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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xx1년 1월 4일
남자친구가 생겼다. 이름은 이지훈. 나이는 나보다 한 살 많고 작년에 교양수업 팀 프로젝트로 처음 만났다. 어떻게 교양 팀프에서 사랑을 찾을 수가 있지? 아야. 이런 말 쓰지 말라고 한 대 맞았다. ?? : 안 때렸잖아 -ㅅ- (진짜 이 표정임) 맞다. 때리진 않았다. 아무튼, 이 일기는 그냥 소소한 기록이다. 언젠가 미래에 펼쳐보았을 때 우리의 하루가 어땠는지 추억할 수 있도록 남겨두는 그런 거. 너무 로맨틱하잖아!
비록 첫 장은 형이 보는 앞에서 쓰고 있지만…. 앞으로 쓸 내용은 안 보여줄 생각이다. 열심히 빼곡하게 써서 나중에 서프라이즈 선물로 줘야지. 나중에 받을 걸 알아버렸으니 서프라이즈가 아니란다. 하여튼 이지훈은 감성이라는 게 부족하다. 이렇게 무뚝뚝한 남자가 내 애인? 오히려 좋아. 이런 말도 쓰지 말란다. 좋다는 뜻인데….
오늘은 사귀게 된 기념으로 무작정 데이트를 하러 나왔다. 츄리닝에 롱패딩 걸쳐 입고 국밥이나 먹었지만 내 생에 제일 로맨틱한 날이었다. 분위기를 더 즐기고 싶어서 손잡고 조금 걸으려고 했는데 너무 추워서 포기하고 실내로 들어왔다. 이 일기장도 아트박스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어? 일기 쓰면 재밌겠다. 라는 생각에 충동 구매했다. 이지훈 이 웃긴 남자는 유치하게 뭘 그런 걸 쓰냐더니 자기도 몰래 하나 사더라.
?? : 그걸 언제 봤어? 어떡하면 좋니 우리 형…. 사귀기 전에도 내가 형 좋아하는 거 다 소문났는데 형만 모르던 이유가 있었구나. 나는 매일 형만 쳐다보고 있는데 자기는 하나도 모른다. 어쩌다 이런 남자를 사랑해서는…. 아프다. 이번엔 진짜 맞았다ㅠㅠ... 형이 자꾸 그만 쓰라고 한다. 아무래도 일기장에 질투하는 것 같기도? 질투 이슈로 인해 여기서 마무리해야겠다. 이지훈 사랑해♡
2xx1년 1월 10일
열심히 빼곡하게 쓴다고 해놓고 6일 만에 일기장을 펼쳤다. 나 김민규 24살. 일기라고는 초등학생 때 방학 숙제가 마지막이었으니까 귀여운 이지훈이 이해해주길 바라. 음, 특별하게 쓸 내용은 없지만, 오늘은 내가 생각하는 이지훈이라는 사람에 대해 적어보고 싶었다.
이지훈은 귀엽다. 이건 진짜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이 일기를 보고 있을 형도 이제는 인정했으면 좋겠다. 나는 이지훈을 처음 봤을 때 '어떻게 이런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비록 중간 기말 다 팀 프로젝트로 점수를 준다는 미친 교양에서 처음 봤을지라도. 그때의 우리는 생초면인 타과생이었음에도.
아직도 가끔 그 박창원 그 사람 AI 아닌가 의심한다. 요새 그런 거 유행이잖아. AI가 매칭시켜주는 소개팅어플…. 그 교수님 진짜 마음에 안 드는 거 투성이인데 형이랑 친해지려고 드랍 안 하고 열심히 했어. 알지? 모르면 말구.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는 걸까? 근데 나는 첫눈에 반한 건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때 귀엽다고 생각한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단 말이지…. 외관이 귀여운데 성격은 꽤 까칠했던 점이나, 목소리가 좋았던 점이나, 무뚝뚝하게 할 일만 하면서 '지훈씨 진짜 잘하시네요.'라는 내 한마디에 빨개지는 귀나. 그런 부분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렇게 된 것 같다.
그런데 이지훈은 매일 귀엽다고 하면 그것도 아니라고 하고,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하면 부끄럽다고 피하기만 한다. 내가 본 이지훈은 세상에서 제일 빛나는 사람인데. 형이 나를 좋아하는 만큼 자기 자신도 사랑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내 표현들도 잘 받아주고 나한테도 더 표현해주지 않을까? 근데 뭐, 표현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형이 날 보는 눈빛이 사랑이 아니라면 이 세상에 사랑이라는 건 없는 거거든. 아, 이지훈 보고 싶다.
2xx1년 1월 12일
형이랑 키스했다 미친. 다시 생각하니까 죽을 것 같아서 더 못 쓰겠다.
2xx1년 1월 13일
아침 일찍 일어나 맑은 정신으로 어제 일기를 오늘 쓴다. 아... 아직도 안 믿기는데 이거 현실이 맞는 건가?
