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3부 16화

기사단장 임명 후~연회 전

시도폰은 창을 등에 멘 채 카리타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둘은 익숙한 장소에 도착했다. 카리타스의 집무실로 가는 복도에 면한 정원이었다. 장미를 비롯한 색색의 꽃이 피어있는 그곳에 도착해서야 카리타스는 걸음을 멈췄다. 먼저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자리를 옮기자고 말했던 건 시도폰이었지만, 막상 조용한 곳에 도착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카리타스가 예언에 익숙하다고 해도 신께서 직접 오셨으니 몸이 상하지 않을 리 없어. 그런데 카리타스가 괜찮지 않다고 말하면,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어.’

등을 돌려 그를 바라보는 카리타스는 여전히 베일을 쓰고 있었다. 베일이 일렁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겠어, 괜찮아. 아픈 곳, 다친 곳 전혀 없어.”

하지만 시도폰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

정원으로 오는 동안 시도폰은 이디스가 북부 수행을 하러 왔던 해, 카리타스가 예언에 관해 설명하다가 괴로워했던 것을 떠올렸다. 당시엔 바깥의 기사가 쓰러져서 카리타스에게 더 물어보지 못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카리타스가 신에 관한 걸 함부로 이야기하는 바람에 생긴 일인 것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그런 이야기를 하도록 부추긴 것은 자신이었기에 그걸 깨달아버린 시도폰은 여기까지 와서도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카리타스는 그런 걱정을 읽고는 괜찮다고 먼저 말해주었다.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언제나처럼 차분한 몸짓으로 뒤를 돌아보면서.

 /

조금 마음이 놓인 시도폰이었지만, 안심하긴 일렀다. 순간 다른 빛으로 흐려진 듯했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는지 보고 싶었다.

“베일을 벗어줄 수 있을까? 여긴 우리 둘뿐이잖아.”

“어떻게?”

카리타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양손엔 시도폰이 선물한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아차차, 이마를 짚은 시도폰이 손을 내밀어 꽃다발을 받아가고자 했다. 그러자 카리타스가 꽃다발을 더 세게 껴안았다.

“나한테 준 거잖아. 도로 가져가려고? 안 돼. 안 줄 거야.”

“이상한 데서 고집을 피우네, 영영 가져갈 리가 없잖아. 당연히 돌려주지.”

그래도 안 된다며 카리타스는 고개를 팽하고 돌렸다. 오기가 생긴 시도폰은 한 발짝 카리타스에게 가까워졌다. 애초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두 발짝밖에 안 되어서 카리타스가 뒤로 물러날 새도 없이 시도폰이 그에게 가까이 붙었다. 순간의 적막 이후로 들리는 것은 새소리뿐이었다.

“네 말대로 주변엔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겠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시도폰은 양손으로 카리타스의 베일 끝을 잡고 조심스레 뒤집었다. 청아한 하늘색 눈동자가 드러나 멀뚱멀뚱 자신을 쳐다보는 걸 확인하고 나서 시도폰은 시선을 그 주변으로 옮겼다. 카리타스는 그렇게까지 시도폰이 꼼꼼하게 살피는 것까지 예상하지 못했는지 뻣뻣하게 굳어서 그를 피하지도 못했다. 시도폰의 손이 잠깐 카리타스의 눈가로 향하다가 닿지 못하고 떨어졌다.

“눈가가 살짝 부었어. 무리한 거 맞네. 목소리만 들었으면 깜빡 속을 뻔했어.”

베일이 다시 카리타스의 얼굴을 가렸다. 얼빠진 채 서 있던 카리타스는 재차 괜찮다고 말했지만, 시도폰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를 집무실에 데려다주었다. 속상한 표정을 지은 시도폰이었지만, 카리타스보다 앞서서 걷고 있었으니 카리타스는 그걸 눈치챌 수 없었다. 문을 열면서 카리타스에게 돌아선 시도폰은 입꼬리를 올려서 웃고 있었다.

