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랑가 四(完)
동젠
오늘따라 제노는 말이 없었다. 동혁이 연습용 목검을 쥔 손목을 다른 손으로 주무르며 뒤에 서 있던 제노를 돌아보았다. 앞에서는 서운을 비롯한 아이들이 하루의 수련을 마무리하며 나란히 서서 내려치기를 연습하고 있다. 하나, 둘, 붙이는 서운의 구령에 맞춰 목검들이 일정한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땀방울이 턱에 고여 뚝뚝 떨어질 지경으로 열심이다. 평소라면 동혁과 함께 아이들을 살피며 잘못된 자세를 고쳐주거나 한두마디 잔소리를 덧붙였을 제노는 여전히 묵묵하다. 무얼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는 얼굴이 어쩐지 어두워 보여 동혁이 걱정스런 눈으로 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제노를 흘끔흘끔 돌아보았다. 혹시 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습니까? 목까지 차오른 질문을 꿀꺽 삼키고는 신발코로 바닥을 툭 찬다.
“동혁아.”
“예, 만랑?”
동시에 제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불쑥 들려온다. 잡념으로 속이 잔뜩 시끄러운 와중에 부름을 들으니 절로 목소리가 튀었다. 동혁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민망한 표정으로 인중을 늘렸다. 앞에서 아이들은 마구 키득대는데 제노는 웃지도 않는다.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더니 아이들을 한 번 건너다본다. 합, 하고 긴장한 아이들은 다시금 가열차게 내리친다. 앞으로 힘차게 내딛은 오른발들에서 모래 먼지가 훅 피어올랐다.
“다 끝났지.”
“예. 반 각 정도만 연습을 더 시키다 보낼까 합니다.”
“그럼 나와 검을 한 번 맞대겠느냐.”
“지금요?”
제노는 대답 없이 허리춤의 검을 검집째로 들어 지검대적세持劍對賊를 취한다. 두 손으로 자루를 쥐고 옆으로 든 채 한 발을 기울여 딛은, 대련의 시작과도 같은 기본 자세다. 목검을 저만치 던져 치우며 손을 두어 번 휘저어 아이들을 마당 한구석으로 물린 동혁이 두어 걸음 움직여 마당의 중앙을 선으로 삼고 섰다. 허리춤에 찼던 검의 자루를 쥔 동혁이 가볍게 심호흡했다. 검과 검집이 마찰하며 캉,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발검과 동시에 지검대적을 취한 동혁이 마찬가지로 발검하여 검집을 도로 허리춤에 꽂은 제노를 마주 보았다. 진검의 날카로운 검날이 햇빛을 받아 쨍하게 빛났다. 오랜만에 즐거운 구경을 하게 된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옹기종기 모여 섰다.
“랑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합니다.”
“도리어 배우겠다.”
짧은 예가 끝나자마자 제노의 몸이 날았다.
“!”
익숙하다. 눈앞으로 쇄도하는 빛줄기 같은 검. 이걸 내가 어디에서 보았더라. 생각을 이을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오른팔을 휘둘러 그 검을 쳐낸 동혁이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제노가 삼 보를 밟으며 뛰어오른다. 베기와 찌르기가 연속된 동작은 동혁의 머리와 몸통, 목을 차례로 노리고 날아들었다.
“만랑, 만랑.”
아무리 불러도 들리지 않는 듯 제노는 빠르게 밀어붙였다. 캉, 카앙, 캉. 쇠붙이가 불꽃을 튀기며 맞부딪치는 소리가 마당을 온통 울렸다. 온몸의 근육이 달아오르다 못해 주변을 감싼 공기마저 진동하는 듯한 착각이 들어 동혁이 턱이 터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몇 합을 맞추었는지 셀 것도 없었다. 여태 이만큼 피한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더럭 겁이 난 건 기어이 중심이 무너져 오른쪽 무릎을 바닥에 거세게 찧었을 때였다. 금방이라도 목숨을 거둬 갈 듯이 검을 고쳐 드는 제노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몸이 굳었다. 몸이 무너진 동혁의 목을 향해 가차없이 검이 날아드는 순간, 한쪽 구석에 잔뜩 겁먹은 채 뭉쳐 서 있던 아이들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쨍하게 귓속을 파고든다.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동혁이 목에 날이 닿기 직전 바닥을 박차고 몸을 굴려 피했다. 허억, 하고 참았던 숨을 토하자 공포 비슷한 감정이 들이닥친다. 제노의 눈이 무서웠다. 여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열오른 눈이다.
“만랑!”
와락 고함을 지르자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진다. 동시에 검은 더욱 날카롭고 빠르게 날아든다. 동혁은 문득 깨닫는다. 이 대련에서 이제노는 어떤 방식으로든 봐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동혁이 이를 끝까지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제노의 검을 막아낸 동혁이 길게 생각할 겨를 없이 손을 놓았다. 휘두르던 검이 맥없이 뒤로 날아가자마자 원래 제 검이 있었어야 할 자리로 일 보 도약한 동혁이 그대로 제노의 몸통을 향해 뛰어들었다. 두 팔로 목을 휘감아 끌어안는 손길이 다급했다. 안겨오는 무게를 못 이겨 뒤로 두어 발자국 밀려난 제노가 검을 든 채 멈춘다. 동혁이 숨을 몰아쉬며 팔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저보다 조금 작은 동혁의 품 안에 갇히듯 안긴 제노가 천천히 팔을 늘어뜨렸다. 이내 손아귀에 힘이 풀린다. 쇠붙이가 흙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짧게 울었다. 바람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해진 낭도원 마당에 아이들이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삭이는 소리만이 울려퍼진다.
