정해서 그러는 건 알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창틀에 팔꿈치를 대고 복잡한 머리를 얹었다. 몇 번 더 물어보던 누나가 한숨을 짧게 쉬더니 차 시동을 걸었다. 빨리 집에 가서 뜨거운 물로 샤워나 하고 싶었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하기 직전, 교문을 빠져나오는 놈을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누나에게 소리쳤다.

“잠깐! 잠깐만 출발하지 마봐!”

끼익-! 타이어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뭐야? 왜 그래?” 누나가 옆에서 물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주신이를 봤다. 녀석은 오늘도 기운 하나 없이 어깨를 축 내려뜨리고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앞머리를 좀 잘라야 하지 않을까? 늘어진 앞머리에 이마와 눈이 가려서 안 그래도 음침한 얼굴이 더 그늘져 보였다. 버릇인지 오늘도 두 손으로 가방끈을 꼭 잡고 있었는데, 가방끈에 매미처럼 매달린 두 주먹이 어깨가 땅에 붙지 않도록 그나마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체육관에서도 힘이 없어 보였는데 그나마 나은 거였다. 하굣길의 놈은 세상의 모든 나쁜 걸 다 짊어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야~?”

녀석을 관찰하느라 정신이 팔려서 마녀가 어느새 안전벨트를 풀고 내 어깨에 턱을 기대고 있는 것도 몰랐다. 마녀가 웃음기가 잔뜩 담긴 기분 나쁜 목소리를 내고 나서야 알았다.

“뭐야, 저리 가!”

“저 애 때문에 우리 산이가 기운이 없었을까~?”

“헛소리하지 말고 저리 가라고!”

“귀여운 애네. 산이 취향이야?”

귀여운 애? 쟤가…귀여워? 메두사 같은 누나 입에서 나온 소리가 맞아? 생각지도 않았던 습격에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눈알만 굴러갔다. 선팅이 빠방하게 된 유리창에 반사된 마녀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생겼다. 저거, 놀릴 껀수 잡았을 때 저렇게 웃잖아. 기분 나빠. 아니, 근데, 쟤가, 귀여워?

“귀엽다고?”

“응. 귀여운데? 산이 긴 머리보다는 짧은 머리 취향이구나?”

“그, 그런가?”

“응응. 근데 왜. 차였어?”

마녀가 물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모퉁이를 도는 주신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잠깐, 뭐라고? 펄쩍 뛰었다.

“차이긴 누가 차여!”

“아니이~, 그래서 이렇게 기운 없는 거 아냐?”

“아니거든! 나 인기 많아!”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정작 네가 좋아하는 애가 너 안 좋아하면, 그거 다 소용 없다~?”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아니, 그것보다도, 나는 쟤 안 좋아한다고!

아니. 그런데. 정작 내가 좋아하는 애가 나를 안 좋아하면 소용이 없다고…? 나, 딴 놈들 관심보다 주신이놈의 관심을 받고 싶었던 건가? 그럴…수도 있어. 놈이 이 학교에서 제일 테니스 잘 치니까…. 근데 나한테 관심 없고…. 그래서 기분이 나빴나? 쟤랑 테니스 한번 쳐보고 싶었는데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버려서?

내 얼굴을 관찰하던 누나가 씨익 웃으며 깜빡이를 넣고 악셀을 밟았다. 스르륵 차가 출발했다. 익숙한 길들을 지나며, 누나가 물었다.

“호감이 있는 것 같아?”

“…관심도 없는 것 같은데.”

“그래? 흐음, 어떤데?”

“나를 절대 안 쳐다봐.”

“그럼, 의식은 하고 있다는 거네?”

“뭐?”

“네가 있다는 걸 안다는 거잖아? 널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지.”

“그럼-”

“물론! 연애 감정은 아닌 것 같지만. 좋아하면 티가 나게 되어 있거든.”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나도 걔 좋아하는 건 아닌데 걔가 나한테 관심은 가져줬으면 좋겠어. 지금은 개무시 당하고 있다고.”

오늘의 누나는 평소랑 다르게 마녀가 아니라 선생님 같았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누나가 알려줄 답을 기다렸다.

누나의 해답은-

“기다려.”

“어?”

“산이 넌 너무 저돌적이라서 일단 들이받고 보는 습성이 있으니까, 그 애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해.”

“그러면 돼?”

“일단은~. 괜히 좋아하는 거 티 내지 말고~ 멋진 모습 많이 보여줘.”

“일단?”

“걔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보고. 보니까 걔, 친구도 많을 것 같던데.”

“?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됐고 일단, 누나 말 따라봐. 산이 네가 언제 누나 얘기 들어서 손해 본 적 있어?”

“없지…?”

“그래, 그래. 적당한 시점에 누나가 다음 단계 알려줄 테니까 기다려.”

주신이가 친구 많을 것 같아 보인다고? 갑자기 신뢰도가 팍 떨어졌지만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누나 말대로 해보기로 했다. 뭐, 여기서 더 나빠질 게 있겠어?

9.

운명을 믿냐? 갑자기 뭔 쌩뚱맞은 소린가 싶겠지만 난 진지하다. 그런 거 안 믿었는데 생각이 쫌 바뀌었다. 누나 말대로 기다리는 며칠 동안 무심코 틀었던 비디오에서 녀석을 발견했거든. 확률로 따지면 어마어마하게 낮지 않을까? 로또랑 비슷할지도 몰라. 진짜 정말로 아무 생각 없이 고른 내 옛날 시합 비디오였다고. 그런데 거기에 주신이 그 녀석이 있었다니까?

몇 년 전의 전국 주니어전이었다. 정확하게는 4년 전! 초등학교 6학년, 13살! 화면 속의 어린 강산이 파워 서브를 팡팡 날려댄다. 실수로 더블폴트를 내서 상대방한테 서브권이 넘어가지 않는 이상 거의 서비스 에이스. 캬, 역시 잘났다니깐.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래서 주신이를 어디서 봤냐면, 옆 코트에서! 카메라가 잠깐 흔들리면서 옆을 비췄을 때 땀을 닦으며 벤치에서 걸어 나오는 장면이 있었다! 처음에는 못 알아봤는데, 뭔가 삘이 탁-! 와서 돌려봤더니 녀석이 맞았다. 지금이랑 엄청 다른 모습이었지만 확실히 주신이였다. 저 머리 스타일과 주근깨가 흔하진 않지!

지금이랑 완전 딴판인 건 표정이었다. 지금이 새까만 밤이라면 비디오 속 주신이는 낮이다. 딱 그 한 장면밖에 안 나왔지만 어쨌든 단서를 찾았으니 저걸 토대로 차근차근 찾아보면 된다! 엄청 어려운 문제의 힌트를 찾은 기분이었다!

바로 그 대회의 영상을 검색했다. 내 8강 시합이었으니까 옆 코트도 당연히 8강전. 해당 대회의 8강 시합 영상을 싹 훑었다. 80%는 내 시합 영상이어서 썸네일에서부터 걸렀다. 지루하게 영상을 넘기다가 녀석이 나오는 영상을 찾아냈을 땐, 너무 후련해서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도 녀석의 상대 선수 쪽 부모가 찍은 영상인 것 같았다. 제목은 대회 이름+8강+모르는 선수 이름. 주신이의 이름은 전혀 없고 폰카로 찍었는지 엄청 흔들리는 저화질 영상이었지만, 화면에 담긴 건 4년 전의 주니어 선수였던 주신이가 맞았다.

영상은 열심히 하라고 외치는 카메라 주인의 응원과 함께 시작했다. 1라운드엔 주신이가 카메라 쪽 코트라서 뒷모습만 보였다. 지금보다 더 작았던 녀석은 몸놀림이 가볍고 거침이 없었다. 파워는 상대가 훨씬 강했지만, 주신이는 공이 어디로 올지 훤히 보이는 것처럼 움직였다. 아무리 쎈 공이라도 바운드 될 위치에 미리 가 있으면 무섭지 않지.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게다가 노리는 코스가 죄다 깊었다. 조금 미숙한 부분이 있기는 해도 초등부의 컨트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상대는 전형적인 베이스라이너였다. 보통은 그렇지. 나도 그렇다. 베이스라이너가 제일 싫어하는 상황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할 때인데 주신이는 그 마음을 아주 잘 아는 것 같았다. 보내는 코스마다 치가 떨리도록 구렸다. 낮게 튀어 오르는 슬라이스며 갑작스러운 드롭이며 기껏 네트 앞으로 불러놓고 갑자기 놀리듯 쳐내는 로브며, 어떻게 하나같이 치기 싫은 구종을 코스요리처럼 내놓지? 내가 상대였으면 빡쳐서 라켓 하나 부러뜨렸다.