“다음 일정 전까지 쉬고 있어. 그렇게 오래 쉬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아예 못 쉬는 것보단 낫겠지. 사람들한텐 나랑 있었다고 말해둘 테니까….”

시도폰은 카리타스에게서 꽃다발을 받아 화병에 꽂았다. 괜찮다고 했던 카리타스였지만, 막상 자리에 앉으니 손 하나 까딱할 힘도 나지 않았기에, 그는 시도폰이 화병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꽃이 잘 꽂혀있는지 확인하는 걸 바라만 봤다. 햇살이 물을 잔뜩 머금은 꽃을 쓰다듬었다.

“올해도 꽃다발 고마워. 예쁘다.”

“난 이런 것밖에 못 주니까 미안한데. 남부는 외부 물품을 많이 꺼리는 편이니까, 다른… 옷이나 도구 같은 걸 선물해주지 못하잖아.”

카리타스는 또 괜찮다고 말했다. 대화는 자연스레 끊겼다. 잠시 후, 시도폰이 책상에 화병을 내려놓더니 쉬라고 말하고 문을 열어 나가버렸다. 적막해진 방에 덩그러니 홀로 앉아있던 카리타스는 같이 있어 주는 거 아녔냐며 아쉬워하다가 문득 자신이 아직 베일을 벗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가준 건가. 이젠 정말 괜찮은데.’

시도폰이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다가 잠깐 멈췄다.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하더니 시도폰과는 다른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메릭이었다. 그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그 앞에 멈췄다.

“집행자께서는 정원에 계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푹 쉬라고 말씀하시더군요.”

화병을 바라보다가 겨우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선 카리타스가 메릭에게 시도폰을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시도폰의 답장은 ‘못 간다’였다. 메릭이 두어 번 왕복한 뒤에야 시도폰이 정원에서 일어섰다. 메릭은 눈치껏 방을 나왔고, 시도폰은 쉬라고 했는데 왜 자꾸 자길 부르냐며 웃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카리타스가 베일을 벗어서 접었다.

“혼자서 쉬는 시간은 많거든, 널 보는 건 많아 봐야 일 년에 며칠 안 되는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순 없지.”

그 말에 시도폰이 다리를 꼬았다. 그는 오른쪽 손으로 턱을 괴고 팔꿈치를 무릎에 올려 살짝 몸을 구부린 채 물었다.

“하고 싶은 얘기라도 있어?”

“….”

할 만한 이야기라곤 이미 편지로 다 해버린 두 사람이었다. 역시 쉬게 놔둬야겠다며 시도폰이 다리를 풀었고 카리타스는 급하게 메릭이 정식으로 호위 기사로 임명되었다고 말했다.

“그건 못 들었어. 언제부터였어?”

“이 주 정도 되었을 거야. 오드샤는 임시 업무가 끝나서 원래 자리로 돌아갔고, 다른 후보자들도 딱히 반발하지 않더라고.”

“그 사람이 될 것 같긴 했어. 어때, 불편하진 않고?”

카리타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다리를 꼬고 앉은 시도폰은 저녁에 있을 연회에 창을 가지고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다.

“전하께서 연회에 참석하신다고 들어서, 호위병 말고는 무기 반입이 안 된다니까 우리 애들은 다 무기는 놔두고 정복만 입고 참석할 거거든. 근데 나는 어떡하지?”

“너는 항상 들고 다녀야 하니까 예외야. 그런데 정복만 입어야 하는 건 아쉽다. 귀족이랑 왕족들은 다 새 옷을 맞춰서 입고 올 텐데.”

시도폰은 기사단에게 전부 옷을 맞춰주려면 예산이 얼마나 배정되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 돈이면 고기를 더 사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제 소매를 만지작 거리던 시도폰이 카리타스에게 물었다.

“그러면 너도 그 옷 그대로 참석해야 하는 거야?”

“응, 우리도 마찬가지야. 교황 성하를 제외하면 다들 맨날 입던 옷이지.”

“이러면 오순절 때 매번 하던 연회랑 다를 게 없겠네.”

