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덩쿨이 사라져 있었다.

마리와 마샤가 처음 이웃집에 인사 갔던 날 이야기.

어느 날-하나네 집 바로 앞 집에 새이웃이 이사 왔다.

이유 없이, 그러니까 하자도 없는데 어쩌다보니 꽤 오랫동안 빈집이었던 앞집은 외관이 썩 좋지 못했다. 종종 집주인이 와서 관리하는 것도 같았지만 누가 영양제를 뿌려주나 싶을 정도로 쑥쑥 자라는 초록잎들은 기어코 담장까지 넘어가 보기 흉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질기고 엉망진창으로 얽혀 있던 넝쿨들이 하룻밤 새에 모조리 잘려 나간 것을 출근하던 하나가 발견했다.

사실 하나가 이웃이 이사온 것을 알게 된 것도 사라진 넝쿨들 덕이었던 셈이다.

딱히 이사차나 큰 트럭이 오는 것도 못 봤는데, 짐은 또 어떻게 다 옮긴건지 어느샌가 싹둑 잘린 넝쿨만이 새이웃의 존재를 알렸다.

새로운 이웃들은 어쩐지 사람과의 교류를 즐기는 것 같지 않았다.

막 이사온 참이라 이래저래 바쁠텐데도, 말끔해진 외관만 아니었다면 사람이 사는 줄도 모를정도로 조용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사 같은 것도 오지 않았고, 애초에 하나와 레비스는 넝쿨이 정리 된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들의 모습도 본 적 없었다. 물론 굳이 하나네 쪽에서 찾아가지도 않았다. 둘은 그냥 어련히 바쁜 분들이신가보다, 할 뿐 저녁 식사 자리에서 잠깐 나눈 이야기 이상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 이런저런 일상을 보내던 와중, 정체가 베일에 쌓여 있던 그 이웃분께서 인사하러 오셨다.

그것도 평일 대낮에.

'띵동-.'

검은색 세라복을 입은 소녀가 레비스네 집 초인종을 한번 꾸욱, 누르자 머지 않아 맑은 챠임벨 소리가 집 안에 퍼졌다. 하지만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소녀는 고개를 느리게 갸웃거리다가 주머니에서 접힌 쪽지를 꺼내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나가기 전, 그녀의 주인이 꼭 지키라고 당부한 사항들을 적어 준 것이었다. 혹여나 실수할까봐 하도 펼쳤다가 닫았다가 해서 쪽지는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아무리 읽어봐도 여전히 본인이 실수한 것은 없었다. 소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다시 맑은 챠임벨 소리가 울렸지만 역시나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쯤하면 돌아갈 법도한데, 도대체가 포기를 모르는 소녀는 잠시간의 시간을 두고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그 짓을 5번정도 더하자, 영원히 안 열릴 것만 같던 문이 열리고 개털 머리카락의 누군가 슬쩍 나왔다.


그 날은 평일이라 레비스는 출근하고 집에 없었으므로, 오늘따라 강의도 알바도 없는 하나만이 고요한 방 안에서 자고 있었다. 교수는 굴 먹다가 노루바이러스 전염으로 휴강, 알바하던 식당은 저번주 내내 내린 폭우로 간판이 망가져서 일주일간 단체 휴가. 마치 누가 짜놓은 듯 기가 막히게 겹친 휴가에 정하나는 싱글벙글하며 전날 밤, 밤 늦게까지 웃고 떠들다 아침 해가 뜨고 나서야 잠에 들었다. 그렇게 광란의 밤을 보내고 난 뒤니 물론 대낮에도 깨어 있을리가 없었는데, 한참 한밤중이던 와중 그 지독한 초인종 소리를 듣고 깬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도 무시하고 다시 자려고 했다. 그런데 택배기사인지 벨튀하는 잼민이 새끼인지 당최가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정하나는 잠결에 레비스 이 새끼가 싸가지 밥 말아 먹더니 기어코 명예훼손으로 고소 당했나까지 생각했다. 이제 조용해졌나하고 잘려하면 다시 띵동거리고, 다시 경계심 풀고 잠에 들려 그러면 또 띵동 거리고, 아주 돌아버릴 것 같았다. 결국 몇 번의 내적 갈등 끝에, 하나는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이르켜 비척비척 현관문을 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별 것 아니면 조지겠다, 하는 마음으로 당차게 문을 열었는데..

