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이란 미래보다도 뜨겁고 과거보다도 깊은 것
<슬로우 대미지> 진상루트 스포
어머니, 마야의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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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간만이다. 최근 악몽의 빈도는 눈에 띄게 줄었고, 그마저도 단편적인 기억이 스치는 것에 그쳤으므로.
그러나 어째서 컨디션이 좋다 싶을 즈음이면 과거의 기억이 방해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나를 단순 도구로 대했음에도 친모는 친모라 이건가? 답답한 기분을 씻어내려 세면대로 향한다. 정면의 거울이 ‘나’를 주시한다. 거울 속의 나를 보면 당장 깨버리고 싶은 충동은 이제 없다. 그만큼 그럭저럭 아물어가는 일이지만, 여전히 불쾌감이 쉽사리 가시지는 않는다. 나는 그 여자를 너무나도 닮았어. 얼굴뿐만 아니라 「euphoria」로서 깊은 곳의 욕망을 이뤄주었던 일까지도. 과거의 기억을 모두 되찾고, 아직까지도 거울을 마주할 때면 늘…… 그런 내게 몸서리친다. 서양관에서 사카키와 대치하며 마야를 연기했을 때에는 스스로도 지독한 무서움을 느꼈다. 내가 그 여자를, 마야를 얼마나 닮았는지가 피부로 녹아들듯 생생히 느껴질뿐더러, 그토록 닮았음에도 내가 구사하는 그의 대인기술에 ‘나’마저 잡아먹혀 이대로 그에게 떨어져 버릴 듯한 감각.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이 피의 저주가 아닌가 생각했고 이런 핏줄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없어져야 한다고도 수없이 생각했다. 메이의 ‘소원’ 때문에 실행에는 옮길 수 없었지만, 생각뿐이라면…….
더욱 짜증이 치미는 부분은 그 여자를 조금은 이해해버렸다는 점. 서양관의 3층에서 일기장을 찾아내지 못했더라면, 적어도 읽지는 않았더라면 평소처럼 무시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것은 혈연이어서, 닮아서인가? 우습다. 나는 아버지의 빚을 떠안은 레이를 미련하다고 핀잔줄 처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여자를 싫어하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겠다. 용서니 뭐니를 논할 만큼 원망하지는 않지만 어느 쪽이냐고 하면 명백하게 감정이 나쁜 쪽이므로. 그럼에도 일기장에 쓰여 있던 그의 어두운 충동, 공허, 외로움…… 익숙한 것이었다. 평범한 자극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욕구, 「euphoria」로 충족한 것도 금세 캔버스에 게워내버리는 공허. 수증기로 목을 축이듯 겨우 메꿔왔을 뿐 도무지, 채울 수 없던…….
…공허한 말. 꿈 속의 어머니는 또다시 ‘괜찮다’며 나를 타이르고 있었다. 최근까지도 그 말의 울림이 미치도록 싫었다, 기보다도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밀어 도무지 버틸 수 없었다. 상황과 무관하게 그 무엇도 명백하게 괜찮지 않은데도, 나를 기만하고 통제하려는 의도가 여전히 나를 지배해 버린다. 왜 하필 ‘괜찮다’는 말이었을까? 진심으로 그 상황들이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인가, 제 2의 마야로 거듭나기 위해 괜찮아져야 한다는 종용이었나, 혹은 진실로 내가, 본인의 자식이 괜찮기를 바란 것이었나. 그는 한 순간이라도 나의 안녕에 관심이 있었는가…… 따위의 생각이 머릿속을 흐트러트린다. 제길. 앨범, 기록, 생일 따위의, 그 여자가 나를 조금이라도 소중히 했다는 증거가 머리를 헤집어놓은 탓이다.
겨우 잡념을 씻어낸 물방울이 나에게로, 그에게로 뺨을 타고 떨어진다. 물기가 뚝뚝 흐르는 얼굴로 거울 속의 눈을 응시한다. 역시, 다시 보아도 나는 그 여자를 너무나도 닮았어. 그 여자로부터 채워진 모든 족쇄는 그를 연기함으로써 전부 승화시켰다고 생각했는데도, 나는 여전히 그 그늘 아래에 있는 건가. 벗어날 수 없는 건가, 그 여자의 손아귀를… …문득, 악몽에서 깨어난 지 꽤 지났음에도 생생한 꿈의 편린을, 나지막히 입 밖에 낸다. ‘괜찮아’. …괜찮다. 무심코 두어 번을 더 내뱉어도 불안한 울림이 옅다. 이제 나는 나의 핏줄, 어머니가 아니라 ‘나’와 ‘나’의 주변인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아서다. 물기를 닦고 화장실을 나온다. 열린 커텐 사이로 빛이 스민다. 눈이 부셔 눈꺼풀을 덮어도,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빛에 감은 눈앞이 밝다. 그래. 나는 벗어났어.
나는, 괜찮다.
그리 속으로 되뇌이며 직감한다. 앞으로 그 여자, 마야는, 더 이상 악몽으로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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