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lting Point

마x니

근데 니키보다 체이스가 더 많이 나오는 짧은 글 


"니키랑 키스했어."

"뭐?"

퇴근하는 체이스를 붙잡은 마일로가 대뜸 한 말은 그거였다. 미친.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꾹 참아냈다. 쿨하게― 어쩌라고, 그렇게 말할까? 아니야, 좀 더 어른스럽게. 

"…니키가 너 좋아해?"

"아니."

체이스한테 말하면 화낼 줄 알았는데. 당황한 기색이 보였지만 바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후―. 길게 숨을 뱉는 모습에서 몸이 굳었고, 이내 고개를 든 체이스와 눈이 마주치면서 쫄았고, 체이스가 천천히 얼굴을 붙이는데 움찔하며 몸을 물렀다. 본능이었다. 이제는 은퇴했다지만 그리즐리 펍에는 체이스의 글로브가 걸려있었다. 

"안경, 더러워졌네."

그렇게 말한 체이스가 마일로의 안경 콧대를 잡아 벗겼다. 니키와 키스하면서 더러워진 모양이다. 안경을 벗을 생각을 못했었다. 그래도 물러서기 싫어서 밀어붙인 탓에 안경이 더러워질 수 밖에 없었다. 다음에는 안경을 벗어야지. 고개는 잘 돌렸는데― 생각하는데 마일로의 고개가 돌아갔다. 정확히는 시야가 돌아갔다. 아니, 시야가 갑자기 흐릿해지더니 분명 제 오른쪽에 있던 건물 간판이 보였다. 

체이스는 자신이 후려친 마일로의 얼굴을 친히 다시 돌려주었다. 억지웃음을 지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후―. 다시금 숨을 뱉었다. 마른 볼이 부풀다가 꺼졌다. 

"그럼, 니 맘대로 한거잖아."

뺨을 툭툭 치는 손끝이 건조했다. 체이스가 손을 거두면서 몸을 돌렸다. 입술을 혀로 적신 마일로가 그 굽은 등에 소리내어 외쳤다. 

"나는 욕심 좀 내면 안돼?"

뱉고나서야 언젠가 그 말을 체이스에게 한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자꾸 체이스에게 어리광을 부리게 되는지, 아니 진심을 말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에게도 보인 적 없는 감정과 생각이었다. 체이스가 돌아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체이스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을 뿐,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걸어갔다. 

체이스는 니키를 기다렸다. 아주 초조하게 기다렸다. 테이블을 두드리고, 다리를 떠는 스스로의 꼴이 우스워서 집안일을 했다. 물건을 닦고 정리하고.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초조함이 불안함으로 바뀌어갔다. 마일로 이자식은 니키를 집까지 안 데려다주고 뭐한 거야? 불안의 화살이 애먼 과녁을 향했다. 

"나 왔어."

평소처럼 소리높여 말하지만 말끝에서 기운빠진 것이 티가 났다. 체이스가 급하게 몸을 돌렸다가 멈추었다. 아차. 너무 티내지 말고, 평소처럼. 

"왔어? 늦었네."

"어―."

평소라면 이유를 덧붙일텐데 작은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진다. 지나가는 귀랑 목덜미가 빨갛다. 테이블에 물건을 올려둔 니키가 그대로 멈추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소리없이 한숨을 길게 뱉는 것을 알았다. 체이스가 조심스레 다가갔다. 니키는 계속 가만히 있었다. 체이스가 허리를 숙여 니키를 들여다보았다. 니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림자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체이스가 몸을 무르자 니키가 고개를 들었다. 운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일 있어?"

"…마일로가 키스했어."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니키가 어린애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해서인가. 마일로가 자신에게 말을 해줬듯이. 아닌가. 그럼 마일로는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말을 한 건가. 

"마일로가 너 좋아해?"

"모르겠어!"

불같이 대꾸한 니키가 의자에 앉았다. 

"마일로가 나 좋아하나봐, 형." 

체이스를 올려다보는 눈이 촉촉해졌다. 

"…그런가보네."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둘 다 어린애는 아니었으니까. 싸운 것도 아니었고. 아니, 차라리 싸웠으면 화해라도 시키는데. 

"너, 마일로 좋아해?"

"아니!"

빠르게 대꾸한 니키의 얼굴이 굳었다. 이내 테이블에 엎어졌다. 

"모르겠어…."

팔틈새로 새나오는 목소리가 울음소리같았다. 체이스가 니키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얼른 씻고 자라."

*

습관적으로 위스키를 주문하려다가 하우스와인을 주문하는 마일로를 따라 같은 것을 주문했다. 마일로가 호의적인 미소를 지었다. 체이스는 마일로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정치인같다고 생각했다. 장학금 받는 대학생이 지을 미소는 아니었다. 

