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글

둥실둥실

August8ight by Ros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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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혁은 가볍다. 그의 대외적인 이미지가 그랬다. 그건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슬림한 바디라인이 그랬고, 숫자로 나타나는 그의 몸무게가 그랬다. 시도때도 없이 뱉어지는 시덥잖은 농담이 그랬고, 누구하고나 잘 어울리는 친화력이 그랬다.

그래, 누구하고나, 잘, 어울리는, 이동혁. 동혁의 이미지가 가벼워진데에 가장 큰 일조를 한 것은 바로 그의 연애관이었다. 딱히 성별이나 나이의 구애를 받지 않고, 수시로 연인을 갈아치우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오는 사람 안막고 가는 사람 안붙잡는 이동혁. 그는 정말이지 가벼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많았다. 그의 연애관이 어떻든지 그의 매력은 이미 차고 넘치니까. 동혁에게 가볍다느니 뭐하다느니 욕하는 사람들도 한번쯤 그와의 연애를 상상했다. 이게 동혁이 수시로 연인을 갈아치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제껏 사귄 애인만 해도 손가락발가락을 전부 접어 센 후 다시 펴 세어도 모자란 동혁은 당연스럽게도 친구가 많았다. 음, 그게 얼만큼이었냐면 3보1친구라고 할 수 있을 정도. 사실 그냥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면서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말 그대로 그냥 아는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지만.. 뭐, 다들 자기가 동혁의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해서 동혁의 속마음이 어떤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한다면 그건 미지수. 알게 뭐람. 이동혁인데. 동혁은 그냥 가볍게 사귀기 좋은 친구였다.

이쯤에서 아무도, 그 수많은 친구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동혁의 비밀을 하나 풀어보자면, 동혁은 일종의 저주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사실 '그것'의 정체가 저주인지 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하는 부분이었으나, 적어도 동혁은 저주라고 여겼다. 사랑받지 못하면 몸이 떠오르는 저주. 이건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주아주 끔찍한 저주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에는 생각보다 큰 힘을 가지고 있어서,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게 모두 영향이 미치기 마련인데, 동혁은 영향을 아주 심하게 받는 체질이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화자의 말에서 무게를 느낄 수 있을 정도. 그리고 이건 동혁에게 아주 중요한 감각이었다. 사랑 어쩌구하는 저주를 가진 동혁이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말에 녹아있는 사랑의 무게로 몸을 누르는 것 뿐이었다.

동혁이 사랑의 무게를 처음 알게 된건 고등학생 때. 사랑이고 자시고 그냥 친구들이랑 놀기 좋아했던 동혁에게 첫사랑이 찾아온 순간부터였다.

날이 제법 더워져 공기가 후덥지근한 시기에 동혁은 옆반 친구에게 고백을 받았다. 그냥 친구라고만 느꼈던 그녀의 고백은 동혁에게 처음으로 사랑의 무게를 알려주었다. 무언가 저를 무겁게 짓누르는 느낌. 이 갑갑한 마음 때문인지, 후덥지근한 공기 때문인지 동혁은 숨이 콱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호흡을 길게 늘려 들이켜고 내쉬었다. 왠지 심장고동 소리가 둥둥 울리는 것만 같았다. 이런 감각이 너무도 낯설어서, 동혁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얘 좋아하나봐. 그게 첫 연애였다.

그녀는 동혁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동혁은 그런 그녀에게서 아주 무거운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한참이 지나서도 연인인지 친구인지 경계를 정확히 나누지 못한 동혁이었지만, 그녀는 그저 웃으며 동혁의 곁에 있었다. 동혁은 그녀가 사랑을 전할 때마다 저를 눌러오는 그 무게가 좋았다. 사랑받는 기분을 톡톡히 느낄 수 있어서 그랬다.

후덥지근하던 공기가 차갑게 식고, 얼어붙었다가 다시 녹아내릴 때쯤. 동혁은 이별을 준비했다. 사랑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는건,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 식어가는 것 역시 곧바로 눈치챌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동혁은 눈치까지 상당히 빠른 아이였기에 그녀의 사랑이 미묘하게 식어버린걸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동혁은 사랑의 무게가 가벼워질 때마다 마음이 쓰렸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게 제가 어떻게 주무를 수 있는게 아닌지라 동혁은 담담하게 최선을 다했다. 첫 연애였고, 동혁은 행복했으므로. 사랑이 조금 식어버린게, 그 사실을 알아버린게, 이 연애를 끝낼만한 이유는 되지 못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노력하면 나아질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열여덟의 낭만이었다.

