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도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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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들었던 이야기 하나를 해 드릴까요. 아니. 들은 것이 아니라. 보고 느꼈던 이야기 말입니다. 부족한 솜씨로 꾸며내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게 있다면. 이것이 아주 좁은 의미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로망스지요. 거창한 단어를 덧붙일 것도 없습니다. 제가 보았던 것들에는 희망도, 영광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아주 조금의 사랑이 존재했습니다. 슬픔과 기쁨과, 또 작별이 함께하는 작은 사랑 이야기지요. 낭만, 로망스. 익숙치 않은 글의 말투지만 저는 기필코 이 이야기를 해야만 합니다. 기록자로서의 의무라는 게 있잖습니까. 보았던 것을 서술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 그래서 저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일종의 책임감과 슬픔을 담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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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단순하게 시작합니다. 한 아가씨와 한 청년이 파리에서 만났습니다. 그러나 기묘한 만남이었습니다. 아가씨는 청년을 너무 잘 알고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잘 알지 못했고, 청년는 아가씨를 잘 알지 못했으나 잘 알았습니다.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아가씨의 이름은 로라라고 했지요. 먼저 알아차린 사실 중 하나는 그녀가 특별한 위치에 속해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1832년의 파리에서 그 어떤 계층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기에 궁금증이 먼저 올라왔습니다. 어디서 온 사람이길래, 대체? 그리고 곧 허황된 소문으로 취급되는 이야기를 더 듣게 되었습니다. 제네바에서 왔다고요. 그리고 사실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은, 목숨이 아홉 개나 되는 고양이와 같은 존재라고요. 전에는 무인도에서 산 적도 있다더군요. 사람들은 모두 그 이야기를 마녀의 존재처럼 취급했습니다. 있다고 믿을 법은 하지만 사실 믿기는 어려운 사실 말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늘 허황된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와 같은 여관에 머물던 그이를 먼 발치에서 지켜보았지요.
사실 알아보기에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아주 간편하기 짝이 없었지요. 묘하게 시간에 어긋난 것 같은 그이의 복식과, 특히 머리칼이 분명하게 눈에 띄었거든요. 허나 시작이 편했다고 결말 또한 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겠습니까. 편안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또 다른 누군가 때문이고요. 로라를 지켜보면서 저는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 미셸 광장 근처의 카페에 그녀가 뻔질나게 드나들었기 때문이지요. 혹자는 그네들이 역사적인 그룹이 될 뻔한 사람들이라고 일컬었지요. 사실 저는 그 이야기 말고, 우선은 제가 만난 한 청년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청년의 이름은 쿠르페락이었습니다. 제가 그리 늙은 사람은 아니지만 감히 그를 청년이라고 칭할 수 있을 만큼 활기찬 생명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목소리를 높이고, 누구에게나 미소를 지어 주고서 어깨를 두드리고, 푸른 하늘이 보이는 날에는 즐거움을 퍼뜨리고, 어두운 하늘이 비추는 날에는 활기를 퍼뜨리는 그런 사람이었지요. 제가 만일 타인에게 그리 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면 뭐든지 했을 겁니다. 과한 찬사일까요? 하지만 쿠르페락은 찬사를 받을 만한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헌데, 좋은 사람들이 늘 그러하듯이 그이는 항상 마음 속 한켠에 어둠을 품고 있었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착한 마음이 충족을 모르는 것이었지요. 그 청년은 마음속에 죄책감을 품고 있어 그토록 사려깊게 행동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들어 안 일이었지만, 쿠르페락이라는 청년은 원래 이름 앞에 드de ─그러니까, 귀족들의 이름인 그것 말입니다.─ 를 붙이고 있다가 스스로 떼어 버렸다고 하더군요. 하다 못해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를 대천사가 스스로 추락하는 일도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존재를 가진 인간이 사회적으로 추락하는 일은 얼마나 괴롭고 또 단호한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르페락은 그 작은 글자를 떼어 버리고 더 아래로 가기로 결정한 듯 싶었습니다. 특권에서 비롯된 행복을 누리던 이들이 스스로 반성하고서 아래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는 것은 제가 들은 이야기 중 가장 황당하고 또 대단한 일 중에 하나였거든요. 자신이 목격한 것들, 파리의 거지, 부랑자, 굶주린 어린 아이들, 고된 노동을 하며 하루 하루 연명해 가는 노동자들, 그것들을 외면할 수 없는 순백의 양심을 가진 이였습니다. 시대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면 저는 기꺼이 그 시대를 탓했을 겁니다. 만약 그가 그리 하지 않았다면, 죄책감과 슬픔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 이야기의 결말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요.
