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무현] 이방인의 사랑

재희무현) 이방인의 사랑 (1)

방수기지 AU, 박무현을 사랑하지 않는 김재희 X 다른 사람을 짝사랑하고 있는 박무

그는 오늘도 온기 없이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는 하루 종일 헤픈 웃음을 지었고 무리 지어 다니는 전갱이 떼 같은 사람들과 물방울만큼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그러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동료들과도 헤어져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면 물에 푹 젖은 깃털 마냥 몸이 무겁게 늘어져 그대로 침대 속에 갇혀버렸다.

해저기지에 입사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 새 직장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바닷속에 들어온 육지 생물이었고 심해에 갇혀버린 이방인이었다. 심해어들은 눈이 퇴화 돼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 만으로 살아간다고 하던데, 이 불쌍한 육지 생물은 아직 시력이 멀쩡해 바다 아래 어둠과 그 속에 숨겨진 외로움을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봤다.

이 지겨운 고독함은 언제쯤 끝낼 수 있는 걸까. 그는 이불 아래 몸을 웅크리며 잠으로 도피했다. 오늘은 과거의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곳에서 조금이나마 온기를 채울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방인의 사랑


"처음 뵙겠습니다. 앨리엇 브라운의 대타로 온 제이든 스턴(Jayden Stern)이라고 합니다."

"아… 예… 박무현이라고 합니다."

박무현은 눈앞의 남자와 악수를 나누면서도 작금의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의무적으로 받아야만 하는 심리 상담을 위해 엘리엇 브라운을 찾아왔는데 웬 처음 보는 남자가 그녀의 데스크에 앉아있었다. 엘리엇 브라운이 오랜 기간 자리를 비우게 됐다고? 지난주에도 식당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했었는데? 게다가 그녀의 대타로 온 상담사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박무현은 해저기지에 근무하는 모든 심리상담사들의 얼굴과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제이든 스턴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양인 외형의 남자는 오늘 처음 만났다. 아마 며칠 전 외부에서 해저기지로 처음 들어온 사람 같은데... 엘리엇 브라운이 퇴사한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새로운 사람을 데려온 거지? 

"브라운 씨는 가까운 친인척이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해 장기휴가를 내고 병간호를 하러 갔습니다. 원래대로라면 다른 상담자들이 엘리엇 브라운의 업무를 나눠 일했겠지만 같은 사유로 파멜라 브라운도 장기휴가를 냈고 해저기지 내 심리 상담사 수도 모자라서 제가 급하게 대타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새 심리상담사는 묻지도 않았는데 그간의 사정을 줄줄 읊었다. 지난 며칠간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게 누구냐고, 왜 여기 왔냐고 물어봤겠지.

"그, 그렇군요."

박무현은 문득 눈앞의 남자가 신기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시종일관 나긋나긋하게 웃던 엘리엇 브라운과 달리, 제이든 스턴이라는 사람은 첫인사를 할 때도, 자신의 사정 설명을 할 때도, 상담실로 안내할 때도 줄곧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말투만큼은 얼굴 표정과 다르게 상냥하고 온화했다. 목소리 되게 좋네. 박무현은 그런 잡생각을 하면서 새로운 상담사를 따라 상담실 안으로 들어갔다.


"재희야, 형 혼자 간다니까. 넌 가서 네 볼일이나 봐."

"형, 또 도망치려고 그러는 거지? 형이 자꾸 상담에 불참하니까 형 담당자가 나만 보면 다음번엔 형 제대로 데려와달라고 잔소리를 해."

"아니, 재희야. 잘 생각해 봐. 형 아주 멀쩡하다니까? 이 거지 같은 해저기지에 정신 이상한 놈들이 한 둘이 아닌데 걔네에 비해서는 내가 얼마나 정상적이고 건강한 정신머리를 가졌냐."

"그러니까 상담받으러 가기 싫다는 거지?"

"…어. 솔직히 난 그 사람 좀 꺼림칙 해. 갈 때마다 내 얘기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데 실실 웃으면서 뭔가를 체크하는데, 사기꾼한테 내 신상정보 다 털리는 기분이라 별로야."

