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글

내가 알아서 해요

August8ight by Ros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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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 삐—, 삐—, 삐—

단조로운 기계음만 들려오는 VIP전용 병실에서 동혁은 조금 살벌하고, 조금 울 것 같은 얼굴로 앉아있었다. 낮게 내리깔린 시선 끝에는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는 지성이 있었다. 또 어딜 가서 이렇게 다쳐온 거야. 동혁은 항상 제멋대로 구는 제 파트너가 정말이지 너무 싫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싸가지 밥 말아 먹더니, 여전히 싸가지가 없다.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은 해줘야 할 거 아니야. 전담 가이드도 없이 혼자 현장에 나갔다가 이 지경이 되어 돌아온 지성이 바보같다고 생각했다. 진짜 싸가지가.. 어찌나 한결같은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존경심까지 들 정도였다. 좀 그런 애라더니 황런쥔 말 틀린거 하나 없었다. 아니 뭐, 다 알고 페어 맺은거긴 한데.. 정도가 좀 심하잖아. 동혁은 죽은건지 산건지 구분도 안되는 지성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불안정하던 가이딩 수치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안정됐다. 곧 죽어도 가이딩을 안받으려고 하니, 이렇게 기절해있을때 넉넉히 해둬야 했다.

페어가 교체되는 경우는 단 한가지. 파트너가 죽었을 때 뿐이었다. 그리고 이미 한번 파트너가 바뀐 동혁은 그 경험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근데 이 커다란 햄쥑이가 영 협조를 안한단 말이지. 괜히 지성의 손에 깍지를 끼고 세게 힘을 주었다.

큼지막한 손을 얼마나 주물거리고 있었을까, 지성이 느리게 눈을 떴다. 눈가에도 짙은 멍이 들어있어 초점이 잘 안잡히는지 한참을 꿈뻑꿈뻑 눈을 깜빡였다. 풉, 저러니까 좀 귀여워 보이긴 하네. 그러다가 동혁의 얼굴을 확인하고, 꼬옥 잡힌 제 손을 확인하더니 인상을 팍 구겼다. 아, 저건 안귀여워. 동혁의 손을 탁 쳐내고는 휙 돌아눕는 지성을 동혁은 가만히 바라봤다. 센티넬이면서 왜 가이딩을 안받는데? 가이딩 없으면 곧 뒤질 것 같은 꼬라지 하고 있으면서 도대체 왜? 목끝까지 차오른 말을 꾹 삼켰다.

"가이딩 받아. 지금 안받으면 너 죽어."

치미는 감정이 뭔지도 모르면서 꾹 눌러내고 한마디 뱉었다. 그러면 돌아오는 지성의 한마디.

"내가 알아서 해요."

기어코 저 말을 들었을 때, 동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입안이 텁텁했다. 여전히 뒷모습만 보여주는 지성을 한번 노려보고 병실을 나갔다. 그래, 뒤지든지 말든지. 니가 알아서 해. 쏘아붙인 말과는 다르게 문 밖에 선 동혁은 약하게 방사 가이딩을 풀었다. 저런 놈 뭐가 예쁘다고 내가 이러냐.. 그래도 이거라도 받아야 살지. 제대로 살리려면 망할 약이라도 먹여야할 것 같으니 담당 연구원 런쥔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파트너 곧 뒤질 것 같으니까 약 가져와.

한참을 문앞에 서있던 동혁은 저 멀리 런쥔의 모습이 보이자마자 뒤도 안돌아보고 발걸음을 옮겼다. 런쥔이 뒤늦게 동혁을 발견하고 부르던지 말던지 담배가 말렸던 동혁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흡연실로 향할 뿐이었다.

