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글

상해

August8ight by Ros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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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은 꽤, 아니 사실 엄청 오랫동안이나 동혁을 짝사랑해왔다. 그게 그러니까 첫만남은 고등학교 때였나. 박지성이 열일곱, 이동혁이 열아홉때. 둘이 처음으로 서로를 바라본 그때가 시작이었다.

지성은 그날을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둘이 처음 서로를 바라본 그날 말이다. 대형 소속사로부터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지? 와 역시 에스엠. 동혁이 그 소속사에 연생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었는데, 지성은 역시 대단하다며 감탄사를 뱉어냈더랬다. 그 정도로 동혁의 호리호리한 몸매가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모습은 아름다웠으니. 웨이브를 저렇게나 아름답게 할 일인가.. 동혁의 몸짓에 온 마음을 빼앗겨 멍하니 바라만 보던 중 무대 위에 있는 그와 무대 아래 있는 제가 눈이 마주쳤을땐, 그야말로 황홀경. 사랑에 빠져버리고야 말았다.

그래, 사랑에 빠진 것까진 오께이. 그럴 수 있지. 근데 문제는 박지성은 신입생이었고, 이동혁은 고3이었다는거. 무슨 타임어택도 아니고 고작 1년동안 뭘해. 3학년은 수능이다 뭐다 하면서 동아리는 물론 학교 행사도 잘 참여 안하는데, 진짜 뭘 어떻게 해야 친해질 수 있지? 현재로서는 할 수 있는게 많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 해볼 수도 있는 거지. 일단 지성은 동혁이 속해있는 댄스동아리에 입부 신청을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초딩 때부터 갈고닦은 팝핀 실력으로 댄동 오디션에 가뿐히 통과한건 그렇다쳤는데, 3학년 부장인 동혁과의 1대1 면담이라니. 일이 이렇게 잘 풀려도 되는 건가? 아니 잘 풀리면 좋지. 근데 그걸 꼭 화장실에서 해야하나..? 지성은 갑자기 저를 따로 불러내더니 화장실로 데려온 동혁 때문에 얼떨떨하면서도 심장이 두근거려 손끝이 조금 떨려왔다. 솔직히 장소가 화장실만 아니었으면 고백을 갈겨버렸을지도. 뇌에 힘주고 주먹도 꽉 쥐면서 참았다.

"너가 팝핀을 그렇게 잘 춘대매? 한번만 보여주라"

사뭇 진지한 얼굴로 한참이나 뜸을 들이더니 하는 말이 저거였다. 왜 하필 화장실에서..? 그치만 형이 보여달라면 보여드려야죠. —라고 하기엔 지성이 낯을 너무 많이 가렸고, 지금 심장이 너무 많이 뛰었고, 머리가 새하얘서 아무 생각도 안들었다. 장소가 하필 화장실인 것도 한몫하긴 했다. 지성이 조금 난감한듯 구니까 동혁은 픽 웃어보이더니 머리 슥슥 쓰다듬고 아이스크림을 하나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다음엔 꼭 보여줘~ 이러면서 웃는데,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서 혼자 한참을 화장실에 서있다 나왔다.

얼굴이 겨우 진정되었을 때 동아리실에 들어가보니 동혁은 없고 부원들만 빙 둘러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부실에서 진동하는 메론인지 참외인지 하는 그 냄새. 지성은 화장실에 서있다가 다 녹아버려 먹지도 못했던 아이스크림이 떠올라 또 괜히 뒷머릴 쓸어내렸다. 나한테 준건 초코비 모나카였는데(동혁이랑 아주 잘 어울리는 진한 초코 아이스크림이었다). 지금 이게 특별취급 아니면 뭐야.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동혁 역시 저와 비슷한 마음인게 아닐까 희망도 품었더랬다. 뭐.. 며칠도 못가서 아니라는거 확인사살 당했지만.

