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아래, 맞잡은 두 손

타브아스 엔딩 후 날조

공장과 공장장 by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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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타리온의 비승천루트, 엔딩 후의 이야기를 날조 및 망상함.

가내 타브의 이름과 배경설정 및 약한 우울함에 관한 언급이 조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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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의 희생으로 엘더 브레인을 물리치면서 기나긴 모험이 끝나고, 루드빅과 아스타리온은 새로운 여정을 택했다. 발더스 게이트의 재건과 재번영은 윌 레이븐가드 대공을 비롯한 도시의 다른 수호자들이 돕기로 했다. 이 둘 또한 초반에 시민들을 돕기도 했으나(이 과정에서 아스타리온은 가끔 괜한 일을 한다며 투덜거렸다.), 둘만의 상의 끝에 동료들에게 도시를 떠날 것을 밝혔다. 두 사람이 발더스 게이트를 떠날 때 남은 동료들은 활기찬 배웅을 해주었다. 자헤이라의 잔소리 속 걱정과 할신의 따스한 격려, 윌의 진심어린 응원 등을 받으면서 둘은 힘찬 발걸음을 내딛었다.

솔직히 말해 엘더 브레인에 삼악신의 선택받은 자들, 언더다크의 매서운 괴물들과 고블린 무리 따위를 모두 무찔러본 만큼 둘에게는 모험 중 일어나는 전투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전투가 자주 발생하지도 않았기에 어찌보면 평화로운 모험을 이어나가는 셈이었다. 뱀파이어인 아스타리온이 비록 햇빛을 좋아할 지라도, 그에게 가혹한 태양을 피해 낮에는 보통 나무 그늘이나 지하 던전, 동굴 따위를 지나오는 게 일상이 되었다.

아스타리온이 원한다면 종종 태양빛에서 멀리 떨어진 높은 산의 그늘 아래에서 노을이 가라 앉는 모습을 함께 감상했다. 혹은 높은 구조물의 뒤나  커다란 나무 뒤에서. 어느 곳이든 그의 피부가 타버리지 않을 곳에서 지켜보았다. 그럴 때면 아스타리온의 시선은 져가는 태양이나 움직이는 그림자로 향했다. 이백 년이 넘도록 햇빛을 잃었던 아스타리온이 올챙이의 힘으로 햇빛을 잠시 되찾았던 후부터, 그의 인생에서 빛을 다시 지워낼 순 없었다. 그가 다시 태양 아래에서 걸어다닐 수 없음을 처음 깨달았을 때는 절망했으나, 루드빅과의 모험을 하면서 이 이상한 취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는 해가 뜨던 노을이 질 때던 그것들을 감상할 때마다 홀린 듯한 눈을 했다.

그러는 동안 루드빅은 그림자 속에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기 일쑤였다. 그 이유는 눈앞의 이 뱀파이어가 이따금씩 마치 위대한 거장의 예술작품을 감상하듯, 혹은 매혹적인 마법에 마음을 빼앗긴듯 빛과 그림자가 서서히 움직이는 풍경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때로는 인상을 찌푸리며 슬픈 눈을 하기도 했다. 루드빅은 그가 흔치 않게 보여주는, 어딘가에 완전히 빠져든 표정을 보기를 좋아했다. 아마 이 취미도 시간이 오래 흐른다면 사라질지 모르지만 지금만큼은 둘 모두 이 상황을 즐겼다.

