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랑가

모랑가 二

동젠

새 도복으로 갈아입은 동혁과, 성화에 못 이겨 결국 먹물 튄 저고리를 벗어 내주고 새 옷을 꺼내 입은 제노가 나란히 전각의 계단 입구에 몸을 붙이고 앉았다. 바닥은 그새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으나 제노가 지붕 아래에서 햇볕을 쬐고 싶다 고집한 탓이었다. 동혁이 눈을 굴려 이제는 익숙한 품으로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댄 제노의 눈치를 봤다. 언제 언성을 높였느냔 듯이 눈을 감고 햇볕을 받는 얼굴이 편안하다. 녹아 늘어진 강아지 같다. 

누각 안쪽까지 쩌렁쩌렁 울려 들어오던 노성이 떠오른다. 매섭게 혼을 내던 조금 전의 얼굴도.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던 위압감. 이 선문에 들고 나서 딱 두 번째로 본 무섭고 차가운 얼굴. 그게 전부 저를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이 문득 믿기지 않아서 동혁은 새삼스런 얼굴로 눈을 끔벅였다. 시선이 떨어질 줄 모르자 결국 평온하던 얼굴에 슬쩍 미소가 비친다.

“뭘 쳐다보고 있어.”

“……,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렇게 티나게 보는데 모르면 바보지.”

“쳇.”

동혁이 입을 삐죽댔다. 눈치챈 제노가 웃었다. 동혁은 숨길래야 숨겨지지 않는 애 같은 면이 있다. 재바르고 눈치 빤한 성격과는 별개였다. 그래도 몇 주 지겹도록 붙어 있었다고 좀 편해졌는지, 동혁은 시키지 않은 말을 잘도 떠들었다. 아주 틈을 안 주십니다, 만랑. 저도 사냅니다. 어찌 제가 뭐라도 해 보려고 하면 귀신처럼 오세요. 어미 치마폭에 싸여 자라는 어린애도 아니구요. 물론 아까 일이야, 제가 당황했으니까……. 제노가 종알종알 떠들어대는 동혁의 말허리를 잘랐다. 

“열여섯이었다.”

“예?”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내 나이가 열여섯이었다. 삼 년 전에도 이런 긴 봄이 왔었어. 부끄럽지만 봄 내내 몰래 여기 낭도원에 오곤 했지. 내 숙소엔 아무도 없었으니까, 먼빛으로라도 또래 아이들을 보려면 갈 수 있는 곳이 여기밖에 없더라고. 제노가 줄줄 고백한다. 동혁이 제노를 내려다봤다. 큰 눈을 가만히 내리감은 고운 얼굴 위로 열여섯의 앳된 표정이 본 적 있던 것처럼 스쳐 지나갔다. 

동혁은 빠르게 가늠했다. 열여섯이면 우영이 혼자 저자로 빠져나가 상인들에게 탁주를 얻어마시다 걸려 처음으로 경을 쳤던 나이다. 그걸 시작으로 참 지겹게도 쏘다녔다. 동혁은 거의 울면서 우영을 잡으러 다녔고, 우영은 매번 볼이 심술로 퉁퉁 부어 동혁의 손에 잡혀 들어오곤 했었다. 헌데 제노는 열여섯에 삼백의 낭도와 함께 선문에 들었다. 또래 아이들은 제노에게 존대하고 제노에게 충성하고 제노를 따른다. 동혁은 숨막히는 기분에 천천히 호흡했다. 만랑 혹시 외로움을 많이 타십니까, 하는 주제넘은 물음이 문득 목구멍으로 치받아 올라왔다. 건방진 말을 꾹꾹 눌러 삼키며 동혁이 슬그머니 머리를 기울였다. 무게를 싣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며 제노의 머리 위에 뺨을 기댄 동혁이 야트막하게 모인 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노가 발꿈치를 돌계단 위에 문질렀다.

“나는 슬픈데, 뭐가 슬픈지도 모른 채로 그 봄 내내 슬펐는데.”

그 해 봄이 참 찬란했어서. 그래서 기억이 나. 풍월각의 벚꽃은 만개했고 낭도원의 목련은 아주 오래 제자리에 매달려 있었지. 제노가 웃었다. 웃음이 입가에서 바스라졌다. 입꼬리가 둥글어서, 눈 감은 채로 웃는 얼굴을 내려다보니 꼭 우는 것 같다. 생각을 읽은 것마냥 제노가 흐흥, 하고 이를 내어 웃었다. 

“동료는 많았어. 그러나 벗은 없었다.”

“…….”

“누굴 곁에 두고 싶었어.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그래서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면 더 좋을 것 같았지. 되려 내가 잠시 기대도 괜찮을 이라면 더 바랄 게 없고 말이다.”

제노는 덤덤하게 손을 뻗어 동혁의 왼손을 쥔다.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가 친구의 손을 잡는 것처럼 순진하고 다정한 손길이다. 마디가 굴곡진 손가락 마디마디를 매만지며 손장난을 치다 이내 굵게 도드라진 중간마디 밑으로 제 손가락을 밀어넣어 오는 제노의 손길에 동혁이 그만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네가 내 제자인 줄 알았다.”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그러나 이제는 제자가 아니라 벗 같아.”

“……, 만랑.”

어쩐지 먹먹해, 동혁이 제노를 가만히 호명하곤 입을 다물었다.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입을 열면 그러지 말란 말이나 그럴 리 없다는 말 둘 중 하나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았는데, 진정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노는 별 반응 없이 잡은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머뭇거리다 툭 묻는다. 

“내가 하는 말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애?”

“……, 아니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거 아쉽네.”

“허나 어울려 드리려고요.”

친구가 없으셔서 저 같은 것이 좋다시는데, 맞춰 드릴 수밖에요. 동혁이 농담조로 툭 던진 말에 제노가 눈을 꾹 내리감으며 소리없이 웃었다. 눈과 뺨의 가운데에 얕게 홈이 패이듯 주름이 졌다.

“그러려면 평생 내 곁에 있어 주어야 할 텐데.”

가벼운 말끝이 귓가를 긁었다. 어쩐지 뱃속에 뜨거운 물 같은 것이 울컥 고이는 것만 같아, 동혁이 저도 모르게 무릎을 모으며 몸을 웅크렸다. 너를 더 오래 보고 싶다는 속내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겉으로는 친구에게 건네도 이상하지 않은 말이나, 실은 저자의 연인들이 정인에게 하는 고백과 그 궤를 같이했다. 선문 안에 갇혀 자란 어린 화랑께서 그걸 아실 리는 없고, 그저 순진하셔선. 떠나가기 전에 알려줘야지, 선문 밖에선 다른 이에게 함부로 이런 말 하지 마시라고. 남들이 들으면 단단히 오해하고 말 것이라고. 나 역시도 심장이 바닥까지 쿵 떨어졌다 올라왔다는 사실만은 그냥 숨기기로 하고. 

깍지낀 손 사이가 더웠다. 동혁이 그늘진 얼굴을 하고 엄지손가락으로 제노의 손등을 가만가만 쓸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속이 쿡쿡 찌르듯 아팠다. 조반 먹은 게 잘못되었나……. 무상히 중얼거린 동혁이 별안간 가슴팍에 느껴지는 무게에 억, 하고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시야가 붕 뜨더니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간다. 냅다 달려들어 동혁의 가슴팍을 제 뒤통수로 눌러내린 제노가 꿈질꿈질 움직여 누각 마루 위에 대자로 퍼져 누운 동혁의 배를 베고 눕는다. 개운한 표정이다.

“내가 말하는 내내 하늘만 보네, 너는.”

“아니, 그게……. 죄송해요.”

“아냐. 이제 나도 보려고.”

