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무겐] 꽃받침

뀨르롹긱 님께 드렸던 고대 연성 라무겐입니다.

꽃받침

아메무라 라무다 X 유메노 겐타로

“형, 나 왔어.”

“...이제 봄이네.”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러. 세계는 변하는데, 나만 제자리인 느낌이야...”

“글을 쓰는 것도 다 허황된 거짓말이잖아.”

“진실은 언제쯤 적히게 될까.”

“...다음에 또 올게. 오래 있는 것도 아직 익숙하지 않네.”

“자주 보러 올 테니 너무 상심하지 마. 내가 이기적인 놈이라서 그래.”

“갈게.”


시부야 외곽의 산책로.

오늘따라 복잡하게 꼬이는 생각에, 겐타로는 휴식을 원할 때마다 찾아갔던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시원한 공기.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공간.

조용한 산책로가 시부야에 있다는 사실마저 믿기 어렵지만, 시끄러운 중심가를 피해 사람이 없는 골목을 몇 번 드나들면 도착할 수 있는 자신의 아지트 중 하나였다.

‘아지트라고 말하면 조금 우스운가요?’, ‘뭐, 별로 상관 없으려나.’

스스로 건덕지 없는 농담을 던지고는, 그는 새로 출간할 소설의 주제를 생각하며 우울한 감정을 떨쳐 버리려고 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밤의 산책길.

조명 하나하나가 어두워지는 길을 나지막이 비추었고

하늘에서 내리는 벚꽃잎은 빛에 반사되어 불투명한 색을 띠고 있었다.

‘오호호. 봄이네요. 누가 뭐래도 봄이에요.’

나지막이 전작에서 등장한 조연 아주머니의 말투를 따라 하고는, 산책로를 걸으며 겐타로는 생각에 잠겼다.


“쳇, 그놈들...”

겐타로가 새로운 소설에 나올 주인공의 성격 구상을 거의 끝냈을 즈음.

자신의 앞에 분홍 머리의 익숙한, 아니, 옷차림을 보아하니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낯익은 사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무다.’

중얼거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그의 기분도 썩 좋지 않은 듯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름을 부르면 닿을 거리.

아는 체 말을 걸을까 입술을 달싹거리기를 한두 번.

하지만 라무다의 표정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 착잡해 보였다. 마치 오늘 산책길로 새어 가기를 결심한 자신처럼, 명확한 해답이 나오지 않아 회의감만 가득한 표정.

겐타로는 그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고 거리를 둔 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사실, 따라 걷는다는 것보다... 그가 내 계획에 갑자기 들어왔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만요...’

몇 분쯤 걸었을까.

오 분? 십 분?

짧은 시간 동안 그의 뒤를 미행하듯 걷던 겐타로는, 어느새 차기작에 대한 내용은 깡그리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저 자신의 앞에 있는, 후드를 푹 눌러쓰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짜증을 삭이는 한 사내만을 머릿속에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라무다의 혼잣말을 들으며, 오늘 그에게 있었던 일을 가늠하는 것이 겐타로에게 있어 새로운 과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 그놈들을 치려면...’

‘이 계획은 위험도가 높아...’

‘하지만...’

고심하는 라무다를 보며 겐타로도 그 나름의 해답을 내놓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라무다의 정확한 상황을, 상태를, 감정을 본인이 어떻게 알 수 있으랴.

‘직접 듣는 것이 아니면 무의미하겠죠.’

자신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을 깨달았기에.

착잡한 마음으로 혼잣말을 뱉었다.

“그렇지? 그 작전은 아무래도 무리겠지?”

어느샌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민트색 후드가 나풀거렸다.

“겐~타로!”

웃고 있는 표정.

자신이 뒤에 있다는 사실을 언제 알았는지, 라무다는 태연스럽게 뒤를 돌아보며 웃어 보였다.

쪼르르 달려와 태연스럽게 팔짱을 끼는 그를 보며, 겐타로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소생,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반가운 마음 반. 혼란스러운 마음 반.

그를 만나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었지만,

잠시 들렀다 온 묘지의 기억 때문인지 겐타로의 속내는 정리되지 못한 채 엉망이었다.

우울한 감정을 구석에 밀어 넣으려고 했지만, 울럭이는 느낌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겐타로는 자신과 다르게 표정의 변화가 자연스러운 라무다를 보며 생각했다.

‘또 감정을 연기하고 있군요.’


이제는 군데군데 있는 가로등의 빛에 의존하여 걸어야 하는 시각.

둘은 팔짱을 낀 채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길을 걸었다.

“벚꽃이 피었어요, 라무다.”

“헤에~. 그러네?”

정적을 깬 건, 각자가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꺼낸 겐타로의 말이었다.

벚꽃 따위, 이미 산책로를 무성하게 덮은 지 오래였는데.