엔지니어 가팀의 김재희와 서지혁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제4해저기지 복도를 걸었다. 목적지는 중앙동의 심리상담 센터. 서지혁은 바쁜 업무를 핑계로 2주 가까이 미루던 정기 심리 상담을 받으러 왔고, 김재희는 서지혁의 운반 겸 농땡이를 목적으로 그를 따라왔다.

심리 상담 센터의 자동문이 열렸다. 서지혁의 담당 심리 상담사는 상담실이 모두 꽉 차있으니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김재희와 서지혁은 상담실의 유리벽 너머를 힐끗 바라보며 상담실 안에 누가 있는지 훔쳐봤다. 저 사람은 미국 채굴팀 직원이고(재희야, 내 생각에 쟤는 심리 상담 센터에 오는 게 아니라 자기 나라 노동청이나 법원에 가야 할 것 같다), 저 사람은 엔지니어 나팀 팀장이고(어우 저 재수 없는 새끼. 저 새끼는 상담 몇 번 받는다고 사람 될 새끼도 아닌데 여긴 왜 온 거야?), 저 사람은 치과의사고(어? 이빨선생님이네?), 맞은 편의 저 사람은… 누구지?


"무현 씨는 해저기지에서 어떤 일을 하시나요?"

"4해저기지 중앙동에 있는 치과 딥블루에서 치과의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주 가까워요."

"해저기지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작년 5월에 입사했습니다. 곧 있으면 입사 1주년이 되겠네요."

"딥블루에 다른 직원들은 있나요?"

"아니요. 아직까진 저 혼자 일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치위생사 구인 공고를 냈다고 하던데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네요. 하하…"

"치과에서 혼자 일하면서 힘드신 점이 있나요?"

"일단... 업무가 너무 많죠. 불소 도포나 스케일링 같은 업무도 제가 직접 해야 하고 일부 환자분들이 치아교정까지 신청하면서 업무가 혼자서는 감당 안되게 불어나고 있어요."

"그 외에는요?"

"그 외에는… 외로운 거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음...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하루 일과 대부분을 혼자서 일하는 것도 그렇고, 저는 내향적인 성격이라 퇴근하고 나면은 방 안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야 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평일에는 거의 하루종일 혼자 있게 돼요. 주말에는 가끔씩 해저기지의 다른 직원들과 약속을 잡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친구를 사귀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어요."

"왜 그렇게 느끼셨나요?"

"편견일 수도 있지만, 해저기지 직원들은 저랑 국적이 다르다 보니 익숙한 문화 배경이나 가치관 같은 게 저랑 많이 다르다고 느껴지더라고요." 

"해저기지에 한국인이 그렇게 적나요?"

"네. 저를 포함해서 10명 밖에 안 돼요."

"그래요? 이제 11명이 된 거네요."

"네?"

"저는 한국계 혼혈이거든요."

제이든이라는 남자는 눈꼬리를 접으며 시원하게 웃었다. 아, 시큰둥한 표정만 짓는 줄 알았더니 시원스럽게 웃기도 하네. 박무현은 저도모르게 그를 따라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미소 지었다.

"그럼 제이든 씨, 한국말도 할 줄 아세요?"

"그럼요. 평소에는 영어를 쓰지만 한국말도 잘할 수 있어요."

오오, 발음 정말 좋으신데요? 박무현은 겉으로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철렁했다. 와... 목소리가 정말... 영어로 말할 때도 목소리가 좋다고는 생각했는데 한국어로 말하니 목소리가 한층 더 감미롭게 들렸다.

박무현은 갑자기 그에게 묻고 싶은 것도, 그의 목소리로 듣고 싶은 것도 많아졌지만 사회적 체면을 발휘해 욕심을 꾹 참았다. 정신 차려, 박무현. 넌 지금 소개팅 자리에 온 게 아니라 그냥 심리 상담받으러 온 거야. 제이든은 그 이후에도 한국어로 박무현에게 이것저것 질문하며 심리 상담을 이어갔다. 박무현은 입꼬리가 너무 올라가지 않게 조심히 컨트롤하며 제이든의 질문을 듣고 질문에 답했다.

새 심리상담사와의 첫 상담을 화기애애하기 마무리할 때 즈음, 박무현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 목소리가 정말 좋긴 한데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거지?


굳게 닫혀있던 상담실 문이 열렸다. 이윽고 치과 의사와 낯선 남자 한 명이 밖으로 나왔다.

