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R/주아케] Rehabilitate 1

주인공과 아케치가 동거하면서 뭔가 먹는 이야기

동거 첫날.

휑하게 비어 있던 집에 가구가 하나하나 채워졌다. 날씨는 아직 봄이 되려면 멀었다는 듯이 쌀쌀했고,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 놓은 탓에 집 안팎을 오다니는 모든 얼굴이 빨갛게 얼어 있었다. 아케치는 무엇이 들었는지 모를, 보기보다 제법 묵직한 박스 하나를 거실 구석에 내려놓았다.

“아, 그거 이쪽.”

이삿짐 센터 직원과 함께 침대를 방에 배치하던 아마미야가 뒤늦게 상자를 발견하고는 질질 끌어 주방으로 옮겼다. 안에서 무언가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아무래도 주방용품인 모양이었다. 어디 들어갈 물건인지 박스 위에 적어 놨으면 두 번 일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아케치는 떨떠름하게 아마미야를 쳐다보다가 쯧, 작게 혀를 차고는 남은 짐을 들이러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과 한 고양이)이 한 집에서 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아케치의 생존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케치 본인조차도 자신이 어째서 아직 살아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자신이 죽은 날짜부터 약 1년 가량이 지난 상태였다는 것밖에는.

즉, 아케치 고로는 1년 간 혼수상태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1년 동안 입원비를 내 준 사람이 있었다. 더 정확히는, 사람들이.

병원 직원 중에 정신을 잃은 채 병원에 실려온 '탐정 왕자'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아케치가 소문대로 정말 무연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입원비를 대신 내줄 결심을 했고, 혼자서 모든 비용을 대기는 어렵다는 판단으로 신뢰할 수 있는 몇몇에게만 정보를 공유하여 필요한 금액을 충당했다.

정말 미련한 사람이 다 있다고 아케치는 생각했다. 아무리 팬이라도 그렇지, 고작해야 TV 속 꾸며낸 모습이나 본 것이 전부인 상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보답받을 가능성 따위는 어디에도 없을 텐데.

타인에게 빚지고 싶지 않았으므로, 아케치는 돈을 갚겠다고 했다. 그는 살짝 웃고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저요, 죽고 싶었거든요.”

동생이 뜻하지 않게 사망한 후로 내내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그는 말했다. 혼자 살아남은 자신이 미워서, 조금이라도 즐거워지면 곧바로 죄책감이 생겨났다고. 그러던 중에 혼수상태로 실려 온 아케치를 발견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무슨 운명 같다고 생각했어요. 아케치 군을 처음 알게 된 것도 동생 때문이었거든요. 그 애, 완전히 팬이라서, 입만 열면 아케치 군 얘기밖에 안 해서 가끔은 좀 지겨울 정도였는데. 누워 있는 아케치 군을 보니까, 그 애가 생각나서요.”

어떻게든 살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동생이라면 그것을 원할 테니까. 그러려면 자신이 살아 있어야 하니까, 어쩌면 그 애가 자기 죽지 말라고 아케치를 이 병원으로 데려다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며 그는 울먹거리며 웃었다.

“그러니까 오히려 제가 도움받은 거예요. 감사합니다. 살아나 주셔서.”

아케치는 그 이야기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극구 거절하였으므로 어찌할 도리 없이 돈을 갚는 대신 부지런히 재활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사람이 1년이나 누워 지내다 보면 온 몸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다. 근육은 다 빠져 한 걸음을 걷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고, 일반식은 소화조차 할 수 없어 미음만 먹는 생활이 며칠간 이어졌다. 미음에서 죽, 죽에서 일반식으로 식사가 바뀌는 동안 아케치를 살려 놓은 그 사람은 아주 이따금, 일을 해야 할 때만 아케치를 찾아왔다. 보답을 바란 것이 아니니,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지난한 재활 끝에 퇴원할 수 있게 되었을 때도 그는 찾아오지 않았다. 아케치가 퇴원 수속을 밟는 동안, 그간 안면을 튼 다른 직원이 퇴원을 축하한다며 말을 걸었다. 짧은 대화 끝에, 직원은 ‘그’의 동생이 어쩌다 죽었는지를 입에 담았다.

“그 왜, 재작년 봄에 전철 탈선 사고 있었잖아요. 그때 둘이 같이 타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아, 이 어찌나 역겨운 이야기인지.

아케치는 정처 없이 걸었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바빠, 재작년 갑자기 방송에 나타나지 않게 된 이후 행방불명되었다던 탐정 왕자가 창백한 얼굴로 제 옆을 비틀비틀 스치건 말건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했다. 겨울 칼바람이 차갑게 얼굴을 에고, 아직 근육이 온전하지 못한 다리는 잘못 디디면 그대로 풀썩 주저앉을 듯 위태로이 경련했으나 아케치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저 걸었다.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다. 아니,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모든 것이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아케치 고로의 비존재야말로 무엇보다도 필요했을 텐데.

