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닌 만우절(1)
콜 오브 듀티 드림
4월은 나의 거짓말
1. 고스트
“저 부대 전출 신청하려고요.”
고스트가 눈을 크게 뜨고 ‘무슨 그런 말을 티 마시는 중에 하나?’같은 눈빛을 보냈다. 해골 가면에 뚫려있는 두 눈구멍 만으로도 그가 느끼는 당혹스러움이 충분히 전해졌다. 고스트는 잠시 조용히 올린 발라클라바를 정리하더니, 나를 마주 보았다.
“이유가 뭐야.”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아니, 그의 목소리는 항상 듣기 좋은 중저음이긴 했지만, 임무 외의 일에 이렇게까지 진지함을 담은 건 처음이었다. 표정을 숨기기 위해 얼굴을 푹 숙였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중위님.”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힘든 내용인가?”
그 행동이 고스트에겐 울음을 참는 걸로 보였나 보다. 웃음을 참느라 떨리는 목소리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고스트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숙였다. 답지 않게 다정함이 묻어나는 행동이었다. 아, 젠장, 고스트. 정말 고맙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면 더 참기가 힘들어진다. 그와 마주하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자 고스트가 손을 뻗어 내 턱을 부드럽게 잡고 자신을 향하게 만들었다.
이 짓도 여기까지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와 마주한 내 얼굴이 아주 시뻘겋게 달아올라선, 누가 봐도 웃음을 참는 얼굴이었으니까.
“뭐-”
“큽, 흡, 파하하! 고스트, 평소에 자주 달력을 안 봐요?”
그게 무슨…. 말을 끝마치지 못한 고스트가 벙찐 채 생각 회로를 돌리는가 싶더니, 와락 눈가를 좁혔다. 그가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나는 당겨오는 배를 붙잡고 뒤집어질 듯 웃었다.
“아, 하하- 정말 속으실 줄은 몰랐어요.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으시네요?”
“재미있나?”
“당연하죠!”
“그래. 충분히 재미 봤길 바라지.”
고스트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훈련은 내가 직접 봐줄 테니 그런 줄 알아.”
“고스트, 화난 거 아니죠?”
“글쎄.”
“저기요 중위님? 중위님??”
2. 프라이스
어쩌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걸까?
책상에는 프라이스가 앉아있었다. 맞은 편에 열중쉬어 자세로 서서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는 피우던 시가를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말해 봐."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 의자에서 난 작은 소리가 적막이 흐르는 방 안에서 몇 배로 증폭되어 울렸다. 프라이스가 팔꿈치를 책상에 기댄 채 양손 깍지를 꼈다. 에바에 타라고 하실 셈인가?
"긴장 풀어. 자네를 혼낼 생각으로 부른 거 아니니까. 그래, 부대 전출 신청을 한다지?"
"네?"
프라이스의 말에 잠시 벙쪘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짚이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친한 대원들에게 장난친다고 떠들어댄 업보가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다니.
내 반응을 본 프라이스가 무언가 확신한 눈빛을 했다. 그게 뭐든 정답이 아닐 것 같습니다, 대위님….
“소프가 귀찮게 구나? 아니면 가즈 녀석이?”
“아닙니다, 저-”
“그것도 아니면 다른 놈들이 괴롭히기라도 하는 건가?”
“대위님! … 그,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큰 소리를 냈다. 오해라는 단어에 프라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에 그가 나를 남들보다 더 아낀다는 느낌은 어느 정도 받았지만, 고작 이런 소문 때문에 따로 불러낼 줄은 몰랐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나는 일이 이렇게 된 경위를 사실대로 말했다. 프라이스의 귀에 들어갈 줄은 몰랐다는 말도 함께.
“정말 죄송합니다.”
“….”
모든 걸 알게 된 프라이스는 제 미간을 한 손으로 문질렀다.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다만 허탈하단 느낌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건지 그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프라이스가 시가를 다시 들어 올렸다.
“애도 아니고, 이런 만우절 장난에 속다니.”
“죄송-”
“아니, 됐어. 그만 사과해. 창피하니까 이만 나가봐.”
프라이스가 시가를 들지 않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는 말을 마친 후에도 계속해서 ‘허’, ‘나 참’ 같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나는 방을 나왔다.
문을 닫고,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그제서야 깊게 숨을 들이쉴 수 있었다. 장난을 친 건 나인데 왜 내가 놀라야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3. 호랑이
“이런 씨발,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호랑이가 늘어져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물었다. 오. 반응 좋고.
“그렇게 갑자기는 아니야. 꽤 오래전부터 생각했었어.”
