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랑가

모랑가 一

동젠

“너냐? 품 없이 선문을 넘은 도둑놈 새끼가.”

동혁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걷다 갑자기 멈춘 탓에 발 옆으로 잔 모래가 튀는 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누가 뱉었는지도 모를 도둑놈 새끼라는 말이 등을 아프게 찔러 들어왔다. 시비를 걸려는 의도가 다분한 목소리다. 별 반응 없이 도로 발걸음을 떼자, 목소리의 주인이 우악스럽게 왼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덕분에 발걸음이 꼬여 잠시 비틀거린 동혁이 그치들의 얼굴로 올라가려던 시선을 간신히 잡아 내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선 동혁을 내려다보던 소년 서넛이 그 모습에 잠시 키득댔다. 비실거리는 꼴 좀 보십시오. 정말이지 어떻게 여길 들어왔을까. 그러니까 도둑놈이라고 하는 거잖느냐.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무골 주제에 나라 녹 얻어먹으려고. 

“…….”

동혁이 가만히 소매를 말아쥐었다. 풀을 먹여 세운 각이 여직 살아 있는 낭도복은 흘낏 봐도 소년들의 것보다 훨씬 새것이었다. 그 사실에 더 비참해진 동혁이 입술을 물었다. 잠깐만 버티면 된다 하셨다. 곧 네 자리에 도련님이 돌아가게 되실 것이야. 그때까지는 아무래도 네 신상이 나랏님 소관이니, 조심해서 다니거라. 눈에 밟힐 짓 하지 말고. 원래라면 도련님께 입혀야 했을 낭도복을 다림질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행랑아범의 당부가 귓가를 쟁쟁하게 울렸다.

“고개 들어, 인마.”

가장 앞에 나선 이가 동혁의 어깨를 툭 밀쳤다. 저항 없이 한 발자국 뒤로 밀린 동혁이 중심을 잡으려 잠시 휘청였다. 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향한 채였다. 얼씨구. 태를 봐라, 바람 불면 날아가겠다. 이거 사내새끼 맞아? 낭도가 아니라 노리갯감으로 들어왔나 본데.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말들에 동혁이 낮게 한숨을 내쉰다. 덤덤히 고개를 든 동혁이 눈을 내리감았다가, 도로 뜬다. 시선은 올곧게 앞으로 향해 저를 향한 시선들을 똑바로 마주한다. 건조하고 뜨거운 눈알이다. 

낭도들의 웃음이 어색하게 멎었다. 어둡고 사나운 얼굴. 동혁은 제 웃음기 없는 상판에 여인 같은 구석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깡마른 몸 때문에 넘겨짚고 비꼬려 내뱉은 말들이 무안해질 정도일 터다. 제 앞에 서 뭐라도 된 양 시비를 거는 놈들이 궂은일이라곤 손끝도 대 보지 않은 백면서생들이라는 것을 알고 간신히 화를 눌러 참은 동혁이 다시금 눈에 힘을 풀고 눈썹을 늘어뜨렸다. 잠시 동안의 대타일 뿐이라고 해도 엄연히 화랑을 따르는 낭도다. 자비하되 날카로운 군자의 태도를 지니라는 소리를 근 며칠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군자답게 맞서야 한다. 맞서는 게 안 된다면 버티기라도 해야 한다. 

“무슨 이유로 이러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해입니다.”

“무엇이!”

우두머리 낭도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동혁이 질린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아주, 입은 살았구나. 웃음을 채 갈무리하지 못한 채로 눈물을 닦은 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 오늘 새로 도원에 드는 아이. 이미 전해 들었다. 네 이름이 우영이랬지. 곡우영.

“우영아. 나는 주경이다. 기억 안 나냐?”

“…….”

“미안하지만 내가 너와 글공부를 같이 하며 자랐단다.”

동혁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입을 닫은 동혁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는 주경의 시선에 비웃음이 어렸다. 

“고작 몇 년 못 보았다고 사람 얼굴도 못 알아볼 줄 아느냐? 상판만 보아도 천것인 놈이, 어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따박따박.”

오만한 말투였고, 근거 없는 비난임이 자명했으며, 그러니 반박해야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동혁이 그저 아랫입술을 지긋이 즈려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맛이 번졌다. 가슴을 꿰뚫듯 들어온 멸칭이 머리를 내리눌러 도무지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몸에 도는 천것의 피가 죄책감으로 변모해 피부를 쿡쿡 찌르며 동혁을 비웃었다. 별 반응 없이 동혁이 묵묵하자, 낭도들의 얼굴에 도로 여유가 돌아왔다.

“건방진 놈. 들키지 않을 줄 알았더냐.”

“…….”

“무슨 연유로 바꿔치기 당했는지는 모르겠고. 보나마나 높으신 분들의 사정일 테니 내 손으로 너를 내치지 못할 것도 알겠으나,”

멀쩡히 이곳에 머물려면 한 몸 건사할 줄은 알아야 할 것이다. 

주경의 웃음기 섞인 말이 떨어지자마자, 맨 뒤에 섰던 낭도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검집에서 검을 뺐다. 사나운 손놀림 탓에 카앙, 에 가까운 검울음이 났다. 훅 끼쳐 오는 검풍에 놀란 동혁이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가 기겁한 눈길로 시퍼렇게 드러난 칼날을 바라보았다. 조롱하듯 킥킥 웃은 낭도들이 저마다 검을 뽑아 들었다. 화랑의 허락 없이 선문 안에서 발검하다니. 상황이 나쁘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한 동혁이 본능적으로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맨 처음 검을 들었던 낭도가 조롱하듯 칼등으로 동혁의 팔을 툭 쳤다.

“아가야. 너 칼 잡을 줄은 아니?”

“누구를 아주 바보 천치로!”

이를 악물고 일갈한 동혁이 퍼뜩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도로 푹 숙였으나 이미 늦었다. 도열한 얼굴들에서는 웃음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다. 동혁이 이를 악물었다. 실수했다. 

유골무죄 무골유죄. 같은 낭도복을 입었다고 다 같진 않다. 사람이라고 다 똑같이 귀하진 않은 이 나라에선 당연한 일이다. 선문 안에서는 골과 품을 따지지 않는 것이 법도라고 하긴 하나, 그것을 정말로 여기는 이는 없다. 두품 낮은 평민이 드는 낭도원이 따로 나뉘어 꾸려진 것만 보아도 알 만 했다. 다시 말해, 지금 동혁이 발을 딛고 선 곳은 낭도들 중에서도 품 높은 이들이 기거하는 곳. 기세등등한 것으로 보아 이 소년들의 집안도 못해 봐야 4두품 이상의 품계를 지닌 집안일 것이다. 좋은 밥 먹고 길러진 도련님들에게 무품 주제에 양반집 도령을 가장하여 낭도복을 입은 놈이 절대 곱게 보이진 않을 테지. 그런데 거기다 대고 어찌 큰소리를. 