제법 사람이 들어찬 흡연실 구석에서 담배만 뻑뻑 피워대던 동혁은 혼자 남을 때까지 줄담배를 태웠다. 진짜 쟤는 뭐가 문제지? 근본적인 물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센티넬에게, 그것도 지성만큼 강력한 능력을 가진 센티넬에게 가이드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능력이 강한만큼 요동치는 파동을 잠재워줄 유일한 존재니까. 만약 잠재우지 못하면 능력이 폭주할테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주변을 위해서라도 센티넬에게는 가이드가 필요했다. 그래서 다른 센티넬들은 자기 가이드한테 집착? 뭐 그런 것도 한다던데. 쟤는 왜 안하냐고. 아니, 집착해달라는건 아닌데, 아니, 어휴.. 뭔 소리하고 있냐, 지금..

담배꽁초를 수북하게 쌓은 후에야 동혁은 흡연실을 나왔다. 아까 런쥔이가 약 가지고 왔을테니까.. 지금쯤이면 먹고 자겠지? 발걸음은 다시 지성에게로 향했다.

아니, 왜 아직도 안먹고 저러고 있냐. 다시 병실로 올라온 동혁은 약을 들고 앉아있는 지성과 눈이 딱 마주쳤다. 런쥔은 약만 주고 가버린건지 병실엔 지성 혼자뿐이었다. 아까 니 마음대로 하라고 승질 제대로 부리고 나갔는데, 가이딩 수치 확인하려고 다시 쪼르르 올라온게 조금 민망했다. 지성이 동혁의 얼굴을 웬일로 빤히 바라봤다. 언제는 눈만 마주쳐도 피하더니. 뭐, 왜, 뭐. 동혁은 오히려 뻔뻔하게 침대 쪽으로 걸어와 간이의자에 턱 앉았다. 강낭콩도 50개는 거뜬히 쥘 것 같은 커다란 손에 완두콩 같은 알약을 하나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있자니 비웃음이 절로 나왔다. 가이딩 한번 받으면 될걸 굳이굳이 약으로 능력을 제어한다니 우습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가이드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억제제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예전이야 부작용 문제로 수요가 많지 않았다지만, 요즘은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 부작용도 거의 없어 매칭률이 낮은 센티넬들이 페어 없이 약으로만 버티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근데 박지성은 아니잖아. 박지성과 이동혁의 매칭률은 무려 91%. 페어 중에서도 높은 축에 속하는 수치였다. 그런데 이런 유능한 가이드를 두고 왜 억제제 따위를 먹냐고. 동혁이 삐딱하게 앉아서 지성을 꼬라봤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지성은 떫은 표정을 한번 짓더니 약을 꿀꺽 삼켰다. 진짜 독하네. 물 한모금 없이 삼키냐.

사실 동혁이 억제제에 반감을 가진 이유는 비단 그가 가이드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종의 트라우마랄까. 동혁은 억제제의 부작용으로 능력 폭주가 일어난 순간, 그 현장에 있었다.

오로지 능력 억제에만 초점이 맞춰져있던 1세대 억제제에는 과복용시 능력이 되려 폭주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 사실이 밝혀진 사건이 바로 5년 전, '화염계 센티넬 폭주 사건'. 말 그대로 화염계 센티넬이 폭주하여 일주일 내내 도시가 불타오른 사건이었다. 물과 얼음 속성의 센티넬들이 대거 투입되어 일주일만에 불길은 잡았지만 도시 1개 전소, 사망자 2백여명, 부상자 5천여명의 피해를 입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붉은 일주일'. 그날 동혁은 제 파트너를 잃었다.

어느 정도 현장이 수습되었을 때, 떠난 사람들을 위한 추모식이 열렸고 동혁은 그곳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그 사람이 너무 많은 원망을 듣지 않기를. 동혁의 파트너가 바로 그 화염계 센티넬이었다.