“…….”
“만랑.”
괜찮으세요? 동혁은 조용히 물으며 서운에게 턱짓했다.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 된 서운이 재빨리 낭도원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등을 아이 다루듯 두어 번 토닥이자 이내 몸에 힘을 풀고 품으로 허물어진다. 그제야 맘놓고 제노를 추슬러 안은 동혁이 손바닥으로 제노의 뒤통수를 감싸 어깨에 얼굴을 묻게 도왔다. 마른 입술을 적신다. 두어 번 짧게 숨을 고르고 작게 말을 건다.
“만랑. 대답 말고 들으세요.”
“…….”
“제 심장 소리 들리시지요.”
“…….”
이놈이 진정할 때까지만 좀 안아주십시오. 소도의 실력이 아직도 미천한 탓에……. 당황하여 검을 놓쳤습니다. 몸은 힘들고 마음은 소란한데, 만랑이 달래주시면 다 나을 것 같아요. 제노의 어깨에 턱을 올려둔 채 한 마디 한 마디 느리게 건네며, 동혁이 둥근 뒤통수와 흰 뒷목을 가만가만 도닥거리고 쓸어내렸다. 제노는 한참 돌처럼 굳어 있다가, 머뭇머뭇 손을 올려 동혁의 허리를 쥐더니, 이내 감싸 안고 매달린다. 물병과 따뜻한 물수건을 들고 달음박질쳐 돌아온 서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동혁이 제노를 안은 채 손에 들린 것을 받아들었다. 울음을 거의 다 그쳐 가는 아이들에게 입모양으로 들어가, 속삭인 동혁이 괜찮다는 듯 눈을 한껏 접어 웃어 보인다. 동혁의 눈치를 살핀 서운이 소맷부리로 얼굴을 문질러 닦고는 다급히 나머지 아이들을 챙겨 낭도원 후문으로 향했다. 그 자리에 더 남아 있을 담력도 없었거니와, 동혁과 함께 있는 이상 딱히 제노를 도울 일이 없으리란 걸 알았다.
“자아, 다 진정됐습니다.”
“…….”
“얼굴을 잠시.”
아이들이 전부 낭도원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본 동혁이 몸을 살짝 물려 제노의 어깨를 잡아세웠다. 저항 없이 상체를 세운 제노가 제 얼굴을 물수건으로 부드럽게 닦아내는 동혁의 손길에 눈을 질끈 감았다. 무엇이 그렇게 서운하고 속상한지 입꼬리가 축 처진 채로 이를 악물고 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제 화랑의 얼굴을 천천히 매만지며 동혁이 미간을 좁혔다.
오늘은 제노가 휴가를 받은 지 사 일째 되는 날이었다. 내일 하루는 동혁을 대동하여 저자에 나갔다 오겠노라고 미리 허가도 받아 놓은 터였다. 하여 오늘은 제노의 처소에서 같이 잠들자 약조도 하였는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러실까. 잠시나마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연유를 따져물을 맘은 들지 않았다. 한참을 잠잠하던 제노는 문득 울컥 질타한다.
“국검의 세를 익힐 때 무엇부터 수련하라 했어.”
동혁은 곧장 제노의 얼굴에서 손을 떼고 일 보 물러났다.
“안법眼法입니다.”
“그 다음은.”
“격, 세, 자 순으로 익히라 하셨습니다.”
”다 알면서 그리하였느냐. 상대가 진전살적進前殺賊 삼 보를 밟았으면 너는 곧장 어떤 세를 취하라 했지.”
“……향우방적向右防賊입니다.”
“너는 내가 삼 보를 밟았을 때 무얼 했어.”
“표두압정豹頭壓頂…….”
“실전의 표두압정세는 너보다 힘이 약하고 느린 상대를 제압할 때나 쓰는 것이다. 안법은 고사하고 방법防法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데 어찌 자법刺法을 이어 쓰려 해!”
서릿발 같은 화가 숨통을 누른다. 동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술이나 짓씹었다. 대련 후에 이렇게까지 혼이 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더 서툴렀던 시절에도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진 적은 없었다. 속상함과 서운함이 속에서부터 꾹 밀고 올라왔으나 그보단 걱정이 앞섰다. 누구보다 동혁의 실력을 잘 아는 제노가 아무 이유 없이 이리 모질게 굴지는 않을 터였다.
제노는 바닥에 떨어진 제 검을 들어 납검했다. 가볍게 턱짓하자 아, 하고 정신을 차린 동혁이 날아간 제 검을 주우러 뛰어간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희게 질린 손가락을 두어 번 쥐었다 펴자 그제서야 손이 떨려 온다.
“들어가자.”
툭 내뱉자 곧장 옆얼굴에 닿아 오는 다정하고 걱정스런 시선. 제노는 부러 마주쳐 주지 않고 등을 돌렸다. 허둥지둥 납검한 동혁이 바닥에 떨어진 물병과 수건을 집어들고 재재바른 걸음으로 제 화랑을 뒤따른다. 빈 도원 마당에 때이른 낙엽이 날았다.
