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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개조 소재 주의

August8ight by Ros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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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뇌과학 연구소'

이름만 들어도 지루하기 짝이없는 건물.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무가 빽빽한 숲 한가운데에는 이게 연구소인지 폐건물인지 알 수 없는 낡은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나마 덜 녹이 슨 철문은 굳건하게 닫혀있으나, 제법 손때가 탄 것으로 보아 아예 폐건문을 아닌 듯 싶었다. 육중한 철문을 열면 끼이익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숲을 울렸다.

내부로 들어서면, 건물의 외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현대식 보안도어가 하나 더 있고, 보안도어 안쪽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밑층까지 내려가면, 한쪽 벽면이 통유리로 되어있는 방이 있었다. 무언가 관찰하기 위한 방인듯한 그곳은, 흰 벽지에 흰색 침대 시트, 베개, 이불···, 따로따로 보면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물건들이 한데 모여있어 정신병원이 따로없어 보였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정신이 나가고도 남을 방에서 여유롭게 독서를 하는 남자가 있었다. 여유롭다기 보다는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 남자였다.

많아봤자 스물남짓 되어보이는 남자는 책을 잔뜩 쌓아놓고 읽고 있었다. 그 분야는 물리에서부터 화학, 생명까지 다양했다. 그는 그저 정보습득이 목적인냥 아무 감흥도 없이 눈동자만 도록도록 굴리고 있었다. 정적만이 가득한 방에는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백발의 머리가 부스스하게 내려앉은 모습이 꼭 방금 일어난 사람 같았다. 한참을 책에만 몰두하던 남자가 드디어 책을 다 읽었는지 책을 덮었다. 부스스한 머리를 한번 흔들고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얼핏 보이는 그의 귀에는 이어커프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냥 '실험체 P-205', 또는 그냥 P라고 불릴 뿐이었다.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 몇 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아주 어릴 적부터 연구소에서 살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태어나자마자 연구소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어릴 적부터 연구소에서 살아온 P는 그간 온갖 실험을 다 당했다. 겨우 옹알이를 하던 나이부터 뉴런을 마비시키는 주사를 맞았고, 감각이 무뎌졌을 때쯤 감정 관련 호르몬을 제어하는 칩을 뒷덜미 즈음에 심었다. 그리고 조금 더 커서 자아가 뚜렷해질 무렵에는 행동과 생각을 제어하는 칩을 뇌에 직접적으로 이식했다.

몇년에 걸쳐 천천히 뉴런이 마비된 P는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모든 감각을 차단시킨 후에는, 통각 외의 감각을 다시 살려내는 훈련을 받았다. P는 혼란이 오는 감각에 하루에도 몇번이나 헛구역질을 했다. 감각이 살아났다 죽었다 하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그 결과, P는 다시 모든 감각을 되살렸고, 오로지 통각만은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P는 타고난 성정이 감수성이 풍부하고 눈물이 많은 편이었으나, 호르몬 제어 칩을 이식한 이후에는 더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기쁨도, 분노도,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사람인 것처럼.

통각도 느끼지 못하고, 두려움 따위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P는 말짱하게 깨어있는 상태에서 머리를 열고 칩을 이식했다. 그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에, 연구원들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뇌 수술을 마친 후에는 귀 뒤에 이어커프 모양 수신기를 이식했다. 수술이 모두 끝나자 P는 무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향했다.

◇ 감각 제어 상태 양호, 호르몬 제어 상태 양호, 심박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심박수 측정을 시작합니다. ··· 심박수 측정 완료. 심박수 정상.

P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잠깐 주변을 살피다가 곧이어 아까 이식한 칩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도 칩이 뇌를 속여 듣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 것이었다. P는 이런 놀라운 사실마저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수긍했다. 이로써 P는 통각과 감정, 자유의지를 모두 잃게 되었다.

P가 가장 먼저 받은 명령은 독서였다. 이런 저런 실험을 다 하더니 시키는게 고작 독서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연구원들도 생각은 있었다. 큰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단계부터 충분히 공을 들여야했다.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된 연구소의 가장 밑바닥에서 자란 P는 모든 지식을 독서를 통해 습득해야만 했다. 하루 할당량은 10권 내외로, 하루종일 방에 틀어박혀있는 신세인 P에게 완독이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P가 책 10권을 반나절만에 다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다른 훈련이 시작되었다. 근접 전투에 쓰이는 전투술부터 사격술, 저격술 등 완전한 인간병기가 되기 위한 훈련이었다. 뇌에 이식된 칩에 수신된 신호로 몸을 제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훈련이든 곧잘 해내었다. 훈련을 받을 때면 P는 항상 지루한 표정을 짓곤 했는데, 그는 사실 지루함따위 느낄 수조차 없었지만, 그냥 연구원들한테 보내는 상징적인 의미였다.

