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싫은 이유 한 가지

규훈깜짝전력

*연령 반전

좋아하는 계절이 있나요?

질문을 읽자마자 이지훈의 볼펜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가을이라는 글자 옆, ③으로 향했다. 선명하게 그어진 브이 표시 위로 이지훈의 검지가 벅벅 문질러졌다. 아오, 잘못 그었다. 잘못 그은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신속하고 정확했지만 아무튼. 설문지 위에 달라붙은 잉크는 문지르는 대로 번지기만 할 뿐 지워지지는 않았다. 이지훈은 제 검지에 묻은 검은색 잉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패스, 다음 질문.

좋아하는 이유는 뭔가요?

이딴 건 뭐에 쓰려고 물어보는 거야? 대충 남들이 말하는 가을이 좋은 이유 100가지 이유 중 두어 개를 휘갈긴 이지훈이 책상 위로 볼펜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가을은 존나게 싫었다. 갈색으로 물든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도, 이상하리만큼 날씨가 좋은 것도, 하늘이 높은 것도 전부 싫었다. 그냥. 그냥 싫다고 그냥.

가을이 싫은 이유 한 가지

딩굴

9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방학을 보낸 대학생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개강을 맞이했다. 아, 저기 반쯤 감긴 눈을 하고 걸어가는 이지훈도 보인다. 방학 동안 바뀐 밤낮을 되돌리는 것에 실패해 결국 밤을 새우더니, 거의 잠든 채 집을 향하고 있었다. 개 피곤해… 기껏 밤까지 새고 열심히 출석했으나 책상 위에 올라온 것은 웬 계절 타령하는 설문지였고, 첫날부터 출석을 부른다는 후기가 적혀있던 교양 수업은 들어간 지 5분 만에 끝이 났다. 그러니까 이지훈이 밤을 새우고 5분을 걸어 20분 버스를 타고 또 5분을 걸어 도착한 학교에서 이득 본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소리였다. 출석? 응, 안 불러. 후기 적은 새끼 찾아서 꼭 죽인다… 아이쿠, 졸면서 살 날리다가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질 뻔하고 나서야 제대로 눈이 떠진다. 그래봤자 집 바로 앞이었지만.

엘리베이터가 1층부터 13층까지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또 꾸벅꾸벅 졸다가 띵- 하는 경쾌한 소리에 풀칠 된 눈을 겨우 떠내고 내렸을 때, 이지훈의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고르시오. ①13층이 아님, ②집이 사라짐, ③집 앞에 누군가가 있음. 맞다. 정답은 3번이었다. 1302호. 분명 우리 집이 맞는데 웬 거대한 캐리어 옆에 그 캐리어만 한 거대한 사람 한 명이 초라하게 쪼그려 앉아있었다. 평소라면 취객인가? 하며 넘어갔을 일이지만…

"김민규…?"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김민규일 리가 없는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김민규와 똑같았다. 아닌가? 피부는 조금 더 그을린 것 같긴 한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익숙한 정수리, 익숙한 덩치, 아니 그러니까 쪼그려 앉아있어도 느껴지는 사람의 분위기가 소름 돋을 만큼 똑같았다.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캐나다에 있을 사람이 어떻게 여기 있겠어. 그럼 취객인가. 이 시간에? 이지훈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한 번 눌렀다. 현재 시각 13:02. 취객이면 더 문젠데…

눈앞에 집을 놔두고 엘리베이터 앞에 계속 서 있을 수 없는 노릇이라, 이지훈은 두 손으로 휴대폰을 꽉 쥔 채 조심스레 신원미상의 사람 앞으로 다가갔다. 저기요. 저렇게 불편한 자세로 잠들기라도 한 건지, 상대는 미동도 없었다. 저기요! 이지훈은 목소리를 조금 더 키웠다. 손을 뻗어 늘씬한 손가락으로 어깨를 툭툭 치기도 했다. 잘 못 찾아오신 것 같아요. 여긴 저희 집…

"지훈아!"

어라, 이거 꿈인가?

"민규 형…?"

"오랜만이다 야, 잘 지냈어?"

이지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김민규의 느닷없는 포옹을 받아냈다. 뭐지? 진짜 꿈인가? 김민규가 포옹을 갈기든 말든 고개를 뒤로 빼서 얼굴을 쳐다보든 말든, 이지훈은 초점 없는 눈으로 현관문만 바라봤다. X발 이거 꿈이지? 그리곤 현실을 부정했다. 이건 꿈이어야만 했거든. 그야 당연히 김민규는…

"형이 왜 여기 있어?"

"아줌마가 전화해 둔다고 했는데 연락 못 받았어?"

"어. 따로 연락받은 거 없는데…"

"아… 그래…?"

김민규는…

"나, 이혼했어."

2년 전에 결혼해서 밴쿠버로 홀라당 떠났으니까.

김민규가 누구냐고?

이름 김민규. 나이 28살. 이성애자(완전 중요!). 이지훈의 옆집 살던 형이었음. 특이 사항. 2년 전에 3개월 연애하고 쫓기듯 결혼하더니 결혼식 끝나자마자 비행기 타고 밴쿠버로 떠나 살림 차림. 그럼 이지훈에게 김민규는 뭐냐고? 음, X발 새끼? 아니면 X새끼? 죽을 때까지 꼴 보기 싫은 새끼?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김민규는 이지훈의…

"그래서. 여기서 살겠다고?"