"....."

"...누구세요?"

"나츠메."

하나는 자기가 꿈을 꾸나 싳어 다시 문을 닫고 들어갈 뻔했다. 아니 글쎄, 문을 여니 웬 처음 보는 사람이 '거 더럽게 늦게 나오네'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한심하다는 양 쳐다보는 것이다.

"...예?"

"뭐? 나츠메라고."

심지어는 누구냐고 물으니까 이름을 말하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까지. 초면부터 반말 찍찍 뱉는게 싸가지도 없었다. 하나는 저도 모르게 '이 새끼 뭐지?'하는 표정으로 잠시간 그 사람을 쳐다 봤지만, 성격 만만찮은 그 사람도 지지 않고 '뭐 임마'하는 눈으로 하나를 꼬라보니 총체적 난국이었다. 하나의 단전 깊은 곳에서는 대단히 귀찮은 사람이라는 예감이 알바하면서 쌓인 연륜으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병, 진짜. 하필 오늘.. 뭐, 빨리 치워버리자. 이런 진상은 상대해주는게 ■신이다, 상대를 해주는게 ■신이야.'

그 때부터 이미 하나의 머리속에는 '저 진상을 얼른 치우고 다시 잠을 잔다'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무언가의 계산을 마치고 방긋 웃는 하나를, 그 사람은 주춤하며 노려보았다. 아마 경계하는 것 같았다.

"아, 예, 뭐. 나츠메인지 나메츠인지. 그래서 여긴 무슨 일인데?"

"...어.."

하나가 갑자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방글방글 웃자, 나츠메는 이 사람의 정신상태가 좀 온전치 못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 이름을 버섯(なめこ, 나도팽나무버섯. 나메코로 발음하기 때문에 마샤도 헷갈린 것이다)이랑 착각한 것을 보아 확실했다. 아무튼 하나가 온 목적을 묻자, 실수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나츠메는 다시 느긋하게 쪽지를 꼼꼼히 읽고 대답했다.

"아, 이제 알겠습니다. 마야가 새로 이사오면 이웃집한테 인사를 하러 가는게 좋다고 해서 왔습니다. 그.. 뭐냐..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떡 돌리기? 그래서 떡도 챙겨왔.. 엥? 어디 갔지? ...아, 집에 두고 왔군. 정정합니다, 떡은 없어요."

다시 읽어보니, 쪽지에는 한국에서는 초면에 반말을 하면 안된다고 적혀 있었다. 갑자기 저 사람이 이상해진 것도 자신이 존댓말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무례해보여서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마샤가 이번에는 더듬더듬 경어로 말을 이어갔다. 아직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중간중간 말을 절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듣는 이의 표정을 보니 대충 이해한 것 같아서 마샤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맙소사, 말을하던 와중 깨달은 것이 있다. 어쩐지 오른손이 허전해 봤더니 마야가 꼭 챙겨 나가라고한 떡을 깜빡하고 집에 두고 온 것이다!! '떡 돌리기'에 '떡'을 두고 오다니, 하나로선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이곳의 문화를 잘 모르는 마샤로선 다음에 갖다주면 그만인 사안이었다.

그렇게 뿌듯하게 말을 마치고 저를 바라보는 나츠메에게, 하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알바하면서 웬만한 진상 다 만나봤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세상에는 정말 별 미친놈이 다 있었다.

"거.. 반말을 쓰던 존댓말을 쓰던 둘 중 하나만 해주실래요."

"응? 마야가 여기서 초면에 반말하는 건 실례라고 했는데. 뭐, 본인 허락 받았으면 괜찮겠지. 그래, 그럼."

"아니, 아까부터 마야, 마야. 그 놈의 마야가 누군데 자꾸 이래? 부모님?"

"그게 뭔.. 개소리야? 부모님이 아니고, 마야는.. 아.. 마야가 누구냐면..."

