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간의 러브-랑데부!
아케주
픽시브에 올렸던 글을 옮겨왔습니다.
내용에 큰 차이는 없지만, 맞춤법을 검사하거나 아주 아주아주아주 사소하게 문장을 수정하거나 했습니다.
“아케치,”
먼저 앞을 나아가던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말을 끝까지 내뱉지 않은 렌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는. 렌은 이 고백이 거절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고백을 한 것은, 거절의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케치는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너 싫어.”
그러니까 네 고백은 거절할게.
…제발 자신을 내버려 두라며 울던 아케치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렌은 그 소원만큼은 들어주지 않기로 했다. 네가 바라는 것 만큼은 이루어지지 않을 거야, 미안해, 아케치. 렌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31일의 유예를 줘, 아케치. 그 동안 네 마음을 돌리게 할게.”
너를 이미 좋아하는 내가, 이미 서로를 좋아하는 우리가, 그것에서 도망치지 않고 인정할 수 있도록.
네가 만약 31일째에도 나를 거절하고 싶다면 그때는 포기하고 네 앞에서 사라지도록 할게. 그리고 두 번 다시 네가 무슨 선택을 해도 관여하지 않고,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붙잡지 않고, 전부, 네가 처음 바랐던 것처럼.
“31일이고 뭐고 이미 거절 했잖아.”
아케치는 렌을 사랑했다. 굳이 어느 종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이, 모든 의미를 다 해서 사랑했다. 연인이라는 단순한 감정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소유욕. 이 감정을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으나, 그저 너무나도 사랑한다는 것 하나만이 명확했다.
아케치는 그 감정이 깊은 만큼 더욱 받아줄 수 없었다. 자신과 살아가면 렌은 반드시 불행해진다— 그것이 아케치의 생각이다. 억지로 살아 돌아온 끝에, 입증되지 못할 제 죄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자신에게 행복할 자격은 없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커져 버린 제 마음을, 아무리 난도질해도 죽일 수 없었던 아케치는 속에서부터 무언가 치고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모든 고통을 겪게 하고도, 아케치는 아직 렌을 제 곁에 묶어두고 싶었다. 그것이 본심이다.
“그럼, 내일부터 잘 부탁해. 오늘 내 고백은 어떻게 할래?”
“네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렌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서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번 정하면 마음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 녀석이다. 아케치는 말려도 소용 없다, 그런다고 듣지 않으며, 그렇기에 렌을 좋아한다는 쓸모없는 감정을 느끼며 마저 나아갔다.
고백 1일째
아케치의 시야에 불쑥 튀어나온 것은 꽃다발이었다. 품에 가득 들어올 조금 커다란 꽃다발. 아케치는 그 촌스러움과 명확한 의도에 경악했다. 지금이 대체 몇 년도인데 이런 부담스럽고 불편한 꽃다발로 고백을 한단 말인가!
“너 대체 이게 언제적 고백법이야?”
참지 못하고 따지듯 물어버린 아케치를, 렌은 씨익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 웃는 얼굴에 두려움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렌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친 사고 중에 멀쩡한 것이 없었으니까.
“고백인 건 알아봤구나?”
“하아, 말을 말자……”
다음부터는 그냥 무시하던가 해야지. 렌은 눈빛을 반짝이며 아케치의 품에 꽃다발을 자꾸만 들이밀었다. 거절은 했지만 받아주는 할 거지? 하며 꽃다발로 꾸욱~~ 눌렀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던데, 받아줄 때까지 누르는 건 괜찮나.
“진짜 그따위로 고백 했으면, 아무리 널 좋아했어도 거절했을 거야.”
아케치는 우선 꽃다발을 받아들였다. 아무렴 선물인데 그대로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으니까. 진짜 어쩔 수 없이 받아주는 거야, 아케치가 그렇게 투덜대며 꽃을 바라보았다.
은은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들고 있는 꽃다발의 안개꽃만큼이나 여리고 아름다웠다. 아케치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지금 같은 미소를 지었다. 탐정 왕자 때처럼 환한 보여주기식 웃음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만 눈치챌 정도의 작은 웃음.
렌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케치와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꽃다발은 처음부터 아케치가 품에 들었을 때를 생각해서 조합한 것이었다. 아케치의 색을 너무 과하게 가리지 않도록, 연하게 빛내듯이 어울리도록. 고민 끝에 채워 넣은 꽃다발은 정상만큼 아름다웠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 봐? 아케치가 얼굴을 다시 찡그려도 렌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잘 보관해줘, 나라고 생각하면서.”
“눈앞에서 꺾어버려도 된다는 소리지?”
그리 말한 것 치고는 아케치는 결국 조심히 자신의 집까지 꽃다발을 들고 갔다. 본래도 대중교통은 이용하는 편이었지만, 혹시라도 사람이 많아 눌릴까 걱정되어 택시까지 불렀다. 녀석도 분명 꽃다발 값으로 이 정도는 썼을 테니까. 당연한 거래다.
막상 둘 곳은 없어서 우선 탁자 위로 올려두었다. 아케치의 집은 언제나 텅 비어있었고, 잠을 자는 것 외로 무언가를 한 적도 없었다. 식사는 정말 무언가를 위에 집어넣는 정도로, 식탁을 꾸밀 가치도 없었다. 아케치는 꽃다발을 조심히 풀어헤치며 꽃병의 위치를 생각했다.
창고에 남은 꽃병은 있을 거고, 하나는 부엌 탁자 위에 하나는 침실 옆에 두면 되나. 탐정 왕자 때 이미지 관리를 위해 한 번 찍고 정리해둔 꽃병을 꺼내 상태를 확인한 아케치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 바보랑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네.
하얀 꽃병 위에 흐릿하게 제 얼굴이 비치자 아케치는 그것을 내려놓고서 꽃을 반으로 나눴다. 사이에 생뚱맞게 끼워져있는 검은 꽃은 분명 자신을 생각해주었으면 해서 넣었을 것이다. 그렇게 뻔한 렌의 생각을 읽으며, 아케치는 그 꽃을 담은 꽃병을 침실로 들고 들어갔다. 다시 봐도 기묘한 조합의 꽃이지만, 조형이 좋냐를 떠나 조합한 사람의 성의는 보였다.
열심히 꽃을 고르는 모습을 상상한 아케치는 후후, 하고 웃었다가 깜짝 놀라 제 입가를 매만졌다. 느슨하게 풀어졌던 입가가 끔찍할 정도로 익숙하지 않았다. 이렇게 웃은 적이 있었던가. 분명, 고민할 가치도 없이 이렇게 웃은 적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없었어야만 했는데.
아케치는 조용히 꽃을 내려다보았다. 지금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 아른거리는 그를 떠올리며.
고백 2일째
아케치는 현재 죽을 만큼 귀찮은 짐덩이를 끌어안고 있다. 의뢰가 귀찮은 것도 있지만, 자신을 따라온 자칭 조수가 더 짐덩이였다. 아케치가 사진을 한 번 들여다보고, 풍경을 내려다보는 것을 다시 반복했다. 이번 의뢰는 주어진 사진이 어디에서 찍혔는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이 이 근처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니, 이제 실제로 있는지와 어느 각도에서 확인해야 그 모습이 보이는지를 찾아본 뒤에, 사진을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을 찾으면 끝이다. 그 처음의 조사로 우선 주변을 파악하는 것이다. 저 건물이 맞는 것 같은데.
“아케치, 우리 이거 하자!”
아케치는 곁눈질로 아마미야를 한 번 바라보았다. 손에 들려있는 것은 자물쇠였다. 난간에 걸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나 뭐라나 하는 상술이었다. 이런 걸 진짜로 하고 싶어 하는 바보가 있구나. 아케치는 대답도 않고서 다시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방해다. 두고 왔어야 했는데, 기어코 따라오겠다고 미행까지 하고. 떨쳐내라면 떨쳐낼 수도 있긴 했지만. 풍경으로 다시 집중하자.
저 건물이라고 가장했을 때 2층 이상의 가정집이 있는 방향. 저 쪽은 멘션이고, 저 쪽에는 가정집이 없고, 그러면……
—철컥!
아케치는 생각에 섞여온 소리에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쭈그려 앉아 몸을 숙이고 제 옆에 기대둔 가방을 만지작거리는 렌이 있었다.
“너 뭐 하는 거야!?”
아케치가 가방을 채가 확인해보면 아까 그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아케치 고로와 아마미야 렌이라고 적힌, 원래라면 난간에 달았어야 했을 자물쇠를. 최대한 틈을 벌려 손을 넣어보면 하나가 전부 들어가지도 않고, 안에 들어있는 서류도 구부리면 겨우겨우 뺄 것 같은 정도였다.
아케치가 경악하자 렌은 즐거운지 훗, 후, 하하하!! 하고 크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 큰 웃음소리에 한 번 이쪽으로 시선이 모였다가, 금세 흩어졌다. 아케치는 이쪽을 향한 시선이 줄어들자 마자 렌의 멱살을 붙잡았다.
“야, 당장 안 열어!?!”
“글쎄~ 열쇠를 인지 세계에 떨어트려 놓고 왔던가.”
이세계 내비도 작동 안 하는데 무슨! 아케치가 강제로 렌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확인해보았지만 정말로 텅 비어있었다.
설마 그 사이에 열쇠를 버린 건가!? 행동 속도 하나만큼은 칭찬할 만 했다. 그 무시무시한 재능을 항상 도둑질에 써먹는 건 유감이지만.
“아니, 애초에 멀쩡한 난간을 내버려 두고 왜 내 가방에……!!!”
명백하게 무시하고 내버려 둔 것의 복수겠지만, 아케치는 오늘 정말로 일만 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했었다.
사전에 경고까지 했는데 이렇게 기어코 방해를 하는구나, 네가! 아케치가 잔뜩 화난 얼굴로 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금도 반성하는 기색이 없었다.
“내 사랑은 아케치가 이뤄줄 건데, 다른 곳에 걸어서 무슨 의미가 있어.”
돌아온 대답은 지극히 뻔뻔한 것이었다. 아케치는 예상외의 대답에 기가 차서 하!? 하며 소리를 내질렀다. 마음에는 없어도 미안해~ 라던가 실수였어~ 라는 말 정도는 할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실시간 메들리로 너에 대한 애정도가 깎이는 소리는 안 들리나 보지? 아케치가 의미 없이 자물쇠를 잡아당겨 보지만 기적적으로 풀리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아. 됐어, 집에 가서 끊어버릴 거야.”
어차피 조사도 막 끝낸 참이다. 저 건물이 확실한 것 같으니 서쪽 방향을 조사해보면 되겠지. 아케치는 먼저 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나도 잠깐 볼 게 있어서, 아케치, 오늘은 이만. 아케치는 얼굴을 살짝 들어 올린 채로 렌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같이 탈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진작 해서 같이 돌아갔으면 될 걸 왜 내내 딴짓하다가.
그래도 결국 아케치는 말을 말자— 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닫히고 있는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렌이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아케치는 남은 일을 혼자서 빠르게 처리하고, 사진을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집과 그 후보들의 주소를 적은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보고서 서류만 제출하면 되는데, 문제점이 있으면 그 보고서가 잠긴 가방 안에 있다는 거였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냥 왔지? 다 벗겨서라도 열쇠를 받아왔어야 했는데. 아케치는 체념한 듯이 자물쇠를 콕콕 두드렸다.
…집에 끊어버릴 수 있을 만한 게 있던가. 공구 상자를 찾는 것도 일이지만, 다시 뽑으러 가는 쪽이 더 오래 걸린다.
아케치는 결국 정리된 상자를 하나하나 다 열어볼 수 밖에 없었다. 박스를 종류별로 두기는 했으니 이 근처에 있을 것이 분명한데. 아케치는 결국 박스를 네 개째 열고 나서야 공구 상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닫아두는 건 한시가 급하니 나중으로 미루자. 그것들을 챙겨 책상 앞으로 왔으니, 이 빌어먹을 자물쇠를 잘라버리면 끝이다.
아케치는 어떻게 잘라야 편하나 자물쇠를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자신의 이름과 아마미야의 이름이 적힌 것을 발견했다.
…분명 이 자물쇠가 풀리지 않으면 영원히 행복할 거라 했던가? 거기까지 생각하자 괜히 손을 멈추게 되었다. 잠깐, 그럼 끊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아케치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서 자물쇠를 잡아당겼다. 진짜 짜증 나네!
이미 박스를 네 개나 열어보는 사이에 마감이 촉박해졌다. 물론, 실제 기한은 많이 남았고 굳이 무리해서 오늘 내로 제출할 필요야 없지만. 그래도 고객과의 신뢰라는 것이 있으니까, 이딴 자물쇠에 낭비할 시간은… 시간은……
“……됐다!”
자물쇠가 달칵, 하는 소리를 내며 풀린 후에야 아케치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요전에 머리카락이 거슬려 샀다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 방치만 해두었던 실핀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비록 12시 종은 쳐버렸고, 결과적으로 기한은 조금 넘겼지만 지금부터 쓰면 내일(더 정확하게는 오늘) 안에는 낼 수 있을 것이다.
아케치는 자물쇠를 들어 올렸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형광등의 빛이 눈부셨다. 내가 진짜 뭐 하고 있는 걸까. 아케치는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까짓 자물쇠가 뭐라고 이런 생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전부 단순한 미신이고 상술이고, 아무튼 과학적 근거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은 착실히 책상에 자물쇠를 매달고 있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걸린 자물쇠는 잡아당겨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아케치는 눈을 감았다.
고백 3일째
“아케치. 뭐든 3일만 넘기면 잘 풀린대.”
렌은 손 끝에서 놓아져 하늘로 두둥실 떠오르는 풍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푸른 하늘에 붉은 풍선이 떠올라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케치는 한 번 그 풍선의 끝을 바라보려다가, 햇빛에 눈부셔 결국 렌을 바라보았다. 산지 오 분도 안 된 풍선을 날려버린 것 치고는 별로 슬퍼 보이지는 않았다. 애초에 풍선을 살 나이도 아니지만! 아케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선 대꾸했다.
“그래, 작심삼일은 아니라 다행이네…”
무슨 급한 일이 있다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길래 정말로 큰일인 줄 알았다. 아케치도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고 빛처럼 따라 나왔건만 손을 이끌려 가게 된 곳은 놀이공원이었다.
어이없어서 굳어있는 아케치를 질질 끌고 가듯이 입장한 렌은 자유이용권이니 전부 돌고 나가자는 헛소리를 했다. 다시 나가자니 푯값이 아까웠고, 어떻게 안 지는 모르겠지만 어제가 마지막 일이었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한가하다.
…아무리 한가롭대도, 내가 왜 이런 바보짓에 어울려주고 있는 걸까. 본래 아케치는 사람이 많은 곳에 놀러 다니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탐정 왕자의 연기를 할 필요가 없는 지금에 오면 더더욱. 시끄럽게 떠드는 것들은 질색이다.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마냥 웃으며 바라볼 수 없는 자신도, 분명 싫었다.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지금의 아케치가 도망치지 않은 것은 필시 사랑 때문이었다. 사라졌으면 할 정도로 비교되는 자신을 뛰어넘어서까지, 그와 미래를 보고 싶다고 소원을 가져버린 나. 그러니 그 의문에 할 수 있는 답은 내가 쟤를 좋아하니까, 말고는 없었다.
“저거 봐, 아케치. 저 관람차 말야. 꼭대기에서 고백하면 이루어진다던데.”
“…그래? 그럼 너 혼자 타고 와. 난 안 탈 거니까.”
예상외의 답변이었는지 렌은 눈을 크게 뜨고선 되물었다.
“진심이야!?”
아케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리를 듣고도 제 발로 탈 리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차라리 타고 나서 말했으면 몰라도. 정정당당히 걸어오는 승부는 받아줘야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멍청한 것까지 이해해주는 것은 별개다. 진짜 안 타? 아마미야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케치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케치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짧게 응, 이라고 대답했다. 렌은 결국 어쩔 수 없이 표를 들고 혼자 관람차를 타러 떠났다.
허어, 혼자 타랬더니 진짜 타네. 아케치는 대기 줄 근처에서 관람차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커플들이 자주 타는 것 같으니 지어낸 이야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면, 관람차에서 아래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렌의 모습이 보였다. 아케치의 위치를 찾고 있는 거겠지. 손을 들어줄 것도 없이, 아케치가 팔짱을 끼고 서 있으면 렌은 금세 아케치의 모습을 찾아내었다. 렌은 아케치도 이쪽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바로 손 하트를 보내왔다. 아케치가 처음 그것을 무시하자, 작아서 안 보였나 싶었는지 크게 팔하트로 동작을 바꾸었다.
저게 안 보일 리는 없다.
애초에 둘 다 보였지만.