파트너를 잃은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동혁과 파트너의 매칭률은 고작 30% 언저리였다고 했다. 그러니 가이딩이 제대로 되지 않아 억제제를 과복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을 이야기에, 동혁은 더이상 페어를 맺는게 무서워졌다. 고작 18살의 소년이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가혹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붉은 일주일 이후 5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동혁은 다른 센티넬과 페어를 맺지 못했다. 파트너가 없는 가이드는 다른 센티넬들의 백업 가이딩을 맡았는데, 백업이라는게 여기저기 호출될 일도 많고, 뼈 빠지게 굴러야 하는 탓에 대부분이 기피하는 업무였다. 그래서 다른 가이드들은 매칭률이 낮아도 페어를 맺곤 했는데 동혁은 그냥 조용히 백업 가이드로서 최선을 다했다. 또다시 자신 때문에 대참사가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야, 동혁아. 너 진짜 전담 가이드 안해? 언제까지 백업만 하게."

"안해. 안한다고. 너는 나한테 그런 말을 하고 싶냐?"

"니 능력 아까워서 그러지. 내가 니 담당 연구원인데 나 아니면 누가 이런 얘기 하냐?"

웬일로 개인 연구실로 호출하더니, 하는 말이 고작 전담 가이드 타령. 동혁은 심드렁한 얼굴로 런쥔이 내어준 과자를 씹어먹었다. 그러지 말고, 와작, 일단 리스트만, 와작, 한번, 와작, 너 지금 일부러 그러지. 앗 들켰넹? 얼마나 듣기 싫어 하는지, 미운짓만 골라하는 동혁의 등짝을 돌돌 말은 서류뭉치로 착착 때리던 런쥔이 서류뭉치를 다시 잘 펴서 동혁에게 건넸다. 이미 다 구겨진 서류를 느릿하게 눈으로 살피던 동혁은 한눈에 들어온 91이라는 숫자를 보고 눈을 빛냈다.

"이 수치 정확한 거지?"

"어. 당연하지. 근데 걔는—,"

"나 그럼 얘랑 할게."

"진짜 사람 말 좀 끝까지 들어주면 안되냐? 내가 말하려던게 걔 때문이야. 걔가 좀.. 그래, 좋은 애는 아니야. 매칭률이 압도적으로 높아서 리스트에 넣긴 했는데, 나는 비추천."

"얘 아니면 안해."

이미 마음을 정한듯 단단해진 눈동자에, 런쥔은 고개를 저었다. 저 눈을 하고 있을 때의 동혁은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안듣는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잘 됐어. 쟤를 언제까지 백업으로 둘 수는 없잖아. 생각보다 둘이 잘 맞을 수도 있는 거고. 런쥔은 나름의 행복회로를 돌리며 페어 승인 요청서를 작성했다.

"자, 인사해. 여기는 A급 센티넬 박지성, 여기는 A급 가이드 이동혁. 동혁이가 2살 형이야."

며칠 뒤, 요청서가 승인이 나서 처음으로 제 파트너를 만나는 날이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던 동혁은 곧 나타난 런쥔과 지성을 보며 작게 웃었다. 저 조그만 런쥔의 뒤에 서있는 커다란 남자를 보고 뜬금없게도 햄스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저 덩치에 어떻게 햄스터가 생각나?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동혁이 본 지성의 첫 인상은 순하게 생겼네, 정도였다. 좀 그런 애라더니 그냥 좀 조용한데? 런쥔이 옆에서 무어라 떠들든 말든 지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말뿐이 아니라 표정도 없고, 관심도 없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런 지성을 살피느라 동혁도 런쥔의 말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동혁과 지성의 무관심 속에서도 꿋꿋하게 설명을 마친 런쥔이 이제 둘이 알아서 친해지라며 자리를 떴다.

"뭘 그렇게 웃어요?"

목소리 진짜 낮네. 동혁은 처음 듣는 지성의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고 생각했다. 그 좋은 목소리로 뭔 말을 했는지는 그닥 신경도 안쓰고서. 동혁이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으니, 지성은 떫은 표정을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가? 동혁의 물음에,

"알아서 뭐하게요.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신경 꺼요."

와, 싸가지.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는 지성을 가만히 바라보던 동혁은 또 작게 웃었다. 꼭 하악거리는 길고양이 같은 느낌이라서.

