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에르 초인학교

ELDORADO :: 유용한 이야기들

" 이는 분리(segregation)가 아닌 사회화를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다. 방황하는 초능력자 청소년들에게는 교관이 아닌 가족이 필요하다. 그들이 소속감을 얻고, 애정을 느끼고 소망을 찾으며, 나아가 세상과 사회에 사랑을 돌려주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결국 모든 학교란 이를 목표로 존재한다. "

  - 칼리토 하비에르, 1997년 8월 19일, 초인 교육 학술 대회 중 발언에서 인용함.

초인 교육 기관의 필요성이 처음으로 논의된 장소는 1990년 여름, 초인 등록제 시행 1년차를 맞이하여 열린 '초인 등록제 개정 심의회'였다. 초인 등록제로 인해 일반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초능력자 청소년들이 대거 발생한 것이 하나, 89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한 초인 신생아가 향후 고스란히 미취학 아동으로 집계될 상황을 우려한 것이 다른 하나의 이유였다. 심의를 위해 현장에 참석한 학자들은 10년 내로 미국의 초인 아동 청소년 인구 중 88%가 공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취약 계층이 된다는 충격적인 예상을 내놓았다. 이는 15년 후에는 그 통계가 청소년 범죄율에 그대로 반영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초인을 위해서가 아니라도, 전체적인 사회의 보호를 위해서는 대책이 필요했다.

가장 먼저 실행된 대안은 전국 각지에 초인 전용 교육 기관을 설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 사회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초인 전용 시설의 존재가 해당 시설을 중심으로 초인 생활권의 결집을 가속화 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결국 초기의 초인 학교들은 도시의 외곽으로 밀려났다. 노후화 된 수도원이나 천문대를 기반으로 한 초창기 교육 시설들은 그 성격 상 기숙사 또한 필수적으로 갖춰야만 했다. 위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동시에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은 거의 없었기에, 초인 교육 시설을 이용하는 것은 소수의 특권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장소와 학생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해도, 초인 교육에 적합한 교육자를 찾는 것은 또 다른 난관이었다. 1992년은 초인 교육의 기본적인 틀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은 시기였다. 청소년의 정신적 성장 과정과 초능력이 맞물리며 나타나는 수많은 문제적 행동에 대하여 사회는 일관적으로 억압하고 통제하는 방법 만을 고수하였고, 이는 정부에 의해 반 강제적으로 투입된 교육 인력조차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95년 전국의 초인 교육기관 15 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조사에 응답한 327명의 학생 중 315명이 교육 기관 내에서 신체적 및 언어적, 성적인 폭력 중 최소한 하나를 경험하고 있다고 답했다. 해당 315명 중 두 가지 이상의 폭력에 노출되었다고 응답한 인원이 288명이었고, 폭력의 주체로 교사를 지목한 인원은 200명이나 되었다. 대상 15개 기관 중 교사의 폭력이 기록되지 않은 장소는 단 한 곳이었는데, 그나마도 1997년 시행한 대규모 감찰에서 조직적 은폐의 정황이 발각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행 당시 청소년들을 인도적으로 양육할 수 있는 시설은 전혀 없었던 셈이다. 열악한 환경과 무지한 교육자에 지친 초인 청소년들은 탈출하듯이 교육기관을 떠났고, 학생 수가 줄어들며 지원금은 아예 끊기거나 교사진, 지역 공무원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자기 파괴적인 악순환 속에서 제도의 존재는 빠른 속도로 유명무실해졌다.

