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전 / 선택과 선택과 선택

단항 x 블레이드

역전

기계 공방 <영원한 겨울>은 언제나와 같이 한산했다. 성에 낀 창을 통해 환하게 불이 들어온 실내가 어렴풋이 보였지만, 문에는 닫힘 팻말이 걸려 있는 채였다.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카일루스, 단항. 너희 아니었으면 <매커니컬 피버> 결성 이래 최대 규모의 공연이 엉망이 됐을 거야.”

서벌이 앉아있는 두 사람 앞에 따뜻한 차를 내놓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게파드 씨가 서운해하던데요. 문제가 생겼는데 왜 자기한테 먼저 얘기하지 않았냐고요.”

카일루스가 말했다.

“그 녀석한테 얘기해봤자 일만 복잡해졌을 거라니까. 명색이 철위대 방위관이라는 녀석이 암표 거래 현장 하나 잡겠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어 봐. 다들 무슨 심각한 문제라도 생긴 줄 알고 겁먹어서 진작 꽁무니 뺐을걸.”

“그것도 그렇네요. 게파드 씨는 요령이랄 게 없으니까요.”

카일루스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다과를 집어먹었다. 단항은 잠자코 홍차만 마셨다. 향이 짙고 목을 타고 넘어가는 끝맛은 달았다. 서벌이 단항을 보며 물었다.

“차맛 좋지? 브로냐가 가져온 거야. 그런 취향은 자기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니까.”

“나쁘지 않네.”

“괜찮다면 갈 때 챙겨 갈래? 두 통 더 있는데 아무래도 난 차보다 술이 더 입에 맞아서.”

“아니, 이 한잔이면 충분해.”

단항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일을 마치고 기계 공방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서벌은 줄곧 자신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내게 묻고 싶은 거라도 있나?”

“하하. 티 많이 났어?”

서벌이 민망한 듯 제 뒷머리를 긁으며 씩 웃었다.

“내가 이렇게 보여도 엔지니어 일로 밥벌이하는 사람이잖아? 네가 쓰는 장비들 한눈에 알아봤다고. 굉장히 솜씨 좋은 제작자가 만든 것 같은데….”

“미안하지만 그 사람과의 만남을 주선하기는 어려워.”

단항은 잠시 말을 골랐다. 그는 전은하급 범죄자가 돼서 수배령을 받은 처지니까. 혹은 장인 노릇은 진작 관두고 지금은 자기 핸드폰 하나 제대로 간수 못하는 신세가 됐으니까. 그것도 아니면 나와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져서 내 얼굴만 봐도 칼부림부터 하는 지경이라서. 세 가지 중 뭘 고르든 분위기가 무거워질 게 뻔했다.

“…사정이 좀 있어서.”

결국 뻔한 말로 퉁치는 게 최선이었다. 서벌은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대신, 이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잠깐이라도 네 장비들을 살펴보게 해줄 수 없을까? 물론 강요하는 건 아냐. 문제가 생기지 않게 정말 살짝만, 아주 조심스럽게…”

“그래, 좋아.”

“정말 고마워!”

서벌이 반색하며 일어났다. 단항은 격운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와— 이거 보기보다 엄청, 무겁네, 읏차!”

서벌이 격운을 양손으로 힘겹게 들어 작업대 위에 올려두었다.

“체격이 크지 않은 편이고 움직임도 날렵해서 당연히 경량형을 쓸 줄 알았는데, 속근육이 꽉 찬 타입인가 봐?”

“타고난 체질 덕분에.”

“유머 감각까지? 누가 무명객 아니랄까봐 반전이 가득하네.”

“농담 아닌데.”

카일루스가 중얼거렸다. 비디아다라는 단명종보다 골밀도가 훨씬 높고 심해의 압력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근육과 외피가 단단하다는 설명을 늘어놓기 귀찮아서 축약했을 뿐이다. 단항은 그것에 대해 굳이 해명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괜찮다면 팔에 끼고 있는 그 보호대도 볼 수 있을까?”

단항은 내심 놀랐다. 격운은 그렇다 쳐도 완갑까지 눈 여겨 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과연 축성가 연구 부서에 몸담았던 천재다운 눈썰미였다. 그는 선뜻 완갑을 벗어 서벌에게 내주었다.