지성은 A급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이리저리 호출되는 일이 많았다. 그의 능력은 얼음. 아마 이만큼 얼음을 잘 다룰 수 있는 센티넬은 전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일 듯했다. 이렇게나 유능한 파트너를 둔 동혁은, 기이할 정도로 한가했다. 그도 그럴게, 지성은 단 한번도 동혁을 데리고 현장에 나간 적이 없었다. 언제나 말 한마디 없이 지 혼자 나갔다가 병실에 누워있는 모습으로 다시 만났다. 처음엔 동혁도 긴급호출이었나 싶었지만 그게 몇번이고 반복되다보니 눈치를 채버렸다. 얘 가이딩 싫어하는구나.

지성이 자신이 아닌 가이딩을 싫어한다고 생각한 데에는 근거가 있었다. 그건 바로 런쥔의 말. 지성이 이렇게나 얌전하게 구는게 동혁이 처음이라고 했다. 첫만남부터 표정 썩어서 지가 알아서 한다고 그랬는데, 그게 얌전한 거였단다. 다른 가이드들한테는 관심도 안주고, 말도 안하고, 쳐다도 안본다고. 그나마 한마디라도 나눈 동혁이 대단한 거라고 그랬다. 나를 싫어하는게 아니라 가이딩을 싫어하는 거면, 뭐 해볼만하지. 동혁은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6개월째. 동혁은 여즉 지성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더 나아지는게 아니라 이젠 아예 다른 가이드들처럼 개무시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동혁은 점점 오기가 생겨났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나한테 가이딩 받게 한다.

"너는 진짜 뭐가 문제냐?"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병실에서 사라진 지성을 다시 찾은건 흡연실에서였다. 얘 담배도 피우는구나. 구석에 구부정하게 앉아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뭐요."

자연스럽게 자기 옆에 앉는 동혁을 떫은 표정으로 바라보며 띠껍게 되묻자, 동혁은 담배를 입에 물고 지성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하여 지성의 입에 물린 담배에 자기 담배를 지져 불을 붙였다. 거의 다 피워서 겨우 불씨를 유지하던 담배가 꺼트려지자 지성은 인상을 한번 구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가. 동혁이 나가려는 지성의 팔을 붙잡고 다시 자리에 앉혔다. 센티넬이라고 해도 아직 부상을 달고 있는 지성은 동혁의 힘으로도 털썩 앉혀졌다. 표정은 더 구겨졌다.

"대답 안했잖아."

"뭔 대답이요."

"너는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그러냐고."

동혁은 담배나 뻑뻑 피우면서 다시 물었다. 자기가 물어봐놓고 별 관심 없는 것처럼 휴대폰이나 쳐다보는 동혁을 지성이 어이없다는듯 바라봤다. 뭐가 문제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 지성은 입술을 짓씹었다. 어허, 입술 다친다. 쳐다도 안봤으면서 입술 짓씹는건 어떻게 알았는지 엄지로 입술을 슥 매만진다. 지성은 그 손을 탁 쳐내고는 동혁을 노려봤다.

"왜요. 나는 뭐, 이러면 안돼요? 나 좋은 애 아닌거 소문 다 났는데 뭘 바래요. 내가 상상 이상으로 별로인가보지?"

음, 역시. 고양이 같애. 동혁은 예전에 누군가에게 들은 고양이에게 다가가는 법을 떠올렸다. 손을 얼굴 가까이에 대서 냄새를 맡게 해주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턱에서부터 쓰다듬어주랬나? 동혁은 손바닥을 쫙 펴서 지성의 얼굴 가까이에 대고는 천천히 다가가 턱에서부터 뺨까지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엄지로 살살 뺨을 매만졌다. 훅 다가온 동혁의 손에, 지성은 당황하며 굳어있다가 뭐하는 거냐며 빽 소리를 지르곤 흡연실을 나가버렸다. 동혁은 씩씩거리는 동그란 뒷머리 아래 발갛게 달아오른 뒷덜미가 참 귀엽다고 생각했다.