"지혁이 형, 저 사람 누구야?"

근무 연차가 길고 마당발인 서지혁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김재희의 기대와 달리, 서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처음 보는데?"

"안젤라 브라운이랑 파멜라 브라운 대타로 온 사람이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서지혁의 담당 상담사가 끼어들었다. 하이고, 이 거지 같은 직장의 희생자가 한 명 더 늘어나 버렸구만. 서지혁은 진심과 장난이 반반씩 섞인 한탄을 내쉬며 낄낄거렸다. 두 XY 염색체들에게 곧바로 관심을 끊어버린 서지혁과 달리, 김재희는 장난기를 쏙 뺀 얼굴을 한 채, 조곤조곤 대화하는 두 사람을 빤히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방금 한국말 한 거 같은데."

"야, 치과 선생님이 한국인인데 뭘 당연한 걸 말하냐."

"아니, 그쪽 말고, 저 쪽."

김재희는 검지 손가락을 쭉 펴서 박무현 옆의 남자를 가리켰다. 그제야 서지혁의 눈빛에도 흥미가 돌았다.

"그래? 박무현 선생님!"

아이고,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거 만났는데 인사도 안 받아주시고 그냥 가셨으면 서운할 뻔했습니다?

김재희의 말을 들은 서지혁은 곧바로 박무현을 큰소리로 부르더니 두 사람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능청스러운 인사를 나눴다. 김재희 역시 서지혁 옆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두 사람에게 가벼운 목례를 나눴다.

"지혁 씨, 오랜만이에요. 지난번에 진료실 문 수리해 주신 거 감사했어요."

"그러니까 치과 시설도 저희한테 자주 점검받으세요. 지난번처럼 진료실 안에 또 혼자 갇히시면 어쩌시려고…"

서지혁은 박무현에게 장난스럽게 말하면서 그 옆의 처음 보는 남자를 곁눈질로 흘끗 바라봤다. 김재희도 처음 보는 동양인 남자를 대놓고 빤히 쳐다봤지만 그는 두 엔지니어를 쓱 훑어보고 말뿐 별다른 시선을 주시하지 않았다.

"미스터 써!"

서지혁이 본격적인 탐문 수색을 시작하기 전, 그의 담당 상담사가 큰 소리로 외쳐댔다. 그녀는 서지혁이 눈도장만 대충 찍어놓고는 또다시 심리 상담을 거부하려 한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하아... 아까비... 서지혁이 중얼거리며 다시 심리 상담 센터로 돌아가려 하자 낯선 남자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가시죠, 무현 씨."

서지혁과 김재희는 화들짝 놀라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박무현은 두 사람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저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낯선 남자와 함께 중앙동 복도를 걸어갈 뿐이었다. 

"재희야, 방금 그 사람…"

서지혁은 적잖이 충격받은 얼굴로 김재희에게 말했다.

"너랑 목소리가 진짜 똑같은데?"


"여기요.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다음번엔 제가 살게요."

"원래 처음엔 한 잔씩 얻어 마시는 거예요. 저도 처음 입사하고 나서는 주위에서 커피 엄청 얻어마셨어요."

박무현은 따뜻한 라떼 한 모금을 홀짝였다. 그는 부드러운 우유와 풍미 깊은 원두의 맛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조금 들뜬 목소리로 제이든에게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제4해저기지에 카페가 두 군데 있는데 둘 다 원두가 달라요. 전 여기 붉은 산호의 커피가 더 맛있더라구요."

"무현 씨는 커피를 좋아하시나요?"

"네. 직업상 단 걸 멀리하게 됐더니 반작용으로 쓴 걸 많이 먹게 됐어요."

심리 상담 센터에서 느릿느릿 걸어 나와 붉은 산호까지 갔던 두 사람은 왔던 길을 다시 천천히 걸어갔다. 아주 짧게 찾아온 휴식 시간,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면 이제 각자의 일터로 돌아가야 하겠지. 박무현은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제이든 씨, 아까부터 생각한 거지만 한국말 정말 잘하시네요. 지금 국적은 미국이지만 한국에 오래 사셨던 건가요?"

"초등학생 때까지만 한국에서 살았습니다."