1세트는 가볍게 주신이가 이겼다. 아마 이 시합 자체도 주신이가 이겼을 거다. 상대편도 8강에 오를 만큼 실력이 있긴 했지만 거의 힘으로 몰아붙이는 플레이라 주신이가 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이때 내가 주신이랑 붙었어도 꽤 애먹었을 것 같다. 주신이의 플레이는 상대가 싫어하는 코스를 알아채고 끈질기게 거기만 노리는 두뇌형 테크니컬 플레이. 그래, 맞다, 뱀! 능구렁이! 상대하면 엄청 기분 나쁜 플레이였을 거다.

잠깐의 쉬는 시간 뒤에 2세트가 이어졌다. 코트를 바꿔서 이번엔 주신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라켓을 단단히 쥐고 자세를 낮춘 어린 날의 주신이가 카메라 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녀석의 얼굴이 엄청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아는 주신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두 눈은 별이 박힌 것처럼 반짝반짝, 얼굴과 전신은 활기와 생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고, 주신이 자체가 한낮의 햇살을 받아 빛나는 보석같이!

녀석은 찬란할 정도로 빛을 내면서, 날아오는 공을 쳐 내고, 상대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 쉴 새 없이 발을 움직이고, 어설프지만 페이크와 심리전을 섞어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주신이의 공은 매 순간 최선의 경로로 날았다. 단 한 구도 대충 치는 법이 없었다.

나는 저 때 뭘 하고 있었나?

바로 옆 코트에서, 상대를 힘으로 찍어 누르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잘난 주니어처럼 으스대면서!

그게 잘못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럴 만한 파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주신이처럼 악착같이 공을 따라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됐으니까. 한두 구 놓쳐도 금방 만회할 수 있으니까!

주신이는 왜 저렇게, 놓치면 엄청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절박하게 공에 달려들지? 그러면서도 공을 네트 너머로 보낼 때마다 엄청나게 즐거워 보였다. 주먹만 한 연두색 테니스공이 녀석의 세상에서 제일가는 보물인 것처럼….

아.

부상 때문에 더 이상 연습 시합조차 할 수 없는 전前주니어, 혼자서 하는 서브 연습만 허락받은.

나는 저 녀석에게-

10.

차라리 보지 말걸. 그랬으면 가벼운 맘으로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뭐에 홀린 것처럼 영상을 보고 또 봤다. 영상 속의 주신이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저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알았구나…. 몇 번째로 봤을 때였더라, 영상 속 녀석이 왼손잡이라는 걸 알았다. 타고난 키와 마찬가지로 왼손잡이도 일종의…재능이었다. 유니크하다는 건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얘기랑 같으니까.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림고 취미반 소속으로 서브 연습을 하던 주신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오른손을 쓰고 있었다.

내가 오른손을 더 이상 쓰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테니스를 계속 칠 수 있을까? 아니. 내 피지컬이라면 굳이 테니스가 아니어도 되니까 팔을 쓰지 않는 다른 종목으로 갈아타면 갈아탔지 왼손으로 라켓을 쥘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다. 여태 해왔던 경험치를 다 버리고 0에서부터 시작하는 거나 똑같은데 훨씬 더 어렵고….

나는…테니스를 좋아하지만. 좋아하니까 이렇게 힘든 훈련을 견디고 있지만. 이기는 게 더 좋다. 패배할 게 뻔한 길을 굳이 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 녀석은 애초에 패배조차 할 수 없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라켓을 휘두르고 있었다. 다치지 않은 남은 손으로라도.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야?…같은 속 편한 물음을 던질 수가 없었다. 좋아하니까. 좋아했으니까…. 저렇게나 즐거웠으니까…….

아, 찾아보지 말걸.

녀석과 테니스를 치고 싶다. 지금의 우중충한 주신이가 아니라 4년 전의 찬란한 주신이와 공을 주고받고 싶다. 주신이는 이 대회 4강에서 탈락해서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그랬어도 녀석은 다음 대회를 손꼽아 기다렸을 것 같다. 그런 녀석과 아무런 가책 없이 시합하고 싶다. 그리고 테니스 얘기를 잔뜩 하고 싶어. 그건 나도 잘 아는 주제고 녀석이 엄청나게 신난 수다쟁이가 될 것 같으니까.

역시 찾아보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는데.

11.

특별한 녀석들은 기억하고 있다. 나는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별다른 일 없으면 항상 최상위권에 들었다. 내 서브를 아예 못 받는 놈들이 널려 있었다. 파워 테니스 시대에 태어나 갖고 태어난 재능을 맘껏 뽐낼 수 있어서 좋았지만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비슷한 스타일이다보니 재미가 없었다. 똑같이 파워가 무기라면 더 쎈 놈이 이기니까 내가 이기는 게 당연하잖아? 물론 그날 컨디션이 나쁘면 질 때도 있었지만 그건 별일이고.

가끔 다른 스타일을 가진 놈들과 붙으면 그나마 덜 시시했다. 대부분 서브를 받아넘기는 것도 버거워했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은 싸워볼 만한 녀석들이 나타났다. 손쉽게 이길 수 없어서 재미있는 놈들. 당연히 기억 해뒀다. 대회 대진표에서 그 녀석들을 찾아야 하니까.

딱 한 번이라도 대진표의 작대기가 만났더라면 당연히 주신이를 기억했을 거다. 어쩌면 치를 떨면서 싫어하는 놈이 됐을 수도 있다. 녀석의 플레이는 나한테도 천적이었으니까. 만나기만 하면 게임 x같이 한다고 욕했을지도 몰라.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주신이가 계속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면. 어쩌면, 나랑 잘 아는 사이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니면 만날 때마다 싸우는 사이였을 수도 있고 말야. 지금처럼 나를 무시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만약’이라는 말처럼 쓸모 있고 쓸모없는 게 또 있을까? 코치들은 항상 지난 경기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라고 한다. 특히 진 경기일수록 더 많이 하라고. ‘만약에 여기서 다르게 받아쳤다면 어땠을까?’ ‘만약에 이렇게 서브를 넣었다면 어땠을까?’ ‘만약에……’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떠올리라는 것이다. 별로 좋아하는 일은 아니다. 뭐, 힘이 부족했든지, 체력 분배를 잘 못했든지, 스피드를 좀 덜 냈든지…. 결국 내 파워가 부족해서 진 건데 핑계가 많아. 어쨌든 도움이 된댄다. 오늘의 패배를 내일의 승리를 위한 비료로 삼으면 패배도 충분히 값지다, 그런 따분한 얘기들.

하지만 몇 번을 시뮬레이션한대도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 없잖아. 가끔은 ‘만약’이라는 단어가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 내 경우엔 ‘만약에 엄마가 아프지 않았다면…’ 이런 물음? 떠올리는 것만으로 슬퍼져 버리고 마는 일들 말이다.

‘만약 주신이가 부상 당하지 않았다면~‘으로 시작하는 상상이 나한텐 그냥 좀 안타깝고 아까울 뿐이지만 주신이 녀석한테는 그렇게 가볍지 않을 테다. 그런 걸 떠올리는 거 자체가 힘들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바꿀 수 없으니까. 아무리 머릿속으로 상상해봤자 현실은 안 바뀌니까….

만약에 나, 강산 자체가 녀석한테 ’만약‘이 됐다면? 그래서 나 때문에 괴로워졌다면? 너무 나갔나? 근데 만약에, 그래서 녀석이 나를 무시하는 거라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해?

아, 뭘 어떻게 하긴 하냐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냐고! 진짜 쓸모없는 만약에다!

역시 괜히 봤다. 답답해졌잖아.

…조금 미안하고.

근데 정말 녀석이 날 보면서 상처받았으면 어떡하냐? 마녀가 들으면 또 깔깔 웃으면서 지나친…뭐…라면서 비웃을 것 같지만 쪼끔은 진지해.

12.

내 속이 복잡하든 말든 녀석이 계속 보였다. 코딱지만 한 학교.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은 같은 수업이다. 그걸 생각 못 했네.

별로 안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으니까…최대한 느리게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어기적어기적 강당으로 향했다. 강당에 들어서자마자 종이 쳤다. 애들은 이미 남자 여자로 나눠서 줄 서 있었다.

애들 앞에는 이마부터 절반이 대머리인 체육 선생이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회초리처럼 자기 손바닥에 탁 탁 치고 있었다. 그래도 이 학교가 나름 스포츠 명문이라더니 코치진이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랬다. 체육 선생의 이력도 나쁘지 않댔지만 테니스부는 학교 수업이랑 관련 없이 완전히 따로 운영하고 있다고. 다행이었다. 저 선생 오래 보면 대머리 옮을까봐 걱정했거든.

농담이고. 인상이 별로라서 맘에 안 든다. 머리 벗겨진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기름기에 번들대는 이마는 더럽고…체육 교사라면서 배때지에 지방 낀 것도 싫다. 괜히 가오나 잡고.

“어, 어서 와라. 우리 주림고의 자랑, 강산이!”