그러자 카리타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넌 이제 자리에 앉아서 너한테 잘 보이려는 왕족이랑 귀족들 얼굴 하나하나 마주하고 인사해야지. 왕자께서 네게 춤을 신청할지도 모른다고 들었어.”

카리타스가 첫 문장을 끝맺었을 때 한숨을 쉬던 시도폰은 그 뒤로 이어지는 문장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왜…?”

“…풋, 너무 대놓고 싫어하는 거 아냐? 그러다가 그분 앞에 가서 정말로 그런 표정 지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경고하는 말과는 다르게 카리타스는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시도폰은 왜 그런 소문이 돌고 있냐고 머리를 쥐어뜯을 듯이 감싸 쥐었다. 창문 밖에선 그를 놀리듯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교회와 친교를 쌓으려고 그런 걸 거야. 네가 집행자로 각성한 이후로 교회의 권력이 강해졌으니 지금은 납작 엎드릴 때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거랑 춤 신청이랑 무슨 상관이 있길래 그런데?”

“상관이 없긴, 왜 없어.”

카리타스가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춤 신청하면 받아줄 거야?”

“당연하지.”

시도폰은 무의식적으로 카리타스의 손에 제 손을 올렸다.

“그럼 얀이 네게….”

“싫어.”

마치 얀이 내민 손을 보는 것처럼 시도폰은 손을 거두어가며 미간을 찌푸렸다. 카리타스가 이번엔 소리까지 내며 웃었고, 시도폰은 자기는 잘 할 자신이 없다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미리 연습은 해두는 게 좋을 거 같아. 네가 춤을 안 춘다고 해서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거절하면 보기 좋진 않겠지.”

“…베론한테 부탁해야겠다.”

힘없는 발걸음으로 시도폰이 일어났다. 이번엔 카리타스도 그를 붙잡지 않았고 연회 때 보자고 말하며 그를 배웅했다. 북부 기사단이 머무는 숙소에 가까워진 시도폰은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멈췄다. 다소 음울한 표정의 여인이 시도폰을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고, 기다렸다는 듯 무언갈 내밀었다.

“달리아 양, 이건….”

시도폰에게 손수건을 건넨 여인, 헤일로 전 기사단장의 여동생인 달리아는 애써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지만, 눈엔 슬픔이 가득했다. 장례식이 있은 지 3년밖에 안 되었으니 슬픔을 떨쳐내라고 감히 말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께 드리려던 거였습니다.”

시도폰이 말없이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기사단 정복엔 손수건을 드러나게 꽂을 만한 부분이 없어서, 그는 손에 그대로 손수건을 든 채 고맙다고 답했다. 달리아는 마음속에 담아둔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차마 그것들을 다 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시도폰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대화라고 할 것을 나누지 않고 헤어졌다. 달리아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을 때, 시도폰은 한숨을 쉬며 숙소의 문을 열었다.

“단장님! 이거 어떻습니까?”

“제 것도 좀 봐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잘 보이지 않겠습니까?”

방금까지 문 앞에 누가 있었는지 모르는 기사들이 해맑은 얼굴로 시도폰에게 손목이나 머리를 들이밀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당황하던 시도폰은 손목과 머리에 묶인 손수건과 리본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마을 아가씨들에게 받았나?”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각양각색의 무늬가 새겨진 손수건과 리본이 숙소를 가득 메우듯이 여기저기 걸려있었고, 두코도 웃으면서 제 무기 손잡이에 리본을 묶고 있다가 시도폰의 시선을 받고 눈을 피했다.

한구석에 있던 솔라는 멀쩡했으나, 그 옆의 크로마는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자세히 보니 크로마의 긴 머리를 누군가가 리본과 함께 열심히 땋아놓았더라. 시도폰은 웃음을 참으며 크로마에게 누가 머리 모양을 그렇게 만들었냐 물었고 그는 조용히 이디스를 가리켰다.