어떻게 된 일이냐. 어제저녁에 형 자취방에서 찜닭을 시켜 먹고 노곤하게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사귀기 전에도 과제 한다고 같이 밤새다가 잠들고 그런 적 많기는 한데. 사귀고 나서 자취방 처음 놀러 가서 그런가? 평소랑 다르게 좀 설레는 기분이 있긴 했거든. 근데 뭐 티 안 내고 나란히 누워서 서로 휴대폰 보고 있는데 형이 갑자기 웃더니 나한테 영상을 보여줬다. 아니 분명 봤는데 보고 웃기까지 했는데 무슨 영상인지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키스의 충격에 기억이 휘발된 것 같다.
아무튼, 영상을 보고 웃겨서 푸하하 웃었는데, 자세가 좀 이상했다고 해야 하나. 서로 약간 떨어져서 휴대폰을 보고 있다가 보여주겠다고 옆에 딱 붙는 바람에. 영상 보고 웃으면서 형을 쳐다봤는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분위기가 진짜 키스 각. 형도 알고 있으니 쓰는 거지만, 나 첫 키스도 아닌데 왜 그렇게 놀랐냐면 무려 이지훈이 먼저. 먼저 키스를 했다고 나한테….
찬물로 세수하고 왔다. 이지훈은 진짜 여우가 아닐까? 여우라는 말도 이상하다. 그냥 나 심장마비로 죽으라고 보낸 사람 같다. 부끄러워서 사랑한다는 말도 잘 못 하고, 내가 좋아해 귀여워 이런 말 할 때마다 오글거린다. 주책이다 잔소리하는 사람이 뻔뻔하게 입술부터 들이밀다니. 근데 분명 내가 첫 연애라고 알고 있는데 수상할 만큼 잘하시더라고요. 이 문제는 다음에 한 번 얘기를 해봐야 할 것 같다.
한참 쪽쪽 거리다가 겨우 정신 차리고 멈췄다. 먼저 당돌하게 그렇고 그런 건 자기면서 입 떨어지니까 완전 얼굴이랑 귀 다 새빨개져서 쳐다보지 말라고 이불 속으로 숨어버리더라. 그래서 그냥 이불 위로 껴안았다. 이지훈 김민규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닌가? 아…. 미친놈처럼 자꾸 웃게 된다. 그만 정신 차려야지! 오늘은 만나기로 하지는 않았는데, 이따 심심하면 만나자고 하지 않을까? 양치질 열심히 하고 나가야지.
2xx1년 4월 6일
오늘은 내 생일이었다. 어릴 땐 생일을 중요하게 챙겼던 것 같은데 성인 된 후로 별생각이 없어져서 거의 까먹고 있었다. 평소랑 똑같이 전공 수업 끝나고 나왔는데 강의실 앞에 형이 기다리고 있길래 깜짝 놀랐다. 형 어쩐 일이에요? 하면서 후다닥 뛰어가니까 -ㅅ- 이 표정으로 가자. 한마디 날려주더라.
그렇게 영문도 모르고 형 자취방으로 갔더니 케이크가 짜잔~ 하고 있었다. 이 사람 진짜 뭐지?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건가…. 형한테 얘기한 적 없어서 모르는 줄 알았는데 진짜 감동받았다. 감미로운 생일 축하 노래도 듣고 같이 케이크 잘라서 맛있게 먹고 있을 땐 너무 행복해서 꿈이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꿈이 이렇게 길리는 없으니까 현실이겠지?
케이크 먹고 뒤에서 이지훈 껴안고 과제 하는 거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형이 화장실 갔다 온다고 일어났다. 혼자서 휴대폰 보면서 멍때리고 있으니까 갑자기 휴대폰 위로 웬 반지 케이스 같이 생긴 걸 쑥 내밀더라고. 난 목걸이 선물인가? 싶었다. 헐 뭐야! 하고 받아서 여니까 반지가…. 그리고 민망한 표정으로 자기 눈썹을 긁적거리는데 약지에 똑같은 반지가…….
나 100일 선물로 커플링 준비했는데 어쩌지. 완전 비상이다. 그렇다고 반지 선물이 싫다는 건 절대!! 아니다. 내가 쓸데없이 너무 일찍 준비했나 보다. 그치만 생일선물로 커플링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단 말이야ㅠㅠ 나중에 형이 이거 읽으면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알겠지? 반지 받고 잠깐 주춤했다고 상처받은 형이 이렇게 말했다. '미안, 내가 너무 들떠서 부담스러운 선물을 준비했나 봐.' 그런 거 아니라고 너무 해명하고 싶었어….
제일 들떠있는 사람이 나였는데ㅜㅜ 형이 내 마음을 꼭 알아줬으면 좋겠다. 일기를 뜯어서 보여줘야 하나?
2xx1년 4월 14일
어제는 형이랑 사귄 지 100일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왜 어제 바로 안 썼냐고? ㅎㅎ 자세히 쓰면 진짜로 혼날 것 같아서 못 쓰겠다. 뭐, 어른들의 사정이지.