"으응. 아줌마가 분명 전달해 주신다고 했는데… 이상하네…"

살벌한 이지훈의 눈빛에 마주하던 시선을 내리깐 김민규가 멋쩍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컵 속에 있던 얼음을 하나 입에 넣고는 씹자 와드득와드득 소리가 났다. 김민규는 마치 그 소리가 저를 씹는 것 같이 느껴졌다. 지훈이 안 본 사이에 무서워졌네.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한 건지, 들리라고 말한 건지, 김민규의 작은 중얼거림이 공기를 타고 이지훈의 귓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빠직. 이건 이지훈 이마에 분노 표시 생기는 소리.

"안 돼."

"뭐?!"

"안된다고. 당장 나는 들은 것도 없고, 같이 살 생각도 없고, 그게 형이라면 더더욱 같이 지낼 마음도 없고, 집 정리도 안 했어."

"아줌마가 안방 깨끗할 거라고 쓰라던데?"

"약속한 대로 딱 한 달만이야."

"당연하지."

"내 방 문 함부로 막 열지 말고."

"야, 너는. 내가 너보다 8살 많은 거 알지?"

"알아요, 아저씨."

나 아직 28살이야!!! 쾅 닫힌 문 뒤로 김민규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침대 위에 누운 이지훈은 두 손으로 마구 헝클여 산발이 된 머리를 한 채 천장을 바라봤다. 김민규는 이지훈이 태어날 때부터 함께 지낸 형이었다. 나이가 8살이나 차이 나는 것에 비해 이지훈은 애늙은이였고, 김민규는 철부지였으니. 둘은 웬만한 동갑내기들보다 퍽 잘 맞는 사이였다. 김민규는 이지훈의 친형이라도 된 양 형 노릇을 했고, 이지훈은 그런 김민규를 아주 잘 따랐다. 따르다 못해 사랑까지 해버린 게 문제였지만…

그래. 김민규는 이지훈의 첫사랑이었다. 무지막지하게 망해버린 첫사랑. 이루어지기는커녕 이제는 꼴도 보기 싫어진 첫사랑. 그런데 막상 이혼하고 왔다니까 자기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첫사랑. 미친놈인가? 이지훈은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제 심장에 손을 얹었다. 청첩장을 내미는 얼굴에 침을 뱉으려던 걸 엄청난 정신력으로 참아내고 꿀꺽 삼켰던 게 겨우 2년 전이었다. X발 거.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가을이었잖아.

자꾸 가을은 왜 걸고넘어지냐고? … … 김민규가 유난스러울 만큼 사랑하는 계절이 바로 그 가을이었으니까. 낙엽 냄새랑 섞인 새벽 공기라던가 높은 하늘이라던가 그런 자잘한 것들을 사랑스럽다는 듯 말하는 눈빛에 흠뻑 빠져들어서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지훈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도 가을이 되어있었다. 걷기 싫어서 매번 버스를 타고 다니던 두 정거장 거리의 학교를 가을에만 걸어 다니던것이 버릇이되어 내리 3년을 걸어 다녔을 정도로.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지훈은 김민규가 사랑한 가을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김민규가 떠난 가을을 싫어했다. 가을은 숨만 쉬어도 김민규를 생각나게 하는 계절인데, 김민규는 그 아름다운 가을에 저를 두고 새신랑이 된 데다가, 세상에서 가을이 제일 아름답다는 밴쿠버로 떠나기까지 했다. 그러니 가을은 그 자체로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18살이면 낙엽만 굴러다녀도 웃을 나이라는데, 그때의 나는 도통 웃음이 나오질 않았다. 굴러다니는 낙엽만 봐도 형의 얼굴이 떠올랐으니.

아무튼. 이지훈은 제 마음을 모두 정리하기도 전에 김민규의 결혼식에서 하하 웃으며 박수를 쳐줬다. 잘 살라는 덕담은 보너스였고. 그러고 밥 먹으러 가기 전에 화장실에 숨어서 남몰래 울었다. 스스로가 추하고 미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치지 않는 눈물을 계속해서 닦아내야만 했다. 그야, 김민규는 첫사랑이었으니까. 이루어질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 얼굴조차 못 보는 사이가 될까 봐 무서워 전하지도 못했지만. 첫사랑이었으니까.

그런 사람이 이혼하고 돌아온 거면 오히려 이득인 거 아니야? 싶겠지만 이지훈에게 김민규의 등장은 그다지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김민규는 여자랑 결혼하지 않았는가? 당연히 동성인 이지훈은 후보가 될 수 없었고, 꼬꼬마 때부터 못 볼 꼴 다 보고 자란 친동생 같은 8살 아래의… 절망적이라서 더 말하지 않겠다. 그래서 오히려 김민규가 해외에 가서 산다고 했을 때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옛말이 괜히 있겠냐고.

음… 결론적으로 옛말은 존나 괜히 있는 거였다. 몸은 멀어졌는데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멀어지지를 않았다. 김민규가 떠난 사이 연애도 하고 수능도 보고 처음으로 술도 마셔보고 엠티도 가보고 중간고사도 보고 과제도 해보고… 그런데도 뜬금없이 떠오르는 김민규를 지워낼 수는 없었다. 노래 가사를 빌려 말하자면 '해볼 건 다 했는데 널 잊는 게 그것만 안 돼' 상태. 당장에 오늘만 해도 김민규가 사랑해 마지않는 가을 때문에 마음이 울렁거렸는데, 앞으로 한 달을 같이 살아야 한다고? 오마이갓…