우영의 얼굴을 안다는 주경의 말이 동혁의 목구멍을 턱턱 막았다. 도련님과 어울릴 정도라면 필시 6두품일 터. 까마득히 높은 신분이다. 평소라면 그 앞에서 빳빳이 고개를 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들겨 맞을 일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자꾸만 손이 떨렸다. 차라리 이제라도 바닥에 엎드려 죽을 죄를 지었다 제발 살려 달라 비는 게 마음 편할 것만 같았다. 십팔 년을 살면서 뼈에 새겨진 두려움이 동혁을 자꾸만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잔뜩 억울한 표정이구나 그래.”

“……, 아닙니다.”

“아니긴. 검을 뽑아라.”

오 합을 맞추기 전엔 널 진정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동혁이 고개를 들었다. 날이 선 낭도들의 눈빛은 농을 던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선문 안에서는 랑의 허가 없이, 진검을 뽑는 것을 금한다고. 개미만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던 동혁이 눈 앞을 번쩍, 하고 스쳐지나는 무언가에 놀라 뒤로 물러서다 제 발에 걸려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날카로운 칼날이 목 바로 옆에 겨눠져 서느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동혁이 목을 콱 막아 들어오는 두려움에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목에 가까이 다가선 검이 없었더라면 또 모를까, 노려보는 눈빛이 한없이 위협적이었다.

“내가 그리 바보로 보이나? 랑께서는 낭도원에 오시지 않아. 이 시간에는 더더욱.”

“……, 이러지 마십시오.”

“발검해. 정녕 뽑지 않겠다면 이대로 벨 것이다.”

목에 한 치 더 가까워진 검날에서 한기가 뿜어져 나온다. 동혁이 질린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손끝이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살려 달라 빌 수 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겠지. 여기서 끝내 무릎을 꿇으면 이들은 실컷 저를 발아래 두고 유린하다 떠날 것이다. 그리고 그건 곡우영을 대신하여 이동혁이 선문 안에 머무는 한 이런 일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될 것임을 의미했다. 그렇게는 안 된다. 

동혁이 겨우 손을 뻗어, 허리춤에 걸린 진검 대신 멀지 않은 곳에 떨어뜨린 목검을 더듬어 쥐었다. 쳐낼 수 있어. 아니, 그래야만 한다. 선문 밖을 나서는 순간 이들의 손에 날벌레처럼 죽는 한이 있어도 곡우영의 이름으로 낭도복을 입은 이상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야만 했다. 이를 악문 동혁의 손아귀가 단단히 목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마른 손등 위로 심줄이 선다. 그걸 그대로 횡으로 휘둘러 검을 걷어 올리려던 순간.

“네놈들이 먼저 시체가 되어 나가고 싶으면 그리해 보던가.”

찰그랑, 목에 겨눠졌던 검이 흙바닥과 날카롭게 마찰했다. 동혁을 잡아먹을 것처럼 으르렁대던 낭도들의 기세가 순식간에 꺾였다. 당황한 눈빛으로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던 낭도들이 일제히 검을 내던지고 바닥에 엎드렸다. 동혁이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옆으로 시선을 느리게 옮겼다. 소년 한 명이 제 앞에 엎드린 낭도들을 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색 무도복에 자주색 띠, 흑색 검집. 

화랑의 복색.

"마, 만랑."

"그 이름을 아는 놈들 하는 짓이 이 모양이냐."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나직이 마당을 울렸다. 그리 크지 않지만 선이 또렷하고 힘이 있는 목소리는 아직 변성기가 완전히 지나지 않은 미성이었지만, 어리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멍하니 주저앉은 채로 제 화랑을 올려다보던 동혁의 눈이 일순 커졌다. 파드득 튀어오르듯이 몸을 일으킨 동혁이 냉큼 다른 낭도들을 따라 화랑의 발밑에 엎드렸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쭉 흐르는 것을 느낀 동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 것만 같은 소년의 둥근 뒤통수를 흘끗 내려다본 어린 화랑의 뼈대 뚜렷한 얼굴에 설핏 미소가 어렸다. 커다랗고 서늘한 눈이 일순 탈처럼 둥글게 휘어진다. 

“내 부재를 틈타 검을 뽑는 게 언제부터 정당한 일이 되었을까.”

“만랑, 그것은.”

“아직도 할 말이 있으렷다. 그렇다면 적도 짐승도 아닌 동료의 목에 칼을 겨눈 건 어찌 변명할 셈이냐.”

“……, 면목없습니다.”

주경이 입술을 콱 짓씹고는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걸 가만 내려다보는 웃는 눈. 순간 보이지도 않는 눈동자가 이채를 띤다. 온화히 휘어진 눈꼬리와 은은히 웃는 입매에서 살기가 풍겼다. 싸늘하고 엄한 기운이 등을 눌러내리는 감각이 선연하다. 동혁이 입술을 말아물고 흘끗 눈을 들어 화랑의 눈치를 살폈다. 나와 나이가 같은가, 그럼 열여덟 살? 혹은 한두 살 더 많아 약관인가. 도련님과 또래 같아 보인다. 생김도 비슷하게 곱다. 하긴, 얼마나 귀히 키워졌을 것인가.

 동혁의 머릿속에 저자를 거닐던 화랑과 그 무리의 걸음이 섬광처럼 스친다. 왜 복색이 아니라 걸음이냐 하면, 행차가 지날 때까지 바닥에 납작 엎드려 고개를 들지 못하고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몰래 눈을 들면 시야에 들어오던 것은 손도 못 댈 만큼 귀한 가죽으로 만든 신발들, 허공을 딛듯 우아하던 발걸음.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씻은 밤알처럼 고이 손을 타며 자랐겠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을 끊어내려 동혁이 입술을 꾹 즈려물었다. 잡생각 하지 말자. 나는 곡우영이다. 이제 정말 헷갈리면 안 된다. 이동혁이 아니야. 지금만큼은 한낱 대감집 노비 새끼가 아니라 도련님이란 말이다. 화랑에게 걸리면, 만에 하나 들키면. 

이건 삼 대를 멸하고도 남을 죄다. 동혁이 콧잔등에 고인 땀을 옷소매로 문질러 닦으며 떨리는 손을 주먹쥐었다.

"검을 반납하고 돌아가. 달포간 너희 다섯은 진검대련을 금한다."

"만랑!"

"아니면. 이 길로 죄를 물어 선문 밖으로 나가고 싶어서?"

아닙니다.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대번 꼬리를 내린 낭도들이 주춤주춤 일어나 길게 읍하고 검을 갈무리해 화랑의 발치에 둔 뒤 그 자리에서 빠져나갔다. 어쩐지 어깨가 축 처진 듯한 낭도들의 뒷모습을 곁눈질로 좇던 동혁이 저를 향해 다가오는 사박거리는 발소리에 흠칫 놀라 몸을 움츠렸다. 잔뜩 겁먹은 동혁 앞에 쭈그리고 앉은 만랑이 동혁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의외로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에 살짝 고개를 든 동혁이 그대로 굳었다. 눈이 마주쳤다. 크고 까만 눈동자와 길고 짙은 속눈썹과 다정한 입매가 너무 가까웠다. 