모든 감상이 끝나고 마침내 하늘이 어두워진 뒤에야 둘은 야영할 준비를 했다. 루드빅이 마법으로 불을 지핀 후 간단하게 요리를 하거나 야영 물자를 꺼내고, 그동안 아스타리온이 주위에서 동물을 사냥해 자신이 먹을 피를 가져왔다. 가끔 물자가 넉넉하면 이스뱅크나 포도주 한 병도 꺼내 홀짝이기도 했다. 분명 이전에 동료들과 함께 오랜 시간 모험을 했는데도, 따뜻한 모닥불 앞에서 둘이 함께 식사를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곳에 발을 디디고 모닥불에 의존해 밤을 지새우는 건 그때와 같은 일이었지만 지금은 온전히 둘만의 여정이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따스한 불빛 앞에서 두 모험가는 그날 있던 사고나 사건들을 이야기 하다가, 옛 동료들의 이야기가 나올 때도 있었고, 어느새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말로 변하기도 했다. 둘에게 이제 이 모든 일과가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며 익숙해진 일상에 편안함을 느끼다 보면 이전에는 한 적 없던 말을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진심어린 고백이든, 숨겨왔던 비밀이든, 실없는 농담이든 간에 말이다. 평소와 같은 밤, 두 사람이 별을 보며 침묵에 빠졌을 때 루드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는... 죽고 싶단 생각을 자주 했어."

말을 꺼낸 루드빅은 손에 든 술병을 홀짝이며 마셨다. 낮에 마을에서 구한 포도주 종류였다. 뜬금없는 말을 한 사람치고 그의 표정은 그저 후련한 듯 마음이 편안해 보일 뿐 어떤 슬픔이나 울적함이 묻어나진 않았다. 아스타리온은 별을 보고 있다가, 그가 말하고 몇 초가 지나서야 고개를 돌려 그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그래? 지금은 어때?"

 "지금은 그런 생각 안 들어."

 "그거 다행이네. 난 너랑 더 있고 싶거든."

아스타리온의 목소리에는 장난끼가 조금 묻어나면서도, 표정만은 온화했다. 그는 두 팔을 땅에 대며 몸을 뒤로 살짝 젖혀 여유로운 자세로 자신의 연인을 지켜보았다. 루드빅은 앞을 바라보다가 제 옆의 엘프를 힐긋 한번 쳐다보고, 술병을 잠시 내려 놓는다.

 "더 물어보진 않아?"

 "글쎄, 네가 얘기하고 싶다면 말해 줘."

서로 할 말을 고르느라 둘은 잠시 침묵을 이어갔다. 제법 뜬금없긴 했으나 루드빅이 맨 처음에 입을 연 의미는 분명했다.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리고 아스타리온도 제 연인의 뜻을 알면서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이었다.

루드빅이 다시 말을 잇기 전에 술병을 한번 더 홀짝였다.

 "그때에는... 도시의 삶에 지쳤던 게 큰 것 같아. 삼촌과 좋은 사람들 덕에 자리잡긴 쉬웠어도, 사람들과 지내는 거? 그건 너무 새로운 일이었어. 처음에는 물론 재미있었어. 근데 일은 일대로 반복되고, 못된 사람들도 좀 만나고 그러니까... 내가 꾸던 꿈과 너무 달라서 더 우울해졌어. 도시로 건너 온 사람들이 환상이 무너지고 절망하는 건 흔한 이야기긴 하잖아."

 "흔한 현상이란들 네가 그렇게 느꼈단 걸 부정할 수도 없어, 자기야. 물론 도시 생활이 각박하단 건 인정해. 나도 잘 알거든."

아스타리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연인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단 뜻이었다. 그 말을 들은 루드빅이 웃음소리를 냈다.

 "맞아, 부정하진 않을 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난 도시랑 맞지 않았던 걸수도 있어... 결국 나 혼자 작은 모험을 떠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런 마음이 줄어들었거든."

 "흠. 모험으로 치유하다니, 모험가나 방랑가의 기질이 있는걸."

 "그럴수도."

루드빅이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한번 더 웃고는 술병을 입에 가져다 댔다가, 마시지 않은 채 다시 내려두었다.

 "올챙이 때문에 전혀 다른 모험을 하게 됐지만... 어찌보면 덕분에 널 만났고, 행복을 되찾기 시작한 것 같아."

잠시 바닥을 향했던 그의 시선이 아스타리온에게로 향하면서 입가에 미소가 생긴다. 그의 행복이 눈 앞에 있다는 걸 보여주듯. 술이 들어가 더 풀어진 미소였다.

 "오, 내가 너의 행복이란 거야? 로맨틱해라."