"안녕?"

여느 때처럼 제 방에서 훈련을 기다리던 P는, 갑자기 방에 들어선 낯선 인물을 보고 경계태세를 갖췄다. 처음 보는 사람이기야 했지만, 그래봤자 연구원이나 훈련관일게 뻔한데도 P는 몸에 익은대로 블레이드 나이프를 쥐었다.

"내 이름은 이동혁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스스로를 동혁이라고 밝힌 남자는 P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흰 가운을 걸치지 않은걸 보면 연구원은 아닌듯 했는데, 그렇다고 훈련관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P는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동혁을 경계하며 나이프를 내렸다. 악수를 하며 맞잡은 동혁의 손은, 온갖 훈련을 거치면서 굳은살이 잔뜩 생긴 제 손과는 다르게 곧고 단정했다. 그렇다면 훈련관도 아닐텐데, 당신은 누구일까? P는 여전히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

"너무 경계하지마. 이제 나랑 자주 만날 거니까."

동혁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P의 표정은 묘했다. 모든 감정을 통제 당하며 살아온지가 벌써 몇년째였다. 그러니 지금 속에서 들끓는 이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가지 알 수 있는건, 동혁과 만남으로써 제 안에서 어떠한 화학 반응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안녕?"

오늘도 역시나 제 방을 찾아온 동혁을 보며 P는 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요며칠동안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P의 방을 찾아오는 동혁은, 이게 뭐하자는 건가 싶을 정도로 시덥잖은 일을 하고, 시간이 되면 돌아갔다. 첫날에는 줄자를 가지고 와서 키나 손크기 따위를 재보며 시간을 보내더니, 다음날에는 과자와 만화책을 가지고 왔고, 그 다음날에는 오래된 mp3 플레이어를 들고와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끼고 음악을 들었다. 원래라면 하루에 할당된 책을 읽었어야 할 시간을, P는 동혁과 함께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는 일들을 하며 보냈다.

"밖에 꽃이 많이 폈더라. 이건 장미라는 꽃인데, 알아?"

"장미목 장미과 장미속에 속하는 관목 식물. 높이는 2~3m이며, 잎은 깃모양으로 어긋나게 자라고, 줄기에 가시가 있는 것이 특징."

"응, 맞아. 향기 한번 맡아볼래?"

P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얼굴 가까이 들이밀어진 장미의 향을 맡았다. 하루에 두번, 아침저녁으로 소독을 하며 완전멸균 상태로 유지되는 제 작은 공간에서는 맡아본적 없는 향긋하고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언젠가 한 연구원이 비슷한 향을 풍기는걸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게 장미였구나. 진짜 장미향은 향수냄새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달콤했다. P는 왠지 입안이 썼다.

"..당신은 왜 나한테 이런걸 알려주는 거예요?"

"앞으로 이 방을 나가게 될 거잖아. 그때를 위한 연습이야."

내가? 이 방을 나가게 된다고? P는 순간 동혁을 처음 봤을 때처럼 가슴속에서 무언가 들끓는 것만 같았다. 괜히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기분 따위 느낄리 없지만 이 감각은 상당히 기분 나쁜 것 같았다. 무언가 토해내고 싶은.. 이 감각. 나는 무엇을 토해내고 싶은 걸까. P는 공허한 눈으로 동혁을 바라봤다.

"너 그림은 잘 못그리는구나?"

오늘은 동혁이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가져왔다. 바닥에 배 깔고 누워 그림을 조금 그렸다. P는 그런 행동을 처음 해보는지라 먼저 엎드린 동혁을 따라 어색하게 바닥에 엎드렸다. 깨작깨작 그림을 그려대던 동혁이 P의 스케치북을 보고는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P는 손을 멈칫하다가 다시 그림을 이어 그렸다. 작은 낙서들이 스케치북 구석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혼자 한참을 깔깔 웃어대던 동혁이 이제 다 웃었는지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P는 언제나 그랬듯 실없는 소리를 하겠거니 생각하며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고 있었다.

