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비 아래 단잠

개저우정

단풍 x 응성

비디아다라 설정 날조 주의

“대체 뭐냐고?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줘야 할 것 아냐?”

응성이 벌컥 성을 내면서 제대로 비우지도 않은 술잔을 탁 소리 나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졸지에 그에게 붙잡혀 술 상대를 하게 된 경원은 응성의 푸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제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그가 눈을 반쯤 감고 얕은 잠에 빠진 꼴을 본 응성은 한층 부아가 치밀어 오만상을 했다.

“집까지 직접 찾아가도 지금은 바쁘시다, 곤란하다 하면서 문전박대하기나 하고,”

탕! 응성의 손바닥이 탁자를 쳤다.

“연락을 시도해도 안 받고, 편지도 답이 없긴 마찬가지고!”

터덩! 탁자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젓가락이 계속되는 강한 진동에 못 이겨 바닥으로 떨어지려고 했다. 그것을 가분히 잡아 탁자 중앙으로 옮겨 놓은 경원이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그러니까 말했잖나. 당분간 무슨 짓을 해도 소용 없을 거라니까.”

“화가 났으면 말로 풀어야지, 사람을 무시해?”

“무시하는 게 아니라고도 몇 번이나 얘기했고.”

“그럼 뭐냐고, 어? 어디서 또 재앙신 찾는 광신도 나부랭이들이 처들어온 것도 아니고, 신책부나 운기군이나 죄 조기 퇴근을 하네 마네하며 퍼져서 자네처럼 한가하게 엉덩이나 긁어대고 있는 판국에 고귀하신 용존께선 당췌 뭐가 그리 공사다망하셔서 코빼기도 안 보이냔 말이야.”

응성은 경원을 노려보았다. 열이 받을 대로 받아서 표정이 사라진 그의 얼굴은 싸늘했다. 오금이 다 저리는군. 이러니 공조사 장인들이 백야의 백 자만 들어도 발끝까지 하얗게 질리지…. 경원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응성이 이토록 펄펄 날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외골수인 응성은 자주 주변(특히나 자신)과 부딪혔고, 가장 친한 친구인 단풍도 그 난리통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오히려 친한 만큼 한 번 다툴 때 크게 다투는 편이라 두 사람 사이에 한 번 싸움이 일어나면 일대에 그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최근에도 어김없이 크게 한 판했다는 모양인데 경원은 등효 장군을 따라가 연맹 회의를 참관하느라 바빠 뒤늦게 알았다. 뭐 평소 같았으면 알아서 화해하겠거니 하고 말았겠지만, 이번엔 타이밍이 영 좋지 않았다.

응성과 대판 싸움을 벌인 단풍이 그대로 칩거에 들어가버린 것이다.

단풍이 이런 상황을 의도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그도 불시에 일어난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응성에게 미처 내력을 알리지 못한 거겠지. 경원은 그렇게 짐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단풍이 겪고 있을 고충에 대해 응성에게 깔끔하게 설명해주고 기다리라 말하고 싶었지만, 과연 그것이 현명한 일인가 하는 의구심이 경원을 머뭇거리게 했다. 화외지민 출신의 단명종인 응성은 20년 넘게 이곳에 살면서도 선주 문화의 대부분을 낯설게 받아들이고 의문을 표했다. 태생이 다르다는 건 이래저래 골치 아픈 일이다. 어떻게 보면 그게 응성이 지닌 매력의 근원이지만….

경류나 백주 또한 이 난감한 사태를 피하려고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품은 채 경원은 제 앞의 술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응성의 말대로 한가한 시기긴 했으나 그 시간을 전부 친우의 푸념을 들어주는데 소모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급하게 굴지 말고 기다려 보게. 그가 허투루 움직인 적이 있던가? 그의 시종이 바쁘다고 했으면 정말 바쁜 거겠지. 확대 해석할 필요 없는 일에 심력을 기울이는 것만큼 무의미한 짓이 또 어디 있겠어.”

경원을 보는 응성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네, 뭔가 알고 있는 거지?”

“하다하다 이젠 생사람까지 잡나?”

“당분간 무슨 짓을 해도 소용 없을 거라는 건 그 녀석이 왜 잠적했는지 이유를 얼추 짐작하니 할 수 있는 말이지. 너까지 이럴 거냐?”

자네에서 너, 로 변한 호칭에 경원은 슬슬 이 자리에서 꼬리를 빼기로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자신의 귀한 휴일이 통째로 날아가 버릴 것이란 위기감이 들었던 것이다.

“잔이 비었군. 내 한 병 더 시킴세.”

그리고는 점소이를 불러 안주까지 추가했다. 후한 대접에도 응성은 의구심을 거두지 않았으나, 독한 술 한 병에 안주까지 더해지니 더는 버틸 도리가 없었다. 거푸 잔을 권하는 경원에게 맞춰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숙소 침상에 꼴사납게 엎어진 채였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는 덤이었다.

“경원 이 능구렁이 자식…. 또 이런 식으로 빠져나갔겠다.”

응성은 이를 갈며 일어났다. 머릿속이 징징 울렸다. 작은 괴물들이 그의 뇌에 들어앉아 북과 꽹가리를 치는 것처럼 끔찍한 기분이었다. 주방까지 기어가다시피 해서 숙취 해소제를 꺼냈다.

이렇게 나오면 별 수 없다. 직접 바닥까지 파헤쳐서 뭘 숨기고 있는 지 확인하는 수밖에.