나무로 된 마루 위에 등만 납작 붙인 채 고개를 쳐들고 어쩔 줄 몰라하던 동혁이 편안해 보이는 제노를 곁눈질했다. 가느스름하게 뜬 눈 아래로 와잠이 도톰하게 올라붙어 있다. 에라 모르겠다, 동혁이 주변을 한두 번 휘휘 돌아보고는 뒤통수를 도로 마루에 툭 내렸다. 자연히 몸에 힘이 풀린다. 누워서 보는 하늘은 배로 더 아름다웠다. 전각 지붕이 둥글게 깎아 먹은 푸른 화폭 위로 하얗게 점점이 수놓은 듯 머리 위로 드리워진 조팝나무 꽃가지. 한참을 누워 하늘을 보던 두 소년 사이에 규칙적인 숨소리가 점차 스며들었다. 한숨 자자. 곧 해가 지니 석반도 함께하고. 내가 함께 있으니 괜한 소리 들을 일은 없을걸. 잠에 들락말락, 나른하고 태평한 제노의 목소리가 공기를 흐늘흐늘 유영해 동혁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동혁이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관을 벗은 제노의 머리칼을 손에 쥐었다. 빗듯이 쓸어내린다. 손가락 사이로 사르르 빠져나가는 느낌이 곱다. 제노는 잠시 멈칫했다가 곧 푸스스 부서지는 웃음을 웃는다. 햇빛이 여전히 곰살맞게 내렸다. 


가짜를 버릴 순간은 늘 온다. 죄가 되기 전에 벗어던지는 거짓으론 벌 받지 않는다. 이동혁에게는 버려지는 것만이 천운임에 분명했다. 그랬기에 동혁은 낭도원 숙소의 작은 제 침상 속에서 잠에 들었다가 거칠게 흔들어 깨워지면서도 저도 모르게 다행이다, 다행이다, 하고 되뇌었다. 도련님이 오셨구나. 잡혀왔는지 제 발로 돌아오셨는지 몰라도 제자리로 돌아오셨구나. 애기몸종 막이를 대동하고 한밤중에 낭도원에 든 우영은 표정이 없었다. 본 적 없는 얼굴이다. 우영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예의 희고 선 고운 얼굴을 비스듬히 틀어 방 벽만 뚫어져라 쳐다봤으나, 동혁은 더럭 겁이 났다. 그 싸늘한 시선이 어쩐지 건방진 제 노복을 탓하는 것만 같아서였다. 열어젖혀진 문밖에는 일면식도 없는 화랑 둘과 대감의 사병장 한 명이 함께 저승사자처럼 서 있었다. 

동혁은 무얼 해야 할지를 잘 아는 눈치빠른 노복이었다. 침상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다급히 침의를 벗었다. 얇은 속곳 위에 막이가 내민 제 원래 옷을 껴입고, 입고 있던 침의를 두어 번 털어내 익숙한 손길로 정돈한다. 우영의 몸에 걸쳐진 두루마기를 조심스레 벗겨내자 마찬가지로 속곳 차림인 뼈대 탄탄한 몸이 드러난다. 장차 커서 장부가 되실 것이라고, 큰일을 하셔서 나랏일에 도움이 되실 것이라고. 그런 소리들을 심심찮게 들었던 도련님. 검 쓰는 것과 머리 쓰는 것을 전부 싫어하면서도 실체 없는 상대와 경쟁하듯 누구보다 열심히 단련하던. 동혁은 망설임없이 침의를 우영의 몸에 걸쳤다. 제 옷고름을 맬 때는 서툴던 손놀림이 우영의 매무새를 만질 때에는 한치 머뭇거림도 없이 빠르고 정확했다. 

- 도련님.

- …….

속삭이듯 건넨 부름엔 역시 대답이 없다. 동혁은 그저 입을 다물고 침의 매듭을 마무리지은 뒤 곧장 제 작은주인의 발치에 꿇어앉았다. 강건하셔야 해요. 이제는 도망치시면 안 돼요. 끼니도 잘 챙기시고. 랑의 말씀에는, 대드시지 마시고……, 여긴 제가 없으니까. 중얼중얼 늘어놓는 말에 우영이 가만히 고개를 돌려 동혁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봤다. 한 방을 쓰던 낭도들 서넛이 때아닌 소란에 작게 짜증을 내며 잠에서 깨어났으나, 어둠 속에서 흘끗 보아도 귀티가 풍기는 낯선 이의 발치에 웅크려 데님을 매는 동혁을 보고는 조용히 말을 잃었다. 곡우영은 이제야 제대로 곡우영이다. 낭도로서 손색없는 우영의 모습을 확인한 가짜 우영은 무릎걸음으로 걸어 방 한구석의 붙장 문을 열었다. 신고 있던 버선을 벗어 그 안에 가지런히 놓은 뒤 저 안쪽에 처박아 두었던 신을 꺼냈다. 낭도원에 들기 전에 삼아 온 새 짚신이다. 품에서 같은 것을 꺼내 건네려던 막이가 무안한 얼굴로 먼저 방을 나선다. 

동혁은 제 동료였던 이들을 돌아보지 않고 신을 꿰어 신은 뒤 댓돌 아래로 내려섰다. 감히 두 화랑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막이와 함께 흙바닥 위에 납작 엎드려 나란히 절한 뒤, 기다시피 일어나 사병장을 따라 뛴다. 밤중의 넓고 웅장한 도원 전각들 사이로 기척 죽인 발소리가 조용히 퍼졌다. 이날이 오리란 것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제 것이 아닌 일에 욕심을 내기 싫었다. 발목을 잡을 만한 것들도 만들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열린 뒷문으로 몸을 숙여 빠져나가며, 동혁은 딱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화랑들이 기거하는 곳은 훨씬 멀었다. 어둠에 잠겨 전각 끄트머리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잠들어 있을 누군가가 떠오른다. 수순처럼 내일 내보이기로 했던 숙제가 생각난다. 아직 좀 덜하였는데.

이동혁은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 

가진 것이 없었으므로 당연했다.

“진짜 득오가 왔다고.”

“오셨습니다. 예, 어젯밤에 분명히 오셨었다는데.”

말끝을 흐리며 안절부절못하는 서운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제노가 보던 서책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관자놀이를 짚었다. 선 곧고 뚜렷한 눈썹이 가만히 옆으로 뉘어졌다. 올 것이 왔구나.

아침부터 낌새가 이상했다. 못해도 진시 전에는 낭도원 뒤뜰로 나와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야 할 동혁이 없었다. 아침나절이 다 가도록 마루에 걸터앉아 기다려도 아이는 나오지 않았다. 아파 앓아눕기라도 했나 싶어 낭도 몇을 붙잡고 종적을 물었으나 아는 이가 없다. 짐작가는 바는 있었으나 섣불리 판단할 순 없었기에 속만 바짝 태우던 중, 정오가 지난 후에야 들려온 소식이 이거라니.

기실 이동혁이라는 아이를 아는 화랑도의 사람이라면,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애가 천출임을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개중 제노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서운이 가져온 소식은 오히려 반갑게 들릴 지경이었다. 갔구나. 진짜가 왔다면 가짜는 떠났겠지. 아마 밤을 틈타 낭도원을 빠져나갔을 터다. 아무도 모르게 제가 왔던 곳으로 돌아간 것이다. 떠날 줄은 알았어도 이렇게 하루아침에 이별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언질이라도 좀 주고 갈 것이지.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제노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서운의 앳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툭 물었다.

“그래, 만나 보았느냐? 제자리를 찾은 기분은 어떻다더냐.”

“……, 그게, 만랑.”

“이럴 때가 아니지. 내 직접 친우를 맞으러 가야겠구나.”