가슴 위로 두 손을 겹쳐 잡은 이지훈이 눈을 감았다. 신이시여 저를 가엽게 여겨 제발 한 달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하루에 한 번 이상 얼굴 마주치지 않게 해주시고(잘생겨서 두근거리니까), 말 섞을 일 없게 해주시고(외국 생활 하다 와서 발음이 좀… 섹시해졌으니까), 한 달이 지나면 이 집에서 김민규가 제-발 떠나게 해주세요. 할렐루야 아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2주 동안 김민규와의 동거 후기를 적어 보자면… 아무것도 없었다. 간절하게 기도했던 게 민망할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다. 아니면 기도를 들어준 건가? 특별히 바뀐 건 형이 일주일 전부터 출근을 시작했다는 것뿐이었다. 아침은 우연히 시간이 맞을 때 같이 먹었고 저녁은 거의 함께 먹었다. 집에 먼저 오는 건 나였지만 저녁은 형이 퇴근하고 직접 차려줬다. 좀. 신혼 같아서 설렜… 미친 이게 아니라. 일하고 온 사람한테 밥까지 시키는 게 조금 미안하긴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생활력이 존나 떨어져서 매일 인스턴트랑 밀키트, 배달 음식을 달고 살았으니까. 형이 처음 집에 온 날 냉장고를 열어보고 지은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명했다. 완전 경악한 표정으로 무슨 말을 했었는데… 지훈아 너 어떻게 살아있어? 뭐 이런 비슷한 말이었던 듯.

아무튼. 두 사람은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다. 예전부터 잘 맞았던 성격 덕에 밥 먹으면서 나누는 짧은 대화도 즐겁기만 했고, 생활 패턴으로 싸울 일도 없었고, 그 외에도 딱히 마찰이 생기는 부분은 없어서 이지훈은 혼자 지낼 때보다 편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무 일이 없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다는 건 아니었지만. 밴쿠버에서 생활했던 2년의 신혼 기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김민규는 눈에 띄게 차분해졌다. 딱히 좋은 얘기가 아니라 묻지는 못했지만, 이지훈은 김민규가 돌아온 첫날부터 이혼 사유가 궁금했다. 겨우 3개월 만나고 결혼하길래 무슨 대단한 사랑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그런데 궁금해서 뭐해? 들으면 또 뭐해? 어차피 못 먹을 감인데.

에휴. 짧게 한숨을 내쉰 이지훈이 채널을 옮기던 TV를 그냥 꺼버리곤 리모컨을 내려놨다. 현재 시각 01:23. 김민규는 아직까지 귀가하지 않았다. 회식이 있다며 저녁은 혼자 먹으라고 연락이 오긴 했다. 그렇다고 이 시간까지 안 올 줄은… 그저 같이 사는 게 전부일 뿐인 형을 새벽까지 기다리고 있는 게 좀 유난인가 싶지만, 친형제… 처럼 지내는 사이에 이 정도 걱정은 할 수 있잖아. 그치? 이상한 거 아니지?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괜히 찔린 이지훈은 열심히 합리화했다. 에휴. 한숨이 한 번 더 터졌다. 딱 30분까지 기다려 보고 잔다. 나는 김민규가 보고 싶은 게 아니야. 혹시라도 취해서 집도 못 찾아올까 봐 걱정…

띡. 띠딕. 띡. 삐용- 삐용- 띠딕. 띡.

이지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관으로 달려가는데 심장이 막 뛰었다. 와, 이 형 취했나 봐. 문도 못 열어.

"이지훈!"

자꾸만 비밀번호를 틀리는 김민규 때문에 엉엉 울고 있는 문을 벌컥 열자 앞에 서 있던 주정뱅이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난다.

"뭐야? 얼마나 마신 거야?"

"지훈이다아~"

휘청거리며 들어와 이지훈에게 매달리듯 안긴 김민규의 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대체 어떤 회사가 회식이랍시고 술을 이렇게 맥여? 아 좀 비켜봐. 신발부터 벗어. 아 쫌! 이지훈의 손바닥과 김민규의 등이 퍽 소리를 냈다. 아야! 왜 때려? 형 왜 때려? 바닥에 엎드려 우는 시늉을 하는 모습을 보자 천년의 사랑이 다 식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이지훈은 김민규는 취하면 개가 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형 안 취했어…"

"누가 뭐랬나."

"안 취했다니까?!"

"아! 알겠다고. 옷이나 좀 벗으라고 제발."

어찌저찌 현관에 쓰러진 김민규를 어르고 달래서(체급 차이 때문에 힘으로 일으키는 건 불가능했다)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침대에 눕히는 것까지 성공한 이지훈이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아오, 새벽에 이게 뭔 고생이야. 그냥 기다리지 말고 잘 걸 그랬다고 후회도 조금 했다. 침대에 풀썩 쓰러진 김민규가 꾸물대며 이불을 파고드는 모습을 본 이지훈은 기겁하고 이불을 잡아당겼다.

"코트랑 양말이라도 벗으라고!!"

"왜 화내???"

"아니…"

"형은 진짜 서운하다아…… 서운해…"

탁. 이건 이지훈이 이마를 짚는 소리. 김민규는 이불을 품에 끌어안고 연신 서운하다며 중얼거렸다. 화내서 미안해. 코트만 좀 벗어. 이거 형 침대 아니고 우리 아빠 침대거든? 이지훈은 서운하다는 김민규의 말이 존나게 황당했지만 일단 이 주정뱅이의 코트와 양말을 벗겨내는 게 먼저였기에 김민규를 달랬다. 형, 미안하다니까. 화 안 낼게. 아니 근데 형이 코트만 벗으면 되는 건데 왜 나한테 서운하대? 물론 그라데이션으로 짜증을 내기는 했지만…

"야! 너는… 너는 형 안 보고 싶었냐?!"

