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우유는 초코선배를 싫어한대
해성고에는 요즘 이상한 소문이 하나 돌고 있다. 딸기우유는 초코선배를 싫어한대. 라나 뭐라나. 어느 누가봐도 이상한 소문이지만, 해성고 학생들은 이 소문에 대해 익숙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음, 맞지. 딸기우유가 초코선배 싫어하지.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고? 그럼 일단 딸기우유랑 초코선배가 누군지부터 알아보자.
"지성아, 이것도 먹어봐. 진짜 맛있더라."
"지성아, 음료수 마실래?"
2학년 5반 창가자리에 앉아 간식 산에 갇혀 아기새마냥 간식을 받아먹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딸기우유' 박지성이다. 친구들에게서 온갖 간식거리를 받은 지성은 순하게 웃어보이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하, 귀여워. 저 미소 한번 보려고 용돈 탈탈 털어 매점 싹쓸이하는 보람이 있었다. 물론 지성이야 주는거 다 받아먹는 성격은 아닌지라 작은 간식거리 한두개를 빼고서는 다 돌려주는 편이었지만, 주변사람들은 지성에게 선물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이렇듯 지성은 반에서 제일 큰 키를 가졌음에도 귀여운 외모와 말랑말랑한 성격, 하찮은 행동으로 반 친구들뿐만 아니라 선배들에게도 와앙 사랑받고 있었다. 약간 다같이 키우는 한마리의 햄찌같은? 느낌이랄까. 이렇게 귀엽고 무해한 존재를 아끼지 않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어, 초코선배다."
수많은 간식거리 중에서 유독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딸기우유맛 사탕을 하나 까서 먹고있던 지성은 어디선가 들려온 작은 한마디에 멈칫, 복도를 바라봤다. 갑자기 차분해졌다고 해야하나, 어딘가 묘해진 분위기에, 친구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5반 학생들은 딸기우유와 초코선배의 소문에 관해서는 가장 잘 아는 이들이었다. 자기들의 딸기우유, 지성이가 초코선배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반응하는걸. 실제로 지성은 소문의 진위여부와는 관계없이 그 소문을 굉장히 싫어했다. 그도 그럴게 본인은 나름대로 조용하고 평범한 학교 생활을 한다고 여기고 있어서, 그 '초코선배'와의 소문은 달갑지 않았다.
그렇다면 '초코선배'는 누구일까? 초코선배를 찾으려면 3학년 교실로 올라가야한다. 3학년 6반 교탁 앞에서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이동혁이 바로 그 '초코선배'다. 해성고 왕자님 소리를 듣는 동혁은 학년 불문, 성별 불문, 만인에게 인기가 좋은 멋진 선배였다.
"초코초코~! 너는 딸기우유 어떻게 생각하냐?"
"엥? 걍 아무 생각도 없는데."
동혁은 친구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친구의 의도는 그 소문의 '딸기우유'를 묻는 것이었지만, 동혁은 말 그대로 딸기맛 우유를 생각했다. 역시 우유는 딸기보단 초코지. 딸기우유를 싫어한다기 보다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서 그렇게 답했을 뿐인데, 친구의 표정은 묘했다. 딸기우유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소문이 그렇게 파다한데, 아무렇지도 않다니! 쿨하다! 따위의 오해를 단단히 하고 있었지만, 그건 동혁은 모르는 일이니까.
이렇듯 동혁은 지성과는 다르게 제 소문에 그닥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건 동혁이 3학년이라 바빠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관심이 없는 것이었다. 입학할 때부터 초코라고 불려와서 그런가, 이름이 아니라 초코선배 따위로 불리는 것도 괜찮았고, 나 싫다는 사람 나도 싫다는 주의라 딸기우유가 저를 싫어한다고 해도 상관 없었다. 애당초 딸기우유가 누군지도 모르는걸. 동혁이 이토록 여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관심 많이 받는만큼 시기, 질투도 많이 받아본 사람의 연륜이랄까, 쨌든 그랬다.
그럼 이들은 왜 딸기우유와 초코선배로 불리게 된 걸까?
"너 또 초코 사탕 먹냐? 안질려?"
"응~ 난 초코 좋아. 맛있잖아."