혹시나 그가 장비들을 잘못 만져서 고장이 날 지 모른다는 걱정은 전혀 되지 않았다. 주인과 함께 적지 않은 수모를 겪었음에도 여태껏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는 물건들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공조사의 최고 장인이 만들었으니 당연했다.

작업대 앞에 선 서벌의 뒷모습은 기타를 쥐었을 때처럼 즐거워 보였다. 본인은 그저 적당히 벌어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음악에 비해 우선순위가 밀릴 뿐 기계를 다루는 작업도 충분히 좋아하는 눈치였다.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양해를 구하는 것도 잊고 관찰에 골몰하는 서벌을 두고, 단항과 카일루스는 각자 시간을 보낼 방법을 찾았다. 단항은 품에서 책자를 꺼내 읽고 카일루스는 핸드폰으로 게임을 즐겼다. 카일루스가 몇 번 아쉽게 1등을 놓치고 탄식하거나 투덜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그 정도로 다른 두 사람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순 없었다.

“으음, 음. 과연….”

한참 작업대에서 손을 놀리던 서벌이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항, 잠깐 여기로 좀 와볼래?”

“?”

뜻밖의 호출에 단항은 의아해하면서도 작업대 근처로 다가갔다.

“과연 나무랄 데 없는 디자인이야. 실용성과 설계 방식 모두 완벽에 가까워. 근데—”

칭찬으로 운을 띄운 서벌이 가죽 덮개를 제거한 완갑의 내부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붉은 빛이 들어와 있는 반원형 칩을. 그건 옥조 기판과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건 의도적으로 설치한 거야? 만일에 대비해서?”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뭘 말하는 거지?”

“아…. 몰랐구나. 여기, 이거 말이야. 위치 좌표를 주기적으로 기록해서 연결된 다른 기기로 신호를 보내는 장치야. 쉽게 말해서 GPS지. 자기가 쓰는 장갑이나 신발 같은 장비에 이런 기능을 넣는 게 흔하진 않잖아. 뭐 컴퍼니 같은 곳에서 근무하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래서 물어본 거야.”

“…….”

단항은 깜빡이는 붉은 빛을 내려다봤다. ‘그 기능’을 얘기하는 거였구나. 당연하지만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블레이드는 자신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건 귀신같이 제 위치를 알고 쫓아와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그건 단순히 감이 좋은 정도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만 당시의 기억이 불완전했던 탓에, 유배령과 함께 적선처럼 주어진 장비들에 어떤 내력이 숨겨져 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과거의 선물은 아이러니하게도 몇 번이고 단항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에게 이 선물을 준 당사자한테서까지. 블레이드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완갑 내부의 온도가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언제 도망치면 좋을지 알려주는 경종과 다름없는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과거의 일들을 보다 또렷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지금은 어떤가?

짝이 되는 완갑을 나눠 낀 채 주고 받았던 술잔을 기억한다. 젊은 장인은 제가 걸작을 하나 더 만들었다며 한참을 으스댔으며 전생의 자신은 그저 말이 없었다. 술잔 안에 담긴 달빛은 차갑지만 아름다웠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찰나를 영원토록 붙박아두고 싶었다. 더불어 비디아다라 용존에게 요구되는 덧없는 미덕들에 염증을 느꼈다. 늦은 밤 식어버린 술은 차가웠으나, 팔뚝을 덮은 완갑의 온기는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괜찮다면 제거해줄까? 추적기를 떼내는 정도로는 기능에 아무 지장도 가지 않을 거야.”

서벌의 제안에 단항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 와서 추적기능을 제거한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다. 자신은 은하 열차에 몸을 의탁했고 블레이드도 이를 알기 때문이다. 자신을 찾고자하면 열차의 행방을 쫓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다.

스텔라론 헌터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어떤 방식으로 이동하며 특유의 술수를 펼치는지 지금으로썬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단항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을 상태였다면 몰라도 이제 그의 신분은 무명객이었다. 운명의 노예가 쓰는 각본에 있어 은하열차가 빠질 수 없는 조각임을 확인한 이상, 단항은 그 은밀한 집단을 집중 주시하며 열차의 경호원으로서 맡은 역할을 다해야 했다.

