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랑가 三
동젠
“동혁아!”
“오셨습니까?”
동혁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옆에서 벌컥 열린 문 쪽으로 왼손을 뻗었다. 익숙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손바닥에 들어찼다. 더우시지요. 많이 힘드셨어요? 얼굴이 온통 땀범벅입니다. 걱정을 건네면서도 오른손에 들린 붓을 침착하게 정돈하여 벼루에 기대 두고서야 고개를 돌린다. 흐트러진 훈련복 차림으로 동혁의 손바닥에 얼굴을 맡기고 기댄 제노는 없는 볼살이 온통 밀린 채로 가타부타 대답 없이 동혁의 앞에 깔린 서안을 살폈다. 중간중간 획이 틀려 다시 쓴 것들은 있었으나, 이제 제법 서체가 정갈하게 잡히고 특유의 태가 났다. 열너덧살배기 수준으로나마 작문도 하기 시작했으나 동혁은 낯간지러운 말을 지어야 할 때마다 매번 얼굴을 붉혔다. 이번에도 제 글을 첫머리부터 꼼꼼히 읽어내려가는 제노의 눈이 부끄러운지, 동혁이 오른손에 묻은 먹물을 수건으로 힘주어 닦아낸 뒤 다른 쪽 볼을 감싸 쥐었다.
“보지 마세요. 아직 완성 전입니다.”
“저어기 연모라는 두 글자가 떡하니 보이는데?”
“아, 정말.”
“연모의 글을 내가 안 보면 누가 보는데.”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농을 거는 제노의 얼굴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내린 동혁이 곧은 코끝에 쪽 입을 맞추었다. 당연히 만랑이 보셔야지요. 그런데 아직 초안인데다가 덜 썼다니까요? 때가 되면 받아보실 것을, 맘만 급하셔선. 툴툴대는 입과 다르게 눈빛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이 다정하다. 양뺨이 잡힌 제노가 은근한 눈으로 동혁을 살피다가, 냅다 기다렸느냐? 물었다. 동혁도 냅다 당연하지요, 목이 빠져라 기다렸습니다, 대답했다. 제노는 참지 못하고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빼 까만 뺨의 점 위에 마주 입을 맞춘다. 간지러운 웃음소리가 방 안에 피들피들 퍼져나갔다.
처음 만난 늦봄도, 정식 낭도가 된 초여름도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해가 지나 또다시 한여름이다. 팔월의 햇살이 따갑게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동혁은 냇가 옆에서 수건을 들고 제노의 세안과 환복을 도왔다. 화랑의 훈련이 끝나는 시간이었기에 얇은 홑속곳 차림으로 냇가를 활보하는 랑과 시중드는 낭도들이 적지 않았으나, 동혁은 제노가 냇물 속에 담겨 있는 내내 불퉁한 얼굴로 주변을 경계했다. 제노는 젖은 머리를 쓸어올려 높이 틀어올리며 물속에서 웃었다. 쇄골 아래에서 수면이 찰랑거렸다.
“누구 하나 잡히기만 하면 곤죽을 만들 기세로구나.”
“안 그래도 저기서 주경이 놈이 보고 있습니다.”
“내버려 둬라.”
“접때 들켜선 안 됐습니다. 하필 저놈한테. 저, 빙글빙글 웃는 것이 아주……. 이따 석반 들기 전에 꼭 눈을 찌를 거예요.”
“어허. 무서운 말을.”
혼내는 말과 달리 제노는 푹 풀어진 표정으로 바위에 등을 기댄다. 동혁은 허공에 주먹을 을러붙이다 제노의 눈치를 보고 잽싸게 손을 거두었다. 냇가 건너 저 멀리서 주경이 제 검집으로 엄한 것을 흉내 내며 놀려대는 것이 보였다. 지난겨울, 동혁과 제노가 낭도원 침소 옆 담벼락에서 어둠을 틈타 진하게 접문하던 것을 목격한 충격으로 며칠 실어증에 걸렸던 놈이라곤 믿기지 않는 작태다. 눈으론 안 되겠는데. 팔을 부러뜨리든 해야겠어요. 아니, 아예 저 입을 콱 꿰맬까? 이를 득득 가는 동혁을 실실 웃으며 올려다보던 제노가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웃음기라곤 씻은 듯 사라진 서늘한 얼굴을 피할 새도 없이 마주한 주경이 찔끔해 깊게 읍하곤 곧장 뒤돌아 줄행랑을 쳤다. 동혁이 팽 콧방귀를 뀌었다.
“본전도 못 찾을 것을 꼭 저럽니다.”
“저놈도 끽해봐야 스물인데 어찌하겠느냐.”
“낭도는 고사하고, 하다못해 양반집 자제다운 위엄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첫만남에 기가 눌린 제가 뭐가 돼요.”
“품이 높다고 해서 다 어른이 아니다.”
그리고 그날 체면을 구긴 건 되레 저놈이지. 텃세 부리려던 네 앞에서 벌을 받았으니……. 나는 아직도 너희 둘이 친해진 것이 신기한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하나도 안 친합니다! 하는 대거리가 날아왔다. 목소리가 잔뜩 억울하다. 제노는 불퉁해진 동혁의 얼굴을 올려다보다 결국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뻗었다. 알았다, 알았어. 어르고 달래며 까만 볼을 두어 번 살살 쓸어 준 제노가 바위를 짚고 물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근육이 보기 좋게 붙은 마르고 하얀 몸을 잠시 넋 놓고 쳐다보던 동혁이 얼른 들고 있던 수건을 빼 들었다. 바싹 다가서자 기다렸다는 듯 시선을 마주쳐 온다. 눈높이가 아주 약간 높아져 있었다. 동혁이 수건의 가장 여린 면을 당겨 제 얼굴에 어린 물기를 톡톡 닦아내기 시작하자 제노가 순하게 눈을 감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숨결이 섞였다.