사실 앞서 말했듯 동혁은 원래부터 초코라는 별명이 있긴 했다. 마치 황금비율로 잘 만들어진 밀크초콜릿 같은 피부에, 가까이 가면 어쩐지 풍겨오는 달달한 초코향, 그리고 항상 주머니에 넣고다니는 초코바닐라맛 사탕. 이 모든 조합이 동혁을 초코라고 불리게 만들었다. 이름을 외우기 보다는 초코향 나는 사람, 초코 사탕 먹는 사람 따위로 불리다보니 그냥 초코가 되어버렸다. 동혁도 그에 관해서는 딱히 불만은 없었다. 초코 좋아하는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지성은 달랐다. 지성과 딸기우유의 교집합이라고는 그냥 지성이 딸기우유맛 사탕을 자주 먹는다는 것 뿐이었다. 심지어 딸기우유는 잘 먹지도 않고, 딸기우유맛 사탕도 받은거 먹을 뿐인지라 고작 그 이유로 딸기우유라 불리는건 좀 억울한 부분이었다. 게다가 이상한 포인트에 집중하는 구석이 있다보니, 먹는건 사탕인데 불리는건 우유라는 점도 신경을 상당히 거스르는 부분이었다. 무슨 이유가 됐든, 지성은 부모님이 지어주신 예쁜 이름이 있는데도 저를 딸기우유라고 부르는게 정말 싫었다. 차라리 어렸을 때부터 저랑 닮았다는 햄찌가 별명으로는 더 나을 지경이었다.
"근데 지성이는 딸기우유맛 사탕 진짜 좋아하는 것 같애."
"맞아. 맨날 먹고 있잖아."
그래, 이런 말 들을 때마다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딸기우유맛만 받으니까 딸기우유맛만 먹는 건데.. 지성이 딸기우유맛 사탕을 먹은건 작년 11월이 처음이었다. 뭐, 그 뒤로도 몇번인가 먹기야 했지만, 그 전부터 다른 맛 사탕도 엄청 많이 먹었는데 유독 딸기우유맛 사탕 먹은 것만 기억 당했다. 이제는 아예 '딸기우유맛 사탕 = 박지성' 이라는 공식이 생긴 것인지, 매점의 딸기우유맛 사탕은 모두 지성의 몫이 되었다. 맛있기야 하니까 주는대로 먹고 있긴 한데, 이런 오해가 쌓이면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
딸기우유와 초코선배 소문의 시작은 약 한달 전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니까 개학을 하기도 전에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다. 시작은 아주 작은 부분에서부터. 원래 서로에게 별 관심도 없(어 보였)던 딸기우유와 초코선배가 졸업식장에서 왠지 서먹하게 구는게 시작이었다.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지성이 일방적으로 동혁을 불편해했다. 안그래도 전교생의 관심 받으며 온갖 모에화를 당하는 입장인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 변화는 생각보다 큰 관심을 받았다.
우리 딸기우유가 왜 저러지? 초코선배가 왜 저러지? 저 둘이 왜 저러지? 이런 작은 의문들이 모이고 모여 최대치에 달했을때, 하나의 목격담이 튀어나왔다. 별관 계단에서 둘이 무슨 일이 있었다! 목격자는 지성과 같은 반인 A양이었다.
A양의 증언은 이러했다. 졸업식이 끝난 후, 뒷정리를 하느라 잠깐 별관에 들렀다가 둘이 함께 있는걸 보았다는 것이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둘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고, 별안간 그만하라며 소리치고는 얼굴을 가린채 냅다 달려가는 지성을 봤더랬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설렁설렁 걸어가는 동혁도 봤고. A양의 증언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강경 딸기우유파에서는 지성이처럼 순하디 순한 아이가 그러는 이유가 있을 줄 알았다며 괴롭힌거 아니냐는 반응이었고, 초코선배파에서는 A양의 말만으로는 그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다며 초코선배가 직접 말을 꺼낼 때까진 중립을 유지하겠다는 반응이었다. 무슨 연예인들 가십거리마냥 생각보다 큰 관심을 받게 된 지성은 그게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아무 일도 없었다며 사람들을 피해다녔고, 동혁은 여유롭게 웃으며 궁금해? 궁금하면 500원~ 따위의 드립을 쳤다. 둘 다 정확한 입장 발표를 하지 않는 바람에 사람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진짜 초코선배랑 아무 일도 없었어?"
"그래! 우리한테는 말해줘도 되잖아!"
