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글

큐피드의 납화살

August8ight by Rosii
5
0
0

"이거 효과는 확실한 거죠?"

"당연하지. 근데 이건 어디다 쓰려고?"

"..그냥 좀 쓸데가 있어요."

"흠, 지성이 너니까 믿고 주는 거야. 이상한 장난치면 안된다."

"당연하죠. 감사해요."

제노는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상대방이 그 박지성이있기에 믿고 물건을 넘겼다. 지성은 물건을 받자마자 꾸벅 인사를 하더니 호다닥 자리를 피했다. 상당히 수상쩍은 행동이었으나, 이미 가버린 지성을 뭐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제노는 그냥 제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거친 숨 헉헉대며 제 방에 도착한 지성은 문을 2중, 3중으로 잠그며 비밀스럽게 물건을 확인했다. 납작하고 길쭉한 나무 상자 안에는, 웬 화살이 하나 들어있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큐피드의 납화살. 찔리는 순간, 가장 먼저 본 사람을 싫어하게 만든다는 신화 속 물건이었다. 지성은 마법 감정용 모노클을 끼고, 화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마법 랭크 A. 높은 랭크가 뜨는걸 확인한 후에야 안심한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것만 있으면 다 해결되겠지. 화살을 다시 상자에 넣고, 상자를 침대 아래에 숨겼다.

지성이 재학중인 학교는 수많은 상급 마법사들을 배출한 왕립 아카데미였다. 공격마법은 물론이고, 지원마법, 치유마법 등 다양한 마법을 개개인에 맞게 배울 수 있고, 굳이 마법이 아니더라도 마법 물약이나 마도구를 만드는 수업을 들을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마법을 부흥시키기 위해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지성은 치유와 지원마법을 복수전공하고 있었고, 성적도 탑급이었다. 외모로는 어디서 빠지지 않고, 성격도 유순하니 그야말로 유니콘 같은 존재랄까, 쨌든 그랬다. 그런 지성이 납화살 따위의 음침한 마도구를 찾는건..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울 찌송이 옆자리는 내 자리~"

공격마법 전공, 광역 공격 특기생 이동혁. 따로 학년이랄게 없는 아카데미에서는 나이차이가 좀 나더라도 수업만 같으면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들었다. 그러니 23살인 동혁과 21살인 지성이 같은 반에 있는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동혁이 발랄하게 뛰어들어와 익숙한듯 지성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자, 지성은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잠깐 비추다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울 찌송이 무슨 일 있어?"

네.. 당신이 문제예요.. 지성은 말을 꾹 삼키고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지성이 납화살을 구한 이유가 바로 이동혁 때문이었다. 동혁이 미워서 골탕이라도 먹이려고 하나?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에게 미움을 받고자 한 것이었다. 납화살에 찔린 후, 가장 먼저 마주한 사람이 되려고 했다. 굳이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이것도 글쎄, 불가항력이랄까.

동혁과 지성의 인연은 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카데미에는 2년에 한번씩 열리는 모의 전투 대회가 있는데, 거의 모든 재학생이 참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카데미의 가장 큰 이벤트였다. 대회에는 2명이 페어로 출전하게 되며, 반드시 공격마법 전공자와 치유 또는 지원마법 전공자가 짝을 이뤄야 했다. 그리고 이때 지성과 페어가 된 사람이 바로 동혁이었다.

공격마법 중에서도 특히나 광역 공격에 능한 동혁은 대회 일정이 잡히자마자 지성에게 페어를 요청했다. 그때 당시에만 해도 지성은 동혁과 전혀 일면식이 없던 터라 약간 당황스러웠지만, 전공 수석을 놓치지 않는 사람의 페어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여기서 지성이 동혁에게 빠지게 된 부분을 설명하자면, 전적으로 유죄인간인 동혁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의 전투 대회는 실제로 마법을 사용하는 전투이니만큼 부상을 입는건 당연지사였다. 이는 지성과 동혁은 합이 꽤나 잘 맞는 페어였음에도, 자잘한 부상을 입는건 피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안그래도 광역 공격을 서포트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치유 마법까지 쓰려니 마력이 쭉쭉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좀 지친 참에 큰 바위 뒤에 숨어서 한숨 돌리던 중에 기습을 당해버렸다. 지성은 이때만큼 스스로에게 실망한 적이 없었다.

"지성아! 괜찮아?"

