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클리어

퍼펙트클리어 2

SSS급 게이트 (2)


"너무 조용한 것 같아요."

"게이트 크기에 비해 별거 없긴 하네요."

저마다 내부 던전에 대한 감상을 한 마디씩 내뱉자 선두에서 걷던 김민규가 그것을 듣고는 하하 웃었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됩니다."

김민규의 손 끝에서 생성된 얼음 창이 무리 뒤로 따라붙던 거미 한 마리의 눈을 꿰뚫었다. 아⋯. 조금은 소란스럽던 동굴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크흠, 다들 집중하죠. 아직 S급 몬스터도 안 나왔습니다. 네! 김민규의 뒤로 따라붙던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당부하자 우렁찬 대답들이 이어졌다. 이지훈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모두가 긴장한 상태로 들어선 게이트 내부 던전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그게, 생각보다 너무. 너무너무 평범해서 문제였다. 초반에 몰려들었던 몬스터들은 전부 C~B급. 개중에 우두머리처럼 등장하는 놈들이 A급. 게이트 등급이 SSS인 것에 비해 나타나는 몬스터의 등급이 형편없이 낮았다. 그렇다고 길이 어렵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던전 내부는 길게 일자로 쭉 이어지는 아주 단순한 형태였다. 여기저기서 맥 빠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방통행으로 이어지는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타이머를 확인한 김민규가 말했다. 내부 시간이 조금 느리네요. 체감은 세 시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뒷말을 머뭇거리자 김민규의 손에 들린 타이머를 낚아챈 이지훈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크게 소리쳤다. 9시간 53분 지났습니다. 조금 더 서둘러야겠네요. 이지훈이 말을 마치곤 휙 던진 타이머를 김민규가 손을 뻗어 받아냈다. 이지훈을 쏘아보는 김민규는 누가 봐도 짜증 난 듯 보였지만, 이지훈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종종 바깥과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게이트들이 있었다. 어떤 게이트는 바깥보다 빠르기도, 어떤 게이트는 바깥보다 느리기도 했다. 3일을 구르고 나왔는데 이틀밖에 안 됐다거나, 7시간 만에 나왔는데 하루가 훌쩍 지났다거나 하는 이상 현상 탓에 게이트 클리어에 타이머는 필수적인 물품이었다.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연구원들이 백방으로 노력 중이지만, 아직 알아내지는 못했다. 하기야, 근본적으로 게이트가 왜 생기는지 100년이 지나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갈림길도 없었고, 오르막도 내리막도 아닌 평지만이 일자로 쭉. 그렇게 바깥 시간으로 20시간 정도 지났을 때, 한 지점에서 우뚝 멈춰선 김민규가 뒤돌아 말했다.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두 갈래 길을 마주하자 모두가 술렁였다. 어떻게 해? 어디로 가야 하지? 나눠서 가면 좀 위험하지 않나? 작게 중얼거리는 말들이 겹쳐 동굴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조용히 해주십쇼."

날카로운 김민규의 외침에 언제 그랬냐는 듯 동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일행들의 모습에 뒤돌아 다시 갈림길을 바라보고 선 김민규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생각하기 시작했다.

동굴 크기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모두가 한 동굴로 가는 건 손해였다. 몇 시간을 더 걸어야 할 지도 모르는데 그 길에 보스가 없다면? 다시 돌아 나와 반대편 갈림길로 가야 하는 최악의 수였다. 그렇다고 정찰조를 뽑아 몇 명만 먼저 보내보는 것도 실속은 없었다. 오가는 시간이 걸리는 건 전자와 똑같았고, 보스가 갑자기 나타나 공격이라도 하면 정찰조든 대기조든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반으로 나누어서 가기엔⋯ 이것 또한 위험한 방법이었다. 보스의 등급이나 전투력을 알 수 없었으니까. 31명으로 감당이 가능한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 찌푸린 미간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결정권은 저에게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62명의 목숨이 달린 문제를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서서 고민하고 있을 수는 없는데⋯.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린 김민규가 결심한 듯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땐, 이미 이지훈의 입이 열리고 있었다.

"왼쪽은 김민규 센티넬을 포함한 26명. 오른쪽은 36명으로 나눠서 갑니다."

"네, 그렇게 가도록⋯ 뭐라고요?"

"아닙니까?"

