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딩굴딩굴 by 딩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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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민규의 품에 안겨 울다가, 눈물이 멎을 때쯤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쪽팔려⋯. 정신이 돌아왔음에도 쉽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으니 지훈의 민망함을 알아챈 민규가 먼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제 학교 나올 거지? 알아서 간다니까. 안 나오면 또 찾아올 거야.

“알아서 가겠⋯ 너 얼굴이 왜 그래?”

“응?”

되풀이되는 대화에 발끈하며 고개를 든 지훈이 경악하며 물었다. 민규의 입술이 파랗게 떠 있었다. 비를 맞은 채로 바깥에 오래 서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모습이었다. 안 추워? 지훈이 묻자 그제야 파란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어, 나 추운가 봐. 지훈아 나 추워. 황당한 민규의 말에 지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추워 보여.

“너 집에는 어떻게 가려고.”

“택, 택시 타면 돼.”

떨리는 입술 탓에 말을 더듬은 민규가 몸을 한껏 움츠렸다.

“근데 나. 옷, 옷 한 번만 빌려주면 안 돼?”

“옷?”

택시를 타려면 큰길까지 나가야 하는데, 여기서 큰길까지는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에 옷만 갈아입고 가겠다는 게 민규의 뜻이었다. 안 돼⋯? 불쌍한 눈빛 공격에 마음이 약해진 지훈이 머뭇거렸다. 그래도 집은 좀. 현관에서 갈아입고 갈게 진짜루. 아니, 근데 집. 너무 좁고 더럽단 말이야⋯. 차마 뱉지 못한 말이 그대로 삼켜졌다. 지훈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동안에도 민규의 입술은 열심히 파래지고 있었다.

지훈아 나 진짜 얼어 죽어. 추위를 견디지 못한 민규가 손을 뻗어 지훈의 손을 덥석 잡았다. 흰 손 위로 덮인 민규의 손이 얼음장처럼 느껴졌다. 와, 진짜 심한데. 손을 빼내는 것도 잊은 지훈이 골똘히 생각하다가 결심한 듯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봐.”

“응?”

“잠깐만 있어.”

그리곤 그대로 민규를 세워둔 채 현관문을 열었다. 급하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선 지훈은 옷장을 열고 눈에 보이는 옷가지들과 잡동사니들을 모조리 처박기 시작했다. 민규에게 빌려줄 큰 옷은 가장 깨끗한 바닥에 내려두고는 다급하게 바닥을 정리한 지훈이 방을 한 번 둘러보았다. 용량이 초과된 옷장이 살려달라는 듯 자꾸만 문 틈새를 벌려댔다. 지훈은 몸으로 문을 밀어 닫고는 의자를 끌어다 열리지 않도록 고정했다. 손바닥을 탁탁 힘차게 털어낸 지훈이 현관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들어와.”

몸을 움츠리고 있던 민규가 환하게 웃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다 젖은 운동화를 힘겹게 벗자 눈앞으로 옷이 내밀어졌다. 이거 입어. 품이 큰 맨투맨과 체육복 바지였다. 옷을 받아서 든 민규는 옷을 펼쳐 제 몸에 슬쩍 대보았다.

“이거, 작을 것 같은데⋯.”

실제로 민규의 몸 위에 올라간 맨투맨은 팔 길이부터가 짧아 보였다. 난감한 표정을 한 지훈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더 큰 건 반팔 밖에 없는데.”

아이고⋯. 작게 중얼거린 민규가 맨투맨을 제 몸에서 떼어내고는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럼 혹시 나.”

“안 돼.”

“야 아직 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안 돼. 그거랑 반팔 중에 골라.”

“나 그냥 자고 가면 안 돼?”

말이 되는 소리를⋯! 지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쌔게 화장실로 몸을 숨긴 민규가 작게 소리쳤다. 고마워 지훈아 진짜 너밖에 없어! 반팔티 문 앞에 두면 알아서 입을게! 이미 잠긴 화장실 문을 괜히 두어 번 흔들어 본 지훈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화장실은 정리 안 했다고⋯.