화염구가 저를 향해 날아오는 것을 분명히 봤는데, 이상하게도 뜨거운 느낌이 전혀 나질 않았다. 화염구가 조준이 잘못된 건가? 싶었지만 근처에서 강하게 풍겨오는 살갗이 타는 냄새가 이를 명백히 부정했다. 슬쩍 감았던 눈을 뜨자, 어쩌면 당연스럽게도 동혁이 지성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혀, 형.. 괜찮아요..?"

방염 마법이 걸린 옷은 그렇다치더라도, 방어막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끝이 살짝 그을린 머리칼이나 피부의 화상은 화염구가 얼마나 강한 마법이었는지를 설명했다. 지성은 손이 덜덜 떨렸다. 제가 방심했기 때문에 동혁이 다쳤다는 사실이 이성적 사고를 정지시켰다. 저를 서서히 잠식시키는 자괴감. 동혁은 그런 지성의 떨리는 손을 덥썩 잡았다.

"괜찮아. 에구 울 지성이 많이 놀랐구나."

와락 끌어당겨진 지성은 동혁의 품에 안겨 토닥임을 받았다. 다친 사람은 저이면서 오히려 놀란 지성을 달래주는 손길이 상당히 익숙해보였다. 동혁은 빙결 마법으로 주변에 얼음벽을 만들어 세워두고, 지성이 진정할 때까지 그를 안아주었다. 지성은 어안이 벙벙한 와중에, 묘한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이 상황에 두근? 퍼뜩 정신을 차린 지성이 동혁의 품을 파드득 벗어났다.

"이제 좀 괜찮아?"

"아, 어, 네에.. 고마워요."

지성은 어정쩡하게 떨어져서는 동혁에게 치유마법을 걸었다. 그을린 머리칼은 어쩔 수 없었지만, 화상입은 피부는 완벽히 치유됐다. 얼음벽이 거의 다 녹아내렸을 때쯤, 동혁은 광역 마법을 시전했다. 지성의 서포트로 강력한 낙뢰가 주변 일대에 내리쳤다. 제한 시간이 따로 없는 대회에서는 하나의 페어만 남을 경우, 대회가 종료되는데 방금 내려친 동혁의 낙뢰 덕에 모든 페어가 전투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렇게 쉽게 끝낼 수 있으면서 왜 진즉에 하지 않았냐고? 글쎄, 그건 동혁만 아는 얘기겠지? 어쨌거나 그렇게 둘은 수석 딜러와 상위권 서포터의 환상적인 합을 보여주며 MVP를 차지했다.

대회가 끝난 뒤에도 동혁과 지성은 나름 잘 붙어다녔다. 애초에 둘이 잘 맞았던건 페어 간의 합 뿐만 아니라 성격의 합까지였으니까. 뭐, 대회 중에 느꼈던 두근거림이 계속해서 이어진건 지성만의 유감이었다만.. 불시에 훅 카운터를 날려오는 유죄인간만 아니면 나름 평온한 심장을 유지할 수 있으니 괜찮았다.

"아, 미안?"

어.. 차갑네. 지성은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차갑고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목소리의 근원지는 동혁이었고, 지성은 그런 그가 낯설었다. 저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동혁이 상당히 기분이 상한 상태라는건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매번 저를 향해 웃어주던 얼굴이 차갑게 굳어있었으니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지성의 생각보다 발달한 감이 어서 자리를 피하라고 눈치를 주고 있었으나, 발바닥이 그 자리에 붙어버린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동혁과 딱 눈이 마주쳐버린 상황은 진짜 최악이었다.

"찌송이~ 여기서 뭐해?"

"아.. 도서관 가고 있었어요."

평소처럼 다정하고 장난기 많은 목소리와 표정에, 지성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이제야 떨어진 발바닥이 좀 원망스러웠다. 원래 향하던 도서관으로 발걸음이 옮겨지면, 동혁도 그 옆을 따라서 걸었다.

"형은요? 무슨.. 심각한 얘기 하는 것 같던데.."

"아, 뭐.. 별거 아녔어. 고백받았거든."

"아, 그래요..?"

지성은 괜히 마음이 찔려서 동혁의 눈치를 봤다.

"내 마음은 고려도 안하고, 자기 마음 먼저 들이미는거 진짜 별로야. 완전 싫어. 그래놓고 거절하는 내가 미안해 해야하잖아?"

"그..렇죠."

"그치? 역시 우리 찌송이~ 형 마음 알아주는건 우리 찌송이밖에 없어~"

제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 손길에 지성은 겉으로는 웃어보이면서도 속이 좀 쓰렸다. 동혁이 고백을 자주 받는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고, 매번 거절한다는 사실 역시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런 마음일 줄은 몰랐지. 지성은 0고백 1차임을 이렇게 불시에 당해버려 마음에 먹구름이 좀 꼈다. 하지만 이미 좋아하는 마음을 뭐 어떻게 하기는 늦었기에, 조금 엉뚱한 짓을 해보기로 했다.