아주 운이 좋게도 저는 로라 아가씨와 청년 쿠르페락이 처음 만날 때를 제 두 눈으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아니. 이것은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어쩌면 아주 좋지 않은 때를 목격한 것일지도 모르지만요. 저는 기록자인지라 사실을 말해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사실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런 의도도 없는 외출이었습니다. 로라라는 이름을 가진 아가씨가 외출을 하는 날인지도 몰랐고, 그 날 거리에서 뮈쟁의 청년들이 인쇄물을 나누어 주고 연설을 하는 일을 벌일 지도 몰랐습니다. 다만 담배가 다 떨어졌기 때문에 잘 썰은 담뱃잎과 어울리는 파이프를 사기 위해 나갔던 것인데. 눈이 있는 터라 목격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팡테옹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거세게 달리는 마차에 화들짝 놀라는 아가씨, 로라가 보이더군요. 그리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거리 한켠에 멍하니 서 있던 로라를 붙잡은 다음, 예의 그 다정한 말투로 괜찮으십니까, 마드모아젤? 하고 묻는 쿠르페락을 볼 수 있었지요. 번개가 내려치는 듯한 만남이었다면 그러려니 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한순간 튀는 불꽃 같은 그런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로라 아가씨는 참으로 우스운 표정을 짓다가 조금 더듬으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저, 저는. 제가 잠깐 담뱃불을 붙이기 위해 멈추었던 행동이 그 대화를 듣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는 행동으로 바뀌었을 때 로라 아가씨가 말을 꺼냈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므슈. 아주 괜찮아요. 사실은 괜찮다 못해 좋은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새된 목소리였습니다. 분명 놀란 것이 틀림없는데도 필사적으로 부정하려 드는 모습에 저는 조금 웃었답니다. 곧 쿠르페락 청년이 보인 반응에 그 웃음은 쏙 들어갔지만요. 그이는 로라 아가씨의 팔을 잡은 손을 내려 실례했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더니, 아가씨의 얼굴을 보며 아주 큰 미소를 지어 주었습니다. 오, 이런. 이게 누굴까요. 오늘 제 행운이 제대로 일하나봅니다! 로라 아가씨는 얼굴의 근육을 당겨 최선을 다해 웃다가 그 말 한 마디에 순식간에 끈이 끊어져 흩어진 구슬처럼 혼란스럽고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습니다. 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점점이 끊어지는 말에도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확신이 마음 속에 들어 앉은 사람은 멈추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이는 과장되면서도 훌륭한 몸짓으로 손을 휘두르면서 자신의 곱슬머리를 톡 치고서 여상한 말투로 말했습니다. 화관은 잘 받았어요. 하고요. 로라 아가씨의 표정이 일그러졌습니다. 그러나 전혀 부정적인 투가 아니었지요. 다만 무척이나 놀란 얼굴이었지요. 자신이 계획한 것들이 전부 틀어졌구나,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당황이 배어 나왔습니다. 그 얼굴을 하고서 아가씨는, 똑같이 손을 휘두르며 자신의 치즈색 머리칼을 톡 쳤습니다. 과장되었지만 어색했습니다. 쿠르페락의 행동과는 달랐지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러자 청년 쿠르페락은 로라 아가씨에게 다시 아주 아주 커다랗고 익숙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저는 이 파리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모르는 게 없답니다. 마드모아젤.