말릴 틈도 없이 제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서운이 기겁하며 조막만한 몸으로 앞을 막아섰다. 만랑, 만랑 잠시만요!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애처롭게까지 들린 탓에 입꼬리를 씰룩이던 제노가 아이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하고 끝이 짧게 끊기는 특유의 웃음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나도 안다, 서운아.”

“예?”

“왔다가 채 아침이 되기도 전에 다시 사라졌겠지.”

“어? 그것을 어찌.”

그럴 것을 몰랐으면 그놈 벗이 아니지, 내가. 웃음 끝에 한숨을 내쉰 제노가 손등으로 찔끔 나온 눈물을 찍어냈다. 예상을 벗어나는 법이 없는 건 그 애나 그애 주인이나 마찬가지로구나. 어쩜 그렇게 뻔하게들 구는지. 제노가 기지개를 한 번 쭉 켜고 옷자락을 탁탁 털어 매무새를 정리하고는 놀란 토끼 눈을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서운에게 다정히 웃어 보였다. 앞장서거라. 우영의 방으로 가자. 아마 그 여우 같은 놈이 아무 흔적 없이 그저 떠나진 않았을 것이다. 어쩐지 조곤조곤 이르는 목소리에 즐거움이 어려 있다. 서운이 잠시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화드득 뒤돌아 뛰듯이 종종걸음쳤다. 아이의 얼굴에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이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은 제노가 쿡쿡 웃으며 서운의 뒤를 따랐다. 그래, 우영아. 내가 네 뜻을 잘 알았다.

그렇다면 너는 나를 위해 무얼 어디까지 남겨놓았을까. 

방 밖을 나서는 화랑의 눈이 묘한 기대감으로 빛났다. 

우영의 방문이 다소 성급한 소리와 함께 벌컥 열렸다. 문지방을 밟지 않고 성큼 들어선 제노가 저를 향해 쏠리는 시선을 마주쳐 주지 않을 채 방 안을 쓱 훑어보았다. 함께 방을 쓰는 낭도 셋은 이미 이야기를 들었는지 훈련용이 아닌 정복 낭도복 차림으로 방 가운데에 정좌하고 앉아 있다. 오른쪽 벽에 붙은 침상 하나가 유달리 깨끗하다. 앞뒤 가릴 것 없이 우영의 침대로 향한 제노가 손을 뻗어 이불을 쓸었다. 한 번도 와 본 적 없고 오리라고 생각도 못 해 보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눈치를 보며 이불을 펴고 개고, 조반과 석반을 들고, 뜬눈으로 밤을 지샜을 까맣고 동그란 얼굴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피식 미소지은 제노가 손끝에 걸리는 종이의 표면을 손끝으로 느리게 문질렀다. 제노를 기다렸다는 듯 정갈히 사각형으로 두 번 접혀 침상 위에 놓여 있던 종이의 뒷면으로 희미하게 붓글씨가 비쳤다.

"……,"

크게 숨을 들이마시었다가 내쉰 제노가 낚아채듯 편지를 집어들어 폈다. 예나 지금이나 곧고 정갈해 교본으로 써도 될 법한, 익숙한 우영의 글씨체다. 랑죽지전상 득오곡배상. 짧고 간결하고 살짝 불퉁하게도 느껴지는 글 첫머리에서 우영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듯했다. 꼼꼼히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제노의 눈동자에 서서히 만족스런 눈빛이 어렸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내가 너를 맘 편히 보낼 수 있지 않겠느냐. 제노가 편지를 본래대로 접어 품속에 쑤셔 넣고 돌아섰다. 정좌하고 앉은 세 명의 낭도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진작 다 보았을 테지?”

“…….”

“아무래도 좋아. 너희 모두 원래부터 득오곡과 한 방을 썼느냐?”

“예, 만랑!”

“허면 넷 다 일어나서 외출 준비 하거라. 서운아!”

“네, 만랑?”

“채비 하거라. 우영의 본가에 갈 것이다.”

지금 바로. 단호히 발음한 제노가 발걸음을 돌려 방을 나섰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만큼 마음이 앞서 달렸다. 저자행을 아직 허락받지도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평소의 제노라면 생각하지도 못했을 일이었다. 제노는 허리춤에 채워진 검의 자루를 어루만지며 가만히 입속말로 되뇐다. 우영아.

그래, 네가 옳구나. 네가 말했듯 나는 불 보듯 빤한 사람인가 보다. 나 같은 이에게도 속절없이 소중해지는 것이 정말 있구나. 놓치고 싶지 않은 소유가 생기는구나. 거짓을 탐하게 되는 것은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똑똑했기 때문이라더니, 그 말이 정말 맞구나. 우영아.

나는 덜 자랐으나 이미 너무 총명해서 네가 알려준 곳으로 간다.

그 아이를 되찾으러 간다.


“혁아! 안방 상 내갔니!”

“막이가 갔어! 누님도 애들이랑 요기하러 가!”

부엌간을 향해 악지른 동혁이 뻐근한 어깨를 두어 번 돌렸다. 다리와 허리가 불편한 탓에 꼬박꼬박 더운물로 온욕하는 대감마님의 시중을 드느라 아침마다 약재를 넣고 팔팔 끓여 적당히 식힌 물을 두 솥씩 내가야 했다. 아궁이에서 욕간까지 왔다갔다하느라 넘친 물로 팔뚝이 축축하게 젖었다. 둘둘 말아올려 쭉 짜놓은 소매가 이제야 좀 마르는 듯해, 접힌 부분을 펴 꿉꿉하게 남은 물기를 탁탁 턴 동혁이 오랜만에 느껴 보는 까슬한 무명의 감촉이 어색한 듯 팔뚝께를 가만히 쓸었다. 

다시 돌아온 주인댁은 우영의 부재 외엔 변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선문 며칠 들어가 있었다고 얼굴에 기름이 도는구나. 인사를 대신해 툭 내뱉던, 무심한 듯 날선 안방마님의 목소리가 자꾸만 가슴께를 꾹 찔렀다. 꼭 네 주제를 절대 잊지 말라는 경고처럼 들렸다. 가만히 한숨을 내쉰 동혁이 대청에 기대 세워져 있던 빗자루를 쥐며 신에 발을 구겨 넣었다. 몇 주간 비 대신 칼자루를 잡은 탓에 고단새 굳은살이 달리 배겨 손에 잡히는 감촉이 어색했다. 이제 저는 화랑을 따르는 낭도가 아니라 한낱 천것일 뿐이다. 아니 이제, 라고 말하는 것도 주제에 맞지 않지. 애초에 이보다 더 높은 것을 꿈꿔서는 안 되는 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

아마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제노의 얼굴에 동혁이 가볍게 머리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 잘해주셨는데. 이젠 저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인 것이다. 잠시 신세를 고쳐 분에 겨운 생활을 했다지만, 참 이상하게도 좋은 것을 입고 먹고 배웠던 시간들보다 제노가 훨씬 더 그리웠다. 그 앳되지만 강단 있는 얼굴, 저를 향해 다정히 웃어 주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동혁이 괜시리 시큰해지려는 눈가를 손등으로 꾹 누르고는 마당으로 내려섰다. 아, 제대로 하직도 못하였는데. 

하늘 천 따 지도 모르는 무식한 놈한테 효경에 논어를 가르치려 하시다니요. 옷을 바꿔 입었다고 핏줄이 바뀌지 않는 것을. 한숨처럼 헛웃음이 새어나온다. 동혁이 고개를 두어 번 휘휘 젓고는 부러 힘을 주어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싸리비 끝에서 훅 모래먼지가 일자, 잠시 콜록거린 동혁이 한쪽 구석의 대야를 들어 익숙한 손길로 마당에 물을 뿌렸다. 뿌린 자국대로 길고 넓게 흙이 젖어들어갔다. 

“…….”