아케치는, 할 수만 있다면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그때, 누군가 아케치의 팔을 낚아채 잡아당겼다.

“조심해요!”

균형을 잃고 뒤로 쓰러지려는 아케치의 등을 누군가 단단히 받쳤다. 코앞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쌩하니 내달려 사라졌다. 깜짝 놀란 탓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쿵쾅거리는 박동이 지나치게 생생해 속이 울렁거렸다. 신물이 역류하며 욕지기가 치밀어 아케치는 몸을 비틀어 빼내고는 주저앉아 헛구역질했다.

“우웩…….”

“취했어요?”

아케치를 붙잡았던 남자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으며 등을 두드렸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삶이라는 역겨운 장난질에 그만 만취해 버린 것이다. 헛구역질이 지속되자 눈물샘마저 자극되기 시작해, 아케치는 눈물과 함께 토기를 꾹 삼켰다.

“이제, 괜찮습…….”

아케치는 고개를 들었고,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운명을 의심했다.

“……아케치?”

아무리 보아도 어울리지 않는 둥근 안경테 너머로, 깜짝 놀란 듯 크게 뜬 눈이 아케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케치 고로는 그렇게 아마미야 렌과 재회했다.

그 후 며칠 동안 발생한 모든 자질구레한 난리법석을 제하고 말하면, 아케치가 아마미야와 동거하게 된 까닭은 몹시 단순해진다. 그간 시도가 제공하던 거주지에 머물던 아케치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로 거주할 공간이 사라진 상태였고, 도쿄 내 대학에 입학해 다시 상경한 아마미야가 고르고 골라 주변 지리나 건물의 상태 등을 따져 가장 괜찮다고 생각한 매물은 방 2개짜리, 혼자 부담하기에는 조금 비싼 맨션인 탓에 월세를 절반 분담해 줄 동거인을 구하고 있었다. 서로의 필요가 본의 아니게 일치해 버린 탓에 두 사람은 함께 살기로 합의하게 되었다.

“물어보니까 미리 가서 살아도 된대.”

“전 입주자는 어쩌고?”

“말 안 했나? 거기, 사고 물건이라. 뭐가 자꾸 나와서 들어가는 사람마다 못 살겠다고 방 뺐다는데.”

“…….”

왠지 위치나 평수에 비해 값이 너무 싸더라니. 그러나 귀신이 정말 있었다면 아케치 고로는 이미 한참 전에 온갖 귀신에게 시달려 죽어 버리고야 말았을 터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귀신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아케치는 신경 쓰지 않고 아마미야가 이사 오는 날까지 ‘나오는 집’에 홀로 머물렀다. 당연하게도, 그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짐이 많지 않은 덕분에 이사를 끝마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닥 청소까지 끝낸 이삿짐 센터 직원들이 현금을 받아 떠나가자, 집에는 아마미야와 아케치만이 남았다.(모르가나는 르블랑에 가 있다는 모양이다.) 창문을 닫고 난방을 돌려도 한기가 가시지 않아 집안은 약간 쌀쌀했다. 정리되지 않은 채 널부러진 박스 여럿을 둘러 보던 아마미야가 물었다.

“배고픈데, 뭐 좀 먹을래?”

“먹을 거 없어.”

아케치의 대꾸에 아마미야가 의아해하며 빌트인 냉장고를 열었다. 그 안에 반쯤 마신 500ml 생수 한 병밖에는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아케치는 심드렁하게 그 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냉동실 문까지 열어 보고 나서야 겨우 현실을 받아들였는지, 아마미야가 다소 경악한 눈치로 물었다.

“그동안 뭐 먹고 살았길래.”

“밖에서 대충.”

거짓말이었다. 아케치는 그동안 거의 끼니를 챙기지 않았다. 아무것도 입안에 넣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음식의 맛이 느껴지는 것만으로도 욕지기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말까지 그에게 할 필요는 없었다. 어쩌다 보니 같이 살게 되었다고는 해도 이런 말을 할 사이는 아니니까. 아마미야가 뒤통수를 긁적거리다가 말했다.

“편의점에서 뭐라도 사오지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없어.”

“그럼 대충 사 올게.”

필요 없다는 얘기였는데. 그러나 그렇게 정정하기도 전에 아마미야는 벌써 문밖을 나선 이후였다. 굳이 나가서 말릴 마음은 들지 않아 아케치는 그냥 거실에 주저앉았다. 어쩌자고 동거 따위를 승낙했는지. 벌써부터 피로감이 몰려왔다.