저거 봐라. 이 학교 소속된 지 이제 2주째거든? 어이가 없다. 맞는 말이긴 한데 안 창피한가? 대놓고 아부잖아.

기분이 다운돼서 그런지 평소라면 기분 좋게 받아들였을 말도 꼬왔다. 애들이 쳐다봐서 어쩔 수 없이 선생에게 목인사 까딱하고 어슬렁어슬렁 맨 뒷줄에 섰다.

배드민턴 라켓을 들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오늘의 종목은 배드민턴이라고 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시킨 선생이 라켓 휘두르는 자세와 룰을 설명했다. 배드민턴, 좋지. 가벼우면서 운동량 많아서 공부만 하는 샌님들한테 덜 무리 가고. 열중쉬어 자세로 선생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멍때렸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다 자연스럽게 아는 뒤통수를 찾았다. 나 오기 전에 키순으로 세워둬서 꽤 앞줄에 선 녀석이 잘 보였다. 아. 머리카락이 조금 뻗친 진고동색의 뒤통수를 보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녀석 앞에 서고 싶지가 않다…. 누나 말대로 나를 무시하려면 나를 의식해야 할 텐데 그 자체도 내 탓 같고…. 미움받는 건 익숙하지만 이런 식으론…처음이고…. 이게 대체 뭐냐고?

“산이, 강산!”

어느새 설명을 마친 반머리 선생이 나를 불렀다. 뭔데, 귀찮게.

“예?”

“잘 들었지? 나와서 시범 보여봐라.”

가지가지….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날인데 세상이 날 놔두질 않는다. 애들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날 돌아본다. 어쩔 수 없지. 후딱 끝내고 쉴란다…. 이게 다 내가 잘난 탓이니까 어쩌겠냐.

입꼬리가 조금 올라갈 정도로 약간 우쭐해졌던 마음은 어김없이 고개 푹 숙인 녀석 옆을 지날 때 완전히 꺾여버렸다. 주신이, 너는 내가 그렇게 보기 싫냐?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녀석을 이해는 했지만 좀 서러웠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뒤에서 욕하는 놈들한텐 그럴 이유를 만들어줬었다. 그치만 과거 사고 때문에 나를 아예 쳐다보기도 싫어하는 녀석이라면 뭘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

라켓을 건네받고 맞은편 코트에 가서 섰다. 선생이 폼을 잡고 셔틀콕을 높이 던졌다. 탁, 깃털 달린 콕이 가볍게 날아왔다. 비슷한 빠르기로 되돌려 보냈다. 늘 쥐던 테니스 라켓보다 훨씬 가볍고 콕도 말 그대로 깃털 같다. 선생이 좀 꼴 보기 싫은 미소를 지으며 이번엔 네트에 거의 닿을 정도로 일직선으로 콕을 날렸다. 미안하지만 한숨 나올 정도로 느리거든요…. 심드렁하게 콕을 올려 친 후 남는 시간 동안 힐끗 관중 쪽을 봤다.

아, 아! 녀석이 나를 보고 있었다!

드디어 녀석의 얼굴을 정면으로 봤다! 놀랍게도 녀석의 표정은 평범했다. 얼굴을 찌푸리지도, 나를 노려보지도 않았다. 그냥, 그냥 그대로 보고 있었다! 나를!

내가 잘못 생각한 거야? 주신이가 트라우마 때문에 나를 피한 게 아니야?…그럼 왜 피했지? 아무튼 내가 그 이유로 싫은 건 아니라는 거지?

그거면 됐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이유가 아니니까 괜찮아!

왠지 이 랠리가 끝나면 녀석이 도로 땅바라기가 될 것 같아서 최대한 선생과 비슷하게 콕을 주고받았다. 티 날까봐 한 번씩 기술도 섞어 주고…. 너무 빠르게 치면 선생이 못 받아칠 것 같으니까 적당히, 적당히. 녀석은 어느 틈에 외딴섬처럼 다른 코트 기둥에 기대앉아 있었다. 여전히 나를 쳐다보면서. 콕 보랴 녀석 보랴 눈이 바빴다.

녀석이 슬슬 지루해하는 것 같을 때 끝을 냈다. 선생이 부들부들 떨면서 가까이 다가와 날 안았다. 웃고 있지만 반절 까진 이마에 힘줄 서서 전혀 안 괜찮아 보였다. 설마 이길 줄 알았냐고, 나를?

환호하는 애들을 팬서비스 차원에서 한 번 슥 훑어주고 바로 녀석을 찾았다.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장 난 것처럼 굳어 버렸다. 얼빠진 얼굴. 맨날 음침하고 어두운 얼굴로 땅바닥만 보더만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냐고. 늘 반쯤 감겨있던 연두색 눈동자를 크게 뜨고 입을 헤 벌린 얼굴이 너무 웃겨서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마음이 아까보다 훨씬 가벼웠다!

13.

누나가 뭐랬더라? 상대방이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보랬나?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유로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안 이상 노력하면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이 생겼다. 테니스 선수가 아니라 그냥 같은 학교 친구로라도! 누나 말대로 나는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던 때가 종종 있었으니까 이번엔 최대한 조심해서 신중하게…녀석에 대해서 파악하고 딱, 친해지는 거다.

그렇게 다짐하고 티 나지 않게 녀석한테 접근할 계획을 세웠다. 스파이 영화처럼. 목표물한테 걸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녀석을 관찰하면서 뭘 좋아하는지 정보를 수집하는 거다. 워낙 눈치 빠른 놈이라 주의해야 했다.

근데 초반부터 장애물이 생겼다. 뭔 놈의 학교가 이렇게 빡빡한지 쉬는 시간이 10분밖에 안 되면 뭘…할 수가 있냐고? 가뜩이나 같은 반도 아니고 테니스부도 반이 갈려서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 적은데 자유시간은 밴댕이 소갈딱지만 하다. 그나마 이동 수업 교실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어서 서두르면 몇 분이라도 건질 수 있었지만 그걸로는 모자랐다. 이동 수업 교실에 자리를 잡은 녀석은 보통 줄이어폰을 귀에 꽂고 책을 들여다보거나 잠을 잤기 때문에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조금 눈에 띄더라도 어쩔 수 없다…. 수업 시간 끝나기 몇 분 전에 화장실 간다고 먼저 몸을 빼기로 했다. 다행히 선생들이 뭐라고 하진 않았다. 녀석을 볼 수 있는 수업 전 시간마다 똑같은 핑계를 대서 내 이미지가 쪼금 걱정되긴 했지만 어차피 얼마 안 있음 미국으로 돌아갈 텐데 알 게 뭐냐? 나는 급하다고!

스파이. 첩보물의 시작은 위장에서부터랬다. 최대한 녀석이 목적이 아닌 것처럼 꾸몄다. 녀석 근처에 앉는 애랑 얼굴을 텄다. 아닌 척도 하고 주변 조사도 하고 꿩 먹고 알 먹고. 처음엔 쪼끔 재밌었다. 며칠이 지나도 정보를 거의 못 모으기 전까지는…. 아니, 맨날…공부만…해!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문제집만 푼다고! 근데 채점하는 거 보면 장마철이다. 아이고. 역시 쟤는 테니스를 쳐야돼. 쟤도 공부론 답이 없어. 쉬는 시간마다 공부하는 끈기는 인정하는데 결과는 썩.

국어나 과학은 그래도 좀 괜찮아 보이는데 수학은 거의 전멸…. 영어도 반토막. 아니, 맨날 문제 푸는데 어떻게 맨날 틀림?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난…영어는 잘하니까 괜찮아! 어차피 프로 선수 되면 다른 건 별로 안 중요하니까!

문제집 푸는 표정도 별로 밝지 않다. 일단 좋아하는 건 모르겠고 싫어하는 건 알겠다…. 근데 세상에 공부 좋아하는 놈이 어딨냐고. 있으면 별종이지.

아, 도움이 하나도 안 되잖아!

14.

“진행 상황은?”

누나가 물었다. 진짜 무슨…스파이 영화 같네. 아무런 소득이 없지만. 괜히 창밖으로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노려보면서 불퉁불퉁하게 대꾸했다.

“몰라.”

“왜 또 심통이 나셨을까, 우리 왕자님이.”

“아 그렇게 부르지 마!”

“뭐 좋아하는지 못 알아냈어? 머리핀이라든지 좋아하는 간식이라든지, 그런 것도?”

“못 찾았다 왜! 그리고 남자애가 무슨 머리핀을 좋아하냐!?”

“응? 남자애?”

마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이해 못 한 것처럼. 나도 의아했다. 그때 같이 봐놓고선?

“걔, 앞머리 이렇게 내려온 음침한 녀석. 봤잖아?”

“아니? 내가 본 건 단발머리 여자애였는데…? 다람쥐 달린 머리핀 꽂은 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쩐지 귀여운 애 어쩌고 친구 많을 것 같다 저쩌고 할 때 이상하다 했다! 애초에 주신이 얘기가 아니었다고? 마녀 말만 믿고 있었는데? 씩씩대면서 누나를 노려보자 딴청 피우며 핸들을 두드린다. 그거 말고 해결책 내놓으라고!