처음 와보는 식당이었는데, 음식이 괜찮았다. 괜찮은 식당이며 가게들이 생겨나는 속도를 체이스는 따라잡기 힘들어했다. 켈시 덕분이었다. 콜링스톤즈, 그리고 그들의 공연을 취소시킨 세 명의 말썽꾸러기들 덕분에 로키앤드가 화제가 되었다. 켈시는 그 기회를 통해 로키앤드가 자신의 고향임을 밝히고 홍보했다. 마일로 시장을 멍투성이로 만든 보상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괜찮은 음식점이 생겼고, 마일로의 집에는 다시 피아노가 생겼고, 마일로는 음악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대학은 다른 전공으로 갔다. 경영이랬나. 아버지의 뒤를 이을 모양이었다. 마일로 시장이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주니어가 이어받는 것이 가장 확실했으니까. 대학에 들어가서도 마일로는 계속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만들었다. 

그놈의 피아노. 마일로는 니키에게 피아노를 알려주고, 니키가 쓴 노랫말로 작곡을 한다며 자꾸만 니키를 집으로 불렀다. 피아노가 있는 집은 많았지만, 체이스와 니키의 오두막은 해당되지 않았다. 니키는 마일로와 함께하는 시간을 즐거워했다. 그때는 지붕에 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둘이 노는 것을 냅뒀다. 돈은, 뭐, 체이스 본인이 더 아끼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 또한 켈시 때문이었다. 로키앤드를 떠나기 전에 켈시는 체이스를 상대해줬고, 보기좋게 패배했다. 봐준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너무 지났을 뿐이었다. 그 기세로 체이스는 다음 날 경기에서 기어코 자신의 글로브를 펍에 걸게 되었다. 그리고 은퇴했다. 누구와의 약속도 아니었다. 체이스의 소식을 들은 켈시가 마일로 시장에게 부탁해서 체이스를 도서관에서 일하게 했다. 

물론 처음에는 거절했다. 글씨가 읽히지 않았다. 그래서 동화책 코너로 배정되었다. 크게 쓰인 짧은 단어들을 겨우 읽었다. 멍과 흉이 옅어지면서, 늘 동화책을 정리하는 체이스에게 말을 거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키가 닿지 않는 곳의 책을 꺼내주었고, 점점 긴 글을 읽을 수 있었고, 낭독을 하기 시작했다. 마일로가 만들어준 이상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가사는 니키가 지어주었다. 그 노래가 인기가 좋다고 말하지 말걸. 생각해보면 자기 탓도 좀 있었다. 

셋이 오로라를 본 적이 있었다. 켈시 덕분에 로키앤드의 오로라 축제가 인기를 얻었고 규모가 커졌다. 마일로가 오로라를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 로키앤드 출신이 로키앤드에서 오로라 구경이라니? 

니키가 제대로 오로라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체이스가 제대로 구경을 하게 허락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걸 마일로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셋이 오로라를 구경하자고 했다. 니키가 기뻐했다. 체이스에게도 소중한 기억이었다. 체이스는 오로라를 싫어했으니까. 그래서 마일로에게 고마웠다. 고마워할지 말걸. 

니키는 혼란스러워보였다. 체이스는 니키에게 지붕수리를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니키는 갈 곳이 없었다. 체이스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조금 읽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결국 마일로와 약속한 시간에 마일로네 집으로 갔다. 피아노를 쳤고, 노래를 만들었다. 몇 번 더 키스를 한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두 사람 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굳이 체이스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니키가 전화기를 새로 샀고, 종종 니키가 웃는 목소리가 집을 채웠다. 그것으로 족했다. 

마일로가 체이스에게 살갑게 굴었다. 동화책을 핑계로 체이스의 일터로 찾아온 적도 있었다. 가끔 같이 밥을 먹었다. 퇴근길에 마주치면 한참을 같이 걸었다. 체이스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꼭, 연인의 아버지에게 잘보이는 청년같았다. 

그게 싫어서 마일로를 불렀다. 

"니키, 친동생 아니야."

"진짜? 니키도 알아?"

"아니, 말하지 마."

"그럼 누구 아이야? 둘이 닮았는데."

"이모네 아이."

엄마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다. 체이스가 어릴 때 사라진 여동생. 마을사람들은 늑대가 여동생을 물어갔다고 했다. 엄마는 늑대 울음소리가 나면 숲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 여동생이 있으리라 믿었다. 아빠가 그 뒤를 쫓았다. 몇 달을 반복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발견된 것은 니키였다. 사라진 여동생을 꼭 닮은 남자아이. 늑대가 젖을 물리고 있었다. 늑대는 꼭 엄마를 알아본 것처럼 자리를 내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엄마는 진정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체이스가 니키를 수월하게 돌볼 수 있게 되었을 즈음, 엄마는 다시 늑대 울음소리를 좇았다. 니키가 살아있으니까 분명 여동생도 살아있을 것이라고. 니키가 있는 숲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있을 것이라고. 여동생은 마을 청년들이 싫어 숲 너머 오로라 속으로 도망간 것이라고. 