문을 두드리며 알겠으니 잠깐 나와보라고 사정하던 지훈은 얼마 가지 않아 들려오는 물줄기 소리에 문고리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민규를 말리는 것에 실패한 지훈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차마 내쫓기에는 작은 양심이 쿡쿡 찔려왔기에, 지훈은 민규가 쓸 베개를 몇 번 밟는 것으로 화풀이를 끝냈다.

“지훈아, 자?”

이미 벽과 하나가 된 듯 보이는 지훈이 민규의 목소리에 벽을 향해 몸을 더 붙였다. 잠들랑 말랑. 눈을 감고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있을 때쯤 자꾸만 말을 거는 김민규 때문에 눈을 뜬 게 벌써 세 번째였다. 지훈의 미간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그만 떠들고 잠이나 자. 지훈도 참 요령이 없었다. 잠든 척 무시하면 그만인 걸 굳이 대답해서 잠들지 않았다는 걸 인증하는 꼴이 됐다. 깜빡깜빡. 천장을 바라보고 눈만 깜빡이던 민규가 지훈의 쪽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지훈이 너, 그만두면 안 되나?”

벽에 붙은 지훈이 생각했다. 뭘? 독심술이라도 배운 건지 지훈이 속으로 생각하자마자 민규가 대답했다.

“너 일하는 그거⋯.”

민규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불을 휙 걷어내고 몸을 일으킨 지훈이 어둠 속에서 민규를 노려봤다. 야, 너 그냥 지금 나가. 이를 악문 지훈의 목소리에 민규가 이불을 꼬옥 껴안았다. 미안. 아오, 이걸 진짜로 내쫓을 수도 없고. 지훈은 다시 누워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끌어다 덮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그만두고 싶다고 둘 수 있었으면 시작도 안 했겠지. 앞뒤 사정 모르는 민규로서는 충분히 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지훈은 민규의 참견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애가 뭔 말을 못하겠어. 지훈은 끓어오른 속을 식히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서너 번 큰 호흡을 반복하니 답답한 속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빨리 잠들어야지 그냥. 하지만 지훈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훌쩍, 크응. 지훈의 등에 맞닿은 민규의 몸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새 감기 기운이 돈다고? 가지가지 하네⋯. 짧은 한숨을 내쉰 지훈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집에 감기약이 있었던 것 같았다.

“야, 감기약 줄게 먹고 자.”

“아냐, 나 괜찮아.”

“뭐래. 벌써 콧물이 줄줄⋯ 너 울어?”

안 울어⋯. 훌쩍이길래 당연히 감기 기운이 돌아서 인 줄 알았더니, 옅은 달빛에 비춘 민규의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눈물 날만큼 아픈가?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느닷없는 눈물에 당황한 지훈이 안절부절못하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민규가 몸을 돌려 지훈을 등졌다.

“병원, 병원 가야 해? 119 부른다?”

“⋯”

“넌 뭔 애가. 그렇게 아프면 말을 해야지.”

허둥지둥하며 어두운 방 안에서 지훈이 손을 짚어 휴대폰을 찾았다. 어디 있는 거야⋯. 이불을 아무리 더듬어도 짚이지 않는 휴대폰에 지훈의 손길이 급해졌다. 불 켜야겠다. 도통 휴대폰을 찾을 수 없어 불을 켜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지훈을 언제 돌아누웠는지 모를 민규가 붙잡았다.

“아픈 거 아니야⋯.”

“그럼 왜 우는데.”

지훈이 묻자 민규의 입이 도로 닫혔다. 고집이라도 부리는 듯 앙다문 입술을 바라보던 지훈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야.”

“응?”

“너 뭔데 자꾸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아니, 그게 아닌.”

“나라고 그런 일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점점 격양되는 목소리에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은 민규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무작정 품에 끌어안은 지훈은 가만히 안겨 씩씩거릴 뿐이었다. 지훈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서툴렀다.

“너 기분 나빠지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어.”

“나도 하기 싫어. 하기 싫다고. 그런데 이거 아니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나보고 뭘 어떡하라고.”

“미안, 미안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해서⋯.”

“처 울기는 씨발, 지가 왜 울어?”

“내가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데⋯ 미안. 안 울려고 했는데⋯.”