컵라면 두어 개. 주먹밥 여러 개. 스포츠음료와 콜라. ‘먹고 싶은 거 골라.’ 전혀 먹고 싶지 않았다. 조금도. 그러나 그런 말을 꺼내는 것도 성가셔 아케치는 소금 맛 컵라면과 스포츠음료를 골랐다. 아마미야는 배가 고프다는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듯, 라면이 익는 동안 주먹밥을 세 개나 해치웠다. 3분에 세 개, 그러면 한 개를 다 먹는 데 껍질을 까는 시간을 포함해서 고작 1분 남짓 걸렸다는 소리인데. 아케치는 질린 듯 아마미야를 쳐다보았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는 고작해야 스포츠음료를 한 모금 홀짝거린 게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그런 티는 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재회부터 엉망진창이었다.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걷다가 오토바이에 치일 뻔하지 않나, 그대로 주저앉아 헛구역질까지 했던 탓에 아마미야는 아케치가 그때 완전히 취해 있었다고 아직까지도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존이 치가 떨리도록 불쾌해 견딜 수 없노라고 고백하느니 차라리 주정뱅이라는 오해를 사는 편이 더 나았다. 약한 모습 따위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라면 더더욱.

아케치는 컵라면 뚜껑을 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나무젓가락으로 면을 집었다. 짭짤한 향기가 코끝을 스치자 주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배가 고프다.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아케치는 입을 열었고, 푹 익은 면이 곤죽이 되도록 오래도록 씹었다. 삼키자 뱃속이 뜨거워졌다. 아케치는 기계적으로 면을 씹어 삼키기를 반복했다. 조용한 거실에 이따금 후룩거리는 소리만이 울렸다. 문득, 컵라면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정말로, 맛은 없었다.

“정리하기 귀찮아…….”

국물까지 죄다 비운 컵라면 용기에 주먹밥 비닐을 대충 쑤셔 박은 아마미야가 벌렁 드러누운 채로 투덜거렸다. 아케치는 식곤증으로 반쯤 졸며 중얼거렸다.

“당장 치워.”

어쩐 일인지, 욕지기는 올라오지 않았다. 몸이 따뜻했다.


동거 첫 밤.

방은 며칠 내내 그랬듯이 변함없이 고요했다. 아케치는 몸을 이리저리 뒤척거리다가 굳게 닫힌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 바깥, 얇은 벽 너머로 고작해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타인이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따끔거리는 착각이 일었다.

방문이 벌컥 열리는 상상을 한다. 거리낄 게 없다는 듯 인기척을 조금도 죽이지 않고 다가온 누군가가 이불을 들춘다. 그때 자신은 어떻게 반응했었더라. 고작해야 몇 년 전 일임에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웃었던가? 아니면 용서를 빌었나?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니까. 아케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바보 같은 상상이었다. 문은 잠겨 있다. 아무도 아케치의 허락 없이는 방에 들어올 수 없다. 집에 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치 않는다.

다만, 잠은 오지 않았다.

인기척이 났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어 아케치는 눈을 번쩍 떴다. 침입자다. 쿵, 심장이 크게 뛰며 몸이 먼저 반응했다. 아케치는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문 옆 벽에 붙어 섰다.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이런 곳에 들어온 거지? 몸을 낮춘 채 문을 노려보던 아케치는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리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침입자 따위는 없다. 있을 리가 없다. 문밖에서 들리는 소란의 범인은 어제부로 동거 상대가 된 아마미야 렌이다. 어느새 잠에 들었는지 벌써 아침이 되어 그가 거실에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아케치는 쓰러지듯 침대에 다시 누웠다. 갑작스럽게 움직인 탓인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며 눈앞이 핑글핑글 돌았다. 바보 같기는. 병원에 있을 때는 수 시간 간격으로 간호사가 오가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대체 무엇에 신경이 곤두섰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작스레 집에 쳐들어오는 불청객 따위 이제 있을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풀어진 긴장을 바로잡듯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케치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여전히 신경이 곤두선 모양이었다. 입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은 조금 뒤에야 났다.

“……왜.”

방이 건조했는지 목소리가 잠겨 걸걸했다. 아케치는 인상을 찡그리며 목을 문질렀다. 잠깐 사이를 두고 문밖에서 아마미야가 물었다.

“커피 마실래? 인스턴트지만.”

어째서 대뜸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아마미야가 무엇을 바라는지 아케치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새삼스레 아침부터 얼굴을 보고 같이 커피를 마실 필요가 어디에 있는지. 이제는 친밀감을 위장할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어쩌다 보니 필요가 일치해 같은 공간에 거주하게 되었을 뿐인데.

“……그래.”

그러나 거절하기도 피곤했다. 밀어낼 이유를 생각해 낼 여력조차 부족해 아케치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어제 고작 짐 몇 개를 옮겼을 뿐인데 팔다리에 나른한 둔통이 느껴졌다. 긴 재활 치료 끝에 퇴원하고서도 아케치는 여전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돌아갈 이유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다만 나약하다는 것만큼은 지긋지긋했다.

거실에는 희미하게 커피 향이 감돌았다. 식탁 앞까지 다가간 아케치에게 아마미야가 물었다.

“나가게?”

