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글

사랑으로 충전이 되나요?

August8ight by Ros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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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넘.. 씨이..."

오늘은 박지성의 연애 35일째 되는 날. 그리고 박지성의 16번째 연애가 끝난 날. 지성은 혼자 훌쩍이며 맥주를 한캔 땄다. 치익, 하고 김빠지는 소리가 들리고 거품이 조금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원래 술은 입에 영 맞지 않는터라 즐겨하지 않는 지성이지만, 오늘은 취하고 싶었다. 초초초단기 연애 경력만 16번. 모두 한달을 채 넘기지 못했던터라 35일이나 된 이번 연애는 좀 다른가 싶었다. 물론 그 희망도 오늘을 기점으로 와장창 깨져버렸지만.

"으엑.. 맛없어.."

슬픈 마음에 맥주를 한입 벌컥 들이켰다가, 억지로 삼켰다. 도저히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지지 않는 맛이었다. 진짜 너무 싫어.. 취하고 싶어도 취하기 어려운 제 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이럴거면 희망도 주지 말았어야지. 30일을 넘기고 5일동안 얼마나 행복했는데, 헤어지자는 문자 한통만을 남기고 잠수를 타버린 전남친이 원망스러웠다.

한입 마시고 저 멀리 치워버린 맥주캔을 보면서, 지성은 언젠가 친한 형들이 집들이를 오며 사온 양주가 떠올랐다. 소주나 맥주 못마시는 사람이 오히려 양주를 더 잘 마시는 경우도 있다던데, 혹시 나도 그런거 아니야? 맥주는 한 모금밖에 안마셨으면서 취하기라도 한 건지 근거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찬장에 고이 모셔둔 양주를 꺼내왔다. 이 상황에서도 무드 맞춘다고 글라스 잔까지 하나 챙겨온 지성은, 갈색빛이 진하게 도는 양주를 한 잔 가득 채우곤 한입에 털어 마셨다. 으엑, 이건 더 맛없잖아. 간결한 맛평가를 한 이후로는 기억이 없다.

"아우.. 머리야.."

골이 울리는 것만 같은 느낌에 인상을 팍 쓰고 눈을 뜬 지성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를 터트렸다. 한잔 마시고 그대로 뻗어서는 다음날 오후에 일어난 제 자신이 웃겼다. 한참을 혼자 킥킥대며 앉아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서 잔 탓에 허리에서는 뚜둑하는 소리가 났다. 애석하게도 챙겨줄 사람 하나 없어서, 깨질 듯한 머리 부여잡고 셀프로 뒷정리를 해야했다.

한참 어제의 흔적을 치우고 있는데 띵동,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느릿하게 걸어가 현관문을 여니, 웬 커다란 택배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지? 운송장을 확인해보니 상품명은 간단하게도 '가전'이라고만 쓰여있었다. 분명 자기 이름과 자기네 집 주소가 맞는데, 정작 시킨 기억이 없었다. 가전제품을 시킬리가 없는데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엄청 크고 무거운 택배 상자를 낑낑대며 안으로 들여왔다. 그리고 지성은 살면서 몇 번 확인해본적 없는 계좌 내역을 살폈다.

"미친.. 66만원..?"

이체 내역 최상단에 떡하니 쓰여있는 오늘 새벽 2시 5분, 660,000원, 러브로이드몰. 지성은 그걸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일배송 미쳤네.. 새벽에 시킨 택배가 그날 오후에 도착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보다는 구입처가 문제였다. 러브로이드..? 저거 막 음흉하고 그런거 아니야? 지성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달달 떨면서 손톱을 깨물었다. 뭔 생각으로 저런걸(?) 시킨 거지.. 스스로한테 실망하기 전에, 주문 내역을 찾아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창이 열리자마자, 어두컴컴한 배경에 분홍색 네온사인 로고가 반짝이는 화면이 떴다. 보면 볼수록 그런 쪽(?)으로밖에 안보여서, 지성은 괜히 더 초조했다. 주문내역을 확인하려고 하니, 자동 로그인이 되어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술에 쩔었으면서 뭘 회원가입까지 하고 구매한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러브로이드!

