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을 엮어서

피가여현(피가아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새하얀 눈밭. 예전에도 이런 풍경을 본 적 있었다. 손으로 꽉 쥐면 그 틈 사이로 흩어져가는 차가운 눈송이들.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저, 여기서 눈을 뜬 채로 차갑게 식어가는 것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

“미틸, 루틸. 뭐 하고 있어?”

“아, 피가로 선생님!”

루틸이 반가운 듯이 피가로를 맞이했다. 피가로는 마주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인 뒤 둘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이좋게 책상에 붙어 무엇을 하나 했더니, 종이를 읽고 있는 모양이었다. 맞은편에서는 뭐라고 적혀있는지 알 수 없었다. 피가로가 종이를 빤히 바라보자, 루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피가로 선생님은 이 이야기 아시나요? ‘은혜 갚은 두루미’라고 한대요.”

현자가 이야기 해준 것을 루틸이 종이에 옮겨썼다며, 피가로에게 종이를 보여주었다. 자신이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싶었던 바보 같은 두루미. 아무리 행복을 빌어줘도 믿음을 얻을 수는 없었던 두루미. 떠나야 할 때, 헤어져야 할 때를 정해놓고 인연을 맺었던 두루미.

“그런데 두루미는 왜 떠나야 했던 걸까요?”

정체를 숨긴 이유는, 노부부를 위해서였잖아요? 미틸이 빤히 종이를 바라보았다. 같은 인간이 아니었지만, 노부부와 두루미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을 거라고, 소년은 그렇게 믿는 것이다. 피가로는 그것이 얼마나 꿈속의 이야기인지 알고 있다.

“두루미는 인간과 똑같지 않으니까, 어디론가 갈 수 밖에 없었던 거야.”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아무리 좋은 관계를 맺었다고 한들 그것은 끝내 무너지고 만다. 그들과 ‘차이점’이 있으니까.

피가로는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 어느 날 눈을 떴는데 피가로는 혼자 남아있었다. 차가운 바닷속에서 고독을 느꼈다. 그래서 다음은 마법사들과 함께 살아갔다. 피가로는 마법사들끼리도 완전히 똑같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피가로는 또 고독을 느꼈다. 혼자 남겨져 길을 떠나려는데, 똑같지 못해도 손을 잡고 살아가는 마법사를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피가로는 결국 먼저 손을 놓게 되었다.

피가로는 웃었다.

피가로가 웃자 루틸과 미틸도 따라 웃었다. 둘은 새롭게 알게 된 이야기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래서 피가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덫에 걸린 두루미는, 눈밭을 바라보며 상상했을 것이다. 이대로 이 덫에 잡힌 채로 여기서 쭉 방치되어, 아무도 구해주지 않아 천천히 죽어갈 미래를. 무력한 두루미는 죽어갈 미래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실로 짜인 천을 덮고, 피가로는 눈을 감았다. 우선 이대로 잠들까. 누군가 저녁 때에 깨우러 와줄까, 그때에 나는 여전히 눈을 뜰 수 있을까?

어둠에 익숙해져도 의식은 떨어지지 않는다. 피가로는 결국 아까부터 문 근처에 서 있던 기척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섰다.

앗, 피가로! 어디 나가는 길인가요…?”

아키라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다. 피가로는 이 풍경을 꽤 좋아했다. 그녀가 시선을 옮겨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는 순간. 처음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와 같았다. 어떤 감정을 이쪽에 향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좋았다. 무엇이든 좋으니, 이쪽에 시선을 고정해준다면 그걸로 좋았다.

하지만, 변명거리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 것도 그렇네. 피가로가 할 말을 찾느라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 아키라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피가로의 방 안을 쳐다봤다. 아무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현자님이라면 한밤중에도 괜찮은데.”

그럼 실례할게요, 하고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가끔은 위기심이 없는 건지, 신뢰해주고 있는 것 뿐인지 알 수 없다. 피가로는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까지 확인한 다음 문을 닫았다. 아키라는 착실하게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피가로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을까, 비밀로 해야 하는 상담일까, 피가로는 반쯤 장난기를 담아 아키라의 앞에 섰다. 앉아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풍경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피가로도 그 이야기 들었나요?”

피가로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기보다는, 그녀가 피가로의 방을 찾을 정도라면 이미 미틸과 루틸에게 이야기를 들은 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아키라는 더 이상 이야기에 대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피가로를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나 상냥한 의사 선생님. 어두운 바다를 닮은 머리카락. 알 수 없는 것을 끌어안고 있는 사람. 아키라는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타인을, 그것도 이 대지에 아주 오랫동안 살아온 마법사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피가로.”

그렇다고 그것이, 포기하는 이유는 될 수 없었다. 아키라는 재차 이름을 불렀다. 두루미가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처럼. 노부부도 그랬을 것이다. 설령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고 해도, 아주 짧은 은혜 갚기에 불가능하다고 해도, 두루미가 여기에 머물러주었다. 얇은 창호지 너머로 실루엣밖에 보지 못했더라도―― 분명 두루미를 소중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래그래, 피가로 선생님은 여기에 있어, 현자님.”

두루미는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을 엮어 천을 만들어낸 것도, 인간들이 그것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루미는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을 원했다. 그래서 인간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어떠한 인간은 다른 대답을 해버리고는 했다. 필요한 것은 당신이 엮어내는 것들이 아니라, 당신의 존재 그 자체라고. 아키라가 피가로의 손을 잡았다. 두 손으로 꼭 잡고 눈을 감은 모습은, 아주 먼 옛날 거듭해서 봐왔던 풍경과 비슷했지만…… 무언가가 달랐다. 아키라는 그 손을 붙잡고 소원을 빌지 않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자신의 신을 이렇게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운 자신을 순간 잊어버릴 것 같이 따스한 시선. 아키라의 앞에서, 피가로는 가끔 작은 존재가 되기도 했다. 피가로는 현자의 마법사일 뿐이다. 다른 무엇도 될 수 없었다. 피가로가 그것을 바라도, 바라지 않아도. 그것은 웃고 싶어질 정도로 얄궂기도 했고, 가끔은 울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기도 했다.

“현자님도 참, 그런 부분이 저돌적이구나……”

아키라는 뭔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본인이 피가로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송해요! 라며 사과를 하고, 온기가 손 끝에서 떨어진다. 피가로는 그 뜻이 아니었지만, 오해를 풀기에는 복잡해질 것 같아 괜찮다고만 답했다.

그녀의 손은 따뜻하다. 아니,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고 해야 할까. 피가로는 그 온기를 더듬는 것처럼 반대쪽 팔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언젠가 나는 스스로 실을 엮는 것을 바라게 될 것이다. 어딘가에 춥게 남겨질 당신을 위해서. 떠나간 뒤에도 당신이 따뜻하기를 바라니까. 내가 당신의 곁에 남아있고 싶으니까. 피가로는 홀로 그런 소원을 생각하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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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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