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봄감기에서는 비린내가 난다
동젠
“제노야. 체육.”
온도 높은 손바닥이 엎드린 제노의 하얀 뒷목을 덮었다. 손이 잠시간 머물다 떼어져 나간 자리에 누긋하게 열감이 남는다. 부스스 상체를 일으키자 선 뚜렷한 얼굴이 드러난다. 단정하게 자른 까만 머리를 쓸어넘기자 잘생긴 이마에 아직 잠이 붙은 부은 눈가도 보인다. 초콜릿 박힌 것처럼 콕 찍힌 눈가의 점도. 별 표정 없던 동혁의 얼굴에 아주 슬쩍 미소가 스쳐지났다.
체육?
응. 오 분 남았어.
나 오래 잤어?
어, 확통 중간부터 쭉.
다정하게 대답하며 동혁이 투박한 손으로 익숙하게 제노의 헝클어진 머리를 푹 눌러 정리했다. 졸음에 겨운 눈을 한 제노가 살짝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실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제노를 한 발짝 뒤에서 쫓는 동혁의 손에는 제노의 것과 제 것, 두 벌의 체육복이 들려 있었다.
-
"형 진짜 죄송해요..."
"어 괜찮아."
어깨 좀 박는다고 뭐…, 부러지는 것두 아니고. 졸음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휘적휘적 손을 저은 제노가 동혁에게서 제 옷을 받아들고 화장실 칸 안으로 쏙 들어가 문을 닫는다. 동혁이 화장실 문앞으로 뛰쳐나오다 제노와 된통 부딪친 조심성 없는 녀석을 돌아봤다. 어떡해, 죄송해요….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이 조금 익숙하다. 그럼 아마 같은 반일 거다.
"저기, 야. 걱정하지 마."
진짜 괜찮아. 엉. 쫄지 말고. 어색한 미소와 함께 절절매는 동급생 녀석을 화장실 밖으로 내보낸 동혁이 그 자리에서 교복 조끼를 벗으려다 멈칫한다. 벽에 다닥다닥 붙어 볼일을 보는 녀석들이 저를 잔뜩 신경쓰고 있다는 게 느껴져 머리까지 아팠다. 결국 빈 변기칸으로 향하며 동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래서야 편하게 옷도 못 갈아입겠다.
"아픈 사람 빠지고, 줄 맞춰. 두 바퀴. 이탈하거나 구령 제대로 안 맞추면 한 바퀴씩 추가야."
"아, 쌤!"
"시끄러, 출발!"
아아아아……. 변성기가 거의 다 지나간 목소리들이 겹쳐져 느적하게 탄식이 늘어진다. 휘슬이 울리고, 곧 이 열 종대로 늘어선 남고생들의 무리가 운동장에 부옇게 모래먼지를 일으킨다. 자욱했던 먼지가 가라앉으면 돌계단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이제노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앞으로 다가가는 이동혁이 보인다. 제노가 춥다는 듯이 팔을 쓸자 동혁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걸치고 있던 저지를 벗었다. 춘추복 위에 남색 아디다스를 걸친 제노는 체육 시간이 다 끝나 가도록 동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흔들흔들 존다. 흙먼지가 날아올 때마다 제노의 코와 입가를 가려 주는 건 이동혁의 손바닥이다. 선생은 딱히 둘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동혁이, 사복 니 거냐. 교칙 위반 아니냐. 예 맞아요. 죄송합니다. 의미 없는 지적과 의미 없는 사과만 오간다. 이동혁이 소리 죽여 대답하는 건 오로지 제노를 깨우지 않기 위해서다.
-
이동혁은 개새끼다.
정정. 이동혁은 이제노의 개새끼다. 그러나 이제노와 이동혁의 관계를 어린놈들이 툭툭 뱉는 저급하고 어린 단어로 명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주인 역할을 맡은 이제노부터가 오백 원으로 천 원짜리 빵을 사 오라거나 교실 뒤에서 네 발로 기어보라는 명령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랬다.
동혁이 개새끼이긴 하나, 그게 제노의 발 아래서 빌빌 기기 때문에 붙은 별명은 아니다. 그저 이동혁은 이제노를 끊임없이 맴돌았다. 그 모양이 설렁설렁 꼬리를 흔들어 가며 주인 정강이에 얼굴을 문지르는 강아지를 닮았다. 말마따나 동혁은 모든 설정이 제노를 기준으로 맞춰져 있는 기계 같았다. 종잡을 수 없는 이제노의 모든 것들을 가장 최적화된 방식으로 다루는. 그러니까, 좀 달랐다는 소리다. 양아치 따위가 아니다. 빵과 담배, 혹은 기타 잡다한 것들에 대한 셔틀도, 심심할 때 갖고 노는 질 나쁜 장난감도 아니다. 그럼 대체 왜 둘은 스물하나씩이나 나이를 처먹고서 고삼 교실 한구석에 처박혀 앉아 있는가. 그것도 골격 뚜렷한 청년의 몸으로 아래위 교복 단정하게 맞춰 입고.