“일어나도 된다. 그렇게까지 예를 갖출 필요는 없어.”

“아, 예, 예.”

엉거주춤 일어난 동혁이 가볍게 심호흡했다. 어쩔 수 없는 긴장으로 인해 내쉬는 숨이 떨려 나왔다. 허리를 편 만랑이 흐흐 실없이 웃었다. 열여덟? 혹은 열아홉쯤 되었으려나. 제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선 피부 짙은 소년은 저와 비슷한 나이였다. 그래, 네가 오늘 새로 왔다고. 부러 다정하게 묻자 예 하는 대답이 떨어진다. 만랑은 쿡쿡 웃으며 동혁의 매끈한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 주었다. 어색하게 굳은 얼굴에다 대고 놀리고 싶었다. 너 태어나서 거짓말을 제대로 해 본 적이 몇 번 없는 아이로구나, 하고. 

‘랑은 불 보듯 빤한 사람입니다.’

‘무슨 뜻이냐, 그게?’

‘척하는 법밖에 배우지 못한 아이는 꼭 욕심 없는 얼굴을 하지요. 좀더 크셔서 세상을 좀 알고 나면, 갖고 싶어 안달내는 게 생길 겁니다. 사군이충이며 사친이효는 물론이고, 교우이신도 떨쳐 버리게 되는 마음을 갖게 되실 거예요.’

‘…….’

‘저주가 아니니 그리 쳐다보지 마시구요. 임전무퇴와 살생유택에 있어서는 기세를 더하시게 될 터이니 어찌 나쁜 예언이라 하겠습니까?’

‘농이 지나치다.’

‘달리 누구의 탓도 아니고, 랑께서 너무 총명하셔서 그런 것입니다. 원래 똑똑한 아이들은 거짓을 사랑함을 알아도 그만두지 못하거든요. 어디 두고 보십시오. 그 잘난 세속오계가 뉘 손에서 놀아나는지.’

그때에도 제가 랑의 친우라면, 두고두고 솔찬히 놀려 드리지요.

짓궂은 눈빛으로 입꼬리를 쭉 찢어 시원하게 웃던 희고 고운 얼굴. 저자에 두고 오래 사귀어 온 벗이 새로이 제 낭도가 되었다 했다. 곡우영은 누구의 아래라는 위치에서 배겨낼 성정이 아니다. 당돌하고 당당하다. 무엇보다 화랑도를 늘상 비웃어 대던 놈이다. 진골인 저 자신과 견주어서도 늘 이기고 싶어하던 배짱 있는 녀석이었는데, 하물며 누굴 따르는 낭도라니. 참 어울리지 않는 자리다. 화랑이 되기엔 골품도 성정도 아주 조금 모자란 아들자식을 어떻게든 출세시키려 집안에서 일방적으로 결정한 일일 것이 뻔했다. 잔뜩 골이 났을 상판을 구경하고 골려 주러 잘 걸음하지 않는 낭도원에 들른 건데.

만랑이 동혁의 건조한 눈과 어두운 뺨에 맺힌 점들을 차근히 뜯어보았다. 그새 표정을 갈무리한 동혁이 매끄럽게 자신을 훑는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제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 녀석은 곡우영이 아니다. 역시 그놈이라면 낭도로 들어오느니 차라리 도망을 치든, 스스로 다리 한 쪽을 부러뜨리든 했겠지. 입문 날짜는 받아 두었는데 들어가야 할 놈이 집을 나갔으니, 아마 저와 우영이 친우지간임을 모르는 집안어른들이 은밀히 장난을 친 걸 텐데. 그럼 이 아이는 대체 누구인가. 만랑이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호는 죽만이며, 아명은 제노다.”

“……?”

“죽지라고도 부르긴 하는데, 그것은 예명禮名이니.”

동혁이 의문스런 시선으로 제노를 올려다봤다. 화랑의 이름자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아명까지 알아야 할 일인가. 원래 낭도와 화랑 간에도 통성명을 이리 격없이 하나. 가만히 서서 눈만 굴리고 있으려니습관처럼 또다시 눈을 접어 해사하게 웃은 제노가 한 발자국 동혁의 앞으로 다가섰다. 주춤 물러서려던 동혁이 간신히 중심을 잡고 제노의 시선을 피했다.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깝다. 키도 품도 그렇게 많이 차이 나지 않았으나 어쩐지 압도된다. 맹수 앞에 선 소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동혁이 최대한 야트막하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먼저 말했으니 너도 알려주어야지. 네 이름은 무엇이냐? 그 다음 이어진 물음은 동혁의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하기에 충분했다. 동혁이 고개를 더더욱 푹 수그렸다. 턱이 가슴팍에 닿을 것 같았다. 수없이 연습했던 대답이 목에 걸려 잘 나오지 않았다.

“성은 곡이옵고, 호는 득오라 하오며, 이름은,”

“나는 네 이름을 물었는데.”

누가 네게 그리 소개하라고 가르쳐 주었어? 

공기가 언다. 동시에 제노가 발검했다. 캉,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낭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검날이 다가온다. 순간 눈앞이 아찔한다. 시야가 점멸하는 것을 느끼며 동혁이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움직이는 것을 채 다 보지도 못했는데, 어느새 목에 칼등이 와 닿아 있었다.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아래로 뻗어내려간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까와는 격이 다른 공포다. 이 어린 화랑의 검은 죽이려는 마음 없이도 죄인 하나쯤은 가볍게 베어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변명할 생각도, 더 연기할 생각도 못 한 채로 저를 멍하니 쳐다보는 동혁의 망연한 시선을 마주하던 제노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눌러참으며 일부러 표정을 싸늘하게 굳혔다. 

동혁이 멍하니 제노를 바라보다, 앞뒤 따질 것 없이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듯 납작 엎드렸다. 어째 몸을 낮추는 동작이 자연스럽다. 덜 자란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리는 것을 내려다보던 제노가 곧은 눈썹을 찡긋했다. 물론 이름을 속이고 선문을 넘은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법도대로라면 딱 죽지 않을 정도까지만 두들겨 맞고 선문 밖으로 내쫓길 터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보아하니 이 녀석이 잘못한 건 아닌 듯싶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 능력껏 덮으면 해결될 텐데. 

“…….”

거의 죽을 죄를 지은 것마냥 겁먹었잖아. 선은 고우나 노동의 흔적이 뚜렷이 남은 마디 굵은 손이 바닥을 짚은 채 어쩔 줄 모르고 주먹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하는 것이 꽤나 안쓰러웠다. 제노가 한 발자국 저벅, 내딛자 동혁의 몸이 흠칫 튀었다. 곧 닥쳐올 상황에 대한 대책 없는 막막함에 곧 동혁의 눈가가 축축해졌다. 이대로 죽는 건가. 그래, 사실 품 없는 천것 따위 언제 어떻게 죽여서 묻어도 뒤탈이 없을 터였다. 