아빠는 엄마가 오로라 속으로 사라졌다고 했다. 엄마도, 이모도 그곳에서 잘 살고 있다고. 우리도 언젠가는 그 곳으로 갈 수 있다고. 그때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체이스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 니키는 모르는 것 같았다. 

아빠는 그 전까지는 지붕에서 떨어지기는 커녕, 폭설이 내려도 발이 미끄러진 적이 없었다. 그런 지붕수리공은 드물었다. 아빠는 로키앤드에서 지붕에 직접 올라가는 지붕수리공 중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엄마가 오로라 너머로 사라진 이후로 아빠는 지붕에서 미끄러지거나 떨어지곤 했다. 오로라 너머에서 네 엄마를 보았어. 병원에 누운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아빠는 오로라 너머로 가려다가 실패하고 지붕에서 떨어지신 거라고, 니키는 그렇게 말했다. 체이스는 그저 니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 장례식은 어린 니키가 견디기에는 슬프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 때부터 니키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배가 곪는 것은 괜찮아도 니키가 배고프다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아픈 것도, 죽는 것도. 

체이스는 그 때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붕을 수리하는 니키를 본 날에서야 깨달았다. 자신은 니키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알고있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란다는 것을. 그렇게 자란 아이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니키를 어린애 취급한 것은 그 아이가 자신을 떠나는 것이 두려운 것이었다. 

다친 새끼늑대를 데려온 날, 그때 느꼈던 불안함은 그 늑대가 죽을까봐서가 아니었다. 약과 음식을 구해와야한다는 부담감도 아니었다. 니키가 엄마처럼 늑대 소리를 따라갈까봐. 오로라 너머로 사라질까봐 두려운 것이었다. 

니키는 자신이 가축이냐고 체이스에게 따져물었지만, 목줄이 채워진 것은 체이스의 쪽이었다. 니키는 그 목줄을 쥔 적도 없었다. 쥐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사라지지 않도록. 버려질까봐 두려웠고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체이스가 마일로를 흘끗 보았다. 

그래, 네가 있으면 니키를 놓아줄 수 있겠다. 나를 놓아줄 수 있겠다. 니키가 사라질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겠다. 이제는 버림받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체이스는 드디어 어른이 되었다. 

"혹시 체이스 너, 니키 좋아해?"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길래."

기가 찬 체이스가 들고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이녀석, 니키의 애인으로 괜찮을까? 일단 니키가 제법 고생할 것은 눈에 보였다. 

"아니 나는, 니키가 어린애도 아니고, 나는 친형제도 아니라서, 그러니까, 나한테 허락받을 것처럼 굴 필요 없다고. 니키한테나 잘하라고."

체이스가 눈을 피하며 주절거리는 말에 마일로가 웃었다. 체이스는 조금 창피했다. 이래서야 정말, 허락하는 아버지 꼴이다. 

"나는, 내가 니키랑 노느라고 체이스 네가 외로울까봐 놀아주는 거야."

"필요없어!"

화를 낸 체이스가 와인을 들이켰다. 마일로가 웨이터에게 손짓하여 잔을 채우게 했다. 웨이터가 다가온 탓에 체이스가 흥분을 억지로 가라앉히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체이스가 마일로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너 혹시, 나 좋아한 적 있어?"

"무슨 소리야."

"나랑 니키랑 닮았다며."

으하학. 마일로가 크게 웃었다. 

"웃지 말고 대답해봐."

"니키는 너랑 다르게 귀엽거든."

"그건 나도 알아!"

음식 값을 지불한 체이스가 지갑에서 지폐를 몇 장 더 꺼내 마일로에게 내밀었다. 마일로가 눈을 꿈벅거리며 지폐와 체이스를 번갈아 보았다.

"니키랑 여기 한 번 와."

"나도 돈 있어."

"학생이 무슨 돈은, 시장님이 주시는 용돈? 그냥 내가 너네 둘 사주는 거야."

체이스가 손을 까딱였고 마일로가 마지못해 돈을 받았다. 체이스가 그제야 지갑을 주머니에 넣고는 앞장섰다. 체이스가 박봉이라는 것을 마일로 역시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체이스의 사랑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맛있는 걸로 사줘. 아무리 지붕에 올라가야한다지만 너무 말랐어."

"맞아, 니키 너무 가볍더라."

체이스가 마일로를 돌아보았다.

"너어, 키스만 한 거 맞지?"

"아직…까지는?"

체이스가 눈을 꾹 감고 이를 악물고 고개를 치들었다. 마른 턱이 도드라지는 것이 보였다. 마일로가 뒷걸음질을 쳤다.

"니키 어린애 아니라며!"

한 대만 더 때릴까. 화낼 니키를 생각하며 참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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