완벽한 연인을 찾고 계신가요? 러브로이드에서 여러분의 사랑을 찾아보세요! 127가지의 세부사항으로, 여러분의 이상형에 맞게 외형에서부터 성격까지 커스텀 가능!

홍보문구 한번 거창하다 싶었다. 주문내역을 보니까 정말로 자기가 시킨게 맞아서, 지성은 이마를 팍팍 쳤다. 술에 취해있었으면서 회원가입을 한 것도 모자라, 127개의 질문을 하나하나 답하고, 주문을 마쳤더랬다. 심지어 전화번호나 주소도 하나도 안틀렸어! 이 정도면 또다른 자아가 튀어나왔던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나마 이상한건 아닌 것 같으니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쨌든 지성은 앞으로 양주는 손도 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상자를 열었다. 또다른 자아(?)의 취향이나 한번 보자는 마음이었다.

"..역시.."

상자를 열어보니 또다른 자아가 있는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외형을 주문했을리 없는걸. 사실 지성은 지금껏 상당히 소나무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키워드는 이러했다. 큰 키, 하얗고 뽀얀 피부, 순한 인상. 이외에 잡다한 다른 취향도 있기야 했지만 지금껏 만나온 사람들의 공통점은 이 정도였다. 그런데 이 분(?)은 적당한 키에,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상태라 인상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미 투 스트라이크 상태였다. 지성은 반품을 고민하며, 옆에 놓인 반품 가이드를 펼쳐봤다.

혹시 반품하실 건가요..?(눈물) 러브로이드는 개인 맞춤형 제품으로, 반품 시 모두 폐기처분 됩니다. 조금만 더 고민해주세요ㅠㅠ

으악 괜히 읽었다. 지성은 에휴 한숨을 쉬곤 러브로이드를 상자에서 꺼냈다. 감정에 호소하는 글에 지성은 너무도 약했다. 별생각없이 꺼내본 러브로이드가 너무 사람처럼 생긴 바람에, 바닥에 널부러트리긴 미안해서 소파에 잘 앉혀놨다. 이왕 쓰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뭐 어떻게 전원을 켜야할 것 같은데, 전원을 도대체 어디서 켜는건지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지성은 상자 안을 다시 뒤져 설명서를 찾았다.

"하..? 진짜 갖다 버릴까.."

친절하게도 그림까지 그려져 있는 설명서를 대충 한번 읽어본 지성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버리고 싶은 욕구가 마구마구 솟구쳤다. 하지만 저 사람같은걸 어떻게 버려! 심지어 반품해도 폐기라는데! 지성은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마음으로, 화장실에 가서 손을 박박 씻었다. 그리고는 머뭇대는 손으로 러브로이드의 입술을 벌렸다. 누가 충전단자를 입안에 만들어 놓은 거야! 현대 과학이 이렇게나 발전되어있는 줄 몰랐던 지성은, 진짜 사람처럼 구현되어 있는 입안을 손가락으로 헤집으며 단자를 찾았다. 말랑한 혀가 손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한참을 헤매어 오른쪽 가장 안쪽, 사람으로 치면 사랑니가 나는 자리쯤에 있는 단자에 가까스로 충전기를 연결하고 나니, 오른쪽 귀 아래쯤에서 잔여 배터리가 퍼센트로 나타났다. 현재 잔량은 3% 정도. 최소 전원 20%는 되어야 전원을 켤 수 있댔지? 지성은 다시 몸을 일으켜 상자를 치웠다.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느정도 정리를 마치고, 다시 소파로 돌아온 지성은 배터리 상태를 확인했다. 19%쯤 충전이 된걸 보고, 나머지 1%를 기다리며, 그의 얼굴을 구경했다. 자신의 취향과는 전혀 상반된 얼굴이었지만, 객관적으로 잘생긴 얼굴이라는건 분명했다. 이런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갔으면 더 좋았을걸.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한참을 얼굴 구경을 하던 지성은, 20%에서 더이상 올라가지 않는걸 보고, 충전기를 뺐다.