유골무죄, 무골유죄. 6두품 귀족인 우영의 부모님과 우영은 어떻게든 화를 면할 것이 뻔했지만, 그 죄를 고스란히 제가 떠안을 것 또한 자명했다. 그 댁 대감님은 제 아들과 내가 꽤나 오랜 벗이라는 걸 아마 몰랐던 모양이지. 제 머리 위에서 제노가 약올리듯이 즐겁게 건넨 말 한 마디에 한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아, 우리 도련님은 왜 이렇게 친우가 많으실까. 내도록 글공부 빠지고 저자로 나돌아 나만 혼나게 만드시더니, 여기저기에서 사람만 사귀고 다니셨나. 어디로 내뺐는지도 모를 도련님이 밉고 분했다. 동시에 눈앞에 선 화랑의 처분이 두려웠다.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지더니 곧이어 턱선을 따라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열셋 무렵에 대감마님께 혼이 나고 대문 밖으로 쫓겨난 뒤론 처음 우는 것 같은데. 실없는 생각이 공포로 멈춘 머릿속에 스쳐 지났다.

“해서, 꽤나 잘 숨기고 들어온 그 이름은 무엇이더냐?”

“만랑…….”

죽여주십시오. 사정없이 떨리는 물기 가득한 목소리에 제노가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설마 우나. 시커먼 사내놈이. 당황에 잠시 굳었던 제노의 입매가 이내 다정하게 풀어졌다. 하기사 제 자리가 아님을 뻔히 알고서 이런 곳에서 버티느라 마음고생깨나 했겠구나. 조금 놀려 주려 했을 뿐인데. 도로 납검한 제노가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일어나, 하고 다정히 말을 건네자 억눌린 울음소리가 약간 커진다. 이런, 역효과가 났네.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인 제노가 동혁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가, 에이, 하고 그대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격식 따위 차리지 않는 모습에 놀란 동혁이 잔뜩 벌개진 젖은 눈으로 제노를 올려다봤다. 제노가 큰 눈을 휘도록 접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이 정도 했으면 날 좀 봐주거라. 검도 넣었는데.”

“아…….”

동혁이 황급히 고개를 내렸다가, 제노의 말이 걸리는지 머뭇거리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흙먼지로 엉망이 된 낭도복의 소매로 얼굴을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는 손길이 다급하다.

“넌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소인 올해로 열여덟입니다.”

“주인 대하듯 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나도 올해로 열여덟인데. 터울없는 사이에 그렇게까지 굽히고 낮출 필요는 없지. 이젠 숫제 동생을 어르는 말투다. 동혁이 후 후 하고 짧게 숨을 내쉬며 울음을 가라앉혔다. 윗사람에게 달래지는 것이 오랜만이라 그런지 자꾸만 마음이 울렁였다. 적어도 쫓겨나거나 큰 벌을 받지는 않을 것 같다는 확신 때문인지, 다행스런 마음에 자꾸만 눈가가 뜨거워졌다. 더 이상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해 참고 있는 동혁을 눈치챘는지 말없이 잠시 기다려준 제노가 손을 뻗어 푹 수그린 동혁의 머리통을 가볍게 토닥토닥 두드렸다. 

“내 친우의 행보는 천천히 듣자꾸나. 알 만하다마는.”

“예, 만랑.”

“뭐 어찌 되었건 간에.”

그러고 있지 말고 일어나자. 원 안에는 생각보다 눈이 많아. 제노가 읏차,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탁탁 털고는 동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침을 꿀꺽 삼킨 동혁이 급히 흙 묻은 제 손을 옷에 문질러 닦고는 조심히 제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제노가 동혁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는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달고 들어온 가짜 이름과 참 어울리지 않는 얼굴이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것이니, 답해 봐. 네 이름은 무엇이냐?”

친우의 이름으로 생판 다른 사람을 부르는 건 아무래도 싫어서 말이지. 너도 불편할 테고. 머뭇거리던 동혁이 옷자락을 꾹 쥐었다. 힘이 들어가다 말고 풀린 손끝이 바람에 스치듯 툭 떨어졌다. 제노가 고민하는 동혁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다 말고 가볍게 입술을 적셨다. 

기실 이 애를 우영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싫다기보단 우영의 이름으로 이 애를 부르는 것이 싫다. 사람이 났으면 붙여진 이름이 있을진대, 제 이름으로 불러줘야지. 그렇지만 개똥이라던지 돌쇠라던지 하는 지나치게 어울리잖는 이름이 들려온다면 새로이 이름을 지어 붙여줄 생각이었다. 마른침을 삼킨 동혁이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소인, 아니 저는 이가 동혁입니다.”

잠시 가만히 동혁, 동혁 하고 곱씹던 제노가 오, 하고 감탄하더니 또 푸스스 웃었다. 동혁이 고개를 도로 숙였다. 이유 모를 부끄러움이 밀려와서였다. 그리 우스운 이름은 아닐 터인데. 왜 웃으시지. 하긴 이 어린 화랑은 지위와 어울리잖게 유달리 웃음이 많은 듯도 했다. 때마침 한층 들뜬 듯한 제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름자는 무어로 쓰느냐.”

“…….”

천것이 무슨 자씩이나 쓰겠습니까. 말이 입안에 턱 걸려 나오지 않는다. 하찮은 핏줄을 타고난 이상 윗분들이 불러 주는 것이 이름이다. 그 뜻 따위를 알고 살아왔을 리 없었다. 제노는 무어라 말하려다 도로 입을 다무는 동혁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동녘 동에 빛날 혁 자를 쓰면 되겠다.”

“예?”

“네 이름. 자가 없다면 이제부턴 그리 하자. 급하게 떠올린 거긴 한데……. 지어 놓으니 잘 어울리네.”

피부가 짙은 것이, 뜨는 태양을 많이 보고 자란 듯해서.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떨어진 꽃잎이 바닥을 구르다 발등을 간지럽혔다. 다리를 타고 올라온 봄기운이 동혁의 얼굴에 열꽃을 피운다. 가슴께와 명치의 중간 어드메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맺히는 기분에 동혁이 어금니를 물었다. 다만 이번엔 시선이 곧다. 멍한 눈으로 제노를 바라보던 동혁이 눈을 끔벅였다. 제노는 그저 희고 곱고 뼈대 짙은 얼굴로 멀거니 웃고만 있다. 짙은 눈썹이 휜다.