제노는 평소와 달리 거칠게 안겨 왔다. 동혁은 제노를 받아 안으면서도 몇 번이고 등을 두드려 가며 숨을 쉬게 해야 했다. 원체 눈물이 없는 제노는 살을 섞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우는 일이 없었다. 대신 습관처럼 숨을 참았다. 동혁은 선 얇고 살 없는 골반을 단단히 쥔 채 움직이다가도 상체를 겹쳐 끌어안으며 몸 아래로 손을 넣어 가슴팍을 토닥였다. 허억, 하고 제노가 숨을 뱉는 소리가 들려오면 몸을 뒤집는다. 싫어, 하고 저항해도 고집을 꺾지 않는다. 얼굴을 보고 싶어요 만랑. 제 얼굴 보기 싫으세요? 어린애처럼 투정 부리며 아래를 꾹 짓쳐 온다.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젖힌 제노는 윽 윽 신음을 먹으며 동혁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오히려 눈에 열감이 몰리는 건 동혁 쪽이었다.
파정은 평소보다 빨랐고 후희는 길었다. 제노는 동혁의 목덜미에 이마를 짓누르며 허리를 떨었다. 동혁은 묵묵히 제노의 등 아래로 손을 넣어 희고 단단한 몸을 끌어안는다. 툭 던져지는 부름.
“만랑.”
“응, 응.”
“제게 숨기는 게 있으시지요…….”
울먹이는 목소리. 숨을 고르던 제노는 문득 올려다본다. 그렁한 두 눈을 마주하고는 곧바로 고개를 꺾는다. 동혁은 밀어내지도 못하고 입을 벌렸다. 치열을 훑어 파고드는 혀를 받아 삼키며 눈을 질끈 감는다. 제노는 동혁의 허리에 제 두 다리를 감아 당기며 뜨끈한 볼을 감싸 쥐었다. 엄지손가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쳐낸다. 그런 거 없어. 잇새로 속삭이는 목소리가 흐릿하다. 어디 닿을 수도 없이 머나먼 데서 오는 것 같다.
동혁은 이제 굳이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훌쩍거리며 제노의 상체를 다시금 끌어안고 눌러내리듯이 바싹 몸을 붙여온다. 뜨거운 살갗이 달라붙는 감각이 생경했다. 어쩐지 더 서글퍼져 무릎을 세웠다. 꾹 박아넣자 달래려던 음절들은 사라지고 으으 하는 앓는소리만 새어나왔다. 손마디가 희게 되도록 동혁의 어깨를 쥐어 잡던 제노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자 다급히 손을 뻗어 머리맡의 창문을 밀었다.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열린 창에서 밤의 찬공기가 훅 밀려들었다. 동시에 입술을 뗀 동혁이 아래에서 헐떡이는 제 화랑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내리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창틈으로 새어든 달빛이 손끝에서 부서졌다.
오랜만에 나온 저자는 예전과 같았다. 장날이 아니었기에 나름대로 한산했고 햇볕이 따뜻해 돌아다니기 좋았으나, 동혁은 저보다 반 보 앞서 걸어가는 제노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 없었다.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 눈물이 터진 것만도 충분히 부끄러웠으나, 그 뒤로 저도 모르게 울컥했던 탓에 제노가 까무룩 기절하듯 잠들 때까지 몰아쳤던 터다. 용서를 구하기도, 그저 뻔뻔히 낯을 들고 있기도 어색하고 민망하기 그지없어 쩔쩔매는데 정작 제노는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동혁아 동혁아 부르며 손목을 잡고 여기저기 이끌었다.
“너 이거 먹어 본 적 있어?”
“앗, 예. 맛있어요.”
“큰 걸로 두 개 주시오.”
동혁이 얼떨결에 제 손에 들린 빈대떡과 제노의 옆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 한 입 크게 베어물려는 것에 기겁을 하고 손목을 쥐어 말렸다. 뜨겁습니다! 귓가로 꽂혀들어오는 외침에 끄트머리에 혀만 간신히 대었다 뗀 제노가 커다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남의 밥그릇에 고개를 박다 들킨 강아지 같다. 동혁이 웃음을 삼키며 포장 종이를 접어 제노의 빈대떡을 조심히 반으로 갈랐다. 쩍 벌어진 튀김옷 사이에서 김이 펄펄 피어나온다.
“이게 속이 정말 뜨거워요.”
“……, 겉으론 전혀 모르겠는데.”
“그러니 조심해야 하는 게지요.”
다음부터 드실 땐 꼭 반으로 접어 드십시오. 동혁은 후후 입바람을 불어 적당히 식힌 제노의 빈대떡을 다시 돌려주고 제 것을 반으로 가른다. 제노는 그 손길을 가만 보고 있다가 손에 들린 것을 살짝 들어 킁킁거린다. 무엇이 들었는지도 잘 알지 못했으나 고소하고 따뜻한 내음이 났다. 아, 여기다 탁주 한 잔 걸치면 딱이겠다. 그렇지요 만랑? 아직 해가 중천인데 그런 소릴. 농담은 설렁설렁 오간다. 제 빈대떡을 한 입 가득 베어문 동혁이 제노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손끝으로 털어 준다. 다정스런 손길이다.
돌아오는 길엔 일부러 먼 길을 택했다. 넓게 노을이 깔린 저잣길을 걸어 선문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도 낭도원으로 향하는 길목에 접어들기 전까지 담벼락을 따라 최대한 뱅뱅 돌았다. 아쉬웠던 탓이다. 그리 매일을 붙어 있었어도 보는 눈들이 많았으니, 온전히 둘이서만 보내는 날이 거의 처음이다시피 했다. 연습용 목검과 목석 따위가 널린 낭도원 마당으로 접어들고, 입구가 먼빛으로 보이기 시작하자 동혁이 먼저 제노의 손을 슬쩍 쥐었다. 혼이 날까 살짝 겁을 먹었는데, 흘끔 넘겨다본 제노는 그저 가만히 웃으며 앞만 보고 있다. 동혁이 제노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꾹 밀어넣어 깍지를 끼며 맑게 웃었다.