나름 100일이니까 수업 다 끝나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근데 우리 둘 다 그런데 처음 가봐서 우물쭈물 눈치 보는 게 좀 웃겼다. 기분 좋게 와인도 한 잔씩 하다가 선물 준다고 하면서 반지를 딱 꺼내니까 형 표정이 완전 헉! 이었다. 내가 반지가 싫어서 그랬던 게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설명했더니 형은 바로 수긍했다. '그러게 커플링은 생일선물보다는 100일 선물이 잘 어울리네' 라고 했던 것 같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우리가 서로 이만큼 사랑한다는 건데!!
저 위에 말은 실제로 했다가 오글거린다고 욕먹었다. 진심이었는데ㅠ 그렇게 반지 사건은 넘기고 우리는 한참 동안 그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교수 욕을 했다. 대학생이니까^^ 4학년인 형이 무려 시험 기간 중 하루를 쉬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굴렀는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연락도 제대로 못 하고 과제와 시험공부에 미쳐 살았던 덕분에 그나마 어제 하루를 덜 불편한 마음으로 즐겼던 것 같다..ㅜㅜ
그러고 나서 형 자취방에서 간단하게 과자랑 캔맥주로 2차를 했다. 이지훈은 무뚝뚝하고 무심한 상남자 같은 성격을 가졌으면서 또 술은 못하는 편이라 집에서 맥주 한 캔을 다 마셨을 땐 이미 취한 상태였다. 먹은 거 정리 좀 해놓고 가려고 주섬주섬 쓰레기 버리고 있으니까 술주정 부리더라ㅋㅋㅋ 근데 기억 못 하는 듯. 나중에 이거 읽으면 기억나려나? 혼자 '아 김민규 잘생겼다 잘생겼는데? 잘생겼잖아'라고 중얼거렸는데. 순도 100% 진실입니다 이지훈씨. 웃으면서 나 잘생겼어? 나 잘생겼어? 했더니 잘생겼다고! 라고 소리쳐서 나 조금 놀랐다. 설마 형 내 얼굴 때문에 만나는 건 아니지…?
아무튼, 방 치우는 동안 자꾸 맨바닥에 눕길래 침대로 옮겨주고 곧 잠들 것 같아서 옆에 누워서 수다 떨었다. 무슨 얘기 했더라. 형이 취해있어서 진지한 대화는 아니었고 또 교수님 욕했다. 그러다가 뭐 우리가 알고 지낸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이런 대화 했던 것 같은데? 얘기하다가 형 잠든 것 같아서 집 가려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집 가려는 사람을 막. 막 끌어당겨서 눕히더니 막. 어휴. 이지훈 여우인 줄 알았더니 늑대였다. 연애 처음이라는 거 아무래도 거짓말 같아요ㅡㅡ
그래서 싫다는 건 아니고…. 많이 사랑한다구♡
2xx1년 8월 20일
형이랑 싸웠다. 이걸 싸웠다고 해야 하나. 기분이 너무 안 좋아서 별로 쓰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것도 나중에 보면 왜 이런 거로 싸웠지? 할 것 같아서 그냥 쓴다.
오늘은 오랜만에 영화나 보자고 영화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거의 다 도착할 때쯤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약속 시각보다 영화관에 좀 일찍 도착해서 안 맞았는데, 예보에도 없던 소나기라 형이 걱정됐다. 오고 있냐는 카톡도 안 보고, 전화도 안 받고. 우산 하나를 사서 버스정류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전화가 왔다. 우연히 정류장에서 후배를 만나 우산 얻어쓰고 영화관에 왔다고.
형은 학교에 친한 사람이 많이 없다. 워낙 혼자 다니는 걸 좋아해서 나도 친해지기 어려웠을 정도니까. 그런데 요즘 형한테 친한 척하는 신입생이 한 명 생겼다. 신입생 들어오면 멘티 멘토 어쩌구 하면서 선배 한 명이 신입생 몇 명 모아서 음료 사주면서 학교 얘기 해주고 그런 거. 그중에 한 명이었다. 근데 하는 꼬락서니 보니까 어떻게든 형이랑 엮이고 싶어서 난리가 났더라고. 형 말마따나 나 같은 애가 애인 자리에 떡하니 있는데 정신이 나간 건지.
그래서 그 후배 마음에 안 든다고 몇 번 얘기했다. 물론 아예 모르는 척하거나 멀리하라는 건 아니었다. 같은 과 후배인데 어떻게 그러겠냐고…. 근데 솔직히 4학년이랑 신입생이 마주치면 뭐 얼마나 마주치겠어? 연락 오는 거 안 받아주고 인사하는 거 대충 넘기고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산을 씌워준 게 그 자식이었다는 게 중요한 거다. 내가 그렇게 싫다고 몇 번이나 말했던 그 후배 놈을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쳤다는 이유로 나한테 연락 하나 없이 홀라당 우산을 같이 쓰고 나란히 걸어서 영화관에 왔단다. 심지어 영화관에 다시 가니까 그놈이 형 옆에 붙어서 꼬리나 흔들고 있더라. 그 꼴을 보는데 어떻게 화가 안 나?