동이 트는 것을 많이 보고 자라긴 했지. 새벽같이 일어나 세숫물을 길고 도련님 조반상을 들이고. 손이 부르트도록 설거지를 끝내면 대감마님의 곁에 붙어앉아 먹을 갈고 붓을 씻고 종이를 말렸다. 실수라도 할라치면 머리 위로 곧장 불호령이 떨어져 내렸다. 오래 무릎을 꿇고 있느라 쥐가 난 탓에 마루에서 마당으로 내려서다 넘어져 들고 있던 연적을 깨뜨린 날엔 무릎에서 흐르는 피를 닦지도 못하고 회초리를 맞았다. 그러니 뜨고 지는 해가 다 무슨 소용이었겠어. 하루는 그저 하루일 뿐,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지도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 뙤약볕에 김매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짙게 탄 피부를 갖게 된 것은 꽤나 억울했으나, 저 스스로의 용모 따윈 돌봄의 영역 밖이었기에 그저 흔하디흔한 노비새끼 꼴이라 자조하고 넘겼을 뿐이었다. 헌데.

“마음에 들어?”

제노가 묻더니, 그 뒤에 동혁아. 하고 힘줘 덧붙였다. 동혁이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깊게 끄덕이며 낭도복 소매 속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어쩐지 초라한 제 이름에서, 물 위에 비칠 때마다 비웃었던 제 까무잡잡한 얼굴에서 이른 새벽의 내음이 났다. 


“아니, 다시.”

어물쩡 가면 옆구리가 빈다. 더 돌려.

턱에 고인 땀이 수련장 흙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손목이 저릿저릿하고 허벅지 근육이 경련한다. 숨을 짧게 끊어 내쉰 동혁이 칼자루를 바투 쥐어 잡고는 제노가 가르친 동작을 그대로 따른다. 앞꿈치가 춤추듯이 바닥을 차고 오르자 몸이 허공에서 날렵하게 한 바퀴 돌았다. 목검이 둥글게 허공을 가르더니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연습용 목석에 그대로 가 박혔다. 손목을 타고 충격이 그대로 전해져 온 탓에 순간 검을 놓친 동혁이 슬쩍 제노의 눈치를 보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잽싸게 도로 주워들었다. 정작 제노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서 손목 괜찮느냐? 하고 걱정 섞인 물음을 툭 던졌을 뿐이었다. 

일주일 남짓 되는 시간 동안 동혁은 제노에게 붙들려 수없이 기본기를 다졌다. 검을 잡는 법, 손목에 힘을 주는 방식부터 베고 찌르는 기본 검술까지를. 이 기묘한 개인 교습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의문을 갖게 했는데, 가르치는 것들이 낭도로 입문 허가를 받은 가문의 자제라면 기본적으로 알았어야 할 것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랬다. 이제 막 입문한 새내기 낭도가 화랑에게 홀로 가르침받는 건 기대하기조차 어려운 일임은 당연했다. 게다가 동혁은 낭도원에 들기도 전에 품이 없다는 사실이 암암리에 소문난 상태였기에 대련만 붙으면 제대로 쓴맛을 보여주겠다 벼르고 있는 또래 낭도들이 많았다. 그러니 수백 명에 달하는 낭도들의 주인인 죽만랑이 개인 수련 시간마다 동혁만을 홀랑 빼내 데려가는 것은 낭도원 내외에 적잖은 불만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작 당사자인 동혁의 심중엔 별 생각이 없었다. 처음에야 머리가 복잡했지만 다음 날부턴 쌔가 빠지게 구르느라 그런 생각도 할 틈이 없었다. 매일매일 온몸의 근육이 뭉쳐 죽을 맛이었지만, 의외로 물 길기 먹 갈기를 비롯한 수많은 잡일로 단련된 팔다리에 검술이 잘 붙어 배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조금 쉬었다 하자. 검 놓고 이리 와."

낭도원 뒷마루에 걸터앉아 옆자리를 두드리는 제노에, 곧장 발치에 목검을 내려놓은 동혁이 쫄래쫄래 그쪽으로 다가갔다. 제노와 조금 거리를 두고 조심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동혁이 옷소매를 늘여 온 얼굴과 목덜미에 비 오듯 흐른 땀을 눌러 닦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군데군데 구름이 핀 푸르고 높은 하늘이다. 그 사이를 가르듯 커다랗게 드리워진 나뭇가지에는 만개한 목련꽃과 시들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꽃잎들이 섞여 매달려 있다. 바야흐로 봄의 한중간이다. 눈을 반쯤 내려감고 햇볕을 받던 제노가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툭 물었다.

“너는 어떤 봄꽃이 가장 좋아?”

“저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더냐?”

되묻는 말에 마디마디마다 쿡쿡대는 웃음기가 배어나온다. 머쓱하게 아, 하고 입을 다문 동혁이 인중을 늘려 입술을 말아물었다. 화랑과 낭도 사이에 나오기에는 어색하기 그지없는 질문이다. 민망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동혁이 머뭇머뭇 답을 내놓았다.

“저는……, 벛꽃 좋아합니다. 비처럼 흩날리는 게 좋아서.”

근데 낭도원엔 벚꽃이 그렇게 많진 않더라구요. 제노가 새삼스런 눈으로 낭도원 돌담을 둘러 심겨진 조팝나무와 귀퉁이마다 크게 드리워진 목련을 한 바퀴 휘 둘러보았다. 어쩐지 낯이 뜨거워진 탓에 동혁이 급하게 되물었다. 그럼 랑께서는 어떤 걸 좋아하시는데요? 같은 질문이 돌아올 줄 몰랐던지 살짝 놀란 눈으로 동혁을 돌아본다. 또 낯이 뜨거워지는 기분에 동혁이 시선을 피하며 두어 번 머리를 털자, 제노가 눈을 두어 번 끔벅이더니, 웃으며 한쪽을 턱짓했다.

“나는 저게 좋다.”

“목련이요? 왜요? 금방 지잖습니까.”

“그래서 좋아해.”

필 때 크고 아름답고 고고하게 피었다가 한 번에 가는 꽃이잖아. 백목련도 자목련도 전부 좋아. 그러나 사실 전부 핑계고,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봐온 봄꽃이 목련밖에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지. 제노의 목소리가 가볍게 봄바람을 타고 날았다. 동혁이 제노를 흘끔 돌아다보았다. 

자색과 청색의 의복, 팔목을 동여맨 먹색의 띠. 깃 달린 관으로 머리를 틀어올려 고정한 화랑의 복색. 저자의 뭇 화도에게 화랑을 그리라면 아마 망설임없이 저 모습을 그릴 것이다. 화랑의 정복이 처음부터 입고 태어난 것마냥 잘 어울리게 되려면 얼마나 어렸을 때부터 검을 쥐었어야 했을까. 어쩐지 제가 평생을 두고 모셔 온 도련님을 보는 기분이다. 도로 시선을 돌리자 목련 꽃송이 하나가 때맞춰 툭 떨어져 내린다. 날씨 한 번 좋네. 중얼거리던 동혁이 순간 흡, 하고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놀라 돌아보자 제노가 옆구리를 쿡 찌른 검지손가락을 그대로 세운 채로 짐짓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보면 모르는 사람인 줄 알겠구나, 아주.”