동혁의 바람이 통한건지 뭔지, 그녀는 먼저 이별을 고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사랑의 무게가 더 늘어나거나 한 건 아니었다만, 동혁은 그냥 그녀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이제는 그녀의 사랑보다 동혁의 사랑이 더 커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사랑만으로 몸을 누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게 서서히 무게가 줄어들다 못해 거의 느껴지지 않게 되었을 무렵에는 동혁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챌 수 있었다. 몸이 너무 심각하게 가벼웠다. 걸음걸이마저 너무 가벼워져서 꼭 달에서 걷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학기가 끝나면서 동혁의 연애도 끝이 났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처럼, 고백을 해왔을 때처럼, 연애를 할 때처럼, 웃는 얼굴이었다. 헤어지는 마당에 웃는 얼굴이라니. 동혁은 너무너무 슬펐지만, 애써 웃어보였다. 저 혼자만 슬퍼하는 것 같아서 조금 억울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아름다운 이별을 당한 동혁은 방학이 시작되었음에도 우울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딱 일주일. 그 시간동안 우울에 젖어있던 동혁은 반강제적으로 퍼뜩 정신을 차리게 됐다. 몸이 붕 떠올랐다.

그리고 어떻게 됐더라? 기억이 잘 안난다. 그냥 사는데 급급해서 아무나한테 사랑 구걸하고 다닌 것 같은데. 사랑을 받기 위해 외모를 가꾸고, 성격을 바꾸고.. 요리 잘하는 남자가 인기라길래 요리도 배우고(원래도 좀 하긴 했다.), 똑똑한 남자가 인기라길래 공부도 좀 해보고.. 그냥 할 수 있는거 다 했다. 그렇게 몇년쯤 살다보면 주객은 전도된다. 사랑받고 싶어서 하던 노력들은 그저 루틴으로 자리를 잡고, 일상이 되어버린 행동들로 인해 사랑받게 된다. 뭐, 이것도 어떻게 보면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동혁은 자신이 마치 풍선 같다고 느꼈다. 헬륨가스가 가득 차있어서 누군가 잡아주지 않으면 하늘로 둥실둥실 날아가버릴 그런 풍선 말이다. 어린시절 누구라도 한번쯤 갖고싶던 풍선. 하지만 정작 손에 넣으면 귀찮아지던 그런 풍선. 그게 자기와 너무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근데 갑자기 옛날 생각은 왜 나는거람. 데이트 중에 문득 생각에 잠겼던 동혁은 이내 훌훌 털어버리고 제 연인을 바라봤다. 옛생각에 잠겨 혼자 청승맞게 구는건 성격에 안맞았다.

"사랑해."

"응 나도."

"왜 사랑한다구 안해죠~"

"나도 사랑해~ 됐지?"

대뜸 튀어나온 동혁의 말에, 연인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동혁을 바라봤다. 동혁이 옛생각에 잠겨있던지 말던지 폰이나 보고있던 사람의 말은 너무도 가벼웠다. 이 땅을 딛고 설 수 있게 하기엔 한없이 가벼운 말. 이에 동혁은 그냥 작게 웃어보였다.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 사람도 이제 끝이구나. 동혁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제 연인의 손을 꼭 잡았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일주일 남짓. 그 전에 무거운 사랑을 받지 않으면 동혁은 몸이 붕 떠올라 하늘로 둥실둥실 날아갈 것이다.

"우리 헤어질까."

연인과 데이트를 마친 후, 바래다준 연인의 집앞에서 동혁은 담백하게 물었다. 그게 마치 내일 보자는 인삿말처럼 들려서, 연인은 황당한 얼굴로 동혁을 바라봤다. 사랑한다며. 아까까지 사랑한다고 해놓고 헤어지자고? 동혁은 원망이 섞인 그 말을 웃는 낯으로 대충 흘려들었다. 어차피 진짜로 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뭘.. 그런 동혁의 반응에 연인은 잠시 울먹한 표정을 짓더니 동혁의 뺨을 한대 때리고는 씩씩대며 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얘는 손이 안매워서 다행이다. 지난번엔 입술 다 터졌었는데. 동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진짜 미친놈 아니야?"

"그니까. 방금 헤어졌다고 하지 않았냐?"

"헤픈 새끼.."

동혁은 제 귀를 더럽히는 수근거림을 들으며 작게 킥킥 웃었다. 헤어지고 바로 클럽이나 와서 술 쳐먹는게 하루이틀도 아닌데 이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참 일관적으로 욕하는 사람들이 우스웠다. 나 이러는거 하루이틀이야? 나 이러는거 알면서도 너희 나 좋아하잖아. 동혁은 괜히 기분만 잡쳐서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났다. 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제 꼴이 우스웠다. 저야말로 저런 말 듣는게 하루이틀도 아니면서 기분이 상하니까. 방금 헤어진 연인이 싫어해서 끊었던 담배가 오랜만에 땡겼다. 아, 취기가 올라온다.

"형 여기서 뭐해요?"

시끄러운 잡소리가 듣기 싫어서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골목까지 굳이굳이 찾아서 들어왔건만 아는 사람을 만날 줄이야. 참 보람없네. 동혁은 쭈그려 앉아서는 저를 내려다보는 사람을 올려다봤다. 얘 이름이 뭐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뭐 이런 식으로 대충 아는 사이가 한둘이 아니긴 했으니 기억 못할만도 했다.