“암튼 걔. 좋아하는 건 못 찾았고 공부 싫어하는 건 알겠더라.”

“그거야…, 흠흠, 아니 근데, 산이 네가 남자애를? 그것도 음침한 애를? 아, 혹시 걘가? 주근깨 많고 힘없던~?”

“누군지 알겠어?”

“그 여자애 뒤에 있던 애~! 아아~! 산이 너 취향이 그런 쪽이었어?”

“아니, 날 무시하는 녀석이라고 했잖아! 친해지고 싶댔지 누가 사귀고 싶댔냐!”

분통 터진다. 하나뿐인 누나가 저 지경이어서.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처음부터 틀렸었다니. 완전 시간 낭비했잖아! 핸들을 토독토독 두드리던 마녀가 복장 터지는 소리를 했다.

“왜? 무시하면 무시하는 대로 두면 되잖아. 왜 친해지고 싶은데?”

“그냥!”

“그냥이 어딨어? 네가?”

“여깄다 왜!”

때마침 빨간불에 걸렸다. 차를 세운 마녀가 나를 쳐다봤다. 눈썹과 볼따구가 씰룩씰룩, 그야말로 놀릴 준비 만반. 누구 때문에 내가 이러는데!

“남한테 관심 없잖아, 우리 산이.”

“그건…그렇지.”

“그럼 그 애랑 친해지고 싶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건데. 누나는 그게 궁금하네?”

주신이랑 친해지고 싶은 특별한 이유? 고개가 기우뚱 기울었다. 그야 그 녀석은 나를 처음 보자마자 개무시한 놈인데 알고 보니 테니스를 치는 놈이었고…내가 보기엔 이 학교에서 제일 잘 치는 놈이었는데…더 알고 보니 테니스를 무지 좋아하는데 부상 때문에 더 이상 칠 수 없게 돼서…나를 보면 그 생각이 나서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더니…지금은 또 그건 아닌 것 같고. 뭐지, 양파야? 정리하니까 뭐가 계속 나와.

떠오른 그대로 마녀한테 털어놓았다. 이 상황에선 뭘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이랑 같이. 마녀는 “흐음….”하는 소리만 냈다. 평소처럼 놀리려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대답할 말을 못 찾은 소리.

아마도, 그대로 두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나랑 안 엮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얘기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고. 하지만,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녀석과 내가 친해질 수 있을지?

15.

결국 누나한테 별 얘기를 못 들었다. 아마 내가 알아서 나가떨어지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바본가? 그럴수록 더 오기 생긴다고. 애초에 이 학교에서 나랑 수준 맞는 건 주신이 그 녀석밖에 없단 말야.

연습 시합 한 번 못 하면서 너무 올려 치나? 싶다가도 녀석의 정교한 서브와 과거 시합 영상을 떠올리면 당연한 생각이라는 결론이 났다. 그런 경기를 했던 놈이 지금 안 쓰던 손으로 그런 컨트롤을 한다면 만약에 사고 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무서운 놈이 됐겠냐고. 사고를 당했는데도 테니스를 그만두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거라고.

게다가 내가 뭘 할 때마다 감탄하면서 그걸 시기와 질투로 덮어 버리는 주니어 놈들이랑 다르게 주신이 그 녀석은 늘 무덤덤했다. 진짜로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적어도 다른 놈들보다 보는 눈도 수준도 높았다. 피지컬만 따라줬다면 아마 그 녀석도 꽤나 주목받지 않았을까. 나만큼은 아니었겠지만.

그런데 그런 녀석이랑 친해지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믿었던 마녀도 쓸모가 없다! 아니, 테니스는 확실히 좋아하는데…지금 상황에서 녀석과 테니스를 치자고 하면 아마 평생 들을 욕을 다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녀석이라면 욕도 안 하고 나를 영영 투명인간 취급할 것 같긴 한데…. 그게 제일 최악이다.

나랑 엮이는 거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그럼……몰래 선물을 주는 건 어떨까? 선물 싫어하는 사람 없잖아. 매점 갈 시간도 아껴서 공부하는 것 같던데 간식 주면 도움 되지 않겠어? 먹을 거 주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댔고! 내가 줬다고 하면 왠지 버릴 것 같으니까 사물함 같은 데에 몰래 넣어두다…나중에 서프라이즈하면…완벽해!

진작 이렇게 할걸! 괜히 누나만 기다렸잖아!

16.

바보는 나였다. 과자만 덜렁 넣어두면 누가 넣었는지 정말로 티가 하나도 안 나잖아!

그걸 3일째야 깨달았다. 이틀 내내 과자만 떨렁 넣어둔 후에야….

누가 오다가다 남는 과자 버린 걸로 알면 어떻게 하냐고. 부랴부랴 포장지를 사다 빼빼로 상자를 포장했다. 그걸로도 뭔가 부족한 것 같아서 생각해 보니 편지, 그래 편지가 없었다. 녀석의 사물함에 넣기 직전에야 생각나서 수첩을 북 뜯어다 인사 한 줄 휘갈겨 쓰고 포장지 틈에 욱여넣었다. 이름하여 신비주의 작전……. 구라지만. 조금 마니또 같아서 설레기도 하고….

누가 보냈는지 힌트 하나 없이 쓰는 게 주요 포인트였다. 과연 주신이 녀석이 알아차릴 수 있을까? 바로 나, 강산한테 선물 받았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으려나? 나중에 짜잔! 하고 밝히면 놀라서 뒤로 자빠지는 거 아냐?

그때를 상상하면 얼마든지 수고해 줄 수 있다. 무엇보다 나를 조금이라도 더 좋아하게 할 수 있다면야!

17.

놈이 편지를 안 읽는 것 같다.

아니…안 읽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답장이 없을 수가 없다. 몇 번이나 답장 달라고 했는데도, 그것도 엄청나게 성의 없이 써도 된다고 친히 허락까지 했는데도 없어.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확실하게 없다.

과자만 먹고 편지는 버려버리나? 설마?

신비주의고 서프라이즈고 정작 녀석이 안 읽으면 소용이 없잖아! 아 진짜…맘 같아선 찾아가서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데 그럼 놈이 싫어할 테니까 못하고. 누가 줬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무시하는 부분은 나만 무시하는 게 아니라는 거니까 좋지만…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은 계속 해본다. 어차피 쫌 있으면 못하니까….

18.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마구잡이로 썼다가 후회한 날. 주신이의 영상을 다시 한번 찾아봤다. 보면서 내가 이 녀석과 친해지면 하고 싶은 게 뭔지 최대한 곰곰이 고민했다. 나는 부상 걱정 없는 녀석과 코트 위에서 테니스를 치고 이기고 싶었다. 녀석이라면 져도 환하게 웃을 것 같으니까. 그런 녀석이랑 테니스를 하고 싶다.

그런데 그러려면 나랑 녀석이 친해지는 것보다 먼저 해결돼야 하는 일이 있었다. 부상이다. 관찰한바, 흉터 있는 왼손으로 일상생활은 무리 없는 것 같다. 그럼 생각보다 엄청 심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수술하고 재활하면 다시 복귀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치료가 아예 불가능한 부상일 수도 있긴 하지만 부딪쳐 보기 전엔 모른다.

정 안돼도 테니스 코트에 설 수 있어. 적어도 녀석을 코트 위로 불러오고 싶다. 어느 형태로든 좋아. 물고기는 물 밖에 있으면 죽는데 녀석이 딱 그 모양이다. 코트 위로 올려야 해. 다시 빛내는 녀석을 보고 싶다.

다행히 나는 강산이고 아빠는 강해웅이다. 적어도 테니스계에서 내가 못할 일은 별로 없다. 주신이놈한테 엄청난 행운이지! 녀석은 내가 주림고에 왔다는 것 하나만으로 이렇게 자기 인생이 뒤바뀔 수 있을 줄 알았을까?

뭐, 그것도 놈이 편지를 읽어야 하겠지만…. 나도 자존심이 있지. 적어도 편지는 읽어라. 아니면 엄청난 기회를 자기 발로 뻥 차버린 줄도 모르고 영영 잃을 테니까.

19.

출국 날짜가 잡혔다. 대회 끝나자마자다. 여전히 놈은 편지…안 읽는 것 같고. 버릇처럼 녀석의 교실에 와서 앉아는 있는데 진도 하나도 안 나가고. 옆에서 애들이 떠드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고민했다. 평생 살면서 안 해봤던 고민을 이 두 달 동안 몰아서 하고 있다. 해결이 딱! 되면 얼마나 편하겠어. 내 맘대로 되는 게 1도 없으니까 계속 고민만 하게 되잖아.