형은 2년 동안 너 진짜 보고 싶었는데… 이지훈의 광대가 씰룩거렸다. 아, 눈치도 없지. 입꼬리 새끼야 좀 내려가 봐. 이지훈은 김민규의 술주정에 가까스로 정신줄을 잡았다. 김민규는 이런 표현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보고 싶다거나, 사랑한다거나, 내 새끼, 내 동생, 우리 지훈이 이런 말들. 어릴 때부터 숨쉬 듯 들었던 말인데 2년 만이라 그런지 속이 간지러웠다. 예나 지금이나 참 유해하다. 이 아저씨는.

"뭐라는 거야 이 주정뱅이 아저씨가."

"형은 너 보고 싶었다니까?"

"당연히 보고 싶어야지. 하나뿐인 동생인데."

코트는 포기한 채 고개를 멀찍이 떨어트리고(혹시라도 발 냄새가 심하면 제 아름다운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엉망이 될까 봐 어떻게든 환상을 지키려는 몸부림) 조심스레 양말을 벗겨내던 이지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닌데… 보고 싶었는데… 진짜루… 점점 느려지는 게 슬슬 잠들려는 듯,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검지와 엄지 끝으로 벗겨낸 양말을 대충 구석에 던지고 일어선 이지훈은 방을 나가려 몸을 틀었다가 멈칫하곤 고개를 돌려 눈을 감은 김민규를 쳐다봤다.

"형. 나 하나만 물어보자."

으응… 물어바… 아직 잠들지는 않았는지 곧장 대답이 따라붙었다.

"이혼은 왜 했어?"

그래. 저 정도로 취했으면 백퍼 내일 기억 못 한다. 이지훈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언제 이렇게 대놓고 물어보겠어? 이때다 싶은 마음으로 뱉어낸 질문이었지만, 김민규가 으음… 하며 잠꼬대인지 고민인지 모를 소리를 내는 동안 어쩐지 이지훈의 심장은 잔뜩 쫄아붙었다. 그사이에 잠들었나? 에이, 설마. 방에는 색색거리는 김민규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이지훈의 표정이 절로 구겨졌다. 이지훈은 결국 김민규 이혼 사건의 전말을 영영 알 수 없었…

"서지를 않아서…"

"뭐라고?"

"발기가 안 돼서!!!"

김민규의 외침 뒤로 3초간 정적. 그리고 정확히 3초 뒤 이지훈의 얼굴이 애니메이션처럼 화르륵 타올랐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건가? 뭐, 뭐가 안 돼서? 색색거리던 김민규의 숨소리는 어느새 씩씩으로 바뀌어 있었고, 이지훈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X발 X됐다… 김민규 이혼 사건의 전말 그냥 영영 모른 채로 살 걸…

"어… 형 잘자. 내일 토요일이니까. 푹 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잘못인 것만 같아 이지훈은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히 문으로 향했다. 김민규가 누워있는 방 문을 조심스레 닫은 이지훈이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신이 공평하기는 한가 보다. 완벽해 보이는 김민규도 밸런스가 맞춰지긴 하는구나. 첫사랑 안 이루어져서 다행이다… 존나 다행이다…

다음날은 하필이면 김민규가 회사에 안 가는 토요일이었지만, 이지훈은 자신이 학교 일정 때문에 외출한다는 점에서 안도했다. 저 형은 기억 못 하겠지만, 나는 다 기억한다고. 첫사랑의 '발기부전으로 2년 만에 이혼당한 썰'을 듣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할 자신은 없었다. 뭐,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어차피 일말의 가능성이 없기도 했고. 내가 가지지 못하는데 남들도 못 가져? 이지훈의 입장으로선 이득이 아닐 수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나온 탓에 김민규의 상태도 살피지 못한 이지훈은 이래저래 심란한 마음으로 일정을 마치고 늦은 저녁 귀가했다.

"왔어?"

반쯤 흐물거리며 집에 들어온 이지훈을 반기는 것은 당연하게도 김민규였다.

"이게 다 뭐야?"

"음, 이지훈 성인 되고 처음 형이랑 술 마실 기회?"

그런데 이제, 술을 준비한. 이지훈은 얇은 블루종을 벗어 식탁 의자에 걸어두고는 김민규가 앉아있는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어제 그렇게 마시고도 숙취가 별로 없는지 김민규의 낯빛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대단하다 진짜. 어제 그렇게 퍼마시고 모자라? 놀리는 듯한 말투에 바닥에 앉은 김민규는 휙 돌아보며 제 옆을 툭툭 쳤다. 어허, 어른이 바닥에 있는데 소파에 앉으면 안 되지. 아니 뭐 언제는 어리다매… 말은 그렇게 해도 꾸물꾸물 내려와 김민규 옆에 앉은 이지훈이 테이블 위 캔맥주 하나를 들었다.

"너 친구들이랑 술 마셔봤어?"

"당연하지 지금이 몇 월인데."

"하긴 벌써 가을이지…"

김민규는 답지않게 시무룩해 보였다. 오늘 뭔 일 있었나?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가끔은 아무 말 없이 들어줄 사람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오늘이 그런 날일 수도 있고… 이지훈은 묵묵히 캔맥주를 홀짝였다. 먼저 술을 마시자고 불렀던 김민규도 별말은 없었다. 틀어진 TV에서는 액션 영화가 나오고 있었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없이 영화를 시청했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나자 별안간 영화가 뚝 끊긴 TV에서는 광고가 시작됐다. NEXT 대격돌 2부. 재밌을 때 끊어버리네. 이지훈이 중얼거리며 새로 딴 맥주를 한 모금 입에 담았을 때. 야, 지훈아. 드디어 김민규의 입이 열렸다.