"그럼 한국을 떠나신 지 꽤 오래되신 거네요. 한국 이름도 있으셨을 텐데, 기억나시나요?"

"아 사실 어린 시절 기억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아서요."

아, 이런. 나 혼자 들떠버려서 선을 넘어버렸네. 박무현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제가 실례를 저질렀네요. 불쾌한 이야기를 꺼내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말과 달리 제이든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박무현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오랜만에 새로운 한국인을 만났다는 생각에 너무 들떠버렸다. 기분이 많이 나빴을 텐데... 미안해서 어쩌지...

어느새 심리 상담 센터와 딥 블루의 갈림길 길목에 도착했다. 박무현은 제이든에게 작별인사를 할 겸 다시 한번 더 사과를 하려 했다. 하지만 박무현이 인사할 때쯤, 제이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나중에 다시..."

"제이(Jay)"

"예?"

"제 한국이름을 물으셨죠? '제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진짜 한국이름과는 조금 다르기는 한데, 알파벳 J로 시작하기도 하고 제 영어이름하고도 비슷해서요. 그래서 한국에서부터 저를 알고 지내던 친구들은 저를 '제이'라고 부릅니다."

'제이'는 눈매를 시원스럽게 휘어가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의 웃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박무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환하게 따라 웃었다.

"이름 알려줘서 고마워요, '제이'. 나중에 또 만나요."

그날 오후, 박무현은 딥블루를 향해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만난 사람의 목소리를 알게 되고, 고향을 알게 되고, 그의 또 다른 이름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유쾌한 기분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그날 박무현은 딥블루를 찾아온 환자들에게 조금 더 친절하게 인사했고 조금 더 오래 미소 지었으며 환자가 없는 진료실에서 잡다한 물품을 정리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복도를 지나가던 엔지니어들이 유리문 너머로 그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아이고. 저 양반은 나이도 어느 정도 먹었을 텐데 어째 생각하는 게 얼굴에 다 보이냐."

"누구 얘기하는 거야?"

"치과 선생님 말이야. 방금도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커피 나눠마시고 있었잖아."

붉은 산호의 특제 오렌지주스를 빨대로 쪽 빨아올리던 김재희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일주일 전, 심리 상담 센터 앞에서 만났던 박무현과 새로운 심리 상담사가 커피 한 잔씩 들고 시시덕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좋았다. 만난 지 일주일 밖에 안 된 쌩판 남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오늘은 인사 안 해?"

"야 됐다, 됐어. 둘이 분위기 좋아 보이는 데 왜 방해를"

"무현 씨!"

"야!"

서지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재희가 큰 소리로 박무현을 불렀다. 박무현과 새 심리 상담사 말고도 카페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김재희와 서지혁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김재희는 그런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듯 뻔뻔하게 씨익 웃으며 크게 손을 흔들었고 서지혁은 크게 당황하더니 박무현을 향해 멋쩍게 손을 흔들었다. 박무현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평소에 서지혁과는 제법 친하게 지냈지만 왜 갑자기 김재희가 나한테 큰소리로 인사하지? 그래도 그는 미소를 지으며 김재희를 향해 팔을 크게 휘적거렸다.

"야! 너 왜 그래!"

서지혁은 뒤돌자마자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외쳤다.

"재밌잖아. 안 그래?"

김재희는 서지혁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지혁은 불안한 눈빛으로 김재희를 쳐다봤다. 입꼬리를 씨익 올리는 표정은 영락없이 사고 치기 일 초 전 모습이었는데, 도대체 어떤 포인트에서 버튼이 눌린 건지, 이 사고뭉치가 무슨 계획을 세워버린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어우, 김재희 이 또라이 진짜! 서지혁은 소리 없이 질색하며 뭔진 몰라도 당분간 저 순진한 치과의사가 고생 좀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밤, 김재희는 팀원들 몰래 백호동을 빠져나왔다. 잠수정 포트의 직원 휴게실 안에 러시아인들이 숨겨놓은 보드카 한 병을 훔쳐 재 안에 감춘 다음 중앙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한도로 올라갔다. 대한도 해변을 어슬렁 거리다 보니 어두운 옷을 입은 여자 두 명이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김재희는 재킷 안에 손을 넣어 보드카를 꺼내 가볍게 흔들었다. 밤바람에 차갑게 식어버린 모래알을 밟으며 해변을 가로지르니 커다란 천막이 등장했고 그 안에서 네 명의 남녀가 나와 그를 맞이했다.