지랄이다 진짜. 안겨 있던 지훈이 한 손을 들어 민규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 품에 안았던 지훈을 놓아주고는 팔로 옆구리를 감싼 민규가 이불 위로 풀썩 쓰러졌다. 아파. 아파서 눈물 나. 지훈은 그런 민규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도로 누워 이불을 덮었다. 벽이 아닌 천장을 향해 누운 지훈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나는 이런 생활이 너무 익숙해서 뭔가를 이루고 싶은 마음도 없고,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없어.”

그러니까 혼자 생쇼 하지 마. 알아서 살 테니까. 응⋯. 말을 마친 지훈은 다시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민규는 등 돌린 지훈의 동그란 뒤통수를 쳐다보다가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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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결국 김민규였다. 대체 무엇을 이긴 거냐고?

“어서 오⋯ 아, 뭐야.”

“손님한테 뭐야?”

문이 열리는 소리에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며 인사를 건네는 카페 직원이 바로 지훈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비가 왔던 그날로부터 한 달 만에 이뤄낸 아름다운 승리가 아닐 리 없었다. 질린 듯한 표정으로 ‘알겠어, 알겠다고.’라고 말하는 지훈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던 것이 벌써 2주도 더 된 일이었다.


지훈과 민규 모두 눈물을 쏟아낸 그날을 기점으로 지훈은 아무렇지 않게 일을 나갈 수 없는 이상한 상태에 들어섰다. 제가 일을 그만두었으면 하는 민규의 말 때문인지, 며칠 동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자신을 괴롭혔던 뺨의 멍 때문인지 까닭은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갔다가, 민규에게 한바탕 시달린 후 학교가 끝나고 다시 집에 돌아오면 나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도통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정말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던가? 그것조차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지훈이 학습된 로봇처럼 집과 학교를 반복할 때, 줄곧 눈치만 보던 민규가 어느 날 자신의 휴대폰을 조심스레 지훈의 앞으로 내밀었다. 휴대폰 액정 속에는 깔끔하게 인테리어 된 자그마한 카페의 지도 정보가 띄워져 있었다. 지훈이 고개를 돌려 민규를 쳐다봤다. 뭐, 어쩌라고. 다소 날 선 눈빛에 움츠러들었다가 다시금 용기를 낸 민규가 입을 열었다.

“아빠 친구분이 나보고 알바 할 생각 있냐고 물어보셨는데, 나는 엄마가 하지 말래서…”

“그래서.”

“주변에 잘할 것 같은 애 있다고 말해보겠다고 했거든.”

민규의 말이 끝나자 이해가 안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 지훈이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 민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훈은 들었던 손을 옮겨 제 이마를 짚었다.

“못해.”

“고민이라도 해보면 안 돼?”

“그런 걸 내가 어떻게 해.”

“이런걸 네가 왜 못해?”

말 끝마다 따박따박 말대답이 붙었다. 이마에 올려 두었던 손을 내리고 민규를 돌아본 지훈의 입술이 움찔거리다 이내 꾹 닫혔다. 화를 참는 행동이었다. 말을 아낀 지훈은 민규를 무시하듯 고개를 돌려 앞을 쳐다봤다. 그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민규가 지훈의 책상 위 휴대폰을 가져오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카페 일 해본 적 없어.”

“…”

“잘할 것 같다는 거 빈말도 아니고, 생각 없이 물어본 것도 아니야.”

“됐어, 안 해.”

“시급도 잘 챙겨주신다고 했고 원하면 주말까지 일해도 된다고…”

“안 해, 안 한다고!”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지훈에게 시선이 쏠리며 조례 전 소란스러웠던 반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자신에게 꽂히는 수십 개의 시선에 눈을 질끈 감은 지훈이 눈을 내리 깐 채 책상 위의 물건들을 모조리 가방에 쑤셔 넣은 채 교실을 나섰다. 멍하니 앉아있던 민규가 뒤늦게 일어나 뒷문을 열고 지훈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는 이미 계단을 뛰어 내려간 후였다.

호기롭게 학교를 뛰쳐나왔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던 지훈은 그저 걷기를 반복했다. 좁은 집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학교에 돌아가 그 불쌍한 척 하는 얼굴을 다시 보고 싶지도 않았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꼴도 보기 싫었다. 제 일도 아니면서 옆에서 한두 마디 툭툭 던지는 게 진절머리 나도록 싫었는데, 그것보다 더 싫은 건 그런 한두 마디에 흔들리는 자신이었다.