"형 발기부전 아니야…"

좀 폭탄 발언으로. 풉. 맥주를 뿜어버린 이지훈은 옷에 흐른 맥주를 닦지도 못하고, 들고 있던 캔을 내려놓지도 못하고, 김민규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굳었다. 갑자기? 그래. 정말 갑자기였다. 끼긱. 끼긱. 이지훈의 목이 뭔 기름칠 안 된 깡통 로봇처럼 부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그리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눈빛으로 전달되는 말이었다.

"아니, 어제. 너가 물어봤잖아."

"기억해?"

"당연하지."

전혀 당연해 보이지 않았는데… 이지훈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아니 근데 그거. 굳이 해명해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목각인형처럼 뚝딱이며 휴지를 찾아 맥주를 대충 닦아내던 이지훈의 귀로 폭탄이 또 하나 들어왔다.

"여자한테 안 서."

이번엔 그나마 다행이었다. 뿜을 게 없었으니까. 한 편으로는 또 불행이었다.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아니 그럼, 여자랑 결혼을 왜 했던 거야? 근본적인 물음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지만 뱉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출력장치가 고장 나서 뱉지 못했다. 이지훈은 다음에 할 행동이 떠오르지 않아 다 닦인 테이블 위만 휴지로 문질러댔다. 벅벅. 고장 나기는 김민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니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겠지만…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검지 끝으로 소주잔을 툭툭 밀더니 손이 닿지 않을 만큼 잔이 밀리고 나서야 잔을 들어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어색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TV에서는 아직도 광고를 하고 있었다. 차라리 영화라도 나오면 뇌 빼고 보고 있었을 텐데. 이지훈이 또 한 번 침을 삼켰다.

"그럼, 형 게이야?"

고개를 돌려 김민규를 쳐다보고 묻자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도 잘 생겼냐 사람이… 이쯤에서 말하자면 이지훈의 주량은 맥주 한 캔이었다.

"그건 모르겠네. 남자를 사귄 적은 또 없어서."

고장 났던 김민규의 출력장치는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어려운 말을 하는 건 김민규인데 오히려 더 크게 고장 난 건 이지훈이었다. 캔을 들었다가 놨다가, 휴지로 테이블을 닦았다가 말았다가, 옆자리를 쳐다봤다가 말았다가. AS가 불가능할 정도로. 취기가 올라와서 반, 너무 당황해서 반. 고장 원인은 그랬다.

"근데 뭐… 굳이 나한테… 해명할 일은… 아니지… 않나…?"

양 손바닥을 허벅지 위로 문질러대는 이지훈의 모습은 적잖이 당황스러워 보였다. 조금 알딸딸한 정신에 김민규의 발기부전 공격까지 더해지니 영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그러니까, 지금 이 형이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지 전혀 하나도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아니! 뭐… 그게 꼭 기능 문제도 아니고 심리적인 문제도 있다고 하기도 하고… 형만큼 잘생겼으면 딱히 문제도… 아니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이지훈의 목덜미가 천천히 붉어졌다. 김민규를 위로하려는 건지, 이런 대화가 민망한 건지, 이지훈의 입에서는 정리되지 않은 날것의 말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그 모습을 본 김민규는 그만 저항 없이 푸스스 웃어버렸다.

"뭐… 왜, 왜 웃어?"

"아냐 아냐.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서 그래."

"그, 근데 형… 남자 만나본 적 없다면서."

"없는데?"

"그럼 서는지 안 서는 지 어떻게 알아…?"

이지훈의 마지막 말에 김민규가 머리라도 얻어맞은 듯 몇 초간 굳어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하하하 웃기 시작했다. 아니 왜 웃는데… 맞는 말 아닌가…? 취기 때문인지 이지훈의 정신이 점점 더 몽롱해졌다. 아니 만나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아냐고. 설마 형… 중얼거리던 이지훈의 말이 뚝 끊기자 김민규가 눈물을 닦으며 설마 뭐? 하고 되물었다.

"막 원나잇 하고… 그랬어?"

"야!! 너는 못 하는 말이 없냐. 그런 거 아니야."

이지훈의 말에 발끈한 김민규는 빈 잔에 소주를 채우곤 또 한입에 털어 넣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아는 건데…? 김민규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이지훈과 눈을 마주치며 생각했다. 지훈이는 취하면 호기심이 많아지나 보네. 아니 뭐 꼭, 상대가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자신의 생식… 기능의 문제는. 어쩌면 당연한건데도 지금의 이지훈은 그렇게 당연한 것도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술을 이렇게 못하는 줄 알았으면 마시자고 하지 말 걸 그랬지…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려 턱을 괸 김민규가 이지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눈빛을 가만히 받아내던 이지훈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획 돌렸다. 얼굴 뚫어지겠네… 물론 얼굴이 뚫어질 일은 없었다.

"이만 자러 가자."

원체 긴장하는 일이 없어 항상 뽀송했던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했다. 이지훈은 축축한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며 일어나는 김민규를 올려다봤다. 이렇게 자러 간다고? 마음에 불을 질러놓고? 또 홀라당 자러 간다고? 그렇게 생각만 해야 했는데… 이지훈은 기어코 주방으로 향하던 김민규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어우, 지훈아 위험해. 좀 놔봐."