이제 전원을 켜야 하는데.. 지성은 다시 설명서를 들어 전원 켜는 법을 찾아봤다. 그리고 또다시 절망. 전원 버튼 역시 입안에 있었다. 도대체 왜! 어째서! 지성은 또 머뭇대다가, 입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충전단자 반대편에 있는 전원 버튼을 꾹 누르자, 러브로이드가 눈을 스륵 떴다. 그리곤 제 입안에 들어와있는 지성의 손가락을 혀로 슥 핥았다.

"악! 왜 이러세요!!"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은 지성은, 손가락을 훽 빼내곤 뒷걸음질쳤다. 치아에 긁힌건지 손가락에는 붉은 자국이 한줄 남았다.

"네가 넣고 있었잖아."

러브로이드는 손가락이 빠져나간 입안이 허전한지 혀로 입술을 훑었다. 그 모습에 지성은 괜히 민망함이 몰려왔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더 할말은 없었다. 지성이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러브로이드는 빙글빙글 웃으며 지성에게 다가왔다.

"나 이름. 이름 지어줘."

"어, 어.. 동혁이..?"

"응, 내 이름 동혁이."

지성은 뜬금없게도 튀어나온 이름이 퍽 친근하게 느껴져서 속으로 좀 웃었다. 동혁은 그런 지성을 바라보며 작게 웃어보였다. 동글동글한 눈매가 예쁘게 휘어지는게, 어.. 좀 귀여운 것 같기도..? 지성은 이때 코가 좀 꿰였다. 물론 스스로 인식은 못했지만 말이다.

"지성아~"

동거를 시작한지 어느덧 열흘. 동혁은 지성의 이름을 부르는걸 좋아했다. 어감이 좋다나 뭐라나. 게다가 툭하면 껴안고, 툭하면 뽀뽀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질문에, 어떻게 답변을 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살가운 성격을 좋아하는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애교쟁이를 좋아했던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처음엔 영 부담스럽던게, 지금은 나름 익숙해져서 동혁이 껴안아 올때면 허리에 손을 두를 정도는 됐다. 지성에게는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런 생활이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지성은 정말 누군가와 연애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실상 연애 과정 건너뛰고, 바로 동거에 들어선 모양새였지만, 지성이 느끼기에 달달한 연애를 하는 기분이었다. 동혁이 아무리 안드로이드라고 해도 사람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고, 매일 사랑을 듬뿍 보내줄 뿐더러, 스킨십도 자연스럽게 하다보니, 더욱 그랬다. 원래 몸멀마멀이라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랬으니, 몸이 이렇게 붙어있는 이상, 마음이 가까워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동혁아. 나 오늘 좀 늦는데, 배터리 얼마나 남았어?"

"웅, 81퍼 정도?"

"그럼 저녁에 와서 충전해줄게."

현재 시각 오전 9시 20분. 지성이 현관에 서서 말하자, 동혁은 쪼르르 다가와 지성을 와락 끌어안았다. 지성은 푸스스 웃으며 동혁을 안았다. 키도 저보다 작으면서 꼭 자기가 안아주는 역할을 하는게 귀엽게 보였다.