블레이드가 완갑을 버리거나 망가뜨리지만 않는다면, 단항은 필요할 때 그가 했던 것처럼 움직일 수 있을 터였다.

추적 당하던 사냥감이 역으로 사냥꾼의 뒤를 쫓는 꼴이 된 셈이다.

그 남자는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생각이나 해봤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물론 기뻐서는 아니었다. 단항은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되레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래?”

서벌은 더 묻지 않고 해체했던 완갑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놨다. 돌려받은 완갑을 팔에 채운 단항은 격운을 두고 서벌과 잠시 토론에 가까운 이야기를 나눴다. 격운이 음운을 다루는 단항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설명을 들은 그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벨로보그의 공방 기술도 마냥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역시 그 선주라는 곳에 한번 가보고 싶어. 배울 점이 많을 것 같아!”

“단순한 화외지민 신분으로 입국하기는 쉽지 않을 거야. 내란 때문에 분위기가 어수선한 때라…. 필요하다면 열차를 찾아와. 나나 다른 사람들이 신분을 보증해줄 수 있을 테니까.”

“그거 정말 고마운 얘기네!”

서벌이 반색했다. 단항은 무심코 제 팔을 매만졌다. 완갑은 차가웠고 그의 존재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으나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선택과 선택과 선택

“30초 남았어.”

고물에 가까운 상태의 오락기 앞에 앉아서 삐걱거리는 조이스틱을 한참 혹사시키던 은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후드를 푹 눌러쓴 채 먼곳을 보고 있던 블레이드는 생뚱하게 들리는 선언에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아무리 귀환까지 남은 시간이 촉박하다고 얘기해도 들을 생각을 않으니 설득을 포기한 참이었다.

“빨간색 자기 부상 바이크가 왼쪽 도로로 지나간 뒤에 30초, 손님들이 보일 거야. 궁지에 몰린 그들이 도망칠 수 있게 활로를 뚫는 방법은 두 가지.”

“판단은 네 몫이야, 은랑. 난 네가 받은 각본에 대해 모르니까.”

블레이드는 담백하게 대꾸했다. 이건 자신이 맡은 일이 아니고 은랑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곳에 온 이유는— 단순히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복수의 선택지 중 멀지 않은 곳에서 단독 임무 중인 은랑을 찾아 돕기를 고른 건 지난번 그에게 진 개인적인 빚을 갚기 위함이었다. 정작 도움을 받게 된 은랑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지만.

정확히 30초 뒤 은랑이 말한 손님들이 요란법석을 떨며 등장했다. 쿠구궁! 건물과 땅이 부서지는 소리가 막이 오름을 알리는 전조곡처럼 들려왔다. 자욱하게 깔린 연기를 뚫고 나온 세 사람의 모습을 본 블레이드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옆구리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차원 저금통을 낀 카일루스, 뒤를 향해 분주하게 활을 쏘아대며 뛰는 마치세븐스, 창과 음운술을 이용해 날아드는 총탄을 튕겨내는 단항까지. 은하 열차 트리오가 청소년 모험 활극이라도 찍는 것 같은 모습들로 줄줄이 뛰었다. 은랑은 그런 세 사람의 모습을 재미있는 신작 게임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눈을 반짝이면서 쳐다보았다.

“내가 할까, 아니면 네가 할래?”

“….”

“그럴 줄 알았어.”

은랑은 두 번 묻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트리오의 뒤를 쫓는 것은 스타피스 컴퍼니의 제복을 입은 자들이었다. 사원급 보안 뚫는 거야 껌이지. 은랑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해킹 툴을 작동시켰다. 자판을 치는 손가락이 잠시 분주하게 움직였을 뿐이지만, 반응은 즉발적으로 나타났다. 추격 대상을 향해 맹렬하게 탄을 쏟아붓던 컴퍼니의 기기가 동시에 작동을 멈추고, 직원들 또한 먹통이 된 총기에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세 도망자는 기기 오작동으로 주춤거리는 추격자들을 홀끗 돌아보고는 뛰는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도망자와 추격자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졌다. 은랑은 도망자들이 무사히 도주로에 접어든 것을 확인하고는 씹고 있던 풍선껌을 크게 부풀렸다. 승리감과 즐거움의 표현이었다.