또 갈 거지. 형 또 갈 거잖아. 내가 가긴 어딜가. 갈 데도 없다니까? 구라치지 마… 아주 발을 껴안듯 늘어지는 이지훈을 보며 김민규는 들고 있던 술병을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왜, 형 밴쿠버 가서 속상했어? 애 달래듯 묻는 목소리가 퍽 다정했다. 이지훈은 바닥에 엎어져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 3개월 만나고 결혼하니까 그런 거 아니야. 그러니까 결혼을 왜 해? 왜 했냐고. 이지훈은 제가 하고 있는 생각이 입 밖으로 나가는 줄도 몰랐다. 구시렁거리는 동그란 뒤통수를 큼직한 손이 덮었다.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이지훈은 답지않게 머리를 들이밀며 어리광을 부렸다. 근데 왜 보고 싶었다고 안 해줬어? 에휴우우우… 김민규의 말에 가슴이 들썩이도록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그걸 길게 뱉었다. 안 보고 싶었겠냐고. 바닥과 맞붙은 입술 사이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 말에 김민규의 입꼬리가 주욱 올라갔다.

"난 또, 이제 나 안 좋아하는 줄 알았네."

"그럴 리…"

엥? 벌떡 몸을 일으켜 앉은 이지훈이 김민규를 쳐다봤다. 방금 뭐라고… 빙빙 돌던 술기운이 순식간에 날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X발 잠깐만 뭐라고 한 거야? 방금 이 아저씨가 뭐라고 한 거냐고. 이지훈의 입술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뭔 개소리냐고 따져 물을 타이밍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다. 한 마디로 X됐다고 나 지금. 벙찐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김민규는 쭈그려 앉았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이지훈 비련의 인어공주 같은 자세로 주저앉아 테이블에 있던 캔과 술병 그리고 과자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을 멍한 눈으로 구경할 뿐이었다.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아니라고…

아니 근데 잠시만.

"형 나 좋아해?"

이런 미친. 떠오른 생각이 아무런 정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출력됐다. 이건 출력장치 고장이 아니라 걍 소프트웨어 고장 아니야? 이지훈은 제가 뱉어놓은 말을 주워 담지 못해 아니, 아니, 아니 그게, 아니… 하는 말만 반복하다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X발 요즘은 카톡 메시지도 삭제가 되는데 왜 말은 삭제가 안 되냐고. 상대는 전혀 그런 뉘앙스의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왜 혼자 설레발치고 난리인지. 김민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무서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앞으로 술은 입에도 안 댄다. 그 와중에 이지훈은 금주를 다짐했다.

"방에 가서 자야지."

너도 손 많이 가네. 양 팔을 잡혀 벌떡 일으켜진 이지훈은 김민규에게 질질 끌려 방으로 들어왔다. 친절하게도 김민규는 이지훈을 침대에도 눕혀주고 이불도 덮어주고 방 불까지 꺼줬다. 잘자. 굿나잇 인사까지 이어지는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고 신속했다. 내 말 진짜로 삭제됐나? 라고 할 뻔. 탁. 김민규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이불 아래 숨어있는 이지훈의 두 다리가 힘차게 이불을 찼다. 김민규의 태도는 누가 봐도 못 들은 척이었다. 필살 회피기. 하긴, 말한 나도 이게 뭔 개소리야 싶었는데 들은 당사자는 어떻겠냐고… 맥주 한 캔으로 필름 끊기길 바라는 거 존나 양심 없겠지? 근데 제발 기억 안 나주면 안 되나. 제발. X발 제발요… 두 손을 가슴 위로 겹쳐 잡은 이지훈은 눈을 꼭 감았다. 제발 기억 안 나게 해주세요. 할렐루야 아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번쩍. 이지훈 눈 떠지는 소리. 짹짹. 아침이라고 새가 우는 소리. 휘리리리릭. 시발… 이건 이지훈이 지난 밤을 기억하는 소리. 역시나 사람의 기억을 휘발시키기에 맥주 한 캔은 턱없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몸을 돌려 베개에 얼굴을 퍽퍽 내리꽂는 이지훈의 방 문이 타이밍 좆, 아니 타이밍 좋게 열렸다.

"지훈아 일어났어?"

문이 열리고 김민규가 들어오는 그 짧은 0. 몇 초 사이에 고개를 멈출 수 없었던 이지훈의 행동은 그대로 노출됐다. 너 뭐해? 베개에 얼굴을 처박는 모습에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화들짝 놀란 이지훈이 띠용잉 튀어 올랐다.

"나, 뭐?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는 이지훈의 모습에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은 김민규가 말했다. 밥 먹을 거면 빨리 나와. 어어, 나갈게. 탁. 이지훈은 지금껏 살아온 20년보다 최근 20시간의 인생이 더 힘들게만 느껴졌다. 플랜 1.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척 하기 실패. 그냥 집을 나갈까? 아니 근데 여기가 내 집인데 왜 내가 나가? 역시 저 아저씨를 내쫓아야만… 이지훈은 실행도 전에 망해버린 플랜 1을 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냥 아무 일 없던 척 닥치고 밥만 먹어야지. 

"그래서 너 아직 나 좋아하는 거 맞아?"

푸웁. 이번엔 다행스럽게도 맥주가 아니라 물이었다. 물론 맞은 편에 앉은 김민규의 코앞까지 물방울이 튀었지만, 맥주보단 나았다. 이지훈은 김민규가 건넨 휴지를 받아 서둘러 입과 옷을 닦았다. 플랜 2. 아무 일도 없던 척 닥치기 실패. 그러나? 곧바로 플랜 3.

"애초에 왜 좋아했을 거라고 확신하는데? 아니거든?"

필살, 안 좋아하는 척하기.

"야, 어떻게 모르냐. 티가 그렇게 다 나는데. 너 내 결혼식에서 울기까지 했잖아."