동혁의 배터리는 특이하게도 스킨십으로 충전이 되는 방식이었다. 충전기를 이용한 전기 충전 방식은 배터리가 20% 미만으로 떨어졌을 때, 20%까지만 가능했고, 그 이후로는 오로지 스킨십을 통해서만 충전이 됐다. 설명서에 쓰인 원리로는 피부끼리 닿을때 발생하는 미세 전류를 이용한거라고 하는데, 처음엔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지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배터리가 80%쯤으로 떨어졌을 때, 동혁의 손을 잡고 있으니 느리게나마 퍼센트가 올라가는걸 보고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역시 현대 과학이 이렇게나 발전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후, 충전 방식에 관련해 이것저것 실험을 해본 결과, 스킨십의 정도에 따라 충전 속도가 다르다는걸 알 수 있었다. 어느정도 차이가 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뽀뽀, 포옹, 손잡기 순으로 충전 속도가 빨랐다. 지성이 느끼기에 손잡는건 좀 낯간지러운 일이라, 충전은 주로 포옹으로 해결했다. 물론 애교장인 동혁은 불시에 지성에게 뽀뽀를 갈기고 셀프 충전을 하기도 했다.

한 10분 정도 있었을까, 이번에도 역시 불시에 지성의 뺨에 뽀뽀를 갈긴 동혁이 해맑게 웃으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자, 그제서야 지성은 집을 나섰다. 매번 집을 나설 때마다 저렇게 시간을 끌어대는 동혁 덕분에, 매번 일찍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야 했다. 약속시간 30분 전. 지성은 느긋한 걸음으로 약속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집에 혼자 남은 동혁은 지성의 방 침대에 누웠다. 지성의 체향이 잔뜩 묻은 이불과 베개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현재 잔여 배터리 87%. 지성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절전모드에 들어갔다.

"동혀가아~"

알딸딸하게 취한 지성이 집에 들어온건, 11시가 넘어가는 늦은 밤이었다. 술을 얼마나 마신건지 도어락 비밀번호도 두어번 틀려서 동혁이 문을 열어줬다. 지성은 동혁을 보자마자 냅다 그를 끌어안았다. 동혁은 잘 걷지도 못하는 지성을 질질 끌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지성을 침대에 눕히고 나니, 지성은 실실 웃으며 동혁을 바라봤다. 동혁은 낑낑대며 커다란 몸 뒤집어 옷을 벗겼다. 그리고 침대에 고이 올려둔 잠옷을 착착 입혀주고 나서야 동혁은 휴, 한숨 돌렸다.

"동혀가아~ 이짜나아~"

"지성아, 나 충전. 충전해줘."

"아 마따! 까먹어써.. 미아내애~"

늦는다고 미리 말하긴 했으나, 생각보다 더 늦게 귀가한 지성 덕분에 배터리가 40%까지 떨어져 있었다. 충전이 조금 급한 동혁이 손을 내밀자, 지성이 그 손을 잡고 제 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지성의 몸 위에 올라탄 모양새가 된 동혁은 당황하며 떨어지려 했으나, 지성이 동혁의 목에 팔을 단단히 둘렀다. 숨결이 닿을만큼 가까운 거리에, 동혁은 답지않게 난감해했다. 저를 가만히 바라보는 지성의 웃음기 서린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볼 수 없었다. 동혁이 은근히 시선을 맞추지 못하며 피하자, 지성은 여전히 웃으며 동혁의 시선을 쫓았다.

"..얼른 자."

동혁이 힘을 줘서 지성의 품을 벗어나자, 지성은 손끝으로 동혁의 손가락을 잡았다.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은 손이었는데도, 동혁은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애초에 지성을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인걸. 동혁은 침대에 풀썩 앉아 지성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성은 마치 고양이처럼 눈을 감고 동혁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동혁은 그런 지성을 보면서, 아까처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키스하고 싶다. 입술을 작게 짓씹고는 지성의 뺨에 입을 맞췄다. 지성이 눈을 반짝 뜨고, 동혁을 바라봤다.