밤마실을 나온 사람은 총 7명. 그들은 각자 술과 안주거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술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일은 없는 것처럼 술을 마셔댔고 천박한 농담을 하며 낄낄대다가 무고한 사람이 엮인 가십거리를 옮겨댔다. 김재희는 그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술을 마시고 음란한 농담에 키득거리다가 쓸데없는 가십거리를 유심히 듣고 본인이 흘러들었던 가십거리를 얘기하는 데 동참했다. 내가 이 놈들이랑 다른 게 뭐가 있을까. 아니, 상관없나. 얘네처럼 속이 썩어 문드러진 건 세상 사람들 다 똑같을 텐데. 

김재희는 그런 자조적인 생각을 하다가 딱 한 사람, 그들과 다를 것 같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순진하고, 고리타분하고, 이쯤됐으면 이곳 사람들에게 질렸을 법도 한데 여전히 해저기지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구는 사람. 술김에 몽롱해진 머리는 생각을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치과 의사. 치과 의사의 웃는 얼굴. 치과 의사가 웃으며 바라봤던 낯선 남자.

너네 중에 새로 들어온 심리 상담사에 대해 뭐 아는 사람 있어?

김재희는 술김에 그렇게 물어봤던 것 같다. 뭐 어때. 어차피 가십거리일 뿐이야. 새로운 사람이 등장했으니 술자리에서 이런 얘기 한 번 할 법하잖아. 그는 머릿속으로 합리화를 시도했지만 이어지는 생각은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술에 취한 주정뱅이들은 헤롱거리는 정신으로 최근 기억을 골똘히 되짚어보더니 김재희의 질문에 나름 성실하게 대답해 줬다. 이름이 제이슨? 제이든? 이라던데. 제이든 스턴이래. 아 맞아 그리고 그 사람 한국계 혼혈이래. 그리고 뭐 더 없어? 어... 아! 한국말 엄청 잘 쓰더라. 전에 카페에서 한국말 엄청 쓰는 거 봤어. 그리고 그 사람

술자리는 이어졌지만 김재희는 더 이상 술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6명의 취객이 툭툭 내뱉은 말들은 하나씩 모여 새로운 정보가 됐다. 이제 그 정보들은 단순히 흘려들을 만한 가십거리가 아니었다. 김재희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다. 술과 안주가 모두 바닥났을 때, 김재희는 남들과 달리 또렷한 정신머리로 대한도를 떠날 수 있었다.


똑똑-

늦은 새벽, 백호동 38호실에 노크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제, 어제, 오늘. 3일 연속으로 점심 식후 제이든과 샷 추가 라떼를 마셨던 박무현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통에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새벽녘의 노크소리를 아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늦은 시간에 누구 김재희 씨?"

박무현은 문 밖에 서있는 사람을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왜 김재희가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온 거지? 우리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잖아?

"왜요? 기대하던 사람이 아니라서 실망했어요?"

김재희는 자신이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자각조차 없는 건지 뻔뻔한 말을 내뱉으며 실실 웃기까지 했다. 박무현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저 사람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 박무현은 가차 없이 문을 닫으며 술냄새 폴폴 풍기는 취객을 내쫓으려 했다.

쾅-

그러나 박무현이 문을 끝까지 닫기도 전에 김재희가 오른손을 문 틈새로 넣었다. 문 세게 닫았는데 설마 다친 거 아냐? 박무현은 다시 문을 활짝 열었다.

"재희 씨, 손! 잠시 손만 좀 볼게요!"

"그 사람은 남자한테 관심 없어요."

박무현은 김재희의 손을 살펴보려 그의 오른손에 끼어진 장갑을 벗기려 했지만 김재희는 통증을 느끼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박무현은 김재희의 오른손을 다시 흘끗 쳐다봤다. 아 맞다. 이 사람 오른손 약지랑 소지가 의지였지. 그래도 문 틈새에 찡기면서 의지 기능에 문제 생기는 거 아닌가. 박무현은 찜찜한 마음에 여전히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김재희는 손과는 상관없는 영 엉뚱한 소리를 꺼내고 있었다. 됐다. 술 취한 사람이 제정신으로 말하는 거겠냐. 시간도 늦었는데 돌려보내야지.