형? 괜찮아요? 남자는 동혁을 정말 걱정하는 얼굴로 바라봤다. 고작 이름이 뭐였나 생각하느라 인상 살짝 구긴게 다였는데. 얼마나 지극정성인지 담배 피느라 쭈그려 앉아있는 동혁에게 시선을 맞추려 저 역시 몸을 앉힐 정도였다. 동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채 남자의 얼굴만을 가만히 바라봤다. 꼭 고딩처럼 말갛게만 보이는 얼굴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이런 얼굴을 기억 못한다고? 동혁이 멍한 얼굴로 제 얼굴만을 보고 있으니 남자는 왜인지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동혁은 그 모습을 보고 풉, 웃음을 터트리더니 남자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무향에 가까운 은은한 비누향이 풍겨왔다. 키스할까.

깨질듯한 두통에 반짝 눈이 뜨였다. 익숙한 자취방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어제의 기억이 싹 날아갔다. 주변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잠금화면에 떠있는 시간은 오후 1시 27분. 기억과 함께 오전 시간도 싹 날아가 있었다.

동혁은 어거지로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아, 아,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취해도 집에는 잘 기어들어오는 타입인지라 입 돌아갈 걱정은 안하는데 매번 성대가 문제였다. 목 나가는게 제일 스트레스인 동혁은 정수기에서 뜨끈한 물을 받아 꿀을 탔다.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니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숙취가 좀 가시면서 순간적으로 떠오른 기억 한조각.

나 좋아한다고 말해. 얼른.

아 미친.. 누군지 기억도 안나는 그 남자애한테 무슨 진상짓을 한거야. 동혁은 이번엔 찬물을 받아 한입에 원샷을 때렸다. 단편적으로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들 때문에 숙취가 아니어도 머리가 좀 아팠다.

어차피 늦게 일어난 김에 오후 강의도 쿨하게 재낄까 하다가 제일 밑에 깔려있는 톡을 보고 나갈 채비를 했다. 대충 씻고 나와서 느긋하게 학교로 향했다. 빡세게 꾸미고 다니는 평소랑은 다르게 푸슬거리는 머리칼은 모자로 눌러버리고 안경에, 마스크까지 쓴 동혁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거 참 사람들의 관찰력이 부족한건지 관심이 부족한건지. 동혁은 속으로 이런 생각이나 하며 킥킥 웃었다. 사실 전혀 웃기지 않은데도.

동혁의 발걸음은 정문을 지나 교내 카페로 향했다. 여러 강의동의 가운데쯤 자리 잡고 있어 항상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거기. 사람 많은 곳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동혁을 그곳으로 이끌어낸 이는 박지성이었다. 그게 누구인지는 동혁도 몰랐다. 기억 안나는걸 뭐 어떡해. 그냥 박지성이라는 이름으로 톡이 왔고, 그래서 나왔다. 원래 동혁은 만나자는건 다 만나는 사람이었다. 오는 사람 안막고 가는 사람 안붙잡는 이동혁이 어디 가겠냐고. 그냥 얼굴 보면 기억 나겠거니 싶으면서, 기억 안나도 상관은 없었다. 이름만 알면 누구랑이든 어울릴 자신이 있었으니까.

동혁은 느긋하게 걸으며 왼손목을 바라봤다. 현재 시각 2시 34분. 2시에 보자는 톡을 보고 나왔으니 완전히 지각이었다. 하지만 뭐, 아직까지도 기다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딱히 발신자가 박지성이라서 그런건 아니고(누군지도 모르니까), 이제껏 자신에게 연락을 보낸 사람들 대부분이 그래왔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는 막연한 예상이었다. 이제껏 재촉하는 연락 하나 없는거 보면 딱 느낌 오잖아.

오늘도 역시나 사람들 잔뜩 들어있는 카페에 들어서니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가 금세 수근거림이 들려왔다. 제 얘기를 하는지 마는지는 관심 없었다. 할거면 하고 말거면 말라지. 그런거 다 신경 쓰면서 살았으면 소문이 이 꼬라지로 나진 않았을 거다. 동혁은 두리번거리며 지성을 찾았다. 그러고보니 얼굴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냐. 동혁은 폰을 들어 채팅방 속 지성의 프로필을 살폈다. 애석하게도 얼굴 나온 사진은 하나도 없었다.

"형!"

뭐야? 순간적으로 저를 잡아당기는 목소리에, 동혁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닿은 그곳에는 인파들 사이로 커다란 손이 붕붕 흔들리고 있었다. 쟤가 박지성인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지만 일단 저를 불렀고, 혼자 앉아있길래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익숙한 얼굴. 어제 봤던 그 고딩같은 애였다.

동혁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지성의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드디어 맨정신에 마주하게 된 지성의 첫인상은,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이게 뭐 사적인 감정을 듬뿍 담아서 하는 말은 아니고, 뭐랄까.. 사랑받은 티가 팍팍 나는 얼굴이라고나 할까. 어쩜 사람이 시선에마저 사랑이 담겨 있을 수 있는 건지. 지성의 올곧은 눈동자에 제 모습이 담기는 것만으로도 동혁은 사랑의 무게를 느껴지는 것 같았다. 풉, 정말이지 웃기는 생각이었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

살풋 웃으며 건넨 지극히도 평범한 안부인사. 그 한마디에 얼마나 큰 애정이 담겨있는지 지성은 알기나 할까. 동혁은 괜히 입이 바싹 마르는 것만 같았다.