나랑 나란히 앉기가 불편한가……. 서운한 기색을 담은 제노의 물음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혁이 냉큼 옆으로 한 엉덩이 옮겨 앉아 제노에게 몸을 붙였다. 에이 아닙니다, 좁아 불편하실까 봐 그랬죠. 싹싹하게 덧붙이는 변명은 덤이었다. 되레 당황한 제노의 손이 허공을 배회하다 멋쩍게 무릎 위로 돌아갔다. 예의며 법도를 차려 가며 대화하기엔 동혁이 너무 재재발랐다. 과히 깍듯해 문제였다. 자세를 낮추는 버릇이 몸에 밴 채로 어찌 선문 안에서 귀족인 척 지내려고 했는지 모를 노릇이다. 대충 나이가 맞으니 이게 어떤 자린지도 모르는 아이를 밀어 넣었을 거란 제노의 추측은 날이 갈수록 확신이 되어 갔다. 

제노가 동혁의 오른손목을 잡아 들어올렸다. 저항 없이 딸려온 잔흉터 많은 손에는 노동의 흔적이 여실했으나, 검자루 쥐는 모양으로 배겼어야 할 굳은살은 없었다. 최근 들어 혹사당한 그 자리에 물집들이 이제야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터졌다가 도로 아무는 중이었다. 애쓴다 싶은 마음에 제노가 투박한 손끝으로 상처를 살살 매만졌다. 살짝 쓰라린지 동혁이 손끝을 파르르 떨었다.

“일전에 검을 잡아 본 적 없는 건 알 것 같고.”

“그, 도련님 심부름하느라 몇 번은 만져 봤는데요.”

“쥐고 휘둘러 본 거랑 같으냐, 그게.”

“랑두 참.”

슬쩍 농담을 찔러 넣었다가 단번에 막힌 동혁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당연히 쥐어 본 적 없죠. 저 같은 것이 함부로 칼 만지면 경을 칩니다. 즐거운 듯도, 가벼운 듯도 한 목소리가 가만 흘러나와 공중에 부유한다. 동혁의 시선이 닿는 곳을 바라본 제노가 푸른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노려보며 불퉁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뭐 어때서. 그 말엔 옆얼굴에 의문스런 시선이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한숨을 삼킨 제노가 입을 다물었다.

제노도 알았다. ‘저 같은 것’이란 말이 얼만큼 큰 의미를 가지는지. 이 애가 천출이라는 걸 알아서, 볼멘소리로 건넨 억지 대꾸 말고는 할 수 있는 대답이 딱히 없었다. 어디 검뿐이랴. 세필붓을 쥐거나 책만 한두 장 넘겨도 혼이 났겠지. 제 능력을 가늠할 수도 없게, 단 한 식경도 귀히 살아보지 못할 핏줄로 태어났을 테니까. 

“허면 학문은. 좀 배웠어?"

제노는 그걸 알면서도 기어이 물었다. 누굴 향하는지도 모를 오기였다. 예? 하고 난처히 되물은 동혁의 귀가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저는 하늘 천 따 지 말곤 쓸 줄 아는 글자가 없습니다, 만랑. 쭈뼛거리며 내놓은 대답에 제노가 여직 잡고 있던 오른손을 놓아주곤 동혁을 돌아보았다. 놓여난 손으로 머쓱하게 머리를 긁던 동혁이 빤히 저를 바라보는 제노를 슬쩍 곁눈질했다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피했다. 아직은 어색한 것이다. 꼬박 일주일을 구슬땀 흘려 가며 함께 굴렀는데도. 날 때부터 제가 품고자 한 이에게서는 어렵잖게 사랑이나 충성 같은 것들을 받아내며 살아온 제노에게 그 사실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괜히 입술을 한 번 물어 적신 제노가 냅다 손을 뻗어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다짐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금방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보니 곧잘 따라하던걸.”

손바닥 아래에서 몸이 굳는 게 느껴진다. 제노는 개의치 않고 박박 헝클었다. 우리 우선 천자문을 떼자. 그 다음에 효경을 떼고, 그게 제일 기본이니까. 그리고 논어를 배우면 되겠다. 그 다음에야 선사를 펼쳐볼 수 있겠네. 가만 손길을 받고 있던 동혁이 이내 허리를 슬쩍 펴고 고개를 젖혔다. 어째 쓰다듬기 수월하게 만들어 주는 모양새다. 제노의 둥근 눈이 이채를 띠었다. 땀이 식어 말개진 까무잡잡한 얼굴에 민망한 표정이 슬금 떠오르는 모양이 귀여웠다. 처음에야 잔뜩 겁에 질린 새앙쥐 같았지, 이젠 숫제 커다란 강아지다. 매순간 바뀐 주인의 눈치를 보지만 온기를 거부하지는 않는 어린 개. 눈이 순한.

“저는 잔눈치만 좋지 머리 쓰는 건 영 별롭니다. 대감마님 글 쓰시는 것만 딱 붙어앉아 몇 년을 도왔는데 아무 글자도 기억 안 나는걸요.”

“도와줄게. 그러면 되잖느냐. 사람은 공부하면 늘게 되어 있다.”

“개도 삼 년을 귓등으로 들으면 경을 읊는다던데. 난 글렀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거리한 것치고는 지나치게 솔직하다. 제노가 결국 으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몸이 옆으로 넘어간다. 격한 반응에 파드득 놀란 동혁이 거북이처럼 목을 오그렸다. 한참을 웃음끝이 남아 끅끅대던 제노가 눈물을 닦으며 상체를 일으키곤 억울하단 듯이 동혁의 등을 툭 쳤다. 

“아까부터 왜 자꾸 그렇게 놀라. 내가 잡아먹는다더냐?”

“아니, 별것도 아닌 것에 자꾸 그러시니까요!”

저야말로 특별히 재미난 소리를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동혁이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것치고 기분은 나쁘지 않았는지 얼굴이 좀 벌개져 있었다. 이건 뭐, 속내가 물처럼 투명하게 읽히는 게 다섯 살도 아니고. 

“알았다, 알았다. 적당히 하마.”

달래듯 제노가 고개를 기울인다. 어깨에 가만히 실려 오는 묵직한 무게를 감각한 동혁이 다시금 굳었다. 가만 하늘을 바라보던 동혁이 이내 눈을 감는다. 기대 있는 왼쪽은 감히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동혁이 오른손을 들어 제노 몰래 손등으로 양볼을 식혔다. 턱까지 숨이 차오르도록 검을 휘두르고 난 뒤 땀이 마를 정도의 시간이 지났건만, 왜 아직도 열이 올라 더운 것 같은지 모를 노릇이다. 역시 쓸데없이 예를 갖추느라 겹겹이 껴입은 낭도복 때문인가. 아니면 혹시. 

동혁이 잠시 눈을 떴다가, 곧바로 각막을 찌르고 들어오는 봄의 햇살에 도로 눈을 감았다. 날이 좋다, 그치. 나른한 제노의 목소리가 왼뺨에 울렸다. 눈만 굴려 흘끗 제노를 내려다본 동혁이 제노의 머리통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어깨에 힘을 주었다. 말투는 잔뜩 어른스러웠으나 맹하니 눈을 감은 얼굴은 오히려 저보다도 더 아이 같았다. 볕을 받은 얼굴이 서서히 뜨뜻하게 달구어진다.