처음 알았다는 듯 태연하게 대답하는 라무다는 이런 아첨이 입에 붙은 듯 보였다.

어떠한 대답을 의도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지만, 겐타로는 지금까지 질근질근 밟으며 온 벚꽃잎을 대화의 시작으로 건넨 자신이 그저 한심했다.

산책로를 가득 메운, 한편에 펼쳐진 벚나무들.

무성하게 피어 꽃비를 내리는 것도 찰나이리라.

결국 그것도 한 순간이니.

‘나와 다를 것이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겐타로는 떨어지는 잎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는 시간.

“겐~타로! 누가 꽃이게?”

겐타로의 표정을 나름대로 해석했는지, 라무다는 신이 난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어 벚꽃잎이 떨어지는 곳 한가운데에 섰다.

그는 분위기를 읽을 줄 알았다.

그렇게 라무다는 새로운 표정을 연기하며, 장난기 머금은 눈으로 겐타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음, 글쎄요. 여기 붙은 벚꽃잎이 꽃이겠지요.”

미묘하다 못해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대꾸한 겐타로가 고개를 까딱 해 보였다.

한 손을 턱에 괸 채 뚜벅뚜벅 라무다 앞으로 걸어간 겐타로는, 언제 라무다의 머리카락 위에 앉은 지 모를 벚꽃잎 하나를 떼어 날렸다.

“재미없어~!”

“... ...

소생, 벚꽃을 보면 과거의 일이 생각나 마음 한편이 아려온답니다.

사랑하는 친우는 저 벚꽃이 모두 지면 자신은 목숨을 잃을 거라고 했었지요.

그래서 소생, 친구를 위해 비가 오는 어느 날, 추위를 무릅쓰고 벚꽃 뒤에 있는 건물 벽면에 벚꽃잎 그림을 그리다 감기에 걸렸답니다. 아직도 벚꽃을 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기침이... 엣취! ... ... 물론 거짓말입니다.”

실없는 농담이면 금방 눈치를 채고 화제를 바꿔 주는 라무다였기에, 이번에도 실존하는 이야기를 적절하게 변환해 말했다.

다이스였다면 ‘에엣, 정말이냐-!! 너, 착한 사람이었잖아!!’라고 끔찍이 믿었을 테지만...

“겐타로는 꽃을 싫어해?”

예상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다이스가 없어서 그런가.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뀐 느낌이었다.

잠시 눈을 크게 뜬 겐타로가, 다시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

“흐음. 눈치가 너무 빠른 사람은 저에게 독이 되는군요.”

“아무래도 그렇지~.”

“아니에요. 사실 좋아합니다.”

“그러면 왜 그런 표정으로 말한 거야? 평소의 겐타로답지 않네~.”

“벚꽃은 빨리 져버리지 않습니까.”

“고작 그런 이유야?”

“당신을 꽃에 비유하기 싫었을 뿐입니다. ...저도 눈치가 빠르니까요.”

“...”

라무다는 대답 대신 천천히 눈을 감아 보였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그의 모습.

이윽고 살며시 가느다란 눈을 뜬 채 말했다.

“흐응, 겐타로. 무언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난 죽고 싶지 않아. 죽지도 않지.”

“...”

“하나뿐인 목숨, 너덜너덜하게 쓰고 돌려줄 테니까~.”

“...”

나름대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한 라무다였지만, 겐타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모습에 슬슬 짜증이 일어 보였다.

“... ... 내가 무슨 말을 했으면 좋겠는데?”

“인간의 경험과 생각은 본성을 굴복시키기도 합니다.”

“당사자에게만 깊은 의미가 있는 법이지.”

“나름의 걱정이었습니다.”

“그래, 그것참 뭣같네~!”

“방향이 다르다고 해 두죠.”

아, 이 답답한 기분.

실타래가 풀리지 않고 바닥을 구르는 기분이었다.

더 엉키고 꼬여, 이제는 자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더이상 산책로를 걷는 의미가 없었다.

‘말이 심했어. 더 키우면 안 돼.’

자리를 피하고자 멀어지려고 하는 그때.

아메무라 라무다는 그가 들으라는 듯 언성을 높여 말했다.

“있지, 라무다는 사탕이 없으면 죽잖아?”

“그 사탕은 중왕구에서만 공급받을 수 있어.”

“나야 그쪽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아양이나 떨며 개 같은 짓도 열심히 하는데.

겐타로가 그렇게 말하는 건, 왜인지 화가 난다고.”

“내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았게?”

“남은 시간 동안 넌 무얼 해줄 수 있는데?”


철컥.

냉한 분위기를 풍기며, 유메노 겐타로는 자택으로 돌아왔다.

쨍그랑!

현관에 놓아두었던 화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화병을 던진 자는 놀라는 기척도 없이 성큼성큼 원고지가 있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 시간 낭비야.’