둘은 서로를 쳐다보며 낄낄거렸다. 그들의 웃음에 맞추어 모닥불이 타닥거렸다. 웃음이 멎은 후에도 한참 서로를 보다가, 아스타리온이 입가에 옅은 호선을 그린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앞으로는... 그런 생각 안 할 것 같아? 처음에 말한 거."

그는 조심스레 루드빅의 손에 손가락을 맞닿았다. 그의 위로 방식 중 하나였다.

 "그러면 좋겠는데 솔직히 확답은 못해. 그런... 묘한 감정들은 내 생에서 떼놓을 수 없을 것 같거든, 내 생각엔. 도시와 떨어져 있던 아주 어린 시절에도 느낀 것들이니까. 근데 이제는 행복감이 커서 없어진 거지. 일단 지금은 안 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미래는 모를 일이지."

 "그래도 불안감이 덮쳐올 때 너에게 숨기지 않을게. 너도 그러기로 했으니까..."

 "좋아.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넌 숨기는 게 많았어. 그동안 난 너한테 내 200년 간의 노예 생활과 이젠 내 손에 죽어버린 그 개자식을 향한 분노까지 전부 말했는데도 말이야."

 "미안, 네가 나보다 더 힘들어 보여서 말하기가 좀 그랬어. 생각해보니 지금도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네 아픔을 없는 취급 할 수 있는 것도 아냐. 그리고 내가 말했잖아, 넌... 내가 가장 신경쓰는 사람이라고."

과거에 대한 짧은 언급을 할 땐 장난스레 과장된 말투를 쓰던 아스타리온이 루드빅의 사과에 뜸을 들이며 답했다. 자신의 말에 아직도 익숙치 않다는 느낌이었다. 답지않게 쑥쓰러워 하는 그의 목소리에 루드빅이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음, 그 말은 언제 들어도 기쁘다. 고마워."

"뭐야? 우리 이제 가벼운 사이도 아니잖아, 자기야."

진지하던 분위기가 풀리며 둘은 다시 낄낄 웃었다. 루드빅은 와인 탓에 볼을 붉힌 채 천천히 아스타리온의 손을 잡았다. 아스타리온이 처음 진심을 고백한 그 날처럼. 두 사람은 한참을 손을 맞잡은 채 서로 마주보다가,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며 별을 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취기가 담긴 짧은 키스를 몇번 나누고, 지나간 모험담을 곱씹어 보기도 했다. 이 모든 과정이 그들의 현재 일상이었다.

이제 잘까? 한참을 이야기하던 와중에 루드빅이 말했다. 검은 하늘이 그들을 덮고 나서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아스타리온이 그에 응하면서 둘은 동굴 속에 자리 잡은 침낭에 누웠다. 아스타리온이 누운 자리 가까이에 루드빅이 다가갔다. 우리 껴안고 자자, 밤은 추우니까. 핑계도 잘 대네. 눈을 감기 전까지도 꼭 그렇게 소근거렸다.

아침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태양에 약한 뱀파이어는 동굴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자기 짐을 정리하고 그의 연인이 나머지 야영 물자들을 챙겼다. 배낭에 모든 물건을 넣고 떠날 채비를 마치면 루드빅이 먼저 그 주위를 살짝 둘러보며 확인하는 게 그날의 모험을 시작하는 방식이다. 동굴 밖에는 그늘이 적어 아스타리온에게 위험해 보였지만 다행히 동굴 안 쪽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오늘은 동굴로 들어가야겠어. 루드빅이 그렇게 말하면서 아스타리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린 애도 아닌데. 아스타리온이 투덜거리면서도 손을 맞잡고 일어섰다.