그래도 오랜만에 나와서 만난 거니까 기분 망치기 싫어서 꾹 참았다. 성민재랑 웃으면서 인사도 해주고 손잡고 사이좋게 영화까지 봤는데도 서운함인지 질투인지 사라지지 않아서 조금 툴툴댔다. 나한테 전화라도 하지. 데리러 가려고 우산까지 샀는데. 걔랑 딱 붙어서 우산 쓰고 왔겠네? 막. 걔는 막. 선배 비 맞아요. 더 붙으라 하면서 어깨동무하고. 사실 마지막 말은 장난이었다. 설마 그랬겠어?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나보고 어떻게 알았냬.
걔 형한테 관심 있는 거다. 수십 번 말했는데도 믿질 않는다. 신입생이 자기 같은 화석한테 무슨 관심이 있겠냐고. '그냥 대학교 들어와서 처음 본 선배가 나라서 그런 거겠지. 나를 왜 좋아하겠어, 내가 뭐라고.' 그럼 내가 형을 왜 좋아했겠냐고 물으니까 그 질문에는 또 대답을 못하더라. 그게 너무 서운하고 속상하고 화났다. 말문이 막혀서 멍청하게 가만히 앉아있다가 그냥 집에 가자고 하고 들어왔다.
이지훈은 답답할 만큼 본인을 잘 모른다.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인데. 내가 형 좋아하는 것 같다고 주변 사람들이 말할 때도 형은 그냥 놀리는 줄 알았단다. 뭐라고 했더라…. '너 같은 애가 날 좋아할 리가 없잖아' 였던가? 그때는 그 말도 마냥 좋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살짝 서운하기까지 하다. 내 진심이 부정당하는 느낌?
그래, 뭐 내가 성민재 걔한테 질 것 같아서 불안한 게 아니다. 걔가 플러팅한다고 형이 흔들릴 것 같아서 불안한 것도 아니다. 아닌가? 불안해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걸까. 잘 모르겠다. 이지훈 좋아하기 참 어렵다. 아까는 그렇게 서운하고 속상했는데 지금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자니 그냥 집에 들어오면 안 됐나 싶다. 진지하게 얘기를 좀 해볼걸. 형은 이런 데에는 또 소심해서 혼자 마음고생 하고 있
2xx1년 8월 21일
ㅋㅋㅋ일기를 쓰다가 나가서 저렇게 끊겼구나. 형이랑 화해했다! 저거 쓰고 있을 때 전화로 집 앞이라고 부르길래 너무 급하게 나가느라 말도 마무리 못 했나 보다. 집 앞이라는 소리에 허겁지겁 달려 나가긴 했는데 막상 형 얼굴 보려고 하니까 괜히 또 서운해서 마음이 복잡했다. 우물쭈물하고 있으니까 형이 먼저 발견하고 와서 꽉 안아줬다.
서운하라고 한 말 아닌 거 나도 안다. 원래 형 성격이 그런 거니까. 그런데 말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던 사람이 횡설수설 주절주절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설명하는 걸 듣고 있으니 자꾸만 광대가 올라가더라!! 표정 관리하느라 힘들었다. 김민규. 너는 지금 서운한 사람이야. 나는 서운해. 나는 속상하다. ㅋㅋㅋ 진짜로 이랬음.
형이 의외로 행동파였나 보다. 소심해서 말도 못 하고 혼자 걱정하고 맘고생 할 줄 알았는데! 앙큼하게 집 앞까지 찾아와서 화를 풀어주다니. 아무튼, 성민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형은 진짜로 걔가 자기를 안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내가 서운한 게 이해가 잘 안 됐다고 했다. 그냥 학교 후배인데 왜 그러지? 싶었다고…. 그런데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만약 누가 나를 좋아하는 게 티가 다 나는데 내가 계속 그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면 자기도 서운할 것 같단다.
질투 날 것 같더라고.라고 말함! 이지훈이 소리 내서 질투 날 것 같다고 했다.
그래. 사귀는 사이에 안 싸우는 건 말이 안 된다. 진짜 상대랑 100% 영혼의 단짝이거나 누구 한 명이 죽어라 참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인데, 세상에 그렇게 잘 맞는 사람이 있겠냐고. 좋아하니까 서운하고, 좋아하니까 바라게 되고, 좋아하니까 질투하는 거다! 싸울 일 없었으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싸우게 되면 이렇게 바로바로 얘기하고 푸는 게 좋겠다. 영화관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내가 너무 쌀쌀맞아서 무서웠단다. 헤어지자고 할까 봐 눈물도 찔끔 났다고 했다. 나는 나쁜 놈이다. 김민규 너 이지훈한테 잘해라.
2xx2년 1월 6일
1주년 기념으로 2박 3일 부산여행을 다녀왔다! 겸사겸사 이지훈 졸업 축하도 했다. 여행 이래 봤자 특별한 걸 하지는 않았다. 저녁에 도착해서 불꽃놀이하고 둘째 날 아쿠아리움 갔다가 근처 카페에서 뭔 콜라보? 한대서 조금 구경했다. 맞다. 특별하지 않았다. 그런데 뭐 특별한 걸 해야 하나? 어떤 날, 누구랑 있는지가 제일 중요하지!