맞긴 맞는데... 말끝을 흐리는 김민규를 이상하다는 듯 흘겨본 이지훈은 앞장서서 인원을 나누기 시작했다. 김민규는 그런 이지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62명을 반으로 나누면 31명. S급 센티넬 세 명을 선두로 조를 나누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보스가 나타났을 때 그 인원으로 버틸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어쨌든 이 게이트의 등급은 SSS였고, 예전 강원도 게이트의 사상자 17명 중에 S급 센티넬이 한 명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다소 위험하게 느껴지는 인원이었다. 그렇게 고민해서 생각한 게 26명 36명이었는데⋯.

이지훈의 뒤통수에 고정된 시선을 겨우 떼어내 정신을 차린 김민규가 서둘러 조합을 짜는 것에 동참했다. 김민규와 상성이 좋은 전기계열의 S급 센티넬과 외 24명, 그리고 화염과 바람 능력을 사용하는 S급 센티넬 네명과 외 32명. 각자의 갈림길 앞에 선 무리는 서로 마주 본 채 중요한 사항들을 다시금 확인했다.

첫째, 가는 길에 흔적을 남길 것.

둘째, 수시로 휴대한 무전을 통해 상황을 전할 것.

셋째, 보스가 나타나면 무전 후, 가능하면 왔던 길을 돌아 합류 지점이 가까워지도록 유인할 것.

"그럼, 다들 살아서 나갑시다."

PERFECT CLEAR

02

천안시 게이트 클리어 

+ 46:28

"야, 잠깐 멈췄다 가."

"시간이 남아도냐?"

일방적으로 말을 전한 이지훈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앞서 걷던 김민규는 이지훈의 말에 날카롭게 대답하며 뒤돌았지만,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주저앉은 이지훈의 모습에 당황한 표정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너 어디 아파? 아까까지 멀쩡했잖아."

"시발⋯ 골 울리니까 크게 말하지 마."

"게이트 들어가는 날 컨디션 조절도 못해놓고 당당하네."

"아침부터 꼴 보기 싫은 얼굴 앞에 두고 밥 먹어서 그런다."

"그게 내 탓인가?"

"그럼 네가 띠껍게 생긴 게 내 탓이냐?"

생긴걸로 지랄이야 짜증 나게⋯. 툴툴대는 말과는 달리 김민규는 이지훈의 소지품 가방을 뒤적거리며 물었다. 약 없어? 단단한 바위로 된 벽에 등을 기댄 이지훈이 중얼거렸다. 먹고 온 거야. 이지훈의 말에 김민규는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곤 저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지가지 한다. 툭 던진 말에 이지훈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복통 때문인지 김민규의 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단 둘 뿐인 동굴이 지나치게 고요했다.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는⋯ 아, 왜 단 둘 뿐이냐고? 게이트에 들어온 지 약 43시간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무전이 끊긴 것 같습니다. 김민규가 무전기를 이리저리 만져봤지만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작아질 뿐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김민규는 곧장 멈춰서 저를 쳐다보고 있는 25명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쪽도 무전이 안 되는 걸 알아차렸을 테니 더 이동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여러분은 왔던 길 돌아서 합류 하시죠. 전 앞쪽만 조금 더 살펴보고 바로 합류하겠습니다. 그러나 선뜻 김민규를 혼자 두고 등을 돌리는 사람은 없었다. 우물쭈물 망설이는 사람들 틈에서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 이지훈이 나선 후에야 상황은 종료됐다.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그럼 문제 없죠? 김민규의 등을 떠밀며 동굴 안쪽으로 향하는 이지훈이 말을 덧붙였다. 다들 이따가 봅시다.

"이제 됐어, 가."

"이게 마지막 쉬는 시간이야."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이지훈을 보며 말하자 나도 알아. 하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우두커니 서서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찔거리던 김민규는 짧은 한숨을 내뱉곤 이지훈의 뒤로 따라붙었다.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낸 김민규가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겠다. 당장이라도 거울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하얗게 뜬 얼굴이 그가 무리하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지만 차마 이지훈을 말릴 수 없었다. 게이트 클리어 48시간 경과. 이젠 정말 시간이 없었다.

둘은 쉬지 않고 이동했다. 일행들을 돌려보내고 30분 정도 탐색을 이어가다가 발걸음을 돌렸으니 합류 지점까지는 내부 시간으로 대략 7시간을 더 이동해야 했다. 이지훈은 챙겨온 물을 적절하게 나눠 마실 뿐 앓는 소리 하나 없이 하얗게 뜬 얼굴로 3시간을 걸었다. 오히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김민규가 더 안절부절못했다. 둘 중에 한 명은 죽어서 나가자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도발에 가까운 빈말이었을 뿐, 만에 하나 정말로 이지훈이 전투 불능 상태가 된다면 손해 보는 건 김민규였다.