스무 살의 제노는 동혁보다 손가락 두 마디가량 더 컸다. 목소리도 낮아지고 얼굴이며 몸의 선이 훨씬 짙어졌다. 이젠 소년이 아니라 청년이라 할 만한 태였다. 그런데도 살결에서 이리 애기 분내 같은 게 나서야. 가만히 손을 타는 제노의 뚜렷한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져 정돈하며 동혁이 한숨처럼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큰다더니.”
“그거 설마 나를 두고 하는 말이냐?”
“……, 에이 설마요.”
“뭔가……, 신경 쓰이는 침묵이 있었는데.”
“뭐, 가끔 좀 어린애 같긴 합니다마는.”
농처럼 건넨 말에 제노가 동혁을 밉지 않게 흘겼다. 동혁이 푸스스 웃고는 뒤쪽을 턱짓한다. 저놈 두고 한 말입니다. 고개를 돌려 동혁의 시선이 닿은 곳에 눈길을 던지자 저만치서 새 수건과 옷가지를 한아름 안은 서운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만랑, 스승님, 늦어서 죄송해요!”
금방 달려온 아이는 숨을 몰아쉬며 들고 온 것을 동혁의 품에 냅다 안기고, 옆에 모아둔 빨랫감을 뭉쳐 들어 도로 비탈을 부리나케 뛰어 내려갔다. 어른 허리만치도 안 오던 키가 어느새 불쑥 컸다. 녀석 참.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혀를 끌끌 차는 동혁을 돌아본 제노가 눈을 접어 웃으며 쭉 기지개를 켰다.
동혁이 서운과 아이들에게 검술을 가르치기 시작한 지 이 주일쯤 되었다. 당연히 동혁은 제가 누굴 가르칠 능력이 되겠느냐며 펄쩍 뛰었으나, 가르치지 못하는 것은 배우지 못한 것과 다름없다며 짐짓 진지하게 을러대는 제노에게 등 떠밀려 울며 겨자 먹기로 아이들 앞에 목검을 들고 설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 그날그날 배운 것을 복습하듯 되풀이하여 가르쳐 주는 정도였으나 아이들은 대번에 동혁에게 스승님 소리를 해 댔다. 약관의 나이에 고물거리는 제자를 여섯씩이나 얻게 된 동혁은 밤마다 제노를 붙잡고 과분하다며 우는 소리를 해 댔지만, 그 아이들이 제법 제 가르침을 잘 따라오는 것을 볼 때면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이따가는 국선께 가셔야 한다고요?”
“응.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오라시더라. 술시쯤?”
“…….”
“네가 가는 것도 아닌데 표정이 왜 그래.”
동혁의 얼굴이 미세하게 울상이 된다. 냇가로 올라선 제노가 푸흐흐 웃으며 동혁이 내민 수건으로 몸을 눌러 물기를 마저 닦았다. 낭도들에게 국선 석품이 무서운 이름임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기실 낭도들이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을 감히 마주볼 일은 거의 없었으나, 크고작은 잘못을 저질렀다가 국선의 손아귀에 떨어져 내리는 날에는 어김없이 엄하게 벌을 받게 되기 때문에 그랬다. 동혁 역시 지난겨울 몇몇 낭도들과 어울려 허락 없이 토끼사냥을 나섰다가 국선에게 걸려 훈련장을 겉옷 없이 백 바퀴쯤 뱅뱅 돌았던 날 이후로 석품의 이름자만 들어도 몸에 오한이 든다고 엄살을 떨어 대곤 했다.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
“혼날 짓을 안 하면 혼내지 않으시는 분이라니까.”
“저는 모릅니다. 아무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아니, 조심할 것두 없다니까?”
“글쎄 저는 모른다니까요. 국선 어른이 나랏님보다 무섭습니다.”
“으이그.”
제노가 아프지 않게 동혁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맞은 데를 문지르며 제노를 따라 냇가로 올라선 동혁이 품에 넣어두었던 제노의 신을 발밑에 놓아주곤 허리를 굽혀 바위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두었던 제 신을 찾아 신었다. 가죽신에 발을 끼워 넣은 제노가 그러게 사고 치고 다니지 말라고 한 마디 더 을러붙이려다가 그저 입을 다문 채 동혁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굵어진 목과 반듯하고 선 곧게 자란 몸. 그 몸에 걸친 낭도복과 머리칼을 깔끔하게 틀어올린 푸른 비단끈이 그린 듯 잘 어울렸다. 실없는 농을 주고받을 때에는 여즉 덜 큰 열여덟 같기만 한데, 문득 한 번씩 이렇게 새삼스러운 순간이 찾아온다. 낯설지는 않았으나 신기했다. 동혁이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제노의 신발목을 추켜올려 매무새를 정리해 주고는 읏차 하고 무릎을 짚어 일어난다. 이 년 전과 똑같이 유순하지만 뼈대가 굵어진 얼굴이 눈에 가득 들어찼다. 볼이 통통하니 앳되던 시절은 다 어디로 갔는지, 스물이 되면서부터 선이 잡힌 곧은 광대와 턱선이 기껍도록 남자다웠다. 제노가 손을 들어 동혁의 잘 뻗은 턱밑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별 동요 없이 눈을 끔벅인 동혁이 입을 연다.
“만랑 저녁 요기하셔야지요.”
“응, 같이 들자. 나 배고파.”
“얼른 가요. 아침을 대충 드시니까 그렇지요.”
“잔소리.”