형이랑 꽤 많은 얘기를 나눴다. 연애 얘기도 얘기지만 앞으로의 계획 같은 인생 얘기? 형은 졸업하고, 나도 이제 막학년이니까. 취업이라던가 자격증이라던가…. 막연히 나이만 먹어갈 뿐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과도 대충 성적 맞춰서 온 거라 졸업을 앞둔 지금이 돼서야 조급한 마음이 들었었다. 그런데 형이랑 얘기하다 보니까 생각이 좀 정리됐다.
형도 심리학을 전공하고는 미디 공부를 하고 있으니까 너도 그냥 이것저것 하다 보면 흥미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사실 다들 하는 얘기인데도 형이 그렇게 얘기해주니까 이상할 만큼 힘이 났다. 그치, 사람이 인생을 계획대로 살 수 없는 거니까. 형이 작곡을 공부하니까 나는 노래를 공부해볼까? 했다가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마음 돌렸다ㅎ..;
내가 벌써 반오십이라니. 시간이 너무 빠르다. 형이랑 함께 있는 시간은 꿈처럼 행복했는데 집에서 혼자 끄적이고 있자니 꿈에서 깬 기분이다. 그래도 힘내야지. 이지훈 먹여 살리려면 열심히 해야지! 김민규 파이팅!!
2xx2년 4월 6일
형이랑 함께한 두 번째 생일이었다! 그런데 둘 다 바빠서 오래 있지는 못하고 낮에 잠깐 만나서 꽃구경하면서 걷다가 헤어졌다ㅜㅜ 작년에 형이 얼마나 힘들게 나와의 하루를 보내줬는지 이제야 공감이 됐다. 사실 나는 비교적 널널하게 시간표를 짤 수 있었는데, 수강 신청 전에 타과 수업도 들어보고 싶어서 몇 개 담아뒀던 게 화근이었나보다. 이것저것 하다 보면 잘 맞는 게 있을 것 같아서 재밌어 보이는 거 조금 넣었더니 시간표가 망해버렸다…. 수업은 빡빡했고 과제랑 시험은 더 심했다. 내가 왜 그랬지….
형은 요즘 꽤 바쁜 것 같다. 사실 나는 들어도 어려운 얘기라 잘은 모르겠지만, 형이 만든 곡이 지인 통해서 어떻게 잘 타고 가수한테 갔다고 했던가. 좋은 일로 바쁜 거라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나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다. 나도 과제 하랴 수업 듣느랴 바쁘긴 하지만 이게 다 자랑스러운 애인이 되는 과정이겠거니 생각하면 많이 힘들진 않은 것 같다. 사람을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걸까?
1학기 종강하고 형 일도 마무리되면 아예 형 자취방에 눌러앉을 계획이다.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것 같다. 형이랑은 겨우 1년 만났는데 내 모든 미래계획에 형이 들어가 있다는 게. 내가 너무 주접떠는 건가 싶다가도 만나자마자 꽉 안고 안 놓아주던 형 생각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2xx2년 11월 23일
어제는 형의 생일이었다. 아직 종강 전 이긴 한데, 1학기만큼 시간표가 극악무도하진 않아서 몰래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다♡ 엄청 바쁜 척 수업도 늦게 끝난다고 했더니 그럼 작업실에 있을 테니까 끝나면 연락하라고 하더라구. 이게 웬 떡이야~ 그냥 이벤트 해주라고 하늘이 준비한 날이었던 것 같다! 수업 끝나자마자 형 자취방으로 달려가서 미역국 끓여놓고 미리 주문 제작한 케이크까지 다 세팅해놓고 지금 출발한다고 전화했다. 괜히 실내인 거 들킬까 봐 밖에서 전화 거는 치밀함도 잊지 않았다.
아 참, 최근에 형은 이사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작업실 근처로 자취방을 옮겼다. 생각해보니 이걸 안 썼네…. 아무튼!! 전화하고 몇 분 기다리니까 형이 도착했다. 문 열고 터덜터덜 걸어오다가 식탁에 케이크랑 미역국 보더니 놀라서 두리번거리더라ㅎㅎ 화장실에 숨어서 문틈으로 지켜보다가 핸드폰으로 생일 축하 노래 틀고 부르면서 나갔더니 형이 엄청 놀랐다. 이게 서프라이즈의 묘미지~
케이크에 불붙이고 앉아서 소원 빌라고 했더니 뭘 이런 걸 하냐면서 형은 손깍지를 끼고 한참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꽤 오래 있길래, 소원이 많은가 싶어서 가만히 기다렸다. 그런데도 고개를 들어주질 않아서 형? 하고 불렀더니 형이 울고 있었다. 알고 지낸 지 3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데 우는 모습은 처음 봐서 순간 몸이 굳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조심스러웠다. 우는 이유도 모르는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으니까….