원래의 지성이는 갖고싶은 물건을 갖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는 사람은 아니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와 더불어 적당히 포기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혁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앞으로 행할 모든 행동들은, 지성에게 있어서 '최선의 노력'에서 좀 벗어난 행동이었다.

첫째, 동혁과 자주 붙어다니기. 이건 뭐 맨날 하는 거니까 난이도 별 1개.

둘째, 동혁과 스킨십 자주 하기. 애교쟁이 동혁은 스킨십에 아주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기가 먼저 하든, 상대가 먼저 하든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난이도는 별 2개, 소득은 제로.

셋째, 사랑의 부적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기. 이건 사실 들키면 좀 부끄러운 일이긴 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마당에 자존심이 어디 있겠는가. 마도구 제작 전공의 제노를 찾아가 부탁을 했다. 제노는 그 유명한 유니콘 박지성이 사랑의 부적 따위를 부탁하는게 신기해서 그냥 하나 만들어줬다. 그렇게 얻은 사랑의 부적을 만들어서 품에 꼭 품고 다녔다. 난이도는 별 1개, 소득은 이번에도 제로.

넷째, 사랑의 묘약 만들어서 먹이기. 이건 '최선의 노력'에서 약간 벗어났다. 굳이 분류를 해보자면 사랑을 얻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랄까. 원래라면 그러지 않았을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랑이 간절해졌고, 더불어 약간의 오기도 생겨났다. 그래서 마법 물약 전공의 재민을 찾아가 사랑의 묘약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재민은 어딘가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방 묘약을 만들어줬다. 작은 유리병 안에서 찰랑이는 분홍색 액체를 초코우유에 똑똑 떨어트려 동혁에게 건넸다. 지성이 주는 거라면 의심도 없이 입에 털어넣고 보는 동혁은 사랑의 초코우유를 한입에 마셔버렸고, 그 결과는..

"에효.."

"엥, 갑자기 웬 한숨?"

처참히 실패였다. 마법 물약으로 입소문이 자자한 그 나재민이 만든 묘약이었음에도 동혁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게 뭐야.. 지성은 풀이 좀 죽었지만, 금방 이겨냈다. 동혁처럼 수석은 아니지만 복수전공하면서 상위권 성적 유지하는 머리를 굴려보기로 했다. 묘약이 왜 안들었을까? 가장 유력한 가설은 동혁의 마법 저항력이 강해서였다. 좀 더 낭만적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지성은 그건 전혀 떠올리지도 못했다.

마지막 방법. 다섯째, 가질 수 없다면 놓아버리기. 난이도 별 5개 플러스 알파. 다시금 제노를 찾은 지성은 이번엔 엉뚱하게도 큐피드의 납화살을 구했다. 온갖 방법을 다 써도 동혁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어서, 그냥 놓아버리기로 했다. 사랑의 묘약까지 썼는데 실패했으니, 더이상 희망은 없었고, 지성은 스스로는 포기가 안됐다. 차라리 동혁에게 미움을 받으면 강제로라도 마음을 접을 수 있지 않을까.. 지성의 생각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지성은 가방에 고이 모셔진 나무 상자를 다시 확인했다.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는 않지만.. 이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수업시간은 조용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수업이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교실을 벗어나는 동안, 지성은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가방을 챙겼다. 동혁은 그런 지성의 속도를 맞춰주고 있었다. 지성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방에서 슬며시 납화살을 꺼내 동혁의 팔꿈치를 콕 찔렀다. 아! 동혁이 팔꿈치를 쓸어내리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지성과 눈이 딱!

"따가워.. 뭐지?"

진짜 뭐냐고.. 동혁은 제 팔꿈치를 살피며 지성에게 아프다고 찡얼거렸다. 분명 A랭크의 효과 확실한 마도구가 맞는데 동혁은 이번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진짜 눈 딱 감고 마지막으로 용기낸 건데 나한테 왜 그러냐고.. 동혁을 좋아하는 것도, 동혁에게 사랑받는 것도, 심지어 미움을 받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었다. 지성은 괜히 서러워져서는 울먹울먹한 얼굴을 하다가, 냅다 가방을 들고 뛰쳐나가버렸다. 뒤에서 당황한 동혁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발걸음은 더욱 속도를 냈다.

"으이구, 많이 서러웠어?"