"야."

"쉴 시간 없어."

"아니, 그게 아니라."

앞서 걷던 이지훈이 우뚝 멈추어 섰다. 그럼 왜 멈추는데? 김민규가 퉁명스럽게 물으며 멈춰선 이지훈의 옆에 나란히 섰다. 멍하니 땅바닥을 바라보던 이지훈이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시체가 없어."

"뭐?"

"들어올 때 거미 몇 마리 잡았던 거, 시체가 없다고. 넌 봤어?"

이지훈의 말이 이어질수록 김민규의 표정도 함께 굳어갔다. 아니. 나도 못 봤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김민규는 제 발밑을 바라보았다.

"흔적은 그대로 있는데⋯."

오른발을 들어 올리자 죽은 거미에게서 흘러나왔던 끈적한 체액이 실처럼 이어졌다. 다른 사람들도 알았으려나. 그러길 바라야지. 김민규는 신발에 달라붙은 체액을 동굴 바닥에 비벼대며 이지훈을 쳐다봤다. 너 뛸 수 있냐? 이지훈은 대답을 망설였다. 기대도 안 했다는 듯 시선을 돌린 김민규는 발을 들어 밑창을 한 번 쳐다보고는 이지훈의 앞에 서서 몸을 굽혔다.

"업혀."

싫어! 이지훈 답지 않게 감정적인 목소리였다. 몸을 굽혔던 김민규는 고개를 뒤로 돌려 이지훈을 노려보았다.

"할 줄 아는 거 없으면 방해라도 하지 말라고 했지."

"뛸 수 있어."

"그럼 나 먼저 뛰어갈 테니까 느긋하게 걸어오던가. 그러다가 보스라도 나오면 재미있겠네."

이지훈의 억지에 코웃음을 치며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린 김민규가 부러 몸을 더 숙였다. 그냥 빨리 가자.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것 같냐? 우리 안 가면 다 죽을 수도 있어. 힘이 실린 김민규의 뒷말에 이지훈이 주춤했다. 아오 진짜. 괴로운 듯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마구 헝클인 이지훈은 곧 김민규의 등에 업히며 말했다. 울렁거리면 토할 거니까 적당히 뛰어. 김민규의 목을 감싸 안는 팔이 느슨했다. 이지훈의 말에 황당하다는 듯 힘 빠진 웃음을 뱉은 김민규는 곧 자세를 편하게 고쳐 업고는 뜀박질을 시작했다.

천안시 게이트 클리어 

+ 70:49

이상한데. 말이 안 되잖아. 김민규의 중얼거림에 이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긴 해. 어쩐 일로 생각이 같은 두 사람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일행들과 합류를 위해 이동한 지 약 24시간이 경과했으나 두 사람의 눈에는 갈림길의 ㄱ자도 보이지 않았다. 23시간도 26명 모두가 걸어서 이동했을 때 기준이고 김민규는 이지훈을 업은 채 몇 시간을 뛰었으니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 맞았다.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가이딩을 받았다 하더래도 더 이상의 뜀박질은 김민규에게 체력적으로 무리였다. 어느 한 시점부터는 함께 걸어서 이동했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길에 먼저 꺼림칙함을 느낀 건 김민규였다. 잠깐만 쉬었다 가자. 그렇게 말하며 벽에 등을 기대고 선 김민규는 동굴을 둘러보았으나 특별한 점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하얗게 떴던 얼굴이 조금은 나아진 이지훈도 별 말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길이 반복되고 있는 건가?"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게이트 자체가 상식적이지 않지."

침착한 김민규의 말에 이지훈은 입을 다물었다. 그럼 끝도 없는 길을 계속 걷고 있었다는 거야? 깊은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안전한 걸까."

"60명보다는 두 명을 더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번엔 김민규의 입이 다물어졌다. 혹시 먼저 출발한 24명도 루프에 갇혔다면⋯ 그랬으면 우리랑 마주쳤겠구나. 혼자 이어가던 김민규의 생각이 뚝 끊겼다. 그리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0명이 함께 있다면 보스가 나타나도 문제가 없을 테니까. 당장 고립된 건 이지훈과 자신이면서도 김민규는 남들을 먼저 걱정했다.