“휴가를 무슨 일로 받으셨는지는 몰라도요.”
“응.”
“자주 이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응.”
“어젠 랑께서도 아쉬웠으니까 괜히 그러셨지요. 말씀 없으셔도 저는 다 압니다. 오 일이면 길 줄 알았는데 어찌 이렇게까지 짧게 느껴지는지…….”
동혁이 말을 끊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저만치 가까워진 낭도원 문에 커다란 종이로 방이 붙어 있다. 저자로 나설 때까지만 해도 못 보았던 것이다. 뭐지, 하고 의아해하려는 찰나 제노가 멈춰 선다. 동시에 동혁의 손을 놓는다. 제노를 뒤에 남겨두고 두어 걸음 앞서간 꼴이 된 동혁이 당황한 낯으로 휙 돌아보았다. 제노는 여전히도 웃는 낯으로 앞을 고갯짓했다.
“없던 게 붙었네. 무언지 읽어 줘.”
“아.”
잠시만요, 하고 대답하려는데 심장이 쿵 떨어진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다. 제노를 멍하니 돌아보다 머뭇거리며 걸음을 떼어 걷던 동혁이 저도 모르게 엎어질 듯 뛴다. 담벼락까지 스무 걸음도 안 되는 거리가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시험삼아 여기저기 붙은 글을 읽어보라 하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잖아. 이제 웬만한 글자는 전부 읽을 줄 아니까, 오늘도 칭찬받고 끝날 거야. 별거 아니겠지. 새로이 선문에 드는 이들의 이름자나, 무관직을 받은 랑들에 대하여 내려온 국선의 치하의 말씀이거나, 그럴 것이다. 쿵쿵대는 심장을 붙들고 낭도원 문에 붙어선 동혁이 가장 크게 쓰여진 글자부터 읽어 내려간다.
파병록
남서방 백제의 횡포가 극에 달하여 일곱 성이 함락됨에 대장군과 장군 셋을 배치하여 개중 꼬리부대는 화랑도의 지휘 아래 두니 명받은 바 찬탈된 성과 땅을 되찾고 대승하여 돌아오라 ……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제노가 검집을 들어 커다란 벽보에 나열된 파병 목록을 쭉 훑어내려갔다. 대장군 유신, 장군 진춘, 장군 천존. 그 옆에 씌어 있는 장군 죽지의 이름. 거기에 시선이 가 닿자 동혁의 몸이 짧게 떨렸다. 제노는 머뭇거림 없이 그 아래에 나열된 이름자들을 쭉 훑어내린다. 죽지랑의 아래에 배속된 부대의 군졸들 중 다른 화랑이나 낭도의 이름은 없다.
“출정은 다음 달 초하루다.”
“그러면 사흘 뒤잖아요.”
“출정식은 이틀 뒤야.”
“…….”
“전하께서 검과 전투복을 내리시는 것은 내일이고.”
“……거짓말.”
왜 만랑 이름이 저기에 있어요.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 나왔다. 남방의 일은 끝났잖아요. 왜 또 전쟁입니까? 왜? 다른 이도 아니고 어찌 만랑이. 거기까지 내뱉고는 문득 입을 다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제노의 차례임을 뼛속 깊이 깨달은 탓이다.
“내가 아니면 누가 가겠느냐.”
“…….”
“전쟁에 끝이 어디 있겠어.”
백제는 끊임없이 국경을 들쑤실 거야. 서라벌의 기세가 남서와 북으로 끊임없이 뻗고 있으니 얼마나 신경에 거슬리겠느냐. 놈들이 삼켰다는 일곱 성이라 해 봤자 사실 삼백 리도 안 되는 국경에 걸쳐 있어. 허나 피해는 계속 커질 테고 그걸 막기 위해 가는 거야.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비열하고 치밀하지. 국경의 지세를 활용하는 법도 잘 아는 이들일 거야. 쉽게 보았다가 역풍을 맞았던 지난번의 전투처럼, 이번에도 상상 못 한 부분에서 당할지 모른다. 제노는 문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난다. 벽보의 가장 아래에 찍힌 왕의 금인金印을 향해 짧게 읍한 뒤 돌아선다.
“신라는 대승할 것이다.”
“…….”
“꼬리장군 하나쯤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캉, 하고 발검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볼에 서늘한 기운이 와 닿는다. 제노는 예상했다는 듯 동요 없다.
”저도 데려가십시오.“
“목록에 없는 자를 데려가는 것은 불충이야.”
“저한테.”
아무 말씀도 없으셨잖아요…….
제노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뒤를 돌아보자 검을 겨눈 동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툭툭 끊기는 호흡으로 따지고 든다. 아무 말씀 않으셨잖아요. 같이 가자고도, 다녀오겠다고도, 하다못해 출정하게 되었다는 것마저도……. 아무것도 말씀해 주지 않으셨잖아요. 그러니 데려가십시오. 랑께서는 가시는데 저는 왜 못 갑니까. 저번 남방 출정 때에는 낭도들도 많이 갔잖아요. 저도 데려가세요. 낭도가 아니라 그저 짐을 들고 말을 끄는 종놈으로라도 좋으니, 데려가시란 말입니다.
“동혁아.”