‘시간 낭비야. 시간 낭비야. 모든 게. 허풍만이 가득한, 거짓으로 된 모든 글이.

시간 낭비야. 시간 낭비야. 시간 낭비야. 시간 낭비야.’

진짜 글을 써야 해. 진실한 글을 써야 해.

‘아메무라 라무다는 중왕구에 의해 목숨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폭력적인 현 정권의 실상은 인간을 개조하는 데까지 나아갔으며 불법 히프노시스 마이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중왕구의당수는이를묵인하고언론을장악하여자신들을정당한행위만을하는자라고칭하고있지만이는전혀사실이아닙니다.그렇게내가사랑하는이는이미목숨을’

그에게 글을 쓰라고 강요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흘리고, 눈물에 번진 글자를 새로운 원고지에 옮겨 쓰고,

그러다 퍼뜩 떠오른 문장이 있다면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글자만을 골라 욱여넣기 바빴다.

뚝.

만년필 펜 심이 꺾이는 소리가 났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원고지의 반은 찢겨나갔고

판은 만년필이 그어 놓은 난도질의 흔적으로 보기 흉해져 있었다.

‘아...’

유메노 겐타로는 울고 싶어졌다.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제는 누군가가, 정말 잘라줘야 해.’

소설가며, 플링 포세며, 사명이며.

그것이 전부 거짓이라면 무슨 소용인가.

너덜너덜할 때까지 쓰고 돌려주는 목숨이 무슨 소용인가.

‘이해할 수 없어...’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그를 이해하려는 생각만 수십 번.

잠들지 못하는 머리는 한동안 겐타로를 뒤척이게 했다.

그는 몇 날 며칠을 앉아 글을 썼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다시 원고를 쓰고, 지우고, 옮겨 적기 바쁜 나날이었다.

새로운 문장을 이어가려고 하면 다른 문장이 떠오르고,

그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이어 나왔기에 손이 그의 머리를 따라가지 못했다.

조급한 마음만 가진 그에게 여유란 없었다.

글은 점점 엉망진창이 되었고, 나중에는 중왕구의 실태 고발을 위해.

아니, 중왕구가 더 파렴치한처럼 보일 수 있도록 자신의 상상력이 허용하는 한,

현재에서는 전혀 따라잡을 수 없는 일까지 지어내며 그들을 추악하게 만들었다.

유메노 겐타로는 알고 있었다.

검은 얼굴이 되어가는 것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무엇이 두려우랴.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바늘 천 개도 삼킬 수 있었다.

소중한 자를 잃는 경험은 참담했고

겐타로의 인생에서 쓰라린 경험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리라.

그러나 모든 것이 처음인 그에게, 절망스러운 감정은 발목을 잡고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글을 쓰는 것이 이제는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해. 형, 형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짜증에 머리카락을 헝클이던 그가 원고지 위에 엎어져 불규칙한 숨을 내쉬었다.


글을 쓴 지 닷새가 되는 날 밤.

그는 자신이 밤새 써 내려간, 초고 그대로의 상태인 원고지 묶음을 꾸깃꾸깃하게 접어 아메무라 라무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처음의 발걸음은 두려움으로.

중반의 발걸음은 조급함으로.

마지막의 발걸음은 결국 이런 글밖에 쓰지 못한다는 자괴감이었다.

라무다의 작업실 앞.

그는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차가운 출입문을 노크해 보였다.

“누구?”

“겐타로입니다.”

“...들어와.”

높은 신호음이 짧게 들려오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철컥.

문을 연 라무다는 초췌한 몰골의 겐타로를 천천히 훑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 주위가 벌겋게 달아오른 유메노 겐타로가 도끼눈을 한 채 소맷귀로 하관을 가려 보였다.

둘은 아무 말 없이, 테이블 하나를 두고 마주 앉았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처음 적막을 깬 건 라무다였다.

그는 분위기를 잘 읽을 줄 알았다. 늘 그랬듯이.

“기분 상할 수밖에 없었지. 어쩔 수 없었잖아. 상황이.”

그는 손을 꼼지락대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 ... 미안.”

겐타로는 대답 대신 조용히 자신의 원고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폭로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무엇이 당신을 위한 길인지 모르겠어요.

글을 쓰고, 지우고, 원고지를 찢는 동안에도 감정이 진정되지 않아서...

이 글이 당신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한 종이가 되어버릴까 봐.

차라리 모든 사람에게 기억된다면 좋겠지만. 벚꽃잎보다 못한 재가 되어 흩날리면 어떡하죠.”

덜덜 떨리는 손이 책상에서 내려왔다.

“... 두렵습니다, 라무다.”

“저는 당신이 제 곁에 머물렀으면 좋겠어요.

당신의 기분을 기록하고, 당신의 행동, 습관, 사소한 모든 것을 남겨두고 싶습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수필이 되기를.

