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기는 칼로 귤 베기 上

젤귤 윤부

unplanned by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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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관은 잔치국수 위에 소담히 오른 유부 고명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정한을 떠올렸다. 찬바람 쌀쌀하게 부는 날씨라 겨울 다 되어서도 안 꺼내던 패딩을 벗어 옆 의자에 걸치고 기다린 지 겨우 십분이었다. 국수집 내부는 분명히 처음에는 깔끔하고 모던했겠지만 차츰 주인의 미감과 취향이 고명처럼 얹혀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국수나 김치찜 같은 한식 단품과 죽집을 같이 하는 모양이라 고딕체의 메뉴판 두 개 사이에 커다란 크리스마스 리스가 시기를 등에 업고 당당히 걸렸다. 들어오는 길이라고 부르기도 멋쩍을 만큼 자그마한 가게여서 승관이 앉은 가운데 자리에서도 손만 뻗으면 입구에 놓인 작은 트리에 닿을 것 같았다. 그 옆으론 주인이 귀하게 여길 듯한 찻잔 세트, 그와 어울리는 녹색 커피머신이 한쪽 벽을 조심스럽고도 완고하게 장식한 채였다. 어쩌면 정수기와 포스기 사이, 저 한구석이 국수집에서 제일 중요한 곳일지도 모르겠다고 승관은 생각했다. 누구나 밥벌어먹고 사는 일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눈길이 자주 닿는 곳엔 가장 좋아하는 여지를 마련해둬야 하는 것이다.

없어도 일할 수 있지만 없으면 일할 맛이 나지 않는 한구석을 승관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정한이 이따금씩 “형은 잔치국수 먹어도 승관이 생각이 나더라.”하던 것을 기억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정한이 으레 하는 실없는 소린 줄 알았는데 사귀고 난 뒤에는 고백 같기도 했다. 정한은 중요하거나 멋쩍은 말도 아무렇지 않게 건네어 버리는 재주가 있어서 승관은 가끔 혼자서 정한이 무슨 말을 했는지 돌이켜봐야 할 때가 있었다. 이 말은 그냥 윤정한이 착한 거고, 저 말은 장난친 거고, 하면서 마음의 바구니에 정한의 모든 말들을 나눠 담다 보면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는 말들이 남았다. 너 좋아서 그래. 곰돌이 사야지. 승관이 닮은 거.

정한이 그런 말들을 유독 태연하게 말할 때마다 승관은 괜히 더 좋아하라는 것처럼, 아직 모자라다는 것처럼, 정한이 말만 그렇게 한다는 것처럼 투덜거렸다. 형은 나랑 놀아주지도 않으면서. 요즘 맨날 다른 사람 만나잖아. 어제도 나랑 안 놀고. 스스로 말한 건데도 너무 어린애처럼 들려서 승관이 대뜸 입을 다물고 삐죽거리기나 하면 정한은 다 안다는 듯이 그래도 승관이 좋아하지, 하며 안 토라질 마음 두 번 달랬다. 참 자연스럽다고, 엄청 특이한 것 같으면서 누구보다 분위기 잘 보고 얽혀들어간다고 승관은 생각했다. 한때 유투버 해보겠다고 홈 브이로그 찍었던 영상을 돌려보면 나만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있네, 하고 끄기 일쑤였던 것이다. 승관은 언젠가 정한의 말 한 마디, 장난 한 번이 당연하고 익숙해질 수 있을지 자주 궁금했다. 정한이 숨 쉬듯 쉽게 중얼거리고 웃는 말들이 고백인지 장난인지 아니면 그냥 하는 말인지 구분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까? 한 마디를 들어도 세 가지 모두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승관은 자주 정한의 장난기를 답답해하고 가끔은 속 터진다고 내뱉어버리기도 했다. 실은 정말 그런 건 아니고 아주 가끔만 그렇게 느꼈다. 아주 다른 사람과 함께 살고 좋아하고 마음을 숨기기가 점점 어려워지면서부턴 토라짐이나 짜증 같은 것을 갑옷처럼 두르고 지냈다. 멋쩍은 마음을 가누기 위해 버럭 성질을 부렸다가도 입을 딱 다물어버렸다.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도 생각했다. 이미 저지른 일이 속상해서 혼자 한숨 삼키다 보면 정한이 슬그머니 와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권했다. 그럴 때면 슬쩍 오른 취기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형, 나는 내가 참 마음에 안 든다? 근데 어떻게 바꿔야 될지 모르겠어. 노력하곤 있는데… 이런다고 바뀌긴 하나? 묵은 한탄이 농담의 껍질을 두르고 데굴데굴 굴러나오면 정한은 그걸 주워서 귤처럼 까는 일을 했다. 승관의 손을 승관이 으레 하는 것처럼 요모조모 주물러보고, 파하학 웃으며 기대 오는 뺨을 지탱하며 가만히 기울어지는 게 고작이었으나 승관은 그럴 때마다 정한의 세밀한 배려가 손에 만져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 어떻게 하면 그걸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되었다.