어려운 질문이었다. 하나야 황당해서 무심코 물어본 것이었지만 마샤에게 마야를 정의하기란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어쩌다보니 같이 있게 된 동행자였는데, 있던 세계관이 폐지되고 여기저기 같이 떠돌아 다니면서 그녀 안의 몽글몽글한 감정을 그녀 자신도 점점 지각하게 되었다. 사랑이라기엔 너무 더럽고, 사랑이라기엔 너무 순수하다. 마야도, 마샤도. 굳이 자신들의 관계를 말로써 정의하지 않았다. 마야는 그것이 마샤를 이용하기 편했기 때문에. 마샤는 마야가 그러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무슨 관계냐고 물어볼 때면 대답하기가 참 난감했다. 결국 마샤는 제 머리 속을 아무리 뒤져도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해서, 조금 이상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마야는.. 뭐... 굳이 따지자면 주인이랄까."

"....."

"..왜, 뭐, 왜 그렇게 보는데?"

"주인.....이라고?"

하나의 포커페이스가 기어코 깨지고, 그녀는 아득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쭈그려 앉을 수 밖에 없었다. 완벽한 휴일을 망친 저 이상한 놈이 귀찮아서 죽을 것 같고, 당장에 집 안으로 돌아가고만 싶었다.

"엥? 이 새끼 갑자기 왜이래. 뭐.. 구급차 불러줘?"

"됐거든? 꺼져, 새끼야, 아.... 제발 좀 꺼져, 그냥!!"

이제 올라오는 본심을 숨길 생각도 안하고 그대로 뱉었지만, 정작 나츠메는 욕 먹은 건 신경 쓰지도 않고 '챙겨 줘도 지랄..'하는 눈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생각하는게 그대로 보이는 타입인 듯했다. 그런데 이제 생각하는게 그대로 보여서 본인이 피곤한게 아니라 보는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타입인.

"하.. 시발... 아니다.. 들어오세요 그냥.."

하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길을 내줬다. 이렇게까지 되면 그냥 돌려보내기도 애매했다. 자다 일어나서 멍한 머리로는 정확, 아니 그전에 복잡한 사고 자체가 불가능했다. 사실 하나는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그냥 되는대로 혀를 움직인 것이다. 평소라면 당장 네 집으로 돌아가라며 성을 냈을 하나가 순순히 집에 들인 이유도 여기 있다. 짜증을 내고 어쩌고할 기운도 없었다. 그냥 빨리 차나 한잔 맥이고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 뭐야, 니나 하나만 해. 나 존댓말 써야 해?"

"됐으니까 제발 좀 들어오시라고."

"..별 보기 드문 미친놈이 다 있네. 그러지 뭐."

'거울 봐라 드문가..'


"허어.. 그래? 그렇게 많은 곳을 가봤단 말이야?"

나츠메인지 나메코인지 나메츠인지를 집에 들인지 N시간 째.

나츠메는 도통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라기보다는, 하나가 축객령을 내리지 않아서 굳이 움직이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하나도 이렇게 오래 붙잡아 둘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기회가 보였다하면 냉큼 보내버리고 부족한 잠이나 채울 생각이었다.그런데 어쩌다가 나온 이야기를 듣자하니, 저와 그 친구가 그렇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좋을 이야기였는데 점점 흥미가 생기게 됐고, 하나의 잠이 깬 후에도 이야기를 듣다가 우연찮게 시간이 되서 같이 점심도 먹고 하다보니 몇시간이 훌쩍 넘은 시점이었다. 물론 하나는 이야기에 푹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 여기서 친구라함은.. 당연히 "마야"다!

하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샤가 한국어에 익숙치 못해 주인으로 오역한 것이고, 적당히 친우정도의 사이인 것으로 이해했다. 사실 주인님이나 친구나 무엇 하나 오역은 아니었지만 말이다(따지고 보면 전자가 더 정확할 수도 있다).

"아.. 그래, 네가 방금 말한 그 곳에서도 살아 봤어. 하지만 거긴 너무 추워. 인긴이 살만한 곳으로는 적절치 않아."

"그야, 뭐.. 원래 러시아가 추운 나라니까. 너 진짜 뭐하면서 살면 애가 이래?"

