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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하기 짝이 없는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볼래?

by 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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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아렌, 네가 싫었어.

 

언제나 햇살같이 반짝이는 네가, 여전히 변함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네가, 나는 지독하게도 싫었어. 그 올곧은 눈이 나를 향할 때면 그만큼 지독한 것도 없었기에. 그래, 그 순간 네가 나를 바라보는 눈이, 나를 향하는 네 손길이, 내게 흘러오는 그 다정한 목소리가, 그 모든 것이 내게 저주였어. 내게 죽어버리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는 저주.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모든 것을 알았고, 해서 네가 내게 주는 모든 다정함의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이미 그것들을 지독할 만큼 잘 알고 있기에, 알아서 그만두려 했어. 하지만 여전히 의미가 없는 짓이었지. 나는 여전히 네가 싫은데, 너는 점점 더 선명해지기만 해서 나는 늘 괴로워야만 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를 피하는 것뿐인데, 멍청하게 다정하기만 한 너는 그조차 허락하지 않아서 나를 줄곧 수렁으로 무너뜨리고 있는 걸 너는 알고 있어, 아렌? 아, 그래…아렌, 아렌……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나의 친우, 아렌데루아. 나의 저주나 다름없는 너는 대체 어떻게 항상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건지 나는 여전히 알 수가 없어. 너는 내가 밉지도 않은 건지, 내가 두렵지도 않은 건지…나는 너에 대해서 더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분명 너는 나를 싫어해야 하는 게 맞는데, 네 다정이 언제나 나를 향하니 나는 대체 뭐가 맞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너는 전부 잊었니? 네 등에 그 상처를 만든 게 나야. 몇 번이고 너를 버린 채로 떠나간 게 나야. 줄곧 너를 피하고 있는 게 나야. 대체 네 다정은 얼마나 크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할 수 있지?

 

 

 

끝이 붉은 노란색 장미를…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어느 새부터 몸에 자라기 시작하는 꽃을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었다. 그걸 모르는 척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인생의 모든 것이 통달하고 해탈의 경지에 오른 사람일 게 분명해. 그러니 나는 그에 이르지 못해서 이것을 모르는 척 할 수 없는 거겠지.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어. 몸에서 장미가 피어나. 그것도 노란색의 장미가. 이 장미가 넌 대체 뭘 의미한다고 생각할 것 같아? 네가 만약 지금의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너는 그 장미를 무슨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오직 한 가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그것 뿐 생각나는 게 없어. 아마 네가 나와 같은 시간, 같은 상황이라면 너도 분명 이렇게 생각할 거야. 분명 그럴 수밖에 없어, 멍청한 아렌. 네가 있기에 내가 숨 쉬는 이곳은 무간이나 다름없어. 고작 한 겁이 어찌나도 긴지…도저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지. 이 빌어먹을 한 겁은 곧 끝나게 될 걸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그 짧은 시간조차 내게는 너무 길어. 내 곁에 항상 네가 있어서, 나는 고작 몇 분의 시간조차 억겁처럼 느껴져. 이 모든 것은 너로 비롯됨이며, 차마 네게서 벗어나지 못한 나로 비롯됨이다. 그래…어쩌면 결국 네 다정 잃지 못하고 앓는 나로 비롯됨이라 해야겠지.

……당연한 일이다. 별 수 없는 일이다. 파도가 밀려오면 그에 휩쓸리고, 바람이 불어오면 그에 흩날리는 것처럼 네 다정에 내가 흐트러지고 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야.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그저 감정에 휘둘리다 못해 집어 삼켜지는 것이 어찌 이리도 당연한 일이 되었는지…. 하지만 이유는 나로서도 알 수 없으니 나는 결국 어찌 할 도리도 모른 채 휘둘리고 말겠지. 그 모든 숱한 악의를 견디며 살아온 내가, 네 다정 하나는 견디지 못해서 만들어질 결과는 그야말로 최악일 거야. 나에게도, 아렌…너에게도, 우리 둘 모두에게 최악일 거야.

 

죽음조차 기꺼이 받아들일 테니, 남은 시간 부디 짧지 않기를 바랐다.