동혁은 무얼 외우는 데에는 정말로 소질이 없었다. 제노는 그 뒤로 거의 매일 동혁을 붙잡아 앉혀 놓고 붓을 들렸다. 덕분에 낭도원 뒤편의 연못 앞 자그마한 누각들 중 하나에는 매일 두 사람분의 다탁과 문방사우가 정갈하게 차려졌다. 일주일이 지나고, 또 일주일이 지나자 이제 동혁은 하늘 천 따 지 가마솥에 누룽지를 겨우겨우 벗어나 집 우 집 주 자까지는 쓰고 읽을 줄 알게 되었다. 여정이 길다, 여정이 길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먹을 갈고 붓에 물을 먹이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제노보다 동혁이 몇 배로 능숙했다. 동혁은 힘이 잔뜩 들어간 탓에 덜덜 떨리는 손목을 다른 손으로 받쳐 가며 한 자 한 자 그려 나갈 때마다 스스로의 모자람에 연신 감탄했으나 제노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미련하달 정도로 동혁의 글공부에 달라붙어 동혁보다 더 열심이다. 

집 우 자로 시작하는 단어를 읊고 하나하나 써 줘 가며 기어이 깨끗한 다섯 장의 교본을 완성시킨 제노가 결국 일어섰다. 시간이 다 된 탓이다. 애초에 열 명의 화랑들이 받는 교육은 수천 명 낭도들의 훈련보다 몇 배는 매섭고 혹독할뿐더러, 수련 시간이 아니래도 화랑이 제 낭도원에 이리 오래 있는 일도 흔치 않았다. 개중 막내인 제노라도 다를 바는 없을 터다. 누각 계단에 쭈그려 앉아 손장난을 치던 아이가 제 주인이 일어나는 소리를 들었는지 폴짝 뛰어올라와 다가왔다. 제노가 풀어두었던 제 검집을 도로 허리춤에 차는 동안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는 손길이 귀엽고 꽤나 야무졌다. 

이름이 아마 서운이라고 했던가. 많이 쳐 줘 봐야 열 살 언저리다. 낭도복은 아니나 노복의 차림도 아닌, 그저 흰 무명옷에 푸른 깃을 덧댄 정갈한 의복이다.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져 동혁이 서운의 하는 양을 가만 쳐다보고 앉아 있자, 아이의 귓가가 점점 발갛게 달아오른다. 눈치챈 제노가 눈을 홉떴다. 

“야, 너 이놈. 집중 안 해?”

“아이고, 예. 합니다. 씁니다, 써요.”

동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붓을 들었다. 이젠 숨길 생각도 않는다. 그 모양이 우습고 귀여워 제노가 입술을 다물어 웃음을 잘랐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 종이에 흰 곳이 없게 채워 연습해야 할 것이다. 붓 쥐는 근육부터 길러야 하니 많이 쓰는 것 말곤 방법이 없겠지? 꽤나 진지하게 을러붙이는 제노에게 덩달아 긴장한 표정으로 옙, 하고 대답한 동혁이 여봐란 듯이 붓을 들었다. 부드럽게 털을 골라 자신감 있게 종이 위로 옮기자마자 손이 떨려 점점이 먹물이 튄다. 아, 진짜. 울상이 된 동혁을 보고 결국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한 제노가 푸하하 웃으며 이마를 짚었다. 

천천히 해, 천천히. 무어가 그리 급해서 서두르니. 나는 아마 저녁때가 다 되어야 올 것이다. 등 돌려 누각을 걸어 내려가면서도 제노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녀오십시오 하고 시무룩하게 하직한 뒤로 동혁은 입까지 앙다물고 집중하고 있었다. 너른 낭도원 뒤뜰을 가로질러 풍월각으로 향하며 제노가 조용히 입꼬리만 끌어당겨 웃었다. 예의 그 얼굴로 눈이 휜다.

제자를 두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본 일이 잦았다. 지금도 서운이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을 지도하고는 있으나 아무래도 신분 때문에 제대로 된 가르침을 줄 수는 없었던 터였다. 오로지 나만이 알고 있는 것, 내가 체득한 것을 넘겨줄 수 있는 제자를 두면 어떨까 하는 마음. 낭도들은 제 화랑을 겁내기 바빴고 유일하게 하나 있는 친우라는 놈은 가르침 따위를 받을 놈이 아니었다. 그러니 새로운 것이다. 처음 동혁을 보았을 때부터 제자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젠 어쩐지 욕심이 생겼다. 무예는 마른 면포마냥 가르치는 대로 빨아들이고, 서툰 글월이나마 있는 힘껏 배워나가는 녀석이 기꺼웠다. 제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오늘치의 교육이 끝나고 나면 동혁에게 줄 것이 있었다. 지난번에 저자에 사람을 보내어 사 두었던 것이다. 

그래, 분명 그랬었는데. 

“입이 두 개여도 할 말이 없을 테지.”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부복한 두 사람을 싸늘하게 베고 지난다.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낸 두 낭도가 감히 대답도 하지 못하고 머리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누각 계단 앞에 선 제노가 제 발치에 납작 엎드린 두 명분의 등판을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무표정한 얼굴을 가장하곤 있었으나 힘이 들어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다른 손으로 꾹 눌러내린 채였다. 제노는 오른손에 들린 종이를 다시금 들여다본다. 조금 전 시시덕대며 누각 계단을 내려오던 두 놈을 마주치자마자 고스란히 압수한 것이다. 엉망으로 구겨진 종이 위에는 밟힌 발자국이 선명했으나 삐뚤삐뚤한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예쁘지도, 일정하지도 않은 굵기로 한 획 한 획 정성스레 쓰여진 글자들을 묵묵히 훑어본 제노가 눈을 돌려 내려다봤다. 할 수만 있다면 저 위선적인 두 개의 등 위에 똑같은 발자국을 남겨 주고 싶었다. 

“그래, 뭐가 모자라서 이것마저 빼앗아 가져가려 했을까.”

“…….”

“저 아이의 노력이 우습더냐.”

아니지. 미숙한 아이를 데려다가 가르치는 내가 우스운 거겠지. 허면 가져가 어찌하려 했느냐. 네들끼리 돌려 보며 비웃고. 폄하하고. 그리하여 종내엔, 내 흠이라도 잡을 셈이었더냐. 차가운 목소리가 누각 앞마당을 울리며 무겁게 내려앉았다. 엎드린 채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그 얼음장 같은 질책을 받아내는 두 낭도는 이제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못난 놈들. 콱 쏘아붙인 제노가 차분히 호흡을 고르고 손에 들린 종이를 조심히 펼쳐 두 번 접었다. 연서를 챙기듯 품속에 소중히 갈무리해 넣고는 판결한다.