제노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자 동혁이 푸스스 웃으며 제노의 손을 잡아내렸다. 물이 덜 마른 손가락 사이로 자연스레 좀 더 온도 높은 뜨끈한 손가락이 파고들어 깍지를 껴 온다. 두 해 전과는 다른 모양으로 흉터와 굳은살이 박인 손이 짜맞춘 듯 익숙하게 제노의 곧고 흰 손을 감싸 쥐었다. 오늘도 도원 식사는 맛이 없겠지. 하루이틀입니까. 장날이던데, 저자로 도망쳐서 놀다 올까? 빈말씀은. 이래 놓고 안 가실 거잖아요. 어떻게 알았지. 낭도원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따라 걸어내려가는 두 청년의 뒤로 작게 가락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너무 뜨거우냐? 뒀다가 천천히 들거라.”
“딱 알맞습니다.”
“그럼 되었고.”
찻잔을 내려놓은 제노가 머쓱하게 웃으며 무릎의 천을 하릴없이 만지작거렸다. 나이가 스물인데도 뜨거운 차를 조심시키시는 것이 좀 부끄럽긴 했으나 이제 이립의 나이에 접어든 국선의 눈에는 저가 여즉 어린아이임을 알았다. 어린 화랑이 먼저 잔을 들고 내리는 것을 가만 지켜본 국선 석품은 그제야 자기 앞에 놓인 잔에도 우아한 동작으로 차를 따른다. 찻잔 안에 채워지는 차의 수면으로 길게 내려오는 물줄기가 티 하나 없이 곧고 고요했다. 잡음 없이 적막하던 공간을 뚫고 석품의 곧은 질문이 내려앉았다.
“남방의 소식을 아느냐?”
“……, 예.”
의약당과 별채에도 다녀왔습니다. 대답하는 제노의 표정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금세 어두워진 눈빛을 기민하게 눈치챈 석품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는다. 달큰한 듯 씁쓰름한 잇꽃차 향이 방안에 느릿하게 고여 갔다.
얼마 전 남쪽 변방, 백제와 맞닿았던 산채 성에서 큰 전투가 있었다. 매복병의 규모가 예상보다 컸던 탓에 경험삼아 파견되어 나갔던 화랑과 낭도들이 경중상을 입고 호송되어 돌아온 지 벌써 보름이 넘었다. 천만다행으로 목숨이 끊긴 이는 없었으나 그 소식은 낭도원 안팎에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석품은 잔을 내려놓으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총 열이 가서 여덟이 다치고 개중 다섯은 중상이지. 애초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던 탓도 있으나 또한 내 불찰이야. 실전에 나가 본 일이 없는 아이들이, 그저 경험삼아 나간 전장에서 상상도 못한 수의 적을 베어 넘겨야 했으니 어디 쉬웠겠느냐. 그나마 설원이가 힘내 주어 이 정도인 것이 다행이다.”
“……,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잔뜩 속상한 목소리다. 잠깐 놀란 듯 치떴던 석품의 눈가에 미미하게 웃음기가 스쳐지났다. 똑똑하고 눈치가 빨랐지만, 그와 별개로 품성이 곧고 선하기로 유명했던 죽만랑이다. 빈말도 아니었고 위로를 바라고 꺼낸 말은 더더욱 아닐진대, 이 어린 화랑은 그 와중에도 제 말에 자책이 섞인 것이 못내 속상한 모양이었다.
“죽지.”
“예, 국선.”
“너는 이 일을 두고 백성들이 무어라 하는지 아느냐?”
제노는 입술을 말아물었다. 동요 없이 평온하고 묵직하게 내려앉는 국선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무겁게 들렸다. 저도 모르게 숙인 고개 위로 선고처럼 말들이 떨어져 내린다. 화랑도가 출정하였는데 백제의 조무래기들에게 칼을 맞고 쓰러졌단다. 방패막이 칼잡이 그 이상은 못 되는 집단이구나. 정복을 갖춰 입고 허세를 부리더니 별볼일 없는 어린애들이로구나. 서라벌의 기상이라느니 한 명 한 명 장군감이라느니, 전부가 헛말이로구나. 그런 이야기들이 왕왕 들려온다. 그 대목에서 참지 못한 제노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눈빛에 분노가 고여 뚝뚝 떨어진다.
“사람이 사선을 넘나들었는데, 어찌!”
“우리야 속사정을 전부 알지. 그것이 그들 탓이 아닌 것도 안다. 허나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먹고사는 이들의 사정은 좀 다르다.”
“…….”
천하만민, 그중에서도 신라의 백성을 지키고 나라에 충을 바치는 것이 화랑도의 존재 이유. 제노는 이를 빠드득 물었다. 울컥하는 감정을 눌러 참느라 관자놀이에 굵게 심줄이 선다. 사람의 입과 혀는 가볍다. 치명적으로 가벼워서, 다치지 않은 이의 가슴에까지 이리 대못을 박는다. 앞에서는 모두가 납작 엎드린대도 뒷말은 누구보다 날카롭고 빠르게 돌았다. 나이가 많아봤자 이립도 안 된 화랑도에게조차 서슴지 않고 모진 소리를 할 수 있는 것도 그들이 그저 양민이기 때문임을 제노 역시 알고 있었다. 허나, 무릇 양민이라 함은 나라가 위태롭고 목숨이 위험해도 칼을 쥐고 떨쳐 일어날 수 없는 이들. 차마 그들을 탓할 수 없었고 그래서 더 속이 상했다. 쥐었던 주먹에 힘이 풀렸다.
“요 며칠 선문에 던지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못해. 놔두었다가는 화랑도의 출정을 명한 윗분들께도 불똥이 튀게 된다.”
“그렇겠지요…….”