"아니..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혹시 협박 당하고 있는 거라면 딸기우유맛 사탕을 흔들어주세요."
"저기, 내 말 듣고 있어?"
지성은 이 말을 도대체 몇번이나 해야 소문이 사드라들지 궁금했다. 진짜 할 수만 있다면 이마랑 등판에 커다랗게 써놓고 다니고 싶을 지경이었다. 초코선배랑 아무 일도 없음!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제 체면이라는게 있으니 충동을 잘 눌러담고 있었다. 이럴 때마다 지성은 매번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앵무새 인형이 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매번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친구들도 모두 앵무새 인형 같았고. 이래서 그 사람이랑은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지다 못해 땅바닥에 흡수가 되어버린 소문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야! 어디가!"
물음표 살인마는 하나만 있어도 지치는데, 3명에게 둘러쌓여 있으니 기운이 쪽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지성은 조금 눈치를 살피다 냅다 도망을 쳤다. 뒤에서 저를 향한 외침이 들려왔으나,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부른다고 돌아갈 거였으면 도망치지도 않았겠지.
"형 때문에 진짜아.."
"왜애~ 또 무슨 일인데~"
지성이 향한 곳은 소문의 근원지, 별관 계단이었다. 미리 약속이라도 한듯 먼저 와있던 동혁이 지성을 반겼다. 동혁을 따라 벽에 기대 선 지성이 작게 투덜거렸다. 이에 동혁은 지성을 살짝 안아주며 달랬다.
"형은 소문도 못들었어요?"
"무슨 소문?"
"그.. 딸기우유.."
"아아, 그거 왜? 나는 별로 상관없는데?"
"와아.. 진짜 상관없어요? 내가 형 싫어한다구 소문난 건데?"
동혁의 반응에 지성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먼저 고백한건 자기면서! 사실 이 둘은 지난 겨울의 첫눈 오는 날, 동혁이 지성에게 고백을 해서 사귀는 중이었다. 오늘부터 1일이라며 동네방네 소문을 잔뜩 내고 싶은데, (저도 학교에서 유명인사면서) 동혁의 인기가 부담스럽다며 비밀연애를 제안한 지성 덕분에 동혁은 날이 갈수록 연기력이 늘어가고 있었다. 뭐, 연기가 너무 완벽한 나머지, 사실과 정반대의 소문이 나버렸지만 말이다.
"엥? 딸기우유가 너였어?"
"뭐예요.. 그게 누구 때문에 생긴 별명인데.."
지성의 말에 오히려 당황스러운건 동혁이었다. 그런 소문이 있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 당사자가 지성인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동혁의 진실적인 반응에 지성은 소문이 어쩌다 생겨났는지 얘기해줬다.
"진짜아.. 형 때문에 이게 뭐예요.."
"어어? 이게 내 탓이야? 너가 나 피해서 그런 거잖아~"
지성이 작게 투덜거리며 입술을 삐죽거리자, 이에 동혁은 억울한듯 말했다. 물론 지성을 질책할 마음은 단 1g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목소리는 장난치듯 가벼웠다.
"그때 계단에서 형이 내 말만 들었어도 이렇게까지 커지진 않았을 걸요?"
"너가 너무 귀여운데 어떡해."
"... 진짜아.. 부끄럽지도 않나봐.."
"울 애기 귀여운건 사실인데, 뭐가 부끄러워?"
볼을 발그레 물들인 지성을 가만히 보고있자니 더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동혁은 지성의 얼굴 여기저기에 꾹꾹 입을 맞췄다.
"아잏 그만해요!"
"싫은데~"
간지러운지 지성이 작게 앙탈을 부리자, 동혁이 이제는 집요하게 지성의 입술을 쫓으며 꾹꾹 입을 맞췄다. 쪽쪽소리가 나면 지성이한테 한소리 들을게 뻔해서 소리 안나게 조심하며 입술을 맞댔다. 하지말라며 동혁을 밀어내던 지성도 금방 기분이 풀렸는지 입술 한번 삐죽거리며 쪽, 뽀뽀를 해줬다. 물론 소리가 난건 예상치 못한 부분이라 제가 하고도 놀라버렸지만. 동혁은 그런 지성을 보면서 귀엽다며 또 뽀뽀를 잔뜩 해줬다.
"응? 방금 밑에서 무슨 소리 안들렸어요?