아케치는 아마미야를 마주 보았다. 머리카락은 정리라고는 되지 않아 부스스하고, 안경알은 한 번 닦지도 않은 듯이 흐릿했다. 목이 다 늘어난 나그랑 티셔츠에는 언제 착색되었는지 모를 얼룩이 군데군데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몸단장을 전부 끝내고서야 나온 아케치와는 대비되는 차림새였다. 아케치가 대답하기도 전에 질문이 다시 돌아왔다.

“언제 들어오는데?”

아케치는 식탁 위를 쳐다보았다. 백엔 숍에서나 팔 것처럼 유치한 무늬가 인쇄된 머그컵에 다갈색 액체가 담겨 있고, 그 옆 작은 접시에는 희고 노란 덩어리가 얹혀 있었다. 카페오레와 에그 샐러드다. 아케치는 작게 숨을 내쉬고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씁쓰름한 액체가 입안을 텁텁하게 적셨다.

“내가 알려줄 의무는 없잖아.”

진실을 말하자면, 그저 잠옷 바람으로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허술한 모습을 보여줄 사이는 아니니까. 그러나 굳이 그와 함께 집에 붙어 있을 이유 따위는 없으니, 나가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아마미야가 앞머리를 몇 번인가 만지작거리더니 주저하듯 입을 열었다.

“……저녁. 안 먹고 오는 거면 같이 먹자고.”

“왜?”

정말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제안이었다. 어제는 그렇다 쳐도, 그와 아케치가 함께 식사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동거를 이유로 쓸데없는 책임감이라도 느끼는 걸까? 그러잖아도 텁텁했던 입이 바짝 마르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해 아케치는 컵을 내려놓았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아마미야가 대답했다.

“그냥.”

이상한 표정이었다. 설마 웃으려고 한 건 아니겠지. 무슨 감정인지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아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케치는 괜히 포크를 들어 에그 샐러드를 쿡쿡 찔렀다. 아마미야가 턱짓했다.

“그거, 같이 먹어. 빈속에 커피만 마시면 안 좋대.”

“…….”

정말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되짚어 보면 그는 늘 이랬던가. 의중을 가늠하기 어려운 뚱한 표정으로 예상치도 못한 말을 불쑥 던지는 탓에, 언제나 생경한 기분을 맛보고는 했던 기억이 났다. 특이한 녀석. 아케치는 대꾸하는 대신 포크 끝으로 에그 샐러드를 약간 떠 입안에 밀어 넣었다. 익숙한 맛이었다. 어디서 먹어본 것만 같은데,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썩 훌륭한 맛은 아니었다.

“저녁까지는 돌아올 거야. 아마.”

모든 것이 불편했다. 아케치는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평일 낮임에도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도쿄야 늘 이렇다. 언제, 어딜 가더라도 모두가 무언가 하고 있고, 모두가 바쁘다. 아무런 목적 없이 튕겨 나온 존재라고는 아케치밖에 없어 보였다. 문득 멀미가 날 듯했다.

목적, 그러니까 해야 하는 일이라면 있다. 돈을 벌어야 할 것이다. 모아 둔 돈이라면 얼마간 있지만, 언제까지고 저금만 까먹으며 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집세와 관리비 따위를 분담하려면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 집에서 계속 살 생각이야?

그거야말로 기막힌 헛소리다. 한때 미간에 총구를 들이밀기까지 했던 상대와 희희낙락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케치는 여전히 손아귀에서 느껴지던 총의 반동과 화약 냄새까지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죽인 그가 가짜였다고 해도, 아케치의 살의마저 거짓이 되지는 않았다.

아케치는 정말로 아마미야 렌을 죽이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아마미야는 정말이지 특이한 인간이다. 자신을 배신하고 심지어는 죽이려 든 존재에게, 고작해야 집세를 절반 분담해 줄 상대를 찾고 있었다는 이유로 같은 공간에 거주하지 않겠느냐고 태평스레 물을 위인은 아마 그 정도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 느껴 마땅한 감정이라고는 배신감이나 혐오 정도가 일반적일 텐데도.

‘장갑은 맡아 둘게.’

문득 그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아직도 버리지 않았을까? 아직도 재전이 있으리라고 헛된 기대를 하는 걸까? 탐정과 괴도, 라이벌이라는 거짓말을 마치 진실인 듯 굳게 믿으면서?

물러 터진 바보 자식.

너와 나는 한 번도 닮았던 적이 없는데.

아케치는 호흡이 흐트러지도록 빠른 속도로 계속 다리를 움직였다. 아직 날씨가 쌀쌀한 탓에 꽁꽁 언 귀가 찢어질 듯이 아팠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주저앉고 싶지 않아 아케치는 종아리에 힘을 주었다. 목적지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저, 탐정 왕자…… 맞죠?”

얼마나 걸었을까. 낯선 목소리가 상념을 흩었다. 고개를 돌리자 한눈에 보아도 긴장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표정을 지은 여성이 머뭇거리며 아케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이는 기껏해야 고등학생 정도일까. 제법 심약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죄, 죄송해요. 갑자기…… 저, 아케치 씨, 맞죠?”

