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글

August8ight by Ros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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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지성이 잠에서 깼다. 몸을 일으키자 동혁이 분주하게 출근 준비를 하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동혁은 지성 쪽을 흘깃 한번 바라봤다.

"더 자고, 나오지마. 나 오늘 늦어."

제 할말만 하고는 방을 나서는 동혁을 지성은 가만히, 바라만 봤다. 끼익—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지성은 다시 스르륵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올 것 같진 않지만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감았다. 동혁이 나간 후의 지독한 침묵을 지성은 참 싫어했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점심 즈음이 되어있었다. 지성은 느리게 일어나 찌뿌둥한 몸을 주욱 늘렸다. 썩 개운해지진 않았으나, 그냥 몸을 일으키며 하는 준비운동 비슷한 거였다. 침대 옆에 가지런히 놓인 슬리퍼를 신고는 방을 나섰다.

지성이 일어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환기를 시키는 일이었다. 집안의 모든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었다. 미치도록 조용했던 집안에 바깥의 소음이 스몄다. 이렇게 창문을 열고 있으면 숨막히도록 무거운 침묵도 먼지와 함께 사라질 것만 같았다. 창문을 모두 연 후에는 자연스럽게 청소기를 들었다. 매일 똑같은 루트로 방들을 모두 돌며 청소를 마치니 이제야 조금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부엌에 들어서서 차갑게 식은 상차림을 치웠다. 조금도 손을 대지 않은 음식들을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지성은 조금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그 후에는 베란다로 나가 조금밖에 안들어있는 빨래를 돌렸다. 빨래를 세탁기에 넣는 그 짧은 사이에도 지성은 창밖으로 구름이 지나다니는 모습을 구경했다. 날씨가 좋아보였다.

집안일을 모두 마치고 나서도 시간은 넘쳐났다. 점심시간을 조금 많이 지나친 시간이었지만 딱히 밥 생각이 들진 않았다. 매번 이러는게 이제는 너무 익숙해서, 지성은 밥도 먹지 않고 서재로 향했다. 직업이 작가인만큼 서재는 온갖 자료와 서적들로 가득했다. 종이냄새가 나는 서재에 들어서니 지성은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댄 지성이 책상에 놓인 투명한 유리병을 가만히 바라봤다. 불면증 때문에 신경은 예민해지고, 기력은 떨어져서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 겨우 찾아낸 수면향이었다. 어차피 동혁은 매일 야근으로 늦게 오니까, 그가 오기 전에 베개에 한방울 떨어트리고 자면 그나마 아침까지 깨지 않고 잘 수 있었다. 요즘 둘 사이에 찾아온 권태기도 잠을 못자서 그런 거라고 지성은 생각했다. 저가 예민하게 굴어서 이렇게 된 거라고, 그러니까 잠을 푹 자면 우리 관계도 나아질 거라고. 지성은 그렇게 믿었다.

한참을 서재에서 작업을 하던 지성은 저녁시간이 되었을 무렵 방에서 나왔다. 동혁이 좋아하는 김치찌개를 끓이고, 밑반찬도 몇개 꺼냈다. 요리에 '요'자도 몰랐었는데 이제 김치찌개 하나만큼은 자신있게 만들 수 있었다. 밥을 두공기 푸고, 식기도 2세트 놓고. 2인분 상을 만들어놓고 지성은 혼자 밥을 먹었다. 다 비워진 제 그릇만 설거지를 하고, 밥상보를 덮어놓았다. 물론 야근을 하고 오는 동혁이 지성이 차려놓은 밥을 먹진 않을테지만, 그냥, 기다렸음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지성은 잘 준비를 하고는 베개에 수면향을 한방울 똑 떨어트렸다.

또 다시 이른 아침,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지성이 잠에서 깼다. 몸을 일으키자 여느때와 같이 동혁이 분주하게 출근 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더 자. 오늘도 늦어."

"오늘도..?"

오랜만에 반문을 해오는 지성에게 동혁은 잠깐 시선을 주더니 응, 하고 짧은 답만 하고는 방을 나섰다. 지성은 그런 동혁을 가만히, 또 바라만 봤다. 끼익—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지성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무언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꾹 참아냈다. 울지마. 박지성, 절대 울지마. 오늘은 지성과 동혁의 7주년이었다.