혹자는 유급이라 했다. 이동혁이 뒤지게 싸웠는데 이제노가 휘말려서 같이 유급됐으리라고. 그러나 그렇다면 이 년씩이나 늦었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기각. 혹자는 부잣집 망나니 자제들일 거라 했다. 공부고 뭐고 사고만 치고 다니던 둘을 갱생시키고자 부모님이 강제로 학교에 집어넣었을 거란 추측이다. 헌데 그렇다기엔 입고 다니는 옷들이 평범했고 하고 다니는 짓들이 검소했다. 그러므로 또 기각.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쯤에서 추리를 그만두었다. 스물한 살 먹고 고등학교 교실에 앉아 있는 동급생 형들의 눈치를 본답시고 조용히 죽어 지내느라 그랬다. 동혁은 자신들을 신경 쓰지 말라고 했고 제노는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들에 별 신경을 안 썼다. 그러나 오히려 그 덕분에 어딘가 기묘한 존재감이 늘상 둘의 주변을 감싸곤 했다.
어쨌건 이동혁과 이제노는 저들과 섞일 일이 없었으므로. 둘의 흥미로운 프로필에 쏠렸던 열띤 관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소강됐다. 주변의 것들에 관심을 싹 거둔 둘은 그저 무심하고 미지근했다.
문을 당겨 닫자 반짝 하고 신발장 불이 켜졌다. 노란 알전구 빛이 푸석푸석한 머리칼 위로 쏟아졌다. 동혁은 신발장 벽을 짚고 운동화 뒤축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신발을 벗었다. 미끄러운 바닥에서 내내 걸어다니느라 끈을 꽉 조여 맨 탓에 쉽지 않았다. 한 칸짜리 어두운 거실 바닥에 두툼하게 쌓인 이불이 몇 번 꿈지럭거리더니 속에서 희끄무레한 얼굴이 툭 튀어나왔다. 일찍 왔네. 또렷하려 애쓰는 목소리가 들렸다. 동혁이 한쪽 신발을 마저 벗으며 고개를 들어 제노를 바라보았다. 기다리다 못 참고 잠시 졸았는지 눈두덩이 약간 부었다. 응, 하고 대답한 동혁이 신발을 대충 정리한 뒤 성큼성큼 다가가 이불을 도로 코 밑까지 끌어당겨 얼굴 반을 덮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잠을 완전히 떨친 듯 맑고 똑바르다. 이불 위로 배를 토닥이니 도로 꿈질꿈질 자세를 바로 해 눕는다. 제노의 눈썹 사이가 천천히 좁아졌다.
“우..., 비린내.”
“얼른 씻고 올게.”
먼저 자, 금방 와. 찌푸려진 제노의 미간을 손끝으로 살살 눌러 펴준 동혁이 들고 있던 가방을 구석에 세워 두고 곧장 화장실로 직행했다. 물이끼 냄새 같은 것이 밴 흰 반팔 티셔츠와 교복 바지를 벗었다. 반팔티는 빨고, 교복 바지는 페브리즈를 적시듯이 뿌려 두고 잠들어야만 내일 아침에 냄새가 좀 빠져 있을 거다. 물온도를 맞추려 샤워기 수도꼭지를 튼 동혁이 거울을 들여다봤다. 좀 전 칼질할 때 고무장갑 위에까지 튀었는지, 손가락 한 마디만큼 핏물이 말라붙은 팔뚝이 거울에 비쳐 보였다. 벅벅 문지르자 먼지처럼 조각조각나 떨어져 나간다. 잠시 멍해졌다가, 곧 틀어 둔 물길에서 훈김이 피어오르는 걸 알아채고 속옷을 벗는다. 맨몸에 뜨거운 물을 끼얹으며 동시에 한쪽 손으론 샴푸를 짰다. 동혁은 라벤더 향기가 나는 퍼퓸 샴푸를 쓴다. 제노가 동혁의 몸에서 비린내가 나는 걸 싫어해서다.
