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덕의 밤

EL DORADO :: 유용한 이야기

“... 누군가는 인종과 계층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용광로가 그저 조화롭게 흐르기를 기대한 듯 하다. 실상은, 용광로 속을 떠다니는 그 누구도 다른 층과 섞이기를 원치 않았다. 분리된 층을 섞어보려는 어떤 노력도 책임도 들이지 않으니 핏빛 댓가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 - 하워드 J. 버튼 Howard J. Burton

1996년 10월 4일. 새벽 4시 32분 경, 두발의 총성이 짙게 내려앉은 새벽 공기를 가르고 도시를 깨웠다. 방아쇠를 당긴 장본인은 LA 시경으로 재직중이던 43세의 패트릭 스패로우(Patrik Sparrow) 경관으로, 미등록 초능력자가 새벽 행인들을 위협한다는 지역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상태였다. 화약연기를 뱉어내는 총구 아래로 스판 슈트를 입은 청년이 마지막 숨을 뱉어내고 식어갔다. 탄흔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노란 가슴을 붉게 물들였다. 사망한 초능력자는 22살의 시드니 말론(Sydney Mallon)으로, 당시 LA 다운 타운에서 ‘로빈’이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하던 히어로였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현장에 있었던 시드니가 초인 등록증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강도로 오판, 그 자리에서 사살해버린 것이다. 10월 15일 열린 재판에서 패트릭 스패로우는 (그의 변호인을 통하여) 시드니가 초인 등록증을 제시하지 않았음은 물론, 경관의 동행 요청에 불응하며 욕설과 초능력을 사용한 위협을 가하는 등의 폭력적인 행동을 보여 자위권을 행사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으나, 현장에서는 시드니가 초능력을 사용한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패로우의 주장은 받아들여졌으며, 패트릭을 포함하여 시드니 말론의 죽음과 연관된 경찰 관계자 3명은 모두 짧은 정직 처분을 받고 시경으로 복귀하였다. 그날 시드니 말론이 실제로 강도로 오인될 만한 행위를 하였는지, 강도가 정말로 있기는 하였는지- 모든 사실은 안개속으로 감춰져버렸다. 초인 등록제의 시행이래로 폭력 진압과 차별 대우에 깊이 곪아있던 미국 전역의 초인 인구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섬멸전이 종결된 1987년, 미국을 구성하는 모든 주에서 일괄적인 초인 등록법안을 시행을 완료한 이후 초인 사회는 두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초인으로서의 자신을 등록하고 정부의 통제 아래 살아가느냐, 자신을 철저하게 숨기고 발각된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협 아래에 살아가느냐. 특히 대도시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초인에게 후자는 불가능에 한없이 가까웠다. 그렇다면 전자는 안전한 생활을 보장했는가? 그렇지 않았다. 법안의 서면 상에는 단순 초인이라는 이유로 초인의 생활에 불이익을 주는 모든 차별 행위를 금지한다고 명시하였으나, 실제로 초인 등록증을 보유한 시민은 개인 정보를 요구하는 모든 생활에서 행동 범위를 제한 받았다. 면접관들은 온갖 이유를 들어 초인 지원자의 우선 순위를 떨어트렸고, 집을 내놓은 주인이 대뜸 거래를 끊기 일쑤였다. 심지어는, 초인 등록이 된 손님을 받지 않는 택시 기사도 있었다. 그야말로 분리 평등 정책(Seperate but equal)의 재림이었다. 이번에는, 반 정부/친 제국 초인 테러집단으로 부터 시민을 보호한다는 명목까지 가졌다.

      “ 내 이웃을 지키는 가장 현명한 선택.