야영을 했던 동굴이 대단히 웅장하진 않았기에 둘은 이어진 길의 모험이 위험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동굴 속으로 갈수록 어두운 길 곳곳에 박힌 불꺼진 횃불이 이곳을 사용했던 이가 있음을 알려주었고, 앞으로 나아가는 틈틈히 함정을 해제해야 했다. 루드빅이 '이그니스!'를 외치며 먼 곳에 있는 함정들을 부수고, 잠긴 문과 바닥에 깔린 함정들은 아스타리온이 손수 해제했다. 이제껏 이 손으로 내가 한 게 얼만데, 이정도 쯤이야. 그는 거들먹 거리며 여지껏 단련한 손재주를 선보였다. 그렇게 자물쇠를 2개 풀고 함정을 5개쯤 해제했을 땐 씩씩대며 한소리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숨겼길래 이따위로 함정을 설치한 거야?! 그 옆에 놓인 상자들을 털면서 이어지는 중얼거림도 비슷한 내용이었다. 그의 불만을 들어보면 동굴의 끝에 100골드에 각양각색의 보석과 귀한 반지들, 혹은 고레벨 주문서가 여러 장 있어도 억울함이 쉬이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 후로도 몇 개의 함정과 자물쇠를 뚫고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미믹들과 전투를 치루고, 이내 가장 화려한 상자 속에서 별 볼 일 없는 물건들을 찾아 냈을 때, 루드빅은 최근 며칠 중 가장 고된 여정에 그의 연인이 다시 한 번 불만을 토로할 거라 생각했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스타리온은 그저 피로가 담긴 한숨을 한 번 쉬고 챙길만한 물건을 챙겨 가방을 정리했다. 그들이 이미 긴 모험을 하면서 희귀한 물건과 돈을 꽤 만져 봤기 때문에 이 동굴에서 진심으로 뭔가를 기대했던 건 아닌 듯 했다. 새삼 그의 반응이 옛날과는 다른 느낌이 들어 루드빅이 가만히 웃으며 그를 지켜보고 있을 때 그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아까 저쪽에서 봐둔 길이 있는데, 아마 거기로 나갈 수 있을 거야. 되돌아 가긴 좀 피곤해."

 "그래? 한번 가보자."

두 사람은 아스타리온이 한참 전에 자물쇠를 풀었던 끼익 소리를 내는 문을 덜컹 열고 닫으며 그가 말한 방향으로 향했다. 그 안쪽에 있던 사다리를 오르고, 이어지는 길을 걷다 보니 운이 좋게도, 그들은 멀리서 희미한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햇빛이 어디까지 오는지 확인하기 위해 루드빅이 먼저 출구로 가까이 다가갔다. 밖에선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고, 다행히도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에서 노을을 볼 수 있을 법 했다. 확인을 마친 루드빅이 아스타리온에게 손짓하자 아스타리온은 천천히 일몰이 져가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 모를 위험에 그는 그림자 속에 완전히 몸을 숨긴 상태였다.

잠시 풍경을 보던 루드빅이 평소대로 아스타리온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자, 그를 바라보던 아스타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처음 눈이 마주친 몇 초 동안 루드빅은 아스타리온이 당연히 다른 곳을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터라 약간 당황했으나, 아스타리온의 편안한 웃음을 보자 같이 미소 지었다. 그 사이 붉은 노을빛이 하프 드로우의 귓가를 스쳤다. 해가 질 때까지 둘의 손은 서로를 꼭 잡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루드빅에겐 마음이 굉장히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밤하늘이 그들을 완전히 뒤덮기 전에 루드빅이 손을 한번 휘둘러 주위를 밝혔다. 커다란 나무를 뒤로 한 채 아스타리온이 간이 텐트를 치기 시작했고, 루드빅은 옆에서 그를 도왔다. 어느정도 정리가 되었을 때 두 사람은 각자 먹을 것을 챙기고 모닥불에 앞에 앉아 함께 식사했다. 험난했던 동굴 탐험 덕에 그들의 몸은 피로한 지 오래였고, 그래서 두 사람은 말 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루드빅은 손으로 빵을 뜯다 말고 전날 마시다 남은 술을 꺼내들었다. 아스타리온이 허기를 채우고 나른해진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은 채 루드빅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제 네 얘기를 듣고 생각해 봤는데,"

"응?"

 "나도 지금이 내 생에서 가장 행복한 것 같아. 너랑 둘이서 모험하는 이 순간이."