수많은 추측에 대한 기각 사유를 굳이 덧붙이자면 이동혁과 이제노는 부모님이고 뭐고 없었고, 갱생이랄 게 불가능한 인간 군상에 속했다. 반항기가 없는 게 아니라 한 번도 학교를 다녀 본 적이 없으니 그저 하란 대로 하는 거였다. 둘은 야자를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석식만 먹고 일곱 시에 나란히 하교했다. 후문을 빠져나와 세탁소 코너에서 꺾은 뒤 삼거리에서 헤어졌다. 늦은 밤이 되면 이동혁은 횟집 특유의 비리고 화한 냄새를, 이제노는 찌든 휘발유 냄새를 각자 매달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동혁은 꽃향기 나는 샴푸에다 아기 분 냄새 나는 바디클렌저를 쓰지만, 제노는 햇반 두 박스에 사은품으로 딸려온 샴푸로 머리를 감고 욕실에 굴러다니는 비누로 몸을 씻는다. 덕분에 화려하고 향긋한 향기를 풍기는 동혁과 달리 제노에게선 건조하고 따뜻한 살 냄새가 났다. 한데 누우면 늘 먼저 몸을 붙여 오는 건 제노였다. 어린애처럼 동혁의 머리칼이며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숨을 쉬기를 좋아했다. 좋은 냄새 나. 너도. 제노의 머리칼에 코를 파묻으며 동혁은 솔직하게 대꾸했다. 비누 냄새 속에 기름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는 이제노의 체향. 이동혁을 한없이 편안하게도 막연히 불안하게도 만드는 향이었다. 안고 있는데도 끌어안고 싶다. 온통 들이마셔 내 속에만 남아 있게 만들고 싶다. 누가 불을 댕기기라도 하면 타올라 재가 될 것만 같아서 그랬다.
“안 돼.”
“왜?”
“나 감기가 오래가.”
아직도 목이 깔깔해. 어김없이 저를 향해 돌아누우려는 제노의 어깨를 잡아 막은 동혁이 나직하게 일렀다. 나 감기 옮아도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아 제노야. 풀죽은 것마냥 옆얼굴을 베개에 부비는 제노를 뒤에서 끌어안고 배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달랜 동혁이 푸스스 웃었다. 방금 뜨거운 물로 씻고 나온 저보다 더 따끈하다.
“그럼.”
“그럼?”
“손바닥 펴줘.”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제 손목을 한 손으로 붙잡아 얼굴로 잡아끄는가 싶더니 손바닥에 얼굴을 묻는다. 깊게 들이쉬는 숨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껴졌다. 동혁이 몸을 바투 붙이고 제노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제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앞으로 쏟아진 동혁의 머리칼에 대답하듯 짧게 입술을 눌렀다.
축축했다. 어딘지 모르게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자꾸만 머리가 무거웠다. 구태여 서로 아픈 티를 내기 싫어했다. 이동혁과 이제노는 그러했다.
- 집이 되고 싶은 피난처.
“동혁이 형, 제노 형이.”
동혁은 두 마디가 끝나기 전에 뒤돌았다. 손에 들고 있던 대걸레를 젖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팽겨치고 화장실을 뛰쳐나와 복도를 달렸다. 울 것 같은 얼굴로 저를 데리러 온 반장 녀석이 뒤따라 뛰는 소리가 들렸다. 동혁은 마치 경로가 입력된 네비게이션처럼 정확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코너에서 꺾고,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올랐다. 아수라장이 된 복도를 억지로 헤집고 들어갔다. 사색이 된 아이들은 밀쳐졌다는 사실에 잠시 얼탔다가, 등장한 게 이동혁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얼른 복도 양쪽으로 갈라져 길을 터 줬다. 열 살 때였나, 이런 장면을 드라마에서 본 것 같기도 한데 모르겠다. 적어도 그땐 주인공들이 아주 멋져 보였었다.
야, 비켜! 비켜 비켜! 뒤따라오던 반장이 악을 썼다. 왔다 왔다! 겁에 질린 채 얼어 있던 아이들이 뒤를 돌아보며 문에서 비켜 섰다. 틈을 비집고 들어간 동혁이 교실 뒤편에 와락 무릎을 꿇었다.
경련하는 몸.
아래위로 들썩이는 가슴팍을 눌러 내리며 넥타이를 잡아당겨 푸는 손길이 익숙했다. 목을 옥죈 단추 두 개를 풀어낸다. 옷소매로 입가에 번진 거품을 닦아내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눕힌다. 들려 꺾인 팔다리를 눌러 펴 주고, 주변의 책상과 의자 다리를 밀어 치운다. 마지막으로,
“문 좀 닫아.”