아케치는 한심한 것을 바라보는 눈을 했다가, 손을 휘휘 휘저어 렌이 날려 보내는 듯한 하트를 쳐 내었다. 렌은 시무룩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이 쯤 기다렸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오겠지. 줄이 길어지고 사람이 늘어나자 아케치는 렌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먼저 비교적 한산한 분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늦게 내린 렌이 아케치, 잠깐만! 하며 외치고서는 헐레벌떡 따라갔다.
고백 4일째
솔직하게 말하자면, 아케치는 3일쯤 되면 렌이 포기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끈기의 문제가 아니라 예의의 문제로, 상대가 싫다는데 꾸준히 구애하는 그런 미련하고 멍청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을 쏴 죽여버리기까지 했다는 괴도단의 리더를 너무 과소평가 했으리라며, 아케치는 크게 후회하고 있었다. 제 앞에 놓여있는 쟁반 때문이었다.
하트 모양의 라떼아트, 서비스라며 내놓은 파이도 하트, 파이 접시 밑에 깔린 편지에 붙은 스티커도 하트. 하트, 하트, 하트! 온통 하트 투성이었다. 굳이 이렇게 까지 어필하지 않아도 진심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아케치가 경악스러운 것을 보는 표정으로 쟁반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렌이 히죽히죽 미소 짓고 있었다. 취소. 장난인지 진심인지 구별조차 가지 않았다.
“르블랑에서는 요즘 쓰레기도 주나 봐?”
아케치가 얼굴을 찡그린 끝에 말하자, 렌은 영업용 미소를 환하게 띄우고선 그에 비교되는 낮은 톤으로 말했다.
“하핫, 영업시간 끝나고 마감하는데 들어와서 달라고 한 주제에 당당한 말이네, 아케치.”
부른 것은 렌이지만 늦게 와버린 것은 확실히 아케치였다. 지구가 무너지면 자기가 구할 테니까 우선 너는 르블랑으로 오라는 기묘한 메시지를 받았기에 늦게라도 일을 끝내고 르블랑을 찾아온 것이었다. 이런 게 기다리고 있었으면 필시 안 왔을 텐데. 아케치의 후회를 아는지 모르는지 렌은 다시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아케치를 바라보았다. 무시가 답이다, 무시가.
아케치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아케치가 책을 펴자 렌도 방해가 되지 말아야지 싶었는지 신속하게 제 업무로 복귀했다. 접시를 정리하는 듯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섞여오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소음과 함께하는 카페에, 페이지와 함께 넘기는 커피는 그려진 하트 만큼이나 달콤했다. 무심결에 기분이 풀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하얀 바닥을 드러낸 찻잔을 바라본 아케치는 슬슬 돌아갈 준비를 했다. 바쁜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정말로 닫을 시간이니 슬슬 자리를 빼야겠지 싶을 뿐이었다. 아케치가 지갑을 꺼내 들려고 하면 렌이 깜찍하게 윙크했다.
“내 사랑이니까 그냥 받아둬,”
아케치는 그 윙크를 바라보다가 환하게 웃으면서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받아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아 멋대로 책상 위에 돈을 올려두었다.
“응, 여기 커피값.”
“사랑을 돈으로 살 셈이야!?”
렌이 경악한 목소리로 다급하게 외쳤다. 아케치가 돈을 올려두던 손이 뚝 멈추고서는 한 박자 뒤에서야 렌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했는지 똑같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하면 뭔가 이상하잖아, 바보냐!”
저게 무슨 드라마 같은 소리냐고! 아케치가 빼액 소리 지르고 나서야 렌도 앗차 싶었는지 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아케치가 씩씩대고 있자 다급하게 바른대로 진실을 고했다.
“오늘은 진짜로 필요 없어. 너한테 내준 커피도 신메뉴 연구용으로 겸사겸사 내놓은 거고, 파이도 선물 받은 거니까.”
아케치가 한층 더 노려보자 렌은 진짜라니까, 라는 말을 덧붙였다. 진짜인 것 같기는 하고, 이런 일에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는 거지만. 아케치는 결국 그러려니 하고 한 번만 넘어가 주기로 했다. 평소보다 달콤했던 것은 아무래도 시험 단계여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가방 안에 종이랑 책 다 들었고.
아케치는 소지품을 확인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로 가지 말라는 둥의 소리는 없었다. 오늘의 용건은 이 편지로 고백 뿐. 그러면 차는 것 뿐이다. 아케치는 문손잡이를 한 번 잡았다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 쓰레기통 이미 치운 와중에 미안한데. 쓰레기 하나 더 있을 거야. 비워 둬.”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케치는 앞으로 쭉 나아갔다. 솔직하게 말하면 반응을 볼 자신도 없었다. 남이 준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린다던가… 미움 받기 위하여 한 행동이긴 하지만, 역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것보단…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 같다. 아케치는 가방을 살짝 열어 아까 그 편지의 ‘내용물’을 바라보았다. 껍데기는 개봉했다는 사실도 모르게 잘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지고, 편지의 내용물은 책 사이에 끼워두었다.
…렌은 분명 버렸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아케치는 차마 편지를 펴볼 용기까지는 없어 가방을 닫았다. 그래도, 서랍에 잘 넣어둬야지. 아케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고백 5일째
“아케치, 이거 해보자.”
렌이 웃으며 말하면 항상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사고 치기에 3초 직전인 고양이를 보는 기분이랄까, 물론 고양이가 훨배 낫지만.
아케치는 렌이 들고 온 것은 빤히 바라보았다. 작은 시집 크기 정도의 책은 ‘심리 테스트’라고 적혀 있었다. 비닐에 싸여있는 걸 보면 새것인 것 같은데. 이 짓거리를 한다고 사 왔다고? 아케치가 얼굴을 찡그렸다.
“난 그런 거 안 믿거든.”
“에이, 이런 건 재미로 하는 거야, 재미로.”
그러니까~ 음~ 렌은 빠르게 책을 슉슉 넘기며 한 페이지에 멈췄다. 이거 재미있겠다, 라며 읽기 시작했다.
“당신의 눈앞에는 지금 커다란 소파가 있습니다. 그건 무슨 색입니까?”
아케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소파? 그러고 보니 거실에 소파를 좀 둘까 했는데. 튀는 건 별로인데, 일단 편한 걸로 사야 하고…… 제일 편한 색으로 사고 싶은데. 예를 들어서, 검정이라던가. 아케치가 그렇게 생각하며 렌을 바라보자 잔뜩 기대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머리카락도 검은색인데.
검은색……?
“야, 너 먼저 대답해.”
“글쎄~~ 난 캐러멜 색이 좋지 않을까? 요즘 그게 예쁘던데.”
렌이 웃으며 대답했다. 살포시 감은 속눈썹이 예뻤다. 아케치는 그 대답에 당연한 결과의 추리를 했다. 무슨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카락 색이나 그런 거겠지.
이 자식이, 이런 꼼수를 쓴다고….
아무튼 아케치는 원하는 대답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거 완전 고백이잖아! 아케치는 최선의 대답을 생각해냈다. 하얀 머리카락을 한 사람은 얼마 없지?
“하얀색이지.”
렌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아케치를 바라보았다. 하얀 머리카락? 라벤차!? 쥐스틴이랑 카롤린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케치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 벨벳룸에 취직하고 올게…….”
아케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선 우선 현실 세계에서나 취직하라고 덧붙였다. 그나저나 방금 처음 핀 책인데 답을 어떻게 알았을까? 충격 받아서 뭔가 나비가 어쩌고를 중얼거리고 있는 렌을 무시한 아케치는 책을 집어 들었다. 조용히 답지 쪽을 펴보니 ‘당신이 현재 좋아하고 있는 사람의 머리카락 색입니다’라고 적혀있었다.
이건 평생 덮어두는 편이 좋겠군. 아케치는 탁자 위로 책을 툭 던져버렸다.
고백 6일째
아케치가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고민한 것은 딱 하나였다.
설마 끝까지 계속한다고? 31일 동안? 있는 휴가 없는 휴가 다 짜내서 쉬어도 모자란데 계속 이렇게? 여러 가지 위기감이 겹쳐오기 시작했다.
진짜 어떻게 해야 하지? 설득이라도 해봐야 하나. 아케치는 맞은 편에 앉아있는 렌을 바라보았다. 카페에는 각자 할 일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더 이상 아무도 탐정 왕자를 기억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말을 걸까 걱정되어 얼굴을 가릴 필요도 없어졌다. 아케치는 살짝 미소 지으며 렌을 바라보았다.
“우리 사이에 굳이 연인이라는 제약을 걸어둬야 할까?”
이 시간을 끝내고 싶어서도 있지만, 사실 반쯤은 진심이었다. 겨우 연인이라는 간단하고 언제 깨질지 모르는 형태로 묶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헤어지자, 라는 단순한 말로도 끊길 수 있는 관계는 싫었다. 그러니 고백 받고 싶지도 않고, 이뤄지고 싶지도 않다. 가진 적 없는 것은 잃어도 슬프지 않으니까.
그 이유도 있고, 시간 상의 문제도 있었다. 아케치는 분명히 렌을 좋아했다, 그 감정을 뛰어넘어 사랑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사랑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시간의 흐름이라던가.
있던 일정이 갑자기 사라지고, 없던 일정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케치의 일이었다. 더 이상 거절하는 것도 마음에 안 좋다. 그것이 아케치의 의견이었다.
“응, 그래야 아케치가 도망가지 않을 거잖아.”
그런 아케치의 마음을 눈치챈 것 같으면서도, 렌은 제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말의 끝에 떠오른 미소는 그의 깊은 걱정 따위는 전부 밝게 비춰버릴 것 같은 밝기였다.
“좋아해, 아케치.”
아케치는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꾹 누르면서 말했다. 너는 사람 말을 참 안 듣는구나. 렌은 질세라 그런 점도 좋아하지? 라고 대답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렌의 그런 부분이야 말로 매력이었다. 아케치는 깨끗하게 비워진 잔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쟁반 위에 자신의 커피잔을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그런 점을 싫어해. 그렇게 짧게 덧붙인 후에 자신의 컵을 식기 반납하는 선반에 올려놓고서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쟨 어떻게 커피숍을 와서 딱 커피만 마시고 나갈 수가 있지? 렌은 조금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전부 마셔버리고선 아케치의 컵 위에 제 컵을 포개어두었다.
아케치, 기다려! 그런 목소리에게서 등 돌린 아케치는 조용히 생각했다. 방금 커피, 음미할 정도로 맛있지는 않았다. 제 감정에 거짓을 고하지 않는다면 렌이 만들어준 르블랑의 커피가 더 맛있었고, 그 커피 탓에 다른 커피들이 영 아니게 되어버렸다. 어느새 아케치의 등에 딱 달라붙듯 따라온 렌이 물었다.
“방금 카페 별로였어?”
그다지 좋은 표정은 아니었기에 눈치를 보는 듯한 얼굴이 바보 같았다. 하지만 네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다른 커피들이 맛없어져서 짜증 난다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저 카페, 커플 데이트로 인기 많던데.”
“그래… 그래서 안 좋았어…….”
이상하게 아무도 관심이 없더니 그것 때문이었나. 아케치는 딱 맞는 핑곗거리에 모든 것을 떠넘겼다.
고백 7일째
아케치의 사무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사소한 의뢰라면 반려동물을 찾는 것이고, 무겁다면 해결하지 못했던— 경찰이 상대해주지 않는 탓에 증거를 찾아서 다시 신고해야겠다는 의뢰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상황과 경우, 상세한 의뢰 내용에 따라 그것은 거절하기도 하고 수락하기도 했다. 아케치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로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끼익하고 사무실의 문의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익숙한 상대였다. 렌이 실례합니다~ 라고 중얼거리며, 안을 한 번 둘러봤다가 당당하게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아케치는 의자에 앉은 그대로 렌을 바라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일하는 중에 너랑 어울릴 시간은 없어. 안 나가면 영업 방해로 쫓아낼 거야.”
단호하고 가차 없는 말에 렌이 에~하고 실망하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일 한두 개로 아케치의 생계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아니지만, 줄어든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렌은 명백하게 영업방해가 되는 사람이다. 솔직히 조수면 좋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있지만, 자신의 인생을 알아서 척척 잘 사는 것 같아 권유해본 적은 없었다.
“오늘은 의뢰가 있어서 온 거야.”
“……네가?”
아케치가 진심이냐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면,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런 것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긴 하지만. 손님이라면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아케치는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용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커피는 따로 안 내줘도 되겠지.
“무슨 의뢰를? 너한테는 인터넷에 빠삭한 동료도 있을 텐데. 이제 와서 탐정에게 할 의뢰가…….”
렌은 평소에 모르가나를 넣어둔 가방에서 꽤나 멀쩡해 보이는 서류 봉투를 챙겼다.
정말로 진지한 의뢰인가? 만약 그런 거라면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않고 개인적으로 연락 했어도 충분히 도와줬을 것이다. 보수를 안 받겠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우리는 충분히 거래라는 형태로 많은 정보를 주고받았고, 성인이 되었다고 해서 굳이 바꿀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익숙한 편이 더 좋잖아?
아케치는 조용히 서류 봉투를 받아들였다. 잘 밀봉되어 있는 봉투를 뜯고, 아케치가 그 내용물을 확인하면 렌은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 사람에 대해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어.”
진지한 표정에 아케치가 눈을 깜빡였다. 마치 거래를 하자며 말을 걸어왔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이상형 조사 좀 해줘.”
아케치는 직후 렌의 얼굴로 서류 봉투를 내던졌다. 봉투 속의 프로필은 탐정 왕자 시절의 제 것이고(그렇다고 신체 사이즈나 기타 등등에 거짓이 있지는 않았다)— 즉, 조사해달라는 이상형도 제 이야기일 거다. 결론을 조합해보자면 평소에 하는 그 같잖은 수작질임이 분명했다.
“나머지는 경찰서에 가서 이야기 하던가.”
아케치가 스마트폰을 집어 들자 렌은 다급하게 잠깐만! 하고 소리쳤다. 영업 방해를 길게 할 수록 너만 불리할 텐데? 아케치가 잔뜩 째려봤음에도 렌은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오늘 나는 손님이야! 아무런 이유 없이 의뢰를 거절해도 돼? 탐정이!?”
뭐래, 평소에도 거절하는 의뢰가 몇 개인데. 아케치는 그 말을 속으로 꾹 삼키고서 애써 침착하게 생각했다.
어떤 멍청이가 본인의 조사를 맡기려니 싶지만, 의뢰 내용은 확실하게 아케치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예능 프로에서도 한 번도 이야기 한 적이 없는 것이 이상형이었다. 그러니 그걸 아케치 외에 누가 알까?
그런데 그거랑 별개로 차원이 다른 헛소리임은 변함이 없었다. 아케치는 헛소리에 정당성을 붙여줄 정도로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다.
“장난이 아니라 정말로, 일하는 중이거든.”
“나도 장난 아니야. 의뢰비도 챙겨왔어.”
그 눈빛에는 조금의 장난도 없었다. 이게 진심이라고? 진짜로 이게? 아케치가 대답이 없자 렌은 웃으면서 손님용 테이블 위에 올려진 볼펜을 집어 들었다. 서류는 어느 것들을 작성하면 돼?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한 다 후려치고 싶었지만 아케치의 손은 착실하게 의뢰 양식 서류에 손을 뻗고 있었다.
렌은 절차대로 서류를 작성하고, 연락처를 적은 다음에 슝 나가버렸다. 큰 태풍이라고 지나간 것 같다. 아케치는 의뢰 파일에 이상형 찾기를 추가하고서 떠나가라 한숨을 내쉬었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나만이 밝힐 수 있는 진실인데 거절하는 것은… 확실히,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아케치는 다른 의뢰를 해결하고 퇴근한 후에, 책상에서 흰 종이와 씨름을 했다. 렌에게 진위를 파악할 능력은 없겠으나 탐정으로서 잘못된 정보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제 이상형인 아마미야 렌을 서술하자니 부끄러웠다. 그 이름 석 자를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를 반복한 아케치는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밤을 새운 후에도 이 해결책은 찾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백 8일째
렌은 바로 다음 날 의뢰를 완료했다는 보고 메일이 도착했기에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아케치에게로 향했다. 가기 전에 한가히 굴러다니던 모르가나를 낚아채 가방에 넣어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문도 모르고 냅다 가방에 넣어진 모르가나는 불평하듯이 울어댔지만, 결과가 궁금했던 렌은 그 불평을 깔끔히 무시했다.