그 순간 마차가 큰 소리를 내며 지나갔습니다. 저는 로라 아가씨의 말을 입술 모양으로, 아주 부분부분 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 알던 ─ 당신은 ─ 친구 ─ 우리 ─ 그래요. 쿠르페락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투였지요. 그리고 웃으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로라 아가씨는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지요. 바쁜 마차들이 큰 길을 달려가면서 저는 둘의 모습을 놓쳤습니다. 마차가 세 대 쯤 지나갔을 때, 로라 아가씨와 쿠르페락 청년은 그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어쩌면 둘이서만 나눌 수 있는 아주 작은 비밀을 말하기 위해 자리를 피한 것일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당황한 로라 아가씨를 위해 쿠르페락 청년이 친절을 베푼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저는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습니다. 좋은 담뱃잎은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남은 것이라고는 로라 아가씨의 혼란스러운 얼굴과 쿠르페락 청년의 커다란 웃음 뿐이었지요. 무언가, 제 쌓여있는 생각 속에서 간질간질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알고 있던 사실과는 전혀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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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두 번째 운은 ─이것은 정말 살면서 한 두 번 있을까 말까한 운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로라 아가씨와 쿠르페락 청년을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이없고 훌륭한 장소에서요. 제가 견딜 수 없으니 먼저 말씀드리자면, 그곳은 성당이었습니다. 네. 무너져가는 성당이었지요. 한때 근처에 공동묘지가 있었으나, 세월이 너무 많이 지난 탓에 이제 더는 새로운 사람이 묻히지 않는 곳이었지요. 묘지가 무너져 내리자 수많은 뼈들이 파리의 지하 납골당으로 이장되었고, 그 때 그 옆에 같이 서서 주변의 사람들과 예배를 드리고 축일과 결혼식을 기념하고 죽은 자들을 위한 축성과 산 자들을 위한 기도를 해 주던 성당도 다른 곳으로 옮겨 갔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조금 빛이 바랬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것은 여전했습니다. 제가 그곳에 어떻게 가게 되었느냐고 물으신다면, 글쎄요. 작가는 원래 모순된 장소를 좋아하는 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삶과 죽음이 뒤섞이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었던 장소지요. 장례식과 결혼식이 있던 곳이잖습니까. 산 자들의 기쁨과 슬픔, 말 없는 죽은 이들의 침묵이 교차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소리와 침묵이 교차하는 곳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군요. 날짜도 기억합니다. 1832년 5월 30일쯤이었지요. 혁명력으로 따지면 목월 11일 쯤이었을겁니다. 어쨌거나. 그날 밤에는 저는 그 성당에서 천사의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성당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깥의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머리 위에 삐걱거리는 낡은 창문 소리를 들으며 펜을 물어뜯고 있었습니다. 날이 좋았거든요. 달이 그렇게 밝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대신 별이 많았지요.
