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넘어 가면

1, 2편 합본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수고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 이데아가 재빨리 채팅 답을 확인한 뒤 기지개를 켰다. 

보자, 지금 시간이… 뭐 안 봐도 새벽이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게임을 하느라 밤새우진 않았으니 그걸로 괜찮잖아? 오늘의 소인에게 칭찬 스티커 하나, 아니면 '아슬아슬하게 철야하지 않은 당신'이라는 일정 확률로 희귀한 조건 달성 시 획득 가능한 칭호를 주셈! F○14!!

…알고 있다. 이건 다 재치라고는 조금도 없는, 어디까지나 재미없는 오타쿠의 농담일 뿐. 그런데도 구태여 먼저 농담한 이유는 며칠 간 무기 하나를 얻고자 던전 하나를 여러 번 돌았던 일의 결실을 봤기 때문이다. 맞다. 이데아는 희박한 확률을 뚫고 드랍으로만 얻을 수 있는 무기를 얻었다. 무려 친절한 겜친에게 선뜻 양보받아서. 이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인가…… 역시, 평생 머슬 쿠레나이 씨와는 겜친하고 싶다는! 

요컨대 그런 내용으로, 살짝, 아주 살짝 신이 났었다. 그래서인지 속사포로 기쁨을 토해내고 나니 남는 건 오로지 완전히 꺼진 컴퓨터의 대기 화면 속 보이는 본인의 모습. 음침하고 초췌하고 창백한 얼굴. 기분 나쁜 오타쿠의 보편적 특징을 그대로 따온 듯한 현실 인물만이 존재했다. 방에 틀어박혀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게임을 하는 은둔형 외톨이. 

그렇게 강제로 갖게 된 잔인한 현실 자각 시간으로 인해, 이데아가 따끈따끈하게 겪은 '게임 종료 직전 기적처럼 발생한 레어 무기 획득'이라는 즐거운 일은 채 5분도 유지되지 못했다. 모니터를 잠시간 바라보던 이데아 슈라우드가 언제 그랬냐는 듯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시작됐네, 귀찮은 자기 반성 모드.

…이게 다 너 때문인데.


슬쩍 시선을 움직여 영문도 모른 채 자고 있는 여자를 바라본다. 어쩔 땐 왼쪽에 있다가도 오른쪽에 있는 신출귀몰한 피어싱이 푸른빛을 받아 옅게 빛났다. 안다. 이 피어싱이 무슨 의미인지도, 여자가 왜 이 학원에 들어왔는지도 대충 알고 있다. 건조한 한숨을 내쉰 이데아가 컴퓨터 옆 어딘가에 놔두었던 고급 헤드셋을 목에 걸고 닳아빠진 후드 집업을 걸쳤다. 쓸데없는 잡념에 빠질 여유는 없었다. 곧 익숙한 시간이 찾아올 터이므로.

어느샌가 여자가 부스스한 머리에 눈을 꼭 감고 비틀비틀 방을 나서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데아가 익숙한 듯 약간의 거리를 두고 천천히 따라나선다.

언제쯤 끝날까. 마지막을 기대하면서도 막연히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지하 아이돌의 가련한 사랑 고백 내용이 헤드셋을 통해 고막에 퍼진다. 동시에 소매 끝으로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래가 살며시 떨어졌다. 이데아는 무심한 표정으로 모래를 털어내려다 그만두었다. 모래는 또 묻을 테니까. 당시에는 꼼꼼하게 털었다고 생각했으나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모래를 뒤늦게 털어내는 일은 이제 질렸다. 눈에 거스르지 않을 정도만 모래를 털어낸 그가 허리를 곧추 세웠다. 느긋하게 모래를 떼고 있다가 상대를 놓치면 안 됐다. 아까와는 달리 조금 다급한 발걸음으로 이데아가 앞서 걸어가는 여자를 뒤쫓았다. 그의 목적지는 이미 알고 있지만, 두 번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떠나는 사람을 붙잡는 일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길 바랐다.

여자와 이데아의 기묘한 동행은 몇 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슬슬 새 학년 진급이 목전으로 다가왔음을 모두 느끼는 시기. 다른 말로 하면 여자와 이데아의 룸메이트 생활이 끝나는 시기도 금방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기이한 사건은 다가올 방학의 기쁨도, 드디어 1인실을 사용한다는 즐거움도 이상하게 와닿지 않아 축 처져있던 즈음 발생했다.