"그으.. 어제 했던 말 기억나요..?"

지성이 괜히 동혁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 지성의 모습에, 동혁은 잠깐 머리를 굴렸다. 내가 뭔 말을 했길래 저러지. 하지만 여전히 떠오르는 거라곤 취해서 개진상부렸던 것뿐이었다.

"저 아무래도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뭔데. 도대체 뭔데. 동혁이 머리를 굴리느라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그냥 기억나는 걸로 친건지 대뜸 답변부터 해버리는 지성 때문에 동혁은 더 영문을 모르게 됐다. 뭘 못한다는 거야. 어제 뭔짓거릴 했지? 드문드문 떠오른 기억들을 찬찬히 되짚었다. 그러니까 어제는 애인이랑 헤어졌고, 술을 먹었고, 골목에서 담배 피다가 얘를 만났고, 좋아한다고 말하라며 협박을 했고.. 아 미친 설마..

"내가 어제 너한테 고백했냐?"

"네? 어, 네.."

동혁은 이제껏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누가 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데 도가 텄다. 그래서 저를 카페에 불러내고, 지각을 했는데도 기다리고, 늦은 저를 향해 웃어주기까지 하는 지성을 보고 얘도 나를 좋아하겠거니 싶었다. 심지어 단순한 인삿말에마저 애정이 담겨 있으니 말 다했지. 어차피 애인이랑도 헤어진 김에 가볍게 사귀기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어? 그게 아니었나? 동혁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버퍼링이 걸려 멀뚱한 얼굴로 지성을 바라보고 있자, 지성은 별안간 안절부절 못하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니 저럴거면 왜 거절한 거야?

"그,래도 연락 주셔도 돼요.."

허? 참나. 진짜 살다살다 이런 애는 처음이었다. 나한테 연락해도 되냐는 말은 무진장 많이 들어봤는데, 자기한테 연락해도 된다는 말은 진짜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가끔 수작부리는 사람들 중에 몇몇 있기야 했는데, 얘는 진짜.. 순수하게 하는 말인 것 같아서 신선했다.

"내가 너한테 연락할 일이 뭐 있어?"

"어... 그냥 심심할 때라도?"

"우리 학교 다니는 사람들 중에 절반은 내 친구일텐데?"

"음.. 그냥 제가 필요해질 수도 있잖아요."

뭐야, 저 찜찜한 말은. 그냥 흥미가 생겨서 실실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가던 동혁은, 꼭 무언가 알고 있는 것마냥 말하는 지성을 보고 순간 인상을 구겼다. 무슨 뜻이냐며 되물으려던 순간, 지성이 먼저 선수를 쳤다. 저 수업 있어서 가볼게요. 이거 제 번호에요. 미리 준비해온듯 주머니에서 꺼낸 아기자기한 메모지에는 11자리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얘 진짜로 이거 주려고 나 불렀나봐. 동혁은 덩그러니 남겨져서 떠나는 지성을 바라봤다. 뭐지, 이 느낌은. 낯선 감정은 덤이었다.

"형 여친분 만나러 안가요?"

"엉 걔 오늘 바쁘대"

지성에게 번호를 받은 그날, 바로 저녁에 전화를 때려버린 동혁은 지성을 불러내 저녁을 사먹였다. 뭘 좋아하는지 모르니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백반집에 가서 김찌를 먹이고 그냥 찬찬히 대화를 좀 했다. 진짜 뭘 알고 있는건가 유도신문도 해봤는데, 그렇다할 부분은 없었다. 진짜 심심할 때 연락하라는 거였나? 나 요즘 심심해보이나.. 결론은 흐지부지 되었지만 대화를 하면서 한가지 알아낸건 있었다. 박지성은 사랑이 넘치는 아이라는거.

대화를 하면 할수록 생각은 확신에 찬다. 골목에서 마주쳤을때는 취해있어서 느끼지 못했는데, 다음날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안들었던 것. 카페에서 다시 만났을때 평범한 안부에서 애정이 느껴졌던 것. 그게 다 사랑이 넘쳐서 그런 거였다. 이 정도 사랑을 내뿜는 아이가 옆에 있으면 애인같은거 안만들어도 이 땅에 발 붙이고 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솔직히, 박지성을 갖고 싶었다. 평생을 붙잡아 놓고 싶었다. 이 아이의 사랑이 오로지 저에게만을 향하길 바랐다.

하지만 동혁은 애인을 만들었다. 얘는 일단 애인은 아니니까. 지성은 일종의 보험 같은 거였다. 애인은 헤어지면 끝이지만 친구는 아니니까. 애인이랑 헤어지더라도 박지성은 옆에 남아있을테니까. 살아온 세월이 엄청 오래된건 아니지만, 이제껏 살면서 터득한 지혜 같은 거였다. 애초에 박지성은 나랑 사귈 마음도 없는걸. 아무리 술먹고 한 고백이라지만 제 고백에 거절을 했으니 연인으로는 가망이 없었다.

"형 오늘 수업 없어요?"

"엉"

"근데 학교는 왜 나온.."