"지성이 어때?"

뭔 소리야. P는 칩이 박힌 뇌로도 이해 못할 말에, 그제야 동혁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동혁은 활짝 웃어보였다.

"이름 말이야. 계속 P라고 부르긴 좀 그렇잖아. 그래서 내가 생각해봤는데, 지성이 어때?"

P가 작게 지성이라는 이름을 곱씹었다. 이름. 내 이름. 동혁은 마치 칭찬해달라는 어린아이마냥 눈을 빛내며 P를 바라보고 있었다. P는 그런 동혁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었으나, 동혁은 만족스럽다는듯 웃어보였다. 그 모습에 지성은 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성아"

동혁은 지성의 이름을 부르는걸 좋아했다. 시덥잖은 소리야 언제나 곧잘 하곤 했는데, 이름 부르는건 더했다. 딱히 용건이 없어도 그 이름을 내뱉었다. 제가 지어준 이름이라 그런 건지, 지성의 이름이라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성이도 원래라면 무시했을 동혁의 말을 이제 나름 들어주는 척은 했다. 서두가 제 이름이라 그런 건지, 이제 동혁에게 마음을 좀 연 건지는 잘 모르는 일이었다. 스스로조차도 말이다.

"..형은 연구원이야?"

어느덧 '당신'이라는 호칭이 사라지고, '형'이라는 호칭이 익숙해졌을 무렵, 지성은 여느때처럼 제 옆에 앉아서 슬라임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동혁에게 물었다. 맨처음 봤을 때부터 들었던 의문. 당신은 누구인가? 그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다. 다른 연구원들처럼 저를 관찰하는 것 같지도, 실험하는 것 같지도 않은 그는 연구원인가? 다른 훈련관처럼 저를 훈련시키는 것 같지 않은 그는 훈련관인가? 지성의 눈이 동혁을 곧게 담았다.

"..연구원은 아니야."

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믿을게. 지성의 말에 동혁의 표정이 묘했다.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지성은 그게 무슨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성은 더이상 캐물을 생각이 없었다.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이건 아무생각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었다. 이건 지성은 뇌에 칩을 이식한 이후, 처음으로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을 내린 것이었고, 이때 칩에는 약간의 오류가 생겨났다. 이건 지성은 모르는 얘기.

"..오늘은 좀 늦네."

벽에 걸린 시계는 11시를 조금 넘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언제나 9시, 늦어도 10시면 제 방을 찾았던 동혁이 이 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은게 지성은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9시 30분쯤 되었을때 손에 들었던 책은 여전히 펼쳤던 그 페이지에 머물러 있었다. 틱,톡,틱,톡, 지독하게도 조용한 방안에는 시계 초침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시계만 흘깃흘깃 바라보던 지성은 책을 덮었다. 말도 안돼.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이 거칠었다.

"미안미안. 내가 좀 늦었지?"

지성은 그 순간에 벌컥 열리는 문을 보고, 속이 좀 울렁거렸다. 동혁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방에 들어서 지성의 곁에 앉았다. 지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동혁은 그런 지성을 보면서 삐쳤냐며 장난스런 질문을 던지다가, 영 상태가 안좋은 얼굴에 표정을 굳혔다.

"지성아, 왜 그래."

동혁의 손이 지성의 이마에 닿는 순간.

◇ 이상 심박수 감지. 시스템을 재부팅 합니다.

지성은 그대로 쓰러졌다.

삐—, 삐—, 삐—, 삐—, 단조로운 기계음이 작게 들려오고, 지성은 스륵 눈을 떴다. 익숙하고도 조금 낯선 자신의 방. 어둡게 조명이 내려간 걸로 보면 소등 시간이 지난 후였다. 지성이 몸을 일으키자, 머리에 붙어있던 전극 패드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툭툭 패드를 떼어내고 보니, 옆에는 동혁이 간이 침대에 웅크린채 자고 있었다. 지성은 자고 있는 동혁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하.."

"으음.. 지성아..?"

지성의 한숨 소리에 동혁이 부스스하게 눈을 뗬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꿈뻑꿈뻑 잠을 깨는 모습이 퍽 귀엽게 느껴져서, 지성은 제 뺨을 세게 쳤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동혁은 일어나자마자 스스로 뺨을 내리치는 지성을 보고 화들짝 놀라 손을 막았다.

"왜, 왜 그래? 그러지마."