블레이드는 그저 처음과 다르지 않은 자세로 서서 멀어져가는 ‘손님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추격자들이 갑자기 동요하며 흐트러진 것이 수상하다 여긴 듯 맨 뒷줄의 청년이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블레이드는 콩알만큼 작은 그의 검은 머리칼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나섰다면 저렇게 조용히 보내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물어본 거야. 일이 더 재미있어질 것 같아서.”

“황당하군.”

엘리오의 의도 따위는 아무래도 좋지만, 이럴 때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허둥지둥 도망치는 저들을 구하는 게 정말로 각본에 한 줄로나마 기록해서 알려줄 만큼 중요한 사안인지.


“운명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지.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그야말로 먼지만도 못 하고. 그럼에도 <각본>의 존재를 알고 따를 수 있다는 건— 우리에게 행운이라고 할 수 있어.”

“행운?”

“적어도 우리가 흐름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장해주니까.”

“답지 않은 말을 하는군.”

“후후, 그런가?”

카프카가 손을 들어 제 턱을 매만지며 가볍게 웃었다. 블레이드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그 말을 이해했다. 자신이 할일을 하나하나 지정하고 예언하는 존재가 있다는건 상당히 유혹적이다. 아무리 발악해도 정해진 길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무력함과 별개로…. 실제로 블레이드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고 이 불법적인 집단에 몸 담은 뒤로 자신의 심신이 상당히 안정되었음을 느꼈다. 단지 카프카가 뻗쳐놓은 거미줄 때문만은 아니다.

자아를 유지하려 온힘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름대로 그저 명령을 수행하고 뭔가를 베어내고 부러지기를 거듭하는 행위에서 오는— 자기파괴적인 안락함이 그를 붙들어 주고 있다.

그렇군.

블레이드는 카프카와의 담화에서 시작된 <행운>이라는 관념에 대해 깊게 곱씹어본 뒤 인정했다. 그와 이유는 같지 않을 지라도 이는 분명 <행운>이다. 이 정체불명의 집단에 들어오지 않고 예전처럼 정처없이 떠도는 삶을 살았다면 그는 언어도 스스로의 정체성도 잊은 채 완전히 흉물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미친듯이 그의 뒤만 쫓았겠지.

단항의 얼굴을 떠올린 블레이드의 눈이 빛을 잃고 허공을 떠돌았다. 단정하게 자른, 흑단같은 머리카락. 차가운 비취색 눈동자. 물끄러미 이쪽을 노려보며 경계태세를 취하는 어리숙함. 비구름이 걷힌 듯 공포가 씻겨나간 자리에 남은, 블레이드로서는 수천 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을, 어떤 맑은 감정.

모습을 어렴풋이 머리로 그릴 뿐임에도 억눌러 놓은 반감과 원한이 명치 아래에서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

블레이드는 불편해진 심기를 감추려 제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나부에서 임무를 완수한 뒤 복귀했을 때, 그는 카프카에게 음월군과 관련된 자신의 기억을 잠시 묻어둘 수 있겠냐고 물었다.

당분간 은하 열차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라는 엘리오의 명령이 떨어졌으니 전처럼 마음대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마각화의 원인이 되는 인물에 대한 기억을 일시적으로나마 억제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카프카는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못한다, 가 아니라 안된다, 였다.

어떤 기억들은… 그 사람의 영혼과 너무 가까워서 섣불리 건드리면 뿌리 상한 나무처럼 시들어버리거든. 돌이킬 수 없게 돼.

설명하는 카프카의 얼굴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어딘가 슬퍼보였다.

“어디 불편해, 블레이디?”

“전혀.”

“자, 슬슬 시작하자. 잊지 않았지? 내가 심문하는 동안—”

“나는 청소를 맡는다.”

“좋아. 깨끗하게 부탁해.”

경쾌하게 박수를 친 카프카가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블레이드는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르며 최상층까지 향하는 카프카의 앞길을 막는 무장 경호원과 전투 로봇들을 처리했다. 최상층에 다다른 카프카가 비서에게 명령해 보안문을 따고 들어간 뒤, 블레이드는 긴급 알람을 듣고 몰려든 특수 부대를 상대했다.