"아~무 소리도 못들었는데요~"
분명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지성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으니, 동혁이 지성의 뺨을 감싸고는 눈을 맞췄다. 집중하시죠, 박지성씨? 그리고는 딸기우유맛 사탕을 입에 물고 부드럽게 입술을 포갰다. 도톰한 입술을 한번 훑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지성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달달한 딸기우유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동혁은 자세를 고치는 척하며 지성의 뺨을 감싸던 손을 허공에 휘휘 저었다. 그냥 가라. 의미가 명백한 손짓에, 계단 밑에 있던 A양은 부리나케 자리를 떴다. 이번엔 소문이 어떻게 나려나. 동혁은 지성의 허리를 감싸안고 깊게 입을 맞췄다.
Epilogue 01
"자, 이거 선물."
"엥, 어.. 감사합니다..?"
지성은 얼떨결에 사탕을 건네받았다. 딸기우유맛이네.. 하얗고 분홍색인 사탕이 입안에 들어오며 달달한 맛을 냈다. 지성은 저에게 사탕 하나 쥐어주고 홀연히 자리를 뜬 그 선배를 가만히 바라봤다. 근데 저 선배 누구지?
"이거 먹어."
또다. 지성은 이번에도 제 손에 쥐어진 딸기우유맛 사탕을 한번 보고, 제 앞에 서있는 선배를 한번 봤다. 요 며칠 딸기우유맛 사탕을 정기배송 해주는 이동혁 선배. 지성은 초코선배인가 뭔가로 유명한 그 이동혁 선배가 저한테 왜 이러는지 궁금해졌다.
"지성이 딸기우유맛 사탕 좋아해?"
"어? 음.. 그, 런 편이지?"
지성은 갑작스런 친구의 물음에 애매하게 답했다. 그러고보니 요즘 딸기우유맛 사탕을 많이 먹긴 했지. 오늘도 입에 딸기우유맛 사탕을 물고 있으니, 주변사람들 눈에는 좋아하는 걸로 보일만 했다. 물론 맛이 없진 않으니, 제 입으로 나름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느샌가 사람들이 저를 딸기우유라 불러대는게 좋은건 아니었다. 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저를 그렇게 부르고 있는걸 이제와서 정정하기도 어려운 일이니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고보니 요즘은 그 선배가 안오네. 문득 든 생각에, 괜시리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제 별명 생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면서 요즘은 코빼기도 안보이는게 좀 서운하기도 했다.
"자, 이거."
그래서 지성은 동혁과 하교길에서 마주쳤을 때,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이번에도 사탕 하나 쥐어주고 가버리려는 동혁을 지성이 먼저 붙잡았다. 답지않은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래서 지성은 일단 붙잡기는 했으나, 막상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서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나온 사탕 하나.
"이, 이거 드세요.."
언제, 누구한테 받은지도 모르는 초코바닐라맛 사탕을 동혁에게 쥐어주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선 냅다 도망쳤다. 으아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제 바보같은 행동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동혁은 귓가가 발갛게 물든 지성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맛있게 먹어."
그날 이후로, 동혁은 훨씬 편해진 모습으로 지성을 대했다. 딸기우유맛 사탕 하나 쥐어주는건 똑같았지만, 머리를 쓰다듬는다거나 직접 사탕을 까준다거나 하는 소소한 행동들이 추가됐다. 아, 그리고 이름 불러주는 것도. 그냥 냅다 가버리던 전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긴 했으나, 여전히 무슨 의미로 제게 이러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만약 옆에서 누가 보고 있었으면, 초코선배의 여우짓이 만천하에 드러났을테지만 눈치좋고 똑똑한 동혁은 지성이 혼자 있을 때만을 노려 다가왔다. 인기 많은 것도 피곤한 일이라 매일 보고싶은 것도 꾹 참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어.. 근데 왜 하필 딸기우유맛이에요?"
일주일에 두어번은 같이 하교하는게 익숙해졌을 무렵, 지성은 이제껏 묻지 못했던 질문을 하나 던졌다. 동혁은 그런 지성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고는 웃어보였다. 조금 쌀쌀한 날씨, 어둠이 내려앉아 하나둘 켜지는 가로등, 조용한 거리, 나란히 걷는 우리. 동혁이 기다리던 그 타이밍이었다.
"너랑 닮아서."