놈은 여전히 이어폰 꽂고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있다. 맨날 뭐 듣고 있는 거지? 관찰하면서 느낀 건데 공부는 정말 저 녀석의 길이 아니다. 녀석도 아는 것 같은데 어떻게든 꾸역꾸역 앉아 있다. 사실 책상 앞에 붙어만 있지 제대로 머릿속에 넣는 것 같지 않다. 오늘도 줄 좀 긋다가 볼펜 돌리기로 넘어가잖아.

아무래도 운동하는 놈이라 그런가 몸 쓰는 건 잘한다. 틀림 없이 굳은살이 배겼을 손가락으로 볼펜을 핑그르르 돌리는데 메토로놈? 켜놓은 것처럼 규칙적이야. 얄쌍한 검정 볼펜이 녀석의 길쭉한 손가락 위에서 잔상 남을 정도로 빠르게 팽글팽글 돌다 챡! 제자리로 돌아온다. 예술 점수 10점. 무슨 기계로 돌리는 것 같다.

무슨 표정일지 궁금해서 힐끔 녀석의 얼굴을 쳐다봤다가. 으, 아악!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 녀석이 나를, 나를 보고 있었다. 바로 옆자리라서 이렇게, 이렇게 가까이서 눈 마주친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아, 아! 녀석의 연두색 눈동자가 제대로 나를 보고 있었다. 거의 두 달 동안 녀석과 눈 마주친 때 없는 건 아닌데, 이렇게 가까이, 제대로 마주친 건 처음이라서!

온 세상이 흑백인데 주신이의 눈동자만 색깔이 있는 것 같은 착각할 정도로 가깝다. 코앞에 있는 것 같이. 녀석의 눈동자에 비친 나는 너무, 너무 얼빠진 멍청이 같은 표정이었지만, 녀석의 눈에 나만 담겨 있다는 게 나는 너무나,

이쯤 돼선 녀석한테 내가 길가의 나무1이나 잡몹4 정도 되는 줄 알았는데. 계속 무시당하고 안읽씹 당하고 있었으니까. 그랬던 주신이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어. 게다가 업신여기거나 비웃는 표정도 아니다. 평소의 반쯤 뜬 눈이 아니고 똑바로 뜬 눈으로 나를 가만 들여다보듯이……시간이 엄청, 느려진 것 같아. 가끔, 아주 가끔 네트 너머에서 날아오는 공이 수박만큼 커 보였던 때처럼. 계속계속 이대로 멈춰있으면 좋겠다.

물끄러미 나를 보는 녀석은 단 하나의 망설임도 없는 눈빛이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뭔가 내가 절대로 피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는 그런 눈빛…꼭 나한테 뭔가 얘기하는 것 같은….

꼭. 나한테 말하는 것처럼.

너, 나를 좋아하지?

순간 그런 환청이 들렸다. 내가 미쳤나?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나도 모르게 터질 것 같이 열 오른 내 얼굴을, 녀석의 눈동자 속에서 발견하고 말았다. 내가, 이 녀석을 좋아하나? 녀석은 확신한다. 나는? 나는,

그 순간 녀석의 손에서 펜이 빠져나왔다. 정신 차렸을 때 나는 녀석의 손바닥 위에 그 펜을 올려놓고 있었고…녀석은 내게 자기가 듣고 있던 mp3를 보여줬다…. 이 흐름 자체가 너무나 얼떨떨해서. 귀를 찢을 듯 크게 종소리가 나자마자 정신없이 교실에서 빠져나오고 말았다.

하루종일 머릿속엔 손때 타서 반질반질해진 낡은 mp3의 화면과 녀석의 눈동자와 목소리가 맴맴 맴돌았다. 하루종일. 홀린 것처럼.

20.

좋아한다는 건 뭘까? 나는 주신이랑 사귀고 싶은 건가? 사귀면 뭘 하지? 손잡고 뽀뽀하고? 아니 그런 것까진 생각해 본 적 없어. 친해지고 싶은 건 맞다. 테니스 치고 테니스 얘기하고 싶고 가능하면 다른 것들도 같이 하면 재밌을 것 같아.

친구…있어 봤어야 알지…. 조금 자괴감 든다. 주신이는 친구 있었을까. 내가 첫 친구면 좋겠다. 그냥 친구 말고 좀 더…친한 친구면 좋겠어.

근데 주신이, 귀엽긴 한가? 일단 음침한 그늘부터 걷어내야 뭐가 보일 듯. 얼굴에 콕콕콕콕 박힌 주근깨나…입꼬리 내려간 입이나…맨날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는 연두색 눈 말야. 뭐 잘 안 풀릴 때마다 팔 자로 내려간 눈썹도. 걔는 앞머리도 잘라야돼. 답답하게 다 가려버리잖아.

귀여운진 모르겠고 지금은 답답해 보이기는 하는 듯. 제대로 뜯어 보고 싶다. 맨날 힐끔힐끔 훔쳐보기만 했으니까.

…녀석이랑 뽀뽀하면. 얼굴. 빨개지려나. 당황하려나? 부끄러워할까? 쪼끔 뭐, 궁금하긴 하네. 만약에 사귀면. 재밌을 것 같긴 해. 쪼금은. 아니 좀 많이.

21.

내가 주신이를 좋아한단 걸 깨닫고 나니까 하고 싶은 말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카드는 너무 작아서 편지지를 샀다. 어버이날에도 안 써봤는데. 여태까진 녀석이 안 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대충대충 쓴 쪽지도 있었는데 왠지 이번엔 무조건 주신이가 읽을 것 같아서 하고 싶은 말을 왕창 편지에 쏟아냈다. 쓰는 내내 mp3를 내밀면서 슬쩍 웃던 그때의 녀석이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상상만으로도 녀석이 나를 보는 게 좋고 내 말을 듣는 게 좋고 나랑 같이 있는 게 좋았다. 이게 좋아하는 감정이라면 내가 정말로 주신이를 좋아하는 게 맞다.

밤에는 녀석이 듣던 노래를 켜놓고 들었다. coldplay-viva la vida. 유명한 곡이었다. 광고에서도 들었던 것 같다. 노래를 따라서 흥얼거리다 문뜩 가사가 좀…심상치 않은 것 같아서 구글링해보고 좀, 좀 그래졌다. 가사 알고 듣고 있었을까? 과거의 영광 얘기하는 노래였잖아. 주신이 그 녀석 영어 잘 못하는데. 설마 모르고 들었나? 어느 쪽이든 맘이 좀. 그래.

내가 만약에 녀석한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럼 좋겠다. 즐거웠던 기억이 과거에만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웃을 줄 아는 녀석이 지금처럼 세상의 우울을 다 빨아들인 것 같은 표정을 짓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랑 테니스 칠 때도 4년 전의 그 영상에서처럼 웃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도록 하고 싶다. 물론, 지고도 웃을 수 있는지도 조금 궁금하고. 내가 이길 테니까!

22.

세 번째 편지를 사물함에 넣다 걸렸다. 주신이 말고 다른 녀석들한테. 한 명은 아는 애였다. 1반 교실 갈 때마다 내 자리에 앉아 있던 말 많은 여자애. 이제 보니 동물 달린 머리핀을 꽂았다. 설마 누나가 말했던 귀여운 여자애가 쟤였나. 3주째 아침 운동하는 김에 학교까지 뛰어와서 녀석의 사물함에 과자랑 편지를 넣고 집으로 돌아가 씻고 아침 먹는 루틴 하는 동안 한 번도 다른 놈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주신이의 사물함을 열고 선물을 넣자마자 그 여자애가 따까리로 보이는 여자애들을 달고 나타났다.

“산아. 사물함 착각한 거 아니야?”

양갈래 머리를 한 따까리1이 말했다. 여섯 시 조금 넘긴 이 새벽에 무리 지어 나를 스토킹 해놓고 하는 말이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말이 안 나와서 고개를 기울이며 무리를 내려보자 따까리1이 한 발짝 물러났다.

“아니. 왜, 왜 그렇게 봐? 우린 그냥 알려주려고.”

따까리1이 물러나니 눈꼽도 덜 뗀 따까리2가 나선다. 벌써부터 피곤하다. 설마 네 명을 다 상대해야 하나. 때릴 수도 없고.

“뭘 알려줘?”

“거기, 현아 사물함 아니야. 선물 잘못 넣은 것 같아서.”

“그게 누군데?”

정말로 몰라서 물어봤다. 그랬더니 1반 여자애가 갑자기 울먹이더니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 쭈그려 있다가 갑자기 기세등등해진 따까리3이 여자애의 어깨를 감싸고 나를 손가락질했다.

“너 현아 좋아하잖아! 왜 모른 척해? 너 잘났다고 어장 관리했어?!”

“? 뭔 소리야.”

“현아야, 울지마. 야, 강산! 너도 현아가 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잖아!”

“누가 누굴 좋아해? 쟤가 나를? 내가 쟤를?”