 

왜, 너는 그저 웃으며 넘겼다지만 근래에 이런 소문이 돌고 있지 않던가. 발병 이후 일주일 후에 식물인간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몸에 꽃이 피어나는 희귀병이 돌고 있다는 소문이. 그래,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때는 그저 웃어 넘겼어.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었지. 주변에 그런 경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몸에 꽃이 피어나는 일이 가능하다 여기지도 않았을 뿐더러, 꽃이 핀다 해도 고작 그것으로 죽음에 가까워지리라는 그 소문은 그저 허무맹랑한 옛 전설과 다름없는 이야기처럼 들렸으니까. 하지만 몸에 꽃이 피고, 그것을 뽑아내어보니 알겠더라. 그 소문은 절대 거짓이 아니야. 한 번의 시도, 그 이후에 손을 대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하나가 아니라 그 이상을 행했다면 분명 나는 죽었을 거야. 물론 그때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차라리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대로 모든 걸 놓아버리기에는 아쉬웠던 탓에 결국 행하지는 못했지. 아니, 아쉬웠다기보다는 두려웠다는 말이 맞을지도 몰라. 당연하지. 이제껏 지켜본 죽음이 몇인데 그 두려움이 오죽하겠어. 익숙해지고자 했건만 결국 익숙해지지는 못했으니, 이는 어쩌면 모든 것의 실패를 의미하는지도 모르지. 앞으로의 모든 실패가 그것 하나로 예견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야. 정말이지…그 이후로 나는 모든 걸 실패하고 있음이나 진배없으니까.

 

 

 

그럼에도 아픔은 지독했기에.

 

너는 내가 너에게 찾아오지 말라했을 때 내게 섭섭함을 느꼈겠지만, 나는 그 시간동안 지독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몸에서 꽃이 피는 것이 어디 정상적인 일이던가. 정상적인 일이 아닌 만큼이나 그는 분명 괴로웠다. 꽃이 몸에서 양분을 흡수하며 계속 피어나는데 자르지도 못하니, 별 다른 방법도 없었다. 그저 어두운 방 안에서 고통에 괴로워 할 뿐이었다. 뽑아내지도 잘라내지도 못해 피부를 긁어내기만 하니 피가 베어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비릿한 피의 향이 온 방 안을 덮어버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긁기만 했다고 그 꽃이 꺾이지 않았겠는가. 아니, 그렇지 않았다. 꽃은 또한 꺾였고, 또 뽑혀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 나는 또 그렇게 죽어가야만 했다.

아렌, 빌어먹을 아렌데루아. 왜 하필 너야. 왜 하필 네가 이 감정의 주인이라서 내가 벗어나지 못한 채로 수몰되게 만들어. 너와 함께 한 시간이 너무나도 길어서, 네가 없는 나의 시간은 내게 고작 찰나라서,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너와 함께 한 시간 뿐 떠오르는 게 없는데…. 왜 하필 너라서 나를 이렇게나 괴롭게 만들어. 차라리 센이었다면…금방 버렸을 텐데, 어차피 곁에 없는 사람이니까 금방 버릴 수 있었을 텐데…너는 그 숱한 악의를 두 눈으로 봤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내 곁에 있어서…나는 이걸 버릴 수가 없다는 걸 네가 알아? 고작 이거 하나 못 버려서 무너지고, 감정에 수몰되어서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나를 네가 보면 참 우습기도 하겠다. 하긴…내가 이러고 있는 꼴을 네가 안다면 참 우스운 일이겠지. 너를 떠나고, 네게 크디 큰 상처를 남긴 내가 이 꼴인데…우습지 않을 수가 없겠지. 내가 그 긴 시간동안 죽인 놈이 몇인데…그때 고작 너 하나 죽이지 못해서 내가 지금 이 꼴인 거잖아. 이게 얼마나 한심한 꼴이야. 나 스스로도 한심하다 여기니 이제껏 내가 죽인 놈들이 나를 비웃는 듯한 환청까지 들리는데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나는 기어코 찾아오는 너를 막을 방법 따위도 알지 못했었나.

 

며칠 만에 기어코 문을 박차고 온 네게 내가 무슨 말인들 할 수 있었을까. 그저 열에 끓어오르는 몸 애써 이끌고 네 앞에 서 보일 뿐이다. 고작 이 정도 아픔에 휘둘리는 모습 보여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찌푸리고 있는 네 얼굴 가만 보면서도 내가 전처럼 웃을 수가 없을 거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적어도 제대로 서 있기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는 그조차 할 수 없었다. 눈에 띄게 비틀거리다 못해 중심조차 못 잡는데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을 리가 없지. 하지만 열이 이렇게 오르는데 제정신 차리고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다 하여 네 앞에서 이리 중심 잃어 쓰러지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건만, 끓어오르는 열병은 그마저도 내 뜻대로 해주지 않았던지라 결국 네 앞에서 쓰러지기까지 하니 참 꼴사납기 그지없어.