사무실의 문을 연 렌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동물 출입 가능해? 준비해두었던 차를 탁자에 내려둔 아케치가 답했다. 모르가나는 괜찮아. 가방에서 툭 튀어나온 모르가나가 아케치를 바라보았다. 너도 참 피곤하겠구나……. 고생한다는 듯한 모르가나의 말에 아케치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모르가나는 사무실을 둘러보는 듯이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말 안 해도 사고는 안 치겠으니 싶어 아케치는 렌에게 서류를 건네었다.
“자. 의뢰는 의뢰니까.”
아케치가 내민 서류를 낚아채듯 받은 렌은 내용부터 확인해보았다. 뭘까? 하얀 머리카락!? 연상!? 장황하게 연인의 조건 따위가 적혀있을 거라 생각했던 종이에는 지극히 심플한 단어가 적혀있었다.
‘검은 고양이’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아 거의 흰 백지 수준이었다. 폴짝 점프하여 탁자 위로 올라와 렌의 옆에서 붙은 모르가나는 경악했다.
이 녀석, 지금 고백하는 건가? 아케치 인생에서 검은 고양이가 아마미야 렌 외에 더 있을 리가 없지 않는가. 누군가가 특정 당하지 않게 나름 노력은 한 것 같았으나 솔직히 의미가 없었다. 아케치와 아마미야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든 연결지을 수 있는 이상형이었다. 아케치는 붉어진 얼굴을 가리고 싶었는지 대각선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렌은 진지한 목소리로 아케치, 하고 이름을 불렀다. 딴청을 피우고 싶었는지 자신의 컵을 집어 들었다. 타는 듯한 기분에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을 때, 렌이 소리쳤다.
“너…… 모르가나 좋아해!?”
그 황당한 발언에 아케치는 쿨럭, 하고 먹던 커피를 뱉어낼 뻔했다. 모르가나가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이 렌을 바라보면, 장본인은 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케치는 사레가 들려 계속 콜록대고 있었다. 날카로운 기침 소리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 아케치는 입가에 묻은 커피를 닦아내었다.
기묘한 침묵이 계속되고, 렌은 종이를 꽉 쥐었다. 둘의 모습을 번갈아본 모르가나는 불안한 예감이 들어 소파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그는 너희들의 바보짓에 이 몸을 끌어들이지 마-! 라고 크게 소리치며 사무실 밖으로 도망가버렸다. 모르가나의 판단은 정확했다. 아케치는 정확히 27초 후 기대한 자신의 멍청함과, 렌의 절망적인 눈치 탓에 당장 나가라며 크게 소리 질렀다. 쫓겨나 버린 렌은 사무실 앞에서 기다리던 모르가나를 데리고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사무실 문에 기댄 채로 주르륵 미끄러진 아케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모르가나는 아무래도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내쉬어도, 쿵쿵 뛰는 심장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바보라 다행이다.
렌이 바보라 다행이었다.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킨 아케치는 그로부터 15분이 지나서야 제 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렌으로부터 모르가나는 절대로 못 준다는 기묘한 메시지가 와 있었기에 깔끔하게 무시하고서 조사로 돌아갔다.
고백 9일째
아케치는 휴일의 대부분 집에서 지내고 있다. 휴일이라는 것은 특별히 무언가를 하지 않고 개인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것이 휴일이다.
그렇기에 휴일에 무언가가 연락이 오면 정말로 최악이었다. 집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사항이면 그나마 좋지만, 나가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정말 지옥이었다. 그 탓에 아케치는 지금 띠롱띠롱 울리고 있은 제 핸드폰을 무시하고 있었다.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누가 연락했을지 뻔히 보였다. 몇 번 무시하면 포기하겠지 싶어 거꾸로 뒤집어 놓았건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려는지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아케치는 속으로 욕을 주워 삼키며 결국 렌의 전화를 받았다. 정말 일말의 반전도 없는 결과였다.
“데이트 가자.”
여보세요, 도 생략하고 바로 본론부터 때리는 것에 대해서는 굳이 태클 걸지 않기로 했다. 아케치는 무의미한 대화는 안 좋아하니까. 심플하고 간결하게 용건을 말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전에 확실하게 정정하고 넘어가야 하는 사실이 있었다.
“우리, 안, 사귀거든.”
한 마디 한 마디 강조하며 내뱉은 말에 렌은 음, 하는 소리를 내었다. 한 번을 안 져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쌍방으로 마찬가지일 것이 분명했다. 렌은 아케치의 차가운 말에 기죽기는 커녕 오히려 더 당당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친구끼리 놀러 가자.”
어떻게 해서도 너랑 나가고 말 것이라는 뜻임이 분명했다.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든 집 앞까지 와 시위라도 벌일 타입이었다. 그러면 진짜로 시위를 하기 전에 한발 물러나서 시끄러운 일만이라도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수십 번 번복된 렌과의 의미 없는 밀고 당기기를 반복한 아케치는 제일 효율적인 수단을 선택할 정도가 되었다. 확실하게 친구라고 정정 받은 아케치는 나갈 준비를 했다. 옷을 갈아입고, 꾸미고.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예뻐 보이고 싶은 것은 당연하니까.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아케치는 치장 없이 외출하지는 않았다.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은 어느샌가 버릇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준비를 끝내고 나간 끝에 끌려간 곳은 야구장이었다. 솔직하게, 불안한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도망치면 늦지는 않았겠지만 영악하게도 표를 이미 끊은 뒤였다.
…돈을 냈는데 들어가지도 않고 버릴 수는 없으니까. 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아케치는 순순히 관객석으로 들어갔다.
나란히 앉아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야구 자체는 별 문제가 없었다. 에초에 둘 다 스스로 야구를 챙겨볼 정도로 관심이 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보고 즐길 수는 있을 정도로는 룰을 이해하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그렇게 아무런 일 없이 경기는 쉬는 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따로 시킬 것은 없고, 음료수라면 들어올 때 샀으니까 일어날 필요가 없었다. 즐거움에 소란스러워진 경기장의 한 쪽에서 치어리딩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아케치는 흥미가 없어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날씨 좋네, 그런 쓸모없는 감상을 떠올리다 보면 공연이 끝났는지 사람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회자는 텐션이 높은 목소리로 뭐라 말하고 있었다. 전광판이 사람들을 비추며,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아케치는 문득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얌전하지? 뭔가 불안해서 아케치가 고개를 돌려 렌을 바라보면, 히죽히죽 미소 짓고 있었다.
“혹시라도 허튼 짓거리를 할 거라면 난 지금 나갈 거야.”
사회자의 말은 이어지며, 오늘도 커플이 가득하다는 둥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선수 치듯 선을 그은 아케치가 일어나려 하자, 렌은 아케치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선 힘을 꾸욱 주어 아케치를 의자에 붙여두려고 했다. 꽤나 진심이었는지 일어나기 힘들었다. 못 일어날 것까지야 없지만.
“조금만 기다려 봐. 그렇지, 한 15초만.”
렌은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15초를 정확히 세는 그 짧은 시간에 아케치는 최악을 상상했다. 야구장에 커플 하면 키스타임 말고 짚이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주변에 커플이 많은 것을 보니 처음부터 전부 이때를 계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생각한 사이에 벌써 시간은 지난 후였다. 3, 2, 1. 렌은 그 인지 세계에서나 지을 법한— 당당하고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쇼타임!”
그 순간 아케치의 당황한 얼굴과 렌의 미소가 전광판에 비쳤다. 화면은 잔뜩 하트로 꾸며져 있었다. 어떠냐, 한 건 해냈지, 같은 표정을 지은 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케치를 올려다보았다. 자, 어떠냐.
이 분위기라면 모두가 기대하고 있었다. 전광판에 동성이나 친구 사이가 비치는 일은 꽤 있다, 그리고 키스타임에 찍혔다면 이유 불문 일단 가볍게라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즐거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아케치는 렌이 생각한 것보다 훨낀 주변은 조금이라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탐정 왕자 때나 지었던 상냥하고 예쁜 미소를 지은 끝에, 상냥하게 렌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선 고개를 살짝 숙여서, 눈을 슬며시 떴다. 정말로 해주나, 정말로?! 렌에게도 의외였다만 해준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다.
기대를 담아 눈을 살며시 감으면, 아케치는 그대로 렌을 밀어버린 뒤에 밖으로 나가버렸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렌은 뒤늦게 몰려오는 아쉬움에 짐을 챙기고서는 아케치! 라고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 뒷모습은 멈출 것 같지 않았고, 렌은 결국 다급하게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고백 10일째
“아케치, 어차피 저녁 안 챙겼지?”
“……? 그렇지, 뭐.”
뜬금없는 물음에 아케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옛날에는 저녁 좀 제때 챙기라고 화를 내더니, 최근에는 어느 정도 아케치를 파악했는지 자기가 먹이는 편이 빨라 렌은 아케치를 끌고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르블랑에서의 일이었고, 렌에게서부터 ‘식당에 가자’고 권유된 것은 오랜만이었다. 렌도 비싼 식당을 자주 이용하는 편은 아니었다. 작은 가게면 자주 애용하고 있지만, 뭐랄까, 아케치의 상당히 까다로운 입맛을 채워줄 정도로 비싼 가게는 가지 않는 편이었다. 아케치도 사실 제 입맛을 떠나 그런 가게는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 학생이 무슨 일로 그런 가게에 가겠는가. 대부분 원치 않은 동행과 약속이었다. 역겨운 어른들과 함께하는 식사. 렌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단 말이지. 갑자기 가자는 것이. 아케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렌을 바라보다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설마 해서 말하는 건데, 음식 사이에 반지 같은 거 끼워서 고백할 거면…… 그냥 굶을게.”
그 말에 렌은 웃으면서 제 손에 있었던 것을 슬쩍 등 뒤로 숨겼다. 그 수상한 손동작에 아케치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냐, 그런 짓 안 해. 하하.”
미묘한 웃음을 보아하니 절대로 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헛짓거리도 막았으니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아케치는 결국 저녁 약속을 승낙했다. 더러운 추억이 있다면, 그 위에 행복한 시간을 덧그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안도하며 들어간 가게 안에는 잔잔하게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아케치 입장에서는 이 정도가 익숙하고 딱 편한 정도였다. 주문을 끝마친 둘은 마주 보고 앉았다. 아케치가 무표정을 하고선 가게를 한 번 둘러보면, 렌은 웃으면서 괜찮은 가게냐고 물었다. 센스는 있었기에 아케치는 솔직하게 너 치고는 괜찮은 가게라고 답했다. 가격은, 음, 뭐 요즘 바쁘게 살았으니 돈 좀 있나 보지. 내라고 해도 낼 수 있을 정도로, 돈은 쟤보다는 많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이상한 이벤트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
완전히 긴장의 끈을 놓고서 나이프를 움직이던 아케치가 말했다. 렌은 그 말에 웃으면서 포크의 끝으로 접시 위 버섯을 툭툭 찌르고 굴리며 답했다.
“지금이라도 해줄까? 이상한 이벤트.”
아케치는 와인잔에 손을 올리고서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렌을 바라보았다. 렌은 그래도 피식 웃으면서 함께 잔을 집어 들었다.
“…제발 부탁인데, 남들 앞에서 창피한 짓 좀 하지 마.”
아케치가 앞으로 살짝 잔을 기울이면, 그것에 어울려주겠다는 듯이 렌이 잔을 가볍게 부딪혔다. 정말로, 와인의 향도 맛도 나쁘지 않은 가게였다. 아케치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제 멋대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에도 표정을 이 정도로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오직 렌 뿐이었다. 둘은 그 정도로 특별했다.
잔을 기울여 와인을 흘려 넣은 렌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남들 앞이 아니라면 괜찮다는 뜻이야?”
“남들 앞이라도, 우리 둘만 있어도, 전부 거절할 거야.”
슬슬 포기해. 아케치가 그 말을 끝으로 입에 음식을 넣었다. 가게의 분위기나 요리의 완성도보다, 누군가가 맞은 편에 앉아있어 함께 잔을 부딪혀주는 것이 더 기쁜 것은… 분명히 자신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 행복을 알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아케치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슬픈 듯한, 괴로운 듯한, 그래, 렌이 어쩌면 일찍이 붙잡을 수 있었던 얼굴이었다. 혼자 무언가를 끌어안고 끝내 추락해버릴 것 같은 모습. 렌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내일 또 고백할게.”
렌은 멈춰있던 손을 움직여 음식을 입 안에 집어넣었다. 조사한 대로 훌륭한 가게였다. 제 취향에 가깝지 않은 가게를 찾은 것은, 아케치가 즐겁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 말 탓에 어두워진 표정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더 이상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렌은 이번에도 ‘또’ 하고 싶었던 말을 억누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런 표정 하지 말아 줘, 라고.
아케치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듯한 괴로운 고통을, 렌은 와인과 함께 흘려보냈다. 테이블 위의 초, 잔잔한 음악, 향이 좋은 와인, 딱 알맞게 익혀진 스테이크.
의도야 어찌 되었든 오늘부터 아케치는, 앞으로 이런 가게를 찾을 때마다 렌과의 대화를 떠올리게 될 것이었다. 추억이 쌓일 때마다 도망갈 길은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고백 11일째
렌은 늘 갑작스러운 약속을 잡았다. 대체로 내일 만날래? 보단 지금 시간 돼? 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일단은 아케치 퇴근 시간에 맞춰서 권하고는 있지만, 일의 특성상 제 시간에 끝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 같은 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으며, 한 번 해버린 약속을 미루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캐치는 결국 두 시간 정도 늦을 것 같으니 안에서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솔직히, 아케치는 렌이 안에서 기다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안에서 기다린 적이 없었다. 그래서 미루고 싶지 않았는데, 이번 의뢰는 정말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아케치는 예상 시간이 2시간이었던 것을 반으로 줄여 1시간 내에 전부 정리해버렸다. 쭉 밖에서 기다렸을 멍청이나 찾아서 혼내고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진짜 이번에야 말로 크게 혼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며 빠른 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가면, 시계탑 아래에 서 있는 렌의 모습이 보였다. 미련한 녀석. 안에서 기다리라니까, 기어코 밖에서 기다리는구나. …미련한 녀석. 오늘 아예 안 나간다고 해버렸으면 될 걸, 지금이라도 뒤돌아 도망가면 될 걸, 바람맞은 줄도 모르고 기다릴 것 같은 바보 탓에 나아가고 있구나.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던 렌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인파 사이에서도 가려지지 않고 선명한 모습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케치는 방금까지 딱딱한 무표정이었던 것이 사랑스러운 미소로 바뀌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케치!”
손을 크게 흔들고 있는 렌의 모습에, 아케치는 눈을 깜빡이며 고민하다가 하는 수 없이 마저 흔들어 주었다. 살짝 들어 작게 흔들었지만, 렌은 확실하게 인사를 받아준 것을 눈치채고서 우다다 달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뚫고 민첩 하게도 다가오는 렌에게 소리쳤다.
“바보같이 넘어지지 말고 천천히 걸어!”
도망가기에 이미 늦었으니까— 그런 뒷말을 삼킨 아케치는 제자리에 서서 렌을 기다렸다. 혼낼 생각이었는데, 바보에 멍청할 정도로 자신이 왔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있는 것이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이 녀석은 겨우 이런 나의 무엇이 좋아서 이렇게까지 해버리는 걸까.
“아케치… 나 계속 기다렸어.”
“그래, 굳이 말 안 해도 알겠다. 실내로 들어가기나 해.”
“응, 아케치. 나랑 사귈래?”
“싫어.”
“에~ 이렇게 열정을 다해 기다렸는데.”
“누가 기다리래? 그냥 약속 파기하자고 했잖아.”
“안돼, 그럼 오늘치 고백을 못하니까.”
둘은 티격대격하며 사이좋게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고백 12일째
아케치는 미묘한 데이트를 12일째 반복 중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느냐고, 하면 아무래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이 원인이었다.
아니, 어쩌면 거절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거듭해서 강조하자면 아케치는 렌을 좋아했다. 고백은 꾸준히 거절하고 있지만, 매몰하게 밀어내거나 도망가 지금 이 시간을 끊는 짓은 할 수 없었다. 한 번 달콤한 것을 입에 댄 후로는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아케치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고서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각은 벌써 10시 30분, 물론 오후다. 이 시간에는 만나러 가는 것도 무리다.
오늘은 아무런 일도 없이 지나가겠군. 아케치는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만나고 싶다는 것은 분명 거짓이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 찾아갈 수는 없었다. 그 녀석에게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 감히 나 따위가 껴안고 있어도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 애가 행복할 수 없었던 모든 원인은, 어쩌면 나로부터 출발한 것었다.
…그럼 오늘로 연속 고백은 끝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잠들 수 없는 밤은 며칠 째였을까. 전에는 쓰러질 때까지 움직였고, 의무적으로 일어나 다시 쓰러질 준비를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케치는 그때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 탓에 점점 썩어가고 있었다. 치료조차 하지 못한 상처가 강제로 방치당하고 있었다. 치료할 수 있는 수단은 정당한 판결이었지만, 제 죄를 입증하는 것은 둘째치고 그 어떤 수단을 써도 무죄가 될 것이 분명했다.
