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윤싫

공부자탄강일

공자님 생일 축전. 발할라의 공자는 유교 그 자체.

공자님 생신 축전을 하루 전에 미리 썼습니다… 3시간쯤 남겨두고 완성했네요.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동양 사상이기 때문에 전부터 쓰겠다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공부자탄강일.

공자의 생일은 유교문화권 국가들에서 불멸의 이름으로 남은 공자를 기리는 날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공자의 생일이 되면 발할라 전역의 유교문화권 출신들이 일부러라도 철학 폴리스까지 찾아오는 일이 벌어져 왔다. 매번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벌써 몇 번째일까, ‘공자’는 그날 생일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문득 생각했다. 이곳에 온 지도 어느덧 한참이었다. 변화하는 계절 속에서 벌써 몇 번째 생일인지. 후학들이 이리 자신의 생일을 챙겨줄 것이라고는, 처음 와서 노자 님과 싯다르타 님만 계셨을 땐 상상도 못한 일이거늘, 허허. 그는 낮게 웃음을 흘리곤,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덧 해는 짧아져, 아직 어스름한 푸른빛 속 흔들리는 가지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인영들.

‘그래도 내가 이 계절에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가, 그나마 이 폴리스를 기준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에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이니.’ 생각하던 중,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사람들의 쑥덕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공자’는 조용히 웃고는 그 큰 체구를 일으켜 방 밖으로 나가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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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사람들을 대하고도 공자는 지친 기색조차 없어 보였다. 후학들이 지치지 않으시냐 여쭈어도 껄껄 웃으며 내 이 정도로 지칠 거였으면 제자 3천 명을 데리고 있질 못했겠지 않은가!라고 대꾸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엔, 발할라의 유학자들만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자네들, 내 이름은 아나?” 공자가 웃으며 말했다. 후학들은 선생님 존함을 어떻게 부릅니까, 하며 야단이었다. 별것도 아니었는데 뭘, 말하며 공자는 말을 이었다. “나면서부터 머리 위가 오목하게 들어간 고로 인하여 구,라는 이름을 붙여주셨다더구나.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연세 차이가 많이 나셨고, 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돌아가셨지. 난 아버지의 무덤도 몰랐단다, 부끄럽게도 말이네. 지방의 연로하신 여인께서 아버지의 무덤을 알려주셔서 겨우 어머니를 합장할 수 있었다네.”

“그게 어디 공자 님의 선택이셨습니까,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요.” 다산 정약용이 조용히 말했다. 다른 유학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지그시 감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 정말입니까? 공자님을 봉하려고 하였을 때에 안영이란 자가 했던 이야기 말입니다.”

“무슨 이야기 말인가, 내게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는가?” 공자는 질문을 한 당돌한 후학에게 고개를 돌렸다. 율곡 ‘이이’였다. 공자의 재질문에 율곡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걸… 제가 말해도 됩니까? 말해 보게나, 얼른. 공자는 미소 지으며 부추겼다. 눈치 보는 것이 역력한 어조로, 율곡이 말했다.

“유자란 약디 약아서 법도를 좇으려 않으며, 오만하고 제멋대로여서 아래 사람으로 삼기 힘들고, 상례를 숭상하여 애도를 다한답시고 파산할지라도 장례는 후히 하니 풍속에 득이 없고, 유세나 하고 다니면서 재물만 빌어먹으니 나라에 득이 없습니다. 큰 현인이 없어진 뒤로, 주나라 왕실이 쇠약하여 예와 음악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공자가 예복을 성대하게 차려입고, 임금에게 예절과 진퇴의 절도를 번잡하게 하고 있으니, 여러 대를 두고 하더라도 그 학문을 다 할 수 없고, 한 평생 하여도 그 예를 다 할 수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그를 써서 제나라의 풍속을 고치고자 하시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하는, 첫째 일이 아닙니다…….”

쏟아내듯 안영의 말을 옮기던 율곡은 말이 끝나갈 때 즈음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이런 말을 공자님 앞에서 그대로 말해도 되나, 정도의 주춤함이겠지. 공자는 쾌활하게 웃었다. “자네, 그걸 전부 외우고 있는가? 대단하군.”

“율곡은 워낙 저희 조선에서도 천재로 이름 날렸던 인물입니다. 언변과 개혁정신이 뛰어났고요. 상대적으로 은거하던 성향이었던 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퇴계, ‘이황’이었다.