여자는 자신과 달리 늘 바빴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룸메이트 생활에서 이데아가 대부분 봤던 모습은 언제나 꽁지 머리를 달랑거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었다. 바쁘겠지. 여자의 동아리는 인싸들만 모인 경음부인데, 그는 거기서도 제일 주목받는 역할을 맡았다. 밴드의 꽃이자 얼굴인 보컬. 경음부 부원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이데아마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역할 선정이었다. 여자의 음색은 둘째치고 무엇보다도 강한 호소력을, 흡입력을 무시하다니 가당치도 않다. 아이돌 팬질은 전혀 하지 않을 듯한 갓반인들이라도 듣는 귀는 있군. 갓반인의 막귀를 내심 걱정했던 그였으나 오르토를 통해, 또 여러모로 학원의 다른 이들과 연이 많은 동아리 후배를 통해 알음알음 파악한 소식 중에 제일 기뻤던 소식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학원 밴드의 메인 보컬이 된다고 해도 이데아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기쁘긴 하지만, 그게 전부. 경음부 부실에 갈 일도 없을뿐더러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부원 중에서 여자만 가위로 오려내듯 따로 만날 수 있다면야 달랐겠지만, 현실은 그가 만든 VR 게임이 아니었다. 

고작 부원 네 명에 불과한 동아리. 학원이 미치지 않고서야 제대로 된 동아리로 인정할 리가 없었고, 이에 정식 동아리가 아닌 동호회 취급을 받아 학원에서 하는 라이브 무대는 웬만하면 전부 교실에서 이루어진다. 하츠라뷸 기숙사생부터 시작해 일반인의 불규칙한 콜을 듣고 있는 일은 지옥보다도 더한 고통이었다. 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여자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갔다가 꼴사나운 표정으로 열심히 콜을 외치는 본인의 모습을 나중에서야 녹화된 동영상으로 확인한다면 더더욱. 어차피 여자의 전신은 이런 좁디좁은 학원 교실 무대 바닥이나 촌구석인 현자의 섬에서 제일 큰 건물 무대가 아니라, 여러 나라를 다니며 제일 화려하고 대규모 랜드마크에서 무대하며 자기 재능을 뽐낼 아이돌이니까. 작금의 무대는 놓쳐도 된다. 그리 말하면서도 경음부 라이브 무대가 있는 날이면 태블릿을 대동해 녹화하는 일을 포기하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이유는 단순하다. 저열한 욕망이다. 실수로 미처 갱신하지 못한 게임을 다시 진행할 수 있는 기회가 도래했다. 아마 이번에야말로 정말 마지막일 순간. 헤어졌다 다시 만난 소꿉친구와 재차 친해질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보통의 경우라도 어려운 일을, 심지어 상대가 어린 시절 기억을 거의 다 잊어버린 상태라면 더더욱 불가능했다. 거기에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는 한 가지가 또 남아있었다. 이데아에게 여태 깊게 남아있는 죄책감과 미안함. 두 가지 감정 역시 친구에게 갖거나 표출하기에 썩 바람직한 감정은 아니었다. 고로, 여자와 재회하자마자 그는 빠르게 다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네 미성년의 끝을 샅샅이 기억하겠다고. 혹시나 소실될 걱정에 PC와 태블릿, 개인 클라우드에 저마다 백업해 둔 동영상 목록이 증명했다. 언제까지고 이걸 바라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어제 자 라이브 영상은 이데아가 품은 일말의 희망과 기대를 눈치챈 듯, 기가 막힌 타이밍에 뚝 끊어지며 끝났다. 오르토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대비하지 못한 이데아의 실책이었다. 어제 자 여자의 엔딩 멘트는 뭐였을까? 머릿속이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 저기. …라, 라이브는 재밌어?"

여자가 동영상 속 다른 밴드부원의 샤우팅 소리에 작게 키득키득 웃는다. 그는 오늘 했던 라이브가 여간 재밌었는지, 아까부터 녹화 영상을 재차 돌려보고 있었다. 덕분에 이데아가 소심하게 먼저 말을 붙여봐도 저 작은 스마트폰과 유선 이어폰 사이에 막혀버렸다. 이데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포기해?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고 넘길까? 안 그래도 창백한 안색이 더 허여멀게지는 기분이 들었다. 힘들어, 그만하자. 이데아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자를 향해 돌렸던 몸을 슬그머니 돌렸다.

"슈라우드 선배?"

여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엄밀히 말하면 여자가 먼저 말을 걸기 전에, 이데아가 먼저 말을 걸었긴 했지만. 이제 그건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니까. 이데아가 공포 영화 속 등장인물처럼 몸을 삐걱삐걱 다시 움직였다. 여자 귀에 꽂혔던 이어폰 중 한 짝은 어느새 손에 쥔 상태였다.

"혹시 저한테 뭐 이야기하셨어요? 기분 탓이면 죄송해요. 뭔가 선배가 저한테 말 거신 느낌이라서⋯."

"⋯⋯마,"

"네."

"마, 맞긴 한데⋯. 별거 아니야."