겨우 말렸는데. 또다시 팔꿈치까지 온통 물이 튀었다. 가만 제 두 손을 내려다보던 동혁이 다시 빗자루를 세게 움켜쥐었다. 어둑한 눈가에 짙은 자조가 어렸다. 잊어버리자. 잠깐 꿈을 꾸었을 뿐이야. 장성하셔서 장차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받으시라고, 속으로 빌어나 드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제 제겐 그 잠깐의 시간을 기억할 자격도 없었다.

이리 오너라.

누군가 길게 읍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랑에 다과상을 들여놓던 동혁이 흘끗 대문 쪽을 돌아보았다. 묵묵히 상을 받던 대감이 두어 번 밭은기침을 하더니 마당을 쓸던 막이를 향해 막이야, 나가 보거라, 하고 소리를 높였다. 몇 년을 두고 속을 앓아 온 탓에 쩌렁쩌렁하던 목소리가 많이 상했다. 예! 싸리비를 마루에 기대 세워 놓은 막이가 재재바른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확인한 동혁이 팔을 뻗어 사랑의 문을 닫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갑니다, 나리! 누군지 모를 객을 향한 막이의 앳되고 높은 목소리를 배경 삼아 다탁 위에 찻잔과 유과 접시를 가지런히 내려놓은 동혁이 대감의 앞에 어지러이 널려 있던 문방사우를 익숙한 손길로 정리해 옆으로 조심히 내렸다. 대감의 흔들림 없는 시선을 받으며 덜 마른 종이와 다 마른 종이를 분리해 차곡차곡 겹치고, 애써 간 먹이 넘치거나 흐르지 않게 벼루를 조심히 들어 옮기고, 서진과 연적을 필묵함에 정리해 넣은 뒤 마지막으로 붓을 집어든 동혁이 저도 모르게 잠시 멈칫했다. 질리도록, 지겹도록 연습했기에 이젠 어찌 잡아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물건이다. 그 조금의 틈을 놓치지 않은 대감이 가만히 입을 열어 불렀다. 

“동혁아.”

"예?"

“그립더냐?”

뜬구름 같은 물음이다. 동혁이 멍하니 대감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얼 일컬은 말씀인지 순간 바로 알아채지 못한 탓이다. 대감이 마른 나뭇가지 같은 팔을 뻗었다. 붓을 쥔 채 굳은 동혁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 돌린다. 한때 이름을 날렸던 무관답게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다. 드러난 동혁의 손바닥과 손가락 곳곳에는 새로 생겼다 터진 물집이 붉은 자국으로 남아 있다. 그제야 무얼 묻는 질문인지를 알아차린 동혁이 야트막하게 숨 쉬었다. 튀어나가는 말보다 가로젓는 고갯짓이 더 빨랐다.

“당치도 않습니다. 제 자리가 아닌데 어찌 감히요.”

“좋은 곳, 넓은 세상에 더 미련이 남지는 않았느냔 물음이었다.”

“소인은 다 잊었습니다.”

“그 말이 정말이냐.”

“대감마님.”

소인은 다 잊었습니다. 동혁이 자세를 고쳐 제대로 꿇어앉으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대감이 피식 웃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껏 자랄 때까지 지켜봐 온 이 소년 노복은 참 한결같이 미더웠다. 비슷한 나이지만 기가 약한데다 성정이 예민한 아들 우영과 반대로, 수더분하니 잘 자라 도련님을 동생 대하듯 싹싹하게 챙기는 이 녀석을 아들처럼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황송함을 연기하는 얼굴에 짙은 자조의 빛이 어려 있음을 놓치고 지나갈 리 없었다. 크고 건조한 눈을 송아지마냥 뜨고 여기저기 싹싹하게 다니며 눈칫밥이나마 겨우 먹고살던 아이가. 

“잠시 보냈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 대감마님, 저는 정말로,”

“아주 애어른이 되어 돌아왔구먼.”

대감이 팔을 뻗어 동혁의 손등을 가만히 감싸쥐었다. 받아 본 적 없는 손길이다. 깜짝 놀란 동혁의 몸이 튀었다. 팔꿈치에 덜커덩 밀쳐진 다탁 위로 찻잔에서 흐른 물이 살짝 넘쳐흘렀다. 

“아, 저, 대감마님. 죄송해요. 닦을 걸 가져오겠습니다.”

“되었다.”

고얀지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는구나. 하긴 열여덟이면 그쯤 처세는 배울 때가 되었다. 어린 녀석 손이 뭐 이리 거칠어선. 당황한 동혁이 황망히 잡힌 제 손등을 내려다보며 눈을 굴렸다. 평소라면 혼쭐을 내셨을 텐데. 대감은 고요히 동혁아, 호명한다. 동혁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 대감마님, 대답했다. 상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웠다.

“네가 우리 집에 기거한 지 십 년이구나.”

“…….”

“어미아비의 얼굴이 기억나느냐?”

무어라 대답하려던 동혁의 입술이 조개처럼 꼭 다물렸다. 어쩔 줄 모르고 다탁 위를 방황하던 왼손이 무릎의 바짓단을 콱 잡아 쥐었다. 곧장 잡힌 손을 비틀어 뺀 동혁이 무릎걸음으로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더니 방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이마가 쿵 바닥에 닿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한시도 잊어 본 적 없습니다.”

“…….”

“대감마님의 은혜가 하해와 같사옵니다.”

“누가 보면 내가 나랏님이라도 되는 줄 알겠구나.”

잊지 않았다면 그걸로 되었다. 그만 일어나거라. 뒤통수로 떨어져 내리는 대감의 목소리에 어금니를 눌러문 동혁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눈두덩이 붉다. 가까이서 뫼실 수 없어도, 부모의 얼굴이나마 어딜 가든 잊지 말거라. 나랏님이 손 닿지 않을 곳에 계시는 이 나라에서 사친이효는 본디 오계의 근본이란다. 대감은 기침을 섞어 가며 천천히 말을 잇는다. 어쩐지 먼 길 떠날 이에게 하는 당부 같다. 입술을 말아문 채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동혁이 머릿속을 비집고 올라오는 의아함에 고개를 들려던 순간,

"대감마님!"

막이가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사랑의 문을 빼꼼 열었다. 동혁이 깜짝 놀라 문 쪽을 돌아보았지만, 대감의 표정에는 아주 조그만 미동조차 없었다. 무슨 일이냐. 두어 번의 기침 끝에 딸려 나온 대감의 힘겨운 물음에 막이가 잠시 차오른 숨을 골랐다. 

“저,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객이 오셨습니다만.”

“그래, 누구시더냐.”

“그게, 선문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랑도 계시고, 낭도들도 서너 분……. 도련님은 아닙니다.

심장이 쿵 떨어진다. 뜨겁고 차가운 감각이 머리와 전신을 차례로 훑고 지난다. 종내에는 발끝마저 저려 오는 감각에 동혁이 어뜩해 오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도리질쳤다. 도련님이 아니라면, 여기에 대체 왜? 누가? 화랑이 계신다 하면 차마 그 앞에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귀한 분 아닌가.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는 어떤 얼굴이 있다. 희고, 곱고, 조금 무섭지만 미소가 순한. 애써 생각을 밀어내며 막이를 돌아봤다.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저를 울상으로 쳐다보고 있다. 동혁은 침착하게 손을 뻗어 앞에 놓인 것들을 정리하며 빠르게 읊조렸다. 대감마님 매무새 봐드려. 시중들어 객 맞고. 다과상은 내가 내갈 테니…….

"동혁아."

“네? 아, 예.”

"상은 나중에 내가려무나."