품속에서 손수건을 깔아 제노의 얼굴 밑에 깔아 주며, 아무에게나 부탁한다. 뭔가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무서움을 꾹 눌러 참고 옆에 붙어 앉아 있던 반장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야, 앞문 뒷문 닫아! 우리 반 아니면 나가 얼른! 소리쳤다. 그러고도 몇몇이 멈칫멈칫 움직이지 않자 등을 떠밀며 내보낸다. 썅 꺼지라고! 구경 났냐고! 진부한 대사다. 열두 살 때쯤 밤새워 읽던 인터넷 소설에 나올 것 같다. 동혁은 멍하니 그런 생각들을 하며 제노의 뺨을 한 손으로 감쌌다. 살짝 힘을 주어 누르자 턱이 약간 벌어지며 거칠게 기침이 터진다.
“제노야.”
제노야. 낮게 불렀다. 간헐적으로 탁 탁 튀어오르던 몸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제노야, 제노야. 동혁은 계속 불렀다. 그 부름이 제노를 안정시켜 주기라도 할 것처럼. 떨림이 멈추지 않으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부르고도 지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허공에 떠 있던 제노의 발이 바닥을 짚었다. 자꾸만 웅크리듯 탁탁 튀어올라 세워지던 무릎에 힘이 풀리고, 바닥을 천천히 미끄러지며 다리가 펴졌다. 동혁은 제노의 얼굴을 덮은 손을 치우지 않았다. 젖은 손수건을 접어 아무렇게나 안주머니에 쑤셔넣고 새 손수건을 꺼내 제 손 아래 숨겨진 젖은 얼굴을 천천히 닦아냈다. 곧 호흡이 돌아왔다. 제노의 가슴팍이 한 번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더니, 다시금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떨림이다. 동혁은 동요하지 않았다. 하던 대로 조용히 손을 움직여 제노의 관자놀이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가자.”
내려가서 자다 오자. 속삭이자 제노가 어린애처럼 두 손을 뻗었다. 동혁은 가만히 상체를 숙여 제노가 단단히 제 목에 두 팔을 감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팔로는 등을 받치고 다른 한 팔은 두 다리오금 아래를 받쳐 천천히 안아들었다. 때마침 야자시간 시작을 알리는 종이 쳤다.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던 아이들이 불에 덴 것처럼 놀라며 화닥닥 제 자리로 돌아가 앉기 시작했다. 끙차 하고 힘겹게 일어서 제노를 고쳐 안은 동혁이 반장을 붙들고 선생님께 말 좀 전해달라 부탁하는 동안에도, 제노는 동혁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둘은 흘끔거리는 시선들을 뒤에 매달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제노보단 작지만 품에 안긴 상체를 완전히 가리기엔 충분히 넓은 동혁의 등과 힘없이 흔들리는 제노의 다리가 복도 멀리로 멀어졌다.
흔들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 사이에서 달고 가벼운 목소리가 늘어지며 메아리쳤다.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 가장 먼저 감각한 것은 축축한 얼굴이었다. 싫어. 울음이 터지는 것을 막지 못한 채 의지할 것을 찾아 팔을 감았다. 제발 말랐으면 좋겠다. 우리가 단단해졌으면. 녹은 것들이 모조리 굳어 우리가 식은 설탕물처럼 균열 없이 달라붙었으면. 그런 바람을 싸그리 무시한 채 뜨끈한 목덜미에 닿은 팔에서 천천히 진물이 배어나왔다. 끔찍하게 끈적하고 징그러운 그것이 느리게 퍼져 나와 두 몸을 덮는다. 싫어, 싫어, 싫어. 눈을 감는다. 시야를 차단한다. 내 머리통을 둘러싼 세상이 그저 요동치게 내버려 둔다.
짜증 나게도 얼굴은 그대로 젖어 있고 목소리는 여전히 달다.