"..나 배터리 없어. 뽀뽀 더 해도 돼?"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직 60%도 충전되지 않았으니. 하지만 동혁은 괜히 눈치가 보였다. 이에 지성은 활짝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혁은 누워있는 지성에게 몸을 기울여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이마, 눈가, 뺨, 콧등, 턱, 그리고 입술.. 밑에 점. 가성비 넘치는 충전 방식이다 보니 금새 70% 넘게 충전이 되어 동혁이 몸을 다시 세웠다. 입술까지 해버리면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동혁을 가만히 바라보던 지성이 느릿한 몸짓으로 일어나 동혁의 뺨을 잡고 입을 맞췄다. 따끈한 혀가 입술을 비집고 들어와 입안을 헤집었다. 동혁은 조금 놀란 눈을 하다가, 눈을 감았다. 자세를 고치며 지성을 다시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서로를 갈구하듯 진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하으.. 동혁아.."

떨어진 입술 사이로 타액이 길게 이어졌다.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는 잔뜩 흐트러진 모습의 지성이 너무도 자극적으로 보였다. 동혁은 제가 입혀줬던 잠옷 단추에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그리곤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지성의 잠자리를 정돈해주고, 이불까지 꼭꼭 덮어준 뒤 방을 나가버렸다. 원래 러브로이드에게는 성관계 기능이 없었다.

"으응.. 머리 아파.."

이른 아침, 갈증에 눈이 저절로 뜨인 지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오늘따라 허전한 옆자리에 부스스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맨날 충전이다 뭐다 하면서 베개 가지고 옆자리를 꼭 차지하고 있던 동혁이 보이지 않았다. 구김없이 깨끗한걸 보면 일찍이 정리를 하고 나갔거나, 아예 함께 자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지성이 거실로 나오자, 동혁은 나갔다 온듯 에코백을 가지고 현관에 서있었다. 지성은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동혁을 알아보지 못해, 순간 소리지를뻔 하다가 겨우 알아보고 삼켜냈다. 동혁은 지성을 빤히 바라보다가 척척 다가오더니 에코백에서 1.5L짜리 이온음료를 꺼내어 지성의 손에 쥐어주고는 제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어딘가 평소와 다른 동혁의 모습에, 지성은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동혁아..?"

지성이 동혁의 방문을 열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가만히 침대에 기대앉아 지성이 사다준 게임기를 만지작거리던 동혁이 지성을 바라봤다. 일단 부르기는 했으나, 딱히 용건이 있어 부른건 아닌지라 지성은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며 할말을 찾았다.

"배터리 얼마나 남았어?"

"..90퍼."

많이 남았네.. 지성은 별 수 없이 알았다며 문을 닫았다. 배터리가 충분한걸 보면 어제 충전을 시켜주고 잔 것 같긴 한데, 지성은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사실 집에 어떻게 왔는지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잠옷차림인거 보면 어찌저찌 잘 들어온 것 같으니 그걸로 됐다며 넘어가기로 했다. 지성은 동혁의 행동 변화에 자신이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는 단 1g도 생각하지 못하고, 안드로이드도 사춘기가 오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동혁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지?"

지성이 답답한듯 물었다. 동혁은 오늘 하루, 제 방에서 한발짝도 나오지 않다가 방에 들이닥친 지성에 의해 소파에 앉혀진 참이었다. 한 집에 둘이 있는데, 아침에 보고 이제까지 한번도 못보는게 말이 돼? 지성은 단단히 뿔이 난 상태였다. 점심이나 저녁을 혼자 먹는건 괜찮았다. 지성은 혼자서라도 밥을 차려먹을 수 있으니까. 그가 화가 난 이유는, 오로지 동혁 때문이었다. 혼자서는 충전도 못하면서 뭐 때문인지 말도 안해주고 방에 틀어박힌게 서운했다. 그러다 방전이라도 되면 어쩌려고! 동혁을 방에서 끄집어내며 확인한 잔량은 고작 15%정도였다.

"왜 아무 말도 안해줘! 나한테 딱 맞는 사람이라며! 나는 말 안해주면 모른단 말이야!"

지성의 말에, 동혁은 여전히 시선을 피한채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지성은 다른 감정보다도 서운한 감정이 울컥 쏟아졌다.

"씨이.. 갑자기 왜 그러는데? 나 싫어졌어? 내가 술마시고 와서 주정부렸어? 말을 해줘야 알지.."

