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IMARE

ANIMARE - 1

TOHELL by TO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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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마차 한 대가 잘 닦여진 오솔길 위를 가로질렀다. 북부는 길도 엉망이고 눈보라가 심해서 마차로도 들어갈 수 없다던데. 다 소문이었던건가. 수애는 창에 기댄 몸을 일으켜 구겨진 드레스를 빳빳하게 펴보았다. 조금은 나아졌지만 주름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제 처지와 같은 구겨진 자국에 한숨을 푹 내쉬고 다시 창 밖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입김 너머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을사람들이 보였다. 바렌체 제국의 북쪽. 제국이 왕국이던 시절, 리 왕국이었던 이 곳은 수백년 전에는 바렌체와 사용하는 언어도, 생활양식도 달랐다고 했다. 제국이 건국되며 리 왕국도 합쳐서 지금의 바렌체 제국이 되었다고 하는데…. 자신이 이 사실을 아는 이유는 교육을 통해서가 아닌, 제 집안의 시초가 리 왕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리 왕국 사람도, 바렌체 왕국 사람도 모두 제국사람인데다 한 글자 성씨를 가진 가문이 제국민의 절반 가까이 되는 터라 특별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대공저의 사람들이 자신을 리 왕국 출신 성씨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자신을 환영해 줄 것이라는 것은 어머니의 크나큰 착각이 분명했다. 착각이 아니라 날 보내기 위한 거짓말이던가.

어느새 마차가 대공저의 정문을 지나쳤다. 한참 이어진 정원을 내달리던 말이 마부의 손길에 의해 걸음을 멈추었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차의 문이 기분 나쁜 소음을 내며 열렸다. 좁은 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태어나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성과 아름다운 장식들, 그리고 일렬로 자신을 기다리는 사용인들까지. 수애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여 마차에서 몸을 내렸다. 그제서야 에스코트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라 화들짝 놀라며 문을 열어준 사용인을 바라보았다. 집사로 보이는 노인이 무언가를 더 기다리는 듯 마차 안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그녀가 타고 온 마차 안에는 더 이상 사람도, 짐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온 것은 작은 짐가방을 든 자신 뿐이었으니까. 노집사가 당황한 듯 얼굴을 굳히며 수애를 바라보았다. 얇고 윤기가 흐르지만 아무런 장식과 꾸밈 없이 늘어트린 기다란 머리카락이며, 수도에서는 평민들이 입을 법 한 짙은 남색의 수수한 드레스. 당연히 자작가의 재정 형편이 좋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새로 오기로 한 대공비의 시녀인줄로만 알았는데, 눈 앞의 어린 여자가 제 마님이 될 사람이라니. 집사가 당황한 표정을 금방 갈무리하고 수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짐은 제게 주시지요. 안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것밖에 없어서…. 괜찮아요.”

“이리 주시지요.”

결국 짐가방을 든 집사가 수애보다 반 걸음 앞서 활짝 열린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외벽도 웅장한 모습이었는데 내부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것이 오래 전, 리 왕국의 장식들이 곳곳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짐가방은 방으로 올려드리겠습니다. 안내는 여기 시녀장인 레아가 해 드릴겁니다.”

고개를 돌리자 머리를 단아하게 틀어올린 중년의 여성이 보였다. 고개를 숙인 레아를 보고 어색하게 마주 인사를 한 수애가 말 없이 레아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역시 북부라 그런가, 수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추위에 팔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본 레아가 발걸음을 조금 빠르게 옮겼다. 마침내 문이 활짝 열린 한 방에 도착하고 나서야 수애가 살짝 가빠오는 숨을 몰래 진정시켰다. 복도보단 나았지만 여전히 썰렁한 내부에 수애가 두리번거리며 안을 살폈다. 자작가에 있는 제 방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크기였다. 여기가… 대공비의 방인가? 역시 성이 이렇게 커다라니까 부인의 방도 이렇게 넓은거구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침대며 책상 등의 가구를 살펴보았다.

“여긴 영애께서 결혼식 전까지 머무실 방입니다.”

“결혼식 전까지만요…?”

“머무시던 곳에 비해서는 미흡할 수 있으니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하녀를 불러주세요. 안나.”

레아가 이름을 부르자 밖에서 대기하던 어린 하녀 하나가 방 안으로 총총 걸어왔다. 이 대공저는 건물도, 사용인들도 다 차갑고 무뚝뚝하던데 이 하녀의 밝은 진저색 머리카락만은 퍽 따스해보였다.