지성은 동혁의 손이 닿은 부위가 너무 따뜻해서 손을 뿌리쳤다. 동혁은 조금 당황스러운듯 하다가, 혼란스러워 보이는 지성을 보고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맞췄다.

"지성아, 네가 얘기해주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소등을 하면 빛 한줄기 없던 방에, 오늘은 은은한 조명이 내려앉아 동혁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던 방에 잡다한 물건들이 들어찬 것도, 흰색뿐이던 방에 노란색 조명이 빛나고 있는 것도, 항상 혼자이던 방에 누군가와 함께 밤을 보내는 것도, 지성에게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무언가 들끓고 있었다. 이걸 뱉어내야해. 지성은 꾹 다물려있던 입을 열었다.

".. 내가.. 형을.. 좋아하나봐.."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던 무언가를 억지로 끄집어내어 뱉어냈다. 지성은 이제야 조금 후련한 것만 같았다. 지성의 말에, 동혁은 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성은 그런 동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톡톡톡 손가락을 까딱이는게 눈에 들어왔다. 아, 뭔가 생각할때 나오는 버릇이다. 지성은 동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답을 뱉을지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걸 이미 알고 있었다.

"지성아, 내 얼굴 좀 봐줘."

동혁은 한참을 생각하다 입을 뗐다. 지성은 그의 말에 내렸던 시선을 올려 그와 눈을 맞췄다. 노란색 은은한 조명 때문일까, 동혁의 시선이 따듯하게만 보였다.


"우리 도망가자. 나랑 같이 도망가서 둘이서만 행복하게 살자."

동혁이 지성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며 말했다. 이에 지성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칩이 이상 심박수로 감지하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확실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나도 너를 좋아해."

이것이 희망일까. 지성은 생각했다.

오늘은 새로운 데이터를 업데이트 하는 날이었다. 뇌에 박혀있는 칩에는 앞으로 지성이 상대하게 될 주요 인물들과, 결코 해를 가해서는 안되는 인물들의 정보가 주기적으로 업데이트 되었다. 특히나 오늘은 실전에 투입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데이터를 점검하는 날이었다. 익숙하게 데이터룸에 들어선 지성은 데이터 전송장치의 의자에 몸을 앉혔다. 생소한 데이터가 뇌에 직접적으로 들어오는 느낌은 속이 울렁거릴만큼 이질적이었으나, 벌써 몇번이나 겪어본 지성은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여러 사람들의 인적사항과 사진이 주르륵 지나가며 안정적으로 뇌에 담겼는데, 그린 리스트에 새로 추가된 한명이 지성의 심기를 건드렸다. 연구 총팀장 Peter Lee. 이름은 처음 보는게 맞았으나, 사진은 그러지 못했다. 왜, 동혁이 형이 여기에, 이런 이름으로 있는 거야? 지성은 가슴이 답답했다. 목구멍 가득히 모래가 낀듯 텁텁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이질적인 무언가 느껴졌다.

쾅, 문이 다소 거칠게 열렸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면, 동혁이 약간 흐트러진 모습으로 서있었다. 지성은 제 뇌로 흘러들어온 이 데이터가 진짜인지 그에게 묻고 싶었으나,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다. 매번 입고 오던 검은색 폴라티 위로 걸친 흰색 가운에 똑똑히 쓰여있는 이름을 봐버렸기 때문이었다.

"날 속였구나.."

지성은 왜인지 가슴이 아려왔다. 답답하기만 했던 가슴은 이제 명백히 아린 느낌을 주고있었다. 분명 아무런 감정도, 고통도 느낄 수 없을텐데, 이상하게도 그런 것만 같았다. 괜히 가슴을 움켜쥐었다.

"..내 말 좀 들어봐."

"다가오지마! 더이상.. 나한테 가까워지지마.."

동혁이 다가오려 하자, 지성은 품에서 블레이드 나이프를 꺼내 꽉 쥐었다. 이미 뇌로 들어온 데이터에 따라, 동혁을 공격할 수는 없을테지만 그저 위협용이었다. 동혁 역시 지성이 저를 공격할 수 없음을 알았지만, 그에게 쉽사리 다가갈 수가 없었다. 혹여라도 자극하면 그가 어떤 행동을 보일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발.. 내 말 한번만 들어줘.. 지성아, 제발.."

"그렇게 부르지마!!"