금세 말뜻을 알아들은 동혁이 무릎에 손을 짚고 일어나는 대감을 재빨리 부축했다. 막이가 상을 돌아 나오는 대감마님을 한 번 올려다보곤 사랑의 문을 열었다. 동혁은 문지방을 넘는 대감마님의 발밑을 보아 드리며 마지막으로 큰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결론지었다. 저 선문 안에 저를 찾을 사람은 없다. 분명 우영의 일로 오셨을 것이다. 이동혁은 선문 안에서 곡우영이었으니까. 또, 죽만랑이 화랑을 대표하여 사가에 들 리도 없었다. 저자 걸음을 하지 않기로 이미 유명하신데다, 화랑 중 가장 나이가 어리니까. 그래도 제 낭도의 일이니 국선이나 이랑, 삼랑의 행차에 아랫것들이나 딸려 보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벌렁거린다. 마당 쪽으로 감히 시선도 던질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면 마당 한가운데 제노가 서 있을 것만 같았다.

동혁의 부축을 받은 대감이 마루 끝에 다다르자, 막이가 재빨리 대청 아래에 있던 신을 가져왔다. 급히 제 신에 발을 구겨 넣고 마루 밑으로 내려선 동혁이 쭈그리고 앉아 익숙한 손놀림으로 대감의 발에 신을 신겼다. 거동이 불편한 탓에 두 소년 노복의 시중을 받으면서도 대감은 시선을 마당에 선 화랑 무리에게서 떼지 않았다. 마침내 대감이 마당으로 내려서자, 막이와 동혁이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법도대로라면 부복해야 했으나 대감의 시중을 들어야 했기에 손과 소매를 더럽힐 수가 없었다.

“랑을 뵙습니다.”

“곡 사찬을 뵙소.”

"미천한 관호마저 빛바랜 구명일 뿐입니다만, 이 늙은이를 이리 예우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허나 모셔 들이기 전에 여쭈어야겠습니다. 랑께서 어인 일로 사가에 직접 걸음하셨습니까."

“……,” 

엊그제 아끼던 낭도 하나를 잃었는데.

필시 여기 있을 듯하여.

못 알아들을 수가 없는 목소리. 참고 또 참던 동혁이 결국 번쩍 고개를 들었다. 달리 빗겨갈 곳도 없는 시선이, 마당 한가운데 서서 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제노의 시선과 정확히 맞물렸다. 화랑의 정복을 입고 뒤에 낭도복 차림의 소년들을 거느린 채 정확히 저를 쳐다보고 선 희고, 곱고, 조금 무서운 얼굴. 순간 그 얼굴에 설핏 순한 웃음기가 어린다.

“영 잘못 찾아온 건 아닌 것 같군요.”

그 말에 정신이 든다. 화드득 어깨를 떤 동혁이 도로 고개를 숙였다. 덜덜 떨리는 오른손은 다른 손으로 꾹 움켜쥔다. 순식간에 가빠진 숨소리가 쌕쌕 울리자, 옆에 선 막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동혁을 걱정스레 돌아보았다. 형, 왜 그래. 앳된 목소리가 나직하게 속삭여 왔지만, 그 물음이 동혁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순간 제 모습을 자각한 탓이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흙먼지 묻은 옷과 부르튼 손끝. 더 내려가면 해진 짚신 속 때 낀 맨발. 동혁이 입술을 꾹 짓씹었다. 완연한 노비의 모습이다. 제가 제노의 눈에 어찌 비칠지 깨달은 순간 동혁은 그대로 뒤돌아 도망치고 싶었다. 필경 같은 방을 쓰던 낭도 아이들을 데려오셨겠지. 모두 날 보고 파렴치하다 여길 것이다. 선문에 들어갈 급이 못 된다는 건 알아도, 여느 대감님 댁 노복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을 터였다. 저곳은 참으로 높구나. 높은 곳이었구나. 동혁이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차라리 엎드려 아무것도 보거나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두 귀로 들려왔다. 초라하다 못해 더러운 행색을 보이기가 싫었다. 꽉 쥔 주먹 안으로 짧둥한 손톱이 파고들었다. 

제노가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날카로운 시선이 동그란 정수리에 가 닿았다. 움츠러든 어깨와 거친 손발에서 이제노를 만나기 전의 이동혁이 그려진다. 평생을 이리 살아왔겠지. 그리 작아져 있는 것도 그래서였구나. 제노의 시선을 의식한 대감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천천히 시선을 돌린 제노가 싸늘한 시선으로 제 아비뻘 되는 이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병색이 짙긴 하나 중후하고 온화한 낯이다. 파리하고 어쩐지 신경질적이나 사내답잖게 어여쁜 우영과는 영 딴판이었다. 인품 좋은 여느 필부의 인상이었으나, 어쩐지 제노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제 아들을 감싸려 노비 아이를 선문으로 들여보낸 건 차치하고서라도 하나부터 열까지 동혁의 시중을 받는 모습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뉴월 나뭇가지 같은 이동혁의 마르고 단단한 손은 대빗자루보단 검을 쥐는 것이 더 잘 어울렸다. 

"아들놈은 지금쯤 선문 안에 있을 텐데요."

"우영이 순순히 거기 머물 리가 없다는 것을 아비 된 자가 모르지는 않을 테고. 대감 눈치를 보아하니……, 누굴 데리러 왔는지는 이미 알고 계신 모양인데 말입니다."

귓가로 들려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심장이 관자놀이에서 뛰는 것만 같았다.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소리가 심장 소리에 겹쳐져 머리를 울렸다. 옆에서 막이가 덩달아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호흡이 거칠어진다. 영겁 같던 몇 초가 지나자 발소리가 바로 앞까지 당도하여 멈추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익숙한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손을 뻗는다.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떨리는 손을 멈춘 손길. 정갈한 손끝과 눈에 익은 정복의 옷소매. 동혁아 하고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가자.”

꿈처럼 제노가 서 있다. 눈이 마주치자 따스히 웃어 보인다. 

어느 저녁에 쏟아져내리던 일몰의 햇살이 거기에 있다.

동혁이 망연히 눈을 끔뻑였다. 응당 붙들린 손을 빼고 바닥에 엎드려 죄를 청해야 했건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옆에서 막이가 작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멍하니 제 얼굴만 바라보고 선 동혁의 팔을 힘주어 끌어 제 옆에 세운 제노가 가볍게 뒤돌아 대감을 마주했다.

“사찬.”

“말씀하시지요.”

“이 아이를 내 정식 낭도로 들이고 싶소.”

“만랑…….”

먹먹해진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제노는 짐짓 모른 체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대감의 얼굴은 여전히 속 모르게 평온했다. 무관직에 있었던 자답게 불편한 몸을 하고도 자세가 곧았다. 실례하겠소, 잠긴 중얼거림 뒤에 두어 번 기침한 대감이 막이에게서 손수건을 건네받아 입가를 두드렸다. 느리게 입이 열린다.

“저는 직접 들인 아이들을 사고팔지 않습니다.”

“허면, 그저 보내주시는 것은요.”

“한 가지 여쭙지요, 랑.”

“…….”

“그 아이의 무엇이 그리 마음에 차십니까?”

저 역시도 아끼는 아이이니 여러모로 잘해냈을 것임은 압니다. 허나 그것이 이리 직접 오셔서 제 허물을 들추실 만큼인지요. 혹 저를 문책하시려는 것이라면, 아들을 앞세워 각주께 청죄하러 갈 터이니 그만두셔도 됩니다. 

동혁의 몸이 굳는다. 필시 공포다. 느릿느릿하지만 정확하게 이어지는 제 주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숨통을 턱턱 죄어 오는 것만 같았다. 가만히 듣고 섰던 제노가 잡은 손목을 다시금 당겨 동혁을 등 뒤에 감추었다. 제 것을 지키려는 듯한 모양새다. 당황한 동혁이 제노의 어깨 너머로 대감을 쳐다보았다. 뜻밖에도 제 주인은 보일 듯 말 듯 웃고 있다. 제노는 망설임없이 입을 연다. 