떨리는 것치고는 제법 확신에 찬 음성이었다. 문득,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는 충동이 울컥 밀려들었다. 잘못 본 것이라고, 사람을 착각했다고. 어쩌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탐정 왕자’는 그저 만들어진 가짜에 불과하니까. 그런 청렴하고 정의로운 존재 따위가 자신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말문이 막혀 한 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아케치의 반응을 오해라도 한 듯 여성이 황급하게 양팔을 내저었다.

“아, 아아!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아니, 그게, 죄송해요……. 그, 저기, 아케치 씨, 팬이라서! TV 안 나오게 돼서, 걱정했어요. 막, 다들, 안 좋은 소리도 들리고, 그래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하고……. 어, 죄송해요. 그게, 아케치 군, 아니, 아케치 씨 보고, 안심해서 저도 모르게……. 헉!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그냥, 저, 늘 응원하고 있어요! 고마워요!”

지리멸렬한 문장을 한바탕 쏟아낸 여성이 대답조차 듣지 않은 채 고개를 꾸벅거리며 허둥지둥 자리를 피했다. 어찌나 쏜살같이 사라지는지 아케치는 그저 작아지는 뒷모습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가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잘됐네.

머리 한구석에서 누군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사랑받고 싶었잖아? 인정받고 싶었잖아? 특별해지고 싶었잖아? 그래서 즐겁지도 않은데 방긋방긋 웃으면서 믿지도 않는 정의를 나불댔던 것 아니야? 방송에 나가지 않게 된 후로 일 년이 넘게 지났는데 여전히 널 기억하고 좋아해 주는 팬들이 있으니 성공한 삶이네. 네가 바라던 그대로니까, 더 행복해야 하는 것 아니야?

또다시 위장이 배배 꼬이며 욕지기가 치밀었다. 아, 죄다 커피 탓이다. 빈속에 마셔 버려 경련이 일어나는 것이다. 배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죄다 게워 내고 싶어 아케치는 크게 헐떡거렸다. 배를 찢어 내장까지도 전부 내다 버릴 수 있다면 조금쯤은 후련해질 수 있을까.

장갑 속에 든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아무리 문질러도 체온은 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케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거리였다. 하기야, 낯설지 않은 장소 따위는 어디에도 없던가.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익숙한 흉내를 내며 다른 이들을 따라 했을 뿐이니 이제 와 새삼스러울 일은 없었다.

아케치 고로는 언제나 미아였다.

벨이 울렸다. 아케치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언제 와?’

‘올 때 케첩 좀 사줘.’

‘까먹고 안 샀어.’

아마미야의 메시지였다.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는 듯, 태평스러운 내용에 문득 화가 치밀었다. 멍청한 소리 마. 내가 왜 네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왜 같이 저녁 따윌 먹어야 하는데? 왜 내가 너와, 왜. 살아야 하는 건데?

‘그냥.’

아침에 보았던 아마미야의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무슨 감정인지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던, 이상한 표정. 아케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 안쪽에서도 그의 표정이 여전히 생생했다. 세상에 그냥 일어나는 일 따위는 없다. 모든 사건에는 동기가 있고, 원인이 있고, 이유가 있다. 그 모든 일을 ‘그냥’이라는 한 마디로 뭉뚱그릴 수는 없다.

없는데도.

아케치는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눈앞에는 편의점이 있었다.

문을 열자 기계적인 벨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꾸며낸 듯한 밝은 인사가 들려왔다. 케첩이 어디 있지. 아케치는 냉장 진열대를 한참 동안 살폈다. 유음료, 컵 커피, 푸딩, 샌드위치, 팩 샐러드……. 아무리 찾아도 케첩은 없었다. 편의점 내부를 전부 둘러본 후에야 케첩이 그냥 선반에 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아케치는 바보가 된 기분을 느끼며 계산대로 향했다. 물건을 사는 간단한 행위를 하는 것뿐인데도 이상하리만치 현실감이 부족해, 마치 형편없는 촌극이라도 연기하는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아마 자신은 이 연극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배우일 것이다.

현관은 굳게 닫혀 있었다. 같은 규격으로 만들어진 문이 긴 복도를 따라 줄지어 늘어서 있는 광경을 볼 때면, 문 너머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 일상을 구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실은 죄다 방송용 세트장처럼, 가짜로 만들어진 모형이 아닐까. 살아 있는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아케치는 언젠가 그런 상상을 했던 적이 있었다. 누군가 타인을 기다리며 따뜻한 요리를 만든다거나, 정답게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창작물 속에서만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다고 여겼던 시절이다. 그때는 모두가 다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아무런 노력 없이도 그저 운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당시 아케치는 몰랐다.

아케치는 케첩이 든 봉지를 고쳐 잡고, 얕은 숨을 내쉬었다. 흰 입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본 후에야 문고리를 돌릴 마음이 들었다. 문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열렸다.

“어서 와.”

“오, 딱 적당한 때 오네.”