정한은 승관의 동그란 볼에서 취기를 닦아내기라도 하는 듯 유독 잘 부어서 승관이 신경 쓰는 고 부분만 손가락으로 쓸어냈다. 승관으로 하여금 기분이 가라앉게 내버려두는 대신 성질이라도 부리라는 거다. 정한의 손길이나 말 한 마디에 마음이 뒤숭숭해질 시절은 이미 지나지 않았나? 연애란 게 원래 이렇게 시작하기만 반복하는 거였나? 처음도 아닌데 도통 안심할 수가 없었다. 정한을 좋아하는데, 좋아해서 불만이 너무 많았다. 정한의 전부를 가지고 싶다가도 그냥 사소한 한 두 가지 행동만 승관의 것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행동을 소유할 수는 없다. 정한은 그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마음을 주는데 그걸 갈취하는 건 영영 불가능해 보였다. 뜨겁고 재빠르고 열렬한 사랑이라면 들이받아서라도 쟁취할 수 있지만, 정한의 사랑은 승관이 아는 것과 너무 달랐다.

어쩌면 시작이 문제였을 수도 있었다. 승관은 정한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무 잘 맞아서, 형이 바다고 나는 섬이니까, 아니면 서로 바꿔서, 아무튼 대충 그렇게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정한이 그를 필요로 할 때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또는 적당한 사이라서. 같이 살아봤는데 나쁘지 않아서, 또는 내치기엔 너무 많이 친해져버려서. 정한이 싫은 사람 끌어안고 살 정도로 우유부단하진 않다는 것을 승관도 알았지만 생각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형이 같이 살 사람 고를 때 그 자리에 내가 없었으면 다른 사람이랑 살게 되었을까? 자취방 월세 나누고? 술 마시다 주말 분리수거 시간 놓치면서, 고장난 보일러 때문에 쪄 죽어도 참았을까? 정한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승관 같은 사람은 어디에나 있었다. 정한이 듣는다면 짐짓 미간을 좁히고 엄한 표정 지으면서 왜 그런 생각을 하냐고 타박했겠지만 승관의 생각은 그랬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은 입 밖에 내지 않는 한 무한에 가깝게 늘어났다. 흰 벽에 검은 연필로 낙서하듯이. 승관은 생각의 벽 한가운데에 이렇게 썼다: 그냥 이대로 만족해야 하나? 윤정한의 옆에 부승관이 있다는 것으로.