“내게 친우가 둘뿐인데, 그중 하나가 도망하였소.”

“…….”

“해서 이 아이가 귀합니다. 내 벗이자 제자요.”

그런데 어찌 이리 모르는 체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군요.

평생을 옆에 있겠다고 약조하였던 건 전부 잊은 모양이지.

- 그러려면 평생 내 곁에 있어 주어야 할 텐데.

제노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다시 귀에 들려오는 듯해, 동혁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잡힌 손목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동혁아, 가겠느냐, 묻는 대감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오듯이 어렴풋이 들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동혁이 조심스레 주먹쥐었던 손을 폈다. 제 손목을 붙든 차고 단단한 손가락들의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넣어 맞물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꾹 맞잡아 온다. 어느 오후의 누각에서처럼. 그때보다 덜 조심스럽고 더 단단하게 맞붙은 손틈에 온기가 들어찼다. 화랑의 낮은 웃음소리가 등을 타고 울렸다. 대답은 딱히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도 친우인데,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엊그저께 들어오자마자 얼굴도 보기 전에 사라졌다. 사실 애초에 이곳에 뜻이 없었던 녀석이긴 했지만.”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다니.”

“아주 어렸을 적부터 곁에서 모셨으니까요.”

저한테는 전부 다 이야기하시곤 했어요. 도련님이 대감마님께 이야기하시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언제나 저는 알고 있었구요. 말상대가 저밖엔 없이 자라셨으니까요. 가여운 분입니다. 창호에 일렁이는 작은 호롱불빛을 쳐다보며 동혁이 조근조근 말을 이었다.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동혁과 제노의 곧은 콧날 위로 그림자가 흔들리며 번졌다. 제노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술병 모가지를 잡자, 제 앞에 놓인 술잔을 조심스레 감싸쥐고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만가만 쓸던 동혁이 두 손으로 잔을 내밀었다. 맑은 청주가 잔에 알맞게 부어지자, 제노가 조금은 서투른 손길로 병 모가지를 돌려 끊어 들고는 탁자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술병을 다루는 품이 서투르다. 예를 갖추는 자리에서 두어 잔 마시는 것 말고는 다른 이와 사사로이 잔을 맞대 보지 않았음이 투명했다. 낭도복으로 다시 갈아입고 나서도 고개를 들지 못하던 저를 방안으로 끌고 들어오더니 혹시 술 할 줄 아느냐고 묻던 비장한 얼굴. 장 아래 상자에서 잔과 청주병을 꺼내오며 그 위에 뽀얗게 앉은 먼지를 급하게 닦아내던 손길. 고개를 돌려 잔을 비우고 빈잔을 내려놓던 동혁이 푸스스 웃으며 제노를 올려다보았다. 

"만랑. 어디서 나셨다구요, 이게?"

"……, 그런 거 묻지 말라니까. 다 수가 있는 법이야."

아버지께선 아직도 이르다고 청주를 금하시지만, 나도 열여덟이다. 사가에 살았으면 진작 여인을 맞았을 나이야. 속눈썹이 긴 눈을 깜박이며 웅얼대는 제노의 귀가 왠지 빨갛게 달아오른 것 같아 동혁이 입술을 말아물어 웃음을 눌러 죽이며 병 모가지를 잡아 들었다. 살짝 느슨해진 제노의 모습이 늘 의젓하고 듬직하게만 행동하던 것보다 기꺼웠다. 다 큰 어른 같으셨는데, 아주 조금은 아이 같달까. 손가락 한 마디쯤을 남기고 깔끔하게 제 잔이 채워지자 제노가 술병을 건네받아 들었다. 그래도 두어 번 해보았다고 아까보단 능숙하게 따른다. 

채운 잔을 제 앞에 내려놓은 동혁이 고개를 숙여 가만히 찰랑이는 잔 속을 들여다보았다. 나을 거 없는 행색이다. 엉망이던 머리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었을 뿐 그 안에 든 이가 바뀌진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낯설었다. 아주 모르는 사람을 마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방 안을 채운 불빛이 크게 일렁였다. 기름잔 속에 반쯤 잠긴 심지가 거의 다 타들어가고 있었다. 제노가 손을 뻗어 탁자 위에 놓인 작은 함에서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홑새끼를 꺼내 두 손가락으로 힘주어 비벼 꼬기 시작했다. 맑은 수면 위로 잔물결이 이는 제 얼굴을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던 동혁이 고개를 들었다. 만랑, 부르는 말에 제노가 응, 하고 가만히 대답했다. 

“제가 열다섯이 되던 해에, 이젠 어른이라고 대감마님이 이것처럼 깨끗한 술을 한 병 내리셨었어요.”

“첫술이 일렀구나. 어쩐지 어린애 같진 않더라니.”

“그때 한 번 빼곤 늘 지게미로만 먹었습니다, 술은.”

가볍게 농을 던지며 느릿하게 심지를 꼬던 제노의 손이 동혁의 마지막 말에 멈칫했다. 고개를 든 제노의 눈동자에 흐리게 웃고 있는 동혁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어미아비는 관노였습니다. 관에서 청주를 거르는 일을 했어요.” 

행랑 한켠에 딸려 있던 한 칸짜리 집에서는 늘 눅진하게 찌든 술약내와 누룩내가 났습니다. 아이라곤 저뿐이었어요. 관노라곤 해도 번듯한 기술을 가졌으니 한평생 먹고살 걱정은 없었습니다. 헌데, 제가 여덟이 되던 해 팔사제에 들어갈 술을 만들었다가 화를 당하였지요. 흉작이 든 해에 제삿술을 햇곡식으로 담갔다고요. 당년에 민심이 흉흉하여 관의 사람들이 많이들 해를 입었다고는 하나, 윗분들 사정이야 저로선 알 수가 없었습니다. 천것들 목숨이야 닦아내면 그만인 먼지 같은 것 아니겠어요. 그리 혼자되어 거리에 나앉을 뻔했던 걸 대감마님께서 거두어주신 거였습니다.

제노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적셨다. 덤덤한 목소리에 덤덤한 얼굴이다. 말마따나 눈물에 무던해진 어른의 그것 같다.

“누군가와 잔을 나누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는데.”

“…….”

“랑 덕에 이리 대작도 해 보고요.”

저는 이것만도 분에 넘칩니다. 그렇게 말하는 동혁의 눈이 나른하고 건조했다. 

동혁이 고개를 꺾어 잔을 비웠다. 제노가 말없이 호롱 기름에 새 심지를 꽂아 불을 옮겨붙이고는 동혁의 빈 잔을 채웠다. 동혁은 제 잔이 빌 때마다 도로 따르는 제노를 말리지 않았다. 한동안 말없이 따르고 마시다 보니 곧 술병이 비었다. 동혁이 말개진 얼굴로 제노를 올려다보았다. 어째 계속 저만 마신 것 같습니다. 발음이 묘하게 뭉개진다. 눈이 살짝 풀린 채로 비식비식 웃는 동혁을 턱을 괴고 구경하던 제노가 탁자 아래에서 새 술병을 꺼냈다. 제노가 하는 양을 가만 바라보던 동혁이 제 잔에 다시 술이 채워지자 머뭇거리다 눈을 들어 제노를 바라보았다.

“만랑, 저는 괜찮습니다. 이미 많이 마셨어요.”

“취했느냐?”

“아닙니다, 허나. 그냥 뒀다 두고두고 드십시오.”

"나 혼자서 이리 많이 못 마신다."

"그래도요, 제가 뭐라고 이리 대작을. 너무 죄송해서 그럽니다."