훌쩍훌쩍 작게 우는 지성을 런쥔이 토닥이며 위로했다. 지성은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뭐 어떻게 해야돼.. 항상 어떻게든 답을 찾고 나아가던 지성이지만, 이번만큼은 캄캄한 암흑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나한테 제일 먼저 오지 그랬어."

런쥔의 말에 지성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퉁퉁 부은 눈이 꼭 마카롱 같아서, 런쥔은 작게 웃었다.

"내가 마법을 하나 걸어줄게."

런쥔은 지성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이제 동혁이한테 가서 '좋아해'라고 하면 마법이 발동될 거야."

"..이게 무슨 마법인데요?"

"사랑이 이루어지는 마법이지."

지성은 조심스럽게 제 이마를 매만졌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마법이라고? 사실 이런 마법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봐서 좀 못미더웠지만, 그 마법을 건 사람이 런쥔이라면 조금 솔깃한 말이긴 했다. 런쥔은 지성도 따내지 못한 지원마법의 수석이었는걸. 지성이 조금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자, 런쥔은 나 못믿어? 라며 지성을 일으켜 세웠다.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킨 지성은 런쥔의 손길에 못이기는척 발걸음을 옮겼다.

"야아~ 박지성! 아까 그렇게 가버려서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알아? 어디 갔었어?"

동혁이 어디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좀 걸었을 뿐인데, 어디선가 동혁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칭얼거림. 지성은 이번에도 애매하게 웃어보였다. 너 울었어? 누가 울렸어! 좀 진정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붓기가 빠지지 않은 것인지 동혁이 지성의 눈가를 매만지며 씅을 냈다. 그 모습에 지성은 푸스스 웃어보였다.

"형 때문이잖아요."

"엥? 나?"

"내가 형 좋아하는 줄도 모르고.. 바보같이."

런쥔의 마법이 걸려있으니 지성은 조금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뱉어냈다.

"형, 좋아해요."

이것도 런쥔의 마법 덕분일까? 지성은 차마 입밖으로 꺼낼 수 없던 한마디가 이토록 가벼운 말인지 이제서야 알았다. 제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운 한마디가 하나의 깃털처럼 가벼이 날아 동혁에게 닿았다. 지성은 동혁이 무슨 말을 하든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냥, 괜찮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아, 정말!"

아, 거절이구나. 지성은 조금 쓰게 웃었다. 예상은 했다지만 마음이 쓰린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 동혁이 저를 와락 끌어안았을 때는, 역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짜아.. 내가 고백하려고 얼마나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그렇게 담백하게 좋아한다 그르냐아~"

지성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이게 무슨 말이야? 상황판단만큼은 항상 자신있었는데 이번엔 영 느리게만 됐다. 동혁은 지성을 끌어안은채 얼굴도 보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작년에 내가 페어 요청했던거 기억나?"

"..네."

"그때부터 좋아했어."

"네에.. 네!?"

지성은 화들짝 놀라 동혁의 품을 벗어나려 했지만, 동혁은 더욱 지성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아, 보지마.. 나 지금 얼굴 엉망인 것 같애.."

지성은 동혁의 품에 가둬져서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제 뺨에 닿은 동혁의 얼굴이 너무 따듯해서 그의 얼굴이 얼마나 달아올라 있을지 알 수 있었다. 지성은 어정쩡하게 안겨있던 자세를 고쳐 동혁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며 웃음이 나왔다.

"형 진짜진짜 좋아해요."

"웅, 나도 지성이 진짜진짜 좋아해."

Epilogue.

"야.. 이제 이동혁 징징대는 소리 안들어도 되는 거냐?

"어, 그대신 행복에 겨워하는 소리 들어야 할듯."

"진짜 지겹다.."

한편, 동혁과 지성이 꽁냥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지성에게 도움을 줬던 제노, 재민, 런쥔이었다.

"지성이 걔도 참 보면 묘해. 어떻게 우리한테 딱 도와달라고 그러지?"

"우리가 동혁이 친구인거 알고 그런건 아니고, 그냥 성적 좋아서 그런걸껄."

제노의 물음에 런쥔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제노는 지성과 한두개쯤 같은 수업을 듣는 클래스메이트 정도의 사이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말을 걸어온 지성이 참 묘하다고 생각했다. 제노의 입장에서는 질리도록 얘기를 들어온 동혁의 짝사랑 상대였지만, 지성의 입장에서는 말그대로 클래스메이트일 뿐일텐데 절묘하게도 동혁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저를 찾아온게 신기했달까.