문을 열자마자 따뜻한 공기와 함께 뭔지 모를 음식 냄새가 풍겼다. 아마미야와 모르가나가 여상스러운 태도로 제각기 인사를 건넸다. 순간 무언가 얹히기라도 한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케치는 대답을 얼버무리고는 식탁 위에 케첩을 올려 놓았다.

“이거면 돼?”

“아, 고마워.”

가벼운 어조로 감사를 표한 아마미야가 케첩 포장을 뜯었다. 다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감사 인사를 해 댄다. ‘감사합니다. 살아나 주셔서.’ ‘늘 응원하고 있어요! 고마워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한 걸까. 아케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날 미처 죽지 못한 이후로 세상은 불가해로 이루어진 모형 정원으로 변해 버린 듯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아직 좀 더 걸리니까 씻고 와. 물 받아 놨어.”

소름이 돋았다.

뜨거운 물로 몸을 녹이고 나서도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다. 아케치는 머리카락을 꼼꼼히 말린 후에야 욕실에서 나왔다. 때마침 아마미야가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고 있었다.

샛노란 오믈렛을 얹은 치킨 라이스, 소스를 듬뿍 뿌린 함박스테이크, 큼지막한 새우튀김과 칼집을 내서 구운 프랑크소시지, 브로콜리 양배추샐러드가 커다란 접시 위에 떡하니 놓여있었다. 그 옆에 자리한 맑은 미소시루는 그저 구색만 갖추는 용도로, 아무리 보아도 영양 밸런스가 편중된 구성이었다. 심지어는 오믈렛 위에는 알록달록한 국기 모양 이쑤시개가 보란 듯이 꽂혀 있었다. 어린애나 희희낙락하며 먹을 법한 메뉴였다.

“뭐야, 이건?”

“어린이 정식.”

아마미야가 냉큼 대답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어쩐지 다소 우쭐대는 듯한 태도였다. 모르가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렌 녀석, 분명 추우니까 크림 스튜 만들겠다고 해 놓고 저거 보자마자 완전 홀려버렸다니까.”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기는! 넌 가끔 너무 충동적이야. 저번에도…….”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듣자 하니 백엔 숍에서 장식용 만국기를 발견한 아마미야가 모든 저녁 계획을 뒤엎어 버렸다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필요한 재료도 깜빡 잊어 아케치에게 부탁하게 된 듯했다. 아케치는 어이가 없어졌다. 고작 장식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이런 걸 좋아해? 애도 아니고.”

“해보고 싶어서.”

아마미야가 목덜미를 문지르고는 자리에 앉았다. 뒤따라 앉은 아케치는 그제야 자신의 수저만 왼쪽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러고 보면 아침에도 포크가 그릇 왼편에 있었던가. 이렇게 그와 마주 본 상태로 비교하고서야 비로소 그가 일부러 신경을 썼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게 대체 뭐가 중요하다고.

아케치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국기 장식을 뽑았다. 어쩐지 속이 쓰렸다.

“뭐, 어쨌든. 잘 먹을게.”

아마, 이런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겠지. 촌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맛, 괜찮아?”

아마미야는 의외로 요리에 소질이 있는 듯했다. 분명 이전에 카레 정도밖에는 만들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아케치가 혼수상태로 보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눌어붙은 부분 하나 없이 샛노란 오믈렛은 겉은 폭신폭신하고 속은 녹진녹진한, 흠잡을 곳 없는 반숙 상태로, 케첩으로 간한 치킨라이스의 산미를 누그러트리고 고소한 맛을 더하는 역할을 했다. 양배추샐러드에 뿌려진 새콤한 유자 소스 역시도 가공육, 볶음밥, 튀김이라는 기름진 메뉴 구성을 절묘하게 보완했다. 내다 팔아도 될 수준,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가 직접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예상한 맛은 한참 웃돌았다.

“이 몸은 이 새우튀김이 좋아. 반죽은 엄청 바삭바삭한데 새우는 탱글탱글해.”

“그건 사온 거야. 함박스테이크도.”

근처 상점가 정육점에서 팔고 있어서 시험 삼아 사 봤다는 이야기였다. 아마미야보다 며칠 먼저 이곳에서 머무르면서도 주변에 상점가가 있는 줄은 몰랐다. 예전이었다면 SNS며 온갖 커뮤니티를 돌며 인기 있는 가게라면 죄다 확인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하기야, 필요 없는 것으로 치자면 지금 이 상황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 터다. 어째서 자신은 아마미야와 마주 본 채 식사하고 있을까. 그냥 거절해 버리면 되는 일이었는데. 아케치는 반쯤 남은 음식을 쳐다보다가 수저를 내렸다. 더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양은 좀 많아.”

“그런가?”

“오므라이스랑 샐러드만 있어도 충분하잖아.”

“그럼 어린이 정식이 아니니까.”