"우리 지생이랑 밥 먹을라고~"

버릇처럼 튀어나오는 입에 발린 말에 베시시 웃는 얼굴만 보면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참 이상한 아이다. 동혁은 그냥 실실 웃으면서 지성의 머리를 복복 쓰다듬었다. 머리가 헝클어지든 말든 손을 타는게 약간 강아지 같아서 귀여운 것 같기도. 풉, 동혁은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할때마다 괜히 웃겼다. 박지성이랑 있으면 저까지도 이상해지는 기분이었다.

"지성아"

"네?"

"나 한번만 안아주라"

"..왜요?"

"그냥.."

동혁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는 지성을 바라봤다. 이제껏 지켜본 바로는, 지성은 불쌍한 것을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방금까지 웃고 떠들다가도 조금만 풀이 죽거나 애처롭게 굴면 매번 져주는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조금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니 지성은 조금 난감해하다가 이내 동혁을 살포시 안아주었다. 아, 사랑이 채워진다. 사실 말에 녹아있는 사랑이 아닌 이상 동혁을 붙잡을 수 있는 사랑은 없다.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동혁의 욕심. 스스로조차 근원지를 모르는 그런 욕심.

욕심은 품을수록 강해진다. 그게 순순히 내어주는 사람에게라면 더욱. 박지성은 만나자고 하면 만나준다. 곁에 있어달라고 하면 있어준다. 손을 잡아달라면 잡아주고, 안아달라고 하면 안아준다. 그래서 동혁은 점점 더 지성을 놓을 수가 없었다. 사랑이 넘치는 이 아이의 전부가 제 것이었음 했다. 그렇게 동혁은 조금씩조금씩 지성을 저로 물들였다. 박지성에게도 이동혁이라는 존재가 특별해지도록. 그 누구도 이동혁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도록.

"..형, 정말 이래도 되는 거예요?"

지성의 목소리가 떨린다. 건물 뒤편의 좁은 틈에서 몸을 바짝 붙이고 있으니 그게 다 느껴졌다. 지성의 목에 얼굴을 부비며 고개를 끄덕이면 지성은 시선을 내리깔며 입술을 짓씹는다. 동혁은 그런 지성의 뺨을 어루만지며 입술을 포갰다.

이제 이 아이는 나의 소유가 된다.

동혁에 대한 소문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연애가 끊긴 적이 없던 이동혁에게 연애 휴식기가 찾아온 것이 가장 큰 역할을 했다. 동혁은 여전히 가벼운 사람이었고, 가볍게 사귀기 좋은 친구였지만 헤픈 사람은 아니게 됐다. 비록 동혁이 하루가 멀다하고 쫓아다니는 지성에게는 썩 좋지 않은 소문이 붙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성은 소문에 별로 관심을 안두는터라 그런 소문이 있는줄도 모르고, 동혁은 그냥 무시했다. 지성의 귀에만 안들어가면 상관없었다. 곧이곧대로 들어가게 그냥 둘리도 없고.

저에 대한 더러운 소문은 가라앉았고, 지성은 여전히 제 곁에 있다. 제 발은 이 땅을 안정적으로 딛고 서있으니 처음으로 평범한 일상이 찾아왔다. 하지만 동혁은 이런 평화로운 때에 오히려 불안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지성의 모든걸 가졌지만, 그의 연인은 아닌 자신 때문에.

"요즘 뭐.. 만나는 사람 생겼어?"

"네? 아뇨?"

"..그래?"

...그런데 왜 사랑이 줄었어? 동혁은 차마 물을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여러 사람 돌려 만나던 때랑은 다르게 박지성만을 바라보며 살자니 지성의 사랑에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이전이었다면 그냥 헤어지고 다른 사람 만나면 됐을걸 박지성이라 그게 안됐다. 안그래도 기말기간이라 요즘 지성과 만나는 시간이 줄어들어 불안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데 기말시험이 팀 과제로 대체된 과목이 하나 있댔나. 악명 높은 교수의 과제라 바쁜건 이해한다지만, 그래도 불안한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런 동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성은 또 팀과제가 있다며 먼저 몸을 일으켰다.

/형, 오늘 저녁 먹기로 한거 조금만 미뤄도 돼요?

"어? 왜?"

/지금 팀 회의 중인데 좀 늦을 것 같아서..

지성의 말에 동혁은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그냥 다음에 먹자. 동혁은 지성의 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전화가 다시 걸려왔지만 동혁은 받지 않았다. 아까 어떤 여자랑 있던 지성이 떠올라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듯 아닌듯 친구인냥 구는 동기들과의 저녁은 지나칠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 주변이 시끄럽든말든 혼자 술이나 적시고 있던 동혁은 부재중과 톡메세지로 가득찬 알림창을 봤다. 박지성, 박지성, 박지성, 박지성, 박지성.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박지성. 정말 과제중이었던건지 뭔진 모르겠다만 시간 간격을 두고 드문드문 오던 톡이 이제 끊겼다. 박지성도 포기한걸까? 동혁은 입술을 짓씹었다. 비릿한 피맛이 났다.

"형, 가요."