웃자란 풀들이 자꾸만 팔을 간지럽혀 몸을 뒤틀며 자리를 잡다가, 저 멀리서 깔깔거리는 소리를 듣고서 동작을 멈추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그 웃음소리가 한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로라 아가씨의 웃음소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풀이 제 팔을 간질이는 것을 내버려 두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뒤에서는 장화의 두꺼운 밑창이 무언가에 질질 끌려가는 것 같은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너털웃음과 함께요. 저는 그것이 쿠르페락 청년의 웃음소리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는 얇아진 석회 벽 너머로 로라 아가씨가 쿠르페락 청년을 잡아 끌고 성당 안으로 이끌고 있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로라, 오, 로라! 쿠르페락의 목소리는 아침 첫 해가 떠오르고 가장 먼저 깨어난 마부가 말을 재촉할때처럼 쾌활하고 힘찼습니다. 장난스러움과 애정을 듬뿍 담은 투로 청년이 말했습니다. 야밤에 외출하는 걸 좋아하는 아가씨라니, 정말 고양이가 맞나 보군요! 저는 제 혀뿌리 밑에서 톡톡 튀어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았습니다. 그래요. 그 아가씨가 고양이라는 소문을 청년도 들었나보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곧 로라 아가씨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귀를 기울였습니다. 글쎄요. 무슈, 아니, 제가 고양이인들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고양이랑 결혼하는 건 별로인가요? 하지만 난 당신이 고양이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하바터면 정말 크게 웃을 뻔 했습니다.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마드모아젤! 하지만 당신은 내 가장 친한 친구 고양이잖아요? 쿠르페락 청년이 맞받았습니다. 동시에 튀어나오는 풋풋하고 싱그러운 웃음소리가 성당 안에 울렸지요. 제 머리 위에 삐걱거리는 창문을 통해서, 마치 축포처럼 펑, 하고 터져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뒤에 로라 아가씨가 춤을 추듯 발을 움직이는지 탁탁거리는 소리가 리듬을 실어 들려왔고, 저는 벽에 기댄 등을 통해 낡은 성당의 돌바닥이 톡, 톡, 하고 두들겨지는 떨림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쿠르페락 청년은 가만히 서 있는 것인지, 어딘가에 앉아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고요. 작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로라 아가씨가 스텝을 밟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요. 아무튼. 저는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면서 아가씨의 스텝을 따라, 쿠르페락 청년의 흥얼거림을 따라 별을 연결하는 일종의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북극성에서 오리온의 왼편 손과 처녀자리의 어깨를 이어 쌍둥이 자리의 발 밑에 놓는 괴상한 짓을 하고 있을 때쯤에 쿠르페락 청년이 흥얼거림을 멈추었습니다. 아주 잠깐동안 로라 아가씨의 발자국 소리만이 들려왔지요. 그리고 그가 천천히 발을 떼는 소리가 들렸을 때, 로라 아가씨의 춤이 멈추었습니다. 저는 이제 웃자란 풀이 제 팔을 간질이는 게 아니라 다른 것이 제 가슴을 간질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쿠르페락 청년이 차분하고, 진지하게 말을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었지요. 로라. 당신이 내게 자꾸만 청혼하는 이유를 나는 알 수가 없어요. 정말로요. 그러자 로라 아가씨가 앞으로 한 발을 떼었다가 도로 뒤로 물러나는 것 같은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따라서 아가씨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나는, 나는. 으으음. 무슈. 쿠르페락 청년은 움직이거나, 웃거나, 발을 떼거나, 또는 한숨을 쉬거나, 하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굳은 듯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거든요. 문득 로라 아가씨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많이 친한 건 알아요. 내 장난이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쿠르페락. 내 성격이 이런 걸요! 당신 말마따나 난 당신이 제일 친한 고양이 친구고요! 그리고 힘 빠진 웃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구의 것이었을까요?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 대신 다음에 흘러 나오는 목소리는 쿠르페락의 것이라는 게 똑똑히 기억납니다. 불쾌하긴요. 그냥 걸리는 게 있어요. 만약에요. 로라. 마드모아젤 로라! 당신의 청혼이 장난이 아니었다면 나는 받아줄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만일 우리가, 가장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 순간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두 눈 안에 쏟아져 들어오는 모든 것이 필요가 없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거든요. 석회 벽에 기대 앉아서. 저는 가만히 누군가의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로라 아가씨의 말이든, 쿠르페락 청년의 말이든. 무엇이든요.