도대체 어디서 어떤 접점을 가졌길래 저 둘은 연애를 하는 걸까. 지성이 혼자서 김칫국을 사발로 드링킹하고 있을 무렵, 동혁은 연애를 시작했다. 그것도 지성이랑 같은 학년(그러니까 1학년) 여자애랑. 여자애가 지성의 옆반인건 운명의 장난인가. 쉬는시간마다 복도 앞에 나타나서는 꽁냥꽁냥.. 그걸 코앞에서 직관해야하는 복도측 맨끝자리 박지성은 괜히 심통이 나는 것이다. 아니 무슨 연애 한번 하는데 저렇게 요란법석하게 해.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근데 진짜 둘이 어쩌다 사귀게 된 거야? 동혁은 같은 동아리인 자신조차도 쉬이 만날 수 없는 고3인데.

지성의 궁금증은 의도치 않게 금방 풀어졌다. 동혁이 생각보다 훨씬 학교에서 인기스타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든 생각은, 와 역시 에스엠.. 진짜로 연생도 아닌데 팬을 보유하고 있으니 앞으로 뭘 하든 대성할게 훤히 보였다. 아니, 중요한건 그게 아니지. 자칭 동혁의 팬클럽(ㅋ) 'Full Sun'에서 「이동혁 연애 사건의 전말」을 낱낱이 파헤쳐낸 것이 중요한 거였다. 솔직히 박지성 입장에서는 약간 소름돋는 행동이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뭐.. 당사자인 이동혁도 가만히 있는데 박지성이 뭐라 말 얹을 입장은 아니니까.

어쨌거나 밝혀진 바로는 여자애가 냅다 찾아가서 고백을 갈겼단다. 근데 그걸 이동혁이 받아줬고. 아니 그렇게 쉬운 거였어? 지성은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슬쩍 티라도 내볼걸 그랬나..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화장실은 오바였다. 그냥 저 여자애 얼굴이 취향일 수도 있는 거니까. 애써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해봐도 저도 모르게 입술이 삐쭉 나오게 된다.

그렇게 6개월. 고작이라고 쉽게 말했던 그 1년 중 고작 6개월이 지났다. 정말 말마따나 1년이 '고작'이라 후루룩 지나가버렸다면 좋았을걸. 1년은 커녕 6개월도 너무도 길었다. 너무 지쳐 마음이 너덜해질 정도로.

수업은 나름 잘 따라갔고, 성적도 공부한만큼은 나왔다. 친구들과도 곧잘 어울렸고, 맛없기로 소문난 학교 급식은 제법 입에 맞았다. 게다가 불순한 의도로 가입한 동아리 역시 상상 이상으로 재밌었다. 매일 똑같은 하루였지만서도 대부분 즐거운 나날이었다. 그런데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면, 매번 같은 자리에서 여친이랑 꽁냥거리는 동혁이 있는게 문제였다. 몇달은 지난 것 같은데 지나온 시간을 보면 고작 몇 주 지나있었다. 그래서 박지성은 자신의 시간이 이상하게도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걸 문득문득 체감할 때마다 지성은 마음이 이상했다. 제 시간을 이동혁이 가지고 노는 것만 같아서.

그럼에도 박지성의 마음은 항상 동혁을 향해 있었다. 여전히 동혁을 보면 두근거리는게 그 반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동혁이 저만을 봐주거나 그의 사랑을 갈구하진 않았다. 그는 애인이 있었고, 그런 사람에게 그런 행동을 하는건 실례니까.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줘야 한댔나. 사실 그거까진 모르겠고 그냥 지금의 관계와 거리에 만족한 걸지도 모른다.

사실 박지성과 이동혁은 지난 6개월동안 제법 가까운 형동생 사이가 됐다. 여름방학에 있었던 동아리 자체 엠티가 그 시발점이었다. 사실 대외적으로는 동아리 엠티지만, 실제로는 동아리원끼리 놀러간거에 가까웠다. 담당 선생님의 동행하에 부모님께 허락을 받은 동아리원끼리 서해안에 펜션 잡고 놀러간 거니까. 옛날부터 이어진 댄동만의 문화라나 뭐라나.

어쨌거나 거기서 우연찮게도 동혁과 이야기할 시간이 생겼고, 밤새 얘기를 나누고보니 바로 호형호제 하게 됐다. 너무 많은 과정이 생략된거 아니냐고? 어쩔 수 없다. 그때 박지성이 너무 정신이 없어서 기억을 거의 못하니까. 그냥 어렴풋이 기억나는 거라곤 춤에 대한 생각이나.. 앞으로의 진로 얘기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뭐 사적인 얘기는 하나도 안한 것 같은데 다음날부터 동혁이 친근하게 굴기 시작했다. 지성은 어리둥절 하면서도 가슴이 뛰었다. 어쩌면 더 가까워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에.