“아니 근데, 그럼 그걸 왜 이제 말하냐는 거지! 너 그만두면 뭐 하려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갑작스러운 철벽에 호랑이가 들으라는 듯 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자세를 고쳐 의자 위에서 양반다리를 했다. 선글라스와 발라클라바에 가려져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잔뜩 진지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예상에 없던 반응이라 꽤 신선하기도 했고, 계속해서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져 덩달아 진지하게 대화에 임하게 되었다.
“야, 솔직히 내가 뭐, 다른 사람들만큼 대단한 삶을 살아왔다곤 못하겠지만, 이래 봬도 산전수전 다 겪어본 사람이거든? 응? 내가 너보다 인생 경험치 쬐-끔 더 쌓은 사람으로서 말하는 건데, 이렇게 막, 막, 어? 그만두고 그러는 거 좋지 않다? 응?”
“막 그만두는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이유라도 들어보자.”
그르륵 칽. 호랑이는 까놓고 다 말해보라는 듯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나는 주변을 한번 살핀 뒤 호랑이에게 당부했다.
“다른 사람들한테 말 안 하겠다고 약속해.”
“당연하지! 내가 또 의리 빼면 시체인 남자 아니냐?”
“네가 언데드인 줄은 몰랐어, 호랑이.”
“이게 팍 씨.”
머리를 한 대 쥐어박는 시늉을 한 그가 말 돌리지 말라며 재촉했다. 나는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사실….
“사실?”
“오늘 날짜 때문에 그래.”
“엉?”
“오늘 말이야. 만우절이잖아.”
해피 만우절, 호랑이. 그렇게 말하자 잠시 벙쪄 있던 그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었다.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
크게 소리 내며 잠시 창문가로 향했던 그가 뚝, 웃음을 그치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몸을 숙여 시선을 맞춰왔다.
“알고 있었어.”
“그래, 그러시겠지.”
“아는데 일부러 속아준 거야. 내가 착해서.”
“그런 걸로 치자.”
“진짜라니까? 아니, 안 되겠다. 너 이리 와.”
아까 못 때린 꿀밤을 지금 먹여야겠어. 호랑이가 위협적으로 주먹 쥔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나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달아났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쿵쾅거리며 복도를 울렸다.
4. 쾨니히
커다란 쿠션에 하듯 쾨니히에게 몸을 기댄 채 늘어져 있다, 문득 장난기가 솟아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있잖아, 쾨니히.”
“Ja.”
“나 일 그만둘까 봐.”
쾨니히는 몸을 움찔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적막만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생각하지 않은 반응에 몸을 돌려 그를 보려던 찰나, 대답이 돌아왔다.
“거짓말.”
“어,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가 뒤에서 팔을 뻗어 상체에 둘러왔다. 껴안는다는 느낌보다는 움직임을 제한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당황하여 움직일수록 더 강하게 팔을 조여왔다. 뒤돌아 그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들리는 것은 오직 그의 숨소리뿐이었다.
“쾨니히?”
“거짓말이야. 넌 떠나지 않을 거야. 떠나면 안 돼.”
날 두고 가지 마…. 조그만 애원과 함께 그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귓가에 그가 뒤집어쓴 티셔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이게 뭐람. 나는 겨우 팔을 움직여, 그를 천천히 도닥였다.
“거짓말 맞아. 오늘 만우절이잖아.”
“만우절?”
“응. 그래서 장난친 건데….”
그제야 그가 팔에 힘을 풀었다. 갑갑함에서 몸이 해방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Tut mir leid.”
“괜찮아. 애초에 내가 먼저 시작한 건데, 뭐.”
나는 어깨를 돌리며 별생각 없이, 장난스레 물었다. 너 이러다 정말 내가 그만두면 그땐 어떡하려고?
그가 푸른 눈으로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서늘하고, 또 고요했다.
“지금부터 생각해 볼게.”
“뭘…?”
“네가 말한 상황이 닥쳤을 때 내가 뭘 하면 좋을지 말이야.”
그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하지만 즐거운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5. 소프
소프와 함께 나란히 걷고 있을 때였다. 감자를 닮은 동그란 머리를 보자, 날도 날이니 장난 한번 쳐봐? 하는 생각이 머리를 번뜩 스쳤다. 나는 태연하게 떡밥을 던졌다.
“소프, 너는 연애할 생각 없어?”
“갑자기?”
바라던 말 대신 그는 웃음만 흘렸다. 대답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눈빛으로 쏘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손뼉도 부딪쳐야 소리가 난다고, 상대가 있어야지. 나 혼자 연애를 할 순 없잖아?”
“그럼 나는 어때?”
“억, 컥, 뭐, 어?”