악을 쓰며 고함을 질렀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건, 이건 무슨 감정이야? 그동안 멈춰있던 감정의 물살이 급하게 소용돌이쳤다. 도저히 감당 못할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오랜만에 눈가에 차오른 눈물이 뜨거웠다.

"당신 말이 맞았어. 연구원은 아니었네. 직접 참여해가며 공들인 실험인데 아쉽겠어."

"....."

"차라리.. 당신을 만나기 전이 나았어.. 아무것도 모르던 때가 나았다고.."

"지성아.."

"이젠.. 아무도 못믿겠어."

뒷덜미 즈음이 화끈거렸다. 과도하게 분비되는 호르몬을 칩이 제어하지 못하고 과부하가 걸리고 있었다. 피부가 녹아내릴 것만 같은 열감에 두 눈마저 충혈되고, 붉은 눈물이 주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성은 제 손으로 뒷덜미에 칼날을 집어넣어 칩을 꺼냈다. 약간 힘을 주자 파직, 부서져버린 칩을 손에서 털어냈다. 이 약해빠진 칩 하나 때문에..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 호르몬 제어 칩 신호 없음. 호르몬 제어 불가.

지성은 피가 줄줄 새어나오는 뒷덜미의 상처를 대충 손으로 지혈하며, 동혁을 지나쳐 데이터룸을 나갔다. 동혁은 차마 지성을 붙잡을 수 없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오랫동안 막혀있던 눈물샘에서 눈물이 터져나왔다. 아무리 닦아내도 하염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에, 지성은 다 포기하듯 손을 내렸다.

"멈춰라! 두 손 들고 투항해!"

저를 향해 총구를 들이밀며 다가오는 무장 요원들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몇명쯤 될지 가늠도 안될만큼 많은 인원이 저 하나만을 죽이기 위해 모여든 꼬라지가 우스웠다. 지성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허벅지 즈음에 넣어둔 총을 꺼내어 가장 앞에 있는 요원에게 발사했다. 이마에 총알이 관통하고, 그가 그 자리에 쓰러지자 지성은 반대방향으로 달렸다. 요원들은 총을 쏘며 지성을 쫓았다. 절대,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연구소 내부 구조를 해킹한 지성은 무기고를 찾아 들어섰다. 최첨단 장비가 줄지어 진열된 방에서, 지성은 꼼꼼하게 무기들을 챙겼다. 그리고 방을 나서려던 순간, 문을 열고 들어선 동혁을 보고 지성이 총구를 겨눴다.

"여기 있는건 어떻게 알았어."

"..수신기에 위치 추적 장치가 내장되어 있어."

그 말에 지성은 피부에 이식된 이어커프형 수신기를 떼어냈다. 살점이 함께 떨어져나가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동혁은 제가 더 아픈 표정을 지으며 지성을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내가 뭘 했는데. 아직 시작도 안했어."

동혁이 서서히 지성에게 다가섰다. 수신기를 떼어냈다고 해도 이미 데이터는 칩에 저장되었기 때문에, 지성은 그에게 해를 가할 수 없었다. 손에 힘을 너무 준 탓에 부들부들 떨려왔다. 동혁이 지성의 앞에 섰다. 그리고는 총을 쥔 손을 감쌌다. 따듯한 손길이 이젠 너무 익숙해서 지성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처음엔 나도 총팀장으로서 너를 관찰하기 위해 투입된게 맞아. 하지만 너와 함께 지내면서 연구보다는 너라는 사람이 궁금해졌어. 너에게 보냈던 호감과 관심, 사랑.. 다 진심이었어. 진짜야.. 믿어줘."

"..하, 이제와서 그걸 믿으라고?"

"..못믿겠다는 것도 이해는 가.. 하지만 지금 너무 위험한 상황이잖아. 이번 한번만 나를 믿어주면 안될까.. 나랑 도망가서 네가 안전해지면.. 네가 원하는대로 할게."

동혁의 말에, 지성은 총을 든 손의 힘을 풀었다. 아직까지는 그의 진심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으로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동안 쌓아왔던 유대감이나 신뢰가 모두 거짓이 아니기를 바라며. 지성의 반응에 동혁은 제가 입고있던 흰 가운을 벗어던지고는 무기를 챙겼다. 지성은 매번 꽃이나 색연필 따위를 들던 동혁의 손에 총기가 들려있는 모습이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었다.