석품은 언제 열을 냈냐는 듯 금세 시무룩 어깨가 내려앉은 제노의 기색을 살피며 다시 다관을 들었다. 심부름꾼 아이가 제노의 찻잔 받침 위에서 식은 잔을 내리고 새 잔을 올려둔 참이었다. 빈 잔에 뜨거운 차가 다시금 고요히 채워진다. 손목을 가볍게 들어 찻물 줄기를 끊은 석품의 수려한 얼굴에 언뜻 그늘이 스쳐지났다.
“죽지.”
“예.”
“전장에 나가라.”
제노가 고개를 들었다.
귀로 흘러들어온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머리는 명징하게 문장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다만 혼란했을 뿐이다. 남방에서의 교전이 그렇게 마무리된 후, 다른 나라와의 분전이 일어나는 곳이 있다는 소리는 여태 들어 본 일 없었다. 머릿속 생각을 읽은 듯 석품이 낮게 한숨을 내쉬며 찻잔을 들었다.
“또 백제다. 저번 그곳을 포함하여 남서쪽 세 개의 성이 함락됐고, 어제 날아온 급보에 따르면 야음을 틈타 석토성까지 손에 넣었어. 이번에는 아예 작정을 하고 병력을 보낸 모양이야. 다친 성주들을 전부 금성으로 불러들여 놓은 바람에 몇 안 되는 군사들이 고전 중이다. 소식을 전해 들으신 전하께서 크게 노하셔 대장군께 명을 내리셨다. 큰 규모로 출정하여 빼앗긴 성을 돌려받고, 국경을 밀 것이다. 길고 위험한 전투가 될 게야. 그리고.”
“…….”
“역시 화랑도에서 누가 나서 주기를 바라고 계신다.”
“허나 국선. 저는,”
“대장군께서는 설원을 원하셨다.”
“…….”
“사정을 좀 알겠느냐.”
모를 리 없었다. 제노가 입을 다물었다.
이 년의 시간 터울은 크다. 열 명의 화랑들 중 가장 막내였던 제노가 이화랑이 될 만큼. 그사이 제대로 품을 받아 무관이 된 여덟의 선배 화랑 중 다섯은 북쪽 변방으로 갔고 셋은 얼마 전 마지막 유랑을 떠났다. 각자 몇 달씩의 터울을 두고 제노의 뒤를 따라 선문에 든 나머지 화랑들은 나이가 많아 봤자 열여덟이다. 설상가상으로 일흔을 앞둔 풍월각주는 오래 그를 괴롭혀 왔던 지병으로 앓아누운 지 꼬박 달포째였다. 열의 화랑과 수백의 낭도들을 두고 선문을 비울 수 없는 국선에게 남은 선택지는 설원과 죽지뿐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출정에 화랑도의 대표로 부대를 하사받아 출정하는 이는 장군의 칭호를 부여받는다. 본래 이 자리는 제노보다 입문이 두 해 앞선 일화랑 설원의 것이었어야 했으나.
“원랑께서는……,”
“회복까지 좀 더 걸릴 것이다.”
남방의 전투에 유일하게 참여했던 화랑인 설원은 전선에서 제 낭도들을 뒤로 빼내느라 가장 오래 싸웠고 가장 깊게 다쳤다. 삼 일간 사경을 헤매다 겨우 정신을 차렸으니 급하게 출정하지 못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도망칠 곳은.
제노는 침묵을 지켰다. 얇은 눈꺼풀이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를 가만 덮을 때마다 짙고 긴 속눈썹이 와잠을 스친다. 석품은 그저 묵묵히 기다렸다. 뜨거운 차가 다시 한 번 차갑도록 식을 때까지 고요하던 제노가 문득 입을 연다.
“가겠습니다.”
“……, 출정은 내달 초하루다.”
“일신을 정돈하고 흐트러짐 없게 채비하겠습니다.”
“교전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른다.”
“삼화랑 요석에게 일러 공석을 대비토록 하겠습니다.”
대답 하나하나가 빚은 듯 정론이다. 국선이 숨길 수 없는 한숨을 다시금 깊게 내쉬었다. 사과할 수도 용서를 구할 수도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차마 제노를 똑바로 마주보지 못하는 석품의 귀에 국선, 하고 작지만 또렷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이 하나 있습니다.”
“죽지.”
“형님?”
죽지랑의 낭도원 마당에서는 진검 대련 준비가 한창이었다. 둘씩 짝을 지어 마주보고 도열한 낭도들을 훑어보던 제노가 들리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반갑게 맞았다. 의약당에 갔다가 처소로 돌아가는 길인 듯, 왼손에 약재 꾸러미를 든 설원랑이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오른쪽 어깨와 상박을 둘러 흰 붕대가 감겨 있고 걸음은 묘하게 느리다. 뼈가 온통 바스라진 어깨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허벅지에도 깊은 자상을 입어 근육이 길게 찢어졌다고 했었다. 엉망이 된 몸을 훑던 제노의 눈에 짙게 걱정이 스몄다. 다가온 설원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제노의 어깨를 멀쩡한 왼손으로 툭 친다. 실없이 약한 강도다.
“실컷 빈둥대지 왜 나왔느냐? 이런 날이 언제 또 올 줄 알고.”
“사흘째 빈둥거리려니 좀이 쑤셔서요. 어깨는 괜찮으신 겁니까?”
“검을 잡으려면 두어 달은 기다리라던데.”
“답답하셔서 어찌합니까. 검술 말곤 영 재미를 못 보시는 분이.”
“이 녀석이.”
“농입니다. 아이들 몇을 데리고 다니시지, 그리 혼자.”
“다리뼈를 다친 것도 아니고. 상관없다.”