            당신의 재능을 등록하세요. ”

     “ 숨길 것이 없다면 두려워 할 것도 없습니다. “

                 (당시 초인 등록 사무소에서 사용한 홍보 문구)

미국의 초인 등록제 시행 8년차인 1994년 경, 각 주의 초인 사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고급 기술직이나 전문직으로 진출하지 못한 젊은 초인 청년들은 그나마 비 초인들의 시선을 적게 받아 구직이 수월한 공장, 혹은 건설 현장등으로 몰려들었다. 디트로이트, 시애틀, 시카고, LA를 비롯한 수많은 도시에 일명 ‘메타빌’이라 불리는 초인 거주촌이 형성되었다. 대다수의 시민들이 초인 군집을 꺼려했기 때문에, 많은 메타빌은 열악하거나 낙후된 환경을 가진 구식 주택가에 주로 자리잡았으며 이중 일부는 이미 ‘할렘’화 된 거주지역인 경우도 많았다. 주류 기득권 사회의 횡포에 밀려 들어온 세력- 흑인과 이주 노동자들, 그리고 초인들 -은 종종 자신들에게 허락된 땅을 두고 충돌을 일으켰다. 1992년 폭동의 여파로 혼란스러웠던 LA의 거주민들에게 이런 산발적인, 그러나 지속적인 마찰과 충돌은 공포와 혐오의 감정을 사회 깊숙한 곳까지 퍼트렸다.

1994년 4월부터 1995년 1월 까지 약 10개월 간 디트로이트 메타빌에서만 545건의 무력 충돌이 있었다. 통계적으로 5회의 무력 충돌은 반드시 1명의 사망자를 동반했다. 이렇게 전미에서 사망한 인원들에는 초인, 비초인은 물론 경찰과 히어로 등 다양한 계층이 포함되었다. 초인 연관 범죄에서 경찰 순직 사례가 줄줄이 발생하자, 1995년 2월 21일,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20여개 주는 ‘화력 우세성’을 빌미로 경찰 병력의 전면적인 화기 사용을 허가한다. 이는 공권력의 사망율를 극적으로 낮추었으나, 전체적인 충돌의 발생 횟수와 사망자에 대한 통계는 전혀 줄지 않았다. 1996년 10월에 이르기까지 발생한 사망자 중에서 변화한 수치는 단 하나, 경찰 병력의 폭력 개입에 의한 사망이었다. 그렇게 억울하게 당겨진 방아쇠에 대한 수많은 초인들의 분노가 10월 4일의 총격 사건을 기점으로 폭발한 것이다.

10월 18일, 비가 쏟아지는 금요일. 스패로우 경관과 그 동료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1989년 워싱턴 D.C에서 열렸던 초인 등록제 반대 시위 이후 최대 규모의 초인 궐기였다. 당초 시위 일자는 19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당일 시경 병력이 시위를 방해할 것을 우려한 주최측은 전날 오후 기습적인 집회를 강행하였다. 이는 비극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전환점이 되었다. 5천여명의 초인 시위대 규모에 시경은 비상 사태를 선언하였고, 현장 통제를 위해 투입하는 모든 병력의 무장 소지 및 사용을 허가했다. 시위가 시작된지 4시간이 경과된 19시 21분 경, 선셋 대로를 통해 할리우드 인근으로 진입하려는 시위대와 이를 제지하려는 시경 병력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했다. 선회 지시를 따르지 않는 시위대에게 무력 해산 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기마대를 필두로 한 경찰 병력은 시위대를 향해 무자비하게 돌진해 몽둥이를 휘둘렀고, 결국 잠시 해산한 시위대는 10블록 정도 떨어진 에코 파크 공원으로 재집결한다. 위협 사격에 맞아 피를 흘리는 사람들, 말 발굽에 채여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 사이로, 10대 소년 제이미 왓슨(Jamey Wattson)이 두부 파열에 인한 출혈로 의식을 잃고 중태에 빠진다. 격분한 시위대는 삽시간에 초능력으로 무장한 폭도들로 변모했다. 시위대는 곧바로 LA 경찰청 본부로 진격했다. 본부가 자리잡은 빌딩에서 난장판이 벌어졌다. 대부분의 병력이 시위대 제압을 위해 밖으로 배치되어 있던 탓에 정작 본청에는 많은 인원이 남아있지 않았고, 몇 없는 경관들에겐 무차별적인 초능력의 포화가 쏟아졌다. 번갯불, 눈보라, 불소나기와 살수포가 한날 한시에 몰아쳤다. 폭동이라기 보단 차라리 재해에 가까운 광경이었다. 폭도들의 맹렬한 공격 아래 통제실 서버가 파괴되었고, 중앙 정보 시스템이 작동을 멈추며 시경은 도시에 대한 모든 통제를 상실한다. 20시 48분 경의 일이었다.