무기고를 나온 둘은, 동혁이 앞장서서 비상탈출구를 향해 달렸다. 가는 동안 마주친 모든 사람은 동혁이 직접 처리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총을 쏘는 모습이 아주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을 봐도, 그를 믿을 수 없다는 점이 지성을 조금 슬프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호르몬 제어 칩을 파괴한게 사람을 감정적으로 만드는 모양이었다.

쾅! 건물 벽이 부서져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제는 제법 인원이 줄어든 요원들이 동혁의 앞을 막아섰다. 동혁과 지성은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총알이 파삭파삭 기둥을 깎아냈다. 더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언제 총알을 맞은건지 지성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동혁은 초조한지 손톱을 뜯다가, 요원들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쏘지마!! 이건 명령이야."

"총팀장님, 비키십시오. 저희는 연구소장님의 지시를 우선적으로 따를 뿐입니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 비키십시오."

동혁은 제 뒤에 있는 지성을 잠깐 바라봤다. 총알이 스친 왼팔에서는 생각보다 많은 양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지혈을 하고 있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내가 이 많은 인원을 해치우는건 무리야.. 동혁 역시 날아오는 총알을 미처 피하지 못해 몸이 만신창이였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 시야를 방해했다. 대충 손등으로 피를 닦아내고는 총을 고쳐쥐었다.

"지성이를 데려가고 싶으면, 나를 먼저 죽여야 할 거야."

동혁의 뒤편, 기둥에 숨어 상처를 지혈하고 있던 지성은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살할까요? 상황에 따라 사살해도 좋다는 지시가 있었다. 사격 허가. 짧은 대화가 끝나자마자 지성은 반사적으로 동혁의 옷을 잡아당겼다. 순간적으로 몸의 균형이 무너지며, 동혁이 뒤로 넘어갔다. 탕, 총성이 울리고 붉은 피가 사방을 적셨다. 지성은 제 눈앞에서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는 동혁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거친 숨을 뱉어낼 때마다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빠르게 혈색을 잃어가는 얼굴이 이상해보였다. 이제 더이상 나올 눈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다시 눈물이 툭 흘러내렸다. 한방울의 눈물이 떨어지자마자 지금 느껴지는 감정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강한 분노였다.

지성은 동혁의 손에서 총을 빼내었다.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은 손은 쉽사리 총을 빼앗겼다. 손끝이 미약하게 지성의 손을 제지했지만, 지성은 그 손을 그냥 툭 밀어냈다. 심장 가까이 맞은 총알은 바닥을 모두 적실만큼의 피를 뽑아내고 있었다. 빠르게 상처를 분석한 결과, 죽음에 이르는 치명상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이미 몸은 지쳐있었고, 이만한 피가 계속해서 흐른다면 생명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성은 근처에 떨어진 옷가지를 찢어 동혁의 상처를 꽉 조여 묶었다. 깨끗하진 않지만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는 동혁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바보같이.. 동혁을 기둥 뒤에 숨기고는 앞으로 나섰다. 분노가 극에 달했지만, 오히려 지성은 감정이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지성은 이제껏 익혀온 모든 기술들을 다 활용하여 연구소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기술을 가르친 사람들을, 그 기술로 죽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성은 가는 곳마다 연구 기기들을 파괴했고, 마주치는 사람들을 다 죽였다. 데이터 상, 해를 입힐 수 없는 사람들은 주변 지형을 이용해 적어도 행동불능 상태까지는 만들어놨다.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지성은 비릿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오늘 마지막으로 업데이트 된 데이터에 따르면, 적어도 팀장급은 되어야 그린 리스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니까 팀장 이하의 연구원들이나 저를 사살하기 위해 모인 요원들은 지성이 제 손으로 죽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뼈빠지게 구르면서 일한건 오히려 말단일텐데, 이런 상황에서는 버려진 모양새가 꼭 자기랑 닮은 것 같아서 그들은 최대한 고통없이 보내줬다. 나름의 배려였다.

"이 발칙한 쥐새끼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성이 의무실에서 소독약과 붕대 따위를 챙겨 다시 동혁에게 돌아갔을 때는, 그의 곁에 누군가 함께 있었다. 정예 요원들이 엄호하고 있는 그 인물은 다름아닌 연구소장이었다. 그린 리스트의 최상단에 올려진 인물. 지성은 들고있던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는 총구를 연구소장에게 겨눴다.