옆에 앉아서 토닥여주니까 조금 더 울더니 형은 금세 평소처럼 돌아와서 하하 웃었다. 내 앞에서 운 게 어지간히 민망했는지 구구절절 또 설명이 이어졌다. 자기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 어렵기도 했고, 일하면서 사람이랑 몇 번 부딪히기도 하면서 지쳐있었다고.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데 괜히 나까지 눈물이 날 뻔했다. 그럼 나한테라도 말해주지 그랬냐 했더니 나도 바빠 보여서 말을 못 했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의지가 되는 애인이 되고 싶었는데, 아직 한참 멀었나 싶기도 하구…. 하지만 힘들었다던 형한테 티를 낼 수는 없으니까 위로하는 데에 집중했다. 그러고 나서는 마주 앉아서 밥 먹고 케이크도 먹고 형이 보고 싶었다던 영화도 같이 봤다. 특별한 걸 하지 않아도 하루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게 신기하다. 사소한 일상을 함께 보내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막상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면 되게 큰 행복이구나 싶다. 나도 형한테 그런 행복일까? 그랬으면 좋겠다ㅎㅎ.
한 장을 더 넘기자 일기장이 덮였다. 다 쓰기도 어려워 보였던 일기장은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기어코 한 권을 더 사 와야만 했었다. 그렇게 민규의 책상 위에는 총 두 권의 일기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찢어 태우면 그만인 종이 몇 장처럼 가벼운 시간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별을 통보하고 집에 돌아와서 하는 일이 고작 지난 추억이 가득한 일기를 읽어보는 것이라니.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는 제 마음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4년이라는 시간이 허무할 만큼 간단한 이별이었다. 헤어지자고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훈은 담담했다. 알겠어, 잘 지내. 유리잔에 맺힌 물방울을 이으며 손끝으로 장난을 치더니 짧은 대답만을 남기고 카페를 휙 나가버리더라. 앉아있을 시간도 아깝다는 듯 서둘러 나가는 뒷모습에 민규는 속이 끓었다. 하다못해 이유라도 물어볼 줄 알았는데.
사실은 저도 안다. 최근 들어 지훈을 피곤하게 만들었다는 거. 숨겨지지 않는 서운함이 고스란히 지훈에게 전달될 걸 알면서도 알아주길 바랐다. 언제부터인가 일방적으로 지훈의 모든 부분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있다는 생각이 점점 민규를 좀먹기 시작했다. 생각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게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자꾸만 서운해지는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지훈은 어떻게든 잘해보려 노력했지만 삐뚤어진 마음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표현을 갈망할 때는 언제고, 낯간지러운 말을 뱉는 지훈의 진심을 의심했다. 그렇게 반복되는 다툼 속에서 두 사람은 서서히 지쳐갔다. 민규는 결국 인정했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겨우 이 정도인 거라고. 지훈은 민규를 사랑했지만 성격을 바꿔 보일 정도는 아니었고, 민규는 지훈의 바뀌지 않는 모습까지 사랑하지는 못했던 거다. 그게 이별의 이유였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술에 취한 민규가 지훈에게 전화를 해보겠다고 소동을 피운 일이 있었다. 일행들이 뜯어말렸기에 진짜로 전화를 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민규와 술자리를 함께한 수현과 소민은 카페에서 처음 만나 어느덧 알고 지낸 지도 1년이 훌쩍 넘어 사적으로도 꽤 가까운 사이였다.
그들은 이별한 민규의 든든한 버팀목이면서도 동시에 지훈에게 처음으로 서운함을 느끼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민규가 본 소민은 지훈과 매우 닮아있었다. 수현을 포함해 셋이 친해진 게 신기할 정도로 공과 사 구분이 확실한 편이기도 했고, 말투도 굉장히 사무적이었다. 사적인 자리에서도 줄곧 무덤덤한 태도를 유지하던 소민이 변화하기 시작한 건 수현과 연애를 시작한 시점부터였다. 처음엔 민규도 몰랐다. 언제부터인가 수현에게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소민을 보면서, 무의식에 그려온 이상적인 연인의 모습을 보면서 부러움을 느꼈던 것도 같다.
소민이가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
평소와 같은 술자리에서 꺼낸 민규의 말에 수현이 스읍. 하는 소리를 냈다. 글쎄요? 처음 만나기 시작할 땐 무뚝뚝했죠. 너한테도 무뚝뚝했어? 네. 그래서 그걸로 꽤 다퉜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바뀌었지? 민규의 물음표에 수현은 고민하는 듯 보였다. 잠시 생각하며 말을 정리한 수현이 입을 뗐다.
표현하는 게 부끄러웠대요. 처음에는. 말 안 해도 충분히 알 텐데 자꾸 말해달라고 하니까. 근데 제가 그걸로 서운해하니까 말 안 하면 모르겠구나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아니, 말을 안 해도 전달은 될 테지만. 사람은 알고 있는 것도 계속해서 확인받고 싶어 하니까. 따져보면 제가 서운해하는 게 싫어서 바뀐 거 아닐까요? 처음엔 어려웠는데 하다 보니까 이젠 자기도 좋다고 하더라고요.
민규는 어쩐지 그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지훈과 저는 4년을 만나며 셀 수 없을 만큼 부딪혀왔는데, 정작 지훈은 그대로이지 않은가. 하는 못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지훈의 성격이 그렇다는 걸 가장 잘 알기에 서운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으로 인해 변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자니 지훈도 그렇게 해줄 수 없는지 자꾸만 바라게 됐다.