겨우 마음을 다스린 지성이 평소보다 일찍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열고, 청소기를 돌리고, 식탁을 치웠다. 간단하게지만 점심도 챙겨먹었다. 오랜만에 점심을 먹으려니 속이 더부룩한 기분이었지만, 지성은 꿋꿋하게 몸을 움직여 나갈 채비를 했다. 오랜만에 입은 외출복이 헐렁했다. 햇볕을 못봐서 허여멀건한 피부와 살이 바짝 빠진 팔다리, 헐렁한 옷까지. 이 정도면 질릴만 하네.. 지성은 거울속에 비친 제 모습이 너무 못나보여서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오랜만에 햇빛 아래에 선 지성은 작렬하는 태양에 눈살을 찌푸렸다. 힘이 나는 것 같기도, 빠지는 것 같기도 한 기분이었다. 오늘 가려고 계획한 곳을 다 가려면 서둘러야 했기에, 지성은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새삼스럽게 활기찼다. 온갖 색들로 가득한 곳에서 홀로 색이 없는 것만 같았다. 

시내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몇 주 전부터 겨우 예약한 수제 케이크 맛집에서 케이크를 픽업하고, 동혁이 즐겨 마시던 와인도 한병 구매했다. 선물은 그가 뭘 좋아하는지, 뭐가 필요한지, 마땅히 떠오르지가 않아서 사지 않았다. 전에는 다 알았던 것들을 지금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게 지성은 조금 슬프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저녁 장을 보고, 지성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동혁이 늦는다고 하긴 했지만, 지성은 저녁 시간에 맞춰 식사를 준비했다. 조금 서툴지만 스테이크도 구워보고, 감바스도 준비했다. 얼마나 늦을지 모르니, 완성은 조금 뒤로 미루고, 지성은 식탁에 앉았다. 오늘따라 동혁을 기다리는 시간이 느리게만 가는 것 같았다. 기억을 더듬어 동혁이 야근을 끝내고 오는 시간을 떠올렸다. 늦어도 10시 전에는 들어왔던 것 같으니까.. 지성은 휴대폰으로 시계를 봤다. 이제야 8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한참을 식탁에 앉아있던 지성은 울음을 꾹 참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 식은 음식들을 뒤로 하고는 케이크에 붙여놨던 초도 후, 입김을 불어 꺼버렸다. 현재 시각은 새벽 3시였다. 이렇게까지 늦은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지성은 덜컥 겁이 났다. 우리 기념일인 걸 알고, 일부러 집에 들어오지 않은 거라면? 지성은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눈가를 벅벅 비볐다. 그냥, 자자. 그가 돌아올 때까지 잠들자. 아주 오래오래 자고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지성의 발걸음은 서재로 향했다.

"지성아. 지성아, 일어나봐."

저를 깨우는 손길에 지성이 느리게 눈을 떴다. 얼마나 잔 거지.. 영 가늠이 안가서 창문을 바라보니, 햇살이 드리우고 있었다. 문득, 이 시간에 제 눈앞에 있는 동혁을 보고, 의문이 들었다.

"왜 불편하게 여기서 자고있어."

"형, 왜, 어.. 왜 집에 있어?"

지성이 횡설수설하며 묻자 동혁이 씨익 웃어보였다. 얼마만에 보는 웃음인지, 반가울 지경이었다. 동혁은 붉은 장미꽃다발을 지성에게 건넸다.

"어제 우리 7주년이었잖아. 일찍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터져서.. 늦어서 미안해."

동혁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쓸며 말하자, 지성의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으이구, 섭섭했어? 동혁이 지성을 끌어당겨 안자, 그 품에서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내가 싫어진게 아니었어. 일부러 늦게 온게 아니었어. 동혁이 몸을 들썩이며 우는 지성을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주었다.침실로 자리를 옮긴 둘은 가만히 서로를 끌어안은 채로 누워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서로의 온기만을 느끼며.

"우리 여행이라도 갈까?"