어, 박지성이다. 동혁은 꿈뻑꿈뻑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게 취해서 헛게 보이는건지 실제로 지성이 있는건지 확인해야 했다. 동혁은 두 손을 들어 제 앞에 있는 박지성(추정)의 뺨을 붙잡았다. 말랑말랑 따끈따끈한 감촉이 느껴졌다. 볼을 조물거리고 있으니 지성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동혁을 일으켜 세웠다. 이미 널브러져있는 동기들에게 굳이굳이 인사를 하고 동혁을 데리고 나왔다. 비틀거리느라 한참을 느리게 걷는 동혁이 행여나 넘어질까 조심스레 붙잡고는 부축했다. 동혁은 여전히 지성의 얼굴만을 빤히 바라보며 현실을 자각중이었다.

"너어, 과제는 다 해써?"

동혁의 물음에 지성은 답이 없었다. 어, 뭐지. 화났나. 동혁은 묵묵하게 앞만 보고 걷는 지성을 빤히 쳐다보다가, 지성의 손을 잡고 골목으로 쏙 들어갔다. 사람들이 잔뜩 걸어다니는 길거리 옆 좁은 골목. 동혁은 지성을 벽쪽으로 세우고는 냅다 입을 맞췄다. 이번에도 져주길 바라면서.

"형"

하지만 지성은 져주지 않았다. 입을 맞춰오는 동혁을 밀어내고는 올곧은 눈으로 바라봤다. 동혁은 그 눈을 보고 있자니 왠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동혁은 그 눈을 피하며 지성에게 기대었다. 피하고 싶던게 지성의 눈인지, 그 속에 비친 제 모습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동혁은 지성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처음 맡았던 무향에 가까운 은은한 비누향. 그 향에 섞인 처음 맡아보는 시트러스향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그 여자랑 잘 되가?"

"..무슨 말이에요?"

"과제 같이 하는 사람, 여자잖아."

"그게 왜요?"

지성의 반응에 동혁은 무언가 넘치려는 반응을 꾹 눌러담았다. 잘해봐. 나 때문에 괜히 썸깨지 말고. 이 말을 하기가 왜이리 어려운 걸까. 동혁은 어거지로 쥐어짜낸 말을 뱉어냈다.

"..그런거 아니에요."

"괜히 변명 안해도 돼~ 학교 다니면서 연애 한번은 해야지."

"그런거 아니라고 했어요."

그제야 동혁은 지성의 얼굴을 봤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꼭 상처받은 것 같은 얼굴에 동혁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마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서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지려 하니 지성이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 일 있어서 당분간 형이랑 못만날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꼭 보고싶었어요. 잘 지내요."

지성이 먹먹한 목소리로 제 할말만 하고는 가버렸다. 항상 저를 기다려주던 박지성이 먼저 제 갈길을 가버렸다. 동혁은 그게 퍽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근데 그렇게 매정하게 가버린 것치곤 마지막 말까지 애정으로 가득 차있어서 그게 마음을 또 이상하게 만들었다. 지성이 저를 떠나가는데도 동혁은 그 자리에 덩그러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필 이럴때 술이 깨고 지랄이야. 눈가를 벅벅 닦아냈다.

그날 이후, 정말 지성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학교에 나오는 것 같긴 한데 마주칠 수가 없었다. 애초에 학과도 다르고 수업도 달랐으니까. 서로에게 시간을 내어 만나는 수밖에 없었는데, 지성이 저를 피하니 만날 수조차 없었다. 일이라는게 뭘까. 뭐였을까. 있긴 했던 걸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냥 나에게 질렸던 거라면? 지성이 그럴리 없다는걸 알면서도 동혁은 불안했다.

하루이틀사흘나흘. 시간은 흐르고 동혁은 점점 가벼워진다. 다른 누구라도 만나서 사랑을 받아야만 할텐데 그럴 의욕이 들지 않았다. 너는 그러면 안되잖아. 너만은 그러면 안됐잖아. 그렇게 떠날 거였으면 처음부터 사랑을 주지 말았어야지. 애초에 지성의 사랑을 갈구한 것은 자신의 욕심이었음에도, 동혁은 지성을 원망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른 누구의 사랑도 원하지 않았다. 그저 박지성의 사랑만을 원했다. 그의 말 하나하나에 녹아있는 애정과 단어 하나하나에 베어있는 사랑. 그게 필요했다.

몸이 둥실 떠오르는게 느껴졌다. 지성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또 누가 나에게 사랑을 속삭여줄까. 누가 나를 땅에 설 수 있게 붙잡아줄까. ..이제 박지성도 없는데. 이런 고민을 하는것도 지겨웠다. 아니, 지쳤다고 하는게 좀 더 어울렸다. 풍선은 하늘 높이 올라가면 펑 터져버린다는데, 나는 하늘로 떠오르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나도 풍선처럼 펑하고 터져서 사라지게 될까.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굴레도 벗어날 수 있는 걸까. 동혁은 가만히 눈을 감고 몸이 떠오르는 감각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형 여기서 뭐해요?"