-
제노는 가끔 시야가 비릿하게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열예닐곱 살 때부터 그랬다. 형들은 바닥을 쓸다 말고 픽픽 쓰러지는 어린애의 몸을 함부로 끌어다 뒷방에 밀어넣고 마저 일했다. 그러는 동안 동혁은 사장님들 옆에 무릎 꿇고 손에 두 겹 겹쳐 든 종이컵에 담뱃재며 가래침을 받아냈다. 오물로 축축해진 컵을 버리고 새 컵을 꺼내 도로 테이블로 돌아가는 일들 사이에 동혁은 꼭 개수대로 몰래 달음박질쳐 비누로 손을 빡빡 씻었다. 뽀송해진 손으로 도로 종이컵 받쳐 들고 자리로 돌아가 사장님 허벅지에 뺨 부비며 헤헤거리는 거다. 아주 좆같은 인간들이 따로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따금 사장님들은 판 위에 어지러이 널린 카드들 위에 오만 원짜리 몇 장을 던지곤 입으로 주워 가면 갖게 해 준다고 어린애들을 부추겼다. 다른 아이들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동혁은 냅다 테이블 위에 무릎 올리고 올라탔다. 상체 납작 붙이고 누런 지폐를 입술로 모아 야무지게 한방에 물어올렸다. 그러면 사장님들은 껄껄껄 만족스레 웃으면서도 카드가 흐트러졌다며 기어이 엉덩이를 두어 대 내리치고 꽉꽉 주물러댔다. 동혁은 비실비실 웃는 얼굴로 테이블에서 내려오며 다시금 생각했다. 아주 좆같은 새끼들이 따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버려 몇 푼을 더 버는 건 이동혁에게 쉬운 일이었다. 동혁보다 먼저 일을 시작한 제노가 언젠가 거쳐 왔을 일들이었다.
일이 끝나 홀이 문을 닫고 나면 씻고 옷을 갈아입어 뽀송하고 포근해진 제노가 부엌에 딸린 뒷문을 열어 줬다. 녹초가 된 아이들이 저린 다리를 절뚝거리며 직원기숙사로 향할 때, 동혁은 마지막으로 손을 빡빡빡 씻느라 늘 마지막 순번이었으며 그 덕분에 늘 제노의 입술에 남은 상처의 흔적을 하릴없이 어루만질 시간을 벌곤 했다.
- 약은.
- 발랐어.
글구 많이 안 혼났어. 이제노는 열받게도 맞았다고 하면 될 걸 매번 혼났다고 말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꼭 주눅든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하고. 동혁아 표정 풀어 나 괜찮아, 그래도 오래 쉬었고 오늘. 말과 다르게 새하얗게 질린 낯은 누가 봐도 괜찮지 않아 보였다. 이동혁은 별말 없이 뒷주머니에 꾸깃꾸깃 쑤셔박아 놓은 오만 원짜리 뭉치를 꺼내 제노의 눈앞에 디밀었다. 제노의 얼굴에 살짝 웃음이 번졌다. 처연한 눈꼬리가 순간 호선을 그린다.
- 돈 벌었네.
- 이거 자랑인데.
칭찬해줘. 가슴팍에 머리통을 들이밀면 제노는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어 주곤 했다. 사실 자랑 말곤 제노를 웃기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도 딱히 없었다. 제노는 돈 벌어오면 좋아해주니까. 그 단순한 명제 속에 숨긴 진실을 동혁도 제노도 부러 모른 척했다. 동혁과 제노가 버는 것은 돈. 언젠가는 이동혁과 이제노를 이 더러운 데서 구해낼 돈. 둘이서 제대로 살아갈 힘이 되어줄 돈. 그게 뭐든 남들에게 숨기려면 스스로를 철저히 속여야 됐다. 동혁은 십을 벌면 구를 제노에게 줬다. 제노는 형들과 선수 애들 몇몇의 출장이 있는 첫째 주 수요일마다 몰래 스뎅 문의 자물쇠를 열고 후문으로 빠져나가 atm 기기 박스 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한 달간 차곡차곡 모은 현금을 입금했다. 도장과 통장은 이따금 믹스커피와 담배를 사러 가는 구멍가게 할머니께 맡겼다. 할머니는 몇 번이고 손등을 쓰다듬으며 불쌍한 것, 아이고 불쌍한 것, 그랬다. 제노는 잘 울지 않는 성격이었으나 날것 그대로의 동정에는 어쩐지 울컥하곤 했다.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할머니는 기어이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손주 보는 것 같어야. 꼭 잘 커서 어른이 돼라이. 어른이……. 그 말을 배웅 삼아 골목을 나설 때면 제노는 늘 궁금해졌다. 어른이 되면요. 어른이 되면 정말 뭔가 달라지나요. 어른이 뭐냐고 제노가 물었던 날, 동혁은 그랬다. 스무 살 되는 거지, 뭐긴 뭐야. 그래서 제노는 납득했다. 잘 커서 스무 살이 되어야지. 그럼 뭔가가 괜찮아질 것만 같았다. 제노는 할머니 말이라면 다 믿었다. 아는 어른들 중 믿을 만한 사람이 할머니밖에 없어서 그랬다.