때마침 호각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고, 낭도들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쇠붙이끼리 마찰하는 날카로운 소리에 잠시 먹먹해진 귀를 손바닥으로 덮어 달랜 두 화랑이 나란히 서서 그 광경을 감상했다. 서로를 향해 쇄도하는 수십의 칼날 아래 수백 갈래 파편처럼 부서져 튀는 햇빛이 절경이었다.
국선은 제노에게 오 일의 휴가를 주어 풍월각으로 돌려보냈다. 명목은 휴가였으나 출정 전 신변을 정리할 시간을 준 것임을 알았다. 덕분에 제노는 오랜만에 제 낭도들의 실력을 점검하러 훈련장에 나온 참이었다. 애초의 목적은 그것이었을진대, 대련이 시작되고부터 제노의 시선은 줄곧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동혁은 이 열에서 주경과 칼을 맞대는 중이었다. 먼발치에서 보는데도 땀방울이 사방팔방으로 튀는 것이 훤히 보였다. 십여 년 검을 잡았을 상대보다 훨씬 서투른 움직임이지만 절대 밀리지는 않는다. 이를 얼마나 악물었는지 턱에 일자로 근육이 선 채로 검을 쳐내는 동혁을 눈여겨보던 제노가 피식 웃었다. 반 박자씩 느린 발놀림이, 고새 땀이 송골송골 맺힌 콧잔등이, 칼자루를 으스러지도록 꼭 쥐어 하얘진 손끝이 못 견디게 기특했다. 설원랑 김도영이 다친 어깨를 주무르다 말고 제노를 흘끗 돌아보았다.
“아주 저 녀석이 타죽어라 쳐다보는구나.”
“티가 납니까?”
“모르면 바보지. 네가 저놈을 아낀다고 온 선문에 소문이 다 났다. 첫 제자가 이른 모양이다?”
“…….”
“…….”
“형님.”
“응?”
“사랑하는 아우가 비역질에 여념이 없다면 혼을 내실 겁니까?”
“…….”
잠시 뜨악한 표정을 지은 도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머쓱하게 웃는 제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망할 놈. 정인이 생긴 걸 이 형님한테도 비밀로 하고. 언제 이렇게 장성하여서. 나는 이리 쉬울 줄도 모르고……. 혼자 속 끓지 말고 진작에 물어볼 것을……. 도영의 안색을 살피던 제노가 마른세수를 하는 도영의 검집을 제 검집으로 툭 쳤다.
단순히 아낀다는 소문이었으면 도영은 이렇게 떠보듯 묻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미 화랑 죽만이 낭도 하날 끼고서 남색을 즐긴다는 소문이 뭇 화랑도들 사이에서 파다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긴 했다. 도영은 제노가 입문했을 때부터 친형처럼 여러모로 챙기고 이끌어주었던 이였다. 그러고 보니 마음에 차는 여인이 생기면 형님께 가장 먼저 얘기하기로 어릴 적에 약속도 하였었지. 선문 안에 떠도는 이야기에 얼마나 혼자 속을 썩였을지 얼핏 알 것도 같았다. 미안함에 입술을 잘근거리는 제노의 얼굴을 말없이 얼마간 바라보던 도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네놈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적응이 안 된다.”
“…….”
"곧 사지에 끌려나갈 아우랑 잠깐 담소나 나눌까 하여 들렀더니만. 나보다 먼저 보아야 할 사람이 왔더구나."
“예?”
“선문 후문으로 가 보거라.”
저 애를 불러 달라 할 줄 알았는데. 너를 부탁하더라. 긴히 할 말이 있는 모양이던데 다녀와. 고놈 지난번에 보았을 땐 사위가 어두워서 그랬는지 영 퍼석하고 기분 나빠 보이더니만. 고단새 얼굴이 피었어……. 역시 네놈에겐 선문 밖이 훨씬 잘 어울린다고 말 좀 전해 주거라.
제노의 눈이 커졌다. 누굴 이르는 말인지 자세히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제노가 제 어깨를 꾹 한 번 짚고는 손을 들어 휘휘 흔들며 미련 없이 뒤돌아 떠나는 도영의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다 느릿하게 발걸음을 떼었다. 몇 발짝 걷지 않고 다시 뒤돌아 딱 한 번 더 동혁의 모습을 확인한 제노가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로 후문으로 향했다. 소년들의 악에 받친 기합이 마당을 울렸다. 대련의 열기가 거세지고 있었다.
“아직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벌써 이 년이다. 영영 떠나 있을 생각이냐.”
“글쎄요, 아버지께서 이 선문에 저를 다시 집어넣지 않겠다 약조하신다면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고. 아들자식을 영 버렸다고 생각하신다면……, 부자유친은 개나 주어야지요.”
“여전하구나.”
핀잔 같은 말투에 우영이 입꼬리를 쭉 끌어당겼다. 반달로 접히는 커다란 눈 덕분인지 냉하던 인상이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마의 두름띠도, 늘 숱 많은 머리를 한 갈래로 깔끔하게 틀어올려 질끈 묶던 검은 끈도 없다. 덥수룩하니 아무렇게나 잘라놓은 까만 머리칼도 쥐색 승포와 어깨에 걸친 바랑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그 밑에서 희고 수려한 얼굴이 웃는다. 어쩐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는 제 오랜 친우를 찬찬히 뜯어보던 제노가 결국 얼굴을 풀고 흐늘하게 마주 웃어 버렸다. 저 장난스럽고 다정한 미소 앞에선 도무지 엄해질 수가 없었다.
“머리털 난 가짜 중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인생입니다.”
“네 결정이라고 믿기엔 퍽 안 어울리는구나.”
“주지께 법명도 받았는걸요.”