"그래도⋯ 그래도, 듣고 싶어요."

"아, 응⋯. 괜찮다면야. ⋯극, 그, 그럼. 아. 저, 저, 저기! 서머 씨는⋯ 그, 어, 어제! 그래, 어제. 어제 라이브 엔딩 멘트 뭐야? 조, 조금 궁금하달까."

말이 끝나자마자 이데아가 힉, 하고 단말마를 내질렀다. 이 질문이 아니었다. 라이브는 어떻냐느니, 동아리 생활은 어떠냐고 나름대로 다소 어색한 사이의 선후배가 나누기 적합한 질문을 여럿 생각해 뒀다. 이 주제가 신통하지 않거나 상대의 지뢰를 밟은 듯할 때, 황급히 변경할 수 있도록. 하지만 라이브 엔딩 멘트 질문을 다짜고짜 물어보는 선배라니.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제요? 어⋯ 아! 모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또 이곳에서 봐요, 였던 것 같아요."

"우구굿⋯⋯"

입에서 짐승 소리가 났다. 이데아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 소인의 최애 솔로 아이돌. 스스로에게 유일한 지하 아이돌이 가케모라면, 유일한 솔로 아이돌은 여자였다. 매일 멘트가 달라! 아이돌이라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감격스러운 기분은 감춰지지 않는다.

"그, 글쿤. 이, 이건⋯ 오르토가, 밴드 무대를 궁금해해서. 나도 뭐⋯ 싫어하는 건 아니고. 그래서, 멘트도 궁금해할까 봐. 그런 연유로⋯."

"알아요! 선배 태블릿, 자주 봤어요."

"왜?!"

들키고 싶지 않아서 교실에서 최적의 사각지대를 찾아 은밀하게 이동하는데 어떻게 아는 거지?! 설마 소인의 소꿉친구, 닌자였습니다만? ⋯같은 라노벨 전개는 아직 나도 힘들다고! 이데아가 가냘픈 비명을 질렀다.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이에게 들켜버린 가장 기분 나쁜 행동. 절망이다. 절망 오브 절망. 절망의 끝. 살생부를 적듯 절망을 기록하던 이데아가 이어진 여자의 말에 황급히 떨군 고개를 들었다.

"오르토 군이 알려줬어요."

이번에야말로 정말 심장이 지하 끝까지 곤두박질쳤다. 이데아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만 끔뻑였다.

오르토는 전부 알고 있었다.

자기 형이 방과 후 시간에 태블릿의 모습으로 도대체 어디에 가는지. 그 태블릿에 들어있는 동영상 형식의 잠금 파일이 무엇인지. 애초에 오르토가 모를만한 내용은 거의 없다. 이데아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접근하지 않을 뿐. 그러나 이데아의 사생활 중 일부는 오르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지켜줘야만 하는 정보가 아니라, 둘 모두에게 공개된 정보. 오르토에게는 여자와의 기억이 그랬다. 로봇이 된 오르토도 유년 시절, 셋이 모여서 다양한 게임을 하고 과자를 먹고 지도를 봤던 순간을 기억하기 때문에. 먼저 다가가 선뜻 말을 걸 수 있는 점도, 상대에게 형의 사생활 일부를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점 또한 대상이 여자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을 원하진 않았다. 간단한 안부 인사 이후 오르토가 자기 형이 좋아할 만한 구석진 자리 몇몇 곳을 알려줬다는 여자의 친절한 부연 설명. 이에 맞춰 이데아의 사지가 점점 오그라든다. 대화 소재라 생각했던 것이 실은 함정이었음에 속으로 깊게 탄식하면서.

"오르토 군도, 슈라우드 선배도 좋아한다고 해줘서 기뻤어요."

"그, 그래? ⋯내가 좋아하는 것도? 너는, 기쁜 거야?"

"네."

여자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이데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묘한 충족감이 들었다.

"노래를 좋아한다는 말만큼 기분 좋은 말은 없잖아요. 기뻐요. 언제나."

"아. 아아⋯ 응. 그렇겠지. 노래, 잘 부르니까."

"잘 부르는 거랑 좋아한다는 말은 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이거, 지뢰였나? 이데아가 슬쩍 용기 내어 여자의 얼굴을 살펴봤다. 표정을 읽기 위해서. 하지만 여자의 표정은 구겨지거나 불쾌해 보이진 않았다. 이데아는 순간 긴장으로 추켜세운 몸의 힘을 다시 풀었다. 곧바로 허리를 살짝 굽힌 편한 자세로 이어지는 여자의 말을 듣는다. 밤이라 평소보다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 심장이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

"좋아한다는 의미에 잘 부른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으면 좋아요."