아, 귓가에 무슨 소리가 울리는 것도 같은데 열이 올라서 그런가…정신마저 흐려서 아무것도 모르겠다. 어지러워서 그런지 제대로 들리는 게 하나도 없어. 어쩌면 정신이 없는 건 끊임없이 몸에서 자라나고 있는 꽃 탓인지도 모르겠다. 이 지독한 고통이 네 말마저 못 듣게 만드는 걸지도 모르겠어. 이다지도 선명한 고통이 이유가 되지 못할 리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네가 나를 매몰차게 내쳐버렸으면 좋겠다. 내가 너에게 그러했듯, 네가 내게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 그럼 나도 전부 버릴 수 있겠지. 그러면 나도 조금은 더 버틸 수 있겠지. 아니면 나 다시 눈 떴을 때 네가 없기라도 하기를 바라. 네가 차라리 그리 한다면 이 한 철 피고 질 꽃이 져버릴 시기가 빨라지지는 않을 테니.

 

 

 

이제 슬슬 알아들어. 네가 내 모든 흉이야, 아렌데루아.

 

하지만 너는 여전히 내 바람을 들어주지 않고, 알고 있을 리도 없으니…여전히 너는 내게 다정해서 눈을 떴을 때 내 옆에는 여전히 네가 있었다. 눈앞은 여전히 흐린데도 불구하고 네가 너임을 알아보게 만드는 이 감정이 얼마나 지독하고 가혹한지…. 목이 아프니 목에서는 쇳소리가 나고, 온몸은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아파서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네가 옆에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계속 시선이 네 쪽으로 가. 이렇게 지독한 게 ■■이라면 이런 것 따위 알지 못하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아니, 애초에 이런 것 따위 느끼지 못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아니, 이건 어쩌면 이 빌어먹을 감정이 이렇게나 지독한 것인 줄 알면서도 결국 이 마음 인지해버린 내 잘못이지. 알면서도 끝내 버리지 못한 내 잘못이다.

아, 짜증나. 센을 보내고, 린덴을 보내고서 수도 없이 속으로 뱉어내온 원망을 내가 들어야 될 판이라니. 이럴 거였으면 구하지 말지. 이럴 거였다면 구하지 말 걸. …내가 속으로 매일 같이 뱉어온 원망들을 너라고 해서 하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까 너도 분명 나를 원망하겠지. 매번 너를 피하고 피하다 못해 죽어버린 나를 너는 원망할 게 분명해. 원망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잖아. 솔직히 이미 나는 너한테 차고 넘칠 만큼 원망 받아 마땅한데, 네가 너무 다정한 탓에 그러지 않을 뿐이잖아.

 

그러니까 너도 내가 죽으면 원망할 거야, 아렌.

근데 있잖아……

너무 원망하지는 않으면 안 돼?

 

나 너한테 미움 받을 자신은 없단 말야.

 

나의 계절은 끝까지 봄이더라.

 

꽃이 몸에서 양분을 흡수해가며 피어나는 탓인가. 몸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쇠약해졌다. 고작 며칠 사이에 이렇게 망가졌다는 게 납득이 안 될 정도로. 원래도 잔병치레가 많던 몸이긴 했다지만 이렇게까지 쇠약해진 적이 있던가.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이 꼴이 된 걸 보면 내 ■■이 정말 지독하기는 한가 봐. 하긴, 네가 문을 박차고 나를 찾아왔을 때보다 더 악화된 몸을 이끌고 비틀거리면서 바다까지 온 내가 한참은 더 지독하지. 그래도 바다가 그리 멀리 있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그래서 네가 모르는 사이, 네가 나를 찾지 못하는 사이 여기까지 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네가 내 마지막 꼴은 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야, 아렌.

 

이 파도를 타고 네게 전해질 마음이라면 참 좋을 텐데. 이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는 게 내가 아니라 이 마음이었으면 좋았을 걸, 결국 전하지도 못할 마음이라 참 아프기만 해. 놓지도 못할 마음이라 더 아리기도 하지. 있잖아, 이건 마치 이 절벽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아픈 마음이야. 평생 너는 알지 못할 마음이야. 그러니까 저 파도처럼 부서져 버리기를. 어딘가로 휩쓸려가서 누군가에게 발견될 바에는 바다에서 한 조각도 남기지 못하고 부서져서 흩어지기를. 그래서 네가 이 마음 한 톨도 알지 못하기를 바라.

 

 

 

아, 어쩌면……

네가 언젠가는 알게 될 감정이려나.

 

…만약 네가 이 마음 알게 된다면 참 비극적이기도 하겠다, 내 사랑은.

 

 

 

 

 

 

 

 

 

 

 

 

 

 

 

 

나의 봄아.

끝내 나를 불살라 버릴 나의 봄아.

나는 네가 영원토록 행복하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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