목소리며 손이며 할 것 없이 덜덜 떨고 있는 주제에, 어딜 데려가 달라는 거야. 타박 같은 문장이었으나 말끝이 부드럽다. 동혁은 불에 데인 듯 화드득 놀라며 검의 자루를 두 손으로 바투 쥐었다. 위협하려 겨눈 검답지 않게 목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검날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제노는 한 걸음 성큼 다가섰다. 제풀에 놀란 동혁이 한 걸음 물러난다. 맘먹고 달려들지도 못할 것을, 맘만 급해선. 칼등을 손으로 가만 밀어내며 제노가 쓰게 웃었다.
문득 인기척이 들렸다. 동혁이 화드득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당도하여 지켜보고 있었는지, 훈련복이 아닌 낭도복 정복을 갖춘 소년들 예닐곱이 허리를 깊이 숙여 예를 표했다. 하나같이 어딘가 어두운 표정이다. 제노가 덤덤히 호명했다.
“주경.”
“예, 만랑.”
“낭도가 내 허락 없이 선문 안에서 발검하면 무슨 벌을 받느냐.”
“…….”
“법도대로 답해라.”
주경의 얼굴에 순간 괴로운 표정이 스쳐지났다. 그러나 곧 대답은 흘러나온다. 발검한 것뿐이라면 랑의 처분대로, 다른 이에게 겨누었다면 삼 일의 구금으로 벌합니다.
“나는 검을 뽑으라 허한 적 없다.”
“…….”
“가둬라.”
순간 검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제노에게 달려들려던 동혁의 팔이 거세게 붙잡힌다. 발버둥쳐 보아도 혼자서 예닐곱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우악스럽게 몸을 끌고 가는 손길들에 잡혀 억지로 끌려가면서 동혁은 기어코 뒤를 돌아본다. 돌아보며 작지도 크지도 않은 목소리로 만랑, 만랑, 부른다. 핏발 선 눈이다.
“…….”
동혁과 낭도 아이들이 사라질 때까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던 제노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바닥에 떨어뜨린 동혁의 검을 주워 들어 칼자루를 고쳐 쥐고는 휙 뒤돈다. 마당 한구석의 목석을 향해 걷던 발걸음이 순간 가벼워졌다. 이 보를 밟은 제노가 가볍게 뛰어올랐다. 동시에 검이 허공을 횡으로 갈랐다. 그간 연습용 목검으로 무수히 내리쳐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고 흠집이 났던 목석의 가슴께가 제노가 휘두른 검날에 무참히 잘려 나갔다. 비스듬히 난 단면을 따라 슬슬 밀리던 나무조각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제노가 아릿한 손목을 돌리며 정갈히 조각된 반쪽짜리 목석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사실은 무얼 베어도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은데 어디로 도망쳐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화단 아래쪽, 떨어진 채 시들고 뭉개진 꽃잎들을 가만 바라보던 제노가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어린 마음에 잠든 곡우영을 앞에 두고 중얼중얼 속엣말을 한 적이 있다. 다음 생에 태어나면 꼭 도련님만큼이나, 아니, 더 높은 이로 태어나리라고. 넓은 방에서 내 침상을 갖고, 매끼 따뜻한 밥에 좋은 반찬을 먹고 살리라고. 머리가 크면서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거니와 다음 생이란 걸 기약해 본 적도 없었으나, 선문에 들고부터 어렴풋이 실감하고는 했다. 아, 나는 새로 태어난 것이로구나. 이것이 나의 내세로구나.
아무리 애원하고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해가 두 번 떴으니 오늘이 출정식이다. 오늘이 지나면 죽지랑은 선문을 나선다. 고개를 떨구어도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더러워진 낭도복 바지뿐이라 막을 새 없이 입밖으로 실소가 터져 나온다. 내 화랑, 나의 사랑하는 정인은 참 영특하고 기민하지. 내가 이리 나올 것을 알고서 진작부터. 동혁이 줄줄이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내려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눈앞이 어뜩했다. 침상이 네 개 놓인 낭도원 빈방에 갇힌 뒤로 식사에는 손도 대지 않은 탓이다. 발악하다 손발목이 묶인 뒤부터는 지키고 선 낭도들이 차례로 들어와 입에 대어 주는 것조차 씹어 넘기지 않았다.
- 스승님, 스승님!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먼데에서 들려온다. 이것이 환청인지 아닌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다. 스승니임! 절규에 가까운 부름이 어깨를 붙들고 흔들었다. 동혁은 눈꺼풀을 밀어올린다. 억지로 고개를 들어 쳐다본 앞에는 얼굴이 눈물범벅이 된 서운이 있다. 환하게 열린 문으로 뛰어들어 제 품으로 달려든다.
다들 출정식에 가셨습니다. 여기엔 아무도 없어요. 원래부터 저랑 아이들에게 신경쓰시는 분은 만랑과 스승님뿐이니까요……. 얼른 일어나세요, 다른 아이들은 지금 만랑께 가 있는데, 저만 뒷간에 간다 하고 몰래 빠져나온 거란 말이에요. 지금 안 가면 늦는단 말이에요! 절박한 목소리 사이에 엉엉 울음소리가 섞였다. 손발목을 묶은 끈이 뚝뚝 끊기는 감각. 동혁은 이를 악물고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손을 뻗어 방안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물병을 집었다. 뚜껑을 열어 콸콸 목구멍 안으로 쏟아넣고 나니 그제서야 정신이 든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흑흑 흐느끼면서 자국 남은 제 손발목을 잡아 문지르는 서운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준 동혁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가만 속삭인다.
“얼른 돌아가.”
“어흐, 흑, 스승님.”
“나도 갈게.”