"너 그러다 폐 썩는다."

"뭐래. 나 여기 올때마다 같이 피면서."

원래 마음이 가까워지려면 몸을 붙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다. 일단 동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지성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닌지 벌써 며칠째. 특히 담배를 태우러 갈때면 무조건 따라가 나란히 불을 붙였다. 우리 이 정도면 담친 아니냐? 동혁이 킥킥 웃으며 지성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아! 하지마요!"

지성은 또 자기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 손을 탁 쳐내고는 동혁을 노려봤다. 지난번 이후로 무슨 재미가 들린건지 툭하면 머리나 뺨을 쓰다듬는 동혁을 매번 질색하며 밀어냈지만 동혁은 꿋꿋했다. 그래도 이제 말도 제법 많이 하고, 작은 스킨십 사이로 스며들어있는 약한 가이딩도 받아들이게 되었으니 장족의 발전이었다. 언제쯤 제 손길을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전보다는 편해진 느낌이라 뿌듯했다. 하지만 지성은 동혁의 표정이 마치 잘 키운 반려동물 보는 주인 같아서 짜증나기만 했다.

담배가 거의 다 타들어갔을 무렵, 동혁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지성을 바라봤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에, 지성은 담배를 지져서 꺼트렸다. 왜요. 할말 있음 해요. 예전이나 다름없는 띠꺼운 말투였지만 동혁은 지성이 많이 누그러진게 느껴져서 비싯 웃음이 나왔다.

"지난번에 네가 그랬잖아. 너 좋은 애 아닌거 소문 다 났다고."

"....."

"근데, 내가 옆에서 보니까 네가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애. 그냥 가이딩 좀 싫어하는? 평범한 애같은데 소문이 왜 그렇게 났나 모르겠네."

동혁의 말에 지성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동혁의 담배가 다 타들어갈 때까지. 동혁은 지성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지만, 캐물을 생각은 없었기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지성을 바라봤다. 형이 커피 사줄게, 가자. 지성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문채로 동혁을 따라 흡연실을 나섰다.

동혁이 지성의 이야기를 듣게 된 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였다. 백업팀에 있을때 친하게 지냈던 동생들과의 저녁. 1차로 김치찌개 먹고, 2차로 호프집 갔다가, 3차로 편의점 탈탈 털어 먹던 중이었다. 동혁이 백업팀을 나온지 벌써 8개월쯤 지난 터라 그동안 못나눈 대화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참을 서로 근황을 얘기하다가, 3차쯤 되니 술기운이 좀 돌았는지 동생들 중 한명이 물었다.

"근데 어떻게 그 박지성이랑 페어했어요?"


동혁은 그 말의 뜻을 쉽게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했냐니? 그냥 담당 연구원이 매칭 해주면 페어 승인 요청서 작성하고, 승인 받으면 맺어지는거 아닌가? 센터 소속이라면 모두가 알고있는 과정이었지만, 저 질문의 답변으로는 적절하지 않은듯 싶었다.

"야, 형 모르시나봐.."

"엥.. 형 그거 모르세요?"

동혁은 동생들이 해준 이야기를 듣자, 속이 울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더이상 술자리를 이어가기엔 무리일 것 같아 급하게 자리를 파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겨우 집에 도착한 동혁은 곧바로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를 붙잡고 구역질을 했다. 울렁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박지성이 '붉은 일주일' 폭주 센티넬 동생이잖아요. 형제가 불이랑 얼음 속성 각성해서 엄청 이슈 됐었는데 몰랐어요? 붉은 일주일 때문에 가이드 불신증 생겨서 페어도 안맺는걸로 유명했는데.

더 게워낼 것도 없을만큼 다 게워낸 동혁이 세면대를 붙잡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박지성이 그 화염계 센티넬 동생이라고. 내 전 파트너의 동생이라고. 동혁은 이 상황이 모두 꾸며진게 아닐까 생각했다.