"……."

네가 뭐긴, 내 낭도지.

제 잔에까지 술을 채운 제노가 술병을 다탁 위에 내려놓으며 불퉁하게 한 마디 툭 던졌다. 아아……, 네? 점점 정신이 없어지는지 손가락 마디로 눈두덩 위를 꾹꾹 누르던 동혁이 제 귀로 들어온 말을 겨우 제대로 이해하고서는 고개를 들었다. 화랑의 매끈한 미간에 균열이 갔다. 서둘러 술병 모가지를 잡으려는 동혁의 손을 제노의 오른손이 한 발 빠르게 낚아챈다. 

“랑이 낭도와 더불어 좀 어울리겠다는데 뭐가 죄송해.”

“…….”

“듣자 듣자 하니 정말 못 들어주겠구나.”

제노가 동혁의 손목을 다탁 위로 죽 잡아끌었다. 천장을 향해 있던 손등을 뒤집어 드러난 손바닥 위에 꾹 누르듯이 무언가를 둔다. 동혁은 멍하니 제 화랑의 하는 양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손이 물러나자 그 자리에 남은 것을 멀거니 바라본다. 제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을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으로 가만 보고만 있던 동혁의 눈이 일순 커졌다. 만랑. 이거 설마.

 

“옥입니까?”

“마노다.”

자마노다. 네 손이 마디는 도드라졌는데 뼈대가 얇으니. 가락지가 너무 굵으면 패용이 불편할까 봐서 얇은 걸로 구하라 했다. 목소리에서 뿌듯함이 묻어난다. 동혁은 말을 잃은 채로 손에 들린 가락지와 제노의 얼굴을 하염없이 번갈아 보았다. 

“저자 필부들은 물론이고 낭도들도 요즘은 많이들 끼고 다니더라고.” 

“…….”

“진작 주려던 건데. 받을 놈이 사라져 버렸으니 줄 수가 있나. 아무도 모르는 밤을 틈타 사라지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던가 보지. 그래도 내 낭도가 되어 주어 고맙기는 하다마는.”

“만랑.”

“첫 선물이니 잘 끼고 다녀.”

울지 말고. 제노가 푸스스 웃었다. 도톰한 와잠이 눈 아래 차올랐다. 동혁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곧 눈물 번진 시야가 부옇게 흐려져 갔다. 흘러넘친 뜨거움이 볼을 타고 내려오는 순간 목구멍 안쪽에서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제노는 이를 악물고 우느라 턱에 심줄이 선 동혁을 말없이 바라봤다. 턱 끝으로 고여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없다면 아무도 저 애가 울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동혁은 돌처럼 앉아 있었다. 눈에 띄면 발로 채일 게 뻔하니 숨죽인 채 모퉁이에 놓인 작은 돌처럼. 안으로 꾹꾹 터뜨려 내는 울음. 

“너무하십니다…….”

“또 무어가.”

“제가 그랬잖습니까.”

저도 사내라고요. 어찌 틈을 안 주세요. 왜 자꾸, 왜. 

왜 자꾸 고맙고 두렵게 만들어. 무언가를 받고 받을수록 아무도 없는 곳에 빈손으로 버려질 것만 같은데, 언제든 배곯고 무엇이든 모자란 것이 당연지사라 생각하며 살아온 탓에 이런 건 너무 무서운데.

원망을 들은 화랑이 웃는다. 조용히 동혁을 응시하던 제노가 가만히 잔을 들었다.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던 동혁이 가락지를 소중하게 왼손 약지에 끼워 넣고는 얼른 잔을 들었다. 허공에서 두 개의 술잔이 가볍게 부딪힌다. 두 소년이 동시에 잔을 비웠다. 울다 말고 술을 넘긴 탓에 사레가 들려 가볍게 콜록거리는 동혁을 바라보던 제노가 잡은 손등을 쓰다듬듯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세 손가락으로 가만히 원을 그리며.

밤의 봄바람이 부드럽게 창호를 흔들었다. 


"왜 이걸 주셨어요."

"왜 자꾸 그걸 묻지. 맘에 안 들어?"

"제겐 너무 과분합니다."

"또, 또!"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요! 저자에선 이런 걸 두고 약조라 한단 말입니다."

"약조?"

누구와 무엇을 약조하길래? 제노는 눈물을 대충 닦아 씻느라 엉망이 된 동혁의 얼굴을 넌지시 건너다보며 물었다. 달빛을 받아 사르랗게 빛나던 꼬질한 얼굴이 곧장 경악의 기색을 담고 제노를 돌아본다. 당연히 정인과의 사랑의 약조지요! 뚫린 담벼락 사이로 입은 못 맞춰도 손은 잡지 않습니까. 제가 축시 넘어 돌아다니다 골목길에서 밀회를 얼마나 많이 보았게요. 도령들이건 아씨들이건 담벼락에 꼭 붙어서선 안쪽에다 대고 사랑한다느니 연모한다느니. 눈물바람하면서 헤어지는 정인들은 백이면 백 약지손에 가락지가 남습니다. 제노가 살짝 머쓱해진 얼굴로 도로 고개를 돌려 달을 봤다. 나는 그런 뜻인 줄은 몰랐다. 저자에 나가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그것도 밤에는. 동혁이 할 말 많은 모양으로 입만 뻐끔거리다, 제노의 옆얼굴에서 언뜻 미소가 옅어지는 것을 보곤 도로 불퉁하게 입을 다물었다. 얼굴 앞으로 넘어온 긴 머리끈을 감아 치우는 손가락에 같은 빛의 마노 가락지가 끼워진 것이 보였다.

그저 제게 이걸 주신 게 문제가 아니라, 같은 반지를 주셨으니 문제인 거예요. 그 말만은 목에 탁 걸려 나오지 않았다. 손가락에 끼워진 제 가락지를 만지작대던 동혁이 아직도 좀 달아오른 듯한 숨을 길게 두 번 내쉬고, 제노의 옆으로 한 엉덩이 옮겨 앉았다. 두 몸 사이의 거리가 손바닥 두 마디도 채 되지 않는다. 제노는 틈없이 맞붙어 따뜻한 열기가 옮아오기 시작한 허벅지를 가만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어 동혁을 본다. 애써 눈을 피한 채였다. 귀가 빨갛다. 가벼운 웃음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이젠 옮겨오라고 하지 않아도 다가와주는구나."

"남들이 보면 단단히 오해하고 말 겁니다."

"무얼. 내가 내 낭도랑 좀 어울리겠다는데."

"그거, 지금 그 말!"

오늘따라 유난히 억울했다. 뭐만 했다 하면 툭툭 튀어나오는 내가 어쩌고 낭도가 어쩌고 하는 말. 동혁이 저도 모르게 욱하고 성질을 돋우었다가, 제노가 이것 봐라, 하고 두 눈썹을 밀어올리는 바람에 곧장 입술을 말아물었다.  그러면서도 결코 입은 쉬지 않는다. 웅얼웅얼 뒷말이 이어졌다. 바로 그 말이 문젭니다. 랑과 낭도면 다 괜찮은 줄 아십니까? 만랑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세요. 이리 씻은 알밤 같아서야. 바깥공기라곤 맡아보질 못한 것마냥 맨질맨질 맨들맨들 아무것도 몰라서야. 듣던 제노는 웃음을 참느라 어금니를 악물어야 했다. 처음엔 그저 갇혀 살던 것을 가여워하더니, 이젠 저를 금지옥엽 고이 길러져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보는 듯한 동혁의 고뇌가 못내 우스우면서도 귀여워서, 제노는 나를 두고 그리 평하는 것도 이 서라벌에 너뿐이리라는 핀잔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오는 걸 겨우겨우 삼켜냈다. 사실 평생 당해 본 적 없는 대우가 조금 기꺼운 것도 사실이었다. 