아주 아주 긴 침묵이 지나갔습니다. 풀벌레가 우는 소리를 세다가 그만둘만큼. 길었습니다. 누군가는 견디지 못하고 말을 꺼내야 할 만큼의 시간을 기다렸지요. 저는 처음에 쿠르페락 청년이 끊어버린 자신의 말을 이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밤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로라 아가씨가 먼저 입을 연 것 같았습니다. 나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쿠르페락 청년도 대답했지요. 물어 봐요. 그러자 로라 아가씨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떨리는 목소리와 빠른 말투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왜 내 청혼을 받아줄 수 없어요, 쿠르페락? 그러니까, 만약 우리가 가장 친한 친구 사이가 아니라면요. 저는 들이마시고 있던 밤 공기를 푸후, 하고 뱉어냈습니다. 로라 아가씨의 말과 함께 호흡하는 것처럼요. 쿠르페락, 그 솔직하고, 친절하고, 다정하고 쾌활한 청년이 발을 한번 더 떼었습니다. 아마 로라 아가씨의 앞으로 다가간 모양인지, 로라 아가씨가 작게 놀란 소리를 내었습니다. 로라, 당신도 뮈쟁을 드나들었으니 알겠지만요. 나는 이미 결심한 일이 있답니다. 그건 누군가의 말처럼 더 나은 세상과 더 높은 목표를 위한 일이고요. 그래서 나는 당신의 청혼을 받아줄 수 없어요. 로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양이가 당신이니까 더더욱 그럴 수 없어요. 사실 쿠르페락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로라가 허겁지겁 말을 얹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니, 아니요. 쿠르페락. 그게 뭔데요? 나도 잘 알지만. 그게 뭔데요. 내가 물어 보면 안 되는 것 같았고 내가 알지만 차마 꺼낼 수 없었던 것들이라는 게 확실하지만. 그래도 난 지금 당신한테 물어볼래요. 그게 대체 뭐에요? 나도 모르는 거 아니에요. 잘 알아요. 내가 누누이 말했던 것처럼 나는 고양이라서 아홉 번이나 살았거든요. 나는 그냥 바라는 거 없이 당신이랑 웃고 대화하면서. 공기처럼 둥둥 떠다니던 말은 거기서 끊겼습니다.
쿠르페락 청년이 작게, 아주 작게 로라 아가씨를 토닥이는 소리가 들렸지요. 그리고 청년은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 그렇게 내뱉었습니다. 로라. 나는 옳은 일을 하려고 해요. 잘못된 것을 보면, 우리는 고치려는 노력을 해야 하잖아요.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면 더더욱. 긴 침묵. 그리고 어딘가를 세게 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어이쿠, 하고 쿠르페락 청년이 내뱉었습니다. 다시 단발적으로, 퍽,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리고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성당에서 청혼을 거절당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에요. 로라 아가씨가 말했습니다. 쿠르페락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다시 로라 아가씨를 토닥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눈꺼풀에 빗장을 지르고 입술에는 자물쇠를 달았습니다. 오직 손 끝으로만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로라, 약속 하나만 해 줘요. 뭘 부탁하려고 그래요, 쿠르페락? 그 날 파리를 떠나기로. 언제를 말하는 거에요, 나는 몰라요. 당신도 잘 아는 날이에요, 당신이 나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침묵. 로라 아가씨가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가,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꼭 붙드는 소리가 들리고, 아가씨가 덧붙였습니다. 약속할게요. 쿠르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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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야기는 좀 더 복잡해지고, 저는 세 번째로 운 좋은 순간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우습게도 첫 번째 운은 그이들이 처음 마주치는 순간이었고, 두 번째는 그이들을 제가 다시 보게되었다는 것인데. 하지만 세 번째 것은,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운일까요? 정말로,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한밤중의 성당. 그 이후로 열흘 동안은 저도 바쁘기 짝이 없었습니다. 거리는 속닥거림과 긴장으로 가득찼고 곧 장례식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떠돌았지요. 누구의 장례식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냥 장례식이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때의 모든 순간은 제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벅찼습니다. 누군가들에게는 그랬지요.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다시 오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저에게든, 아니면, 낡은 여관의 방에 홀로 틀어박혀 한참 동안 나오지 않는 주황빛 머리칼을 가진 아가씨에게든. 시간이 어찌나 쏜살같이 흐르던지요. 저는 거리에서 마차가 뒤집어지고 하늘에서 가구가 쏟아지며 말과 붉은 깃발과 화약 냄새가 사람들의 정신 안으로 스며드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거리는 순식간에 바리케이드로 막힌 하나의 요새가 되었지요. 그 안에 쿠르페락 청년이 있었습니다. 로라 아가씨는 없었습니다. 저는 샹브르리 거리의 골목으로 걸어가 바리케이드 안의 청년들을 보았습니다. 코랭트 주점과 카페 뮈쟁의 깨진 창문 너머로 저 멀리 총소리를 듣고 불안에 떠는 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죽음과, 죽음과, 죽음. 밤 새도록 보초를 서던 이들을 지켜보았지요. 밀정이 붙잡히고, 지붕의 저격수가 떨어지고, 청년들은 아름다운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서로 술을 한 잔씩 나눠 마셨습니다. 보초 서는 청년을 빼고 모두가 잠깐 불안한 잠에 들었을 때 저는 숨어 있던 골목에서 나와 낡은 여관이 있는 쪽으로 향했습니다. 곧 해가 뜰 터였습니다. 제가 바리케이드에서 여관 가는 길을 절반쯤 걸었을 때 무언가 저 쪽에서 후다닥 뛰어나왔습니다.