팬이 됐다거나 좋아한다는 말을 좋아하나 봐요. 여자가 개구쟁이처럼 생글뱅글 웃었다. 그럼 이데아는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다 어색하게 따라 웃는다. 소리 없이.

"특히 요즘에 봐주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저, 선물도 받았는데."

"뭔데?"

본디 아이돌은 악성 팬이 있을 수 있으므로 선물도 가려받아야 좋은데. 말하지 못한 생각을 애써 떨쳐내며 이데아가 물었다. 여자가 즐거운 듯 신난 목소리로 잠시만요! 라고 외치더니 잠옷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에서 꺼낸 주먹 쥔 손.

펼치니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보석이 있었다. 연한 보랏빛 색이 꼭 여자와 닮아있었다.

"좋은 기억을 선물해주는 보석이래요. 폼피오레 기숙사 분이 주고 가셨는데, 워낙 빨리 주고 가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못했어요. 그게 좀 아쉽지만⋯ 다음에 보면 고맙다고 말하려고요."

이 보석 덕분에 좋은 일이 생기는 듯해서. 선배의 일도 그렇고. 여자가 재차 빙긋 웃더니 조심스럽게 보석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데아도 여자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넘어가려 했다. 보석 때문에 살짝 봉긋해진 주머니를 흘낏 바라본 여자가 덧붙였다.

근데 원랜 색이 투명했는데 점점 변하더라고요! 조금 신기했어요. 무슨 특별한 기능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이데아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불안이 드리운다. 입학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신입생이자 소꿉친구이고 경음부 메인 보컬에게 악질 팬이 생겼다. 왜 그러세요? 여자의 자수정 같은 눈동자는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이데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형의 말, 진짜였어!"

오르토가 들뜬 듯한 어조로 말을 붙여왔다. 아마 별다른 특징 없는 평범한 마법 아이템을 한눈에 알아본 형의 능력이 자랑스러웠겠지. 하지만 이데아로서는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서글퍼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오르토. 사실 그 물건 주인 말이야. 오르토도 아는 사람이고, 우리랑 제법 친했던 사이였거든. 근데 불순한 의도를 지닌 게 틀림없는 물건을 받아버렸어. …라고 설명할 수 있을 리가. 말하는 순간, 영리한 동생은 필시 알아채고 되묻을 터다.

형. 혹시 그 사람 말야. 서머 누나를 말하는 거야?

동아리 후배와 동생, 그리고 자신이 일방적으로 무거운 감정을 품고 있는 소꿉친구까지 셋. 이데아의 교우 관계란 동생을 제외하면 거의 없다시피했다. 그래. 평소 좁디좁은 인간관계를 넓히지 않은 과오가 여기서 드러날 테지. 하지만 본인의 인간관계에 후회는 없고, 후회할 시간이 있으면 모바일 게임 로그인 보너스 보상이 적당한지 아니면 유저를 무시하는 쪽에 가까운지를 놓고 토론하는 일이 더 즐거웠다.

그래서인지 덕질이나 마도 공학 외에 답이 정해져 있는 설명을 하는 취미 역시 없었다. 혹은 스스로에게 그만큼 가까운 사람이 없어서 그럴까. 굳이 수고를 감수해 가며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하다니. 아무리 가정하고 생각한들 본성에 맞지 않는다.

더욱이 이번 일에선 동생조차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본인의 유일한 예외였는데도. 어쩌면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포함하지 못하는 문제가 존재했고, 그게 이번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을 동생에게 말할 수 있지만, 단 하나. 서머 셀린이라는 여자 이야기에 관해서는 유독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터놓고 말할 용기가 부족했다.

아… 나라는 인간의 존재가 불편해. 동생에게조차, 동생의 앞에서도 솔직할 수 없다니. 이런 게 형이냐고.

약간의 자조를 품고, 오르토에게서 시선을 돌린 이데아가 가냘픈 한숨을 내뱉었다. 됐다. 지금 중요한 건 이 문제가 아니다. 평생을 지고 가야 할 문제를 고민할 시간은 쌔고 쌨다. 그것보단 당장 급한 일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

하지만 현시점에서는 일단 물건의 정체만 대충 파악했을 뿐, 용도가 불순하다는 점은 아직 알 수 없다. 0과 1이 확실하게 나뉜 공학의 세계와 달리 현실의 무엇도 불확실하므로. 확실에 가까울 뿐, '완전히' 확실하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그게 빌어먹을 정도로 귀찮았다. 아니면 어떡하지? 내가 마법 아이템을 착각했다면? 물론 내가 착각할 확률은 극히 희박하지만 그래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게다가 다른 무엇보다 오르토의 형으로서, 이데아 본인이 같은 기숙사 후배의 영상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하고 싶었다. 가타부타 여러 말을 붙이고 핑계를 댔지만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자면 진짜 이유는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괜히 확실해지기도 전에 의문을 제시했다가 지금껏 숨기고 있던 사실도 제 입으로 밝혀야 할지 모른다. 그것만은 죽어도 싫었다.