동혁의 말이 충분한 답이 되지 못한듯 지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얗고 분홍색인 것도 너랑 닮았고, 부드러운 느낌도 너랑 닮았고, 달달한 향 나는 것도 너랑 닮아서, 볼때마다 네 생각이 나서 나도 모르게 사고있더라고."
지성은 제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가고 있다는게 여실히 느껴졌다. 동혁의 말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너무 잘 알겠어서, 부끄러웠다. 지성은 무어라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올해 첫눈이네."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던 와중에, 동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제야 하늘을 바라본 지성은, 작은 눈송이들이 내려오는게 보였다. 그 자리에 멈춰서서 눈송이를 하나 손에 받은 지성이 작게 웃었다. 동혁은 그런 지성의 손을 감싸쥐고는 물었다.
"나도 오늘부터 너랑 첫날해도 돼?"
환상적인 타이밍에 내린 첫눈 아래서 동혁은 고백했다. 좋아해, 사랑해 같은 진부한 말 하나 없이 담백하고 또 솔직하게. 지성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차가운 제 손을 타고 전해지는 동혁의 체온이 너무 따듯하게만 느껴져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근하게 내려오는 눈을 맞으며 둘은 손을 맞잡고 걸었다. 날이 너무 추웠는데도, 동혁의 손이 너무 따듯해서, 지성은 조금 열이 올랐다. 사실 딸기우유는 초코선배를 좋아하고 있었다.
Epilogue 02
2월 14일 별관 계단. 졸업식이 끝난 후, 뒷정리를 하는척 강당을 빠져나온 동혁은 역시나 슬쩍 빠져나온 지성과 몰래 만났다. 오늘은 발렌타인데이고, 지성이 특별히 기대하라고까지 했으니,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는걸 막기는 어려웠다.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붙잡히기 전에 바삐 걸음을 옮겨 계단을 오르니, 지성이 먼저 와서 동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울 애기~!"
"아앙 진짜아! 학교에서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동혁은 지성이 뭐라고 하든, 지성을 끌어안고 부둥부둥하기 바빴다. 학교에서 티 안내기가 여간 어려워야 말이지. 방학동안에야 학교 밖에서 주로 데이트를 하니, 학교 사람들에게 들킬 일은 없었지만, 졸업식인 오늘도 그렇고, 곧 있을 개학 후에도 비밀을 유지하려는게 좀 부담스럽긴 했다. 물론 원체 능청맞은 성격인 동혁에게는 큰 무리까지는 아니었으나, 생각하는게 그대로 얼굴에 내비치는 순딩이 지성에게는 미션 임파서블이 따로 없었다.
"형 이거.."
한참을 꼭 붙어서 꽁냥거리다가, 지성이 동전지갑에서 작은 초콜릿을 하나 꺼냈다. 초콜릿을 동전지갑에 넣고 다니냐고. 동혁은 지성이스러운 행동이 귀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진짜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야? 동전지갑도 꼭 자기처럼 동그랗고 귀여운 걸로 들고 다니는 지성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동혁이 지성의 손에 들린 초콜릿을 받으려던 찰나, 지성이 냅다 포장지를 까서 입에 넣었다. 동혁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이어진 지성의 행동에 기절할 뻔 했다. 달콤한 초코맛이 입안을 헤집었다. 혀가 섞일수록 초콜릿이 녹아 맛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동혁은 나름 열심히 입을 맞춰오는 지성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깊게 입을 맞췄다. 숨결이 조금씩 가빠지는게 느껴졌다.
"그, 으읍, 그만.."
초콜릿이 다 녹아 없어져도, 입술을 떼지 않는 동혁을 지성이 살짝 밀어냈지만, 동혁은 더욱 끈질기게 입술을 붙여올 뿐이었다.
"그만해요!"
지성이 동혁을 꾸욱 밀어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따끈했다. 입술도 좀 부은 것 같고.. 지성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려서 동혁을 밀어내고는 냅다 도망쳤다. 혹시 누구랑 마주칠까 얼굴을 다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혁은 그런 지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여튼 귀엽다니까. 얼핏 누군가의 그림자를 본 것도 같았지만, 크게 대수롭게 여기진 않았다. 이게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전혀 모르고서 말이다.
며칠 뒤, 학교에는 이상한 소문이 하나 돌았다. 딸기우유는 초코선배를 싫어한대!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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