동혁의 잔잔한 목소리에, 지성이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이대로 있고 싶었다. 이게 꿈이면 어쩌지. 지성은 불안했다. 동혁은 그런 지성의 등을 쓸어주며 그를 안심시켰다. 따스한 손의 온기가 등줄기에 전해졌다. 이게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아.. 지성이 동혁을 더욱 끌어안으며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잔잔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져들었다.

매번 눈을 뜨던 시간에 지성은 번쩍 눈을 떴다. 항상 덩그러니 혼자 남아있던 침대에 동혁이 누워있었다. 일어났어? 부드럽게 웃으며 지성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를 보니 지성은 왠지 눈물이 차올랐다.

"으이구, 왜 울어"

동혁이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주었다. 지성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작게 웃어보였다. 맞아, 원래 이랬었지. 잠깐 안좋았던 거야. 맞아.. 지성이 저를 바라보는 동혁의 뺨에 입을 맞췄다. 더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형, 오늘은 출근 안해..?"

"응, 며칠 휴가냈어."

이불에 둘둘 말려서는 식탁에 앉아있는 지성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동혁에게 묻자, 동혁은 대수롭지 않게 답을 했다. 지성은 무어라 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형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리고는 제 눈앞에 차려진 식사를 바라봤다. 따끈한 밥과 김치찌개, 계란 프라이와 소세지. 아침이라 간단하게 차렸다며 수저와 함께 제 앞에 앉는 동혁. 지성은 이 일상적인 아침이 반가웠다.

"휴가도 냈고, 날도 좋은데 드라이브라도 갈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침실로 돌아와 앉아있으니, 동혁이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지성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내일, 내일 가자."

그래, 동혁이 부드럽게 웃었다.

"아, 비 오네."

아침부터 우중충하던 하늘이 별안간 빗방울을 쏟아냈다. 이제막 집을 나서려던 둘은 발걸음을 멈췄다. 동혁은 아쉬운 눈치였지만, 지성은 어쩔 수 없다는듯 짐을 내렸다. 동혁이 비 오는 날을 굉장히 싫어하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좋아했지만 이제는 몸 챙긴다고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요 앞이라도 다녀올까?"

그래서 지성은 동혁의 말에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현관에 서서 제게 말을 걸어오는 동혁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꺼림칙한 기분. 이 사람,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나? 지성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동혁을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내, 내일 가자. 아직 휴가 남았지..?"

동혁은 또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지성은 이상하게도 심장이 쿵쿵댔다. 기분 좋은 박동은 아닌듯 했다. 하지만 지성은 애써 그 느낌을 무시한채 동혁을 끌어안았다. 그러면 동혁 역시 지성을 끌어안으며 귓가에 사랑을 속삭여주었다.

집안에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장마도 아닌데 일주일 내내 비가 내렸다. 매일같이 밖을 나가자는 동혁에게 지성은 비 핑계를 대며 집안에 머물렀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동혁에게서는 낯선 느낌이 났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제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동혁을 믿고 싶었다. 항상 제 곁을 지키고, 저를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는 동혁을 사랑했다.

"형은, 진짜가 아니지?"

지성의 말에 동혁의 표정이 묘했다. 분명 웃는 얼굴인데도 어딘가 공허했다. 동혁의 표정에 지성은 쓰게 웃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으나 이렇게 확인사살을 당하니 씁쓸했다. 이렇게 행복한 나날이 모두 거짓이었다니. 지성은 모든게 허탈해졌다.

"진짜, 가짜가 그렇게 중요해?"

동혁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진짜 나보다 내가 더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지성은 동혁을 가만히 바라봤다. 동혁의 눈에 지성이 가득 담겨있었다. 이렇게 형의 눈에 가득 담겨본지가 언젠지. 생각할수록 스스로가 비참했다. 그럼에도 지성은 이곳에 남아있을 수 없었다. 지성의 마음을 눈치챈 동혁이 지성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여기도 다 네가 만든 거야. 네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어. 너도 여기가 더 행복하잖아.."

"응.. 그치. 나도 여기 있는게 더 행복할 거야. 하지만 내가 여기 있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슬퍼할 거야."

"그걸 어떻게 장담하는데? 그도 지금이 더 행복할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밖에.. 비가 그치지 않잖아."


동혁의 뒤로 보이는 창문으로 비가 세차게 내리는 바깥 모습이 보였다.