각오를 하지 않은 일은 아니었지만, 이런 형태가 되어서까지 남아있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그들 또한 전부 죽여버린다면, 무언가 나아지지 않을까. 그것 또한 속죄가 될 수 있을까, 그리 생각하며 방황하던 아케치의 팔을 잡은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렌이었다.
함께 살아가자, 그 말은 지독하리만큼 달콤했고 죄스러웠다. 수많은 생명을 끊고 그 시체 위에 선 자에게 살아간다고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되는지, 렌도 알고 있다. 그 전부를 알고서도 아케치에게 손을 뻗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사고를 깨부순 것은 스마트폰의 알림 소리였다. 이 시간에 겁도 없이 자신한테 메시지를 보낼 인물은 한 명 뿐이었다. 화면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하면 사진 한 장이 보내져 있었다. 사진을 눌러 확대하면 엉거주춤한 자세로 잠들어 있는 듯한 모르가나와 자신의 한 팔을 이용해 하트를 만들어 보내온 렌이 있었다. 저렇게 난장판을 치고 있는데, 저 고양이는 잘도 자는군.
[아케치, 오늘도 좋아해. 나랑 사귀어 줘.]
- 모르가나 가지고 놀지 마.
[아냐. 저렇게 자고 있었어, 난 손 안 댔다고. 지금 침대도 양보한 상태인데.]
확실히 저렇게 중앙에서 뻗어있으면 옆으로 치우지는 않는 한 렌이 누울 자리는 없어 보였다.
- 모르가나는 왜 뻗었어?
[나랑 엄청 뛰어다녔거든. 아, 그나저나 지금 시간이면 너도 쉬러 들어가는 길이었겠네. 방해해서 미안, 잘 쉬어.]
- 너도. 모르가나 깨우지 말고.
메시지의 1이 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빠르게도 핸드폰을 끈 모양이었다. 이런 식으로 챙겨줄 필요는 없는데. 아케치는 메시지를 몇 분이고 빤히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까지 나에게 집착하는 걸까. 내가 너였다면 나 따위는 잊어버리고 혼자 살았을 텐데. 직접 만나지는 않아도 결국 렌은 아케치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저, 그 사실만이 선명했다.
고백 13일째
어제 아케치가 결국 밤늦게 고백받은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바쁜 일이 엄청나게 몰려있었고, 아무튼 유능한 탐정이었기에 싹 밀어버리는 것에 성공했다. 한동안 급하거나 바쁜 의뢰도 없었으니까, 모처럼 정시에 퇴근할 수 있다.
상사나 부하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케치는 기본적으로 집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자체적으로 늦게까지 남는 것이라 퇴근 시간이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자의적으로 남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남는 것은, 아무튼 소소한 차이가 있었다. 모처럼이니 집에 일찍 들어가자, 고 생각한 시점에서 다른 곳에 들를 마음도 들지 않았기에 아케치는 순순히 제집으로 돌아갔다.
사람으로 꽉 차 지옥 같은 대중교통에서 벗어난 아케치는 속으로 제 멍청한 판단을 원망하고 있었다. 평균적인 퇴근 시간을 빗겨서 집에 돌아가는 이유는 대중교통에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고, 사람이 너무 많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불쾌하게 부딪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술에 꼴아 뒹굴고 있는 취객들과 한 열차를 타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면허야 있지만 제 차를 뽑지 않는 것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다. 혼자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그래, 어쩌면 그건 샀을지도 모르겠다.
…피곤하니까 별 생각이 다 드네. 아케치는 고개를 들어 제 문 앞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부터 무언가 검은 물체가 보이고 있었다. 제 집 앞에 앉아있을 검은 물체가 또 뭐가 있을까. 아케치는 발걸음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선 그 곁으로 다가갔다. 어쭈, 이게 납치해도 모르겠네? 기척을 최대한 지우기는 했지만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을 텐데.
아케치는 들고 있는 가방으로, 렌의 머리를 가볍게 콩 때렸다.
“남의 집 앞에서 뭐 하냐?”
렌은 고개를 돌려 아케치를 바라보고선 씨익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품 안에 커다랗고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것도 같았다. 굳이 여기서 기다렸다는 것은 중간에 만나면 내가 거절하고 쫓아낼 것 같아 앞에서 기다렸을 것이다. 정 안 되면 문에 매달릴 생각이라도 했을까. 아케치가 노골적으로 불안하다는 듯한 눈빛을 했다.
“저녁밥을 안 챙길 것 같은 아케치를 위한 찾아가기 서비스.”
렌은 검은 봉투를 살짝 열며 안에 든 식재료를 자랑했다. 그리고 아케치가 예상했던 대로 이미 식재료까지 전부 사버렸으니 내쫓을 생각은 하지 말라며 문에 딱 달라붙었다. 어쩜 저렇게 예상을 조금이라도 빗나가지 않는 걸까.
아케치는 어이없어져서 손으로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서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일단 비켜야 문을 열 거 아냐. 그 작은 승낙의 말을 놓치지 않고 주워 담은 렌은 웃으며 아케치의 팔을 붙잡았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들여줄 생각이었지만.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방금까지 잠깐 이대로 밀치고 들어가서 잠가 버릴까 고민했으니까.
아케치가 피곤한 정신으로 신발을 벗고, 부엌은 멋대로 쓰라며 떠넘긴 뒤에 자신은 욕실로 들어갔다. 아무리 반복해도 사람과 맞닿는 것만큼은 익숙해질 수 없었다. 그래도 집에 사람을 두고 있으니, 평소보다 서둘러 씻고 나온 아케치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탈탈 털어버리며 거실로 나섰다. 바로 옆에 보이는 부엌에서는 앞치마를 두른 렌이 있었다.
가스레인지보다 더 자주 이용하는 전자레인지는 주황빛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아케치 집에 애초에 밥이 되어있을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는지 사온 즉석밥을 돌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확한 추측으로, 떨어진 지 조금 오래되었다.
애초에 집에 좀 들어오기나 해야 챙기지. 밥을 챙기는 것 자체는 둘째치고. 그래도 다 차려주니 무언가는 해야겠다 싶어 아케치는 접시와 식기를 옮기고, 다 돌아간 밥을 꺼내었다.
렌은 요리한 카레를 접시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항상 먹는 메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몇 달 만에 집에서 집밥다운 풍경을 보게 되었다. 카레의 장점은 역시 요리하면 뭔가 되긴 된다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요리도 잘하고 가정적인 연하남 어때?”
슬쩍 던지는 듯한 말에 아케치가 수저를 들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서는,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미소를 지으며 깔끔하게 답했다.
“난 평생을 남이 만든 음식만 사서 먹을 돈이 있어서 괜찮아.”
그렇게 대답하자 렌은 와~ 하는 탄식을 내뱉고서는 중얼거렸다. 나도 돈 버니까 가능하거든, 그냥 만들어 먹는 편이 효율이나 가격이 장기적으로 싸니까 하는 거라고.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케치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솔직히, 바꿔 말했을 때 렌이 집에만 있어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의뢰가 들어오는 만큼 벌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하나다 무시할 정도의 금액은 아니다.
…함께 살아도 나쁘지는 않을 텐데, 아케치는 그런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식기를 움직였다. 그렇게 둘은 조용히 저녁을 먹고 해산했다.
고백 14일째
“아케치, 벌써 2주나 됐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던데.”
렌이 추리 소설책에 밀려 방치된 지 10분 만에 꺼낸 말이었다. 슬쩍슬쩍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아케치는 얼굴을 찡그렸다. 책을 거꾸로 뒤집어놓고서는 턱을 괴었다. 렌이 그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독서에 방해되었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너는 열 번 찍혀진 나무한테 미안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솔직히 열두 번이나 찍었으면 넘어가지 않은 쪽보다는 넘어갈 때까지 두들겨 팬 쪽이 나쁘지 않은가. 아케치가 고개를 살짝 치켜올리고선 렌을 내려다보면, 렌은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며 변명을 찾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케치가 한 말은 당연한 수준의 이야기였고, 아마도 제가 잘못했다는 자각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결국 렌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돌리고서 뒤늦은 대답을 했다.
“…응, 미안해, 아케치. 민폐라는 건 알고 있어.”
알고 있다면 포기하는 편이 좋을 텐데. 렌은 끝내 마주해야겠다 결심했는지 아케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그 자신이 한 일에 잘못은 있어도 일말의 망설임이 없다는 표정이 아케치에게는 두려웠다.
이렇게까지 올곧은 사람이 또 있나?
나는 한평생 선택을 후회하기만 했는데, 눈앞의 이 올곧은 눈동자는 설령 어느 결말을 맞이하더라도 도망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녀석이었다. 그렇기에 아케치는 더더욱 렌과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나같이 비겁한 녀석을 사랑하게 되면, 저 녀석은 한 번이라도 멈춰 서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
“그렇지만 좋아해. 너와 줄곧 함께하고 싶어.”
말의 무게는 둘째치고, 아케치는 솔직히 ‘그냥 뱉어본 말’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받아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본래 사람이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듯이, 아케치는 결국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려 그 시선을 피했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다.
아케치를 옭아맨 생각들은 어쩌면 평생 떨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상처와 저주, 아케치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서 고개만 돌리고 있으면, 렌은 결국 시선을 떼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지금 붙잡지 못하는 것은, 그가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아케치가 도망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랑을 인정할 때까지. 몇 년이고 기다려줄 수 있었다. 그를 잃는 것보다는, 그 무엇이든,
“……포기해. 벌써 2주잖아.”
아케치의 차가운 대답에 렌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분명히 상냥했다.
“이제 2주지. 내일도 말할 거야. …네가 받아들여 줄 때까지.”
아케치는 마음대로 하던가, 라는 말은 끝내 내뱉을 수가 없었다.
고백 15일째
아케치의 시야에 불쑥, 장미꽃 한 송이가 들어왔다.
“좋아합니다, 첫눈에 반했어요, 사귀어 주세요.”
고개를 들어 장미꽃의 주인을 바라보면, 살짝 미소 지으며 꽃을 내미는 렌이 있었다. 얼굴에 더 가까이 다가온 장미로부터 향기가 나서, 아케치는 얼굴을 찡그린 뒤에 고개를 뒤로 살짝 뺐다.
렌은 거절하지 말아 달라는 듯이 장미꽃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가시는 전부 제거한 뒤라서 다행인가. 아케치는 결국 손가락으로 장미를 밀어낸 뒤에 말했다.
“애초에 왜 또 꽃인데?”
아케치는 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하느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지만 제 돈을 주고 자리를 비워 꽃을 장식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굳이 좋아하지 않는 상대에게 이렇게까지 자주 줄 필요는 없을 거다. 아케치가 얼굴을 찡그리자 렌은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장미꽃을 제 쪽으로 다시 가져갔다.
안 좋아해? 렌이 정말로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아케치는 한층 더 표정을 찡그리고서는, 애초에 왜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고 대꾸했다.
“저번에 너네집 갔었잖아, 탁자 위에 있던 거 내가 준 꽃다발이잖아?”
너도 별로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아서. 렌은 아무래도, 아케치가 꽃을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탐정 왕자 시절에는 이미지 관리를 위해 귀에 꽃을 꼽은 뒤에 사진을 찍을 정도였지만, 솔직하게 말해 꽃도 사치품 목록 중에 하나에 불과했다.
필수로 필요한 것도 아니고, 비싸고, 금방 고장 나는.
손님이 오면 장식용으로라도 쓰겠지만, 지금까지 아케치의 아파트에 들어온 사람은 렌과 모르가나 뿐이었다. 물건을 사용을 안 하는 것은 둘째치고 섬세한 탓에 고장 날 일이 없어 수리기사 조차도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 보지 않는 것은 장식할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아케치의 집에 액자가 하나도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왜 존댓말이야?”
아케치는 결국 떨떠름한 표정으로 렌을 바라보았다. 꽃이야 뭐, 고백에 흔히 동행하는 것이니까 놀랍지는 않다. 하지만 합니다 와 요의 콤보는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연상 취급을 해줄 리는 없고, 없던 예의가 생겨난 것도 아닐 테니까 분명 수작질인 것 같았다.
렌은 아케치의 헛소리 할 거면 그냥 대답하지 말라는 뜻으로 찡그린 얼굴을 무시하고서, 웃으며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킨 인터넷 브라우저에 보인 것은 연애에 관련된 기사였다.
최근 20대를 조사해서 제일 인기 많은 연하가 존댓말을 쓴다나 뭐라나. 기사도 유명하지 않은 회사의 게시글로, 조회수도 몇 없었다. 정말 조사한 끝에 나온 것인가 의심스럽기까지 한 정도였다. 아케치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아하~ 하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난 별로니까 평소 말투로 돌아와라.”
명령조에 가까운 말에 렌은 시무룩해져 작게 응, 이라고만 답했다. 어디에서 맨날 이상한 것만 주워듣고 시도해보는 것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장미 꽃다발은 부담될 것 같아서, 한 송이만.”“꽃다발이고 나발이고, 꽃은 다 싫어.”
아케치가 딱 잘라 대답했다. 탁자 위에 올려둔 건 그냥 남아서 장식한 것 뿐이야, 라며 변명을 덧붙이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실제로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구차하게 더 설명하면 진정성부터 의심하게 될 것 같아 그 부분은 생략하기로 했다.
그래도 오늘 장미꽃은 받아준 거잖아? 렌이 환하게 웃자 아케치의 동공이 조금 흔들렸다. 아, 역시 아직도 정면으로 바라보기에는 너무 심장이 떨렸다. 바보 같기는, 주인 눈치도 안 보고 멋대로 뛰네. 대부분의 것들은 아케치가 스스로 조절할 수 있었지만 박동까지는 아무래도 조절할 수 없었다. 아케치는 괜히 장미꽃을 꽉 쥔 뒤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극적으로 얼굴이 붉어지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장미꽃을 받아 든 아케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돌아갈 거야. 렌이 시계를 올려다보자 확실히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있었다. 턱을 괴고서 미소 짓고 잘 가라고 인사하는 렌을 향해, 아케치는 애써 차가운 목소리를 내었다.
“앞으로 이런 거 이용할 생각 마. 귀찮으니까. 네 바보 같은 고백을 거절하는데 우리 집이 혼잡해져야 하잖아.”
그렇게 덧붙여지듯 말하자 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싫다면 하지는 않을게, 난 너한테 사랑 받고 싶은 거니까. 뻔뻔한 목소리를 뒤로 한 아케치는 문밖으로 나섰다.
결국 집까지 소중히 장미꽃을 안고 돌아갔다. 이번에도 꽃병 사이에 끼워둘 생각이었다. 하얀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풀면 안에서 작은 메시지 카드가 나왔다. 조금 말려있던 그것을 편 아케치는 내용을 읽어보았다.
꽃점이라도 해볼래? ‘나는 아마미야 렌을 좋아하지 않는다’로 시작해서.
손수 적은 메시지 카드를 내려놓은 아케치는 장미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선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잎을 만지작거리다, 한 개를 뜯어내며 중얼거렸다.
나는 아마미야 렌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근처에 잡히는 다른 잎을 잡았다. 좋아한다. 팔랑, 꽃잎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좋아하지 않는다. 몇 번이고 기대를 쌓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자신에 의해 무너졌다. 좋아한다. 이미 아케치는 충분히 기대했다가, 또 배신당하고 버려지는 일을 겪었다.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새로운 사랑에 쏟을 힘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를 사랑해보고 싶어졌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보답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좋아하지 않는다가 나올 때마다 무너지고, 좋아한다고 나올 때마다 다시 기대하고.
피고, 지고, 피고, 진다.
하지만 현실과 마음 따위는 조작해버리겠다는 듯이, 장미꽃의 잎은 전부 떨어졌다. 끝에 나온 결론은 ‘아마미야 렌을 좋아한다’는 진실이었다. 아케치는 고운 장미꽃마냥 붉어진 얼굴을 팔로 가리면서 중얼거렸다. 비겁한 자식. 이 장소에는 없어 듣지도 못할 상대에 대한 욕이었다.
비겁한 자식, 꽃잎이 홀수인지 짝수인지도 계산하고서 그런 메시지 카드를 남긴 거다. 결국 남은 꽃잎을 전부 주워 담아 자신이 아끼는 다이어리 사이에 끼워둔 아케치는, 진정하기 위해서 크게 숨을 내뱉었다. 좋아한다는 말은 여전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지만.
아케치는 제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 나오던데? 는 거짓된 내용을.