그런 지성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혁은 자꾸만 지성을 특별취급했다. 의미없는 다정은 죄인데, 이동혁은 자꾸만 박지성에게 죄를 저질렀다. 이 극악무도한 사람 같으니. 그의 의미없는 다정에 지성의 마음은 하루에도 몇번이나 롤러코스터를 탔다. 사랑해줄거 아니면 다정하지 말라구.. 속으로 수십번 되내인다. 정작 그의 다정이 고파서 아무말도 뱉어내지 못하면서.

"형은 공부 안해? 고3이잖아"

지성의 물음에 동혁은 눈을 도로록 굴리다가 찡긋 웃어보이면서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안해도 돼~ 손이랑 눈은 엄청 바쁜데 입은 한가한듯 말을 늘인다. 동혁은 좀.. 재수없게도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기억력이 좋다고 해야할지, 응용력이 좋다고 해야할지. 그냥 둘 다 훌륭한 걸지도. 그래서 남들 코피 쏟아가며 공부할때 박지성이랑 게임이나 한판 땡길 수 있는 거였다.

솔직히 지성의 입장에서는 남들한테 방해 안받고 같이 시간 보내는거? 완전히 땡큐다. 근데 그래서 더 문제다. 너무 좋으면 안되는데. 동혁은 여전히 잘만 연애중이다. 이러고 저한테 편히 기대어 게임을 하다가도 여친한테 연락 오면 홀랑 일어나서 나가버릴걸.

"나 잠만 나갔다 온다잉~ 어, 애기~"

이거봐.

그리고 며칠뒤 복도가 난리가 났다. 옆반의 '그' 여자애가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다. 그런데 시선은 온통 지성을 향해 있었다. 박지성이 뭘 잘못했냐고? 그런건 없다. 지성은 이 상황의 최대 피해자일 뿐이다.

"그런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만 울어"

"그런게 아니면 뭔데! 맨날 박지성, 박지성! 둘이 사귀냐고!!"

솔직히 박지성은 저기서 자기 이름이 왜 나오는지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동혁의 여친이 지성의 존재 때문에 뭔가 울분이 터진 것 같긴 한데.. 지성은 자신이 함부로 끼어들 일이 아니니 그냥 모른척하고 있었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자는 척을 했다. 아무것도 못들은척, 어떤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는척. 자리가 바뀌어 창가쪽 두번째 줄에 앉아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사람들의 시선은 지성의 뒤통수에만 박히니까.

둘은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그리고 예비종이 치기 직전에 깨지고 끝났단다.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동혁의 결별 소식은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다. 그걸 보면서 지성은 동혁이 형도 참 피곤하겠구나 싶었다. 그 사랑싸움의 원인인 본인도 만만찮게 소문이 생겨났는데 말이다.

이제 이동혁은 애인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다가갈 수도 없다. 그건 동혁의 이별 사유가 박지성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혁이 아예 연애를 끊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이 이동혁은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이다. 그런 동혁이 다시 솔로가 됐다는건, 다시 기회가 생겼다는 뜻. 그래서인지 연애가 깨졌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이때다 싶어서 고백을 갈겨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동혁은 고백을 전부 거절했다. 웃는 낯이었지만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쯤되면 사람들도 포기할만 한데, 하루가 멀다하고 동혁은 고백을 받았다. 그걸 보면서 지성은 또 소름 돋는다고 생각했다. 동혁을 좋아한다면서, 동혁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습이 참 모순적이었다.

이쯤되니 동혁과 지성의 관계는 조금 미묘해졌다. 박지성 때문에 애인과 깨진 이동혁. 여전히 이동혁을 좋아하는 박지성. 그런 둘이 찰싹 붙어다니는 이상한 상황. 둘이 하도 붙어다니니 사귀는거 아니냐는 말을 골백번쯤 들었다. 그 덕에 동혁이 공책 한장 찢어다가 [사귀는거 아님!!] 적어서 등판에 붙이고 다니려는거 겨우 뜯어말렸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체면이라는게 있잖아. 일단 말리긴 했는데, 진짜로 공책 한장 찢으려 하기에 지성의 마음은 조금 찢어졌다. 나랑 사귀냐는 말이 그렇게 싫은가..