"뭐, 왜. 내가 저능한 거에 불만 있냐? 어차피 내 생각은 아무래도 상관 없거든. 결정은 전부 그 아이가 하니까."

"아니 글쎄, 자꾸 그놈의 마야는, 씨. 그 친구랑은 평생 살거야?! 그 친구는 동의는!!"

"...."

"..아니, 뭐, 알빠야? 평생 같이 살면 좋은거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거지."

"참 내, 너 내가 아는 누구랑 정말 닮았다."

바보 같을 정도로 한명만 냅다 보는게 딱 그짝이었다.

'뭐, 친구? 웃기고 있네. 저게 친구면 난 친구 없다. 말하는 것보니 애인도 아닌 것 같고. 주인님 맞네, 뭘.'

바로 방금 전 자신이 했던 생각을 비웃으며 하나가 생각했다.

마야인지 미친인지 어떻게 하면 이 또라이를 매여둘 수 있는건지 호기심이 동하기도 했지만, 척봐도 연관되면 귀찮아질 것 같은 건이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해서 주제를 돌리고자 머리를 굴리며 문득 창 밖을 봤는데, 글쎄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던 것이었다.

"어, 어? 언제 시간이 이렇게.. 야, 너 집 안 가 봐도 돼?"

"응? ..아아, 응, 이제 가야지."

마샤는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축객령이 떨어졌기도 하고, 슬슬 그녀가 집에 돌아올 시간이니 먼저 집에 가 있다가 돌아 온 그를 맞이해 줄 생각이었다.

"그럼 나 간다, 떡은 나중에 주던지 할게."

"아니.. 이제와서 떡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데.."

그런 시시콜콜한 대화를 주고 받으며 문을 열려는데, 나츠메가 앞으로 밀어도 뒤로 당겨도 열리지 않는 문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나 집에 달려 있는 도어락의 사용법을 몰랐던 것이다.

"아 잠시만, 그거 버튼 누르고 돌리면서 앞으로 밀어야 돼. 내가 해줄테니까 비키-"

그걸 본 하나가 대신해서 문을 열어줄려던 순간,

-우지끈!

무언가가 망가지는 소리가 났다.

하나가 불길한 예감에 위를 올려다보자 하나네집 현관문의 경칩이 가볍게 박살나 떨어져 나가는 것이 보였다.

"어, 어라."

이어 나츠메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챙그랑!

하나네집 현관문의 손잡이도 운명을 다하고 괴상한 형태로 꺽여 제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

"......"

둘 사이에 잠깐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정신을 차린 나츠메가 황급히 경위를 설명하려 해보았으나..

"아, 아니, 이게 왜 떨어지냐. 내가 부술려고 부순게 아니야! 살짝 앞으로 밀기만 망가졌어! 너희 집 너무 노후한 거 아니야?!"

"..그거 몇주전에 방탄 문으로 바꾼건데."

"..아, 응."

.....무용한 일이었다.

하나는 그 자세 그대로 휴대폰을 꺼내들어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몇번 나더니, 상대는 곧장 전화를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하나? 죄송한데 제가 지금 좀 바빠서 말입니다. 용건만 최대한 짧게-"

"우리집 이제 문 없다."

"..예?"

쾅!!

타이밍 좋게 아예 문의 몸체 자체가 앞으로 넘어갔다.

원래 문이 있던 문틀로 바람만 쌩쌩 넘어 왔다.

"....."

"....."

"....."

"..죄송합니다, 역시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주십시오."

나츠메와 ???(불명), 이사온지 n일차.

이웃집과 첫 만남부터 거나하게 사고 치다.


~후일담, 마리와 마샤의 대화~

"..그래서, 도어락...사용법을 몰라서 문을 부숴 먹었다, 이 말이야?"

"으, 응."

"....."

"아-아니, 그, 별로.. 힘 안 줬는데.."

"...하아, 알겠어. 이미 일어난 일 어쩔 수 없지. 내가 따로 이야기 해둘게. 그런데 가져가라던 떡이 그대로 있던데 그건 어떻게 된 일이야?"

"응..... 그게.. 네가 생각하는 거 맞아.."

".....그래."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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