박지성이 싫어하는건 가이드가 아니라 이동혁이었다.

"나 담배 피러 갈건데 안가요?"

"어? 어어, 오늘은 혼자 가."

지성의 표정이 묘했다. 동혁은 차마 지성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어서 애써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런 동혁을 빤히 바라보던 지성은 별다른 말 없이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동혁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어떡하지.

"그래서 날 왜 찾아온건데. 나 바쁘거든?"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책이 나오지 않아 찾은게 바로 자신의 담당 연구원, 런쥔. 그는 산처럼 쌓인 서류의 틈바구니 속에서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동혁은 런쥔이 내어준 과자를 먹으며 자기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일하느라 제대로 듣는지 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털어놓을 곳이 필요했다.

"그런 얘기면 나보다는 지성한테 하는게 낫지 않냐? 왜 그걸 나한테 말하는 거야."

"언제는 담당 연구원이니까 고민거리 같은거 다 말해도 된다매."

"그건 내가 안바쁠때 얘기지. 나 지금 바쁜거 안보이냐?"

어휴, 내가 너한테 뭘 바라냐. 동혁은 마지막으로 남은 과자를 입에 쏙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도 말 한마디 없이 현장에 나가버린 파트너 덕분에 동혁은 질리도록 한가했지만, 노잼냄새나는 연구실에 있고 싶진 않았다.

"야, 나 간다."

"어, 잠깐잠깐! 이거 가져가."

"이게 뭐야?"

"뭐긴 뭐야. 지성이 억제제지. 오늘치니까 네가 전해줘."

동혁은 런쥔이 건넨 흰 알약을 보고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박지성이 먹던 약은 분명 초록색.. 순간적으로 오래된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형, 그 약은 뭐야? 능력억제제야. 너 부재중일때 먹으려고. 붉은 일주일 발생 며칠 전, 파트너였던 화염계 센티넬이 먹던 그 약. 그것도 분명 초록색이었다.

"지성이, 지성이한테 가야해!!"

"뭐? 야! 뭔데!"

동혁은 해성동을 향해 차를 몰았다. 제발, 제발 늦지 않기를. 연구실을 나오기 직전, 런쥔에게 들은 말 때문에 마음은 더욱 불안했다. 지성이가 호출 됐다고? 오늘 호출 없었는데. 역시나 A급 센티넬이 호출되었다기엔 지나치도록 평화로운 동네. 불안한 감이 뒷덜미를 싸하게 만들었다. 쾅, 콰광. 무언가 터지는 굉음. 그리고 도심 한복판에 생겨난 얼음기둥. 동혁은 곧바로 그곳을 향해 달렸다.

쿵, 쿵, 쿵, 쿵, 심장박동이 이렇게까지 크게 들렸던 적이 있었던가? 지성은 왼쪽가슴에 시작된 불안한 박동에 주먹을 꽉 쥐었다. 꽤 길게 이어진 전투 때문에 가이딩 수치가 불안정했다. 능력 제어가 잘 안되어 손끝에서부터 빠득빠득 얼어붙고 있었다. 더이상 시간을 끌면 안돼. 지성은 어렴풋이 제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는 고삐를 곧 놓칠 것 같았다. 이건 센티넬의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빠르게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폈다. 적은 누구지? 인원은? 능력은? 위치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동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전투능력이 없는 가이드들이 여기에 들어올 수도 없고.. 머리 위를 빙빙 돌고 있는 헬기에는 현장에 나와있는 모든 센티넬들의 전담 가이드들과 백업 가이드들이 수십명 타고 있을테지만, 그들의 방사가이딩으로는 회복에 한계가 있었다. 가이드, 아니 동혁이 형이 필요해. 센티넬로서의 본능이 가이드를 찾았고, 지성의 감각이 동혁을 찾았다.

"지성아!!"