익숙한 목소리. 동혁은 감았던 눈을 살짝 뜨고는 저를 붙잡고 있는 지성을 바라봤다. 요며칠 코빼기도 안보이더니 하필 이럴때 나타난 박지성. 동혁은 뭐가 그리 조심스러운지 소매 끝만 겨우 붙잡고 있는 지성의 모습이 괜히 웃겼다. 얘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와 저를 붙잡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동혁은 그냥 저를 놓아주어 그 끝을 볼 수 있게 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놔."

"..어디 가는데요? 위험해요. 가지마요."

지성의 손이 작게 떨리는게 느껴졌다. 하지만 동혁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버린 상태라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겨우 결심이 서서 끝을 보려는 저를 방해하는 지성의 존재가 귀찮고 거슬릴 뿐이었다. 지성은 그런 동혁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듯 입술을 꾹 깨물고는 울먹한 표정을 지었다. 또 저 표정이네. 나를 향해 저런 표정을 지어주는 사람이 몇이나 되더라.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네가 뭔데."

"네?"

"네가 뭔데 나를 붙잡냐고."

동혁은 점점 떠오르는 몸을 여전히 붙잡고 있는 지성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네가 나한테 무슨 존재인데? 퉁명스런 말투였지만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스스로도 이름짓지 못하는 자신의 감정에, 우리의 관계에, 지성이 이름을 지어주었음 하는 바람도 어느정도 있었다. 동혁은 지성의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는걸 그냥 바라봤다. 저건 무슨 표정이지. 약간 울듯하면서도 절대 울 것 같지 않은.. 그런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지성은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뜨며 동혁을 바라봤다. 눈물이 살짝 고여 촉촉한 눈동자에 가득히 동혁이 담겼다. 동혁은 왠지 그 눈을 바라보니 왠지 몸이 약간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분명 그럴리가 없는데도.

"..알아요. 제가, 제가 형한테 어떤 존재도 아니라는거.. 하지만 형은 모르잖아요.. 내가 얼마나 불안한지 모르잖아요. 매일 어디론가 날아가버릴 것 같아서, 내 눈이 형만 좇는걸 모르잖아요."

소매 끝만 겨우 붙잡고 있던 지성이 동혁을 당겨 손을 잡았다. 금방이라도 날아갈듯 떠있는 동혁을 놓치지 않겠다는듯 단단히 붙잡았다. 지성의 커다란 손에 담긴 온기가 그의 손에서 동혁의 손으로 옮겨진 순간, 동혁은 붕 떠있던 정신이 순식간에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나는요, 너무 무서웠어요. 나조차도 감당 못하는 이 마음이.. 형한테 상처가 될까봐. 괜히 섣부르게 마음을 줘버려서, 나중에 형이 상처받게 될까봐.. 그게 너무 무서워서 마음을 숨겼어요. 근데 형이 이렇게 날아가버리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너, 지금.."

"형은 꼭 조각배 같아요. 바다가 아니라 하늘을 떠도는 작은 배요. 닻이 없어서 그냥 떠돌 수밖에 없는 배 같아요. 그래서.. 내가 형의 닻이 되고 싶어요. 형이 하늘을 헤매지 않게, 내가 형을 잡아주고 싶어요."

우주를 담은듯 반짝이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떨어진다.

"저 형을 좋아해요."

지금껏 느껴본적 없는, 가장 무거운 사랑의 무게가 떠오르던 몸을 붙잡는다. 첫사랑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얘는 도대체 뭐지? 동혁의 몸이 점점 내려감에 따라 지성은 동혁을 바라보며 두 팔을 벌리고, 동혁은 작게 웃으며 그를 껴안았다.

"나처럼 작은 조각배에 너처럼 큰 닻을 어떻게 달아."

"이만큼 크니까 더 세게 잡아줄 수 있어요."

와락 껴안은 지성의 품이 너무 따듯해서, 동혁은 제 작은 조각배에 이다지도 커다란 닻을 달아보기로 했다.

그래, 이건 사랑이었다.

Epilogue

해가 질 때까지 학교에서 과제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하루종일 학교에 처박혀있어서 그런가, 평소보다 더 피곤했다. 그러고보니 하루종일 고개도 못들고 과제만 했지.. 지성은 뻐근한 목덜미를 제 큰 손으로 주무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주한 어두컴컴한 골목. 여기를 지나가, 말아? 밝은 큰 길 옆에 있어서 어두운게 더 대비되는 이 골목은, 대낮에도 통행량이 적고 밤에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좁은 골목이라 가로등도 별로 없어서 진짜 으슥하기 그지없는 곳. 그리고 지성의 자취방까지 가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지성은 잠시 골목 앞에 멈춰섰다. 보통 귀가를 하는 시간에는 대부분 해가 떠있으니까 아무 걱정 없이 지나가는 길인데, 빛이라곤 저 멀리 있는 미약한 가로등 불빛이 전부인 밤의 골목은.. 좀 무섭잖아. 하필 며칠 전에 공포영화를 봐서.. 괜히 속으로 한마디 더 얹으며 변명을 했다. 여기 못지나가는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에잇 그냥 가자. 몇분이나 골목 앞에서 머뭇대던 지성이 드디어 마음을 굳히고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어봤자 피로만 더 쌓일 뿐이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큰 길로 집에 가려면 빙 돌아서 가야한다. 안에는 아무도 없, 다?