아마미야가 그렇게 말하며 제 몫의 치킨라이스를 크게 한 입 떠먹었다. 이제 보니 그는 아직도 국기 장식을 뽑지 않은 채, 가운데 부분만을 남기고 깎아내듯 밥을 먹고 있었다. 먹으면서 쓸데없이 유치한 장난이나 하고 있다니. 정말 어린 애가 된 기분이기라도 한 건가.

“왜 그렇게 어린이 정식에 집착하는 건데?”

아마미야는 한참을 우물거린 후에야 입에 든 음식을 삼키고 대답했다.

“……그냥?”

또 ‘그냥’이다. 심지어 이번에는 의문형이기까지. 대체 뭐냐고 묻고 싶다. 무엇을 원하는 거냐고. 다른 사람들이야 아케치 고로의 본성을 모른다지만, 청렴하고 정의로운 ‘탐정 왕자’를 진짜라고 생각한다지만, 아마미야 렌은 다르지 않은가. 아케치가 여태껏 무슨 짓을 저질러 왔는지 전부 알고 있으면서. 아케치의 표정이 굳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었는지, 아마미야가 당혹한 듯 물었다.

“어린이 정식 싫어해?”

“……아니. 딱히.”

싫은 건 네 태도야. 아케치는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시선을 내렸다. 뭇 어린이들이 동경해 마땅했을 음식은 아케치의 손에 의해 아무렇게나 파헤쳐져 이제는 아무도 관심 주지 않을 모양새로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입이 열렸을 때, 아케치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먹어본 적 없었어. 한 번도.”

먹고 싶다는 희망조차 품어본 적 없었다. 아이들이 좋아할 메뉴를 고르고 골라 한 접시에 담아낸, 그야말로 꿈만 같은 요리 아니겠는가. 누군가에게 꿈은 입에 담기만 해도 당연하게 현실이 되는 것이지만, 아케치에게는 정반대로, 마음에 품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케치는 기대하는 법보다도 전에 포기하는 법부터 배웠다. 그편이 가장 쉬우니까.

기대를 걸지 않으면, 배반당할 일도 없지 않은가.

“나도 안 먹어봤어.”

아마미야는 그렇게 대답했다. 별달리 대단한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래서 그냥 해본 거야.”

역시 그는 자신과 전혀 달랐다. 조금도 같은 부분이라고는 없었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도리어 몸에서 힘이 빠졌다. 아케치는 숟가락을 만지작거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뭐, 맛은 나쁘지 않았어.”

아마미야가 다행이라는 듯이 미소 지었다. 아케치의 감상을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듯한 태도에 이질감이 들었다.

“다음부턴 양 줄일게.”

“또 뭘 하려고?”

“뭐든지.”

이상했다. 무언가 어긋나 있다. 분명 대화하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말이 통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마미야는 무언가 다른 것을 보고 있다. 아침부터 느꼈던 기묘한 감각이 다시금 아케치의 발목을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케치는 위화감을 떨쳐버리려는 듯 날카롭게 물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나랑 밥 먹어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어쩌다 동거하게 됐다고 가족 놀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아마미야의 표정이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흐트러졌다. 모르가나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렌은…….”

“아니, 괜찮아.”

아마미야가 손을 들어 모르가나를 막았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가 본 적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아케치를 바라보았다.

“그냥, 정말 그냥이야. 그냥 하고 싶어서 그래.”

“그건 이유가 안 돼.”

“……그때, 마루키의 세계에서 벗어난 이후로, 생각을 좀 해 봤어. 내가 뭘 하고 싶었던 건지. 너한테 뭘 원한 건지. 난…… 그냥 이런 걸 하고 싶었어. 아케치는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아마미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뜬구름 잡는 소리에도 정도가 있지. 아케치는 아마미야의 말을 끊고 물었다.

“마루키가 누구야?”


병원에서, 아케치는 많은 기사를 살폈다. 시도 마사요시의 재판, 아마미야 렌의 입소와 출소. 그밖에 아케치가 의식이 없는 동안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 어떤 기사는 대서특필되었고, 어떤 기사는 그저 사소한 찌라시에 불과했고, 어떤 기사는 뒷돈을 제법 먹인 티가 났으며, 어떤 기사는 기자의 사견이 가득 담겨 있었지만, 어쨌거나 수많은 줄글들을 읽어댄 끝에 아케치는 원하던 정보를 대략적으로 얻어낼 수 있었다.

시도 마사요시는 ‘개심’되었다. 단, 이세계와 관련한 죄과는 애초 존재조차 않은 듯 그 어떤 기사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언급이 사라진 쪽에 가까울까. 예상했던 대로였다. 이세계를 이용한 범죄에는 수많은 이들의 이해득실이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보고도 못 본 척 묵살하기로 동의한 자들이 한둘이 아닐 터였다. 이 나라는 그런 것에 무척이나 능하지 않던가. 불리한 사실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무시해 버리는 행동 말이다.