이디스는 한 손에 리본 묶음을, 한 손에 빗을 들고 기사들을 하나씩 붙잡아 앉혔다. 그들은 크로마가 당한 것처럼 순식간에 알록달록한 리본을 머리에 달게 되었고, 마침내 이디스가 시도폰을 향해 돌아보았을 때 시도폰은 긴장하며 그를 피해 뒷걸음질 쳤다.

“리본, 안 받으셨나요?”

이디스의 뜬금없는 물음에 시도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구한테?”

“그야 당연히 성녀님이죠. 아까 두 분께서 따로 어디 가셨다고 들어서 저는 당연히….”

“그런 거 안 받았네. 그리고… 경사니 만큼 들뜬 건 이해하지만, 이런 모양으로 저녁 연회에 참석하진 않을 거라고 믿네.”

시도폰은 웃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얼어붙었다. 이디스는 눈치를 보더니 크로마의 머리에 잔뜩 얽혀있던 리본을 풀어주었고 프라이에를 비롯한 기사들도 헛기침하며 색색의 조각들을 끌렀다. 그때 누군가 숙소의 문을 두드렸고, 시도폰은 누구냐고 물었다.

“성녀님께서 단장님께 전하라고 하신 물건이 있어서 왔습니다.”

곧바로 문이 열렸고 시도폰의 손엔 작고 긴 상자가 들렸다. 금방 기가 살아난 이디스는 얼른 상자를 열어보라며 부추겼고, 마지못한 척 시도폰이 상자의 뚜껑을 들어 올렸다. 하늘색의 리본엔 꽃 모양의 자수가 새겨져 있었는데 모양이 영 엉성했다. 아무리 봐도 장인이 만든 건 아닌 것 같은 모양새에 이디스는 더 들떠서 말했다.

“어디에 묶어드릴까요?”

“….”

모두의 기대가 시도폰의 등을 쿡쿡 찔러댔다. 성녀님의 성의를 봐서라도 당연히 메시지 않겠냐는 속삭임, 즐기고자 모인 연회인데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가 무슨 상관이겠냐는 약간의 투덜거림이 결국 시도폰의 손목을 이끌었다.

얌전히 이디스에게 손목이 붙잡힌 채, 시도폰은 리본을 너무 아래로 내리지 말고, 리본 끝이 날려서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도록 묶으라고 지시했다. 결국, 리본은 손목보다 조금 위에 묶여서 소매를 내리면 그 모습이 가려졌다.

“이디스, 수고했어.”

“주문이 과했어요. 위치도 그렇고, 자수도 잘 보이게 하라니요.”

다시 리본을 감고 있던 프라이에가 이디스의 응석을 받아주었다. 얼마 뒤, 연회장으로 이동할 시각이라는 시종의 외침에 기사단이 숙소를 나섰다. 해가 진 맑은 하늘엔 별이 반짝였고, 긴 복도의 가장자리엔 띄엄띄엄 촛불이 켜져 있었다. 아까는 오순절 행사를 진행했던 교회 내부는 음식이 놓인 탁자 몇 개를 제외하곤 휑하니 비어있었다.

프라이에가 창문 너머로 쌓여있는 긴 의자들을 보며 ‘저거 치우느라 정말 힘들었겠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한편, 시도폰은 말끔하게 치워진 공간을 보곤 창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절대로 앉아서 쉬고 있거나 뒤로 빠질 순 없겠다는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자 두코가 지적했다.

“저기, 단장님? 손에 힘 빼십시오. 누가 춤 신청하면 바로 찌를 기세로 보이십니다.”

“…찌르면 안 되겠지? 자네는 춤에 자신 있나?”

“단장님이 계시는데 저한테까지 차례가 오진 않겠죠. 잘 부탁드립니다.”

시도폰이 곁에 있는 두코에게 속닥거리다가 갑자기 울린 음악 소리에 다시 손에 힘을 주었다. 사제들의 의례에서는 악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니 이 화려한 관악기의 음색은 분명 왕족을 위한 것이리라. 기사단장이지만 집행자이기도 한 시도폰과 교회의 수장인 교황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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