고백 16일째
일하는 중에는 방해하지 않는다, 그것이 약속이었다. 물론 공개된다고 좋은 것은 없으니 화면은 가리고, 의뢰인의 신상이라고는 조금도 추측할 수 없는 정보 정리의 단계. 아케치는 노트북을 탁 닫아버리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렌은 마주 보고 앉아있다가 갑자기 일어난 아케치를 올려다보았다.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에, 아케치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거 네 장난감 아니거든. 상대는 고양이가 아니라 인간이기는 하지만 가끔이랄까, 꽤 자주 고양이처럼 굴어서 혹시 궁금하다고 만져보다 고장 낼지도 몰랐다. 모르가나는 똑똑한 고양이니까 그러지는 않겠지만.
노트북을 들어서 저 멀리 옮겨두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렌은 그런 아케치를 바라보다가, 자신도 따라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섰다.
“슬슬 나랑 사귈 준비는 됐어?”
아케치는 렌이 다가온 만큼 물러났다. 한 걸음 성큼 다가오면, 뒤로 쫙 물러나고. 가까이 다가오려는 얼굴에, 아케치는 팔로 시야를 가린 후에 대답했다.
“내가 언제 받아준다고 하긴 했던가?”
주름진 미간을 바라보며 렌은 피식 웃었다. 언제나의 아케치가 짓는 표정이었다. 분명히 짜증을 내는 건 맞는데, 이제는 그것조차 익숙해져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렌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서, 몸을 살짝 숙여 아케치의 시야에 들어가려 했다. 가려진 팔 아래로 보이는 렌을 바라보며, 아케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받아주게 되어있어, 넌 나를 좋아하잖아.”
지금처럼 말야. 아케치가 가리려고 뻗은 팔 사이로 파고들어 가 가까이 달라붙은 렌을 바라보며, 아케치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붉어진 얼굴이 머리카락에 전부 가려지지도 못했다. 그저 떨리는 듯이 헤엄치는 눈만큼은 가릴 수 있었겠지만.
아케치가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어쩌다 그렇게 뻔뻔해진 거야, 라고 말하며 렌을 슬쩍 밀어내었다. 그러면 렌은 뒤로 물러나 주기는 하지만, 대신 자신을 아케치의 손에 가까이 붙어 비비적댔다. 집 안에서까지 장갑을 끼지는 않아 맨손으로부터 닿는 볼에 따뜻한 온도가 느껴졌다. 온기야말로 삶의 증거였다.
그 어떤 따뜻한 사람도 죽고 난 후에는 차가워지고,
그 어떤 차가운 사람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따뜻하다.
아케치의 당황하는 듯한 표정에 만족했는지 렌은 마지막으로 한번 아케치의 손에 제 볼을 꾹 눌렀다가 떨어졌다. 아케치는 다급하게 제 손을 뒤로 숨기며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등 뒤로 숨긴 손은 아쉬운 듯 제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깐, 아케치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하고 이런 걸 해!?”
내내 좋아하는 것이 전제인 이야기를 한 주제에 이런 때에만 자신이 없는 듯이 되묻는 꼴이 웃겼다. 아케치는 그 질문에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치듯 대답했다.
“우리가 대체 뭘 했는데? 키스도 뭣도 안 했거든!?”
그건 커녕 떠넘기듯 손을 잡은 적도 거의 없고, 포옹을 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같이 어딘가에 놀러 가거나 하는 것은, 그래, 친구들끼리도 하잖아? 자기합리화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아케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저 녀석이랑 있으면, 이것저것 절제가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게 무슨 멍청한 대화야? 아케치는 결국 무슨 소리를 해도 무시하고, 우선 일이나 하자는 생각을 하며 다시 노트북을 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렌은 아케치의 바로 곁에 다가가 속삭이듯 물었다.
“좋아하면 키스해도 되는 거야?”
“그거야 당연히,”
좋아하는 사이면 할 수도 있지? 아케치가 당연한 대답을 하려다가 자신과 렌의 관계를 떠올리고서는 입을 꾹 닫았다. 무시하자. 일이나 하자. 아케치가 대답을 생략하고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하자, 렌이 곁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당연히? 똑같은 어투로 되묻는 것에 아케치가 결국 입을 열었다.
“헛소리 할 힘이 있으면 이거 좀 도와주지?”
“에이, 비전문가가 손을 대면 안 되잖아.”
맞는 말이기는 했다. 아케치는 한껏 짜증 내는 목소리로 그럼 조용히 구경이나 하라고 한 뒤에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렌은 수십초 동안은 조용히 그 이야기를 듣다, 턱을 괴고선 흐음- 하는 소리를 내었다.
불안한 느낌이 들어 아케치가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리면, 렌은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진짜 키스하면 안 돼?”
아케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렌의 이마를 콩! 하고 때렸다. 끝까지 무시하지는 못했으니, 아케치가 진 셈이었다.
고백 17일째
“그런데 아케치는 매번 시간을 내주네. 사실 한가해?”
한가로운 대낮, 르블랑은 오늘도 마찬가지로 손님이 없었다. 항상 아르바이트를 하던 점원 한 명과, 그런 점원 맞은편에 앉은 손님 한 명. 입에 포크를 문 채로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묻는 모습은, 솔직히 귀엽기는 했다.
그거랑 별개로 애써 시간을 짜내서라도 만나주고 있는 사람한테 대고 무슨 소리인가, 이건. 아케치는 표정을 찡그린 뒤에 차가운 어투로 답했다.
“너 때문에 뒤로 밀어둔 일이 산더미 같은데, 나 돌아가도 될까?”
아케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렌은 우선 아케치의 어깨를 꾹 눌러 다시 자리에 앉혔다. 오늘은 친히 오는 길에 사달라고 부탁한 팬케이크까지 줄 서서 사 들고 왔건만.
렌에게 신경 쓰는 시간만 없었어도, 아케치의 삶은 빠르고 편했을 것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 모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렌은 무척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아케치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바라봐? 아케치가 턱을 괴고 대놓고 불만이라는 눈치를 주었다. 아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렌은 잠깐 앓는 소리를 내더니 설마 해서 물어보는 건데, 라는 말을 꼭 덧붙여 아케치를 짜증 나게 했다. 정말로 나 거절하려고 시간을 내고 있는 거야? 지금?
“아케치, 그 정도 정성이면 그냥 사귀는 편이 좋,”
렌의 말은 아케치가 억지로 입에 욱여넣은 쿠키 탓에 막혔다. 저 쓸모없는 소리를 막겠다고 내 팬케이크를 나눠주는 것은 내키지 않았으니까. 아케치는 흥, 하며 다시 커피잔에 손을 옮겼다. 역시 렌만 아니었어도 몇 배는 한가한 일상이었을 터다.
렌은 쿠키를 우물거리며 아케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것도 먹여준 것에 포함 되는지 고민하는 것 같은데. 아케치는 뻔한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르블랑에서 외부 음식 먹어도 되는 거야?”
“음… 안 들키면 괜찮아.”
알바치고는 뻔뻔한 대답이었다. 오늘은 아케치가 사 들고 오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렌이 준비한 것들이라 아케치에게는 찔릴 구석도 없었다. 마스터에게 혼나도 난 몰라. 괜찮아, 소지로 씨라면 용서해주실 거니까.
“다음에는 저녁 먹으러 올래?”
“저녁에는 시간 없어.”
“나랑 결혼하면 매일 저녁으로──”
“나 밥 안 먹어.”
“지금까지 무성의한 변명을 이것저것 봐왔지만… 오늘보다 대충인 건 없었던 것 같아.”
“하핫.”
변명… 맞지? 렌이 불안하다는 듯이 되물어도, 아케치가 대답하는 일은 없었다.
고백 18일째
“나 길거리 캐스팅 당했어.”
“흐음, 괴도에 이어 연예인이라도 해보게?”
아케치는 흥미 없다는 듯이 흘려듣듯 답했다. 시선도 주지 않자 렌은 주머니에서 꺼낸 명함으로 아케치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아니, 모델이야.”
계속 무시하자, 렌은 계속 쿡 쿡 쿡 찔러댔다. 결국 짜증을 못이긴 아케치가 확 고개를 돌려 바라보면, 렌은 이때다 싶어 눈앞에 명함을 챡 내밀었다. 결국 아케치는 표정을 구기며 명함을 바라보았다.
디자인이라곤 뭣도 없는 조잡한 명함이었다. 이름하고, 무슨 주소하고, 전화번호하고. 사무소도 아니고 개인용인 것 같았다.
아케치는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솔직히 렌의 외모는 꽤 먹히는 타입이었다. 잘만 다듬으면 미인계도 성공할지 모르는 쪽. 실제로, 변장이랍시고 꾸몄던 것도 꽤 어울렸다. 진심을 다한 차림에 웃기기는 해도… 누군가에게 ‘변장’이라는 것이 들킬 정도는 아닌, 그 정도로 예쁜 사람. 최근에는 인생에 고난이 조금 없어져 표정도 꽤 밝아졌다.
…아니. 사실, 무표정튼 조금 사나워 보여도 웃으면 또 그건 그것대로 귀여웠다.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판단으로.
덧붙여 집안일도 척척 잘하며, 뭐든 배우는 게 빠르고 똑똑하며, 머리 회전도 빠른 타입이었다. 결론이 무엇이냐면, 아케치는 슬슬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생이 조금 굴곡이 심한 것 말고는 흠잡을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나 아니면 누가 얘를 데려가겠어? 에서, 내가 얘를 데려가도 되나? 같은 느낌으로. 아케치 본인에게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고, 이것도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정을 제하고 세간적인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의 이야기다.
아케치가 혼자 얼굴을 찡그리고 있자 렌은 히죽 웃었다. 그 웃음이 기대하는 말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아케치는 결국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이거 연락할 거야?”
만약 진짜로 하면 상대를 찾아서 처리해버릴 생각이었다. 모델이랍시고 끌려가는 건 그 자식 하나로도 충분했다.
이 이상 내어주기에는 렌의 몸은 하나 뿐이었고, 그 전에 이런 수상한 연락에 따라갈 정도로 멍청하고 쉬운 녀석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연락처는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외울 수 있어. 사실 집 주소만 기억해도 나머지 정보는 털 수 있는 것이 탐정이다. 아케치의 표정이 점점 지옥으로 치닫자, 렌은 웃으면서 아케치의 손에 들린 명암을 빼앗았다.
“아니, 당연히 거절하고 왔어.”
그래도 그 정도 분별 능력은 있는 모양이네. 아케치는 내심 안심하고서는 순순히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명함을 바라보았다. 거절했는데 끈질기게 명함을 들이밀기에 어쩔 수 없이 그것만 받아주고 왔다는 것 같다.
그래, 설령 더 유명해지고 와도 이 녀석이 그런 부탁을 받을 리가 없다. 눈에 띄는 것이 좋았다면 그 말대로 진작 연예인이라도 했겠지.
“그래도 아는 사람이 부탁하면 그건 거절 안 할 거야.”
유스케라던가. 그렇게 덧붙여진 이름이 아케치는 얼굴을 한 번 찡그렸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 정도는 네가 알아서 하겠지.”
“아케치가 질투할 것 같아서 미리 말해두는 거야.”
뻔뻔한 말에 기가 찬 아케치는 허, 하며 말을 내뱉었다. 또 헛소리야? 렌은 웃음기 가득한 헛소리로 내내 무서운 표정을 지었으면서. 라고 답했다.
확실히 좀 짜증 나기는 했지만, 표정으로 티 날 정도로 미숙한 인간은 아니었다. 아케치는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질투를 왜 해? 만약 사귀었어도 안 할 거야.”
“난 아케치가 표지로 나온 호 아직도 가지고 있어.”
뭐? 아케치가 되묻자, 렌은 그러니까- 잡지 이야기야. 라고 답했다. 그게 궁금해서 물어봤겠냐? 아케치는 서둘러 기억을 되짚었다.
탐정 왕자 시절에 개인적으로 찍은 것도 몇 있었고, 전문적인 잡지에는 퍼포먼스 식으로 찍은 것도 꽤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팔지 않아도 당시에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대체 언제적—”
“아주 옛날. 음, 네가 별로 안 좋아하는 건 알지만 웃는 모습이 보고 싶을 때마다”
렌이 그리운 듯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하면 아케치는 괜히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실물이 있는데 굳이 잡지를 볼 필요도 없을 뿐더러, 그때가 마음에 더 들었냐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아케치와 렌에게 있어서 그 시절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최악의 시간이었다. 서로를 속이고 기만하기 위한 대화를 몇 번이고 나눴던가. 그러니까, 아케치는 이왕이면 그때의 일은 조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탐정 왕자는 전부 지어낸 껍데기였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사랑했고, 아케치는 거짓된 찬사에 앉아있었다.
지금은 그 모든 것들에서 내려오기는 했지만. 어느 쪽이든, 그렇게 화내기에는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아케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고백 19일째
렌이 창문 앞에 달라붙어 이상한 짓을 시작한 지 벌써 3분이 지났다. 관심을 주면 괜히 더 시끄럽게 나대니까, 아케치는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우선은 제집 창문이라 마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사고 치는 것만큼은 막기 위해서 감시하고 있었다.
…마치 물가에 내놓은 애를 지켜보는 것 같군. 아케치가 빤히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아는지, 렌은 손을 더 서둘러 움직였다.
“됐다! 아케치 이거 봐봐.”
“뭐야? 테루테루보즈?”
“내일 비가 오면 안 되니까, 부적 삼아서.”
굳이 즐거운 일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일 강수량은 95%였다. 비가 반드시 온다고 하는 편이 정확했다. 벌써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으니까. 렌은 자신이 만든 테루테루보즈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 옆모습은, 어둡고 눅눅해 보이는 창문 너머에 대비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알아.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휴지를 꽁꽁 묶은 뒤에, 붉은 리본으로 묶어 머리를 만든 렌은 웃으면서 아케치에게 그것을 들이밀었다. 아케치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뒤로 살짝 숙여 그것을 피했다.
얼굴을 그리려는지 렌은 한 손으로 테루테루보즈를 붙잡으며 유성 매직을 들었다. 입으로 뚜껑을 물어 펜을 연 뒤에, 집중해서 하얀 테루테루 보즈에 검은 선들을 그었다. 제일 작은 건 고양이였고, 또 하나는 안경을 썼고, 남은 하나는 찡그리고 있는 얼굴.
“야. 설마 그거 나야?”
굳이 물을 필요도 없이 명백하기는 했지만. 렌이 웃으며 펜의 뚜껑을 재빠르게 닫았다. 혹시라도 수정하라고 할까 봐 재빠르게 닫아버린 것이 분명했다. 거기에 더해, 렌은 뻔뻔하게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 탓이야.”
렌은 손을 움직여 창문에 테이프로 줄을 붙였다. 집주인인 아케치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척척 고민 없이 창문을 꾸미고 있었다.
너 저번에 그거 다이어리 꾸민다고 산 마스킹 테이프 아냐? 아케치가 조용히 태클을 걸자 렌이 답했다. 다이어리는 쓰고 있어! 결국 쓰지도 않을 건데 샀단 소리군. 다이어리는 제 할 일을 정리하는데 쓰는 녀석이니, 솔직히 꾸밀 것 같지 않기는 했다.
렌은 고양이 옆에 안경을 쓴 것을 거려다가, 잠깐 옆에 내려두었던 찡그린 얼굴의 테루테루보즈를 잡았다. 양손에 쥔 인형을 번갈아본 렌이 말했다.
“이거 뽀뽀시키면 언젠가 이루어질까?”
“……뭐야, 그게. 저주 인형?”
평범하게 호러거든. 아케치는 얼굴을 찡그리고서 렌을 바라보았다. 렌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아케치의 표정이 풀릴 것 같지 않자 테루테루보즈로 얼굴을 가렸다.
그것을 살짝 옆으로 치우면, 자신이 그린 표정이랑 아주 똑같은 얼굴로 찡그리고 있는 아케치의 얼굴이 있었다. 그 사실이, 어째서인지 몹시 웃겨 렌은 소리높여 웃음소리를 냈다. 아하하!! 그 소리에 아케치가 빼액 소리 지르며 말했다. 뭐가 웃겨!! 그런 물음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답하며, 렌은 다음에는 꼭 화내는 얼굴도 그려야겠단 생각을 했다.
고백 20일째
끝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예보에 맞춰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렌은 우산을 쓰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아케치가 우산이 없을 리는 없고. 알고는 있었지만 가방에는 모르가나 대신 접이식 우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만약 우산이 없으면 택시라도 불러 돌아갈 것 같지만. 렌은 아케치의 퇴근 시간에 딱 맞춰 계단 앞에서 기다렸다.
아케치는 한 손에 우산을, 남은 한 손으로는 문을 밀며 밖으로 나왔다. 렌은 문 바로 옆에서 쭈그려 앉은 채로 아케치를 올려다보았다.