괜히 들켜서 혼나지 말고, 얼른. 그 말에 서운은 와앙 울음을 놓으면서도 의심 없이 벌떡 일어난다. 서두르셔야 해요……. 아이가 뛰어나가자 열린 문으로 햇볕이 쨍하니 비쳐 들어왔다. 동혁은 멍하니 문밖을 쳐다본다. 지키는 이는 아무도 없다. 어지러운 머리를 두어 번 두드리다가 그 자리에 그대로 드러눕는다. 언젠가의 누각에서 정인과 함께 맞던 것처럼 곰살맞게 따뜻한 햇살이다.
그러니 여기가 나의 내세로구나.
"만랑!"
발걸음이 저 알아서 멎는다. 장독을 깨뜨리고 도망치는 아이의 뒷덜미를 잡아채듯 다급하고 거친 부름이다. 땅을 박차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더니, 이내 바로 뒤에서 멈추었다. 두 발 앞으로 잔모래가 튀었다. 흙먼지가 발 앞으로 가라앉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제노가 이를 지그시 내리문 채 뒤돌았다. 동혁은 말없이 숨을 고르며 사지로의 출정을 숨긴 제 정인을 핏발 선 눈으로 마주보았다. 화랑의 앳된 얼굴은 유순하게 풀려 있다.
분명 물을 말이 많았는데. 어찌 이러시냐고, 이런다고 순순히 미워해줄 줄 알았느냐고, 아니 이런다고 고이 보내줄 줄 알았느냐고 따져 물으려 했는데. 그 모든 말을 잃어버린 동혁이 혀를 내어 바싹바싹 마르는 입술을 적셨다. 어깨와 가슴, 배에 가죽띠로 단단히 둘러맨 경갑. 왕실 문장이 선명히 찍힌 검집. 그 안에 깃을 정갈히 세워 갖춰 입은 정복. 제노를 둘러싼 그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었다. 과히 잘 알아 문제였다.
“기어이.”
“…….”
“기어이 가십니까.”
말끝이 볼품없이 튀었다. 제노가 검집의 금장을 어루만지며 시선을 내렸다. 누가 꺼내 주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았다. 이놈이 아니라 서운이 고 녀석을 묶어 놓았어야 했는데. 얼마나 몸부림을 쳐댔는지 손발목이 온통 붉게 까진 게 보였다. 보기만 해도 쓰라려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원래는 말씀하셨던 대로 가둬만 두려고 했는데요. 이놈이 겁대가리라는 게 없는지 윗창을 손으로 뜯고 나오려고 발악을 하더라고요. 어쩔 수 없이 묶었습니다. 헌데 만랑……,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 되는 겁니까? 걱정 반 안타까움 반으로 묻던 주경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연히 들리는 듯했다.
고개를 든 제노의 눈망울이 흔들림 없이 동혁을 마주했다.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파르르 떤 동혁이 이를 악물었다. 총명하게 검고 커다란 눈동자. 웃음기 없는 눈. 평소의 다정한 웃음은 사라지고 없는, 완연히 전쟁을 앞둔 장군의 얼굴. 대답 없는 이에게서 미안함을 읽어낸 동혁이 기어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화랑 죽지의 심중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허나 동시에 인간 이제노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말을 고르던 동혁이 결국 아랫입술 안쪽을 콱 짓씹었다. 울고 싶었는데 입을 열면 울음 대신 서러운 원망만 쏟아질 것 같았다. 한참을 아무 말 없던 제노가 가만히 손을 든다. 손끝이 머리칼에 닿기 직전, 동혁이 한 발자국 물러섰다. 덕분에 허공에 멈춰선 손이 잠시 머뭇거리다 맥없이 떨구어졌다.
"왜 피해."
“…….”
“언제 다시 만져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눈앞이 아득해진다.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아찔함과 함께 순식간에 전신에 찬 소름이 타고 올랐다. 호흡을 고르려 아무리 애써도 어지러운 머리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질끈 눈을 내리감은 동혁이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얼굴을 감싸쥔 둥근 손끝이 잘게 떨린다. 뼈아프게 깨달은 탓이다.
잡아도, 화내도, 나를 베고 떠나시라 드러누워도 제노는 갈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곳으로. 검이 허수아비나 목석 대신 뜨끈한 피가 흐르는 목을 베는 곳으로. 인간은 시신이 되고 시신은 육편으로 분해 까마귀 먹이가 되는 땅으로. 동혁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던 제노의 시선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제일 좋고.”
“…….”
“맑은 술을 골라서.”
또 그날처럼 잔을 나누면서, 축하해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제노가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꾹 눌러내린 목소리로 날아오는 익숙한 약속이 아팠다. 동혁이 결국 이를 아드득 물었다.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아서.”
“동혁아.”
“저는, 언젠가는 그날이 올 거 같아서…….”
안 될 걸 알지만 상상으론 수없이 화랑도 되어 보고. 랑과 함께 밤이 새도록 부어라 마셔라도 하여 보고. 저는 그리하였는데. 랑께서는 죽으러 간다고 이제야 알리시면 어떡합니까. 죽음을 불사하겠다 맹세했을 사람이 내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지으면 어떡합니까. 안 그래도 보내지 못하겠는데, 그리 슬픈 눈을 하시면 저는 어찌합니까. 정말이지 너무하십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들을 겨우 삼킨 동혁이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수그린 제 화랑을 마주보며 옷자락을 아스러질 만큼 꾹 말아쥐었다. 땀과 흙으로 젖고 세탁하기를 반복하여 너덜해진 천의 감촉이 손 안에 들어찼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곁에 있어줄 줄 알았다. 가끔 넘어지려 할 때 굳은살 단단한 손으로 잡아 일으켜줄 것이라 믿었다. 그 손에 거둬졌으니 그 손으로 버려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 놓쳐 버리지는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모래를 움켜쥔 채로 풍랑 이는 바다에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간다. 안일하고 어리석었던 혼자만의 약속들이 사라진다. 마지막에는 기어이 제노마저도, 느리게 빠져나가 물살 속으로. 멀리멀리로. 동혁은 폐 속을 채울 듯이 들이치는 소금물 같은 감각에 멀미가 날 것만 같아 허리를 숙여 무릎을 짚었다. 무어라도 해야 하는 순간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명치가 조였다. 이것에 이름을 붙이자면 무력감이다. 스스로의 무능을 견디지 못해 반쯤 무너져내린 둥근 머리통 위로 제노의 낮고 나긋한 목소리가 꽃잎처럼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동혁아.”