“국선께 가라.”

무슨 짓들을 하였는지 상세히 고하고 벌을 청해. 내리시는 처분은 군말 없이 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설사 도복을 벗고 이곳에서 내쳐지는 일일지라도. 말을 씹어뱉은 제노가 휙 등을 돌렸다.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분노로 점철되어 거칠었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낭도원의 훈련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간이었으니까. 지나가다 홧김에 그랬든 작정을 하고 왔든 시비를 걸었을 테고, 또 그놈은 아무 대거리도 하지 않았겠지. 혹은 대들었다가 꼼짝없이 행패를 당하였겠지. 그럼에도 돌아온 나를 보면, 아마 그놈은. 생각이 이어질수록 제노의 미간에 패인 골이 점점 깊어졌다. 동혁이 제 얼굴을 보고 처음 내어놓을 말이 무엇일지가 뻔히 그려져서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올라갈수록 발이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소도가 경솔했습니다, 만랑.”

“…….”

일어나라니까. 나직하게 이른 제노가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정말이지 예상을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누각 마루 위에 엉망으로 엎어진 다탁 앞, 온통 먹물 범벅이 된 바짓단을 쥐어 잡고 표정 없이 꿇어앉은 동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붓은 누가 잡고 밟은 듯 아예 절반으로 꺾였고, 벼루에는 금이 갔다. 한켠에 쌓여 있던 새 종이들은 찢기거나 구겨졌다. 제노가 아무 말 없이 어지럽혀진 누각 안을 천천히 뜯어볼수록 동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 검게 물든 낭도복 바지가 온통 주름졌다. 제노는 나직이 반복했다. 일어나. 분노를 참으려 어금니를 짓씹은 탓에 목소리가 안으로 깊게 잠겨 들어간다. 

동혁은 일어나는 대신 손을 뻗었다. 먹물에 끄트머리가 젖은 채 엉망으로 바닥에 흩어진 제 연습 종이를 집어 들더니, 그것으로 온 바닥에 흥건한 먹물을 움킨다. 두 시진을 꼬박 연습했을 글씨들이 순식간에 검게 물든 종이 안으로 사라졌다. 결국 부글부글 끓는 속을 참아내지 못한 제노가 성큼성큼 다가가 동혁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손목을 덥썩 낚아채자 그제야 당황한 눈으로 올려다본다. 죄송해요. 오시기 전에 다 치워 놓으려고 했는데. 제노가 이를 악물었다. 

“누가 너보고.”

누가 너보고 여길 닦아 치우래! 

기어이 노성이 터져 나왔다. 동혁이 멍하니 제노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 건조하고 깨끗한 눈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 제노가 잔뜩 속상한 얼굴로 동혁의 손아귀에서 종이를 잡아뺐다. 엉망으로 검게 젖은 종이에서 튄 먹물이 제노의 푸른색 무도복에 점점이 떨어졌다. 만랑, 옷이! 다급하게 만류하는 동혁의 손목을 끌고 그대로 그 자리에서 일으켜 세운 제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갈했다.

“서운아!”

아이들 데리고 전각을 정리하거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노의 등 뒤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울린다. 서운을 필두로 키가 제 가슴께나 올 법하게 작은 아이들 너덧이 재재바르게 올라와 훈련된 군대마냥 전각의 한 구석씩을 맡아 자리잡고는 엉망이 된 마룻바닥을 야무진 손길로 정리하기 시작하는 광경. 동혁이 멍하니 아이들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고 섰다가 다시금 제 손목을 꾹 하고 쥐어 오는 압력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만랑. 잡힌 손목이 저릿하니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째 입이 딱 붙어 버린 것마냥 떨어지지 않았다. 

“날 돕는 녀석들이다. 자라 장차의 화랑을 위한 낭도가 되겠지.”

“아…….”

“나를 돕고, 나를 모시는 내 낭도들을 돕고. 내가 부탁하는 일을 들어 주는 아이들이야. 본가에서 내가 직접 데려왔다. 궂은 일을 해주러 왔으나 밤마다 글공부를 해. 주에 한 번씩은 검을 쥐고 검술을 배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아듣겠어? 나직하게 찔러 오는 질책에 동혁이 입을 다물었다. 그런 게 아닌데.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닌데. 그냥 나도 모르게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비단방석보다 나뭇바닥이 무릎에 짓눌리는 감각이 더 익숙해서 그랬던 것뿐인데.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글과 무예를 배우면서, 제 말뜻을 알겠냐 되짚듯 묻는 제노를 보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속상하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가볍게 스러지는 말끝에, 거기 묻어나는 날숨에 다 참지 못한 화가 뚝뚝 뭉쳐 흐르는 듯했다. 

“동혁아.”

여기는 그런 곳이다. 하물며 네가 무릎 꿇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그런데 왜 자꾸 네가 너를 그렇게 다뤄. 제노의 손끝이 먹물 자국 남은 동혁의 손마디를 가만히 문질렀다. 마디가 굵고 뼈대가 얇은 손가락. 동혁이 잡힌 손을 내려다보며 침묵한다. 다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헷갈렸던 탓이다. 그저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제노를 아주 많이 화나게 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억울하다 떼쓸 수도 없다. 제가 어디 그럴 위치던가. 머릿속에서 아주 전쟁이 일어나는 모양새로 제게 손을 잡힌 채 가만 서 있는 동혁을 쳐다보던 제노가 한숨을 끊었다. 평소엔 능글맞게 말만 잘 하던 놈이. 저 머리통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눈에 훤히 보일 만큼 빤했다. 동시에 그래서 답답했다. 네 속을 어찌 모르겠냐만. 아니지,

“네 속을 어찌 알겠냐마는.”

고개 좀 들어. 죄인처럼 굴지 말고.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씁쓸하고 다정한 어조에 동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순간 화랑의 머리 뒤로 지는 노을이 산산이 갈라져 빛살처럼 쏘아진다. 동혁이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외려 눈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주황빛이다. 놀랄 만큼 따뜻하고, 눈이 멀어 버릴 만큼 밝은. 그걸 가로막고 선 인영이 어둑하게 웃는다. 고운 뺨이 호선을 그려 솜털이 햇빛을 머금는다. 대뜸 화내서 미안하다고, 표정 풀고 환복하러 가자고 달래는 선 부드러운 입술이 그림자에 가려졌다가 또 도드라졌다가를 반복한다. 동혁은 똑똑히 보았고, 그 사실이 숨막혔다. 무얼 보았느냐면.

 무릎 꿇지 않아도 되는 곳. 세상의 색이 모두 죽고 주황으로 화하는 순간에 그곳의 한가운데 서서 마주쳐 오던 크고 올곧은 눈. 태양을 쥔 것 같던 손의 온기. 그 모든 것 때문에 숨이 막혔다. 동시에 황홀이다. 생의 손에서 얼마간 놓여난다. 

날 때부터 건조하고 뜨겁던 눈이 전부 담았다.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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