나와 여자애를 가리키자 따까리들이 그럼 아니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부터 이게 뭔 개소리지? 안 그래도 이번 주까지밖에 시간 없어서 초조한데.

“둘 다 아닌데?”

내가 사실을 말하자마자 무리의 눈빛이 확 사나워졌다. 여자애는 더 크게 울었다. 정말로 어이가 없었다. 쟤가 나를 좋아해? 아니잖아! 좋아하면 티가 나게 되어 있다고. 주신이가 내 감정을 알아차렸던 것처럼. 쟤는 떠드는 걸 좋아했고! 오해를 풀어줘야 하는 애가 오히려 울고 있으니 얼척이 없다.

“야, 말해봐. 니가 내가 널 좋아한다고 했냐?”

갑자기 쫄아있던 따까리1이 팍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내 손등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내 절반 만도 안 한 여자애의 갑작스러운 폭력에 몸이 굳어버렸다. 쟤를 때릴 순 없잖아. 그 바람에 선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따까리1이 미친 것처럼 선물을 밟았다.

진짜로. 미쳤나?

포장지가 찢어지고 버터과자가 부스러졌다. 편지라고 무사할 리가 없었다. 구겨지고 찢어지는 봉투를 보자 어제저녁에 저걸 쓴다고 보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어차피. 어차피 다음 주면 한국에 없는데. 스팀이 팍 오르며 이마가 어찔했다. 이 화를. 어떻게 풀지? 저 미친새끼를 어떻게 해야 하냐? 울고만 있는 저 새끼가 제일 악질이다.

따까리들이 찢어지는 목소리로 뭐라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귀가 아팠다. 딱 한 대만 맞아도 닥칠 새끼들이. 병아리처럼 삑삑삑.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학폭은 안된다는 생각이 간신히 들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화를 욕으로라도 풀어내려고 소리 지르기 직전, 주신이가 생각났다. 내가 없어진 후에도 계속 이 학교에 다닐 녀석이. 아직 답을 듣지 못했지만 만약 거절한다면 녀석의 일상을 날 만나기 전으로 되돌려줄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숨을 쉬어내고. 여자애들을 노려보며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주신이고. 쟤와 내가 관련 없다는 건 쟤가 더 잘 알 거라고.

23.

그러고 다음 주, 예정대로 미국으로 떠났다. 대답 못 듣더라도 적어도 미안하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를 좋아하는 네가, 나에게.

녀석의 첫 번째 편지를 보자마자 웃음이 픽 샜다. 동시에, 남은 편지들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솟았다. 어차피 다 해서 열세 통뿐인데다 이것처럼 편지보다 쪽지에 가까운 분량이라면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 괜히 호기심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것보다야 나을 것이다. 나는 녀석의 첫 번째 편지를 손에 쥐고는 남은 선물들을 살살 뜯었다. 역시나 쪽지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받은 순서대로 바닥에 늘어뜨려 놨다.

마지막 두 통은 두툼했다. 달갑지 않았다. 여기에 무슨 이야기가 적혀 있을까. 내 기대는 편지 아닌 짧은 쪽지까지만이었나 보다. 녀석이 내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었는지 알면서도 첫 번째 쪽지처럼 가벼운 이야기만 전해오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고, 녀석의 말을 듣는 수만 남았다. 그게 녀석에게도, 내게도 예의였으니까….

두꺼운 편지 봉투들을 끄트머리에 두고, 스탠드를 바닥에 놓고 약한 밝기로 켰다. 취침 시간이 가까워 엄마의 오해를 살 수 있으니 방의 불은 껐다. 바닥에 앉아 침대에 등을 기대고 스탠드 불빛을 적당한 높이로 조절했다.

달빛 하나 없는 깜깜한 밤에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숨어서 편지를 읽는 행위 자체가 우스웠다. 원래라면 받은 날에 읽고 답을 주는 게 맞는데, 나는 편지를 받은 사실 자체를 외면해 오다 몇 주치 편지를 하루 만에 몰아서 보니 잘못이 맞긴 했다.

꾸깃해진 첫 번째 편지를 빛 아래 펼쳤다. 다시 봐도 짧고 굵다.

첫 번째.

안녕 주신이!

단어장을 죽 찢어낸 것 같은 쪽지에 급한 글씨체로 휘갈긴 한 문장. 반점 하나쯤은 넣었을 만도 한데 그것조차 없다. 녀석의 성격이 보이는 것 같아서 웃겼다. 이 문장 하나를 쓰려고 녀석이 얼마나 골머리를 썩였을지 궁금했다.

마치 코딩 시간에 처음으로 배우는 문장 같다. Hello, world! 말이다. 그쪽은 쉼표가 제대로 들어가 있지만…. 어떻게 본다면 궤가 같았다. 낯선 대상에게 노크하듯 첫인사를 건넨다는 점에서….

첫 쪽지를 오른편에 내려놓고 다음 쪽지를 집었다.

두 번째.

내가 누구게?

강산이지 누구겠어. 너 말고 누가 있겠냐?

앗차. 보자마자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딴지를 걸고 말았다. 이런다고 녀석한테 들리지도 않을 텐데. 근데 정말…어이가 없어서. 첫 쪽지와 다른 이유로 녀석의 머리통을 까보고 싶어졌다. 무슨 의미인데, 이거.

세 번째.

과자는 어때? 맛있냐?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내가 좋아하는 걸로 골랐음

좋아하는 과자 있으면 적어놔

이 날의 녀석은 알고 있었을까, 유학 갈 때까지 단 한 번도 답장을 받을 수 없을 거란걸.

그런데 답장을 썼어도, 녀석이 원하는 답을 주진 못했을 거다. 과자, 당분 덩어리에 영양불균형 주범이라 별로 안 좋아하니까…. 그렇다고 다른 걸 받고 싶지도 않았을 테고. 결국 당일에 읽었어도 답장 주긴 어려웠을걸.

그나저나 이런 과자들을 좋아하는구나. 앞에 수북이 쌓인 과자들을 살펴봤다. 대체로 초코맛이었지만 전혀 달지 않은 과자도 몇 개 껴있었다. 이런 불량식품 먹고도 식단 조절이 되는 건가? 타고난 피지컬 덕분인가. 몰라도 되는 정보를 얻었다.

네 번째.

네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싫어하는 건 좀 알겠거든?

그거 말고 좋아하는걸 해주고 싶은데 뭘해주면 될지 모르겠다고

살짝 써주면 안되냐?

나만 볼께

내가 싫어하는 게 뭔데? 녀석의 답이 궁금해졌다. 근 두 달간 주위를 맴돌면서 얻은 데이터가 무엇일지, 녀석의 눈에 비친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이 편지에도 답장은 없었다. 녀석이, 내가 좋아하는 걸 결국 자력으로 알아냈을까.

내가 좋아하는 게 뭐가 있지?

이때도 당시에 봤어도 답장을 못 썼을 것 같다. 떠오르는 게 없다. 좋아하는 거…. 좋아하는 것.……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가 않다.

편지는 2주차로 넘어갔다. 아홉 통이 남았다. 녀석답지 않게 꿋꿋하게 답장도 없는 편지를 오랫동안 썼다. 정말로, 내가 아는 강산답지 않게도.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나. 내 판단이 잘못됐을까…. 하는 물음은 다음 쪽지를 집어 들자마자 와장창 깨졌다.

다섯 번째.

야, 읽고 있냐?

어떻게 알았지?

…라고 하기엔, 답장 써달라는 편지를 두 번이나 무시했으니까 알 만했지만. 그런데도 계속 썼네, 안 읽는 거 알면서도. 좀 더 미안해지는데…. 뒷내용이 걱정된다. 이 뒤에 무슨 얘기를 써놨을지….

이미 엎지른 물이다. 다섯 번째 쪽지를 읽은 쪽지들 위에 쌓고 왼손으로 다음 쪽지를 들었다.

여섯 번째.

내가 고민해봤는데 너, 아무래도 안읽는거 같아

과자만 빼먹고 편지는 버리는 거 아니지??

너무하는 거 아니냐??

진짜 안읽어? 읽으면 답장 줘. ㅇ 하나만 써도 괜찮으니까!

미안한데 이 편지에도 답장 없었다.

일곱 번째.

안읽네.

이 킹갓엠퍼러강산님의 편지를. 이렇게 무시한다 이거지?

편지. 버리지만 마라.

나중에 내가 프로 데뷔하면 비싸게 팔릴 테니까….

얼마나 꾹꾹 눌러 썼는지 쪽지에 요철이 생겼다. 이 악물고 쪽지를 적는 녀석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 와중에 본인의 프로 데뷔에 대한 자신감이 엄청난걸…. 본받고 싶을 정도의 자기애다. 강산이 성공적으로 자기 아빠의 자리를 이어받는다면 영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긴 했다. 하지만 이걸 누구한테 팔라는 걸까. 강산 혼자만의 일기장이면 모를까 나까지 얽혀 있는 걸 팔 수 있겠냐고. 정말 아무렇게나 말하고 있잖아. 어이없어서 실소하고 만다. 어떻게 글씨로 된 문장이, 이렇게까지 사람 앞에 두고 필터 없이 하는 말 같은지. 정말로, 녀석다웠다.

