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gwarts Alone
1997년 12월 25일
영영 현재를 유실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오만이었는지, 편지를 손에 쥔 애쉬린은 이제야 체감한다.
*
12월 25일 저녁, 수많은 학생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돌아가지 않은 학생들이 연회장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누는 시간. 저마다의 삶에 따르기야 하겠다만 모두 각자의 행복을 누리는 시간인 것만은 같아야 할진대, 애쉬린은 가족과 함께 하는 사람에도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사람에도 속하지 못했다. 지금의 애쉬린은 언제고 자신을 받아줄 것만 같았던 집도, 상냥한 친구들이 죄다 모여있는 연회장도 아닌 비어 있는 후플푸프 휴게실에 있었다. 벽난로 앞에 놓인 큰 의자에 몸을 기댄 채, 한 손에는 편지를, 그리고 다른 손에는 가짜 진주 귀걸이를 든 채로.
이번 크리스마스는 호그와트에서 보내야 할 것 같구나. 함께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
평소 같았다면 고대 룬 문자로 적혀 있어야 했을 장난스러운 편지다. 그러니 편지를 연 순간에 안았던 것은 당연히 기대였는데……, 적힌 글씨는 그저 볼품없는 두어 줄의 내용일 뿐이다. 그마저도 제대로 된 상황에 적은 건 아닌지, 휘갈겨 쓴 태가 지나치게 나는 그런 필체. 기울어가는 가문의 사정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같은 일을 예견했던 것 또한 아니었다. 차오르는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도 모르겠으나 당장 제 삶과 목적을 무너트리려 날아온 것만 같은 편지는 눈앞에서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러니 애쉬린은 몸을 들어 벽난로 안에 편지를 구겨 던진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돌아가야만 했던, 돌아갈 줄 알았던, 그러나 이번에 몸담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과거의 집을 떠올린다. 윈터스 일가의 집은 한때 런던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저택을 가진 주택이었다. 애쉬린 윈터스가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했던, 평화를 비롯하여 제가 아는 좋은 단어를 죄다 끌어모아 공간으로 만든 것만 같았던 장소, 집. 입학 전까지만 해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맛있는 음식을 차려두고 가족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장소, 집. 그런 집이,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것은 언제부터였던가.
다시 의자에 몸을 푹 기대앉은 애쉬린은 빠르게 지나간 시간을 회상한다. 자신의 비이성적인 안도와 부모의 완벽하게 틀린 판단을, 그리고 그 판단 아래에서 본인이 행했던 비이성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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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틀어진 것은 1994년 6월쯤이었다. 완벽이라는 단어에 가장 가까웠던 집안에 생긴 뚜렷해진 균열인 만큼 그것이 언제 발발한 균열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니까……. 부모님이, 친구의 채무 보증을 서주겠다고 나섰던 해. 그리하여 비로소 빚을 떠안고 주저앉게 되었던 해. 호그와트에 처음 발을 들였던 해에 일어난 균열은 아직 이어져 이 삶을 집어삼키고 있다. 에버딘의 작은 집으로 집을 옮겼을 때도, 사치품을 전부 매각했을 때도, 어머니께서 지인의 출판사로 들어가 일하기 시작하고 아버지께서 직업을 바꾸셨을 때도. 이런 시간은 곧 끝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가문이 몰락했지만, 무너지는 것이 빨랐던 만큼 다시 일으킬 여지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유난히 제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하거나 저와는 다른, 머글의 피가 섞인 사람들에게 모르는 척 무례한 행동을 일삼은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이것이 제가 살아 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으니까. 온전히 자신이라고 할 수도 없는 껍데기만이, 자신을 행복했던 그때로 되돌려줄 것 같아서.
그러니 애쉬린은 자신의 가문이 몰락했다는 사실까지도 철저히 숨겼다. 가짜 장신구를 천으로 닦아 가만히만 있어도 빛이 나는 비싼 보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관리했고, 낡아빠진 옷도 낡은 기색 하나 없이 번듯하게 보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전까지 누려왔던 삶을 흉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살아왔던 것과 하나 다르지 않아 보이게, 속이 곪았다는 것만 드러내지 않고 그런 방식으로. 껍데기에 불과할 자신만을 드러내며 살았다. 하지만, 그에 따른 결과는 고작 지금에 불과하다. 호그와트에서 홀로 보내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 빚쟁이들에게 쫓기느라 제대로 된 안부조차 전하지 못하는 부모님의 짧은 편지, 손에 쥔 낡은 귀걸이. 막연한 희망이랄 것이 실은 스스로를 겨냥한 기만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처럼, 외로운 크리스마스는 애쉬린 윈터스에게 차가운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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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쥐고 있던 귀걸이를 내려둔 애쉬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남을 밀어내고 멀쩡한 삶을 살아내는 척을 해도, 부자 행세를 해도, 남이 살아가는 방식 같은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은 아가씨인 것처럼 굴어도. 가문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무너지는 것을 어느 정도 막아내고 나서는 과거의 삶을 되찾기에 급급했던 가문. 끝내 처음 무너졌던 것보다 처참하게 몰락한, 오늘 같은 날 돌아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못한 집. 그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단어를 일깨웠다. 제가 두른 거짓말이 지금 이 순간, 제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호흡 하나조차 예상과 다른 현실 아래에서 애쉬린은 깨닫는다. 이 이상으로 거짓말을 키워봐야 무너지는 것이 고작일 테다.
그러니 이제는 지금과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애쉬린은 몸을 일으켰다. 이제부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혈통, 허세, 가문, 부, 명예. 제가 두르고 있었던 허울뿐인 것들, 쌓아 올린 거짓말의 다른 이름들. 그런 것은 이 자리에서 잊고자 한다. 지금의 자신을 치장할 수 있는 것은 허울 좋은 혈통도 몰락한 가문의 마지막 허세도 아닌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로 쌓아 올린 지식이며,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다. 애쉬린의 걸음이 책상 앞에 멎는다. 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은 애쉬린은 탁자 위에 양피지와 책을 올려두고, 깃펜을 붙들었다. 괜찮아. 많은 것이 달라졌고, 품었던 희망은 무너졌고, 모두가 행복을 누리는 날 마냥 행복하지만은 못하더라도. 그래도 괜찮아.
나는 이제 다른 길을 만들어 나갈 테니까.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타고나길 쥔 가문도 명예도 혈통도 자신을 장식해 주지 못했으니까. 이 삶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가다듬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다. 그렇게, 애쉬린은 양피지 위에 글을 적어 내리기 시작한다. 그 첫걸음이 누구나 누리는 행복을 닮지는 못했더라도, 그가 표방하던 영광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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