그렇지만 개 같이 실패… 아니 울었던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이지훈은 물을 닦아내던 휴지를 아무렇게나 뭉쳐서는 식탁 위에 퍽 소리가 나게 올려두었다. 생각보다 소리가 커서 흘끗 김민규 눈치를 봤지만. 그렇게 김민규와 한참 눈싸움을 이어가다가, 자신이 쩔쩔매고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이지훈은 그제야 동요하지 않은 척 다시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맘대로 생각해라."

"어떤 부분이 그렇게 좋았는데, 말 좀 해줘 봐. 혼자 알지 말고."

"아! 안 좋아한다니까!"

"진짜?"

"어. 아니, 그리고 결혼식에서 울면 다 좋아하는 거냐? 태어날 때부터 친형처럼 지냈는데 울 수도 있지."

"그렇긴 하지…"

김민규는 말끝을 흐리며 숟가락으로 아무 잘못 없는 밥을 쿡쿡 찔렀다. 이지훈은 슬쩍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보고는 입 안으로 밥을 밀어 넣었다.

"아쉽네. 난 너 꼬시려고 이혼하고 온 건데."

땡그랑-! 이건 이지훈의 숟가락이 바닥을 구르고 전치 12주짜리 부상 입는 소리.

"지훈이 네가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이지훈의 입력장치가 단단히 고장 났다. 소프트웨어는 물론 출력장치까지 몽땅 먹통이었다. 입 안에 있는 밥알을 씹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음. 요란하게 바닥을 구른 숟가락은 김민규의 발밑에 안착했다. 떨어트리면 어떡해. 정작 이지훈을 그렇게 만든 당사자는 매우 평온한 표정으로 일어나 숟가락 하나를 가져다주었다. 이지훈의 힘 빠진 주먹에 야무지게 숟가락을 꽂아주곤 다시 자리에 앉은 김민규는 태평하게 밥을 먹었다. 마저 먹어 지훈아. 이지훈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쉬기 시작했다.

난 너 꼬시려고… 꼬신다는 게 무슨 뜻이었지? 꼬신다는 게. 그러니까 상대를 꼬신다는 건… 버퍼링 걸린 이지훈의 뇌가 팽팽 돌아갔다. 1분 동안 무적상태가 지속되었던 이지훈은, 제 나름대로 꼬시다의 정의를 내린 후 입을 열었다.

"형 나 좋아해?"

"응."

김민규의 대답에 다시 버퍼링. 아, 여기 네트워크 좀 안 좋네. 이지훈은 또 생각했다. 그러니까 좋아한다는 게 무슨 뜻이었지…? X발 근데 이건 모를 수가 없잖아. 좋아한다는 건. 그러니까 형이 나를 좋아한다는 거는…

"왜?"

당장 할 말이 이것뿐이었다. 왜? 아니, 대체 왜? 나를 왜 좋아하는데? 그럼 결혼은 왜 했는데? 또 이혼은 왜 했는데? 나 꼬시려고 이혼했다는 건 뭔데? 발기부전이라 이혼한 거라며… 거짓말한 거야? 진짜로 나 때문에 온 거야? 정리되지 않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하나씩 묻고 싶었지만, 당장에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왜? 하나뿐이라 저도 답답한 심정이었다. 누가 봐도 과부하 걸린 이지훈을 앞에 두고 김민규는 꿀꺽꿀꺽 밥을 잘만 삼켰다. 맥주 한 캔 먹고 취해버린 이지훈을 위해 끓인 콩나물국까지 한 숟갈 떠먹고 나서야 김민규의 손에서 숟가락이 떨어졌다.

"내가 어릴 때부터 붙어 다니던 옆집 동생이 한 명 있거든?"

근데 어느 순간부터 걔가 눈에 안 보이면 괜히 불안하고 걱정되고 하더라고. 조금은 느리게 말을 잇던 김민규가 숟가락을 내려놓은 손으로 턱을 괴고 이지훈을 빤히 바라봤다.

"그래서 처음엔 그게, 그냥 과보호인 줄 알았어. 내가 외동이니까 동생이 너무 갖고 싶어서 걔를 그렇게 감싸고 도는구나 싶었지."

이지훈은 여전히 고장 난 상태로 눈꺼풀만 깜빡였다. 그나마 기름칠이 잘 된 눈꺼풀은 삐걱거리지 않았다. 눈앞의 김민규는 어제 먹은 메뉴를 얘기하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걔가 원래 걷는 것도 싫어하고 활동적이지도 않고, 집돌이거든? 근데 걔 중학생 땐가… 내가 한 번 아침에 산책을 데리고 나가서 가을은 아침에 걷는 게 참 좋다. 뭐 그런 말을 했었단 말이야?"

"근데 그다음 날부터 걸어서 학교에 가더라고. 죽어도 버스 타고 다니겠다던 애가. 아침에 가방 메고 학교 가는 걸 창문으로 보는데 기분이 좀 이상했어. 그때는 몰랐는데, 크면서 보니까 알겠더라고 지훈이 네가 나 좋아하는 거."

"근데 뭐, 좋아하면 어떡하겠나 싶어서. 너한텐 좀 미안한 말이긴 한데… 그냥 모르는 척했지."

좋아하는 걸 알면서 결혼했다고? 이지훈은 김민규가 꽂아준 숟가락을 있는 힘껏 꽉 쥐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 지 몰라 힘이 쭉 빠져있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 아저씨가 장난하나… 발끈한 이지훈이 입을 열기 전에 김민규가 선수를 쳤다.

"계속 그렇게 지내자니 네가 자꾸 눈에 밟히고 생각나고… 아오. 내가 8살이나 어린 애를 상대로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 그것도 친동생 같은 애를. 너는 나를 좋아할 수 있다고 해도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까 뇌에 힘 엄청 주고 살았지. 도둑놈 되기도 싫었고."