여덟 번째 편지는 카드였다. 쪽지들과 별다를 게 없는 손바닥만 한 크기로, 빨간 종이봉투 안에 들어있었다. 풀칠이나 봉인이 없어 봉투를 열고 바로 꺼내자 여태까지보다 훨씬 날림 글씨인 본문이 눈에 들어왔다.

여덟 번째.

안 읽는다고 생각하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 할란다

이건 네 탓이야 주신이

(뒷장)

뒷면을 보라는 얘길까? 나는 별생각 없이 카드를 뒤집었다. 앞장보다 훨씬 진지해진 투의 문장들이 그곳에 있었다. 눈에 담자마자 내가 뭘 읽은 거지? 의심하며 짧은 세 줄의 문장을 되풀이해 읽었다.

나는 네가 테니스를 계속 하면 좋겠다.

너랑 시합해보고싶다.

진심이야.

강산이, 나랑 테니스 시합을 하고 싶다고.

내가, 테니스를 계속 쳤으면 좋겠다고.

어떻게?

분노가 일었다. 자각하지 못한 새에 들불처럼 화르륵, 목구멍을 치고 올라온 화를 입 밖으로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다물고 카드를 노려봤다. 눈을 내리깔고 연민하는 듯한 목소리로 뇌까리는 강산의 얼굴이 카드 위로 둥둥 떠 올랐다. 어떻게, 어떻게 감히 네가, 나한테! 아무것도 잃은 적 없이 내가 갖고 싶은 모든 걸 욕심 많은 두 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는 놈이, 어떻게 모든 걸 잃은 나한테! 네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해??

연민마저 온전히 나를 향한 게 아닐 거라는 확신이, 분노를 부채질했다. 그 대단하신 강산이 보시기에 내가 제법 재능이 있었나 보지? 아까워 보였나 보지? 무슨 이유로 취미반에 박혀있는진 알까? 궁금하긴 했을까? 어디서 부상 얘기를 주워들었다면 더더욱 불쾌했다. 녀석의 알량한 동정은 자기 마음만 달랠 수 있을 뿐이니까! 동정받는 나는 아무 변함 없는데도!

카드를 내동댕이치고 다음 편지를 집었다. 이번에는 A5 크기의 편지지였다. 한 장 가득 여태 봤던 글씨 중 제일 작은 크기로 꽉꽉 채워진.

아홉 번째.

네가 이 편지들을 읽고 있지 않길 바래

계속 그랬듯이 말야

편지인지 악담인지 분간할 수가 없는 도입부였다. 종이를 스탠드 불빛 아래에 바짝 갖다 대고 눈알에 힘을 준 채로 다음 줄을 읽었다.

어제 편지를 보내고 후회했다 네가 내 편지를 안 보는 것 같아서 욱해서 그렇게 썼어 지금 이 편지도 네가 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쓰고 있지만 어쩌면 네가 내 선물들을 받자마자 쓰레기통에 처넣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너한테 도착할 거라고 생각할께

미안하다. 어제 편지가 너한테 얼마나 상처를 줬을지 알아

퍽이나 알겠지.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오만한 새끼!

글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야.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고 싶다. 너만 괜찮다면 방법을 찾아봐도 될까? 주위에 부상을 극복한 선수분들이 있어. 수술과 재활 전문 병원을 소개받을 수 있어. 수술 비용은 재단을 연결해줄 수 있을 것 같아. 만약 안되더라도 개인적으로라도 돕고 싶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하지? 그건…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네가 이대로 꺾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해

네가 이 편지를 읽었으면 좋겠다 나를 실컷 욕해도 좋으니까 한번 생각 해주라.

머리가 띵했다. 왜…?

녀석과 나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녀석은 전학 오기 전까지 내 존재를 몰랐을 것이다. 녀석이 나를 좋아하면서 접점이 생겼지만, 녀석이 변덕을 부리면 언제든지 끝이 날 얄팍한 관계에 불과했다. 나와 공 한 번 주고받아 본 적 없는 녀석이 대체 무엇 때문에 나한테 이리 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시 읽어도, 온전히 호의만 느껴져서, 더더욱 이해 불가능했다.

왜……?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 떠다닐 뿐.

열 번째.

주신이. 너한테 고백할 게 있어.

무엇을?

네가 만약에 편지를 읽고 있다면 내 얘기를 의심할 것 같아서 고민했어

네가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없으면 못 믿을 것 같거든

내가 봐왔던 너라면 그럴 것 같았어 오해라면 미안한데 맞을 거 같음ㅋㅋ

사실 너한테 미안한데 네 예전 시합 영상을 찾아봤었다.

그걸 보고 네가 테니스를 계속 했으면 싶어졌어

코트 위의 네가 어쩌면 그때의 나보다도 더 빛나고 있었거든

네가 다시 빛나면 좋겠어

그러고 나랑 시합하자 어차피 나한테 지겠지만ㅋㅋ

몰래 찾아봐서 미안해

열한 번째.

마지막 쪽지였다. 남은 두 통은 편지.

열 번째 쪽지에서 사실 녀석의 고백이 다른 쪽일까 내심 겁먹었었으나 전혀 다른 고백이었다. 내 시합 영상을 찾아봤다고. 그런 게 있었나. 그리고, 그게 녀석이 이렇게까지 행동하도록 만들만 한 일이었나?

정보값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어지럽고 눈이 아파왔다. 제대로 사고할 수 없을 것 같아 황급히 다음 쪽지를 펼쳤다. 여유 없이, 허겁지겁.

사실 변심했다고, 괜한 말을 했다고 적혀 있으면 차라리 지금 내 맘이 편해질까. 첫 번째 쪽지를 처음부터 보지 않았더라면 나았을까. 그러나 이젠 무를 수가 없었다.

영상 제목은 <201O년 전국 주니어 선수권 대회 8강 OOO>이야

힘들겠지만 보면 좋겠다

주신이 네 상황을 잘 모르니까 내가 하는 말이 주제넘을지도 몰라

하지만 정말로 진심이야

혹시라도 생각이 있다면 010-OOOO-OOOO로 연락해줘

나는 아마 곧 미국으로 갈 것 같아

그래도 저 번호로 연락줘

꼭 받을께

바랐던 반전 없이 일관적이었다. 나는 멍하니 종이를 내려다봤다. 눈이, 아팠다. 안약을 넣은 것처럼 시큰거려서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럽다. 내가 무시했던 녀석이 내 생각을 이렇게나 하고 있었다는 게 이해되지 않고, 두 통에 걸쳐서 이유랍시고 떠드는 말을 들었지만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은 자기와 관련 없는 사람한테 이렇게까지 심력을 쓰지 않아. 가족이어도 본인이 최우선 순위에 있으니 상처 주는 줄 알면서도 할퀴게 되곤 한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도 털어놓을 수 없는 말들이 많다. 그런데 녀석은 왜, 자기 심경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는지, 그것도 타인인 나를 위한 일을 하기 위해.

어느새 자정에 가까웠다. 엄마도 방으로 들어가셨는지 집 전체가 어둡고 고요한 한밤중. 나는 열두 시가 지나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호박 마차 마냥 녀석의 쪽지를 하염없이 쳐다만 보았다. 강산이 자기 말을 다 지킬 수 있을까? 수술하고 재활하면 내가 다시 코트에 설 수 있을까? 테니스 선수가 되고 싶다고 엄마를 제대로 설득할 수 있을까? 갑자기 하늘에서 찬란한 별이 내 앞에 뚝 떨어져, 소원을 이뤄주겠다고 선언한 것 같았다. 믿기지 않고, 믿고 싶고, 믿음이 배반당하면 받을 타격이 두렵다.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지만 그래서 더더욱 이뤄지지 않았을 경우가 무섭다.

내가 좋아하는 건, 테니스.

강산의 말대로, 테니스.

테니스를 치고 싶다.

떳떳하게 코트에 서고 싶다.

내 잘못과 가책에도 불구하고 계속, 테니스를 치고 싶어.

뻔뻔하게도.

한숨이 얼굴 앞에서 뭉친다. 잠잠히 배어드는 물기를 토해내고 봉투를 붙잡았다.

나는, 나는 모르겠어. 내가, 그래도 될까?

감히, 내가, 너의 호의에 기생해도 될까?

열두 번째.

편지는, 온몸으로 그래도 된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야. 내가 너를 좋아하나봐.

그걸 이제 알았어? 아. 울다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댔는데.

아니, 그럼 얘는 자기 감정도 모르면서 그렇게 굴었던 거야? 나는 최소한 과자 주기 시작할 때쯤엔 자각한 줄 알았지!