그날을 기점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다툼의 빈도가 높아졌다. 우리 지금까지 이렇게 잘 만나왔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도 서운해도 말하지 말고 참으라고요? 말을 왜 그렇게 해 또…. 의미 없는 말싸움이 이어졌다. 그렇게 몇 번의 싸움에 지나 결국 지훈이 항복했다. '노력해볼게. 네가 서운할 거 알면서도 자꾸 맞춰주니까 내가 이기적으로 굴었나 봐, 미안해.' 솔직한 지훈의 사과를 듣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했다. 이런 걸 원했던 건가? 제 속마음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번 틀어진 마음은 도통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이게 진심일까? 지금까지 못 한다며 하루아침에 이렇게 바뀔 수 있는 거였나? 싫은 소리 하는 게 싫어서 그러는 척 하는 거면 어떡하지? 형이 그럴 리가 없는데. 부쩍 늘어난 지훈의 표현은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민규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왜 신은 저에게 이토록 작은 마음을 주었는지 원망스러워 목놓아 울고만 싶었다.
세상에 다시 없을 만큼 사랑했던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는 건 너무 괴로웠기에, 민규는 지훈이 미워질수록 자신을 탓했다. 내 속이 좁아서 그래, 형은 노력하고 있잖아. 내가 덜 바라면 돼. 나만 잘하면 다 해결될 일이야. 스스로를 갉아먹은 결과는 이별이었다. 더는 지훈을 미워하고 싶지 않았고, 더는 자신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처음엔 당연히 힘들었다. 사무치게 그립다가도, 연락 한 번 하지 않는 지훈에게 화가 났다. 홧김에 휴대폰에 있는 사진을 모두 지웠다가도, 새벽에 혼자 훌쩍거리며 앨범을 복구했다. 삭제와 복구를 반복하기를 3개월, 민규는 그제야 지훈의 사진을 완전히 지울 수 있었다.
Rrrrrr - .
베개 바로 옆에서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뭐야, 벌써 아침이야?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을 애써 깜빡였다. 아직 어두운데…. 입으로 앓는 소리를 한 번 내곤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여보세요... 잠에서 깨지 못한 목소리가 잔뜩 잠겨있었다. 여보세요...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인상을 한 번 찌푸리며 반대쪽 손으로 눈을 비볐다. 뭐야, 누구야... 이어지는 정적에 깜빡 졸고 나서야 귀에 붙였던 휴대폰을 떼어내 화면을 눈에 담았다. 화면에 적힌 열한 자리 숫자가 눈에 들어오자 몸이 반사적으로 일으켜졌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알 수 있었다. 4년 동안 지겹도록 봐왔으니까. 새벽 3시 56분에 걸려온, 6개월 전에 이별한 전 애인 이지훈의 전화였다. 번호를 확인한 머릿속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잘 못 걸었나? 끊어야 하나? 확인 좀 하고 받을걸. 아니 근데 형인지 어떻게 알았겠어 내가. 부스스하게 내려와 시야를 방해하는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 민규야.
그냥 끊자. 생각하며 통화 종료 버튼을 향하던 손가락이 형의 목소리에 그대로 멈췄다. 저도 모르게 눈을 꽈악 감았다. 민규야... 민규야. 흔들리는 형의 음성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건데. 깊은 한숨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다. 잠깐 숨을 고르고 감았던 눈을 뜨며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전화 잘 못 거셨어요."
떨리는 목소리가 볼품없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형은 모를 거니까.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이지훈이 취했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 전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헤어진 지 반년도 더 넘은 사이에 술 먹고 전화하는 건 너무 추한 실수 아닌가. 이제 와 무슨 소용이라고.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통화 종료를 망설인 것이 무색하게 형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럼 그렇지, 그냥 실수였던 거잖아.
끊을게요. 한참을 머뭇거리다 겨우 말을 꺼냈다. 끊는다고. 이지훈, 나 끊을 거라니까? 할 말 없어?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은 말들을 속으로 겨우 삼켜내고 휴대폰을 쥔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나 진짜 끊을 거야. 그리고 차단할 거야. 할 말 있으면 지금 해. 아니, 그냥 하지 마.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종료 버튼에 검지가 점점 가까워졌다.
- 민규야.
멀어진 휴대폰에서 희미한 음성이 새어 나온다.
- 왜 날 버렸어?
마음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서로에게 더 큰 상처로 남기 전에 끝내고 싶었다. 이지훈을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나를 탓했고, 그럼에도 이지훈을 미워하는 내 자신이 너무 싫어서 날마다 괴로워했다. 어떻게든 너를 계속 사랑하고 싶어서 발버둥쳤던 내가, 널 버렸다고? 이 감정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갈피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지금 억울한 건가? 화가 나는 건가? 미안한 건가? 슬픈 건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황당했다. 그래, 나는 지금 이 상황이 황당한 거였다. 이별하고 반년이 지나서야 연락해온 주제에 도리어 내 탓을 한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저를 사랑했는지도 모르면서. 기대를 안 했다 말하면 그건 거짓이었다. 사실은 아주 간절히 바랐을지도 모른다. 나를 한 번만 잡아주기를. 아직 사랑한다던가, 보고 싶다던가, 집 앞이라던가 하는 흔한 미련들을 말이다. 정작 이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왜 저를 버렸냐 문책하는 말이었지만.