한편 아마미야 렌은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마음의 괴도단' 리더로서 자진 출두했고, 보호 관찰 처분 상태였던 탓에 소년원에 입소하게 되었지만, 피해자 여성의 증언 덕택에 결백을 입증받아 몇달만에 퇴소하게 되었다는 모양이었다. 이쪽도 이세계와 관련한 이야기는 모든 뉴스 플랫폼을 전부 뒤져 보아도 한 톨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도 그렇게 되리라. 모든 죄를 털어놓더라도 입증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더 정확히는, ‘없는 것’으로 취급되겠지. 손을 더럽혔다고 자백한들 미치광이 취급이나 받게 될 터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진실에 관심이 없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납득하기 쉽도록 가공된 허구다. 청렴하고 정의로운 ‘탐정 왕자’처럼.

결국, 아케치 고로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다.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알아야 할 건 그 정도로 충분한 줄 알았는데.

아케치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마미야의 설명은 그 정도로 허무맹랑했다. 대중의 나태로 인해 만들어진 신에게 반역했다는 이야기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스케일이 큰데, 심지어는 그 빈자리를 차지하여 신이 되려 한 남자가 만들어낸 ‘모두가 고통받지 않을 수 있는’ 세계에서 빠져나왔다는 소리까지 나오자 말문까지 막힐 지경이었다. 이게 무슨 삼류 SF 소설도 아니고.

그 세계에서, 아케치 역시도 마루키와 맞서 싸웠다고 아마미야는 말했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던 거군.”

“…….”

“그렇지?”

아마미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잠시 뒤에야 작게 속삭였다.

“널, 다시 만나고 싶었어.”

그 말은 어쩐지 고해 같다고, 아케치는 생각했다.

니지마 사에의 팰리스를 공략하던 때, 아마미야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칸다에 있는 성당에 아케치를 데려간 적이 있었다. 모든 일이 다 끝난 지금 생각해 보자면, 아케치가 한 짓을 알고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정작 그 당시 아케치는 오로지 계획을 들키지 않아야 한다, 의심을 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해 본의 아니게 고해소로 들어갔지만.

그렇다고 얇은 벽 너머에 있는 신부에게 정말로 죄를 고해하지는 않았다. 아케치는 그 어떠한 범죄조차 느껴지지 않도록 적당히 뭉뚱그려 얼버무린 말만을 내뱉었고, 따라서 보속하면 신이 죄를 사하여 줄 것이라는 신부의 말은 조금도 와닿지 않았다. 그러나 내면에 엉켜 있던 생각을 그저 토해내는 행위 자체만큼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여겼던 기억이 났다.

아마미야의 속삭임도 그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해묵은 마음을 건져 올려, 그것이 죄인 양 사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행위.

그러나 아케치는 그런 행동에 장단을 맞춰 줄 마음 따위 없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네 입맛대로 만들어낸 나랑 즐거운 시간이라도 보냈었나 보지? 만나자마자 같이 살자는 소리부터 튀어나온 걸 보면. 내가 너랑 이딴 소꿉장난이나 어울려줄 사람처럼 보였어? 하, 웃기지도 않아.”

아케치는 한차례 말을 쏟아낸 후 크게 숨을 들이켰다. 온몸이 떨리며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리는 한편으로, 머릿속만은 차갑게 식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진실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납득하기 쉽도록 가공된 허구에만 애착을 가진다. 뼈저리도록 알고 있던 사실 아니던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텐데.

그라면 무언가 다를 줄 알았던 걸까?

‘정의’를 진심으로 외치고, 이득도 없이 타인을 구하고, 역경 속에서도 부러지지 않으니까, 아케치 고로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니까. 무언가 다르리라고?

우스운 망상이다. 고작해야 집세를 절반 분담해 줄 상대를 찾고 있었다는 이유로 자신을 죽이려 한 상대에게 동거를 제안하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결국 그도 다른 것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아케치 고로가 아니라.

“왜, ‘탐정 왕자’가 그렇게 좋았나 봐. 배신당하고도 못 잊어서 망상 속에서 꾸며낼 정도로. 정의로운 탐정 왕자랑 세계를 구하는 놀이라도 하고 싶었어? 바보 같은 소리 마! 그딴 건 다 가짜라고! 너도 알잖아! 넌, 너는 다 봤잖아!”

그날, 엔진실에서, 모든 걸 다 봤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눈두덩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관자놀이 부근에 찌르듯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목구멍 안쪽에서 신물이 울컥 치솟았다. 뱃속에서 위장이 불쾌하게 꿀럭거렸다. 아케치는 입가를 누른 채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변기를 붙들자마자 동시에 더는 구토감을 참아낼 수 없게 되었다. 아마미야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아케치?!”

“욱, 우웩…… 콜록, 윽……! 흐끅…….”

머리에 피가 쏠리며 압력이 치솟아 눈물이며 콧물이 연신 흘렀다. 방금 먹었던 음식들이 위액과 담즙에 섞여 변기통에 죄 쏟아졌다. 목구멍과 입안이 화상을 입은 마냥 홧홧했다. 죄다 게워낼 수 있으면, 편해질 줄 알았는데.

속이 더 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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