왜 몰랐지? 너는 언제부터 알았어? 내가 얼마나 한심했을지 모르겠다. 내가 너를 좋아했구나. 이제 알겠어. 왜 네가 계속 신경쓰였는지 왜 네 기운 없는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알겠어. 내가 너를 좋아해서. 그래서 그랬어! 아, 얼마나 바보 같은지 모르겠다고! 왜 몰랐지? 주림고에 오고 맨날 네 생각만 했었는데. 어떻게 이걸 몰랐지?

주신이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아니, 대답하지 마. 나중에 OK할 때 얘기해줘. 아니면 안들을래.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을까? 그럼 너무 쪽팔릴 것 같은데. 나 미국 가고나서 봤으면 좋겠다

실제로는 녀석과 대화 한 마디 나눠본 적 없는데, 빨개진 얼굴로 허둥대면서 말을 와다다 쏟아내는 녀석이 바로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목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란 이렇게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구나.

근데 너한테 얘기했던건 이거랑 따로야! 내가 널 좋아한다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런 얘기를 하진 않아. 영상 봤어? 안 봤으면 보고와주라. 그럼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거야.

봤어? 보고왔어? 귀찮다고 넘기지 말고 보고와! 꼭봐라!!! 201O년 전국 주니어 선수권 대회 8강 OOO이야! 유튜브에 있어!

녀석의 말대로 귀찮았다. 그래서 쪽지에 언급됐을 때도 그냥 넘겼는데 여기서 한 번 더 나올 줄은.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봐야겠지. 201O년이면…4강에서 탈락했던 대회네. 사고 한 해 전의.

주변이 어두워 핸드폰 화면 밝기를 줄이고 유튜브를 켰다. 얘기해준 대로 검색하자 똑같은 제목의 영상이 떴다. 조회수 몇십이 채 안 되는 아마추어 영상이었다. 썸네일을 보자 묻어뒀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시합, 재밌었지.

뭐든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시기가 있었다…나에게도. 이때도 그랬었다. 아깝게 4강에서 탈락해서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다음 대회에서는 금메달, 아니면 은메달이라도 따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던 때가 있었다. 그 바로 다음 대회에서 사고를 당해 몇 년간 라켓을 아예 쥐지 못하게 될 줄도 모르고.

음소거된 영상이 소리 없이 시작됐다. 핸드폰 카메라일까? 손떨림 보정 기능이 없는지 화면이 자잘하게 흔들리다 수십 초가 지나서야 고정됐다. 맞은편 코트에 선 상대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나는 가끔씩 폴짝 뛰어오를 때나 네트 앞으로 뛰쳐나올 때 뒷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지금 보니 많이 미숙했다. 다룰 수 있는 구종의 가짓수도 적었고 컨트롤도 훨씬 떨어진다. 지금이라면 오른손으로도 저것보다 훨씬 라인에 가깝게 떨어뜨릴 수 있는데. 하지만 순간 판단은 그럭저럭 맘에 든다. 그때의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어느 정도는 한 것 같아서. 적은 경험과 모자란 피지컬로도 열심히 했구나. 물론 만약에…지금의 내가 저 코트 위에 설 수 있다면 훨씬 효율적인 전략을 쓸 테지만 저 때의 나는 확실히 경험도 가용 전략도 부족한 점이 많았으니까. 100점 만점이라면 40점 정도 될까.

강산이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게 뭘까. 코트 복귀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고 싶었을까? 그런 거라면 필요 없는데. 나는 항상……다친 이후로 줄곧…다시 코트에 서고 싶었으니까. 내가 다시 설 수 없는 코트 위에 우뚝 선 다른 선수들의 시합을 매일매일 보면서, 사실은 매일,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던 삶을 상상했으니까. 만약에, 만약에 아빠가 나 때문에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내가 그 시합에서 손목을 다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강산은 그 불행한 만약들에 한 가지 가정을 더 얹고 있다. 강산, 너는 정말로 내가 코트로 복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화면 속의 코트가 바뀐다. 코트를 가로지르는 상대와 나. 카메라에 잘 보이는 코트에 선 어린 내가 뒤로 돈다. 라켓을 고쳐 잡으며 자세를 낮추는 열세 살의 주신이. 상대를 화면에 담기 위해 카메라의 초점이 약간 내려가기 직전, 내가 위를 쳐다본다. 그때의 내 얼굴이 화면에 제대로 잡혔다.

환하게, 더없이 환하게 웃고 있는 표정.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고 그저 이 시합 자체가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웃는 나.

아, 나는….

즐거웠지. 재밌었지. 모든 게 새롭게 행복하고,

좋았지.

너는 이때의 나에게 반했구나.

그리고 아직도 내게서 이때의 나를 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구나.

나는 단 한 번도 꿈꿔본 적 없는 미래 시제의 가정을, 네가 하고 있구나.

영상을 끝까지 볼 수 없었다. 혹여라도 소리가 엄마의 수면을 방해할까, 옷을 쥐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수도꼭지 밸브를 끝까지 풀어버린 것처럼 눈물이 쏟아져 내려서, 그래서 더 볼 수가 없었다.

뱃속이 화해질 정도로 수분을 토해낸 후에야 눈앞의 물로 된 장막이 걷혀서 다시 녀석의 편지를 집어 들었으나 절반 이상이 내 눈물에 젖어 버려서 죄다 번져 있었다. 그래도 맥락은 읽을 수 있었다. 영상 속의 내가 얼마나 빛나고 있는지에 대한 묘사와 내가 가진 재능이라면 세계 무대에서도 통할 거라는 허풍 섞인 호언장담. 나보다 더 나에 대해 확신하는 어조.

녀석의 생각은 머리통이 열려있는 것처럼 훤히 들여다보여서, 이 모든 말들이 진심이라는 게 너무나 자명해서, 나마저도 이 얼토당토않은 말들을 믿고 싶어진다. 산적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누구보다 철옹성 같이 나를 보호하는 엄마를 설득해야 하고, 재단의 후원 대상자로 선정되어야 하고, 수술이 잘 끝나야 하고, 재활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야 하며, 이 모든 일들이 지난 후에도 내 재능과 의욕이 여전히 프로 무대에서도 통할 만큼 빛이 나야 한다. 누구보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어야만 어쩌면 올 수도 있는 미래.

나는 더 이상의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안주하면 현상 유지는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만약 희박한 가능성을 택한다면, 강산, 나를 좋아하는 그 녀석이, 그 모든 시간 동안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직감.

나는 녀석의 열세 번째 편지를 꺼낸다. 동시에 녀석의 대화 더미에서 열한 번째 쪽지를 찾으며.

당장 내일의 내가 오늘을 후회하게 될까?

몇 년 후의 나는?

하지만, 그런데도, 나는, 너의 호의에 기대보고 싶어서.

End.


후기.

이 후기를 보고 계신다는 것은 제가 무사히 마감을 끝냈다는 이야기겠지요…. 하. 이 문장. 정말정말 써보고 싶었어요. 이것은 초고를 쓴 직후 쓰는 후기입니다. 고칠 곳이 잔뜩 있어요(특히 결말 부분은 많이 다듬어야할 것 같아요). 진정한 의미의 마감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어쨌든! 완성을! 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겠습니다.

30p 잡고 시작했던 글이 66p가 됐어요…. 미친 듯한 분량조절실패. 흐아앙. 저는 팔지도 못할 책을 왜 이렇게 열심히 썼을까요…. 왜겠어요 그만큼 사랑했으니까……. 이제 다른 회지 작업하러 또 가야 해요. 진짜 미친 것 같아요……. 하지만 사랑하는 본진 회지를 실물로 받아볼 수 있다니 감격스럽습니다T.T 마치 연성러 자아와 소비러 자아가 분리된 것 같네요…. 그치만 이런 정신 상태가 아니면 마이너 덕질 할 수 없는걸-!

지금 약간 후련하고…퇴고 어떻게 하지 싶어서 부담스러워요. 좀 묵힌 다음에 봐야하니까…남은 후기는 퇴고 후에 이어 쓰겠습니다. 며칠 후의 나, 파이팅!

며칠 후의 나 파이팅은 무슨…. 거의 윤문만 했습니다. 지금 이 후기는 마감 당일 아침에 작성되고 있으며…. 생각보다 편집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후기는 회사에서 작성되고 있으며 마감 2시간 10분 전. 진짜 답없네요~~ㅋㅋㅋ

조금만 더하면 당일출력할 판이라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쓰면서 정말 괴로웠지만 완성하고 나니까 정말 뿌듯하고…왠지 옛날에 냈던 회지와 같은 형식으로 분량만 2배가 된 것 같은 기분이지만, 이렇게 한 번 해냈으니 다음 책은 좀더 길게! 플롯에 신경 써서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일단 본진 최애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는 점이 너무 좋습니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건 정말…멋진 일이에요.

즐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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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페어
#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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