이상하게도 익숙한 색의 고양이 한 마리. 제가 골목에 가만히 서서 야옹, 하고 손짓하자 이상하게 빛나는 초록눈으로 저를 한참 응시하다가, 도로 발을 놀려 어딘가로 사라지더군요. 저는 어제부터 이어진 총성과 고함소리에 지친 나머지 쫓아가 붙잡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습니다. 아마 바리케이드 안에는 쿠르페락 청년이 있을 것이고. 로라 아가씨는... 로라 아가씨는. 저는 눈을 감고 생각을 하다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여관에 찾아가던 제 발걸음이 아주 틀려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요. 졸음이 사라졌습니다. 지쳐서는 안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곧 해가 뜰 것이고. 그러면. 그래서 저는 발을 놀려 고양이를 따라갔습니다. 아니, 따라간 게 아니라 제가 걸어 나왔던 길로 도로 돌아나왔습니다. 바리케이드로요. 저 멀리서 군홧발 소리가 들렸습니다. 총소리가 쾅, 하고 울렸습니다. 저는 발걸음을 재촉했고, 어디선가 육중한 쇳덩이가 굴러가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저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대포라는 사실을 알았지요. 그때쯤 저는 숨차게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대포 소리가 한번 더 울렸습니다. 비명과 총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공화국 만세, 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바리케이드까지는 딱 한 블록이 남아 있었을 때, 저는 총이 연거푸 발사되어 매캐한 화약 연기가 뮈쟁 쪽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턱 끝까지 찬 숨을 달래며 바리케이드의 가장 가까운 곳에 도착했을 때, 저는 골목에 우뚝 선 아가씨를 보았습니다.
로라 아가씨. 저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주저앉았습니다. 로라 아가씨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하얗게 굳은 얼굴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멍하니, 어딘가 초점 나간 얼굴을 하고서. 그대로 서 있다가. 누군가가 골목에서 잽싸게 내민 팔이 그이를 끌고 갔습니다. 여기서 뭘 하고 서 있어! 하는 외침도 들렸지요. 사라지면서도 로라 아가씨는 이미 쓰러진 바리케이드에 고정된 시선을 떼지 않았습니다. 골목 틈으로 아가씨의 갈색 치맛자락이 사라지고, 멀리, 아주 멀리 아홉 발의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귀를 틀어막고 숨을 들이쉬고. 그리고 석고상처럼 굳어져 있던 로라 아가씨의 얼굴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렸습니다. 로라 아가씨는 쿠르페락 청년과의 약속을 어긴 겁니다. 그리고 저는 그 순간을 또 목격했습니다. 이게 제가 사족처럼, 이것이 운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고 덧붙인 이유입니다.