어? 어떻게 알았냐고? 응. 맞아. 형, 우리 두 사람의 소꿉친구를 스토킹하고 있소이다. 그래서 그 보석의 존재도 다른 누구보다 빨리 캐치할 수 있었단 사실! 후히힛. 그래, 오르토도 이 콜렉션 볼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상은 마이크가 고장 난 걸 뒤늦게 알아챘지만 당황하지 않고 웃으면서 관객을 조용히 시킨 다음에 생목으로 부르는 건데….

잠깐 상상했으나 더할 나위 없는 최악이었다. 내가 왜 사회적 체면 자살, 아니 인격 말살 방법을 내 입으로 하나 더 늘려야 하는데? 오르토는 심지어 자신이 만든 최고의 휴머노이드다. 이런 사소한 말 한마디도 평생 잊지 않을 유능한 로봇.

비록 저번에 여자의 입을 통해 들었던 잔인한 말로 인해 오르토가 진즉 알고 있었다는 점을 알았다고 해도, 속으로 알고 있는 일과 직접 입으로 내뱉는 일은 다르다. 이데아는 아직까진 자기 입으로 말할 생각이 없었다. 상냥한 동생이 기다리다 못해 먼저 해명을 요구하거나 설명을 바랄 때가 오지 않는 한 먼저 말해야겠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그렇게 정확한 대상을 밝히는 일을 어물쩍 넘어간 이데아가 간단히 부연설명했다.

"그런 아이템이야 뻔하니까. 자기 마음을 음침하게 표현하는 녀석. 심지어 그 방식이 로맨틱하다고 믿는다는 점이 제일 최악! 으으, 웬만해선 상종하기 싫은 부류 NO.1인데… 오르토. 그거, 지금 구매 가능해?"

"음… 미안, 형. 사이트 여러 곳을 둘러봐도 구하는 사람은 많은데 파는 사람은 없어. 지금은 단종된 마법 아이템이라 품귀 현상이 붙은 데다가……"

오르토가 이데아의 컴퓨터를 잠깐 만지는 듯하더니 한 영상을 화면에 띄웠다. 연예인으로 추정되는 화려한 외모의 남녀 한 쌍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무언가를 주고받았다. 이데아가 며칠 전에 보았던 그 보석이었다. 다만, 영상 속에서는 보석의 색깔이 전혀 달랐다. 룸메이트의 눈 색처럼 보랏빛을 띤 게 아니라 연한 분홍빛으로 영롱히 반짝이고 있었다. 오르토가 재생을 멈추고 명랑하게 말했다.

"이 로맨스 영화에 나와서 더 유명해졌어. 연인, 혹은 호감을 지닌 사람에게 주는 선물로 로맨스 영화 매니아 사이에서 꽤 유명해졌다나… 한정 수량으로 제작된 물건이라 구하기 어렵다는 것 같아."

"한정 수량은 대략 몇 개 정돈데?"

"100개도 안 되는 것 같아! 당시 언론 기사를 살펴보면 100개 한정으로 제작했다고 나와 있지만, 판매 이후 몇몇 글에는 분실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어. 아마 지금 소유한 사람은 100명보다 더 적을 거야."

"그리고 그중 한 명이 우리 학교 학생이라는 건가."

"응. 저기, 형."

"왜?"

"⋯이번 일은 온라인보다 오프라인으로 접근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사소한 물건 같은걸, 온라인에 일일이 적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는 점은 형도 알고 있을 테고⋯."

어디까지나 소문이지만 폼피오레 기숙사생은 다른 기숙사에 비하면 소셜 네트워크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은 경향을 띤다고 해. 대면으로 담소 나누는 행위를 훨씬 선호하고….

다정한 동생이 조심스럽게 권유하는 기색을 보인다. 오르토는 이데아 본인과 달리 어물어물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디에서나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신 있게 외치는 동생이었다. 그런 그가 일부러 머뭇거리며 말을 건네는 순간은 대부분 이데아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서일 뿐.

알고 있다. 이 촌구석에 위치한 학원 내 인물을 찾을 때는 온라인보다 오프라인이 배로 도움이 된다는 사실쯤은 당연히. 단지, 인정하기 싫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 벌어지는 일은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 나 혼자서 해내기란 현실은 물론이고 애니메이션에서도 불가능한 전개라는 점을. 쉽게 인정하는 순간 지는 느낌이라서. 그래서…….

오르토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애정 어린 시선으로 뜸 들이는 이데아를 바라본다. 아무 말 없이 기계 소리만 간헐적으로 울리는 방. 목을 가다듬은 이데아가 마지못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토가 활짝 웃는다.