사실 제노 뿐만 아니라 재민, 런쥔은 동혁과 아주 오랜 친구였는데, 장장 6개월 동안이나 동혁의 사랑앓이를 직관한 입장으로서 지성의 도움 요청은 이 지긋지긋한 굴레를 벗어날 절호의 기회였다. 사랑의 부적 같은 귀염뽀짝한 부탁을 하는게 귀엽기도 했고. 물론 지성이야 이 셋이 동혁과 절친한 친구인지는 런쥔의 말처럼 모르고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결과가 좋으니 다 잘 된 일이었다.

"근데 너 마지막에 지성이한테 걸어준 마법 뭐야?"

"그거 그냥 체력 회복 마법이었어. 하도 울어서 기운 빠졌을까봐."

제노는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런쥔과 지성은 동혁을 빼고서라도 인연이 있는 사이로, 지원마법 전공자끼리 하는 연구 동아리의 부원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독 생각이 잘 맞는 편이라 친밀하게 잘 지내는 사이랄까. 지성이 동혁을 알기 전부터 알던 사이라, 런쥔은 지성과 동혁 사이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물론 남의 연애사에 깊게 관여하지 않는 자신만의 신조가 있어서, 오작교 역할을 굳이 나서서 해주진 않았으나, 마지막에는 너무 힘들어하는 지성을 위해 기꺼이 한마리의 까마귀가 되어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재민이 너는 무슨 생각으로 진짜 묘약을 만들어 준 거야?"

"말로만 듣던 걔를 실제로 보니까, 동혁이 주긴 아까워서?"

"뭔 소리야.. 너 그거 사랑의 묘약이 맞긴 해?"

런쥔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법 물약에 관해서는 천재 소리를 듣는 재민은 조금 엉뚱하고, 제법 이상한 물약을 곧잘 만들어내곤 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재민의 머릿속은 보편적이지 않다는 뜻이고, 이런 사람을 보편적인 사람들은 흔히 또라이 괴짜라고 부른다는 뜻이다.

"흐흥 사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는 묘약이었지용~"

"뭐?"

"동혁이가 욕망에 못이겨서 키스라도 갈기면 재밌을 것 같아서용~"

"미쳤나봐.."

재민의 말에 런쥔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재민은 제노, 런쥔과는 다르게 지성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는데, 그저 재밌으니까 흔쾌히 묘약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것도 부탁한 사랑의 묘약이 아닌 다른 묘약을! 아무리 오랜 친구라지만, 런쥔은 재민의 머릿속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제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동혁이한테는 효과가 없었던 거야?"

"걔가 워낙 마법 저항력이 세기도 하고~ 미친 자제력을 갖고 있기도 하고~"

재민은 아주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아무리 마법 저항력이 세다고 해도, 그걸 가뿐히 상쇄시킬만큼 독하게 만든 회심의 물약이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한 것이 의도치 않게 학구열을 자극했다. 저게 진짜 사랑의 힘이라면 연구할 가치가 있겠는걸? 재민은 말을 아꼈지만, 옆에 있던 제노와 런쥔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쟤를 누가 말려.. 하면서도 정작 본인들도 말릴 생각은 없었다. 이러니 몇년째 친구하는 거겠지.

"나한테만 뭐라도 하지마~ 이제노도 납화살 구해줬잖아. 그거 되게 위험한건데"

"맞아. 너는 그거 무슨 생각으로 구해준 거야?"

직접적인 질책을 들은건 아니었다만 질책의 눈초리를 받은게 영 억울했는지, 재민은 제노를 걸고 넘어졌다. 이에 런쥔은 크게 동의하며 제노를 바라봤다. 효과가 없었으니 망정이지, 진짜 효과가 있었으면 아무래도 큰일이 날 뻔한 상황이었으니, 지성이를 끔찍이 아끼는 런쥔으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그거 안 통할 거 알고 있었지."

제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거 상대방이 자기 좋아하면 효과 없거든."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와씨.. 나 방금 소름돋았잖아. 진정한 사랑, 뭐 그런 거냐?"

런쥔은 소름이 오소소 돋은 제 팔을 쓸어내렸고, 재민은 더욱 눈을 빛냈다. 둘의 반응에 제노는 눈꼬리를 예쁘게 접으며 웃어보일 뿐이었다.

조금 낭만적으로 마무리를 해보자면, 지성과 동혁은 사랑의 부적이나 묘약 따위가 없었어도 사랑하게 됐을 것이다. 그들은 큐피드의 납화살로도 갈라놓지 못할만큼 서로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Fin.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