승관은 두 사람이 사귀지 않는 것처럼 연인이 되었듯 헤어지지 않은 것처럼 헤어지게 될까 봐 두려웠다. 스물 셋과 스물 여섯일 때처럼 스물 여섯과 스물 아홉도 별반 다르지 않은 걸 이상하게 여겨야 될 것만 같았다. 인턴 시절 출근에 바빠 화장실에서 이 닦으며 조는 정한을 붙들고 나도 오늘 일교시야아, 저리로 좀 가봐, 하면서 옆구리를 밀치던 아침으로부터 무언가 달라질 때가 되지 않았나? 대리 윤정한과 인턴 부승관이 야근 후에 시켜먹는 볶음짬뽕과 불족발처럼 양은 곱빼기가 안 돼도 사이드 추가는 할 때 아닌가. 마음이 허하면 음식이 끝도 없이 들어간다던데 방금 식사를 끝내고도 야식 생각이 났다. 승관은 면을 다 먹고 남은 국물에 둥둥 뜬 김과 유부와 계란 지단 고명을 몇 개 더 건져먹고는 계산이요 이모, 하고 일어섰다. 포스기에 카드가 꽂혔다가 나오는 사이에 스마트폰 화면에 알림이 하나 떴다.

[ 승가니 언제 와? ]

이 양반은 아무렇지 않게 구는 데 뭐 있다니까. 나는 지금까지 지 생각하느라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승관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엄지로 화면을 툭툭 두드렸다. 답장을 고민하기보다 투덜거리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그랬다.

[ 몰라 ]

[ 형이 시간 가지자며 ]

그러곤 계산 마친 카드를 돌려받으면서 화면도 끄고 패딩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일부러 보란 듯이 꾹 누른 버튼이 무색하게 팔천원 결제됐다는 알람이 화면을 잠깐 밝혔다가 정한의 답장과 함께 주머니로 쏙 들어갔다. 기다리든지 말든지. 승관은 속으로만 흥, 하고 사장 이모님께 밑반찬으로 나온 열무김치 칭찬을 한바가지 하고는 국수집을 나섰다. 이른 저녁 먹으러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아직 해가 있어서 날이 괜찮았는데, 배 따스하게 채우기 무섭게 하늘이 새까맸다. 며칠 있으면 숨만 쉬어도 입김 나오겠다 싶어 패딩 주머니에 양손을 밀어넣었다. 한쪽에는 스마트폰이, 다른 한쪽에는 매끈하고 차갑고 텅 빈 주머니가 만져질 줄 알았는데 마냥 따끈했다. 승관은 원인을 포착하듯 밀어넣은 손을 그대로 뺐다. 저번 주에 정한의 손이 차가워서 대량으로 주문한 일회용 손난로였다.

두 박스 시키면 더 싸다길래 결제하고 보니 박스당 스무 개나 들어 있어서, 친구고 회사 사무실이고 죄다 돌리느라 일주일 내내 주고받은 감사 인사며 남았다고 둘러댄 말에도 다들 쥐여 준 커피 덕분에 군것질거리 비용이 다 남을 지경이었다. 막상 그러고 나니 정한과 승관이 쓸 게 없어 새 것을 산 게 웃을 일이라면 웃긴 일이었다. 있잖아 형, 두 박스나 사 놓고 웃긴 소린데 일회용은 환경에 쫌 안 좋은 거 같아. 저번에 갔던 전시회 굿즈 보니까 재활용 되는 손난로도 있더라? 승관이 마음에 드는 걸로 해, 형은 다 좋아. 정한은 승관이 잘 모르는 소재며 원재료 이름 더듬더듬 읽어가며 제품군 고를 때는 가만히 뒹굴거리다가 디자인 고를 때나 한 마디 했다. 곰돌이로 사줘. 오메? 당연히 고양이가 귀엽지. 아니지, 곰돌이지. 언제는 내 마음대로 하라매? 그건 그거구 이건 이거잖아. 손난로 구석에 조그맣게 프린팅된 그게 뭐라고 한참을 옥신각신하다 정한이 고른 대로 주문했는데 아직 안 왔나 싶었다. 승관은 유치하고 새빨간 군고구마 무늬를 주무르면서 중얼거렸다.

“찾을 때는 없더니, 내 패딩에 있었네.”