"다른 낭도에게도 이리하신 적이 있습니까?"

"없지."

"허면 다른 낭도에게 가락지를 주셨던 적은요."

"당연히 없지."

"만랑, 정말이지."

결국 동혁이 이마를 짚었다. 가만히 관자놀이를 문지르다 결국 깊게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삼킨다. 제법 심란해 보이는 얼굴에 제노가 손가락을 뻗어 동혁의 손에 끼워진 가락지를 매만졌다. 그리고 묻는다.

"내가 너를 귀히 생각하는 것이 버거우냐?"

동혁은 손끝만 꿈질꿈질 움직여 그 손을 잡는다. 슬쩍 손틈 사이로 바라본 제 화랑의 얼굴은 제법 당당하고 억울해 보였다. 술도 좀 올랐겠다, 불긋하게 달아오른 눈매가 축 처진 것이 아주 새끼 강아지 같다. 

"버겁긴요. 좋아서 그럽니다."

"목소리를 듣자하니 그게 아닌데?"

"……."

"……."

"……만랑."

제 눈에도 이게 약조로 보이는데 어쩝니까?

참지 못하고 뱉어낸 동혁이 제노의 손을 가만히 잡아내렸다. 깍지껴 쥔 제노 손의 가락지와 제 손의 가락지를 나란히 둔 동혁이 엄지 첫 마디로 가만히 두 마노 위를 쓸었다. 덥혀지지 않고 남은 보석 특유의 냉기가 미미하게 느껴진다. 그거 아십니까? 랑께서는 저를 귀히 다루시지요. 그걸 모르면 바보 천치지요. 그런데 낭도를 대하듯 하질 않으십니다.

"숫제……, 사랑하는 이를 대하듯 하셔요."

그러니까, 저는. 제게 그만큼의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니까. 결코 랑을 화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이럴 자격은 없는 거니까. 랑께서 그러실 때마다 저는, …… 저는.

"너는."

그래서 내가 그리할 때마다 너는 어떠한데. 말끝을 툭 끊고 들어온 목소리에 웃음기가 없다. 머뭇거리던 입술을 가만히 닫은 동혁이 짧은 망설임 끝에 눈을 들어 제노를 본다. 당당함은 없어지고, 아까보다 조금 더 억울해진 것 같은 얼굴. 제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입술이 조금 튀어나와 어쩐지 토라진 어린아이 같다. 동혁은 그 희고 뚜렷한 얼굴에서 풍기는 묘한 아이다움 때문에 귀로 들어온 말을 이해하는 데에 조금의 시간을 더 쓰고야 말았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하고 되물으려는 찰나 한층 내려앉은 제노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공기를 울렸다.

"내 정인의 자격은 없고 낭도의 자격만 있으니 버겁더냐?"

"……."

"허면 너는 내 낭도는 될 수 있고."

정인은 될 수 없느냐?

공기가 울렸다. 제노의 입에서 떠나온 마지막 마디가 귓속에 꾹 박혀 들어왔다. 이다지도 먹먹한 걸 보니 어쩌면 귀가 아니라 심장일지도 몰랐다. 동혁이 입술을 적셨다.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냐고 따져 들고 싶었으나 누가 목을 거세게 치고 지나간 것처럼 탁 막혀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제노도 다를 바 없었는지 맞잡은 손이 땀으로 척척하게 젖어들어간다. 

밤벌레가 울고 희미하게 도랑의 물소리가 들렸다. 달빛이 두 소년 사이에 고요히 부유하는 먼지를 비춘다. 그새 바꾼 심지가 다 되었는지, 방안의 호롱이 훅 꺼져 등 뒤가 어두워졌다. 화드득 놀란 제노가 놓칠세라 동혁의 손을 꽉 쥐었다. 동혁은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마주 쥐어주며 제노의 희고 곱고 조금 무서운 얼굴을 핥듯이 들여다본다. 눈 아래로 내려앉은 숱 많은 속눈썹과, 술인지 마음인지 모를 것으로 불그스름 달아오른 얼굴과, 말아물었다 놓기를 반복하는 억울한 입술을 차례로. 이리 귀한 얼굴을 하고 내놓는 말이 하나도 믿기지가 않아 멍한 눈으로. 제노는 손마디가 희게 되도록 힘껏 움켜쥔 뒤에도 한참을 있은 후에야, 남은 말들을 가만가만 쏟아 놓았다. 

어찌 몰라. 먼저 손을 잡는 것도, 가락지를 나누는 것도, 둘이만 있고 싶어서 내내 불러내는 것도 전부 같은 뜻임을 내가 정말로 모르겠더냐. 그걸 모르면 바보 천치지. 너는 나를 아주 바보 천치로 보았어. 내가 그토록 다가서도 네가 몰라주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너에게 나는 그저 어린아이로구나. 그렇다면 그동안엔 나야말로 네 정인이 될 수가 없었겠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이건 되레 내가 서운할 일이잖아. 

동혁은 말을 잃고 멀거니 제노의 얼굴을 바라봤다. 심장에 다시 뜨거운 물이 고인다. 썩어 가던 연못에 파도가 일어난다. 늘 속으로 삼켰던 거대한 요동이 풍랑 이는 바다의 파도처럼 심장을 뒤흔들며 울렁거렸다. 폭풍우가 몰아친다. 이제노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의 문을 열고 열쇠를 부러뜨린다. 다시는 잠가 없애지 못하도록 파헤치고 바람을 쐰다. 트인 마음이 과한 열기를 견디지 못해 얼굴이 끓듯 달아올랐다. 

"나는 약조한 것이다, 동혁아."

몰랐구나, 너?

 

제노의 긴 손가락이 두 가락지 위를 포근하게 덮었다. 그대로 매끄럽게 동혁의 손에 끼워진 가락지를 거두어 간다. 동혁은 저도 모르게 빼앗기지 않으려 허둥지둥 제노의 팔을 쥐었으나 제노가 조금 더 빨랐고 조금 더 힘이 셌다. 제노는 동혁의 손목을 단단히 쥐고, 아주 투박한 손길로 손바닥을 눌러 고정시킨 뒤, 원래 가락지가 끼워져 있던 손가락에 그것을 조심스럽게 다시 밀어 넣었다. 

"이제야 준다셈 치고, 다시 약조하자. 이건 말 않으려 했는데, 자마노는 화랑의 증표니까. 네가 지금처럼만 열심히 단련하여서 온 서라벌을 누비고, 공도 세우고, 글에도 통달하여, 나중에 언제건 랑이 되면. 그때도 내가 네 곁에 있을 테니까.”

“…….”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곡득오를 축하할 때에 나는 이동혁을 축하해 주마. 제일 좋고 맑은 술을 골라서, 또 오늘처럼 잔을 나누면서. 알았느냐?”

한 손으론 봉인하듯 가락지 낀 손을 덮어 쥐고, 나머지 한 손은 동혁의 앞으로 내민다. 새끼손가락만 세운 채다. 어린애들 놀이 같은 짓이다. 동혁이 저도 모르게 하하, 하고 얼빠진 웃음을 웃었다가 제풀에 놀라 이를 악물었다. 코와 입 앞으로 쏟아지는 숨이 거칠고 뜨거웠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지럽고, 뜨겁고, 조금 울고 싶을 만큼, 그러니까 이건.

 

“이건 화랑으로서가 아니라.”

 

곧은 얼굴이 무너져내려 둥글게 웃는다.

 

“네 정인으로서의 약속이다.”

“…….”

“받아주겠느냐?”

아아, 내 정인.

동혁은 망설임없이 고개를 내려 내밀어진 새끼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어떤 약속 위에 같은 온도의 약속이 포개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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