그리고 스물이 되던 첫날, 이동혁은 죽기 직전까지 처맞았다.자던 제노가 팔뚝을 붙잡혀 작업장으로 질질 끌려나갔을 때, 동혁은 눈 한쪽이 시퍼렇게 부어올라 뜨지도 못한 채 사장님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입에 물린 연황색 종이엔 터진 입술에서 흐른 피가 번져 있다. 순간 정신이 확 든 제노가 눈을 깜박이자 저 씹새끼 표정 좀 봐, 하고 비웃은 형 하나가 그대로 동혁의 옆얼굴을 구둣발로 깠다. 비명도 못 지르고 제노 쪽으로 고꾸라진 동혁의 입에서 빳빳하고 질척한 종이와 함께 핏물이 팍 터졌다. 등을 떠미는 형들의 손길에 넘어지듯 주저앉은 제노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종이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제노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통장을 들켰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덜미를 잡혔다. 이름이 이동혁으로 된 통장주 앞으로 날아온 저금리 대출 광고 우편물 때문에.
- 제노야.
- 살려주세요.
- 진짜 귀엽다, 너네.
- 살려주세요 사장님.
잘못했어요……. 말이 엉망으로 튀었다. 겁먹은 숨이 떨림과 함께 터져나왔다.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덜덜 떠는 제노를 보며 껄껄 웃은 사장이 까닥 고갯짓하자, 형들 둘이 붙어 쓰러진 동혁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 뒤론 빌어도 아무도 들어 주지 않았다. 네가 아프니까, 동혁이가 다 처맞는 거야. 형들 맘 알지? 상냥한 말 뒤론 이미 반쯤 정신을 놓은 몸을 추슬러 일으켜 뺨을 후려치는 게 보인다. 동혁이 죽어요, 살려주세요, 사장님 제발요. 제노는 더듬더듬 기어 사장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린 채 한참을 애원하다 결국 뒤로 넘어가며 발작했다. 그제야 동혁을 내팽개친 형들이 익숙하게 제노의 사지를 붙잡아 바닥에 짓눌렀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제노는 언젠가 동혁이 자기 허벅지를 베고 누워 가벼운 농담처럼 던졌던 말들을 떠올렸다.
좆같은 새끼들.
아주, 쓰레기 같은 새끼들.
역시 너를 데리고 도망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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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결초보은이라 했다. 은혜를 입었으면 영혼이 돼서라도 그걸 갚는다고. 다리 부러진 걸 갖다 고쳐줬더니만 대번에 흥부 부자 만들어 준 것도 제비새끼 하나야. 귀신이랑 미물도 그 정돈 한다. 니들은 사람새끼가 돼서 갚을 빚이 있는데, 입을 꾹 쳐닫고 뻐팅기니 짐승보다 못하네. 맞지. 어딜 토낄라고, 쥐꼬리만한 걸 야금야금 빼돌려서, 별 븅신 같은 것들 불쌍해서 배때기 안 가르고 홀에 써 줬더니, 질질 짜지 말고 똑바로 말해. 어따 숨겼어.
물 한 모금 없이 갇힌 지 이틀째 되던 날 새벽에 문이 열렸다. 같이 일하던 애 중 하나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열쇠를 들고 서 있었다. 얼른 가. 지금 다 출장 나갔어, 창고에 뺀찌 있고. 나는, 나는 못 가. 갈 데도 돈도 없어. 니네만 얼른 가, 도망가. 멀리 가……. 어깨를 들썩이면서 줄줄 울던 애는 말을 한 움큼 쏟아붓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안쪽으로 뛰어들어갔다. 부모 빚 갚으러 도박장에 팔려온 애치고는 심성이 모질지가 못한 애였다. 고맙다는 말을 할 새도 없이 제노가 늘어진 동혁의 몸을 들쳐 업었다. 경력도 길고 온갖 잡일을 다 해본 덕에 또래들 중에서 창고 비밀번호를 아는 애는 제노밖에 없었다. 제노가 녹슨 자물쇠를 힘주어 돌리며 이를 악물어 눈물을 참았다. 뒤에 업힌 이동혁 몸이 자꾸만 힘없이 흘러내렸다. 정신없이 문을 열고, 펜치를 꺼내 스뎅 문을 단단히 걸어잠근 자물쇠를 비틀어 끊어내는 동안 비릿한 쇠 냄새가 자꾸만 코끝을 맴돌았다. 동혁이 다 갈라지고 뭉개지는 발음으로 나직이 물었다. 제노야, 우리 도망가? 제노는 동혁의 다리를 붙들지 않은 오른손으로 온 힘을 다해 쇠사슬을 걷어내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응. 도망가. 멀리 가서 다시는 오지 말자. 뒤도 돌아보지 말자.