비 오는 날에 고양이도 아니고 사람이 버려져 있네. 아케치는 렌의 머리에 살짝 손을 올리고서 물었다.
“너 누구 기다려?”
무슨 약속이라도 있나. 이 근처에는 확실히 가게나 건물이 많아 약속지로 못 잡을 것까지는 없었다. 굳이 사무소 앞에서 기다렸다고 하면 아무래도 자신을 기다렸다고 생각해야 맞겠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이제 기다릴 필요가 없어졌나 봐……”
아련한 듯한 눈빛에 아케치가 어이없다는 눈빛을 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내 우산을 가져왔다던가 그러지는 않지? 그 말에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렌은 제 가방을 꽈악 쥐었다. 비 오는 날이고 하니 모르가나는 안 온 모양이네. 아케치는 뭐라 하면 좋을지, 이 멍청이를 어쩌면 좋지 고민하다가 결국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우산을 안 챙겼겠어?”
“혹시 모르잖아.”
그 혹시가 없으니까 나 아니야? 아케치는 더한 헛소리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은지 조용히 자신의 검은 우산을 폈다.
“그리고, 아케치가 우산을 빌려 가면 다시 한번 볼 구실도 생기고.”
렌이 후후, 하고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것 아니더라도 평소에 충분히, 계속 부르고 있는 주제에. 이제 와서 구실 따위를 신경 쓰다니. 뻔뻔한 말이었지만 아케치는 결국 그 열정과 노력, 수작질에 한 번 져주기로 했다.
방금 핀 우산을 다시 접어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렌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우산을 꺼냈다. 지극히 평범한, 1인용의 투명 우산이었다.
“야, 내 우산은?”
“무슨 소리야? 러브 이벤트에는 우산 하나면 충분하잖아.”
“지금 나한테 줄 우산도 안 챙겼으면서 데리러 온 거야? 너 우산 없이 돌아갈래?”
그러다가 감기 걸리면 책임져주는 거야? 렌이 자신의 우산을 피며 아케치한테 슬쩍 씌워줬다. 네가 설령 뭐라고 말해도 우산 한 개로는 안 돌아가. 아케치가 화내며 말하자 렌은 들은 척도 안 하고 가자며 턱짓했다. 이런 게 다 낭만이고 추억이잖아, 아케치. 틀린 말은 아니지만 청춘도 다 지났는데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이걸 져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아케치는 결국 뛰쳐나가기 직전인 렌을 보고서 다급해서 같이 가자며 붙잡았다. 둘은 결국 성인 남성 둘이서 1인용 우산으로 사이좋게 르블랑으로 돌아갔다. 각각 오른쪽, 왼쪽 어깨가 비에 흠뻑 젖어있었다. 바로 앞에 세탁소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미친 짓이었다.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은 아케치와 달리 렌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르블랑에 돌아온 렌은 가방 안에 들어있던 예비우산을 스윽 꺼냈다.
“…난 우리한테 우산이 총합 세 개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렌.”
“응. 나는 너랑 가까이 붙을 수 있어서 좋았어.”
“하아, 너랑 절대로 연애 같은 거 안 해……”
고백 21일째
아케치.
…왜.
아케치는 나를 좋아하지?
아니.
거짓말쟁이. …있잖아, 아케치. 나는 행복해지고 싶어.
…정말 행복하고 싶은 거라면, 나랑은 처음부터 안 엮였어야 맞잖아.
난 너와 만나서 불행해졌다고 생각한 적 없어.
…….
그리고, 내 행복에는 네가 행복한 것도 포함 돼.
헛소리를—
아케치. 나는 행복해지고 싶어. 만약 눈을 감게 된다면… 아아, 행복한 삶이었구나ー 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
…혼자서도 할 수 있잖아, 너는.
언젠가 아케치의 곁에서 눈을 감고 싶어. 너와…… 아니. 그 옆자리를 나에게 주지 않을래?
……….
아케치.
…응.
…그런 표정을 하게 만들고 싶었단 것은 아닌데. 역시 죽는 날의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 미안해.
……평생, 평생 다락방에나 박혀있어, 멍청아.
하핫, 알겠어. 신혼집은 다락방 있는 쪽을 찾을게.
고백 22일째
“아케치, 미라클 모닝! 잘 잤어?”
“아침 5시 30분에 누구 덕분에 깨가지고 별로 잔 것 같지는 않은데.”
아케치는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핸드폰을 쥔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가고, 아무리 짜증 난 목소리로 말해도 상대는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목소리가 심하게 잠겼다. 방금 일어났으니 당연하지만.
급한 연락인 줄 알고 일어났더만, 오늘도 쓸모없는 내용일 것이 분명했다. 대충 이른 아침부터 뻥 차이고 싶다는 걸로 이해하면 되나. 아케치가 졸린 눈을 꾹 누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래? 모닝콜에 너무 감사할 필요는 없어. 지금 집 앞인데 좀 열어줄래?”
“……뭐?!”
모닝콜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잠을 깨우는 말이었다. 아케치는 깜짝 놀라 이불을 확 들춰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버튼을 눌러 카메라로 전환하면 정말로 문 앞에 렌이 서 있었다. 이게 정말 미쳐버렸나. 예의를 말아먹었나? 고백이 아니라 고소장을 받고 싶은 건가?
고민해봤자 이미 온 것은 온 것이었다. 이 행동력에는 감탄하게 될 정도다. 솔직히 정신이 나간 녀석인 것은 옛날부터 싫을 정도로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까지 미쳐버릴 줄은. 아케치는 결국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가 고민 끝에 문을 열어주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서 널어두었던 수건을 채가듯 빼내 욕실로 우당탕 들어갔다.
넘어지지는 않았으니 세이프. 집에 들어온 렌은 실례하겠습니다~ 라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아케치는 우선 욕실 문을 잠가버린 뒤에 찬물에 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갑작스러운 스케줄이 있었어도 이것보다 급했던 적이 없었다. 아케치는 샴푸를 짜다가 내가 정말 왜 문을 열어줬나 싶었지만, 늘상 하던 고민이었기에 그냥 손이나 바삐 움직이기로 했다.
아케치~ 어디 있어? 렌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물소리가 나는 욕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손님을 두고 씻고 있는 건가 싶지만, 갑자기 쳐들어온 것은 자신이니 기다려주기로 했다. 씻는 동안은 못 나올 테니까, 내 세상인 것이나 마찬가지고.
아케치는 렌이 만약 사고라도 칠까 간단하게 치장하고 욕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평소에 입는 것보다는 편한 옷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노력한 것이다. 애초에 아케치의 집에 과한 무늬나 컬러의 옷은 존재하지도 않지만.
아케치가 나와서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제 방문 앞에 붙어있던 렌이었다. 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전부였다. 그야말로 전부! 의뢰의 문제가 아니라, 렌이 준 것들을 소중하게도 차곡차곡 쌓아둔 모습을 들키면 웃을 것이 눈에 선했다. 아케치는 성큼성큼 다가가 렌의 목덜미를 잡고 제 쪽으로 꽈악 끌어당겼다.
“이게 들여보내 줬더니 문이나 따고 있어?”
“잠긴 문을 열려고 하는 건 괴도의 본능이야.”
렌은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지만 순순히 끌려 문에서 떨어졌다. 손에 들고 있던 머리핀을 주머니에 넣은 후에 아케치를 올려다보았다.
흠, 그 사이에 무슨 마법이라도 쓴 거야? 생각보다 빨리 나왔네. 맹세컨대 아케치는 렌을 쫓아내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무섭고 고요한 분노를 알았는지, 렌은 눈치를 보듯 너는 안 꾸며도 예쁘다는 말을 덧붙였다.
…효과는 굉장히 미미했지만.
아케치는 냉장고를 열어 음료수를 꺼냈다. 찻잎이야 있지만 영 번거롭다. 아케치는 그냥 주스로 참으라는 의미를 담아 렌의 앞에 컵을 두고 콸콸 따라 한 잔 가득 선물했다. 렌도 그 뜻을 알았는지 어쩐 일로 차가 아니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아케치, 오늘 향기 좋네- 라는 쓸모없는 말로 더 화나게 하긴 했지만.
“그래서? 오늘은 또 뭐야?”
“음~ 가구 좀 둘러볼까 해서. 아케치 취향도 확인해두고 싶고.”
가구를 보고 싶으면 가구점에나 갈 것이지 왜 우리 집으로 오고 난리야? 아케치가 쏘아붙이며 말하자 렌은 어필이라도 하듯 윙크를 날렸다.
그럴 때마다 아케치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가 오늘 밤에 못 자면 분명 너 때문이야…. 아침부터의 난장판에 지친 듯이 말하는 아케치를 보며, 렌은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더니 내가 아케치를 밤새 안 재운 거야!?라고 말했다. 아케치가 냉장고를 이미 닫아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분명 음료수로 렌을 때렸을 테니까.
아무튼 렌이 가구를 보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면, 놀라우리만큼 살풍경스러운 장소였다. 열리지 않는 아케치의 방을 제해두면 정말로 기본적인 가구밖에 없는 집이었다.
참고가 될 리가 없네.
“그냥 내 마음대로 배치할게, 가구는. 조금 복잡해질지도 모르겠는데….”
소파는 흰색이었던가? 렌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해 아케치는 순간 아니, 검은색- 이라고 대답할 뻔했다.
그게 저번의 심리 테스트 내용이었다는 것은 둘째치고, 왜 남의 집에 와서 가구를 보는 중인가? 아케치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답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제 머리가 미웠다. 뭐기는 뭐야, 이 멍청이가 나랑 같이 살 집이라도 구하고 있는가 보지. 무의미한 자문자답을 그만둔 아케치는 잔뜩 내려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는 거야? 누가 너랑 같이 산데?”
그런 매서운 목소리에도 전혀 기죽지 않은 렌이 웃으면서 뻔뻔하게 답했다.
“미래의 아케치가 같이 살아준다고 했어. 그런 게 있더라.”
“하아…… 아침부터 너 때문에 피곤해 쓰러지겠다. 나가.”
고백 23일째
“아케치, 선물.”
렌은 검은색을 바탕으로 붉은 체크무늬가 그려진 보자기에 감싸진 물체를 내밀며 말했다. 이게 뭔데? 아케치가 수상쩍게 바라보며 우선 그것을 받아들였다.
“도시락이야. 점심용.”
“갑자기 무슨 도시락이야? 나 점심 안 먹거든?”
아케치가 다시 돌려주려고 내밀자 렌은 있는 힘껏 밀어 도시락을 다시 아케치의 품으로 돌려주었다. 그러니까 싸 왔지! 라며 날뛰기 시작해, 결국 아케치는 5분간 점심을 챙겨야 하는 틀에 박힌 설교를 들었어야 했다.
그런 소리를 듣는다고 챙겼으면, 진작 건강 관리를 위해 세 끼 꼬박 챙겨 먹고 다니는 사람이었을 거다.
…그렇다고 아케치가 건강 관리를 안 하는 것은 아니고, 아무튼 괜찮은 선에서는 챙기고 있다. 그러니 렌이 챙겨줄 필요는 없었다.
렌은 만약이라도 아케치가 돌려줄까 봐 품에 안겨준 채로 고백도 잊고 떠나버렸다. 아니, 일부러인가? 아케치는 홀로 남겨져 도시락을 들고 있었다. 안에 무언가 수작질을 해뒀을 것 같은데. 그래도 받은 김에 점심에 열어야지…….
그렇게, 아케치는 점심이 되어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솔직하게, 예상한 것은 하트투성이 도시락이었다. 내용이 붉은색 투성이만 아니라면 다행이지. 고백을 안 하고 도망갔다는 것은 도시락을 고백으로 사용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어느 정도 예상 내 범위에서 도시락은 하트투성이였다. 달걀말이도 하트, 밥에 올려진 완두콩도 하트. 아케치는 침착하게 도시락 통을 닫은 뒤에, 서류 더미를 얹어 도시락을 다시 봉인시켜버렸다. 음식가지고 장난질을 치네. 어차피 점심은 먹지 않는 편이라 도시락을 그대로 가져다 버려도 상관 없었다. 정 배고프면 근처 빵집에서 한두 개 사 오면 되는 거고.
하지만 이 정도로 될 줄을 알고 있었고, 그래, 알고도 넘어가 준 것이다. 아케치는 결국 서류를 공손히 치워 옆으로 밀어두고 도시락을 다시 열 수 밖에 없었다. 하트로 된 콩을 치워버리고 싶은데, 편식하냐고 놀릴 미래가 너무 선해서 어쩔 수 없이 사랑이 담긴 도시락을 먹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렌은 요리 실력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니 맛에서는 걱정한 적이 없었다.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라도, 아케치 입맛에 딱 맞춰 요리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하지만, 도시락은 원래 맛이 중요하진 않다. 그래, 어느 쪽이냐면… 정성의 문제. 아케치는 비어버린 도시락통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내가 어쩌다가 남이 손수 만들어준 도시락을 먹고 있을까. 받아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탐정 왕자라는 껍데기는 매력적이었고, 팬들이 먹어달라며 준 것은 있었다. 그 무엇도 입에 대지 않고 전부 쓰레기통에 버렸지만.
그것은 단순 위험도 이전에— 그저, 나를 위하지 않는 도시락이기 때문이었다.
…오직 나를, 위한, 도시락.
아케치는 복잡한 기분이 되어 도시락통을 닫아버렸다. 타이밍 좋게 울린 핸드폰에는 [내 사랑이 담긴 도시락 어땠어?]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아케치는 평소보다는 조금 더 솔직하게 사 먹는 것보다는 덜 귀찮고 나쁘지 않았다는 대답을 했다.
고백 24일째
“나, 아케치 입에서 ‘좋아’라는 단어가 듣고 싶어.”
렌이 뜬금없이 꺼낸 말에 아케치가 고개를 들었다. 맞은 편에 앉은 렌은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또 혼자 무슨 허튼 생각을 했길래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난 헛소리를 하는 거지? 렌의 뜬금없는 소리는 충분히 들어봤지만, 최근에는 점점 심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를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괘씸하지만, 방치하기 위해서 책을 읽은 것도 나니까 어쩔 수 없지.
“네가 무슨… 좋은 짓을 해야 좋다고 해주지.”
매번 사고만 치고. 매번은 아니지! 매번이거든. 의미 없는 대화가 몇 번이고 더 지나간 후에서야 렌은 한숨을 쉬며 책상에 엎어졌다.
그리고서 누운 그대로 살짝 시선을 움직여 아케치를 올려다보았다. 렌의 눈빛에 혹시라도 마음이 약해질까, 아케치는 빠르게 렌의 얼굴을 책으로 가려버렸다.
그냥 도망가는 게 낫겠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면 쫓아올 거라 생각했건만 렌은 그대로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케치는 결국 다시 가까이 다가가 렌을 쿡쿡 찔러보았나.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면 갑자기 돌변해 끌어안기라도 할 거 같았는데. 아케치는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운 없으면 들어가 쉬지 그래? 아케치는 책을 바로 옆에 내려둔 후에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야.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옆의 의자를 끌어 뺀 후에, 아케치는 곁에 다가가 렌의 등에 손을 올렸다.
“……너 진짜 무슨 일 있었어?”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케치가 속상한 듯한 표정을 짓자 렌은 고개를 빼꼼 들었다. 아케치 본인에게는 분명 자각이 없겠지만, 누가 봐도 걱정하는 듯한 사람이었다. 렌은 그런 아케치의 인간적인, 평범한 어린아이 같은 부분을 마주할 때마다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우물이었다.
물을 길어야지, 퍼 올려야지, 그렇게 바가지를 던지면 끝없이 추락해 저 아득한 곳에서 첨벙, 하고 물이 있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계속 줄을 당기다 보면 언젠가는 확실히 물을 뜰 수 있는 우물이었다.
하지만 아케치의 연약한 면은, 보이는 표면만을 떠오르게 했다. 물은 실제로 거기에 없고, 내가 들어가면 다시는 올라올 수 없는 높이에 있지만 마치 가까운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수면이 전부 환상이고, 그 안으로 물에 닿기 위해서 손을 뻗는다면 고꾸라져 깊은 우물 안으로 추락해버릴 것 같았다……
“아케치가 좋아한다고 해준다면 전부 괜찮아질 것 같은데….”
“그래… 네 그 어디서 기어 나온 지 모를 의문의 자신감은 존경스럽다고 생각해…….”
걱정해서 손해 본 듯한 기분이 들어, 아케치는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꽤나 몰입한 듯 책을 바라보는 눈빛은 여타 평범한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렌은 아케치의 그런 옆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있잖아, 아케치. 나는 지금도 우물에 뛰어드는 미친 짓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어. 너라면 분명 미쳤냐며 들어오지 말라고 하겠지만, 나는, 너의 그 표면에 속지 않고도, 얼마나 깊은지도 물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도 모르면서, 단지 뛰어들고 싶다고 생각해.