재계할 재 자에 백성 민 잡니다. 허파에 아주 바람이 꽉 차 있다고 호통 치시더군요. 품이며 벼슬이 부처 앞에선 소용 없으니 네가 뭇백성이란 사실부터 다시금 깨달으라고요. 물론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요즈음에 들어서야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합니다. 까놓고 말해서 부처 앞에선 만랑이나 저나 똑같은 필부라니 얼마나 공평합니까. 반평생을 그것이 억울하여 잠 못 이루었는데.
웃음소리가 낮게 터지듯 울렸다. 두 청년의 사이에 목조 테두리가 붉게 칠해진 문이 놓였다. 하나는 한사코 그것을 넘어가려 하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그런 상대방을 구태여 저지하려 하지 않았다. 선문 옆 돌담을 둘러 심긴 목련화 향이 두 코끝으로 훅 끼쳤다. 여름이 한창인데 아직도 기를 쓰고 두어 송이 매달려 있던 것들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기실 진작에 다 피고 다 져 버렸어야 했으나 찬그늘이 진 곳이라 봄꽃이 늦었다. 그나마도 내일이면 전부 질 것이다. 목련은 그런 꽃이니까. 잠시 화려하고 향기롭게 피었다가 흔적 없이 지는.
“그래서 어인 일로 하산을 다 했느냐.”
“산에 들었다 하여 세상 일을 영 모르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고맙네.”
“…….”
“마지막 인사를 하러 찾아와 주는 친우라니.”
말문이 막힌 재민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온화하게 웃는 하얀 얼굴은 더 이상 어린애 같지 않다. 제대로 마주한 스무 살 죽지랑의 인상은 그랬다. 어렸을 때에는 그저 순하게 웃는 법밖에 모르는 새끼 강아지 같으신 분이었는데. 안 본 새 깊고 기품 있는 눈빛이, 몇 마디 나누어 보지 않고서도 제 속내를 꿰뚫어 보는 예리함이 생겼다. 그것이 제노를 영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돌려 말해 봤자 먹히지 않을 것이다.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낀 재민의 눈빛이 느적하게 가라앉았다.
“오는 초하루에 변방으로 출정을 나가신다구요.”
솔직한 말투에 제노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계속해보라는 듯한 유들한 눈빛에 재민이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잠시, 재민의 시선이 제노의 어깨 너머를 향했다. 어렴풋이 들리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기합 소리의 시작점을 더듬는 듯 잠시 가늘어졌던 눈매가 제노의 작은 헛기침에 다시 펴졌다. 대신 그 빈자리를 천천히 번지듯 메우는 싸늘함.
“알리셨습니까?”
주어 없이 직설적인 물음이다. 그러나 재민도 제노도 그 물음의 속뜻을 진작 알고 있었다. 곧장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제노에 재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설핏 미간을 구겼다.
“그 애에게 알리지 않으셨지요, 만랑.”
추궁하듯 따라붙는 그 말엔 제노가 도로 입을 다문다. 그리고는 잠시 묵묵하다가,
“그랬다면.”
저도 모르게 대들듯 대거리한다.
“그랬다면 어쩌게? 미리 준비시키게?”
“…….”
“내가 죽어 못 돌아오면 도로 데려가려고? 또 그 애를 밤중에 몰래 빼내 가게? 원래 있었던 자리로 돌려보내게? 사랑 윗목이나 부엌간에 본래대로 처박아 두고 싶어서?”
말이 봇물 터지듯 터져나온다. 왠지 모를 억울함에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목소리가 점점 격양되었다. 늘상 덤덤하게 낮던 말끝이 튄다. 실로 감정적인 반응이다. 제노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저는 아무 말도 않았습니다. 재민이 가만히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노는 그제야 한 발 늦게 입을 다물었다.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속 깊은 데 고였던 죄책감에 재민의 질문 한 마디가 확 불을 댕겼다. 재민은 숨을 가라앉히는 제 친우를 앞에 두고 가만히 말을 고르며 오른손의 염주를 엄지로 느리게 문질렀다. 한참을 묵묵하더니 제노가 입안 여린살을 꾹 깨물며 노려보자 그제서야 느리게 입을 연다.
“할아버님께서는 늘 제가 살고 싶은 대로 살라셨어요.”
첫 문장은 뜻밖이었다.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선문답 같다. 제노는 그저 묵묵히 재민의 선 고운 입술을 응시했다. 재민의 오른손끝이 작은 염주를 한 알 한 알 천천히 어루만지며 세어넘겼다.
“그 애를 거둔 것 역시 할아버님의 뜻이었지요. 아버지께서는 그저 따랐을 따름입니다. 곧 죽어 넘어갈 노인네 청 하나 들어준다 생각하면서요. 그놈은 아직도 아버지를 평생의 은인이라 여깁니다만. 참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집안입니다.”
“…….”
“손이 참 여물었습니다. 이부자리를 보고 물을 데우고, 장작에서 불쏘시개를 발라내고 하는 잡일들에 배우지 않아도 능숙했어요. 어려서 잃었다던 어미아비를 닮았는지 철이 되면 집안 노복들을 도와 술도 잘 빚고요. 그 둥글고 단단한 손끝으로.”
“…….”
“그중에서 제일 잘하는 것은 제 옷매무새를 봐주는 거였습니다. 할아버님 장례 때에도 그 애가 상복 매듭을 지어주었어요. 이제 다 커서는 알지요. 할아버님께서 타고나길 예민하고 성정 더럽게 태어난 손자놈에게 소꿉친구 하나 붙여 주려 하신 것을요. 그놈은 저를 전부 압니다. 제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디가 불편하고 어디가 좋은지 전부. 십 년을 모시는 동안 곡우영이라는 사람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게 되었어요. 그러나 저는 많지요.”