그 순간 훅 끼쳐오는 익숙한 향기. 지성은 자신을 끌어안은 동혁의 몸이 축 들어지는게 느껴져 손이 떨렸다. 어디서, 어디서 날아온 거지? 동혁의 몸을 완전히 관통한 얼음창. 그 끝에 맺힌 붉은.. 지성은 눈을 꾹 감았다. 이건.. 이건 내 능력이잖아.. 이건 내 얼음이야.. 그럼 형을 공격한건.. 손이 벌벌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윽.. 니가.. 알아서 한다더니.. 이게 뭐냐..?"

동혁은 피 묻은 손으로 지성의 뺨을 매만지더니 짧게 입을 맞췄다. 언제나 따듯하던 그의 손이 오늘따라 너무도 차갑게만 느껴졌다. 흘러들어오는 미약한 가이딩이 툭, 힘없이 떨어지는 동혁의 손과 함께 멈춰버렸을때, 지성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손끝에 얼음결정이 생겨나고, 눈동자는 푸르게 물들었다. 차가운 숨이 후욱 뱉어지며 정신은 몽롱해졌다.

"—신 차려! 박지성!!"

"허억..!"

붕 떠오르던 감각이 순식간에 곤두박질 치는 느낌. 아득히 멀어지던 정신을 붙잡아준건 다름아닌 동혁이었다. 배를 관통했던 얼음창도, 옷을 적시던 핏자국도, 그 무엇도 없이 온전한 상태의 동혁. 그를 본 순간, 지성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정말 괜찮아."

지성은 자신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는 손이 너무 따듯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뭐가 괜찮아. 도대체 뭐가 괜찮은데. 이미 주변은 초토화된 상황이었다. 그 어떤 전투의 흔적이 없음에도 건물은 얼어붙고, 얼음 파편이 곳곳에 박혀있었다. 동혁도 소용돌이 치는 얼음 파편에 베여 작은 생채기가 여럿 나있었다. 그걸 이미 다 봐버렸는데도, 지성은 동혁의 괜찮다는 말에 안도하고야 말았다.

곧이어 폭주 센티넬 전담반에서 지성을 구속했다. 능력제어구를 양 손목과 목에 차고, 그들에게 이끌려 차에 올랐다. 능력이 한번 폭주한 센티넬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성이 폭주 센티넬 격리소에 들어간지 일주일. 그 사이에 지성이 복용하던 억제제가 능력 폭주를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약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세대 억제제를 베이스로 하여, 약을 복용한 센티넬들의 능력을 폭주시키고, 그들에게는 환각을 보여주어 마치 전투상황에 놓인 것처럼 느끼게 한 것이다. 지성도 그런식으로 정신지배를 당해 무고한 희생자를 여럿 만들게 되었다. 이 일로 약을 생산하던 제약회사의 대표와 일조했던 정신계 센티넬은 구속되었고, 지성은 판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붉은 일주일 이후, 5년만에 다시 일어난 센티넬 폭주사건. 지난번의 사건에서는 센티넬을 제어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사살을 했지만 이번엔 케이스가 달랐다. 지성의 폭주를 막은 사람이 있으니까. 정부와 센터에서는 지성의 처분을 두고 왈가왈부 말이 많았지만, 결론은 하나로 내려졌다.

"...복귀요?"

현장복귀. 지성은 3년간 감봉, 항시 전담 가이드와 동행하는 조건으로 현장에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현장에 나간 실적과 페어 매칭률 덕분이었다. 그리고 여차하면 능력 폭주를 막아줄 파트너도 있으니까.

지성의 복귀가 확정되고, 센터는 온갖 구설수로 시끄러웠다. 뇌물을 줬다더라, 뒤를 대줬다더라, 약점을 쥐고 협박했다더라. 지성을 향한 질 나쁜 소문이 무성했다. 이따금씩 동혁을 향한 걱정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걔랑 계속 페어 맺어도 괜찮겠어? 걔 좋은 애 아니라던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동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들이 알긴 뭘 안다고. 동혁은 속으로는 욕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해."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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