이지훈은 주저앉았던 몸을 일으켰다. 일단 가자, 천천히 걸어라도 봐야지. 김민규는 벽에 기대있던 등을 떼어내어 앞장섰다. 만약에라도 뭐 나타나면 그때부터 넌 아무 소리 내지 마. 교육을 너 혼자 받는 줄 아냐? 그런 건 나도 알아. 평소와 같은 이지훈의 대답에 어쩐지 입에서 웃음이 샜다. 너 잘났다. 놀리듯 말을 뱉고 한발짝 내민 김민규가 걸음을 이어가지 않고 그대로 멈췄다.

"왜⋯."

저벅. 왜 멈추냐 물으려던 이지훈의 귀에 축축한 발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지훈과 김민규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어두컴컴한 동굴 끝 쪽에서 보이는 흐릿한 인영에 안심한 김민규가 걸음을 옮기려 하자 이지훈의 손이 김민규의 팔을 낚아챘다. 저거, 사람 아니야. 김민규에게만 들리는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이지훈에게 향했던 고개를 돌려 점점 가까워지는 인영을 바라보는 김민규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저게 뭐야⋯?"

흐릿한 형체가 선명해질 수록 이지훈과 김민규의 몸에 힘이 실렸다.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는 그것은 결코 사람이 아니었다. 피부도, 이목구비도, 손가락과 발가락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그것은 그저 검은 색의 덩어리일 뿐이었다. 명탐정 X난 속 범인의 모습처럼.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다가오는 검은 물체를 바라봤다.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 멈춰선 그것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돌처럼 굳어 정지된 것을 앞에 두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김민규가 슬쩍 고개를 돌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몬스터인가?"

"동굴에 인간형이 나오나."

"나도 모르지."

"그럼 나는 알겠냐?"

아무리 작게 중얼거려도 동굴인 탓에 목소리가 울렸다. 소득 없이 종료된 짧은 대화에 김민규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굳었던 물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던 그것은 울퉁불퉁 튀어나오고 들어가며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었다.

야, 저거 그냥 두면 좆될 것 같지? 원래 변신캐는 변신할 때 치는 게 합법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김민규의 손 끝에서 만들어진 얼음이 정확히 물체의 머리 부분을 꿰뚫었지만, 검은 색 덩어리는 아랑곳 않고 울렁거렸다. 두 어번 얼음을 날렸지만 액체처럼 울렁거리는 그것은 얼음마저 삼켜냈다. 두 사람은 결국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점차 사람의 모습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던 김민규의 입이 별안간 떡 벌어졌다.

"저거 설마, 나야?"

그 검은 것은 어느새 김민규와 똑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 아."

목소리까지 완전히 흉내 내지는 못하는지 목을 가다듬는 소리는 다소 기괴했다. 불협화음을 기계음으로 만들어낸 목소리라고 해야 할까. 이지훈은 본능적으로 김민규의 뒤로 몸을 물렸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목과 팔을 돌리며 스트레칭과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던 그가 고개를 들어 정확히 김민규와 시선을 마주했다.

"너 뭐야?"

"그게 중요해?"

위협적으로 묻는 김민규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한 손을 들어 올리자 손끝에서 생성된 얼음이 빠르게 날아와 김민규의 옆을 지나쳤다.

"이거, 맞추기 어렵다."

벽에 부딪혀 부서진 얼음 파편을 흘겨본 김민규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외관이 아니라 능력까지 따라 하는 건가? 그게 가능한 거야? 말이 돼? 흔들리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은 김민규가 손을 들어 마구잡이로 얼음을 쏘아댔다. 김민규의 외관과 능력을 흉내 낸 저것은 그래봤자 김민규보다 한 수 아래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얼음이 꿰뚫는 곳마다 점토처럼 말랑해졌다가 다시 피부로 재생되는 모습을 보며 이지훈은 경악했다. 머리, 심장, 팔, 다리 몸 어느 곳이 뚫리든 눈 한 번 깜빡이면 멀쩡한 모습이 되어있었다.

물론 김민규도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뚫는 건 소용이 없다. 어차피 계속 재생하니까. 정확도가 높아지는 얼음을 피하며 머리를 굴리려니 배로 집중력이 떨어졌다. 김민규의 얼음은 점점 빗나가는데, 김민규에게 스치는 상대의 얼음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나마 이지훈의 방사 가이딩 덕에 덜 맞고 있는 게 이 정도였다. 집중해야 해. 김민규는 주먹을 쥔 손에서 차가워지는 손 끝을 느끼며 다시 팔을 뻗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보스로 추정되는 상대가 이지훈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엄폐물 하나 없는 동굴에서 이지훈은 전투 현장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지만 상대는 김민규만 공격할 뿐, 이지훈은 보이지도 않는 것 처럼 굴었다. 종종 시각은 없지만 센티넬의 활성에너지를 추적해서 공격하는 몬스터들이 있었다. 물론 김민규의 겉모습을 흉내 냈으니 시각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본능적으로 전투력이 더 높은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개이득이다. 이지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처음엔 당황해서 조금 밀리더니 김민규도 곧 자신의 페이스를 찾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이었다. 불안한 건 아직 어떻게 죽여야 하는 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이었지만, 구멍도 많이 내다보면 언젠가 죽기야 하겠지. 다소 태평한 생각으로 방사를 이어가는 이지훈이었다.