늦은 밤, 동혁은 불이 꺼진 집에 들어섰다. 동혁이 관리하던 서버가 터지는 바람에 3일간 밤낮없이 일만 하다가 겨우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집을 비운 사이, 지성에게서 연락 한통 없는게 이상하다 싶었지만, 잠금화면에 떡하니 쓰여있는 기념일 날짜를 보고 아차싶었다. 7주년이 이틀 전이었다.

무드등이 미약하게 빛나는 어두운 거실, 지성이 차려놓았을 저녁밥 냄새. 이런 익숙한 풍경이 저를 반겨야하는데, 오늘은 이상했다. 빛 한점 없이 어둠만이 내려앉은 거실과, 음식이 상한 냄새. 동혁은 예쁘게 포장된 장미꽃다발을 거실 테이블에 올려두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빨래통에 넣고 부엌으로 가니, 식탁에 다 상한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한켠에 놓인 케이크 위에는 불을 붙였다 끈 흔적이 있는 초가 꽂혀있었다. 케이크 옆에 놓인 메모를 발견한 동혁이 천천히 글을 읽어내렸다.

7주년 축하해. 그동안 미안했어. 사랑해.

짤막하게 적혀있는 메모를 읽은 동혁은 사색이 되어 온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머릿속을 가득 메워 정상적인 사고가 안되었다. 항상 함께 잠들었던 침실부터 드레스룸, 화장실, 손님방까지. 문을 모두 열어봤지만 지성이 보이지 않았다. 동혁은 마지막으로 남은 지성의 서재 앞에 섰다. 불안감에 손이 덜덜 떨려왔다. 문고리에 손을 올려 돌려봤지만, 문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동혁은 거칠에 문을 두드렸다.

"지성아, 박지성! 안에 있으면 대답해!!"

아무런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자 동혁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어디선가 봤던 열쇠를 찾아 온 서랍을 뒤적거렸다. 열쇠뭉치를 찾아 다시 방문 앞에 선 동혁이 열쇠를 하나하나 맞춰봤다. 손이 너무 떨려와서 몇번이고 헛손질을 하는 탓에 동혁은 작게 욕을 뱉어냈다. 달칵,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항상 지성의 향기가 풍겨오던 서재에서는 낯선 향기가 가득했다. 독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진하게 풍겨오는 향기에 동혁은 인상을 찌푸리며 창문을 활짝 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방에 향기가 스민 것인지 향은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동혁은 천천히 걸어서 간이 침대 앞에 섰다. 낯선 향을 내뿜는 액체가 베개를 모두 적시고도, 바닥까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지성이 고요하게 누워있었다. 아마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겨있었을 투명한 유리병이 간이 침대 옆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작은 유리병을 집어든 동혁이 사용법을 찬찬히 읽어내렸다.

당신의 수면을 책임질 수면향! 자기 전 베개에 한방울 떨어트리면 만족스러운 수면을 보장합니다!

⚠ 주의 - 스포이드를 사용해 한방울씩 사용하십시오. 과도한 사용은 건강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동혁은 다시 시선을 돌려 축축한 젖어있는 베개를 바라봤다. 냅다 들이부은 정도로 젖어있는 모양새에 골이 아파왔다. 요즘 지성이 불면증으로 고생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 자신이 한심했다. 예민한 반응도, 무기력한 행동도, 모두 잠을 못자서 그런 것일텐데 그거 하나 이해해주지 못하고 결국 이런 이상한 약품을 쓰게 하다니. 죄책감이 온몸을 뒤덮었다. 미동도 없는 지성의 손을 살며시 잡고는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동혁의 전화에 부리나케 달려온 이는 오랜 친구이자 의사인 인준이었다. 인준은 집안에 들어서서 땀을 닦아냈다. 동혁이 안내하는 방에 들어서자, 훅 끼쳐오는 독한 향기에 인상을 구겼다. 지성의 상태를 살피고, 유리병의 사용법도 읽었다. 아무런 표정도 담기지 않은 동혁의 얼굴을 보고, 인준은 조금 마음이 불편했다. 걱정이라도, 불안이라도 담겨있을 줄 알았는데 모든 것을 포기한 이의 얼굴을 하고 있다니. 영문을 모르겠는 인준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중독인 것 같아. 그냥 잠든 거니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 문제는.."