라무다는 책상에 올려진 원고지를 자신의 쪽으로 끌고 왔다.

그리고는 구겨져 엉망인 종이를 소중하게 펼치고, 어슴푸레 빛을 띄는 자신의 눈에 담기 시작했다.

원고지의 내용은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관용구도, 문단의 구성도, 맞춤법도 엉망이었지만, 그는 내색 하나 하지 않고 필기를 찬찬히 읽어 나갔다.

진중한 모습이었다.

다시 초침 소리만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원고지의 마지막 장까지 읽은 라무다가 일어나 겐타로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껴안고는, 목멘 소리로 속삭였다.

“겐타로.”

“... ... 고마워.”

애타게 매달리는 라무다의 모습.

품에 안겨 사랑을 속삭이는 라무다를 보며, 겐타로도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발그스름하게 물들어진 라무다의 볼을 쓰다듬으며 그가 말했다.

“라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의 끝은 비극이에요. 그런 일은... 한 번으로도 족해요.”

라무다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안았다.


다음날.

눈을 뜬 겐타로는, 라무다가 자신에게 매달린 채 함께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닷새 동안 자지 못했던 잠을 전부 자서일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본 시간은 오후 다섯 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라무다. 일어나세요. 벌써 하루가 다 갔습니다.”

“우웅...”

느릿하게 눈을 비빈 라무다는 정신을 못 차리는 듯 ‘응, 으응.’이라며 옹알이만 반복했다.

‘하긴, 어젯밤 그리 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겐타로는 옷가지를 챙겨 입고, 자신의 집인 마냥 능숙하게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중간중간 라무다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피곤한 기색의 라무다는 아직까지 겐타로의 겉옷을 껴안고 뒹굴 뿐, 움직일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우물우물 밥을 삼키던 라무다를 보며, 겐타로는 어젯밤 일이 생각나 젓가락을 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경황없이 했어. 정신도 없었고요...’

꼬이기만 하는 자신의 속과 다르게, 라무다는 활기 넘치게 밥의 절반 이상을 먹어가고 있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설거지를 하던 와중.

누군가 음흉하게 자신의 허리를 감쌌다.

“설거지 중이에요, 라무다.”

“겐~타로.”

“네, 듣고 있어요.”

“벚꽃 보러 가자!”

옆으로 슬며시 고개를 돌린 겐타로는, 벚꽃길에서의 그 모습보다 더 환하게,

그리고 거짓 하나 없는 미소를 자신에게 보여주고 있는 라무다를 보았다.

“좋아요.”


다시 찾은 외곽의 산책로.

벚꽃잎은 아직도 나풀나풀 떨어지고 있는 참이었다.

겐타로는 잠시 ‘다음 소설 주제로 써야겠군.’이라 생각하다 눈을 돌려, 사랑스러운 자신의 애인을 쳐다보았다.

‘밝은 분홍색 머리카락. 새하얗고 보드라운 피부. 달콤한 체취. 아릿한 담배 냄새.’

모두 사랑하는 그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밤의 산책길.

조명 하나하나가 어두워진 길을 나지막이 비추었고,

이제는 드문드문 떨어지는 벚꽃잎이 빛에 반사되어 불투명한 색을 띠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말 없이 길을 걸었다.

그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번에는 라무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겐타로.”

“나는 이 순간을 사랑해.

벚꽃이 흩날리는 이 밤에 사이사이 보이는 너를 사랑해."

"내가 꺼내기 싫어하는 말을 네 입으로 말해주는 너의 성격을,

그리고 내가 벚꽃에 휩쓸려 사라져도 날아가는 벚꽃잎을 하나하나 붙잡아 날 그려줄 너를 사랑해.”

라무다는 천천히, 그리고 능숙하게 그의 목을 자신의 팔로 감싸안았다.

“...키스할래?”

“날 놓아주지 마.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해줘.”

달빛이 그들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라무다의 작업실.


“얏호! 각자 노래 준비는 어느 정도 했나요~?”

“나의 겜블 사랑이 물씬 담긴 곡으로 준비했지!”

“다이스, 아직 빌린 돈도 못 갚았는데, 겜블이 주제인 곡을 써서 어쩌려는 건가요...”

“아앗!! 그래도!!”

“아핫, 각자 마음에 드는 곡을 부르는 게 좋으니까 괜찮지 않아?”

“후우...”

“겐타로는 무슨 곡인데?”

“소생은...”

겐타로는 가사가 적힌 원고지를 내밀어 보였다.

“꽃받침? 꽃이 아니라 꽃받침?”

다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에, 꽃받침이랍니다. 가장 연약한 꽃잎들을 이어 주는 존재.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작성했습니다.“

겐타로가 눈을 살포시 내리깔며 말했다.

‘당신을 위한 곡입니다. 라무다.’


꽃받침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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