1996년 악덕의 밤 사건 이후 초인 등록제를 지지하는 기반이 다소 흔들리며 미 정부는 기존의 초인 인구 정책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한다. 그 대상에는 시행 4년차에 접어들고 있었던 초인 교육 기관 정책 또한 포함되었다. 1997년 5월 미 정부는 '초인 교육을 위한 연구 및 심의회'를 설립하고 당시 초인 연구의 권위자이자 유명한 히어로인 '칼리토 하비에르' 박사를 중심으로 한 자문위원회를 설치한다. 하비에르 박사는 이미 1979년 발표한 그의 저서 '생각을 읽는다는 것(On Telepathy(1979))에서 초인에게 특화된 양육 및 교육 시설의 필요성을 예측한 바 있었기에, 많은 이들은 하비에르의 참여가 결정적인 국면 전환을 불러오기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하비에르 박사와 심의회는 얼마 가지 못해 의견 충돌을 마주한다. 심의회는 초인 청소년들을 사회의 규격에 맞게 준비시키는 정규 교육기관을 주문했지만, 하비에르 박사는 정부의 전폭적인 자금 지원을 바탕으로 하여 학생 개인의 삶을 지지할 수 있는 일종의 보육 기관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8년의 초인 등록제와 슈퍼 베이비 붐이 겹치며 만들어진 초인 사회는 개인 가정에서 초인 청소년을 지지할 수 있는 능력이 거세 된 상태나 마찬가지였기에 하비에르의 비전은 정확했다. 대부분의 초인 청소년은 경제는 물론 정서적인 지원을 제공 받을 수 있는 가정이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박사의 주장과 같은 대규모 국가 사업에 대단히 회의적이었다. 하비에르가 민간 기업의 스폰을 받는 방안 또한 완강하게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대중과 정치 세력은 그를 '사회주의 몽상가'라고 비난하였으며, 일부 초인 사회조차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으로 초인 사회의 발전을 방해한다.' 는 이유로 하비에르에게서 등을 돌렸다. 결국, 1999년 1월 8일, 자문위원장 자리에서 사퇴한 하비에르는 그 대신 1세대 히어로 생활로 축적한 부를 이용해 '하비에르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남미로 활동 근거지를 이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1999년 6월 18일, 구 뽀르뚜 알레그리 재건도시에서 최초의 '하비에르 아카데미아'가 문을 연다.

하비에르 박사는 국적이나 지역, 나이나 성별, 그리고 능력을 가리지 않고 최초의 학생들을 모집했다. 지난 시간 동안 그의 평판은 다소 손상되어있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소수의 학생들을 모집하는데 성공하여 가르쳤다. 하비에르 아카데미의 1세대 수료생들은 1세대 히어로의 명성을 잇는 2세대 히어로들로 거듭났다. 현대 최고의 히어로 팀이라는 평가를 받는 테스크포스 101 팀의 '부스터' 또한 하비에르의 1세대 제자였으며, 1999년부터 2008년까지 그가 직접 구출하여 육성한 학생들을 제외하고도 장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수많은 세계의 초인 청소년들은 이후 21세기 초인 사회를 떠받치는 주춧돌이자 대들보가 되었다. 하지만 그 명성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하비에르 박사는 선의에 의한 기부금을 제외한 모든 기업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그는 스폰서 혹은 파트너십을 전혀 맺지 않았고, 재학생들에게서는 일체의 수업료도 받지 않았다. 장성한 제자들이 기부금의 형태로 자금을 지원하기는 하였으나, 아카데미가 학생들을 위해 매년 사용하는 지출을 충당하기엔 역부족이어 점차 장학재단의 재정 상황을 위협했다. 설상가상으로 2008년, 무장한 과격 종교 단체와의 충돌에서 학생 두 명이 중상을 입고 한 명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9년 간 쌓아 올린 아카데미의 명성은 큰 타격을 입었다. 세간에는 하비에르 박사가 그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아 소극적으로 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하비에르 박사는 2008년 초 이미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으며, 치료를 위해 점진적으로 외부 활동을 줄이고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제자의 실종이 그에게 끼친 영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비에르는 줄곧 제자가 살아있다고 믿었으며, 그를 찾기 위해 강도 높은 능력 사용을 이어나갔다. 2년 뒤인 2010년 하비에르는 첫 번째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발전한 의학 기술 덕분에 치명적인 뇌손상은 피할 수 있었으나, 하비에르는 의사의 강력 권고를 어기고 또다시 제자를 찾는 일에 몰두한다. 결국 2011년, 개인 집무실에서 두 번째 뇌경색을 겪은 하비에르는 이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이듬해인 2012년 세상을 떠난다.