렌은 결국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끝내 답을 낼 수 없는 것은, 렌이 두려워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고백 25일째
렌은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바라보는 사람, 가방을 들고 있는 사람,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 사이좋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가족. 그 모두를 인식하고도 아케치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것은 분명 잃고 싶지 않아서임이 분명했다. 인파를 멀리 내려다보아도 놓치고 싶지 않은 모습. 렌의 걸음이 멈추자 아케치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 곳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멈춰선 모습이 상당히 눈에 띄었다. 아니면, 아케치의 눈에 렌밖에 보이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끄러운 차의 경적, 사람들의 대화하는 소리, 최근 유행이 어떻네 뭐가 소란이네 하는 소리들. 그 거리의 중심에, 렌이 서 있었다. 그 얼굴은 아주 먼 옛날 거짓투성이의 사이에 본 적 있는 것이었다. 지금이라면 알 수 있었다. 어두워도, 자신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아 애써 웃는 얼굴.
“있잖아, 아케치.”
그렇게 이름을 부를 때면 항상 무슨 생각을 했을까. 르블랑에 혼자 남겨져, 그 누구도 나를 찾지 않아, 갈 곳을 잃어버린 나의 이름을 부른 너는. 아케치는 숨이 멎는 것만 같았다.
하늘은 우중충한 회색빛이었고, 일렁이는 듯한 빛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한 번도 내 앞에서 사라진 적 없는 너였지만, 지금은, 마치 헤어질 것 같은 공기가 가득했다. 내가 떠나도, 네가 떠나도, 이 관계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두려웠다.
아케치는 남아있을 생각은 없었지만 도망갈 의지도 잃었다. 처형대에 목을 내밀고 누군가가 줄을 끊어주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매일. 그 어떤 사람도 처형식을 지켜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회색 후드를 쓴 사람이 죽음을 기다리는 아케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렌이었다. 줄을 끊을 생각도, 그렇다고 그 곳에서 아케치를 빼낼 생각도 없는 렌이. 그저 오지도 않을 처형식을 기다리는 아케치를 두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생각한 건데. 입술이 마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너랑 함께 추억을 쌓은 이 거리에서 살아가고 싶지만.
르블랑에 가면 반겨주는 마스터가 있었다. 자주 가는 카페의 점원도 슬슬 둘을 알아보고 있었다. 게임을 하러 가면 가끔 보이는 소년이 인사했고, 매일 한 공원에서 강아지의 산책을 시키는 사람도, 자주 가는 마트의 3번 계산대에 서 있는 사람도. 이제는 많은 사람이 아케치와 렌을 기억하고 있었다.
가끔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 같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어느 샌가 사람들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었기 때문에, 당연하다. 횡단보도에 중간에 서 있었다면 차라리 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것을.
이제는 인파를 거꾸로 등진 아케치를, 렌은 괴로울 정도로 상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걸음을 완전히 멈춘 아케치가 손을 뻗었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말고 와, 렌.”
아케치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것 밖에 없었다. 너조차도 이 거리에서 도망가지 않는데 내가 감히 떠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가지는 않을 것이다. 렌은 설령 무슨 끝이 있더라도 두 눈으로 모든 진실을 지켜보겠다는 계약을 맺었으니.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마음을 가지지도 못했다. 이 거리는 아케치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썩어가는 밧줄은, 분명 언젠가 끊어져 그 칼날로 죄인의 목을 베어버리겠지.
…하지만 그것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떨어질지 아닐지도 모르는 처형의 때를, 렌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아케치가 택한 속죄이며,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너는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렌은 결국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포장했다. 하지만 아케치,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그때라면 나는 그 아래에 서서 지켜보도록 할게. 그것이 바로 너를 사랑하는 나야.
아아, 괴로워 심장이 멎어버릴 정도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렌은 눈을 살포시 감으며 아케치가 뻗은 손을 붙잡았다. 이대로 도망가자고 하면 넌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네 속죄가 끝나기를 바라지도 않아. 그저, 네가 바라는 대로. 그 어떠한 시간이 흘러가더라도 네가 바라는 대로.
“다 끝나고 난 뒤에는, 함께 여행이라도 갈까?”
“너랑 여행 같은 건 안 가.”
“에이, 친구끼리도 여행은 가잖아. 그래도 신혼여행이면 좋겠네. 역시 평화로운 남부의 섬?”
“너랑 안 간다고 말했잖아. 친구랑도 여행 안 가.”
“나 말고 친구는 있어?”
“야.”
응, 나는 그렇게 네가 바라는 처형의 종이 울리기를 기다리고 있을게. 혹여나 피를 뒤집어쓴다고 해도 눈을 돌리지 않을 테니까.
고백 26일째
아케치는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그 ‘최악으로 유명한’ 망작 영화를 보러. 어쩌다가 이렇게 됐느냐고 하면, 렌이 우연히 표를 얻게 되었다고 했다.
길거리에서 추첨을 돌렸는데 이 티켓을 받았다나 뭐라나. 누가 봐도 쓰레기를 떠넘긴 듯한 기분이지만, 이왕 받았으니 얼마나 망했는지 궁금하다며 영화관을 찾은 것이었다.
아케치가 반대하고 렌이 조금 지각하는 바람에 영화에 25분 정도 늦기는 했지만, 관 내는 이미 텅 비어있었다. 드문드문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기는 해도. 용케 안 내려갔는 감상밖에 들지 않았다.
영화의 내용은 25분밖에 지나지 않은 것 치고는, 상당히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그 짧은 새에 급전개를 맞이해 클라이맥스를 맞이한 듯한 싸움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물론, 내용도 이해되지 않았다. 캐릭터들의 감정선도 엉망이었다. 갑자기 왜 실성하고, 분노하고, 끝내 울음을 터트리는 건가. 아케치는 나가고 싶었지만 곁에 앉은 렌은 꽤 집중하고 보고 있기에 무어라 말할 수도 없었다. 혼자 나간다고 하기에도 좀 그렇고. 아케치가 재미없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 주변을 둘러보면, 한 명은 잠든 후였고 남은 한 명은 보다 버티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남이 이렇게까지 부럽기는 또 처음이었다.
하아. 아케치는 한 번 눈을 비비고서는 우선 버텨보기로 했다. 싸웠다가, 또 진정했다가, B급 호러가 이것보다는 재미있을 것 같았다. 토마토가 세계를 지배하면 그건 재미있기라도 하지 않은가? 어느새 영화는 극적인 장면에 다다르고 있었다.
여주인공은 홀로 아무도 없이, 전부 죽어버린 밤거리를 비틀거리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 낡아빠진 가로등 앞에 넘어졌다. 희미한 빛이 주인공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울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영화를 찍으면서 노래 연습도 안 했단 말인가! 아케치는 빈말로도 잘 불렀다고는 할 수 없는 노래에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다. 쟨 진짜 이것도 괜찮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면 집중하며 보고 있어서 아케치가 다 죽어가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 너무 늦은 건 알지만 돌아가고 싶어요, 그의 곁으로, 우리가 행복했던 그 시절로, 옛날의 우리들로──.
주인공은 끝내 지나온 일들을 후회하며 노래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슬픔을 토로했다. 아케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 사람의 인생은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이해하며 넘어가려는 순간, 영화관 안을 꽉 매울 정도로 시끄러운 총성이 들렸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여주인공은 쓰러져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되었다. 영화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을 맞이했다. 총성에 깬 듯한 관객은 욕을 내뱉으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뭐 이런… 이런 영화가 다 있어? 아케치는 혼란스러워져 제 미간을 꾹 눌렀다. 잘도 이런 걸 냈구나. 아무도 안 말렸단 말이지?
“슬픈 영화였네…….”
“너 대체 평소에 뭘 보고 사는 거야!?”
아케치가 있는 힘껏 태클을 걸었다. 순간 제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입을 막아보았지만, 애초에 주변을 둘러봐도 관객이라고는 자신과 렌 뿐이었다. 하긴 누가 이걸 끝까지 보고, 여운에 젖어있을 수 있을까.
“어라, 꽤 슬프지 않았어? 역시 아케치는 문학을 모른다니까….”
아케치는 그 말에 어이가 없어져서 제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저게 지금 나보다 책을 안 읽으면서 문학을 운운하는 건가? 영화 보고 미친 거 아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 이런 최악인 영화는 빨리 잊기나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움직였다. 어느새 끝나있는 크레딧의 끝에는 여주인공이 다시 비치고 있었다. 총을 맞아놓고도 눈을 희번덕하게 뜨고 있는 여자는 계속 중얼거렸다.
‘아아… 돌아가고 싶어… 내가 틀리지 않았던 시간으로… 그에게 사랑한다고…….’
아케치는 결국 그 말의 끝을 듣지 않고서 영화관을 빠져나왔다.
마지막까지 불쾌하기만 한 영화였다.
고백 27일째
아케치에게서 먼저 렌에게 용건이 있는 날은, 자주는 아니었지만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뭔가 일이 있어도 권유는 언제나 렌이 먼저였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연락도 없는데, 잠깐 물어볼 것이 있어서 르블랑에 찾아가게 되었다.
조용히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한가한 듯이 꼬리를 흔들던 모르가나는 아케치를 보고서 눈을 깜빡였다. 렌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모르가나는 다락방이라고 답했다.
어차피 할 질문은 뻔하다 이건가. 성실하게 답해주긴 했으니, 아케치는 순순히 고맙다고 인사하며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잠들어있는 렌이 있었다. 굳이 침대를 내버려 두고 바닥에서 잘 이유는 모르겠지만. 얘도 참 기묘하게 자는군. 아케치는 그리 생각하며 깨워 침대로 가라는 말을 하려다, 닿기 직전에 시야에 들어온 구겨진 종이 탓에 손을 멈추었다.
아케치는 입을 꾹 다물고서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혀 정리가 안 된 듯한 책상은 위부터 바닥까지 종이 투성이였다. 전부 아케치에게 쓰려다가 실패한 듯이, 쓰레기통에도 구겨진 편지 투성이었다. 무슨 말을, 또 그렇게 하고 싶었을까. 아케치는 책상을 내려다보며 하나쯤은 사라져도 모를 것 같아, 제일 길게 쓰여있는 편지를 접어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 후에서야 렌의 어깨를 살짝 토닥거리며 깨웠다. 무거워 보이는 눈꺼풀이 슬쩍 뜨이고, 잿빛 눈은 상대를 인식하기 위해 스르르 움직이고 있었다. 끝내 아케치가 깨운 것을 인식한 듯한 렌은 벌떡 일어나 종이 뭉치들을 확 엎어버렸다.
어차피 쓰던 중인 편지는 아케치의 품에 있었지만, 너무 당황해 깨닫지도 못한 것 같았다. 종이 뭉치 사이에 몸을 눕힌 듯한 렌은 아케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앞으로도 깨워줄 거야?”
엉망진창이었다. 당장 치우라고 하고 싶은데, 밤이라도 샜는지 아직도 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꽤 어눌한 발음이었다. 졸려 죽겠다는 사람을 완전히 깨워버릴 정도로, 아케치는 매정하지 못했다.
상대가 아마미야 렌인 한정이었지만. 결국 렌을 번쩍 들어 올려 침대에 눕힌 아케치는, 렌의 등을 조심스레 토닥였다.
“오늘이 마지막이야.”
그래, 딱 오늘까지만 이럴 거니까. 그런 변명은 상대에게 하는 것인지,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고백 28일째
“아케치, 짜잔. 예약 표!”
“흐음, 어디 놀러 가게?”
말에 반응해 되물은 것 치고는 상당히 관심이 없는 듯한 어투였다. 하지만 렌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진심으로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응, 3일 뒤의 아케치랑.”
당사자는 가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상당히 당돌한 대답이었다. 또 사람들 앞에서 차이고 싶어? 아케치가 표를 보면, 어디 지역 살리기 프로젝트로 진행되는 행사의 입장권이었다. 이런 가족 단위의 이벤트는 아케치의 취향은 아니었다. 무언가 만드는 체험에 달아오를 정도로 어린 아이도 아니고.
그것 말고도 3일 뒤라면 31일째로, 고백의 마지막 날이었다. 굳이 행사장에 갈 것까지 없이 칼같이 거절해버리면 갈 필요도 없다. 그럴 가치도 없었고. 굳이 가게 된다면, 그래, 마음 때문이다. 아케치가 포기하지 못한 마음.
아케치는 손꼽아 기다렸다. 이 끔찍한 시간이 끝나기를.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을, 렌의 앞에서만큼은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눈 딱 감고 받아줘 버리자는 생각을 하면,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받아주면? 그 후에는 어떻게 할 건데? 행복하게 해줄 수 없었다. 그것만큼은 흔들림 없는 진실이었다.
아케치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렌은 티켓으로 아케치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티켓으로 뺨을 얻어맞은 기분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아케치는 성가신 티켓을 채가듯 뺏어간 후에 제 코트 안주머니에 넣어버렸다.
“한가해지면 내가 놀러 가자고 할게.”
“에에~~ 나 이거 꼭 가고 싶었던 행사인데. 꼭 불러?”
남이랑 가면 그거 바람 피우는 거니까. 렌의 말에 아케치가 얼굴을 찡그렸다. 너랑 사귄 기억이 없는데? 너 혼자 꿈이라도 꿨나 본데. 날카로운 말에도 렌은 한결같이 미소 지었다. 3일 뒤에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지, 솔직히 기대하고 있어. 자신감에 찬 태도는, 정말 언제까지고 변할 것 같지가 않았다.
우리가 계속 여기에 남아있을 것 같아서.
아케치는 그것이 두려웠다. 네가 떠나지 않는 이유가 나를 기다리기 위해서일까? 그래서 결국 렌이 떠나기를 바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떠나가는 뒷모습을 붙잡지도 않고 후회하고 싶지는 않았다. 방법은 자신이 나가는 것 뿐이었는데.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손의 이름은 옛날의 자신이었다. 너에게 행복할 자격이 있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기만하고. 너에게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어. 어머니가 그런 심한 말을 했었는지, 전부 자신이 그렇게 믿고 싶은 망상이었는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그만큼 오래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오래된 일조차, 오늘의 아케치를 붙잡고 있었다.
고백 29일째
아케치는 자신의 어중간함을 저주했다. 그만큼 많은 시간이 지난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거리가 바뀌면서도, 여전히 추억의 형태가 남아있었다.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는 끝내 살아가고 있었다. 가고 싶은 장소가 없었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그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렌은 그저 끊임없이 아케치의 손을 이끌었다. 세계의 끝은 이곳이 아니었다. 아케치는 그 아름다움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의 아케치는 렌을 불러냈다. 저번에 하지 못했던 일을 하기 위해서. 목적지를 설명하지 않아도 따라오는 모습은, 무거울 정도의 신뢰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거 데이트 신청이야?”
“당연히 아니지.”
선 만큼은 명확하게 긋고 있었다. 먼저 성큼성큼 나아가는 아케치의 뒤를, 렌은 바쁘게도 쫓아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렌은 따라가고 있었다. 어디 치과라도 데려가는 건 아니지? 불안한 듯한 목소리를 깔끔히 무시한 아케치는 목적지에 도착이라도 한 듯이 멈추어 섰다.
렌은 그 곁에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터널은, 인도로 사용되고 있는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 즐거운 듯한 웃음소리들이. 언젠가 아케치와 함께하기를 바랬던 그 풍경이.
아케치는 렌에게 손을 뻗었다. 잡아달라는 듯이 뻗어진 손을, 렌은 잠깐 바라보다가 크게 고민하지도 않고 붙잡았다. 한 번 잡을 수 없었던 손이었다. 이 끝에 설령 명계가 있더라도 놓을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을 이용하는 것 같아, 아케치는 자신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지고 싶은 것이 있었다. 확신, 어쩌면 저주? 아케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문 상태로 끌고 가듯 렌과 걸어 나갔다. 완전히 관광 용도로 사용되는 듯한 터널은, 벽화가 그려진 둥 꽤 꾸며져 있었다. 아케치는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렌의 손을 꽉 붙잡고 있었다. 설령 무엇이 있어도 놓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낮에 비해 어두운 터널의 끝에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서부터 보이는 터널의 끝에는 바닥에 꽃잎이 가득했다.
아케치. 렌이 이름을 불러도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터널의 끝에 도착해, 완전히 밖으로 빠져나간 후에서야 아케치는 손을 놓았다.
완전히 밖으로 빠져나온 둘의 사이는 다시 멀어져 있었다. 아케치가 두 걸음 정도 물러나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렌은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며 손을 쫙 폈다. 팔랑이며 손 위에 안착한 꽃잎은 빛을 받아 분홍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아, 어쩌면 오늘이야말로 이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렌은 풍경만큼이나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아케치. 한 번 더 이름을 불렀다. 렌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럽고 상냥했다.