그런거치고는 이동혁의 박지성 특별취급은 변함이 없었는데,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정말 무슨 썸이라도 타는 것마냥 구는 것이다. 그래놓고 지성의 마음을 북북 찢었다가 다시 꼭꼭 붙였다가, 아주 혼자 병주고 약주고 다 해먹는다. 그래서 지성은 제 마음을 도무지 다잡을 수가 없었다. 선을 지키려 하면 이동혁이 선뜻 선을 넘어오고, 다가가려 하면 이동혁은 한발 물러서니까.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박지성은 이동혁이 어렵다.

정말이지 어렵다, 어려워. 또 진전없이 시간은 흘렀고 동혁의 수능이 다가왔다. 평소엔 잘난 머리만 믿고 공부도 안하는 사람이 수능이라고 며칠이나 잠수타고 공부만 했단다. 학교에서는 도무지 만날 기회가 없으니 지성은 꼭두새벽부터 수능 응원을 왔다. 와, 나 진짜 이동혁 사랑하는듯. 졸린 눈 비비면서 속으로 킥킥 웃으며 동혁을 기다렸다.

"와! 우리 지생이 형 응원왔어? 감덩~♡"

핫팩 쪼물거리며 꽁꽁 언 손을 녹이고 있으니 별안간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니 추위에 뺨이랑 코가 발갛게 물들어 있는 동혁이 있었다. 그래서 지성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핫팩을 동혁의 뺨에 대주었는데, 그거에 동혁이 눈에 띄게 놀라버려서 얼른 손을 떼버렸다. 그리고는 냅다 주머니에서 가나 초콜릿 하나랑 자기가 쓰던 핫팩을 쥐어주고 도망쳤다. 이럴걸 예상한건 아니다만, 응원은 초콜릿 껍데기에 '수능 홧팅!'이라고 적어놓은 개발새발 글씨가 대신해줬다.

수능이 지나갔다는건 동혁의 졸업이 다가온다는 뜻. 수능이 끝난 고3은 고삐가 풀린 망아지마냥 폭주하기 시작했다. 형형색색으로 물든 머리칼 중에서도 제일 눈에 띄는건 동혁의 빨간 머리였다. 전교생 모아놓고 봐도 바로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붉은색. 사람들은 톤그로라면서 웃고 떠들기 바빴는데, 지성은 그게 너무도 잘 어울려 보였다. 왜 동혁의 팬클럽 이름이 'Full Sun'인지 알 것 같았다. 저만큼 태양과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태양을 연상시키는 붉은색이 마치 이동혁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이때쯤의 지성에게는 큰 고민이 하나 있었다. 진로? 학업? 그런게 지성에게 뭐 대수겠냐. 당연스럽게도 이동혁에 관한 고민이었다. 이동혁은 여전히 애인이 없다. 그리고 여전히 박지성을 특별취급 한다. 수능 끝나자마자 지성을 데리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많은 시간을 지성과 보냈다. 그렇다면 둘은 썸인가? 이건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고민이었다. 이제 1년의 타임어택이 끝나간다. 고백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열일곱 박지성 인생 최대의 고민이었다.

그래, 하자. 해도 후회하고 안해도 후회할 거면, 일단 해보고 후회하자. 이제막 열여덟이 된 지성은 마음을 굳혔다. 그새 마음이 좀 성장한 것 같기도. 어차피 졸업식이 끝나면 동혁과는 보지 못한다. 그러니까 졸업식날 고백하자. 그날은 동혁의 학교생활과 지성의 사랑, 두가지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맺게 된다.

"형, 졸업 축하해요."

졸업식이 끝나고 사람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 동혁의 주변을 서성이며 쭈뼛거리고 있자니, 동혁이 먼저 다가왔다. 일단 축하한다며 꽃다발 하나 건네고, 사진도 한방 찍었다. 오늘 결말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저 사진은 지워질 수도 있겠지. 지성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긴장감에 숨이 모자르다. 크게 쉼호흡하며 동혁을 부른다.