하루가, 한 시간이, 일 분이, 일초가 아까워서 매일을 발버둥 치는 주제에 마음이 불편하다는 핑계로 일을 쉬고 있는 것도, 등교만 해도 되는 학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수업을 듣는 것도, 돈도 안 될 카페 아르바이트 제안에 잠시나마 혹했던 것도. 다 말이 안 되는 일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 꼴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다. 김민규 때문이라고.

앞으로 김민규가 어떤 말을 하든 무시하겠다고 다짐한 지훈이 이틀 만에 학교에 돌아온 날, 비장한 다짐이 무색하게도 민규는 지훈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매일 건네던 살가운 인사도 없었다. 눈이라도 마주칠까 몸까지 삐딱하게 돌아앉은 민규의 모습에 빈정이 상한 지훈도 그 유치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아주 고등학교 교실에 앉은 초등학생이 따로 없었다. 의미 없는 신경전은 지훈이 학교를 나서는 점심시간까지 계속됐다. 평소라면 학생이 성실하지 못하다는 둥 어딜 급하게 가냐는 둥 귀찮을 만큼 붙잡았을 텐데 그날은 가방을 챙겨 뒷문으로 향하는 지훈의 뒷모습을 짧게 흘겨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날 밤, 출처를 알 수 없는 우울감에 일찍이 잘 준비를 마친 지훈이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지훈이 숨을 죽였다. 아직 깡패들이 찾아올 시기가 아니었다. 다녀간 지 오래되지 않았으니까. 지훈의 눈동자가 돌아가는 소리가 집안을 가득 울릴 때, 타이밍 좋게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훈아, 있어?”

하아…. 순식간에 긴장이 풀린 탓에 수건을 툭 떨어트린 지훈이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곤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역시나 김민규였다. 긴장한 듯 굳어있던 표정을 풀며 미소 지은 민규가 물었다. 들어가도 돼? 지훈은 탐탁지 않았으나 내쫓을 마음도 없어 대꾸 없이 뒤돌아 떨어진 수건을 주워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냈다.

“왜 왔는데.”

부러 눈길도 주지 않으려 수건으로 시야를 가린 채 머리를 털어내던 지훈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신경질적인 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산스럽게 가방을 뒤적거리며 준비를 마친 민규의 목소리에는 웃음이 묻어있었다. 중요한 발표를 하나 하려고 왔지. 애매한 대답에 지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지금 몇 시인지는 알… 뭐하냐?”

“짜잔.”

수건을 치운 지훈의 눈앞에 보이는 건 작은 책상 위에 세팅된 노트북과 그 화면을 가득 채운 ‘이지훈 카페 아르바이트 프로젝트’라는 내용의 무지개색의 글씨였다. 다소 경멸에 가까운 지훈의 눈빛에 잠시 주춤한 민규는 곧 다시 미소를 짓고 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꽤 정성을 들인 듯한 PPT였다.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눈을 질끈 감은 지훈의 입에서 나가라는 말이 나오기 직전에 민규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 이거 진짜 열심히 만들었거든? 그냥 쟤 또 저러네 생각하고 한 번만 봐주라 제발. 응?”

“…”

“10분도 안 걸려. 다 보고 가라고 하면, 갈게! 바로 갈게 진짜로!”

문을 괜히 열어줬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찬 지훈이 길게 한숨을 뱉었다. 빨리하고 나가 그럼. 명백한 오케이 사인이었다.

아무튼. 10분이라고 했지만 15분이 지나도록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PPT를 가만히 앉아 듣던 지훈이 눈을 질끈 감고 제 머리를 쥐어 뜯으며 소리친 말이 ‘알겠어, 알겠다고. 하면 될 거 아니야. 이제 나가 머리 아프니까 짜증 나게 하지 말고.’였고, 그 말에 김민규가 벌떡 일어나 ‘잘 생각했어!’하며 힘차게 박수를 쳤다… 라는 이야기였다.