말랑말랑. 이지훈의 심장이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AS된 입력장치가 완벽하게 제 역할을 수행해냈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좋아하는데, 그러면 안 되니까 모르는 척했다는 거지? ㅇㅇ 맞는 듯. 찌푸렸던 미간은 다리미가 지나간 것처럼 반듯하게 펴진 지 오래였다. 이지훈은 막아보려고 안간힘 썼다.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말이다.

"너는 성장하는데 나는 늙어가고 있으니까… 아 이제 진짜 그만해야겠다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좀 도피성으로 연애하고 그중에서 제일 좋은 사람, 아 그러니까 사람이 좋은.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아무튼 좋은 사람이랑 급하게 결혼해서 너 안 보이는 외국으로 멀리 도망치기까지 했는데."

하아아… 턱을 괴고 말을 이어가던 김민규가 고개를 푹 숙이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너는 그러게 왜 결혼식 때 울어가지고 사람을 힘들게 만드냐아… 입꼬리 vs 이성 빅매치의 승자는 입꼬리였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입꼬리가 결국 이성을 때려눕히고 하늘을 향했다. 녹다운 직전에 겨우 힘을 짜낸 이성이 이지훈의 손을 움직여 입을 가리게 했다. 밴쿠버를 나 때문에 간 거라고? 나 때문에? 근데 내가 결혼식에서 울었던 걸 보고 신경 쓰여서 2년 만에 이혼하고 온 거라고? 와, 로맨티스트 실화야? 이지훈의 입력장치와 소프트웨어가 완벽한 합을 이뤘다.

"진짜로 너 나 안 좋아해?"

살짝 벌린 손가락 틈으로 김민규와 이지훈의 눈이 마주쳤다. 쿵쿵쿵쿵. 이지훈의 심장이 또 존나게 나대기 시작했다. 고백 공격 때문인지, 얼굴 공격 때문인지 잘은 모르겠다만. 아 당연히 좋아하지! 라고 대답하려던 이지훈의 입술이 반쯤 열렸다 다시 꾹 닫혔다. 잠시만, 근데 이거 너무 홀라당 좋다고 하면 좀 그렇지 않나? 나는… 나는 2년을 고생했는데 자기는 2주 만에 고백하고 끝?

"예전엔 좋아했었지…"

엄청난 노력으로 겨우 끌어내린 입꼬리를 보여주기 위해 손을 쓱 내린 이지훈이 중얼거렸다. 감흥 없다는 듯 숟가락을 들어 국을 휘젓는 이지훈의 모습에 김민규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예전엔? 그럼 지금은? 안 좋아한다니까. 야, 거짓말하지 마. 형은 너 눈만 봐도 다 알아. 그럼 봐보든가. 고개를 휙 들어 올린 이지훈과 몸을 앞으로 기울인 김민규의 시선이 식탁 위에서 뜨겁게 얽혔다. 아, 얼굴 공격 반칙인데.

푸흐흐. 역시나 이번에도 이지훈의 이성이 패배했다. 뻔뻔하게 눈을 마주칠수록 점점 어두워져 가는 김민규의 표정에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지훈의 웃음에 굳었던 김민규의 표정도 서서히 풀려갔다. 놀리니까 좋냐? 어. 완전 재밌는데.

"형 쫌만 봐주라… 너 성인 될 때까지 겨우 버틴 거야 나."

"사람 울린 벌이야 그거."

"네가 나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줄은 몰랐지."

"할 말이 없다 그냥."

미소를 숨기지 않은 이지훈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모른 체 하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고백은 고백이고, 일단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니야. 다 식어 미지근해진 콩나물국을 휘휘 젓고 있으니, 김민규가 손을 뻗어 검지로 식탁을 툭툭 쳤다.

"왜 또. 밥 좀 먹자 우리."

"그래서 너 아직도 나 좋아하는 거 맞지?"

하. 하며 헛웃음을 흘린 이지훈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당연하지."


좋아하는 계절이 있나요?

질문을 읽자마자 이지훈의 볼펜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가을이라는 글자 옆, ③으로 향했다. 선명하게 그어진 브이 표시 위로 후후 부는 숨결이 닿는다. 두어 번 바람이 지나가고 이번엔 이지훈의 검지가 올라온다. 설문지에 철썩 달라붙은 잉크를 쓱쓱 문질러 번지지 않는 걸 확인한 이지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패스, 다음 질문.

좋아하는 이유는 뭔가요?

이건 근데 진짜 뭐에 쓰려고 물어보는 걸까? 볼펜을 설문지 위에 올린 채 잠시 머뭇거린 이지훈은 휘리릭. 다소 짧은 답변을 적어냈다. 번지지 않도록 설문지 위로 후후 바람을 분 이지훈이 볼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4학년도 별거 없구나… 강의실 창문 너머로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게 보였다. 설문지 작성하신 분들은 앞에 제출하고 가시면 됩니다~ 이지훈은 벌떡 일어나 설문지를 들고 교단으로 향했다.

이지훈의 설문지를 건네받은 교수는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다음 수업 때 봅시다. 강의실을 나서는 이지훈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뗀 교수는 설문지를 쳐다봤다. 음? 다른 학생들에 비해 유난히 짧은 6번 문항의 답변을 읽은 교수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보기보다 로맨틱한 학생이네. 꾹꾹 눌러 적은 글자를 한 번 더 읽은 교수가 고개를 들고 다시 외쳤다. 작성 다 한 학생은 앞에 주고 가면 돼요~

좋아하는 이유는 뭔가요?

애인이 좋아하는 계절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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