자기가 넣어놓고 까먹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제야 정한이 한 일이겠거니 싶었다. 저녁 밖에서 먹겠다고 말도 안 하고 나왔는데 언제 넣었지. 새하얗게 굳어 따끈따끈한 손난로가 정한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무르던 승관이 나머지 한 손도 빼냈다. 스마트폰과 손난로를 한꺼번에 쥐고 있으니 정한과 함께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럽게 보고 싶어졌다. 보기 싫고 미워서 나왔는데 보고 싶어진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 동시에 아직 그를 사랑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도 그랬다. 실은 사랑이란 건 시도 때도 없이 뜨거워지거나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살갗이 뜯기는 것만큼 괴롭거나 어디 한구석이라도 맞붙이고 있지 않으면 삶이 끔찍해지는 거라고도 생각했다. 우리가 하는 건 사랑보다는 익숙함이나 안정감 같다고도. 사랑이 뭐냐는 상투적인 질문 앞에서는 할 수 있는 대답이 없는 것 같았다. 윤정한이 없으면 죽을 것 같아?

아니.

승관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내서 대꾸했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지. 우리가 무슨 세기의 사랑도 아니고. 영화 주인공이야 뭐야. 얼토당토않은 질문이라고 스스로에게 핀잔이라도 줄 셈이었는데, 이상하게 내뱉은 말이 부메랑처럼 저 멀리 날아갔다가 찬바람을 휘감고 돌아왔다. 섣불리 뱉어버린 말들이, 마음에도 없었지만 어떻게 보면 조금은 진심이어서 아니라고 부정해줬으면 했던 말들이,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영영 날아간 줄 알았던 말들이 안에 돌멩이 넣은 눈뭉치처럼 날아오는 것 같았다. 몸이 으슬으슬해지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몸이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감기 걸리려고 이러나. 패딩 입고 나왔는데…. 손난로도 있는데. 승관이 찬바람에 느릿느릿 식어가는 손난로나 주무르고 있는데 스마트폰 화면이 다시 켜졌다. 이번에는 전화였다. 정한이었다. 승관은 문득 자신에게로 우박처럼 날아오던 불안의 말들이 방향을 바꾸는 것을 느꼈다. 정한의 기색을 느끼고 원래 목표를 향해 다시 꽂히려는 것처럼 섣부르고 투박한 말들이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다. 그건 전부 승관의 말이었다. 승관의 불안이었고 오래 묵은 불신이었다. 정한을 못 믿는 건 아닌데, 만약에 그에게도 열렬함이 있고 그게 승관의 것일지가 궁금했다. 진짜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면 도망갔을 거면서 그랬다. 스마트폰 너머에서는 정한의 숨소리가 들렸다. 한숨처럼 들려서 승관의 코가 찡해졌고, 덕분에 조금 훌쩍거렸다.

“혀엉.”

“승관이, 울어?”

“안 울어. 스물 여섯이나 돼 가지고 울긴.”

“에이, 승관이 맨날 울잖아.”

“뭐어? 아니거든?”

“스물 여섯이면 뭐 어때? 형은 스물 아홉인데도 우는데.”

“형이 언제 울었다고…. 하여튼 윤정한.”

결국 피식거리면서 승관은 하여튼 윤정한, 하고 입 속으로 몇 번 더 중얼거렸다. 통화 너머로 소리가 새어들어갔을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자꾸 부르다 보면 이유도 없이 허전해진 마음이 다시 충만감으로 들어찰지도 모르니까. 처음 정한의 마음을 짐작하고, 더듬어 확인하고, 마침내 끌어안았을 때의 벅차오름을 다시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쨌든 그때는 정한을 가졌다고 생각했었다. 어리고 미숙했지만 진짜 사랑을 시작한다고 믿었다.