"김재희 씨, 취하셨어요. 김재희씨 방은 여기 아니니까 돌아"

"무현 씨. 그 사람, 남자한테 관심 없어요."

박무현은 김재희의 눈을 바라봤다. 취기에 조금 붉어졌지만 나름 또렷한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내가 착각했다. 얘 지금 나한테 제정신으로 말하는 거 맞구나. 박무현은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점심에 마셨던 커피 때문인 걸까. 새벽에 찾아온 취객을 향한 분노 때문인 걸까. 그게 아니면 그의 질문에 정곡을 찔린 긴장감 때문인 걸까.

"김재희 씨, 뭘 잘못 알고 오신 것 같은데요. 이제 진짜 방으로 돌아가세요."

"제이든 스턴이요. 이번에 새로 온 심리 상담사."

박무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김재희는 어떻게 알아챈 거지. 김재희가 알아챘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알고 있는 거지.

"아닙, 아닙니다."

박무현은 하얗게 질린 채 김재희의 말을 부정했다. 김재희는 그런 박무현이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평범한 이성애자 남자한테 반하신 거예요."

김재희는 눈썹을 내리며 동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박무현을 내려다봤다. 이 사람은 어쩜 이렇게 제 감정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김재희는 박무현에게 마무리 쐐기를 박았다.

"가엾게도."

박무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가엾게도. 가엾게도. 가엾게도.

진작에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제이에게 느끼는 감정이 신참 동료에게 느끼는 단순한 호감 정도가 아니라는 것은. 그리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성애자인 만큼 자신이 호감을 품은 남자 역시 이성애자일 확률이 높다는 것은. 그래서 이 마음을 끝까지 숨기고 싶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데 그 마음을 배려 없는 제삼자인 김재희가 알아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김재희는 자신의 감정을 동정하기까지 했다. 박무현은 수치심과 당혹스러움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마음 같아서는 손에 잡히는 아무 물건이나 김재희의 얼굴에 집어던져버리고 그에게 큰 소리로 욕설이나 내뱉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사람들이 깨어나 왜 소란 피웠냐고 추궁하기라도 한다면...

"그 사람 대신 저는 어때요?"

정신 차리고 보니 김재희가 양손으로 박무현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박무현은 김재희를  쏘아보며 붙잡힌 손목을 떨쳐내려 했지만 김재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슨... 무슨 악력이 이렇게...

"저는 남자도 가능한데."

김재희는 박무현과 눈을 맞추며 야릇한 눈웃음을 지었다. 박무현은 저항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김재희 씨, 이거 성희롱인 거 아시죠?"

"무현 씨."

박무현은 김재희를 노려보려 했지만 눈앞은 캄캄할 뿐이었다. 김재희는 어느새 박무현의 오른손을 붙잡던 왼손을 놓아버리고 박무현의 두 눈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무현 씨, 정말 싫으세요?"

박무현의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는데... 알고 있는데... 눈앞의 이 사람은 심리 상담사 제이가 아니라 엔지니어 가팀의 김재희인데... 그런데 컴컴한 어둠 속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니 그 사람이 생각났다.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의 남자.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자신과 대화할 때는 이따금 햇살같이 웃던 남자.

"정말 저랑 하기 싫으세요?"

그는 몽마였다.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 홀로 간직하려 했던 짝사랑의 목소리를 한 악마였다. 그리고 몽마의 유혹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외로움으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은 유혹을 물리치기엔 너무 약해져 버린 상태였다.

김재희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박무현의 입술을 삼켰다. 가슴팍을 밀치며 반항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파들파들 떨기만 하고 김재희를 제대로 피하지도 못했다. 생각보다 훨씬 쉽네. 김재희는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박무현의 입 안에 더 깊숙이 들어왔다. 두 눈을 가린 손바닥에 속눈썹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김재희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자 두 눈을 감은 박무현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물러가던 그들은 마침내 선을 넘어 백호동 복도에서 방 안으로 서서히 몸을 옮겼다. 김재희의 등 뒤에서 스르륵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백호동 복도는 새벽의 정적에 휩싸였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백호동 38호실로 들어가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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