“아케치, 좋아해.”
고개를 든 아케치의 얼굴은, 슬프고 괴로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흩날리는 꽃잎들에, 즐거운 듯이 뛰어다니는 사람들에, 바라는 것이 있는 자신에 비해 더더욱 슬픈 얼굴이었다.
무엇이 그렇게까지 너를 슬프게 하는 걸까, 아케치. 렌은 끝내 정답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렇게 아름다운데,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케치의 모습이 너무나도 외로워 보였다.
그래서 속상했다, 괴로웠다. 무엇을 하면 네가 살아가고 싶을 수 있을까. 너의 삶이 되고 싶었다. 렌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으려 했지만, 아케치의 말에 의해 저지당했다.
“나는 네 마음 받아줄 생각 없어, 렌.”
렌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에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알아, 아케치.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괜찮아. 렌은 가까이 다가가 아케치의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을 떼어주었다. 괜찮아, 아케치…. 명확하게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 마음만큼은 전해지기를 바랐다.
아케치가 이 곳을 찾은 이유는, 스스로 생각해도 바보 같았다.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터널을 처음부터 끝까지, 손을 잡고 걸어가면 그 사랑이 영원하다는 이야기.
그런 소문에라도 매달리고 싶었다.
아케치 또한 이 사랑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동화 속 이야기인 것은 알고 있지만, 렌이 자신을 평생 사랑해주기를 원했다. 언젠가 자신의 마음이 정리가 된다면, 오랫동안 가질 수 없었던 각오가 생긴다면. 오지도 않을 것 같은, 평생을 바라지 못했던 날의 끝에 렌을 선택해도 늦지 않았으면 해서. 그것도 안 된다면 차라리 우리 둘 다 평생 사랑하고, 지금 같은 29일이 계속 반복되어, 그저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스스로 생각해도 지독한 생각이었다. 아케치가 그럼에도 울 수 없었던 이유는, 렌의 미소가 너무 순수하고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고백 30일째
아케치의 스마트폰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렌의 전화였다. 오늘로 30일째, 내일이면 이 모든 시간이 끝나는 날이었다. 솔직히 중간에 포기할 줄로만 알았는데, 렌은 끝까지 아케치에게 고백하는 것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의지만큼은 칭찬해줄 만 했다.
그렇게나 할 수 있으면, 나를 사랑하지 않도록 노력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케치는 결국 전화를 받았다.
“늦었네, 아케치. 40초 정도.”
“그래? 벨소리를 바꿔서 잠깐 듣고 있었거든.”
“어쩐 일로? 다음에 꼭 들려줘. 그래서 아, 오늘은 무슨 용건이냐면... 저번의 이야기를 마저 하고 싶어서.”
“난 너랑 계속할 이야기는 없는데.”
아케치가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답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눈치채지 못할 동요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렌이었다. 그가 도망가려고 하는 것 쯤은 파악하고 있었다.
“아케치, 이번에는 도망가게 두지 않을 거야. 제대로 나와 마주해.”
잔인한 말이었다. 어쩌면, 사형 선고였을지도 모른다. 아케치는 지금도 죄인이었다. 그것을 면죄부 삼아 행복으로부터 도망가고 있었다.
행복할 자격이 없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을까? 렌은 그 질문에 대한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그리고 끝내 찾은 대답은 NO였다. 네가 행복에게서 도망간다면, 그것에 짓눌려 죽더라도, 나는 너를 행복하게 할 거다.
“네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건지 알아. 그럼에도 나는 너와 함께하고 싶어. 제대로 우리 '둘'이서 행복해지고 싶어.”
“렌…”
“괜찮아, 아케치. 그래도 괜찮은 거야, 우리는. 이제.”
스마트폰을 꽉 잡은 아케치의 손이 떨리고 싶었다. 그럴 자격이 있을 리 없다. 누군가의 행복을 뺏어 놓고서, 존재만으로도 어머니의 불행이었으면서, 또 정신을 못 차리고 행복해지길 원하고 누군가의 행복이기를 원하다니.
그래서는 안 돼. 제 분수를 알아야지.
아케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아? 괜찮은 거야? 내가 누군가의 '행복'이 될 수 있는 거야? 크게 숨을 내뱉었다. 오랫동안 바라온 만큼 이루어지지 않았고, 몇 번이고 기대를 쌓아 올린 끝에 아케치는 결국 지쳐버렸다.
전화 너머는 고요하기만 했다. 재촉하지 않고, 아케치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그럼에도 살아가는 나야? 꾸역꾸역 목숨을 이어가는 괴물? 나 자신을 도무지 사랑할 수 없었다. 아케치는 몇 번이고 넘어져 울어 죽음을 원했다. 이제 형태를 가리지 않고 끝이 찾아오기를 원했다.
오직 바란 것은 그거 하나 뿐이었는데—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고 만 것은 용납해주지 않았다.
“있잖아, 렌… 나는,”
목소리가 우는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렌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잠깐 걸음을 늦추었다. 한 음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몇 년을 기다려온 판결의 때를.
“응, 듣고 있어.”
“나도… 나도 말야, 너를──”
아케치는 오랜 시간을 말하지 못했던 대답을 하려고 했다. 네가 고백을 하기 전부터 나도 하고 싶었던 말을. 나도 사실은 너를 좋아해, 간단하고 짧은 말이지만 이미 완벽한 문장을.
하지만, 아케치의 그런 결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전화 너머로 시끄러운 소음이 덮쳐왔다. 자동차의 경적, 타이어가 바닥을 끼익 끄는 소리,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 스마트폰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그렇게 둘의 30일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아케치가 손꼽아 기다렸던 31일은, 전화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려줄 연락을 기다리며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고백 31일째
교통사고라고 했다. 뺑소니도 아니었고 인근 주민이 바로 신고해주었기 때문에 빠르게 사건은 수습되었다. 아케치는 모든 일을 미루고 병실에 누워있다던 렌에게 찾아갔다. 문을 다급하게 열고 들어가면 창문 밖을 응시하던 잿빛 눈이 아케치를 응시했다. 그 눈이 오늘따라 먼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아직 괜찮아, 괜찮았다. 이기적인 말이지만 이제부터라도 내가 고백한다면, 렌은 분명히 받아줄 거고, 그렇게 둘이서 살아갈 수 있다. 처음부터 31일째의 약속이었으니까. 아케치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렌이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어쩐 일이야? 이렇게 급하게?”
태평한 말에 아케치는 경악하며 소리 지르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너 어제 통화 도중에 사고 당해서 사람 걱정 끼친 주제에…!”
“우리, 어제 통화 중이었어? 너 스케줄 때문에 바쁘다고 하지 않았던가? 방송, 이라던가 나간다고… …”
“……뭐?”
“미안, 무슨… 중요한 이야기였나? 작전 관련 이야기라던가, 아아, 그게 기억이 자꾸 흐릿해서…”
“…너, 너 뭐라는 거야? 그건…”
그건 몇 년 전의 이야기잖아.
아케치는 차마 그렇게 말하지 못하고 렌의 어깨를 잡았다. 잔뜩 놀란 표정이 아케치를 올려다보았다. 작게 중얼거리듯 우리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였나? 라고 중얼거리는 것에 확신했다.
렌은 30일은 물론이고, 둘이 절대 떨어질 수 없었던 몇년간의— 그리고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조차 전부 잊어버린 것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잊지 않기로 한 것은 너잖아. 네가 오늘 나랑 가겠다고 무슨 티켓도 준비했었으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아케치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자 렌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아케치의 등을 토닥여줬다.
“저기, 아케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멍청아.”
갑자기 뛰쳐나온 듯한 아케치의 말에 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앞뒤 상황은 몰라도 상당히 큰일임이 분명했다. 탐정 왕자는 ‘멍청이’라는 말은 안 하니까.
“멍청아, 네가, 네가 약속해놓고…”
흐느끼는 목소리에 렌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던가? 싸울만한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무슨 약속을 한 기억도 없었다. 만약 약속을 어기고 다른 누군가를 만났다고 해도, 아니, 무슨 약속을 안 지켰더라도 자신의 관련된 일에 울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아케치는, 그런 사람이니까.
도무지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저 울고 있는 아케치를 꼭 끌어안고, 계속 토닥이며 알 수도 없는 중요했던 것 같은 약속에 대한 사과를 했다. 미안해, 아케치─라고.
렌이 모르가나, 후타바, 소지로에게 들은 설명으로는 자신이 요 몇년간의 기억을 깔끔하게 날려 보냈다는 이야기였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래, 그게 성공했구나... 다행이다... 떨리는 손으로 후타바의 손을 맞잡은 렌은 미소 지었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함께한 것, 잘못 엇나가면 사라지는 자신의 목숨, 험한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들. 그 후에 시도를 개심시킨 것, 신을 죽인 것, 아케치가 돌아온 이야기까지 전부. 렌은 모든 이야기가 아득해서,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 같았다. 특히 신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비현실적인데, 자신과 괴도단이 한 일들도 충분히 기이한 체험이었기에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뒤늦게 뛰어온 괴도단의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렌은 오히려 잘 됐다며 미소 지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까지도 고생하는, 트라우마가, 기억과 함께 깨끗하게 날아갔다면 그건 불행 중 다행이니까. 외의 그 누구도 웃지 못했지만.
아케치는 복도에 서서, 행복하게 이야기하는 렌의 목소리를 조용히 듣다 차마 그 문을 열지 못하고 돌아갔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최근까지 그 때의 기억으로 고생하는 너와 행복하겠다고, 내가 대체 무슨 낯짝으로 너를 사랑하겠다고, 내가.
내가……
고백 ?일째
아케치는 홀로 비척이며 집으로 돌아왔다.
제 방 책상 위에 소중하게 올려져 있는 렌의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자물쇠나 편지나 훔쳐 온 쪽지에 티켓까지. 사랑하지 않겠다고 하기에는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것마냥 잔뜩 모아두고 있었다. 이게 뭐야, 나 정말 바보 아냐? 진짜 멍청하다, 진짜. 아케치는 결국 그것들을 전부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어쩌면 잘 됐다. 그 기억들이 없으면 렌은 오늘처럼 아케치에게 다가서려 들지 않을 테니까. 이게 옳은 거야, 아케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지막으로 남겨진 펴보지도 못한 종이를 집어 들었다. 전부 없던 일로 해버리자. 그러면 이제 네가 상처 입을 일은 없을 테니까.
아케치가 종이를 반으로 찢어버리면, 종잇조각이 팔랑이며 조용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살짝 벌어진 편지 사이로 보이는 글자는 미워, 라는 말이었다.
이것도 전부 운명인 것이 아닐까?
아케치는 결국 홀린 듯이 조심스레 종이를 펴보았다. 아케치, 있잖아. 나 사실 네가 미워. 연습이라도 한 듯 주변에 미워, 네가, 사실은── 하고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바로 이 문장이야말로 렌이 아케치에게 편지를 건네지 못한 이유였다. 펜에 힘이 꾹꾹 들어갔는지 잉크가 번져있었다.
정말로 미워해, 사랑하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지만. 어디가 밉냐면, 나를 사랑하면서도 네 생각으로 나를 놓아버리려고 하는 것이 미워. 네 스스로 목숨을 놓아버릴 것 처럼 위태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미워. 소란스럽게 떠드는 사람들을 등지고 쓸쓸한 눈을 하는 것이 미워. 눈가에 차갑게 내려앉은 그림자도, 나를 위해서라고 하며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모습들이 너무 미워. 네가 사라지는 꿈을 꿔. 그리고 그건 너무 현실들 같아서, 내가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어. 그렇기에 네가 받아주지 않을 것을 알지만, 고백이라는 핑계로 너를 묶어둔 나도 조금 미운 것 같아. 그래도 아케치, 너와 함께한 시간은 즐거웠어. 나는, 글씨는 거기에서 그만둔 것처럼 끊겨있고, 구석에는 작은 글씨로 적혀있었다.
언젠가 묻힐 무덤에, 너와 함께하고 싶어.
어딘가 스산하기까지 한 고백을.
네가 ‘또’ 죽는다면, 나도 ‘이번에는’ 반드시 함께 죽을 거야. 렌의 그런 의사가 느껴졌다. 아케치는 조용한 방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너를 사랑해, 렌. 너를 좋아했어, 너와 함께하고 싶었어, 너와 함께 잠들고 싶었어, 너와 함께, 그래, 힘들었지만, 고난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하지만, 틀려, 렌. 너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나의 무덤이고, 나는 산 채로 묻혀가고 있는 거야. 너와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야. 더 정확히는, 이제 네가 죽어도 좋다고 말할 날까지 죽지 않고 살아갈 나 뿐이야.
네가, 나를, 이렇게 붙잡아준다면————
기억이 날아간 것에 비해 멀쩡한 렌은 의외로 일찍 퇴원했다. 회복 속도가 경이롭다고 해야 할 정도일까, 거기서 며칠 지나지 않아 운동을 해야겠다며 강한 만류에도 기어코 르블랑의 출근을 따내고야 말았다. 소지로가 10분 간격으로 쉬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했지만, 렌은 정말로 바쁜 매일매일을 보내다 급격히 한가해진 탓인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르블랑은 손님이 많은 건 아니니까, 무리하는 것도 아니고 괜찮은데. 렌이 빗자루를 들고 르블랑의 밖으로 나가면, 밖에서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갈색의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렌은 환하게 웃는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예전에도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미소였다.
또 누군가의 미소를 흉내 내고 있는 걸까.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케치가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렌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어 인사했다.
“좋은 아침, 아케치. 꽃다발은 어쩐 일이야? 무슨 축하할 일이라도?”
“응. 몇 년 동안 못한 고백을 할 거거든.”
“…우와, 네가…… 고백을 못하는 상대도 있구나.”
렌이 살짝 경악하는 듯이 말하며 빗자루를 꽉 잡았다. 그나저나 청소에 방해가 되는데, 르블랑 손님 중 누군가인가? 비켜달라고 해야 하나, 뭐라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지 고민하던 렌이 고개를 돌려 바닥을 바라보았을 때 갑자기 불쑥 시야에 꽃다발이 들어왔다. 꽃의 향기가 확, 다가왔다.
“좋아해, 렌. 오래 전부터 좋아했어. 나랑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 줘.”
렌은 들고 있던 빗자루를 탁 떨어트리고 아케치를 바라봤다.
혹시 오늘이 4월 1일이던가? 농담이라고 하기에 아케치가 부끄러운 듯이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렌은 당황스러웠다. 아케치가 신경 쓰이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절대로 사랑의 감정은 아니다. 뭣보다 우린 아직 잘 모르는 사이라고!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자신의 몇년간의 기억이 깔끔하게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렌은 꽃다발을 바라보았다.
혹시 내 날아간 기억 속에서 아케치와 무언가를 했나!? 혹시 내가 책임져야 할 타이밍 같은 건가!? 렌이 꼼짝없이 굳어 아무런 대답도 못하자, 아케치가 말을 이었다.
“갑작스러운 건 알아.”
“응, 무척 갑작스럽지…”
“그러니까ー 미안하지만, 나한테 기회를 주지 않을래?”
“…무, 무슨 기회!?”
삑사리가 날 정도로 놀란 듯한 대답이었다. 아케치는 강제로 자신이 들고 온 커다란 꽃다발을 렌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리고선 손을 뻗어 렌의 볼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살짝 숙여 가까이 다가갔다.
“31일의 유예를 줘. 그 안에 너를 반하게 할게.”
이것이 너라는 죄를 끌어안게 된 나의 대답이다.
아케치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번에야말로 렌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본 적 없는 그 올곧은 시선에, 렌은 생각했다. 저기, 아케치, 사랑은 승부가 아니잖아…? 렌이 꽃다발을 꼭 끌어안고 저세상의 것을 쳐다보는 표정으로 아케치를 바라보았다.
농담일 리는 없겠지? 사실 다 몰래카메라? 이게 전부 현실이라고? 키스를 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순간 당황해 눈을 질끈 감아버린 렌의 얼굴을 보며, 아케치는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참고로 네게 선택권은 없어. 31일간 잘 부탁해, 렌. 참고로 오늘의 대답은?”
“아케치, 제정신 맞아?!”
“그럴 줄 알았어. 내일 또 올게.”
아케치는 만족했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홀로 떠나버렸다. 이,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야. 렌은 빗자루조차 줍지 못하고 멍하니 르블랑의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앞으로의 30일이냐 하면, 아케치의 복수가 아주 조금 포함된──아케치와 렌이 결혼을 전제로 사귀게 되는 날까지의 남은 시간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30일!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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