“…….”
“내가 혹여 돌아오지 않거든,”
국선께 허락을 받고 사가로 가. 아주 나가진 말고, 휴가를 타서 말이다. 우영이에게 소식 한 마디 전해 주고. 뭇 낭도들은 한 번씩 다 가는 동안 내가 한 번도 데려가 주지 않아 아쉬웠을 유랑을 나가 보는 거야. 땅끝으로도 가보고. 그간 못 봤던 곳들에 다 발도장을 찍고. 여기와는 아주아주 먼 곳으로 방향을 잡아서.
“알았느냐?”
“…….”
“동혁아.”
"그리고 나서는요."
이번에는 제노가 입을 다물었다. 귓가로 파고든 갈라진 목소리가 낯설도록 무섭고 무거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좋은 곳을 보고 듣고, 실컷 쏘다니다가, 몇 날 며칠을 패기 넘치고 용감무쌍한 화랑도답게 모험하다가. 그리고 나서 돌아오면!”
“…….”
“그때엔 여기에 랑이 계십니까?”
물음이 외침처럼 울컥 터져 나왔다. 고개를 번쩍 든 동혁이 제노를 무섭도록 노려보았다. 뜨겁고 건조하게 타들어가는 시선을 마주한 제노가 망연히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긴 속눈썹이 눈밑을 덮었다. 소용없다는 걸 안다. 이리된 이상 저애를 어떤 말로도 달랠 수 없단 걸 안다. 그렇지만.
“왜 화를 내.”
“지금 그게 무슨,”
“그럼 대체 어찌할 작정이길래. 내가 네 살아 숨쉬는 한평생 돌아오지 않으면 어찌할 작정이길래 이러는 것이냐. 내가 죽는다고 따라 죽기라도 할 셈이야?”
“예, 그리할 것입니다!”
“…….”
이전에 본 일 없는 매서운 대거리였다. 거칠게 말끝을 치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말문이 턱 막혀, 잔뜩 속상한 목소리로 따지고 들던 제노가 굳은 채 야트막하게 숨 쉬었다. 그리할 것이라고? 뭘 어찌하겠다고? 왜? 동혁아, 네가 왜. 내가 죽으면 너는 살아 주어야지, 데려갈 만한 곳이라야 같이 가지…….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올라 혀끝에 맴도는 말을 입술로 베어물며 제노가 이를 악물었다.
“어딜 가시든 다시 오지 못하신다면 제가 만나러 가겠습니다. 끝까지 따라갈 거예요. 저를 등지고 가시면 제가 앞질러 가서 가로막을 겁니다, 그리하여!”
“…….”
“혼자 외로이 먼 길 떠나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제노가 고개를 들었다.
어찌 숨겼던 말이 없겠어. 많이 상상했어. 손을 잡고 함께 저자를 걷는 일, 아무도 없는 곳에 둘이서만 가서 하루를 보내는 일. 진골이니 화랑이니 다 버리고, 품계 없는 평범한 집안의 자식이어도 좋으니 너와 서로의 옆집에 친한 친우로 태어나 매일을 함께하는 일. 전부 상상만 했어. 나도 아직 어려서, 사랑은 네가 처음이라서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그랬어. 가끔은 갑갑한 정복을 벗고 네 손을 잡고 싶었어. 날 제노야, 하고 불러 주는 네 목소리를 들어 보고 싶었어. 나는 그렇게 너와 함께 평범해지고 싶었는데. 목까지 치받아오른 수많은 말들을 꾹 삼키고, 겨우 하나 조심스럽게 내놓는다.
“다음 봄에는 손잡고 놀러 가자.”
“…….”
“벚꽃이 만개한 동네로…….”
막을 새 없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절대 울지 않기로 다짐했건만 기어이 머리와 눈가가 터질 것처럼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져 동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약속 꼭 지키시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제노가 손을 뻗어 동혁의 볼에 엉망으로 그려진 눈물길을 엄지손가락으로 서툴게 닦아냈다. 그제서야 제대로 시선을 맞춰 주는 동혁의 볼을 가만가만 도닥인 제노가 눈물 그렁한 눈으로 웃었다.
“무턱대고 혼내서 미안해.”
“…….”
“나 없이도 잘했으면 좋겠어서 그랬어.”