루드빅은 뭐라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그 말에 놀란 듯, 두 눈을 몇번 깜빡였다. 아스타리온의 목소리가 마치 달콤한 자장가를 부르는 듯이 너무나 부드럽게 들렸고,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미간을 찌푸리지 않은 채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데다가, 무엇보다도 그의 태도가 평소와 달리 조금 수줍어 보이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림자 저주가 서린 숲에서 진심을 고백했던 그날처럼, 그리고 그의 묘비 앞에서 다시 한 번 사랑을 속삭였던 날처럼. 루드빅은 지금의 분위기가 그 때보다 더 온화하고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귀 끝이 붉어진 창백한 엘프는 달리 뭐라 해야 할 지 모르겠는 눈으로 이리 저리 바닥을 훑다가, 제 옆의 하프 드로우가 아무 말이 없자 결국 그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았다. 아스타리온이 시선을 올리자 보인 루드빅의 얼굴은... 벙쪄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지더니, '아니, 음, 어...' 하고 말을 더듬거렸다. 마치 처음으로 사랑 고백을 받은 어린 소년 같았다.

 "...진... 진짜야?"

 "그래. 뭣하러 그런 걸로 거짓말 하겠어?"

 "나... 네가 그렇게 느꼈단 게... 믿기지 않아. 아니, 그게 싫단 게 아니라. 그러니까... 나랑 함께하는 게 행복하다니, 너무 기뻐서..."

 "너도 어제 나한테 그런 말 했잖아. 똑같은 거야."

 "그렇지, 근데... 몰라.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냥 너무 설렌다."

 "갑자기 쑥맥처럼 구는 거야? 자기야, 너 아직 귀여운 면이 남아 있었구나."

 "몰라, 놀리지 마......"

루드빅이 붉어진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더니 대뜸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입에 대고 벌컥 벌컥 술을 마셨다. 그 과정을 지켜보던 아스타리온이 옆에서 깔깔 대며 웃었고, 그가 한창을 웃던 도중에 루드빅이 푸하, 소리를 내며 술병에서 겨우 입을 떼고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그는 술김에 더 붉은 빛이 피어오른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다가, 마른 기침을 하며 슬쩍 아스타리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 말해줘서... 진짜 기뻐. 나랑 똑같이 느끼는 거잖아, 그치?"

 "흠, 사랑하는 사람과 어딜 가도 함께 하고 서로를 지킬 수 있단 건 생각보다... 행복하게 느껴지더라고.

 "...그렇더라. 근데 솔직히 오늘 모험은 그냥 생고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부정하지 않을 거야."

아스타리온은 여전히 장난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두 사람의 눈이 마주하자 그의 얼굴도 조금씩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쑥쓰러운 표정을 여전히 감추지 못한 루드빅이 제 연인을 슬쩍 껴안으며 그에게 머리를 조금씩 기대었다. 술김에 힘이 풀린 몸이 뱀파이어에게 들러붙기 시작했다. 루드빅의 옆으로 빈 술병이 나뒹굴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느끼게 됐어...?"

연인의 순진한 물음에 아스타리온이 한번 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물음에 답해주었다. 그러면 그의 어린 연인이 또 다른 질문을 했고, 아스타리온이 웃으며 답했다. 그들의 대화가 보통 이렇게 흘러가진 않았지만, 그 날 밤만은 특별했다. 서로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을 하고, 진실한 감정을 털어 놓고, 그 답에 함께 웃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음에는 햇빛 차단 주문을 좀 더 연구해봐야겠다... 네가 좋아하는 노을도 제대로 볼 수 있을 거야."

 "모험하려면 외워야할 주문이 이미 산더미라더니. 뭐, 말리진 않을게."

아스타리온이 연인의 말에 기뻐하면서도 아닌 척 손짓하며 새침하게 대답하자 루드빅의 미소는 더 밝아졌다. 루드빅은 다시 장난스럽게 아스타리온의 등을 만지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모닥불은 더 뜨겁게 타올랐고 밤은 점점 깊어져 갔다.

그들은 비록 모닥불과 서로의 체온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따뜻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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