“천재라더니, 정말 그렇군그래. 다만 그의 말 중에서 틀린 말은 없었다 생각한다네. 나의 의도를 너무 과하게 해석한 것뿐, 그가 지적한 것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니.”

“논어에서 그 안영을 찬양하시는 부분이 있기에 익히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진정으로 그리 생각하시는군요, 선생님께서는.” 주희, ‘주자’가 말했다. 훌륭한,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까지 하는 후학인지고. 스러져 가던 유학의 판도를 바꿔준 후학을 공자는 웃음기 어린 눈으로 응시했다.

“그럼. 자네들이 알지 모르겠다만, 송나라 사마 환퇴가 나무 아래에서 예를 익히던 나를 죽이기 위해 나무를 쓰러뜨린 일, 초나라에서 나를 초빙하려 하자 진, 채의 대부들이 우리를 들판에 억류하여 식량이 떨어져 곤궁하게 된 일 또한 직접 겪은 일이지만, 지금 와서까지 원한을 가지고 있지 않네.”

在陳絶糧, 從者病, 莫能興. 子路慍見曰: "君子亦有窮乎?" 子曰: "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재진절량, 종자병, 막능흥. 자로온견왈: "군자역유궁호?" 자왈: "군자고궁, 소인궁사람의." (*논어, 이인 중 7.)

공자의 말을 들은 그 자리의 모든 유학자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이 구절을 읊었다. 공자는 흠칫 놀랐다. 이 후학들은 나의 언행에 대해 이토록 자세히 알고 있단 말인가. 바로 그 곤궁한 시절에, 제자 자로가 “군자도 곤궁함이 있습니까?”라고 따져 물었던 것에 공자 본인이 “군자는 원래 곤궁한 것이다. 소인은 곤궁하면 혼란에 빠진다”라고 말했던 것을 이 후학들은 정확히 읊고 있었다. 문득 그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내가 한 시류를 만들어낸 사람으로 자리잡고 있긴 하구나.

그 후에 이어진 이야기들은 화기애애했다.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께 그런 짓은 너무했습니다,라고 열 내는 최고의 논객 ‘맹자’, 후학들의 비판을 많이 받음을 알지만 잘 챙겨주는 ‘순자’, 성리학과 다른 노선을 탄 ‘양명’과 하곡 ‘정제두’ 등의 학자들이 각자 공자의 생에 대한 감상을 나누었다.

어느덧 시간은 늦어져 달이 떠올랐고, 슬슬 자리는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를 나눴는데도 이 후학들은 지친 듯하지 않았다. 도리어 학문의 대스승의 인생역정을 따라가며 직접 이야기를 들은 것에 다소 들뜬 듯 보이기도 했다. 공자는 천천히 모든 후학들을 눈에 담았다. 천천히, 정성스레. 그 후에야 슬슬 정리하자며, 공자는 먼저 말을 꺼냈다.

“시간이 늦어졌으니 회포는 여기까지 푸세. 자네들이 나에 대해 이토록 알고 있다는 것이 매우 생경하군그래. 오늘 하루 생일로 축하해 주어 감사하네. 나도 덕분에 생전의 여러 일들을 오랜만에 떠올릴 수 있었어. 오래된 일이어서 다시 꺼낼 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네만……. 이리 이야기하니 나름 추억 같기도 하고. 고맙네, 다들. 조심히 들어가시게.”

그리고, 이곳에서의 새로운 일상도, 함께해 주어 고맙네.

이 말을 공자는 삼켰다. 일단 저승과 비슷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것을 일상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기도 하고, 이리 고마워한 제자들을 먼저 떠나보낸 악몽이 문득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생이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아끼는 것은 드러내지 않고 숨겨둘 필요도 있는 것이겠지.

공자는 소란스레 자리를 물리는 후학들을 바라보며, 고요히 웃었다.


공자님 생신에는 발할라 유교문화권 사람들 잔뜩 모여서 축하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발할라 공자님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다 마주하실 것 같고.

그러다 공자님이 자신이 정말 중요한 위치에 있구나,라는 것을 생일에 문득 느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간략하게나마 새로운 발할라 공식 설정을 적용해 보았어요! 폴리스마다 기후가 다르기 때문에 철학 폴리스 기후를 살짝 적용한 묘사가 들어갔습니다:D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24.09.27 백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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