사레가 들렸는지, 소프가 재채기를 하며 마시던 음료를 내려놓았다. 내 고백 공격이 제법 효과적이었나 보다.
그런 그의 추태를 짐짓 모른 척하며 나는 공격을 이어나갔다. 나 사실 너 좋아하는데.
소프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어-’, ‘엄…’, ‘그러니까’ 등의 말만 반복했다. 달아오른 얼굴이 단지 햇볕 탓은 아닐 터였다. 귀여운 놈. 나는 성공을 직감하곤 혀를 베- 내밀었다.
“아주 제대로 속아 넘어갔지, 그치?”
“으, 응?”
“오늘 만우절이잖아, 멍청아.”
“아.”
소프는 그 말로 무언갈 깨달은 듯 제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가 음료를 든 손에서 검지만 뻗어 나를 가리키곤 웃었다. 제법인데? 그 칭찬에 나는 무대 위 출연자처럼 과장되게 감사 인사했다. 별말씀을.
소프는 생각에 잠긴 채 간간이 헛웃음을 뱉을 뿐, 잠시간 말이 없었다. 이내 그가 무언갈 결심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전부 거짓말이야?”
“응?”
“그러니까… 방금 고백에 진심은 일절 없냐고.”
진지한 눈동자에 오롯이 내 모습이 담겨있었다. 얼굴이 내 의지와는 다르게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 또한 햇볕 때문은 아닐 것이었다. 이거… 성공한 거 맞아…?
6. 가즈
가즈와 간만에 휴게실에서 수다를 떨던 때였다. 프라이스의 옆을 지키느라 바쁜 탓에 그는 분명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고 있을 터였다.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넌지시 말을 던졌다. 불쌍한 가즈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내 얘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그 자식이 애인은 없냐고 추파를 던지는 거야. 그래서 말했지. 좋아하는 사람은 있다고.”
“그 사람이 순순히 물러나던가요?”
“응. 네 얘기 꺼내니까 그냥 가던데?”
“네?”
“멋지고 잘생긴 군인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했지.”
잘못 들었습니다? 가즈가 되물어왔다. 여기서 나는 결정타를 날렸다.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나 너 좋아했어.
가즈는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하고 제 턱을 몇 번 문질렀다. 방황하던 그의 눈동자가 질문과 함께 나에게 꽂혔다.
“잠깐, 왜 과거형이에요?”
“응?”
“‘좋아했다’면서요. 그럼 지금은요?”
이건… 예상에 없던 질문인데. 나는 내가 그렇게 말했나? 곱씹으며 즉석에서 변명을 쥐어짜냈다.
“오, 음… 글쎄, 네가 워낙 바빠서 잘 못 마주치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식은 거예요?”
결국 내가 먼저 두 손을 들었다. 나는 사실대로 말하기로 마음 먹었다.
“가즈, 너 정말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구나?”
“네?”
“오늘 만우절이잖아….”
아, 하는 짧은 깨달음과 함께 우리 사이엔 정적이 찾아왔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 가즈가 나보다 한발 빨랐다.
“그래서 어떤데요?”
“뭐가?”
“지금은요.”
“응?”
이번엔 내 쪽에서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가즈가 상체를 조금 기울여 가까이 다가왔다.
“저 어떻게 생각하냐는 말. 저는 거짓으로 물어본 거 아니니까, 진지하게 생각해 주세요.”
오늘이 끝날 때까지 만우절 장난이라는 말은 없었다.
7. 오니
오니는 좋게 말하자면 우직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고지식했다. 그런 그를 놀렸을 때의 반응이 얼마나 재밌는 것일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호랑이와 나는 번갈아 가며, 때로는 합을 맞춰 그에게 시답잖은 농담을 하고, 싸늘한 눈초리를 받는 것이 일상이었다. 오니는 이름 그대로 귀신 같이 화를 냈다가도, 제 안의 사람을 쉽게 내치지 않는 성격이기에 금방 용서해 주었다. 그걸 알아서 더 놀리는 맛이 있는 거지만.
그의 옆에서 그가 카타나를 손질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전에 우치코가 어쩌고, 누구이가미?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가 저쩌고하며 찬찬히 설명해 주었으나 솔직히 다 까먹었다. 도검 손질에 관심이 있어서 보는 게 아니고, 그의 차분하고 절제된 움직임이 나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기에 옆에 있는 거라 처음 두어 번은 설명해 주던 오니도 떠드는 대신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는 분위기였다.