"좋았어! 그럼 서머 누나를 위해서 힘내자!"

"역시 알고 있었잖아⋯."

"헤헤."

지겹다.

훤히 보이는 속임수. 아니, 이걸 속임수라 말할 수 있을까? 대놓고 자기 속셈을 알아달라는 뜻으로 보이는데? 아즐 아셴그로토가 주름 하나 없는 매끈한 이마를 다소곳하게 찌푸렸다. 벌써 몇 번째인지. 거위가 낳은 황금알과 다름없는 금싸라기 땅을 대놓고 입찰하지 않은 게. 평소라면 벌써 사방에 자기 땅을 독점 수준으로 잔뜩 만들어 놓고 기세등등하게 어마어마한 통행비를 요구했을 터였다. 광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데⋯⋯

"할 말이 있으면 직접 하세요."

다소 신경질적으로 가상 화폐를 던지듯 통에 집어넣은 아즐이 땅문서를 가져가며 말했다. 운 요소가 강한 게임. 안 그래도 게임 대부분에 강한 상대가 이런 게임에 강하다는 사실은 불공평하기 그지없었으나, 아즐은 태어날 때부터 삶은 절대로 동화 속 이야기처럼 아름답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쉽게 말해 불공평에 또 다른 불공평을 더 해봤자 전혀 놀랍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자기 승리욕을 불태우게 하면 모를까.

현실보다 게임에서 운이 엄청나게 좋은 남자와 그 남자 편을 들어주는 모든 게임. 이 때문에 지금껏 백이면 백 전부 패배했으나, 유년 시절부터 줄곧 아즐은 패배로부터 성장해 왔다. 패배하면서 느끼는 격렬한 분노, 언젠가부터 마음속 깊이 은은하게 자리 잡은 열등감, 상대를 짓누르고 싶은 정복욕으로부터. 남들이 기피하거나 지향하지 않는 상황에서 꿋꿋이 성장해 온 남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따라서 오늘도 늘 그렇듯 아즐 아셴그로토의 성장 발판 중 하나가 시작되는 날이었고, 이와 동시에 그동안 쌓였던 성장 동력이 폭발하는 날인 줄 알았다. 막 첫 바퀴를 돌았을 시점엔 그랬다.

"에? 어, 무, 무슨…!"

상대가 불안함이 가득 담은 채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리에 열이 살짝 차올라서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이제서야 제대로 마주한 남자는 그 음성만큼이나 표정도 부자연스러웠다. 이걸 이제야 인지한 자신에게도 약간 실망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뻔뻔하기 짝이 없군. 아즐이 입으로 콧방귀를 뀌면서도 착실한 상인의 본능으로 가상 화폐를 반듯하게 정리했다.

이대로 계속하기엔 흥미는 벌써 싸늘하게 식어버렸고 대놓고 짜인 판에 놀아나는 취미도 없었다. 그러나 가짜 화폐에 불과하다고 한들 소중한 거래 수단이 지저분한 채로 끝내는 일 역시 아즐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조금 전 괜한 분풀이를 사과하듯 자기 앞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남은 화폐를 조심스럽게 통에 전부 넣었다. 오늘 게임은 이걸로 끝내죠.

"⋯혹시나 해서 묻는데, 아즐 씨. 화났소이까?"

"반대로 이데아 씨께 묻죠. 만약 제가 이데아 씨라면? 어떻습니까. 화 안 나겠어요?"

"윽. 인정함. 인정할 테니까."

등을 둥글게 만 이데아가 손에 꽉 쥐고 있던 화폐를 내려놓았다. 제아무리 티 안 나게 게임에서 져주려고 해도 상대가 상대인 지라 이데아 본인이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눈치챈 모양이었다. 역시 이기는 일보다 지는 일이 배로 어려워.

"⋯그, 근데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 사정이라고 할까, 내 사정은 아니지만, 궁금한 거라고 할까. 아즐 씨라면 나보다 인싸고… 뭐 이것저것 아는 게 많을 테니까? 물론 나도 아는 게 적진 않지만? 그래도 이런 분야는⋯"

"⋯길어! 그리고 시끄럽습니다. 본론부터 말해주시겠어요? 제가 본 사람 중에 이렇게 부탁하는 태도가 최악인 사람은 처음입니다."

"알았으니까⋯! 그, 그럼. 본론부터 말하겠음."

"참 일찍이도 말하시네요."

"빌 씨한테. ⋯물어봐 줬으면 좋겠어."

"뭘요?"