문이 열렸다. 제노는 명확한 발걸음으로 구멍가게로 향했다. 이곳을 나서자마자 맑아진 머리는 수십 번도 넘게 상상했던 루트를 비로소 뚜렷이 그려냈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동혁의 손가락이 제노의 옷깃을 꾹 눌러 잡았다. 우리, 기차를 타자. 고즈넉한 동네로 가서 살자. 큰 병원이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치. 나는 무서워 제노야, 네가 아플까 봐 무서워……. 횡설수설 귓가로 쏟아지는 말을 들으며 눈물이 나는 걸 꾹 눌러 참은 제노가 흘러내리는 몸을 고쳐 업으며 발로 구멍가게의 철제 셔터를 쾅쾅쾅 걷어찼다. 업힌 몸이 너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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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혁의 병원비와 제노의 새 약값으로 모은 돈의 반을 썼다. 그간 잘못된 약을 써서 신체기능이 많이 저하됐다는 걱정어린 의사의 말에 제노는 그저 고개나 끄덕였다. 간질 증상에다 해열제나 타이레놀을 막 섞어 먹었으니 당연했다. 여태 안 죽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동혁은 부러진 어깨뼈를 새로 맞춰 붙이는 수술을 급하게 받은 후 일주일을 입원했다. 수액을 맞고 찢어진 데를 꿰매고 감염증 때문에 열이 오른 몸에 항생제를 밀어 넣었다. 죽은 것처럼 잠든 동혁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제노는 그제서야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참았던 걸 다 토해낼 것처럼 엉엉 어린애마냥 울었다. 다음 날 정신을 차린 동혁은 암말 없이 제노의 손을 잡았다. 제노는 참지 않고 또 질질 울었다. 우리 지금 대구다, 동혁아? 그 말에는 동혁도 참을 수가 없었던지 얼굴을 온통 일그러뜨리며 같이 울어버렸다. 이제노 제정신 아니네. 오산에서 대구를 어떻게 왔어. 거기서 여길 어떻게. 말하다 말고 숨을 헐떡이는 동혁의 배에 얼굴을 묻은 제노가 엄지손가락으로 까만 손등을 힘주어 쓸었다. 단단히 맞잡아 오는 손의 압력과 뜨거운 온기가 좋았다. 그게 이제노를 유구히 숨 쉬게 했다.
퇴원 후엔 곧장 방을 구해 이사를 했다. 세간살이를 죄다 새로 마련해야 했으므로 이사라기보단 사실 입주에 가까웠다. 안심동이래. 이름 한 번 우습다. 깁스한 오른팔 대신 왼팔로 커다란 이불 보따리를 끌고 상가 빌라촌 계단을 오르며 동혁은 양손이며 어깨에 짐들을 바리바리 든 채 뒤따라오는 제노에게 그 얘길 했다.
여기 안심동이 왜 안심동이게 제노야. 옛날에 어떤 왕이, 누구였는진 기억 안 나는데 하여튼. 전투에서 적군한테 졌대.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이 동네에서 겨우 한숨 돌리고 안심했대. 그래서 안심동이래. 아주 유구한 역사를 가졌다고 이 이름이.
웃자고 한 말에 제노는 웃지 않았다. 진지하게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마딜 덧붙였다. 그 사람도 도망치는 중이었구나. 나는 그런 사람들은 되게 위대해서..., 한 번도 그래본 적 없을 줄 알았어. 동혁은 그 말엔 대꾸하지 않았다. 삼 층짜리 빌라 계단 바로 앞에 위치한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며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을 뿐이다. 방과 화장실이 하나씩 딸린 투룸. 사양은 나쁘지 않았으나 건물주가 애들 둘이 무슨 돈이 있냐며 월세를 반씩이나 깎아줘 낼 돈은 얼마 안 됐다. 이게 인심이야? 제노가 물었고, 아니 동정이야. 동혁이 답했다. 아침만 되면 초등학생들이 짹짹대는 소리가 들리는 집이었다. 초등학교를 지나치고, 중학교를 지나쳐야 고등학교가 나왔다. 빌라촌을 마주보곤 놀이터를 사이에 둔 아파트가 있었고, 등교 시간이 되면 책가방을 멘 크고 작은 인영들이 동네를 누볐다. 작은 면적 안에 오밀조밀 잘도 모여 있다. 도망자들에게 안락한 안식처가 돼 준 동네다웠다. 둘은 십 분 정도를 걸어 등교했다. 스물하나 둘이 전학수속을 밟고 고삼 교실에 발을 딛자마자 분위기가 급속도로 안정됐다. 고르고 골라서 온 꼴통 학교가 이름값을 못 했다. 하지만 덕분에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느껴 본 적 없는 안정이었다. 그러나 이제노와 이동혁은 늘 불안했다. 어딘가가 자꾸만 흔들리는 것만 같다. 금이 간 것만 같았다. 떨어지지 않는 감기를 달고 살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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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줘.”