기어이 눈물을 뚝 흘려버린 지성이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닦았다. 정말이지 갑자기 변해버린 동혁이 밉기만 했다. 지성의 눈물에, 동혁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지성을 와락 끌어안았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 잘못이야. 동혁의 작은 목소리에 지성은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뭐가 미안한데. 뭐를 잘못했는데. 왜 말해주지 않는 건데. 지성이 질책하며 가슴을 팍팍 쳐댔지만, 동혁은 지성을 꽉 안아줄 뿐이었다.

"아무래도.. 나 고장났나봐."

"뭐?"


배터리가 40%까지 충전이 된 후에야 떨어진 둘은, 어색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그 시작은 동혁의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너를 보면 욕심이 생겨. 손을 잡고 싶고, 안고 싶어. 뽀뽀하고 싶고, 키스하고 싶어. 어제는.. 너를 더 안고싶었어."

"..그게 왜? 연인은 원래 그런 거잖아."

"우리는 그런 기능이 없어. 그런데 나는.. 너를 보면 그런 욕심이 자꾸만 들어. 너를 더 안고싶어."

지성은 할말을 잃었다. 그런 기능이 없다는 것도 이제 알았는데, 동혁이 저를 향해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니. 조금 당황스러운 감이 없지않아 있었지만, 사실 그게 지성에게는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동혁이 기계든 사람이든, 일단 제 연인인걸. 지성은 조금 눈치를 보는 동혁을 보며, 어젯밤의 일이 조금 떠올랐다. 아, 어제도 저렇게 눈치를 봤었는데. 순간적으로 떠오른 기억은 줄줄이 이어졌고, 어제 동혁과 뭘 했는지 다 기억이 나버렸다. 지성은 조금 얼굴이 화끈거려, 손부채질을 했다.

"안고 싶으면 안으면 되잖아. 나는 네 연인인걸?"

지성이 살짝 웃으며 말하자, 동혁은 그제야 시선을 올려 지성과 눈을 맞췄다. 그래도 돼? 동혁의 물음에 지성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마치 어제처럼 먼저 입을 맞췄다.

띵동, 이른 아침부터 울려대는 초인종 소리에 지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동혁의 품을 파고들었다. 내가 보고 올게, 누워있어. 동혁은 그런 지성에게 뽀뽀를 잔뜩 해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지성은 동혁을 따라 몸을 일으키려다가 찌르르 아파오는 허리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다시 누웠다. 동혁은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옷가지를 주워다 몸에 걸치곤 현관을 열었다. 현관에는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커다란 택배 상자가 놓여있었다. 제품명은 '가전'. 동혁은 그 자리에서 상자를 열었다. 큰 키에 하얗고 뽀얀 피부, 눈을 감고 있음에도 순해보이는 인상의 러브로이드가 떡하니 들어있었다. 동혁은 함께 동봉된 편지지를 펼쳤다.

러브로이드!

안녕하세요, 박지성 고객님.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 측의 실수로 주문하신 러브로이드가 아닌, 테스트 버전 제품이 오배송된 것이 확인 되었습니다. 늦게나마 주문하신 러브로이드를 보내드리오니, 오배송된 러브로이드는 반송 부탁드립니다. 만약, 기존의 러브로이드에 만족하신다면, 오늘 보내드린 러브로이드를 반송해주시면 되겠습니다. 항상 노력하는 러브로이드몰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동혁은 편지지를 다시 고이 접어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상자를 꼼꼼하게 테이핑해서 닫아버렸다. 반송 송장을 적어 상자에 붙이고, 그대로 문앞에 둔채 집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이따 택배 기사 불러야지. 작게 흥얼거리며 지성의 방으로 돌아갔다.

"왜 이렇게 늦게 와~ 밖에 뭐였어?"

지성의 칭얼거림에 동혁이 작게 웃으며 답했다.

"몰라? 아무것도 없던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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