블레이드는 카프카의 부탁을 빙자한 요구를 어기지 않았다.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포화를 뚫고 들어가 저격 드론들을 모조리 무력화시키는데 1분도 채 걸리지 않았고, 그 뒤는 하품이 나올 만큼 쉬웠다. 카프카가 일을 마무리하고 신호를 보낼 때까지 대기하기만 하면 됐다.

빌딩 진입부터 세뇌를 통한 정보 입수까지 걸린 시간은 7분이었다. 문을 열고 나온 카프카가 어깨가 뻐근한 듯 목을 좌우로 돌렸다.

“음— 다음 단계는 좀 까다로울 수 있겠어.”

“무슨 문제가 있나?”

“무명객들이 목표 지점 근처에 있다나 봐. 각본에는 적혀 있지 않은 걸 보면 그들의 존재는 이번 일에서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얘기겠지. 나야 간만에 회포를 푸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는데.”

너는 어때? 생략된 물음을 읽은 블레이드는 그게 뭐 대수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효율 떨어지는 짓은 관둬.”

“그것 참 교활한 대답이네.”

“….”

지적과 달리 카프카는 순순히 블레이드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일처리 하나만은 깔끔한 여자였다.


8시 30분, 중요한 정보원이 에이테크 플라자 건물을 나와 경호원을 대동한 채 자차로 이동할 것이다. 3분 뒤 두 블록 건너 사거리에서 트럭 충돌 사고를 유도해 길을 막고 목표의 주의를 분산시켜라. 목표가 차의 자폭 기능을 활성화시키기 전에 제압을 시도하라. 만일 그러지 못할 시 100초 후 폭발이 일어난다. 시나리오가 폭발 사태로 넘어갈 시 목표는 하수구를 이용해 지하수로로 빠져나가려고 할 것이다. 알파조는 수로를 따라 목표의 뒤를 쫓으며 베타와 감마조에 연락하라. 베타조는 수로 동쪽을, 감마조는 서쪽을 맡아 봉쇄한다….

…정보 획득 후 목표를 제거하라. 그러나 경호원의 경우 가급적 온건한 방식으로 제압하거나 회유를 통해 정보원과 다시 접촉할 수 없도록 막아야 한다.

뇌리에 쑤셔박은 듯 선명한 각본의 텍스트를 상기하며 블레이드는 눈을 떴다. 문제의 경호원이 묵묵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네가 여기에 있는 건 엘리오의 뜻이겠지.”

“새삼스럽군.”

단항이 한숨을 흘렸다. 학자 한 명을 우주 정거장까지 안전하게 에스코트하기만 하면 된다는 의뢰 내용을 들었을 때부터 퍽 수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스텔라론 헌터까지 엮일 정도로 커다란 비밀을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완갑을 통해 블레이드의 접근을 깨달은 단항이 의뢰인에게 미리 경고했으나 소용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도망칠 기회가 없을 거라면서 이동을 강행하더니 사거리에서 결국 교통사고를 내고야 말았다. 급기야 타고 있던 자동차까지 자폭시키는 바람에 도로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됐다.

정체불명의 습격자들을 서둘러 처리하고 도로를 뒤덮은 불길을 잠재운 뒤 도망친 의뢰인을 쫓아 수로로 들어왔더니 길 끝에는 블레이드가 보란듯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여기까지도 그 망할 각본에 다 적혀 있었겠지. 단항은 불쾌한 깨달음을 느끼고 인상을 찌푸렸다.

“날 막을 건가?”

“여기서 더 앞으로 가려고 한다면 그래야겠지.”

“내 의뢰인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갈수록 뻔해지는군, 음월. 정말 몰라서 묻나?”

블레이드는 냉소했다. 그는 느긋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눈은 단항이 쥐고 있는 창과 자세를 집요하게 주시하는 중이었다. 나부에서 힘을 다루는 방식을 익힌 단항이 진심으로 덤벼온다면 블레이드도 허투루 대응할 수 없을 터였다. 대군조차 쓸어버리는 물의 힘. 심지어 이곳은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흐르는 수로다. 블레이드와는 소위 ‘궁합’이 맞지 않는 장소였다.