의미없는 공격을 주고받던 두 사람이(정확히는 사람 한 명과 몬스터 한 마리) 잠시 공격을 멈췄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김민규는 숨을 골랐고,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멀쩡해 보이는 상대는 그냥 자리에 서서 김민규를 바라볼 뿐이었다. 손등으로 땀을 훔친 김민규가 이마에 닿는 차가운 손의 감촉 흠칫했다. 조절하면서 해야겠네⋯. 짧은 시간 동안 컨디션을 끌어올린 김민규가 다시 손을 들자, 보스의 입에서 찢어진 기계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는 안 지쳐?"

"뭐?"

"난 좀 지치는 것 같아."

내 얼굴을 하고 저렇게 나약한 소리를 하다니. 괜히 자존심이 상한 김민규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네가 약한 거야 그건. 대답과 동시에 날아온 창을 가볍게 피한 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데⋯ 이상해. 넌 인간이잖아. 어떻게 나보다 멀쩡할 수가 있어? 이어지는 황당한 말에 김민규가 코웃음을 쳤다.

"그게 약하다는 거지 뭘."

한껏 비웃으며 대답한 김민규는 차가워진 손을 주물렀다. 원래 짝퉁보다 오리지널이 더 세. 빠르게 날아간 얼음이 정확히 김민규의 모습을 한 보스의 이마를 꿰뚫었다. 하지만 뚫린 이마는 또 울렁거리며 제 모습을 찾아갔다. 미치겠네, 저걸 어떻게 죽이라는 거야. 통으로 얼려야 하나? 분명 싸움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나 왜인지 모르게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긁적인 김민규가 물었다.

"넌 안 죽어?"

"이상해, 이상해. 인간이잖아⋯."

하지만 김민규의 물음 같은 건 들리지도 않는 지 보스는 제자리에 서서 중얼거리기를 반복했다. 아 뭐 어쩌라는 거야. 그냥 이대로 튀면 안 되나? 이어지는 김민규의 공격에 보스의 몸에 생긴 여러 개의 구멍은 또 울렁거리며 제 모습을 찾아갔다. 아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짜증이 보스의 중얼거림과 함께 울렸다.

야, 어떻게 해? 패닉에 빠진 보스를 앞에 두고 뒤돌아 입 모양으로 이지훈에게 말을 걸자 이지훈은 어깨를 한 번 올리며 입 모양으로 대답했다. 나도 몰라. 김민규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진짜 도움이 안 되네⋯.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자 패닉에 빠져있었던 보스와 눈이 마주쳤다. 뭐지? 등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싸늘함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김민규는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이지훈 도망쳐!!"

하지만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김민규는 이미 이지훈의 눈앞에 있었다.

"이런 게 있었구나⋯."

제 머리로 향하는 손을 쳐내려던 이지훈의 손이 그대로 그에게 붙잡혔다. 이지훈의 손을 꽉 잡은 그의 얼굴이 마구잡이로 일그러졌다. 온 몸이 울렁거렸다.

"이상해. 이상해. 이상해. 이상해. 이상해."

찌그러진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기괴하게만 느껴졌다. 손을 비틀어 빼내려는 이지훈의 몸부림에도, 여러 차례 꽂히는 김민규의 얼음에도 계속해서 울렁거리던 몸은 천천히, 아주 느리게 제 모양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반칙이야. 반칙이라고. 이렇게 좋은 걸 너만 쓰고 있었어? 이상해. 이상해. 코앞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적인 상황에 이지훈은 압도 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말도 안 돼.

"야."

애써 침착하기 위해 크게 호흡한 이지훈이 김민규를 부르며 제 눈앞에 있는 또 다른 김민규와 눈을 마주했다. 이지훈의 앞에서 완전한 이목구비를 갖춘 김민규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이 새끼 가이딩이 돼."

천안시 게이트 클리어 

+ 7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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