그 애 손이 그렇게 여물단 걸 알았어도 장난으로 목검 한 번 들려 본 일이 없습니다. 먹이나 갈게 시켰지 함께 붓을 든 적이 없어요. 아마 이곳에 와서는 퍽이나 잘해냈겠지요. 검도 잘 잡고 붓도 잘 들고요. 아마 좀 겁은 냈겠지만요. 어렸을 때에도 잔겁이 많아 오히려 제가 앞서서 밤길을 걷고는 했으니까요. 제가 그 애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것도 고작 이 정도입니다. 그러니.
“만랑.”
“…….”
“어딜 도로 데려갑니까.”
“…….”
“제겐 자격도 집도 없는걸요.”
씁쓸한 음성이다. 제노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적셨다. 몇 년을 두고 알아 왔어도 우영이 자기 이야기를 이리 오래 하는 것을 처음 보는 탓이다. 재민이 고개를 들어 제노를 곧게 쳐다보았다. 호수처럼 맑고 잔잔한 눈이다. 그에게서 처음 보는 눈빛. 제노는 낯섦에 고개를 돌려 눈을 피했다.
“그 애가 왜 만랑을 따라왔는지를 아십니까.”
오른뺨 위로 재민의 낮은 음성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평생 노비로 사는 것보다 이곳이 나으리라는 건 어린애도 아는 사실이 아니냐. 제노는 불퉁하게 대답한다.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게 아니란 걸 이미 아시면서요. 재민의 조용하지만 단호한 되물음에는 결국 입을 다문다. 곡우영은 늘 제가 몸에 두른 단단한 갑옷 사이의 빈틈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법을 알았다. 그러나 평소와는 다르다. 오늘 이 아이의 손에 들린 것은 복슬한 강아지풀 대신 날 벼린 창이다. 가슴께가 간질간질해지는 대신 꾹 찔리듯 뻐근하게 아팠다.
무엇을 말하고픈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지만, 그 윤곽이 보일수록 짜증이 치밀었다. 숨기고 숨겨 꽁꽁 봉인해 놓은 무언가를 깊숙이 찔릴 것만 같은 예감이 자꾸만 들었다. 제노의 표정이 구겨지면 구겨질수록 재민의 말투는 더더욱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소인은 이제 일개 땡중이온지라 그쪽 안의 삶이 뭐가 그리 나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
“만랑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그 애가 적어도 팔자 고치잔 맘 하나를 가지고 그리 쉽게 집을 떠나오지는 않았으리란 거.”
뭐, 어렸을 땐 가끔 저한테 담 생엔 육두품으로 태어나 도련님마냥 호강을 하겠노라고 퉁퉁거리긴 했습니다만. 재민이 즐거이 덧붙이며 눈을 감았다. 눈꺼풀과 그 아래를 덮은 길다란 속눈썹 위로 한낮의 햇볕이 쏟아졌다. 농담 따먹기나 할 요량이면 이만 돌아가거라! 제노가 와락 얼굴을 구기며 쏘아붙였다.
눈을 뜬 재민이 피식 웃었다.
"농담처럼 들려?"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제노가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재민을 쳐다보았다. 재민은 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바라본다. 미소가 지워지자 얼음장 같은 얼굴이다.
“어른인 척 해봤자 여즉 어린애로구나, 죽지.”
“이대로 끌어내 주길 바라는 것이냐.”
“동혁이를 연모하잖아.”
“…….”
“그래서 못 말하고 있는 거잖아.”
“…….”
“아니야?”
목소리가 엄한 척 못내 다정하다. 제노는 그만 고개를 떨궜다. 곡우영에게는 이제노의 가장 나약한 부분을 아프지 않게 눌러 꺼내는 재주가 있었다. 침묵이 이어졌으나 재민은 가타부타 말없이 제노의 잘 뻗은 콧등을 쓰다듬듯이 응시했다. 조금 화가 난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노가 곡우영의 하나뿐인 친우라면 이동혁은 하나뿐인 형제였다. 제 친우가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전장에 나가는 것도 삼 일 밤을 지새며 가슴만 두드렸을 정도로 애가 끓는 소식이었을진대, 선문 안에서 기댈 울타리 없이 홀로될 아이를 생각하면 속에서 기어이 무엇이 울컥했다. 눈앞의 제노가 어쩔 수 없이 야속한 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 속이 헤집어졌을 죽지랑에게 더 이상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미운 마음을 전부 쏟아내고 돌아섰다가는 남은 평생을 후회하게 될 거란 걸 알았다.
“화랑이고 낭도고 나발이고, 질려서 신물이 날 지경인 나는 이제 뭐가 귀하고 천한지조차 잘 모르겠다.”
“…….”
“그러니 묻자, 제노야.”
“…….”
“무엇이 그리 겁이 나서 그러니.”
그 애가 너를 원망할까 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노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누그러진 목소리로 되묻는 재민을 마주본 제노가 결국 실토한다.
“동혁이가.”
“응.”
“괜찮다고 할까 봐.”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 나온다.
“원망 없이 나를 보내 줄까 봐.”
그 애는 늘 그랬으니까. 내가 한다는 일이라면 제 사정은 덮어두고 고개부터 끄덕였으니까. 그리 화를 내고 혼을 내도 여전히 제 뜻 없이 내 말대로만 하니까. 이번에도 그러면 어떡하지, 내가 가겠다는 대로 보내 줘 버리면.
“내가 그 애 속을 다 아는데.”