폭도로 변한 시위대에게 더이상 방향성이란 없었다. 일부는 본래 목적지인 할리우드를 향했고, 일부는 인근 주택가를 순회하며 상점과 길거리를 닥치는대로 파괴했다. 분노의 목표물은 이제껏 많은 마찰을 일으켜온 흑인 및 이주 노동자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일부는 다운타운의 메타빌로 되돌아가 파괴 행위를 벌였다. 시위대와 거주민들 사이에선 총격전이 벌어졌다. 두시간 내로 다운타운 LA 전역이 전쟁터가 되었다. 지휘 체계를 상실한 시경이 산발적으로 위치한 교전 구역을 모두 소화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역 경찰서로 신고 전화가 빗발치면, 잠시 후엔 초인 폭도들이 들이닥쳐 현장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총기 등의 물자를 약탈했다. 19일 00시 23분 까지, 에코 파크에서 시작된 불길은 차이나타운과 이스트 할리우드까지 뻗어나갔다. 새벽 1시 10분 경, 소방서의 상황실을 경찰 상황실로 개조한 시경은 LA 전역에서 인력을 긴급 차출하여 현장으로 투입한다. 소방관과 경찰 인력, 그리고 호출에 응답한 히어로 팀을 포함한 대응 병력의 규모는 3000명을 조금 웃돌았다. 소방차와 경찰 버스들이 작은 거리로 갈라져 나가는 길목들을 봉쇄해 시위대의 경로를 큰길로 집중시켰고, 히어로 팀이 경특대 병력의 지원을 받아 돌파하려는 시위대를 막아섰다. 대 초인 제압에 익숙한 히어로 팀이 없었다면 시경 측은 두배는 큰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르나, 결국 초인과 초인의 싸움이었다. 시위대의 진격이 꺾이자, 대응 병력은 다운타운 LA를 중심으로 포위망을 결성하여 점차 좁혀들어갔다. 비행 가능한 히어로들이 공중 감시를 수행하며 교전이 일어나고 있는 지점을 마크하면, 제압대가 투입되어 주동자를 체포 혹은 사살했다. 새벽 4시경, 히어로 팀 ‘애국적 성화’를 필두로 한 특공대가 시경 본청을 탈환했고, 연이어 5시경 주방위군이 포위망 바깥의 폭동 재발을 억제했다. 끔찍한 밤은 19일 7시 54분, 다저스 스타디움으로 후퇴해 마지막 농성을 벌이던 시위대가 항복을 선언하며 드디어 끝이났다. 경찰 병력과의 교전으로 피투성이가 된 시위대 주동자들이 히어로들의 손에 붙들려 연행되는 광경은 늦은 시각까지 TV를 주시하던 미국 전역의 시청자들에게 생중계되었다. 시위대의 4633명이 재물 손괴, 폭행, 절도, 방화, 살인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144명은 진압 도중 사망했다. 이 중에는 초인 등록을 통해 히어로로 활동하던 인원들도 다수 섞여있었다. 시위대를 제외한 민간인 6800여명이 부상을 입었고, 36명이 사망했다. 경찰 측에선 1200여명의 부상자,  109명의 순직자가 집계됐다. 추산한 피해 총액은 10억 달러를 가볍게 초월했다. 이 모든 것이 약 12시간, 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발생한 일이었다.

          “  우리는 사악한 마귀때도, 눈 먼 짐승들도 아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멸시와 핍박 속에 몸부림 치는 한 명의 인간들이다.