근데, 진짜 사랑이 뭔데? 승관은 스스로에게 비죽였다. 어차피 연애란 거, 서로 다른 사람을 진짜로 가진다는 거, 소유라는 거 다 허상이라고. 성숙한 어른들의 연애는 퍼스널 스페이스든 물리적 공간이든 각자의 범위를 존중하고 상호 합의된 거리감을 긍정적으로 유지하는 거라고. 어느 모임에서 들었던 말을 주워섬긴 승관이 스스로에게 들으라는 듯 코를 킁, 훌쩍이고 씩 웃었다. 몰라, 이게 어른이 되어가는 건가 보지. 윤정한이랑 나랑 어른 연애 하는 거야. 얼마나 좋아. 그렇게 다짐하면서 입꼬리가 슬금슬금 내려가는 걸 애써 무시하고 있는데 누군가 승관을 답싹 끌어안았다. 그가 아는 향기였다. 승관이 산 샴푸에 승관이 고른 바디워시를 쓰는 사람이었다.

“승관이 너, 앞도 안 보고.”

“형?”

뒤늦게 고개를 물리고 위아래로 훑어보려는데 정한이 도로 끌어안아서 그럴 수도 없었다. 정한이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내내 하나만 입고 버틴 바람막이에 코가 눌려서 승관이 끙 소리를 냈다. 밀어내고 싶었는데 안은 팔이 은근히 놓아주질 않아서 별 수 없이 그만뒀다. 어차피 안아준 게 괜히 좋기도 했다. 저 멀리서 알아보고 달려온 거야? 참나. 안으려고? 어이없다 진짜. 피식피식 웃으면서 승관이 정한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어딘 줄 알고 나왔대.”

“근처 돌다가 안 오면 일층에서 기다리려고 그랬지.”

“안에 있지 그랬어. 춥잖아.”

“추워 보여야 승관이가 화도 풀어주고.”

“얼씨구?”

그제야 웃음이 소리로 샜다. 승관이 정한의 등 뒤로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문득 고개를 기울여 내려다보니 그나마 챙겨입은 외투 아래로 삼선 슬리퍼에 맨발이 보였다. 이게 뭐냐고, 왜 맨발로 덜컥 나오냐고 핀잔을 주려다가 승관은 그 대신 정한의 어깨에 입을 붙였다. 덜컥 내뱉은 말이 온통 정한을 향하고 있을까봐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마음에도 없는 말과 진심이 아닌 투정들, 기분을 나아지게 만들거나 분위기를 풀기 위해 툭툭 흘리곤 하는 승관의 버릇들이 그를 아프게 할까 봐 문득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승관은 괜히 정한을 더 꽉 끌어안았다. 정한이 승관의 어깨를 끌어안고 힘을 풀지 않는 것처럼.

“이제 화 풀렸어?”

“화 안 났어. 속상했어.”

“어어….”

“시간 갖자는 말이나 하고.”

“미안. 형이 차근차근 설명했어야 됐지. 그치.”

“응. 들어가서 설명해줘.”

정한이 알았다고 대답하려는데 승관이 걸어온 쪽에서 찬바람이 휭 불었다. 동시에 두 사람의 몸을 휩쓸고 지나가는데, 꼭 얼른 들어가라고 재촉하는 것 같아서 승관이 부르르 떠는 정한의 몸을 슬금슬금 밀었다. 승관이 춥지이. 난 패딩 입었잖아. 네 맨발이나 생각해애. 화났는데 형 걱정해주는 거야? 안 났다니까. 으응. 속상한데 형 걱정해주는 거야? 왜 자꾸 물어봐? 승관이한테 듣고 싶으니까 그렇지….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그새 언 것 같아서 승관이 괜히 볼을 부풀려서 바람을 훅 불었다. 정한이 드물게 동그랗게 놀란 눈으로 승관을 돌아봤다가, 빙그레 웃었다. 추위에 달아오른 뺨이 붉어서 승관의 뺨도 붉어지고 있었다.

형.

응, 승관이.

나는 잔치국수 먹어도 형 생각이 나더라.

…진짜?

엉… 뭐야, 왜 이렇게 좋아해.

우와, 너무 설레는데?

뭐래 진짜… 자꾸 웃길래?

웃으면 좋아하는 건데.

그래, 형 좋아서 그런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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