각본을 통해 단항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심 그와 마주칠 일이 없기를 바랐다. 이런 상황에 단항과 싸우는 건 소모적인 짓에 불과했다. 저쪽이야 수로를 한번 물로 한번 깨끗하게 휩쓸고, 임무 실패의 씁쓸함에 기운이 좀 빠지는 정도로 끝난다지만 자신은 아니다. 단항을 막으려면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카프카가 묶어둔 실타래의 매듭이 풀어지기라도 하면— 또 다시 기억도 못할 만큼 날뛰면서 죽고 또 죽어야 하겠지.

전력으로 쫓든, 피하든, 결국 운명은 제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체감할 때마다 치미는 분노. 그 뒤를 잇는 탈력감.

정말로… 지긋지긋하다. 블레이드는 소리 없이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 제 이마를 매만졌다. 창백한 얼굴에 설핏 피로감이 스친다. 아주 찰나에 불과해서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감정. 블레이드는 능숙하게 그것을 갈무리하고 검을 뽑았다.

예상한 대로 수로에서의 전투는 블레이드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단항은 마지막으로 무기를 맞댔을 때보다 확연히 실력이 늘어난 상태였다. 사실 향상보다는 복구라고 불러야 옳겠지마는. 솟구친 물길이 블레이드의 퇴로를 막고 발목을 잡았다. 예리하게 치고 들어오는 창날에 옷자락이 찢기고 어깨와 허벅지에는 자잘한 상처가 새겨졌다. 상처가 벌어졌다가, 재생되었다가, 다시 벌어지기를 반복했다. 물과 피로 젖은 옷이 무겁게 블레이드의 피부에 달라붙었다.

쿵!

송곳처럼 찌르고 들어오는 물살을 맞은 블레이드의 몸이 벽으로 튕겨나갔다. 낙법을 이용해 바닥을 구르기 무섭게 격운이 옆구리를 스쳤다. 블레이드는 옆으로 몸을 틀어 아슬아슬하게 그 공격을 피했다. 수압과 벽에 부딪힌 충격으로 뼈에 금이라도 갔는지 전신이 다 욱신거렸다. 코와 입속에는 쇠비린내가 가득했다.

다음 공격이 결정타가 될 것이다. 블레이드는 직감적으로 판단하고 뻣뻣한 손가락 끝을 구부려 검을 고쳐쥐었다. 날카로운 창끝이 블레이드의 목줄기를 꿰뚫을 기세로 강하했다.

—하지만 이어진 건 고통이 아닌 공백이었다.

블레이드는 눈을 들어 단항을 올려다보았다.

“왜, 이제 와서 인정이라도 베풀 셈이신가?”

“….”

음운의 힘을 다루는 동안 형형한 빛이 돌던 단항의 눈이 가라앉았다. 투명한 옥색으로 돌아온 눈동자에 시궁쥐 같은 꼴의 자신이 고스란히 비추는 것을, 블레이드는 별 감흥없이 마주 보았다.

“어차피 진심으로 싸움을 건 것도 아니잖아.”

단항의 말투는 냉정했다. 숨을 조금 가쁘게 내쉬는 것 외에는 격렬한 전투를 벌인 사람답지 않게 차분한 모습이었다. 블레이드는 어린 청년의 얼굴 위로 익숙한 이미지가 베일처럼 드리운 것을 보았다. 내가 진심으로 상대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네가 더 잘 알고 있으면서, ■■. 오만한 용존의 얼굴을 하고 자신을 내려다보던….

블레이드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이명이 귀를 덮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팔다리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힘을 끌어다 쓴 부작용이 되돌아오는 소리였다.

블레이드의 얼굴에 어린 체념을 항복선언으로 받아 들인 단항이 창을 거뒀을 때였다.

“!”

미처 잡을 새도 없이 블레이드의 몸이 수로 밑으로 추락했다. 단항이 놀라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손가락을 잘라낼 듯 매서운 칼날의 궤적에 막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첨벙 소리를 내며 물속에 빠진 그의 몸은 다시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단항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검은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물에 빠지기 직전 블레이드가 단말마처럼 쥐어짜낸 공허한 웃음소리가 어지럽게 귓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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