"지성아, 우리 계속 연락하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조금 솔직해지자면. 지성은 꽤, 아니 사실 엄청 오랫동안이나 동혁을 짝사랑해왔다. —는 거짓말이고, 외사랑이었다. 언제부터일까. 언제부터 지성의 마음을 알아챘던 걸까. 수능 응원을 갔을때? 여름방학 동아리 엠티 때? 동아리 가입 후 1대1 면담 때? 어쩌면 첫만남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지성은 저를 향하는 동혁의 웃음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 웃는 얼굴이 가장 익숙한 사람은 박지성일테니까. 고백에 실패하면 연락처 지우고 잠수나 타려고 했더니만 이렇게 시도도 못해보고 차였네.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응, 그래."

박지성의 사랑은 그렇게 결말이 났다.

그래, 그렇게 끝이 났는데. 분명 그렇게 끝을 낸건 이동혁인데. 왜 이제와서 이러는지 모르겠다. 현재 박지성의 나이는 스물넷, 이동혁은 스물 여섯. 6년이 흘렀다. 박지성이 고백을 하기도 전에 차였던 그날이 자그만치 6년이나 흘렀단 말이다. 그런데 왜 이제서야 그런 얼굴로 나를 바라보지? 지성은 이 상황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계속 연락하자던 동혁의 말대로 둘은 연락을 해왔다. 서로 학교가 다르니 만나는건 몇번 못하긴 했는데, 전화나 톡으로 매일같이 연락을 나눴다. 서로 군대에 가있을땐 곰신마냥 면회도 가고 휴가 나오면 서로 보러 가고 그랬다. 참나, 우리가 무슨 롱디도 아닌데. 지성은 이따금씩 이런 생각을 하곤 했지만 연락을 끊을 수는 없었다. 미련이 남아서.. 그래, 솔직히 그럴지도 모르지. 아주 천천히 시간을 들여 접어가는 마음이 아직 다 접히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 걸지도 모르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사람 어디갔어. 박지성이 예외인건지 아니면 그 말이 진짜 거짓말인건지, 시간이 지날수록 지성의 마음은 더 애틋해졌다. 그래서 지성은 동혁이 만나자고 땡깡을 부려도 이런저런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 오래되면 변질되기 마련이고, 지성은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들여야했다. 안그러면 어설프게 접힌 마음이 주름 가득한 상태로 다시 펴져 동혁에게 나쁜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이게 아직은 반듯하게 접혀있는 사랑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지성은 지금 상황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만나자는거 서른번쯤 거절하니 더는 거절하기가 어려워서 오랜만에 동혁을 만난 자리였다. 이제 거의 다 접었다지만 그래도 일말의 걱정은 남아있었는데, 막상 동혁과 만나니 지성의 걱정과는 다르게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같이 밥을 먹고, 영화도 한편 보고, 오락실 가서 게임도 하고. 꼭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좋았다. 근데 왜 지금? 왜 그런 표정을? 지성은 자신이 너무 잘 아는 얼굴을 한 동혁을 바라봤다. 약간 상기된 표정과 쭈뼛대는 몸, 무언가 망설이는 입모양. 졸업식때 자신의 모습이 비쳐보이는 것만 같았다.

"지성아"

막아야 한다.

"있잖아.."

들어서는 안된다.

"형"

"어?"

"둘이 하는 사랑은 오래 되면 식지만, 혼자 하는 사랑은 상해"

지성의 말에 동혁은 멈칫, 말을 멈춘다.

"말라비틀어지고 변질돼서, 더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게 돼"

"지성아"

동혁이 지성의 팔을 붙잡았다. 무언가 애처로운 표정. 지성은 괜히 시선을 피했다.

"나는 내 사랑이 그렇게 변해가는걸 볼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나는.. 그만뒀어"

"둘이, 둘이 하면 되잖아. 사랑이 상하기 전에 나 주면 되잖아"

"형,"

"나도 너를—,"

"형이 하는게 정말 사랑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꺼낼 수 없었을 거야"

"....."

"형이 하는건 사랑이 아니야."

지성은 저를 붙잡고 있는 동혁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조금 슬픈 눈으로 동혁을 바라봤다. 왜 이제 왔어. 조금만 빨리 오지. 내가 내 마음을 접기 전에 와주지. 겨우 접은 내 마음은 이제와 다시 펴봤자 주름만 가득할텐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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