엊그제의 이야기다. 그런 걸로 원망한 적 없다고 말해주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노가 머쓱한 표정으로 눈을 한껏 휘며 씩 웃었다. 복색과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개구지고 해맑은 아이다운 미소였다. 그동안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얼굴. 지고 있던 짐을 전부 내려놓은 듯한 후련한 웃음을 마주보던 동혁이 아랫입술을 꾹 내리물었다. 이 기억이 오래오래 남을 터인데. 정말 마지막이라면 나도 웃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입안에 비린맛이 퍼지도록 입술만 짓씹던 동혁은 말없이 한 발자국 다가선다. 어깨에 찬 경갑 아래로 튀어나온 옷자락을 갈무리해 주고, 목을 반쯤 가리며 올라온 깃을 다시금 접어 정돈해 주고. 정복 소매의 주름진 부분을 털어 정리하며 비뚤어진 손목아대를 다시 채워 주고. 제노는 동혁의 여문 손을 망연히 내려다보며 말을 잃었다. 평소에는 내가 네 화랑이지 주인이냐 화를 내며 밀어냈을 손길이었다.
저 멀리에서 소란이 일더니 발자국 소리가 다급히 가까워진다. 없어진 동혁을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곧 몇몇의 낭도들이 저 멀리에서 모퉁이를 돌아 나타났다. 동혁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뛰어오려다 제노를 보고는 너나할 것 없이 당황한 낯으로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선다. 제노는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기민한 주경이 제 뜻을 눈치채고 주변에 기다리라 손짓하는 것을 본 제노는 다시 고개를 돌려 동혁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손을 뻗어 동혁을 만진다. 살이 내려 마른 뺨과 뼈대가 드러나는 굵은 목과 틀어올릴 정신이 없었는지 쓸어올려 대충 묶은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동혁은 피하지 않았다. 그저 뜻대로 하시라 내주며 이를 악물었다. 제노는 힘이 들어간 턱마저 살살 만졌다.
“다시 할 게 그리 많으냐.”
“……, 제 손이 안 닿으니 아주 엉망입니다.”
“매무새를 가다듬어준 아이들이 들으면 서운하겠구나.”
“…….”
“동혁아.”
“예.”
“미안해.”
동혁의 머리 위로 제노의 사과가 가만히 떨어져 내렸다. 아까와는 다른 이유라는 것을 알았다. 동혁은 대답 없이 쭈그려 앉았다. 제노의 바짓자락을 다시금 단단히 동여맨다. 군화의 이음새 사이로 데님 매듭을 집어넣고 다시금 꾹꾹 눌러 마무리하는 손길. 제노의 손이 망설이다 동혁의 뒤통수에 가만히 덮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 터져 나온다.
“서운이랑 아이들은 걱정 마십시오.”
검으로는 선문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재를 만들어 놓겠습니다. 저도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수련할게요. 랑께 이 년을 꼬박 배웠더니 이제 몸이 부서져라 수련하는 것에는 도가 텄습니다. 해가 뜨면 눈을 뜨고, 새벽이슬 맞으며 검 휘두르는 것도 잘해요.
“장하지요. 저 다 컸지요. 그런데요.”
저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 아직도 노비새끼가 어떻게 여기에 있냐고, 사지를 찢어죽여도 모자라다고 누가 을러대는 꿈을 꿔요. 혼자서는 선문 안을 걷는 것도 두려워요.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만으로도 죄를 짓는 것 같아요. 랑 없이는 아직 아무것도 허락받지 못한 것만 같은데, 저 혼자 무얼 해요. 만랑. 만랑.
씩씩하던 말끝이 맥없이 무너진다. 동혁아. 듣다 못한 제노가 말을 끊는다. 동시에 동혁이 털썩 무릎 꿇는다.
“가지 않으시면 안 되겠지요…….”
악물었던 잇새에서 기어이 흘러나오는 말과 함께 신발목을 힘주어 추켜세우던 손에 힘이 풀린다. 그대로 제노의 두 발등을 덮어 쥔 동혁이 막을 새 없이 와락 울음을 놓았다. 터져나오는 것은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의 통곡 같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만랑 가지 마세요. 저랑 있어요. 첫 유랑 같이 나가 주신다 했잖아요. 꽃도 보고 바다도 보러 가자고 했잖아요. 미워요. 이제 고작 스물인데 전장에 나가는 법이 어디 있어요. 죽으러 간다니 그런 말이 대체 어디 있어요…….
이윽고 제노의 두 발을 붙든 채로 오열하는 동혁의 등에 조심스레 단단한 손이 놓였다. 동료 낭도들에게 붙잡힌 팔에 힘이 풀린다. 뒤로 천천히 물러난 두 발이 머뭇거림 없이 뒤돈다. 명징한 걸음으로 앞을 향한다. 동혁은 자박이는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반듯한 뒷모습이 멀어진다. 어룽진 시야에서 흐려지고, 흐려지다가, 마침내는 점처럼.
동혁은 왼손을 단단히 주먹쥐었다.
차마 하지 못한 말이 거기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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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따뜻하고 볕이 좋은 봄입니다
다 녹은 눈을 뚫고 봄꽃 맺힌 찬밤에
괴로운 소문들이 도원 담을 넘는데
길 잃은 언어들이 사방 자욱합니다
떠난 지 수일인데 어찌 소식 없으신지
기다리다 기어이 아침해 뜨고 나면
가시는 랑 기리며 초와 향을 올립니다
하늘과 땅이 울어 서로 시름하나니
몸을 두고 아름다운 넋만이 날아가고
새로이 득오곡을 만난 것 싫었는지
그리하여 훨훨 떨쳐 버리고 가시는지
주인 잃은 원망들이 목을 타고 오릅니다
만랑
붓과 검을 그 봄에 묻습니다
저는 여기 있고 랑은 없어 슬픕니다
이것은 마지막 연서입니다
몸 뉘신 곳 차가운 풀무덤을 어찌합니까
말 잃은 사랑만이 주변을 떠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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