"폼피오레 기숙사 사람 중에 최근에 다른 사람한테 보석을 선물한 사람이 누군지. 갑자기 뭐임? 싶지만 나도 알아. 근데 아까도 말했지만, 알아야 할 이유가 있어. 화, 확실하진 않아서 자세히는 말 못 해주지만⋯⋯ 아즐 씨라면 게임 튜토리얼처럼 금방 수소문할 수 있을 테고."

"보석의 소유자? 사는 게 아니라? 소유자가 누군지 정도야, 뭐, 사는 게 아니라면 그리 어렵진 않은데요. ⋯그런데 혹시나 해서 묻습니다만, 당신이 받았나요? 그 보석."

"남자한테 보석을?! 전혀 받고 싶지도 않고, 받아도 그거 완전히 순결을 잃거나, 그, 그런 루트인 거잖아! 미소년이라도 절대 받고 싶진 않은 데다 이 학원 사람한테 받다니 어떤 의도가 있을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수상한 물건일 뿐이라굽쇼!? 아즐 씨, 이제껏 모르고 있었어? 이 학원 내에서 괜찮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아아,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네⋯. 장삿속으로 온통 새까말 줄 알았더니."

"좋아요. 입 다물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을 겁니다."

"넵."

"에리얼 윈터. 우리 기숙사 2학년이야. 최근에 동급생에게 친애의 의미를 담아서 보석을 선물한 적이 있다고 했어.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됐니?"

"네. 협력 감사합니다, 빌 씨."

"이것쯤이야 간단하니까. 그것보다… 당신의 의뢰인, 이데아지?"

"눈치채셨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나 빌 씨. 대단하시네요.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저와 빌 씨 사이의 비밀로 해주시겠어요? 꽤 성가신 사람이라서요."

그 사람이 제 소중한 동아리 시간을 더 이상 망치게 두고 싶진 않거든요. 아즐의 얌전한 불평에 빌이 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뭐, 어떤 느낌인지는 짐작이 가네.

"당신한텐 예전에 받은 것도 있고, 아까도 말했지만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넘어가 줄게. 그렇지만… 알고 있는 거야? 왜 이런 부탁을 했는지. 아즐, 당신은 알고 있어야 하잖아."

"부끄럽지만… 확실한 건 듣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그 사람, 직설적으로 이야기할 때가 드물잖아요? 본심을 끌어내기 위해 시간을 들이기엔 저도 바빠서요. 게다가……"

이데아 씨에게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구석이 있거든요. 아즐의 음흉한 미소를 본 빌이 잠시 덜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죽이 잘 맞는다고 해야 할지, 가끔 보면 이데아와 아즐은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듯 보이면서 비슷한 구석이 꽤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다던가. 빌이 잡념을 떨쳐내려 다시금 허리를 꼿꼿히 폈다.

"뭐, 너라면 내가 간섭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겠지만. 잘 끝내길 바랄게."

감사의 의미로 새로이 받은 화장수를 바라본 빌이 말했다. 찝찝함을 떨쳐내기 위한 선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었다. 아즐은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화장수를 가져가는 빌을 보면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빌 씨의 협조, 많은 도움이 됐어요. 이번엔 제가 신세 졌으니, 다음에 부탁하실 일이 있다면 편히 찾아주세요. 특별히 무상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어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이데아가 내게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오늘만큼은 그렇네요."

아즐과 빌이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럼, 이제 확실한 거지?"

"확실하다고 하기엔 약간 부족합니다만… 뭐 그렇죠. 틀림없어요. 이데아 씨가 말하는 보석의 현 소유자는 서머입니다."

"에, 싱거워! 게다가 재미없는 대답이고. …근데 그거 그냥 단순한 선물용 마법 아이템이라며?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원래 주인을 찾아야 할 일은 아니지 않아?"

알고 봤더니 그놈이 이상한 녀석이라던가 뭐 그런 거야? 플로이드가 명랑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표정과 달리 누군가에게 주기 위한 화장수의 재료로서 몸을 잔뜩 쥐어 짜인 탓에 분위기 자체는 몹시 지쳐 보였다. 평소라면 분주히 돌아다녔을, 도대체 어느 정도 가격인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값비싼 구두를 신은 두 발이 소파에 얌전히 달라붙어 있을 정도로.

"그건 아닙니다. 빌 씨가 말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그냥 평범한 서머의 팬 같아요. 기숙사장인 빌 씨가 자기 기숙사생을 모를 리가 없고, 그가 내게 구태여 거짓말할 이유도 없어. …근데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느낌이 이상해요. 그 이데아 씨가 이런 걸 묻는 사람이 아닌데. 단순한 선물이라면 제게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부탁하진 않는다고요."

"헤에. 그래? 그냥 단순히 열 받고 짜증 나서 물어볼 수도 있는 거 아냐? 아즐도 옛날 치어 시절 사진 볼 때마다 짜증냈잖아?"