"할 말 그게 끝이면 끊을게. 번호 차단할 거니까 연락하지 마."
- 민규야 잠시만, 잠시만...
이번에야말로 정말 끊어야지 다짐했는데, 울먹이는 목소리에 속절없이 약해진다. 형 자고 일어나면 후회할 거야. 나도 알아, 나도 아는데. 전화 너머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간이 소음이 섞이는 걸 보니 집도 아닌 모양이었다. 술도 잘 못 하면서, 집이라도 빨리 들어가지. 입안에 맴도는 하지도 못 할 말 대신 한숨을 푹 쉬었다. 진짜 끊을게. 끊겠다는 나의 말에 다급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 민규야, 민규야.
- 오늘 뭐 했어? 미안해. 근데 목소리 조금만 더 들려주면 안 될까?
- 미안해. 술 먹고 전화해서 미안해.
형 진짜 나한테 왜 이래?
- 근데 민규야, 나 진짜 너무 괜찮고 싶었는데 괜찮지가 않아.
- 어떻게 했어야 네가 날 계속 사랑했을까. 자꾸 그런 생각만 하게 돼. 내가 어떤 사람이었어야 할까. 미안해. 사실 네가 질려 할까 봐 무서워서 그랬어. 내 마음을 다 보여주면, 민규 네가 더 빨리 떠날 것 같아서 무서웠어.
- 내가 잘할 테니까 우리 다시 만나면 안 될까? 민규야 사랑해. 다 진심이었어. 거짓말 아니었어 나, 나 진짜로 너 많이 사랑했어. 아니 아직도 사랑해. 내가 바뀔게, 내가 잘할게. 민규야 제발...
형 그만해.
- 왜, 왜 그만하라고 해. 나 너한테 끝까지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네가 떠나가는 그 순간에도 알겠다는 말밖에 못 했어. 알잖아. 민규 너 앞에서 울기 싫어서 그냥 도망치는 게 전부였어 나.
- 왜 날 버렸어. 나한텐 네가 전부였는데 나는 이제 어떡해? 민규야, 민규야….
헤어지는 데에 누구 잘못이 어디 있어 우리는 그냥. 우리는 그냥 거기까지가 맞았던 거야. 우리는 그만큼밖에 안 맞는 사람들이었던 거고... 내가 미안해. 형을 그렇게 만든 게 나인가 봐. 형한테 상처가 될 거 알면서 서운해했어. 형이 날 위해 많이 노력하고 바뀐 거 하나도 몰라서 그랬어. 그냥 형한테 계속 바라기만 했던 거야 내가. 그런데 그게 어떻게 형 잘못이겠어.
-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바뀌면 네가 서운할 일도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내가 잘할 테니까 민규야.
형... 우리가 다시 만나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 아니, 절대 아닐 거야. 우린 또 똑같이 반복하게 될 거야. 형은 바뀌려고 노력할 거고 나는 그런 형 모습을 보면서 미안해하기만 할 거야. 내가 처음부터 형한테 그랬으면 안 됐는데... 미안, 그냥 끊을게. 다시 연락하지 말고 집 조심해서 들어가.
휴대폰을 잡은 두 손이 덜덜 떨렸다. 액정 위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내 작은 마음에 나만 다친 줄 알았다. 형을 미워하기 싫어서 나를 미워했다는 말이 그냥 내 마음 편하려고 제멋대로 한 포장이라는 걸 이제야 알아버렸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 그랬다. 끊임없이 내 마음을 확인받고 싶었던 건 형일 텐데도 계속해서 서운해하고 실망하고 화내는 나한테 상처받으면서 노력했던 거다. 몇 년이고, 몇 번이고.
무책임하게 이별을 통보해놓고 이지훈을 잊었다고 생각했다. 벼랑 끝에 형을 밀어 넣고 뒤돌아 도망친 주제에 마음을 정리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랬으면 안 됐는데. 당장이라도 형에게 뛰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목소리 조금 더 들을걸. 형 할 말 남은 것 같았는데 그거라도 다 들어볼걸. 끔찍한 미련이 이제서야 흘러넘쳤다. 다시 전화 걸어야 해.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서둘러 잠금을 푼 작은 화면에서 열한 자리 숫자를 누르려는 동시에 짧은 진동이 울렸다. 곧이어 상단에 자그마한 메시지 알림이 뜬다.
[미안해. 번호 차단해줘.]
내용과 번호를 수차례 확인하고 나서야 소란스러운 마음이 가라앉았다. 갈 곳을 잃은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한참을 방황하다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한 번 눌렀다. 어떻게 끝까지 이럴 수가 있지. 새카만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풀썩 침대에 누웠다. 그냥 전화 끊지 말걸. 어디냐고 물어보기라도 할걸. 나도 아직 사랑한다고 말해줄걸. 전하지 못했던 진심들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청승맞게 다시 눈물이 흘렀다. 아, 나 진짜 추하다. 그만 울어야 하는데, 내일 출근인데.
눈물이 멈추지 않아 잠들 수 없는 괴로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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