하비에르의 죽음은 히어로 업계의 많은 이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나, 특히 장학재단과 아카데미에 관련된 인물들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제자들은 분투했으나, 하비에르의 비전과 지도 없이는 도저히 학교를 이끌어나갈 여력이 없었다. 새로이 모집하는 학생들이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지원금도 점차 끊어졌다. 3년이 흐른 2015년에 이르러서 하비에르 아카데미는 몇몇의 충성스러운 동문회에 의해 간신히 건물을 유지할 수 있는 사교 모임에 가까웠다. 결국 2015년 6월 2일, 장학재단의 새로운 학장이 된 하비에르의 딸, 오브듈리아 하비에르는 무너져가는 비전을 살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내린다. SKY의 지원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당시 막 프레임을 완공한 SKY는 마침 신도시 기업령 '엘 도라도'의 상징이 될 교육 기관을 원했고, 하비에르 아카데미의 명성은 그 대상으로 적격이었다. 하지만 기업은 아카데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인수와 자금 지원의 조건으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 느슨한 평생 교육 정책은 사라졌고, 6학년제를 기반으로 하는 기초 3년, 심화 3년의 정규 교육 과정이 자리를 잡았다. 이후로도 SKY는 특유의 '사업적'인 모델 변화를 수년에 걸쳐 설치했다. 가장 먼저 가해진 변화는 입학 전형을 분리하여 등록금을 지불하고 교육을 받을 의향이 있는 초인 가정을 모집한 것이다. 재편된 교육 과정의 첫 세대가 졸업한 2022년에는 오히려 등록금 전형을 '일반화'시켜 기존의 학생 선별 방식을 특수 전형으로 밀어냈다. 두 전형으로 선발되는 학생 비율의 격차도 점차 줄여나가 2021년에 이르러서는 그 수가 역전되었다. '세련되고 고급 진' 새 교복을 디자인하여 학생들에게 착용토록 하였고, '히어로 공채' 체계에 '하비에르 졸업 예정생 인턴쉽'을 추가하여 막대한 어드밴티지를 부여했다. '인턴쉽'의 대상을 '선별'하기 위해 경쟁적인 성적 시스템이 부여된 것은 물론이다. 학교의 이름도 바뀌었다. 기업 이사회는 보다 분명하게 학교의 존재 목적을 어필할 수 있는 이름을 원했다. "하비에르 아카데미"는 그렇게 "하비에르 초인 학교"로 재탄생 했다.

하비에르가 그린 아카데미의 모습은 방황하는 초인 청소년들이 평생을 보낼 수 있는 집과 같은 공간이었다. 누구나 원한다면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었고, 자유롭게 자신의 꿈과 장래를 설계하며, 언제든지 떠날 수도,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 비전은 현재 호텔을 방불케하는 고급 진 기숙사 방과 호화로운 식사만이 흔적으로 남아있다. 과열된 입학 경쟁은 정작 학교가 세워진 이유였던 아이들을 배제하며, 그나마도 통과한 학생들은 6년-대부분의 특수 전형 학생들은 그보다 더 짧은-의 제한 시간 동안 자신이 통과할 수 있는 시험을 찾아 해맨다. 학교는 5년이 지나면 다시 돌아와선 안되는 곳이 된다. 6학년이 되어도 학교에 남아있는 이들은 실패자, 패배자라며 손가락질을 받으며, 이후 그 아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특히, 특수 전형 학생들은 자신들이 탈출했던 수렁에 빈손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에 이르러 하비에르의 결정들을 돌아보면, 그의 생각들이 얼마나 먼 미래를 내다본 것이었는지, 또 수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굽히지 않고 걸어온 길이 결국 옳은 길이었다는 부분에서 감탄과 함께 깊은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비록 한 여름 밤의 꿈과 같은 몽상이었을지언정- 그의 이상은 현실에 때 묻지 않은, 아이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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