저는 귀신처럼 제가 머물던 여관으로 돌아와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로라 아가씨가 생각났습니다. 그이가 어디에 짐을 풀었는지는 잘 알고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달려가 문을 쾅쾅 두들겼지요. 제가 로라 아가씨와 한번도 말해본 적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때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두들겨도 대답이 없더군요. 저는 한번 더 문을 세게 쾅, 쳤습니다. 그런데 우습게도요. 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애초에 잠겨 있지 않았던 겁니다. 천천히 문을 열어 젖히고, 인사 한 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저는 제가 급하게 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방이 깨끗했거든요. 아무 흔적도 없었습니다. 로라 아가씨가 머물던 방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전부 사라져 있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작은 고양이 털 하나를 빼고. 전부요. 그이가 그 낡은 여관방을 청소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저는 영혼이 빠진 사람처럼 다시 바리케이드가 있었던 장소로 찾아갔습니다. 아가씨가 어디로 갔는지는 너무 분명했기 때문이지요. 자정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깃털과 부숴진 가구들이 널린 달빛 밑의 거리는 피로 젖어 온통 붉은 빛이었고, 제가 알던 청년들은 저녁마다 모여 토론하고 웃고 미래를 고민했던 주점의 바닥에. 네. 거기에 누워 있었습니다. 얼굴의 빛은 사라지고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된 채로. 멀리서도 잘 보이더군요. 저는 핏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은 길바닥에 그냥 주저앉았습니다. 건물의 기둥에 등을 기댄 채 고개만 흔들고 있었습니다. 이게 무엇일까. 하면서요.
저 멀리, 청년들이 누워 있는 곳, 그곳에 아주 새하얗고 예쁜 드레스를 입은 로라 아가씨가 서 있었습니다. 손에는 드레스만큼이나 예쁜 꽃다발을 들고서요. 신부처럼 곱게 차린 드레스를 입고서. 로라 아가씨는 손에 든 꽃다발을 가만히 내려놓았습니다. 붉은 조끼를 입은 곱슬머리 청년의 가슴에요. 그리고 소중한 것을 만지는 손으로 청년의 양 손을 들어 꽃다발의 아래쪽에 조심히 포개 놓았습니다. 아가씨가 아주 작게 중얼거렸던 것도 같습니다. 쿠르페락. 하고요. 그리고 아가씨는 다시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손에 꽃다발을 든 채 눈을 감고 있는 쿠르페락 청년, 하얀 드레스를 입은 로라 아가씨의 뒷모습. 그게 제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습니다.
그 꽃이 청년과 함께 묻혔으면 좋았으련만. 다음 날 아침 찾아온 청년의 정중하고 고상한, 귀족 집안 출신의 가족들은 그 꽃을 하수구에 내던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파리에서 쿠르페락 청년도, 로라 아가씨도, 다시는 볼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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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도둑과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물론 정식으로 배운 것도 아니지만요. 늘 그렇게 살았습니다. 시대와 상황에서 무언가를 훔쳐 내어 제 것으로 만들었지요. 하지만 그 때 저는 도둑이 되기 싫었습니다. 이번 만큼은 거창한 이름을 하나 달고 싶었거든요. 기록자 말입니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보고 듣기 위해서 신이 기괴한 타이밍에 저를 가져다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 좋았지요. 왜 하필 그 순간들이었을까요. 그이들이 첫 번째 만나던 순간, 성당에서 로라 아가씨의 청혼이 거절당하던 순간, 그리고 그날 아침 아가씨가 약속을 어겼을 때의 순간을 모두 보았저는 이제는 제가 더 쓸 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로라 아가씨가 그랬던 것처럼요. 하지만 저는 이번만큼은, 정말 도둑이 되기 싫었습니다. 더 이상은 훔쳐낼 수 없었습니다.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이제는 손끝으로 기록자의 책임을 다하려고 합니다. 이제 이야기를 마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희망도, 영광도 없는. 행복한 결말도 없는. 그렇지만 아주 작은 사랑 이야기. 제가 부디 제 책임을 충실히 다 했기를 바랍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부디 안녕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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