오니가 하얀 천 같은 것으로 날을 감싸고 닦아내었다. 숙련되지 않은 자가 함부로 하면 손가락이 날아갈 것이란 무시무시한 얘기를 해주었었는데, 정작 그는 말을 하는 동시에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알 수 없는 요령 같은 게 있나 보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오니는 웬만한 방해가 아닌 이상 간간이 말을 섞어준다는 거다. 고요를 깨고 그를 부르자 시선은 계속해서 도검에 둔 채 대답해 왔다. 나는 오늘 점심 메뉴를 알리듯 말했다. 사실 나 너 좋아해.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움직임이 멈췄다. 설마 손가락 날아갔나…? 나는 괜스레 마음이 불안해져서 그를 다시 불렀다.
“오니? 괜찮아?”
“… 아니.”
이럴 수가, 진짜 손가락이…? 나는 급하게 몸을 일으켜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오니가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다행히 손가락은 다섯 개 전부 있었다. 그럼 왜 정면에서 못 보게 하는 거지? 그의 8시 방향쯤에서 기웃거리던 나는 붉어진 귀를 발견했다. 아하. 이 녀석….
잠시 할말을 고르던 오니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큽.”
“….”
“흐읍, 아니, 큼. 신경 쓰지 말고 하던 마할, 흡! 계속 해.”
그리고 나와 마주한 뒤 멈췄다. 어쩔 수 없었다. 너무나도 진지한 그의 태도에 표정을 관리하기가 힘들었는걸.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그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소리 내 웃었다.
“해피 만우절, 오니쨩~”
“이딴 장난이 재미있나?”
“으하학, 당연하지! 오니쨩, 제법 순진한 구석이 있네. 귀여워!”
“だまれ.”
그가 보란 듯 한숨 쉬며 도검 손질을 위해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지금의 분위기도 그렇고 뒤에서 요란하게 웃어대는 나 때문에 집중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결국 쫓겨났다.
8. 크루거
만우절 장난, 좋지. 하지만 내 상황은 최악 중 최악이었다.
친한 대원들끼리 몇 모여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고 있던 때 이런 제안이 나왔다. ‘만우절이니까 거짓말로 고백해 보는 건 어때?’
고등학생들이나 떠올릴 법한 유치한 발상이었지만, 원래 이런 무리에서 유치하게 놀 수록 재밌는 법 아니겠는가. 우리는 방정맞게 들떠선 제비뽑기로 고백할 사람과 고백받을 사람을 정하기로 했다.
여기서 문제가 두 가지 발생했다. 하나는, 고백할 사람으로 내가 뽑혔다는 점.
나머지 녀석들이 꺄르르 뒤집어졌다. 사실 여기까진 괜찮았기에 나는 입으로는 욕을 내뱉으면서도 같이 웃었다.
또 다른 문제. ‘진짜’는 이거다. 고백받을 상대로 크루거가 뽑혔다는 점.
여기서 내 입꼬리가 싸늘하게 내려갔다. 나머지 녀석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대체 누가 크루거의 이름을 적어 넣었는지 범인 찾기에 바빴다. 그런다고 자수할 리가 있나.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군인이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금방 해치우고 오겠다며 당당히 나섰다.
그리고 지금 크루거를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 괜히 나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하군인 하고, 어? 욕도 좀 먹고 그러고 그냥 안 하겠다고 할걸.
베일을 뒤집어쓴 탓에 놈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멀끔하게 생긴 놈이 저런 걸 계속 뒤집어쓰고 다니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내 안에서 끔찍한 상상이 점점 최악의 최악으로 향해가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너무 끔찍해서 일일이 설명하진 않겠다. 대신에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 악몽을 끝내는 쪽을 선택했다. 나는 인간의 언어를 처음 배운 안드로이드처럼 입력된 말을 출력했다.
“나 사실 너 좋아해.”
“알고 있어.”
이 미친 놈이 뭐라는 거야?
“이 미친 놈이 뭐라는 거야?”
아차. 입력과 출력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입 밖으로 나와선 안될 말이 나와버렸다. 나는 입을 합, 다물었다.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크루거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태연히 말을 이어갔다.
“대체 언제 고백하나 기다리고 있었잖아, 우리 강아지.”
“저기, 시발, 너 오늘이 만우절인 거-”
“아무튼 잘 들었어. 이제 딴 놈들한테 가서 말해. 크루거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고.”
“이런 미친.”
계속되는 욕설에도 크루거는 손을 뻗어 진짜 강아지 다루듯 내 볼을 꼬집을 뿐이었다(놀라서 몸을 물렸을 때 그의 비웃음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Mein Hündchen. 내일부터 기대하고 있을게.”
뭐를? 크루거는 대답 대신 꼬집은 볼을 튕기듯 놓아주곤 떠나갔다. … 오늘부터 진지하게 옮길 직장을 알아봐야겠다.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결제하시면 창작에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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