본인의 의지 없이는 깨어나기 어려울 것 같아. 인준의 말에 동혁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아무런 표정도 담겨져 있지 않던 얼굴이 눈물로 얼룩졌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동혁을 보고, 인준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지성이 좀 잘 보살펴줘라."

지성의 팔에 링거를 연결한 인준이 집을 나서자, 동혁은 또다시 혼자 남아 지성의 곁을 지켰다. 간이 침대 옆에 앉아서, 지성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렇게 따듯한데, 왜 너는 눈을 뜨지 않니. 너는 꿈 속에서 뭘 보고 있니.

동혁은 쌓여있던 휴가를 전부 써버렸다. 휴가도, 밤낮도 없이 열심히 일을 해온 그간의 모습을 고려해 회사에서는 휴가를 승인해주었다. 지성이 잠든 집안은 미치도록 고요했다. 내가 나가면 너는 이 지독한 적막 속에서 혼자 있었니. 동혁은 괜시리 가슴 한켠이 아렸다. 침실로 옮겨진 지성은 여전히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동혁은 그의 손을 잡고 하루를 보냈다.

"이동혁, 밥 먹어."

링거를 갈아주러 방문한 인준이 동혁을 끌어내며 말했다. 동혁은 인준의 손을 뿌리치고는 다시 지성의 옆에 앉았다.

"내, 내가 나간 사이에 일어날 수도 있잖아.."

인준은 거칠게 머리를 헤집었다. 동혁은 이미 사람꼴이 아니었다. 잠도 안자고, 밥도 안먹고 오로지 지성의 곁을 지켰다. 사람이 이렇게 단시간에 초췌해질 수 있나 싶을만큼 동혁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 차라리 누워있는 지성이가 더 건강해보일 지경이었다.

"너까지 쓰러지고 싶어? 얼른 밥 먹어."

"..그동안 힘들어 했는데, 내가 옆에 없었어."

"....."

"힘들어하는거 알았는데, 모른척 했어."

동혁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이번에도 내가 옆에 없으면 어떡해.."

기어이 눈물을 툭 떨어트리는 모습에, 인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상태에서는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터였다.

"지성이가 눈을 뜨자마자 네 모습을 보면 어떨 것 같은데?"

그럼에도 인준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의사야. 나한테는 지금 잠들어있는 지성이도, 다 죽어가는 너도, 다 똑같아. 살려야 한다고."

동혁은 떨리는 눈으로 인준을 바라봤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지성을 위해서라도 동혁은 버텨야했다. 그가 깨어나기 전에는 쓰러질 수 없었다. 인준은 그를 다시 일으켜 이끌었다. 동혁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인준을 따라 걸었다.

지성이 쓰러진지 일주일이 꼬박 지났다. 동혁은 이제 어느정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지성의 곁을 하루종일 지키는건 다름이 없었다. 일반식은 삼키기 어려워 해서 인준이 사다주는 죽 따위를 데워서 지성의 옆에서 먹었다. 식사를 마치면 따듯한 물을 가져와 지성의 몸 구석구석을 닦아주었다.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수시로 자세를 바꿔주기도 했다. 다 죽어가던 동혁이 이제는 제법 사람꼴을 하고 담담하게 제 할일을 했다. 인준은 그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성아, 사랑해."

동혁은 매일같이 지성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다. 언제부터인가 하지 않게 된 그 한마디가 이렇게 후회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라도 말하면, 잠든 너에게까지 전해질까. 동혁은 그 한마디를 할 때마다 눈물이 흘렀다.

"..나,도.."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오고, 동혁은 고개를 들어 지성을 바라봤다. 가만히 감겨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뜨였다. 눈동자가 저를 선명히 바라보고 있었다. 동혁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지성의 뺨을 감쌌다. 이거 꿈 아니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동혁은 입술을 벙긋거렸다. 지성은 작게 웃어보이며 동혁의 손에 얼굴을 부볐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동혁은 고개를 저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토록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동혁이 힘없이 누워있는 지성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기다렸어. 어서와."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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