"내가 죽더라도 총 한발은 쏘고 죽을 수 있겠지. 형을 놓아줘."

지성의 말에 연구소장은 호쾌하게 웃어보였다. 이에 지성은 인상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봤다.

"글쎄, 네가 다시 말 잘 듣는 쥐새끼가 된다면 살려주도록 하지."

"지,성아.. 안 돼.. 도망쳐.. 윽..!"

연구소장은 쯧, 혀를 차더니 동혁의 상처를 꾹 눌렀다. 감아놓은 옷이 피로 젖어갔다.

"..당신 아들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하하, 그런 말이 네 입에서 나오니 우습군. 갓난쟁이였던 너를 이런 연구소에 버리고 간 너희 부모같은 사람도 있는데, 나라고 부성애를 느껴야 하나?"

연구소장은 말에, 지성은 뒷골이 쫘악 땡겨오는걸 느꼈다. 이 이상 흥분하면 안 돼. 지성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길어지는 대치상황에, 동혁은 점점 지쳐갔다. 피를 너무 흘린 탓에 정신이 흐려졌다. 기어코 몸이 힘없이 쓰러졌을 때, 동혁은 끝까지 지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쯧, 이제 쓸모없어졌군."

동혁이 쓰러지자, 연구소장은 그를 짐짝 던지듯 옆으로 넘어트렸다. 그 모습을 보고있자니 지성은 무언가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동혁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훨씬 강한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 호르몬 과다 분비. 호르몬 제어 불가. '폭주 모드'가 활성화 됩니다. 시스템 다운.

지성은 저를 잠식시키는 강한 분노에 몸을 맡겼다. 마치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마구잡이로 총을 난사했다. 연구소장은 요원들의 엄호 아래 유유히 그 장소를 벗어났다. 지성은 저를 공격하는 요원들을 하나씩 처리해나갔다. 제 몸에 상처가 나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총이 여기저기 스치고 박혀도 멈출 수 없었다. 타겟팅된 인물은 연구소장이었으니, 그를 잡기 전까지는 죽을 수도 없었다.

지성의 폭주로 칩에는 오류가 발생했다. 그간 업데이트 된 데이터들이 뒤죽박죽 섞였고, 일부 유실되기도 했다.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 반동으로 눈은 붉게 물들었고, 피를 토하기도 했지만 지성은 죽을 각오로 연구소장을 뒤쫓았다. 하지만 연구소장은 이미 연구소를 벗어난 뒤였고, 지성은 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수기 시작했다. 건물이 무너져내리고,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다. 폭주로 칩이 과열되어 곧 터질 듯 했다. 지성은 이게 제 마지막임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 괜찮아. 그만해도 돼.."

가만히 눈을 감고 칩이 터지기만을 기다리던 지성에게, 동혁이 다가와 입을 맞췄다. 지성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혁이 살아있음에 놀라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에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성은 동혁을 끌어안고, 더욱 깊게 입을 맞췄다. 심장이 터질듯 했다.

◇ 이상 심박수 감지. 시스템을 재부팅 합니다.

지성을 스르륵 감겨오는 눈꺼풀 사이로 동혁의 모습을 가득 담았다. 지성이 쓰러지고, 동혁은 절뚝거리며 지성을 업고 연구소를 빠져나갔다. 무너져내린 건물을 비집고 나오자, 밖에서는 연구소장이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혁은 매서운 눈을 하고 제 아버지를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한다고는 안했잖아요."

"뭐 어떠냐. 나름 완벽한 결말인데."

"지성이가 그대로 죽어버리기라도 했으면, 아버지라도 용서 안했을 거예요."

"내 덕에 산 주제에 말이 많군."

오늘은 지성의 폐기 처분이 결정된 날이었다. 이미 만족할만큼 데이터는 추출해냈으니, 더이상 쓸모가 없어진 지성은 오늘 연구소 폐쇄와 함께 폐기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동혁이 지성을 데려가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고, 연구소장은 이를 허락했다. 다만, 마지막으로 '폭주 모드'를 활성화 시켜보는 조건이었다. 연구소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지성의 행동 데이터를 분석했다. 다음번엔 더욱 완벽한 인간병기를 만들어낼 수 있겠지. 동혁은 그런 제 아버지를 그냥 지나쳐, 시스템이 다운된 채 제게 업혀있는 지성을 데리고 제 집으로 향했다. 이제 앞으로 계속 함께할 생각에 조금 행복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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