"..형 여기서 뭐해요?"

으악 깜짝이야..! 지성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고 여긴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이동혁 때문에. 하필 또 지성이 오던 방향에서는 미묘한 각도로 안보이는 곳에 있던터라 진짜로 심장 떨어질뻔 했다.

지성의 물음에 동혁은 슬며시 시선만 올려 지성을 바라봤다. 금방 술을 마신듯 나른한 눈과 어렴풋한 홍조. 입에 물고 있는 담배와 그걸 들고 있는 마디 굵은 손가락. 지성은 괜히 심장이 뛰어 작게 숨을 내쉬었다. 박지성도 이동혁을 짝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명이냐고? 그렇다. 아니, 좀 더 명확히 하자면 아마 가장 오래 짝사랑한 사람일테지. 동혁이 지성을 기억할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박지성의 짝사랑은 상당히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고등학교 2학년, 옆 학교로 공연을 갔을 때였다. 댄스 학원까지 다닐 정도로 춤에 진심이던 지성은 댄스부에 들면서 이곳저곳 공연을 다니기도 했는데, 그때 가게 된 곳이 같은 댄스 학원의 수정이 누나가 다니는 학교였다. 수정이 누나는 웃는게 정말 예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그 누나를 짝사랑했던건 아니고, 그냥 객관적으로 봤을 때 말이다. 어쨌거나 수정이 누나의 학교에 찾아갔을 때, 동혁을 처음 봤다. 진짜 누나보다 웃는게 예쁜 사람은 처음이었다. 

웃는게 예쁜 사람이 이상형인줄은 스스로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렇게나 웃는게 예쁘던 수정이 누나한테는 이러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박지성은 게이였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글쎄. 살면서 남자에게 호감을 가져본적 또한 이번이 처음이었다.

낭만을 타고난 지성은 이 상황이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단 하루, 심지어는 그 순간밖에 보지 못한 사람에게 이다지도 마음을 빼앗겨 버렸으니 말이다. 이런게 첫눈에 반한다는 걸까? 지성은 괜스레 마음이 간지러웠다. 이동혁이라는 사람은, 정말이지 이상하고 또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홀로 마음을 품은채 몇년이 흘렀고, 캠퍼스 내에서 동혁을 다시 만났을 때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운명이라고. 뭐가 됐던 이동혁과 박지성은 인연이 닿아있다고.

그럼 동혁에게 대뜸 입술을 빼앗겨 버렸을 때의 박지성의 심경은 어땠을까? 그건 본인 스스로도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마음이 너무 어지러웠다. 훅 끼쳐오는 술냄새와 담배냄새, 향수냄새에 속이 울렁거렸다. 지성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떨며 동혁을 밀어냈다.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몇년이나 홀로 마음을 키워왔는데, 꼭 다른 사람 같았다.

"나 좋아한다고 말해, 얼른"

"..형 이러지 마요."

"왜? 너도 내가 싫어?"

"..! 내가 형을 왜 싫어해요! 저는 오랫동안..!"

왈칵 쏟아져 나오는 감정에 지성은 말을 멈추고 입을 닫았다. 동혁에 대한 소문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가벼운 이동혁. 자신의 기억 속 동혁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물론 그때도 동혁을 다 알았던건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이런 질 나쁜 소문이 붙을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래서 지성은 소문을 믿지 않았다. 어쩌면 믿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소문은 그저 소문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라니. 지성은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자신이 알던 그 모습은 뭐였을까?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변한다지만 이렇게나 바뀔 수 있을까? 어쩌면 자신이 알던 모습은 단편적인 모습일 뿐이고, 이게 진짜 모습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성은 왠지, 정말 이유도 없이 동혁이 불쌍해 보였다.

"나 좀 사랑해줘.."

"...."

동혁을 부축해 자취방으로 향하는 내내 동혁은 자신과 사귀자며,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성은 그저 말없이 동혁을 부축할 뿐이었다. 도대체 왜일까. 이 사람은 왜 이리도 사랑받고자 아등바등하는 걸까. 혼자 머리를 굴린다고 답이 나오지 않을 질문을 몇번이고 되뇌었다.

"사랑이 없으면, 나는..."

풍선처럼 떠올라 터져버릴지도 몰라. 동혁의 작은 중얼거림에 지성이 멈칫, 동혁을 바라봤다.

"형,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성의 물음에 동혁은 답했다. 사랑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고. 사랑으로 몸을 누르지 않으면 땅을 딛을 수 없다고.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형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형이 헤픈놈 취급이나 받으며 사랑을 구걸하는게 정말 저 이유 때문이라면, 몇년이나 이어온 내 사랑을 주면 되지 않을까?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다 내가 형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 내 사랑이 줄어서 형을 붙잡지 못하게 되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성은 동혁에게서 한걸음 떨어졌다.

"미안해요.. 형을 너무 사랑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그치만 형 곁에 있을게요. 형이 날아가지 않게, 내가 잡아줄게요. 내가 형의 닻이 될게요. 사랑해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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