“…….”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보내주고, 또 몇 날 며칠을, 어쩌면 평생을 혼자 가슴 후벼파인 채로 살아갈 텐데. 따라갔어야 했다고, 같이 죽었어야 했다고 생각할 텐데. 나는 그 애가 이미 나를 너무 귀히 여기는 걸 알아. 그래서 내가 떠나면 속이 문드러지다 못해 썩어나갈 거란 것도 알아. 그 애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되면 안 되는데……, 나는 그저……, 그게 무서워서.”
“…….”
느릿느릿 말을 잇던 제노가 문장을 맺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조금은 기운이 빠진 듯한 모습에 재민이 표정을 풀었다. 부드럽게 부른다.
“만랑.”
“응.”
“몰아붙여서 죄송해요.”
“…….”
“저자에는 이미 소문이 퍼졌습니다. 랑께서 참전하신다고요.”
동혁이가 이 소식을 만랑이 아닌 다른 이에게 듣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이어지는 당부에 제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재민은 시무룩해진 얼굴을 확인하듯 들여다보고는 팔을 뻗어 메고 온 낡아빠진 바랑 안을 뒤적였다.
“만랑, 제가 아까, 그 애가 여길 왜 따라왔는지 알고 계시냐고 물었어요. 그렇지요?”
“…….”
“주제넘게도 제가 먼저 알아버려서 그랬습니다.”
빳빳한 종이로 감싸인 서찰 같은 것이 내밀어진다. 제노는 그걸 받아들어 끈을 풀어냈다. 안에서 나온 것은 두 번 접힌 종이다. 먹물 자국으로 얼룩덜룩하고 손을 탔는지 끄트머리가 낡았다.
“그애의 연서입니다.”
연습 종이들 사이에서 빼 따로 처박아 두었던 것을 보아……, 아마 처음으로 썼으나 차마 드리진 못한 것이겠지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낭도원에서 지샜던 밤에 붙장 깊숙이에서 발견하였어요. 나중에 만랑이든 그애든 실컷 골려먹으려고 몰래 감춰두었고요. 그리고 제가 먼저 읽었습니다. 부러우시지요. 재민은 예의 여상한 말투로 돌아가 슬렁슬렁 놀려댄다.
“……, 이걸.”
이걸 네가 왜 가져갔어!
종이를 든 손을 달달 떨던 제노가 저도 모르게 와락 언성을 높였다. 재민은 어이쿠 놀래라, 여상하게 두 손을 올리며 한 걸음 물러난다. 씩씩거리는 화랑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탕을 뺏겼다 돌려받은 어린애 같아진다. 늘 일정한 호선을 긋고 온화히 닫혔던 입술이 삐쭉 나오고. 속눈썹 다붓한 눈이 어쩐지 푹 울멍해지고. 재민이 잠시 아연했다가, 이내 눈썹을 뉘며 웃는다. 아이고……. 언제 또 그만치나 마음을 주셨소.
“랑은 여전히도 불 보듯 빤한 사람이군요.”
“…….”
“그리고 여전히도 총명하십니다.”
읽어보세요. 저는 어차피 아는 내용이니 제 앞에서 읽으셔도 관계없지 않겠습니까. 재민의 말에 조심스러운 손길로 종이를 펼친 제노가 천천히 눈으로 한 글자 한 글자를 훑어내린다. 군데군데 틀린 글자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뭉개진 말들이 많았으나 못내 사랑스럽다. 가만히 소리내어 읽는다.
봄이 가는 것이 아쉽습니다
저를 가르치신 처음 첫날
바람이 따뜻했고 해 볕이 좋았습니다
만랑은 아름다워요
다음 봄이 되면
손을 잡고 싶은데
저는 그때에 여기 없습니다
제가 사라지면 슬퍼하
서운하시겠습니까
“영 못 가시겠지요.”
“……, 그걸 알면서.”
제노가 고개를 팍 쳐들고 재민을 노려보았다. 잔뜩 원망스런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재민이 푸스스 웃었다.
“그냥 좀 속상하시라고 가져왔더니만 이럴 줄은 또 몰랐네. 제가 살다살다 만랑 우는 걸 다 보네요. 상상 못했던 수확이온데, 이거 참. 마음이 무거워서.”
“안 운다.”
“예, 예.”
“안 운다니까.”
“눈이 그만치 젖었으면 그것이 울음이지요 뭐.”
“…….”
“품고 가십시오. 부적이 될 줄 누가 압니까.”
“…….”
“…….”
“고마워.”
“웬만하면 다치지 말고 몸 성히 돌아오시고요.”
그 밋밋한 걱정을 들은 제노가 웃었다. 이 다정한 사람이, 이걸 홀로 품고 있다 영영 전해주지 못할까 봐 연 끊은 선문까지 급하게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봄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아까 진하게 왔다 갔던 목련화 향이 아스라이 다시 스쳐지나갔다. 그새 조금 옅어진 듯도 했다.
감히 청할 것이 있다고 했다. 너무 어려운 것이 아니라면 전부 들어주겠다 약조하며 무어냐 묻는 석품에게 죽지가 말한다. 낭도들 없이 꾸린 새 부대를 내려주시고 출정 사실을 비밀에 부쳐주십시오. 저자의 뜬소문 따윈 상관없습니다만 선문 안에서는 국선과 원랑 말고는 아무도 모르게 해 주십시오. 그 연유를 묻는 질문에는 망설임도 거짓도 없이 대답한다. 개중 사랑하는 이가 있습니다. 전장에 나간다 알리면 필시 따라올 것이고, 따라오면 그 아이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 출정 인원이 정해질 때까지만. 명단이 올라갈 때까지만, 비밀로 하여 주십시오. 혹 지금 고해올린 것이 화랑도의 이름에 씻지 못할 죄가 된다면.
전장에서 죽음으로써 갚겠습니다.
“오래 못 돌아올 것이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제노의 눈이 울었다.
목련화가 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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