            우리를 만들어 낸 것은 당신들의 악덕이다. ”

- 리차드 맥기(Richard McGee), 시위 참여자. 그의 말은 상황을 중계하던 카메라에 고스란히 포착되어 미국 전역으로 중계되었다.

이후, 언론은 위의 진술에서 단어를 따와 이날의 사건을 ‘악덕의 밤(The night of misdeeds)’이라 이름 붙였다. 수없이 많은 무고한 시민들의 희생을 일으킨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런 명명은 거센 반발에 부딫혔으나, 이 폭동의 원인에 수년간 지속된 초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차별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일부는 해당 사건에 슈퍼 빌런의 연관이 되어있다는 음모론을 내놓기도 하였으나, 이는 곧 초인 사회의 비난에 몰려 사그라들었다) 결국 ‘악덕의 밤’은 이와 같은 초인 봉기의 상황이 다시 발생하였을때 대응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함과 동시에, 수년간 적체된 초인 사회의 반감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방법 또한 논의하게 만들었다. 1997년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 초인권 회의에서 아바 레히나르와 매디슨 레히나르의 ‘그저 사람일 따름(They are but man)’ 연설을 기점으로 초인 등록제 폐지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1998년에는 보다 구체적인 초인 보호 감찰법이 재정되어 1999년 11월 경 시행을 시작한다. 같은 해 12월 초인 등록제 폐지의 주축이던 레히나르 일가족이 빌런 집단에게 살해당하며 움직임도 잠시 주춤하였으나, 2001년 부터 2006년 초인 등록제의 궁극적인 폐지가 이루어지기까지 수없이 많은 개정안이 만들어지며 기존 메타빌/초인 집단 거주촌 등을 만들어낸 핍박과 불이익을 해소한다.

LA 시는 에코 파크 공원에 위치한 ‘악덕의 밤’ 추모비에 시드니 말론과 제이미 왓슨을 비롯한 초인 희생자들을 위한 공간을 추가로 설치했다. 새로이 기재되는 이름 중에는 당일 민간인 살상을 일으킨 인원도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반대를 표하는 목소리를 내었으나 시 의회는 설치를 강행하였다. 에코 파크의 ‘악덕의 밤’ 추모비는 화합의 실패와 그 댓가를 상징하는 기념물로서 굳건하게 서있다. 사회 구성 계층들이 서로에게 품은 증오가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지나치는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다시금 되새기면서 말이다. 매년 10월 4일이 되면 LA에선 시드니 말론을 비롯해 끔찍한 밤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렬이 열리며, 이 추모 주간은 ‘악덕의 밤’이 일어난 19일 새벽 6시까지 계속된다. LA 시는 2016년까지 ‘악덕의 밤’ 사건의 피해자(초인/비초인을 가리지 않고)에 대한 소송 종결 및 보상 조치를 마쳤으며, 당일 범행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복역을 마치고 사회에 복귀하는 인원들에 대해서도 재사회화와 복지 프로그램을 운영 하고 있다. 화합을 위한 노력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또다른 악덕 청산의 밤이 열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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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패로우 경관은 시위 당시 시위대의 목표물이 될 것을 우려하여 당국의 결정에 따라 산타 모니카에 위치한 숙소로 임시 보호 조치 되었으며, 정직 기간이 지난 이후 LA 시경으로 복직하였다. 이후 스패로우 경관은 시드니 말론에 대하여 대외적으로 어떤 입장도 표현하지 않았으나, ‘나는 그저 사회의 질서를 지키려 한다.’ 라는 사명감을 지속적으로 내비쳤다고 한다. 비록 침묵했으나, 그가 이후 초인/비초인 무장 충돌에 더욱 적극적이고 인도적인 태도로 뛰어들었으며 악덕의 밤 사건의 피해자들을 위한 기부 또한 활발히 진행해 왔다는 행보로 미루어볼 때 모종의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껴왔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스패로우 경관은 2012년 무장 은행 강도와의 교전 도중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는데, 그를 살해한 브라이언 쿡(Brion Cooke)은 단 하나의 초능력도 가지지 않은 비초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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