펼친 손바닥 위로 엉망으로 구겨진 약봉지가 던져졌다. 동혁의 손가락을 맞고 튀어나간 조그만 불투명 종이공들이 보건실 바닥에 투두두 구르다 멈춰섰다. 동혁은 동요 없이 허리를 숙여 약봉지를 주워담아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제노가 입에 약을 탁 털어 넣는 것을 확인한 동혁이 들고 있던 물컵을 건넸다.
다음 순간 세차게 물이 튀겼다. 제노가 발작적으로 컵을 쳐낸 탓이었다. 손잡이를 쥐고 있어 컵이 깨지는 것은 막았으나, 동혁의 한쪽 팔과 반팔 교복 소매가 죄다 흠뻑 젖었다. 수습할 정신 없이 동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 없이 알약 세 개를 억지로 삼켜낸 제노가 목울대로 구역질을 삭이고 있었다. 단숨에 작은 머리통을 끌어안아 솟구치던 토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뒤통수를 다독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제노가 동혁의 가슴팍을 힘없이 떠밀었다. 반항 없이 밀려난 동혁이 벌게진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제노에게서 시선을 피하며 컵을 개수대에 가져다 넣었다.
“내가 할 거야.”
“응, 미안해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동혁이 중얼거리며 한 발짝 물러섰다. 제노가 거칠게 일어서 정수기 앞으로 걸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단호하게 반댓손으로 잡아눌러 고정시킨 채 살균소독기에서 새 컵을 꺼내 물을 받는다. 스테인리스 컵에 천천히 물이 채워진다. 서두르지 않고 반이 찰 때까지 기다린 제노가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꿀꺽, 꿀꺽. 두 모금만에 컵이 빈다. 숨을 크게 두어 번 내쉰 제노가 걸어올 때보다 아주 조금 풀죽은 걸음으로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잠시간 먹먹한 적막이 감돌았다.
"........,"
동혁은 제노의 선 뚜렷한 턱끝을, 제노는 동혁의 얼굴 위 찍힌 선명한 서너 개의 점 위를 눈길로 더듬었다. 제노가 문득 울컥한 눈을 하고 입술을 물었다. 팔을 벌렸다.
“사랑해.”
“응.”
나도 그래. 동혁이 그제야 성큼 다가섰다. 제노의 두 볼을 감싸쥐고 눈을 맞췄다. 시선이 맞물리자마자 제노를 깊숙이 껴안으며 몸에 힘을 풀었다. 목덜미가 맞닿자마자 제노는 동혁이 몸을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서웠어?”
“응.”
“사랑해.”
“......,”
“사랑한다구, 동혁아. 응? 그니까 그만 떨어.”
네가 이러면 겁나. 내가 불쌍한 애가 된 것 같단 말야. 조곤조곤 흘러드는 제노의 목소리를 동아줄 삼아 매달린 채 동혁이 천천히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침대 앞에 무릎을 꿇은 동혁이 제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나직하게 숨을 쉬었다. 떨림이 천천히 가라앉을 때까지 제노는 동혁의 뜨끈한 귓가에 대고 사랑해, 사랑해, 조용히 속삭였다. 나직한 고백은 어딘지 주문처럼 들렸다.
미안하지 않기. 미안하다 대신 사랑한다 말하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소년 둘이서 서로를 동정하지 않기로 다짐한 약속. 평생 목이며 코끝에 붙어 떨어지지 않을 우리의 봄감기. 동혁아, 우리는 늘 훌쩍이며 살아가겠지. 네가 나를, 내가 너를 사랑하는 동안. 그건 곧 우리가 서로를 온 마음 다해 안쓰러워하는 동안일 테니. 네게서 어릴 적부터 풍겼던 피 냄샌지 쇠 냄샌지 물고기 냄샌지 눈물이 마른 냄샌지 모를 비린내가 꼭 내 피난처처럼 느껴져서. 내겐 그게 참 위안이라서,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해.
이 말을 할 때면 입안에서 비린 맛이 나.
제노가 저를 끌어안은 동혁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손끝에 감기는 온기가 단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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