지훈의 아르바이트는 단순한 용돈벌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학생들과는 다르게 일주일 중 주말을 포함한 총 6일의 시간을 카페에 할애해야 했다. 민규 부모님의 지인이라던 사장님은 아르바이트 동의서 얘기를 하다가 지훈의 가정환경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래서 지훈의 빽빽한 희망 근무시간표를 보고 안 된다 말할 수 없었다. 다만, 학업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월요일은 쉬는 조건을 내걸었다. 주말은 풀타임이니까 몸이 지칠 거라는 이유였다.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딘가 비장한 지훈의 말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대답으로 돌아왔다.

고작 근무 시간 따위를 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느냐 묻는다면, 지훈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2주 동안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카페에 출석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 사람은 당연히 민규였다. 학교가 끝나고 아르바이트를 가는 지훈의 뒤로 매번 민규가 따라붙었다. 처음 며칠 질색했던 지훈도 이제는 포기한 상태였다.

따라오기만 하면 차라리 다행일 텐데. 매일 카페에 눌러앉아 저를 쳐다보는 시선도 어지간히 불편했지만, 카페에 가는 동안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입이 제일 불편했다. 눈물 콧물 다 빼며 서럽게 뱉은 고백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민규는 그날을 이후로 제 마음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너 왜 따라오는 건데?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카페 앞에 우뚝 선 지훈의 화난 듯한 표정에도 민규는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좋아하니까?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뻔뻔한 표정에 지훈은 그대로 휙 돌아서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그 후로 지훈이 민규에게 불필요한 말을 건네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민규가 조용해진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바빴어?”

“별로.”

컵 캐리어에 음료를 넣고 빨대를 챙긴 지훈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이스아메리카노, 딸기 라떼 테이크아웃 나왔습니다. 어느새 익숙해진 일이었지만, 흐뭇한 표정을 한 민규의 시선을 의식한 귀가 붉게 타올랐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손님이 나간 카페에는 지훈과 민규 둘뿐이었다. 테이크아웃 손님을 위해 잠시 옆으로 비켜있던 민규가 다시 계산대에 몸을 기댔다. 조용한 카페에는 지훈이 설거지를 하는 달그락 소리만 가득했다. 얼마 없는 설거지를 끝내고 포스기 앞에 선 지훈은 익숙하다는 듯 복숭아 아이스티 한 잔을 찍었다.

"나 근데 오늘은 시험공부 하러 온 거야."

"어쩌라고."

"진짠데⋯ 나 원래 카페에서 공부해."

카운터 앞에 서서 들고 온 가방을 흔들어 보였으나 밋밋한 지훈의 반응에 괜히 머쓱해진 민규가 입으로 쩝. 하는 소리를 냈다. 결제를 위해 카드를 내밀자 지훈이 무심한 표정으로 결제를 이어갔다. 쌀쌀맞은 태도에 입술을 삐죽인 민규가 카드를 건네받으며 손가락으로 지훈의 손등을 은근슬쩍 간지럽혔다.

“뭐 하는데 진짜⋯.”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낸 지훈이 앞치마에 손등을 문질렀다. 카페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뒤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진 좋아하니까. 좋아하는데? 좋아해서 그렇지. 그래서 좋은가? 등의 온갖 고백 공격에 이제는 내성이 생길 만도 했는데 지훈은 도통 그러지를 못했다. 눈이 마주치면 웃을 때마다, 은근슬쩍 손을 잡아 올 때마다, 낯간지러운 말을 부끄럼 없이 뱉을 때마다. 그냥 밀어내고 도망치면 그만일 텐데, 가만히 얼어붙어 시선을 피하는 게 고작인 자신의 모습도 어지간히 답답하다 여겼다.

내가 더러워? 뾰로통한 민규의 목소리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투덜대기 위해 열렸던 민규의 입술은 들려오는 종소리에 다시 꾹 닫혔다. 어서 오세요. 인사를 건넨 지훈이 카운터 앞 테이블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손님 때문인지 순순히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민규의 시선은 주문을 받는 지훈에게 고정됐다.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주문을 받는 지훈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으면 이따금 눈이 마주쳤다. 그럼 민규는 작게 미소 지었다. 지훈이 급하게 눈을 피해도 민규의 시선은 지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태연한 표정과 달리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지훈의 얼굴을 본 민규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몰래 웃었다. 아, 부끄러워 하는 거 진짜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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