“안나가 앞으로 영애를 모시게 될겁니다. 부끄럽지만 대공저에는 수도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없어 그나마 수도에 살았던 적이 있는 이 아이가 영애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점이나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고개를 숙인 레아가 방을 나섰다. 무거운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안나가 고개를 번쩍 들고 반짝이는 눈으로 수애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안나라고 불러주세요. 수도에서 오셨다고 들었어요. 저도 5년 전까진 수도에서 지냈거든요. 처음에 북부로 왔을 때 어찌나 춥던지…. 어머, 내 정신 좀 봐. 아가씨, 많이 추우시죠. 그래도 옷은 어두운 색으로 잘 입고 오셨네요. 수도에서는 어두운 옷이 평민들이나 입는 옷이라고 하지, 여기 북부에서는 귀족 마님들도 다 어두운 옷을 입으세요. 그래야 보온도 되고 보석도 돋보이…….”

“…….”

“죄송해요. 아가씨…. 제가 말이 너무 많았죠…. 시녀장님께서 조심하라고 하셨는데….”

“아니예요. 괜찮아요. 제가 북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서….”

“말 편하게 하세요, 아가씨. 곧 대공비가 되실 분이신데요. 아니셔도 자작가의 영애께서 하녀에게 존댓말을 쓰시면 제가 혼나요.”

“으응….”

과연 제 집안도 귀족이 맞는걸까. 끊길 듯 간신히 이어오던 명맥을 귀족의 명예도, 위신도 저버리고 딸을 팔아 사치를 이어가는 제 부모가 떠올랐다. 이 결혼으로 대공에게 수도에 성 두 채는 살 수 있는 금화를 받았다던가. 자신은 구경도 못 해보았지만 자작가를 떠나는 날 자신을 배웅하지도 않던 부모가 제게 준 것은 허름한 마차와 일용직 마부 뿐이었다. 잠깐 상념에 빠진 수애를 가만히 기다리던 안나가 조용히 수애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녀려보이는 제 아가씨가 혼자서도 들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짐가방. 안에는 몇가지의 옷과 책 두어권, 필기구가 전부였다. 보통 수도의 귀족이 시집을 갈 때에는 친정에서 보낸 짐이 마차 세 개를 꽉 채우고도 부족할 정도였는데 귀한 것만 직접 챙기신건가? 그렇다기엔 시녀장도 별 말이 없었고 수애가 입고있는 옷도 귀족의 옷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아가씨의 이름이…. 김수애. 수도에 있는 자작가 중에…. 가만히 머리를 굴리던 안나가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설마 하나뿐인 외동딸 데뷔탕트 할 돈으로 도박을 했다던 그 소문의 자작가가 아가씨의 집안인가? 그 불운의 자작영애가 제 아가씨이고? 이 성씨와 집안, 수애의 허름한 모습으로 미루어보아 사실이 분명했다. 불쌍한 아가씨. 이 아름다운 미모라면 지참금 없이도 시집을 갈 수 있는 귀족이 수도에도 있었을텐데. 데뷔탕트만 치루었다면….

“아가씨, 결혼식은 보름 후에 있을 예정이에요. 북부는 수도처럼 사교계가 활발하지 않아서 아마…. 결혼식 이후 피로연이 아가씨의 데뷔탕트가 될 것 같아요. 그걸 데뷔탕트라고 해도 될 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진짜 데뷔탕트처럼 최고로 아름답게 치장해드릴게요.”

“그럼 대공께서는….”

“원래 오늘 저녁 만찬에 오실 예정이었는데… 아침에 급하게 토벌을 나가셔서요. 아마 삼, 사일은 있어야 오실 것 같아요. 그동안 제가 북부랑 성에 대해 안내해드릴게요. 걱정마세요. 주인님이 생긴 건 무섭고 무뚝뚝하시긴 해도 나쁜 분은 아니….”

“…….”

"죄송해요, 아가씨. 제가 또 입이 말썽이라….“

“아냐, 괜찮아. 대공은 어떤 분이셔…?”

“음…. 주인님은 일단 키가 엄청 크세요. 덩치도 크시고. 그리고 잘생기셨어요. 또… 무뚝뚝한 성격이시긴 한데 사용인들의 실수에는 너그러우세요. 다른 귀족분들에게는 많이 엄하신데 저희한테는 안 그러시더라구요. 좋은 분이세요. 친절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좋은 분인건 확실해요. 분명 아가씨에게 젠틀하고 상냥하게 대해주실거예요. 아가씨는 아름다우시니까, 주인님이 첫눈에 반하실 수도 있잖아요.”

키득이며 까르르 웃는 안나의 모습에 수애가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제국에 단 하나뿐인 대공가에서 대체 왜 자신같이 한미한 집안의 여자를 신붓감으로 찾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인격적으로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지나오면서 본 모든 사용인들은 제 일에 자부심을 가지는 듯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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