"…그 이야기가 지금 이야기랑 무슨 상관이야!?"

"아, 화냈다. 그래도 맞잖아? 틀려?"

"⋯큼, 흠. 넘어가죠. 그 이야기는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고, 지금 상황에선 별 도움도 안 되는 이야기예요."

"에, 나름 비슷한 거 같은데―. 진짜 아니야?"

"그만하라고."

"아― 알겠어. 알겠으니까 그 표정 그만해. 혼나는 거 싫어."

아즐한테 잔소리 들으면 3일은 후유증이 있는 것 같단 말이야. 플로이드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척 아즐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플로이드. 당신께 부탁할 게 있습니다. 서머의 일이니 당신도 평소보다 의욕적으로 행동하겠지만."

그는 언제 폭발했냐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빠르게 침착해진 뒤 곱게 접힌 쪽지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내일 이데아 씨와 만나기로 한 장소입니다.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적어뒀어요. 그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니까 약속을 잡으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뭐야. 아즐이 가는 거 아니야? 거길 내가 가라고?"

"네. 당신이 이데아 씨를 만나세요. 나는 달리 갈 데가 있습니다."

"어디 가는데?"

나야 상관없지만, 반디 오징어 선배는 아즐이랑 이야기하는 걸 더 편해하지 않아? 플로이드의 잇따른 질문에 아즐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즐이 이런 표정을 지을 때면 꼭 무슨 일이 일어나곤 했다.

"그러니까 당신이 가야 하는 거예요, 플로이드."

"하?"

플로이드가 되물었다. 아즐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며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있잖아, 아즐. 지금 갑자기 든 생각인데, 굳이 나를 보내려고 하는 거. 반디 오징어 선배를 일부러 불편하게 하려고 그러는 거지?"

"네. 말한 그대로예요. 내가 간다면, 확실히 그는 좀 더 편히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편하기만 할 뿐 내가 원하는 정보를 못 들어. 그러면 이데아 씨에게만 좋은 일을 해준 거잖아요? 미안하지만 그렇겐 둘 수 없죠. 당신이 가서 이데아 씨와 협상해 줬으면 합니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를, 저도 알아야겠어요. 플로이드, 당신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서머 일이니까."

"⋯애초에 그 이야기니까 계속 듣고 있는 거잖아. 알았어. 내가 갈게. 그러니까, 아즐도 혹시 중요한 정보 얻으면 꼭 공유해 줘야 해. 알겠지?"

"당연하죠."

이제 됐지? 나 갈게. 거의 눕다시피 앉아 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플로이드가 내키지 않는 표정과 달리 순순히 책상 한가운데 놓인 쪽지를 자기 바지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반디 오징어 선배랑 나, 제대로 이야기해 본 적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있나? 엉성하게 얽힌 지난 2년간 있었던 육지에서의 기억을 온통 헤집어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뭔갈 특별히 기억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굳이 기억할 만한 사건이 있다면, 학원에서 서머와 재회한 일 정도였다. 남고라 만날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만날 줄이야. 그건 정말 좋았지만, 반디 오징어 선배랑은 딱히…….

오히려 있는 게 이상한 거 아냐? 학년도 다르고 기숙사도 다르고 자신이 관심 있는 '강한' 부류도 아니다. 도무지 엮일 구석이라곤 인어 비늘 한 조각만큼도 없었다. 아즐이 부탁한 거기도 하고, 서머와 관련된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만…. 끌리지 않는 일에 저도 모르게 뚱한 얼굴로 VIP룸을 빠져나온 플로이드가 괜히 모스트로 라운지 복도 바닥을 발길질하며 걸었다.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플로이드에게 있어 굳이 가까운 상대가 아닌 이와의 대화는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약한 상대와 계속 맞붙는 일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끔찍하게 싫었다. 관심이 요만큼도 없는 잡어랑 떠들고 싶은 사람, 아니, 인어는 없잖아? 내 기분이 좋으면 몰라. 방금 아즐과의 대화로 자기 소꿉친구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직후라 지금은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기다 협상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그인지라 내일 있을 대화는 플로이드에게 억지로 해야 하는 과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 맞다. 제이드한테도 말해야 하는데. 혹시 몰라. 돌아가면 제이드한테 같이 가자고 말해봐야지. 쌍둥이 형제인 그는 요즘 동아리 활동에 흠뻑 빠져 있어서 제대로 들을 리가 만무했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말해서 같이 가면 좋고, 아니면 아닌 거지. 그렇게 생각하니 아까보다 훨씬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플로이드가 휘파람을 불었다. 

잠시 후, 플로이드가 사라진 복도는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한없이 조용하고 적막함만이 존재했다.

마치 내일의 큰 파도가 몰아치기 전 잔잔한 바다처럼 소리 없이, 고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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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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