단풍의 갑작스러운 잠적이 감정적인 이유에서 기인한 게 아니란 건 물론 그도 알았다.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만데 그 정도도 모를까. 장수종 기준으로는 찰나에 불과해서 깜빡하기 쉽겠지만 자신은 아니다. 무려 평생의 1/3을 넘어선 비율이다. 33%는 결코 작은 숫자가 될 수 없다. 주어진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당장 죽어버린다면 퍼센테이지는 순식간에 치솟아 100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니까, 그 만한 시간을 함께했는데 자기는 아직도 모르는 게 있고 다른 친구들은 그렇지 않은 게 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자신이 이런 차별 아닌 차별에 얌전히 순응하는 성격이었다면 공조사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도 요원했을 터다. 응성은 맛이 지독한 해소제를 식도에 때려붓고 찬물 샤워로 심기일전한 뒤, 기물 몇 가지를 창고에서 끄집어냈다.


거목을 봉인하기 위해 인연경을 침수시킨 뒤, 비디아다라족은 동천이 훤히 내다 보이는 단정사 구역에 일족이 새로이 기거할 별궁을 지었다. 대부분의 비디아다라가 새로운 터전이 고해에 잠긴 본궁의 위용을 발끝만큼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입을 모아 평했다. 응성은 그게 우습지도 않은 허풍이라고 여겼다. 난공불락 같은 절벽과 바다를 등에 이고 세워진 별궁은 그야말로 파월고해 밑바닥에서 통째로 건져 올린 보물상자 같았다. 진주가루를 발라 굳힌 벽은 맑은 날 궂은 날 가리지 않고 달처럼 빛나고, 지붕 위 유려하게 굽이치는 순금 용의 허리는 하늘로 힘차게 박차오르는 순간을 박제해 놓은 듯 생생했다.

다른 장수종들에게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는 오기로 이만한 규모의 건물을 축조한 것이겠지. 윗분들의 치졸한 욕심에 갈려나갔을 장인들의 수명과 건강이 눈에 선했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제 집을 향한 단풍의 평가는 박했다. 쓸데없이 넓어. 거주지 재건 계획에 참여한 군사와 장인들이 들으면 온몸의 구멍으로 피를 쏟으며 쓰러지고 남을 건조함이었다.

응성도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는 단풍의 평가가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미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흠결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궁전의 경관은 주명에서 나부로 갓 이주를 마친 풋내기 단명종에게 또 다른 별천지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런 새로움은 사적 방문이 거듭될수록 엷어져서 끝내 이곳 주인과 다르지 않은 감상을 갖게 만들었다.

‘진짜 더럽게 넓네.’

방에서 방으로 건너가기를 열댓 번쯤 하니 그런 생각을 안할 수가 없었다. 단풍과 함께 들어왔을 때는 그토록 한산하던 곳에 무슨 바람이 불어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지. 오가는 자들 모두 단출한 복장에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응성은 그들이 군인이라고 추측했다. 그 추측은 별궁의 심부에 가까워지며 확신이 되었다.

‘진주지킴이가 왜 여기에…?’

낯익은 얼굴의 여인이 우비를 입은 채 단풍의 처소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인연경에 잠든 비디아다라 알을 지키는 중책을 맡는 자가 어째서 대낮부터 별궁 내부에 머물고 있는 걸까? 응성은 기둥 뒤에 숨어 그를 지켜봤다. 혹시라도 그가 기물의 기능을 간파할 수 있단 우려에서였다. 다행히 진주지킴이는 지척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나 쉽게 자리를 비울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수를 쓰는 수밖에. 응성은 주머니에 넣어둔 컨트롤러의 버튼을 눌렀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별궁 담장 근처에 정차시켜 놓았던 드론이 작동되었다.

“동관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이윽고 보고를 받은 진주지킴이가 황급히 자리를 떴다.

후원으로 돌아간 응성은 누가 볼 세라 얼른 창을 열고 단풍의 집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날도 흐린데 불까지 모조리 꺼둔 실내는 어둑어둑했다. 그는 투명화를 해제하고 온몸을 답답하게 옥죄는 수트를 벗었다. 견본용으로 만든 기물이라 그의 몸보다 사이즈가 좀 작았다.

다음 견본은 편의성을 중심으로 개선해야겠어. 훈련된 비디아다라의 눈을 속일 정도면 성능 테스트는 안 봐도 합격이지. 응성은 미관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탓에 폐기장에서 끄집어낸 흉물처럼 보이는 수트를 방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아두었다. 여기는 용존의 공간이었고, 이곳에 들어온 이상 얄팍한 눈속임은 통하지 않을 터였다—는 사실 핑계고. 수트가 너무 무거워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버리고 싶었다.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기가 차가워졌다. 흡사 비구름 속을 헤집는 느낌이었다. 단풍이 가라앉은 기분을 주체하지 못할 때면 이런 식으로 주변 공기가 달라지곤 했다. 어째 요 며칠 동천 일대에 계속 비가 쏟아지더니만.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단풍도 자신만큼 편치 않은 일상을 보냈다고 생각하니 심술 섞인 통쾌함이 슬그머니 응성의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굳게 닫힌 침실 문 앞에 다다른 그는 미리 자신이 왔음을 알려야 할지 말지 잠깐 고민하다가 소리 죽여 문을 열었다.

“!”

침입자가 집무실 창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그 기척을 느낀 침실 주인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외려 응성이 놀라 뒤로 나자빠질 뻔 했다.

빛이 들어올 구멍이란 구멍은 모조리 차단하고 불을 꺼둔 침실은 심해처럼 어두컴컴했다. 단풍은 그 비릿한 어둠 속에 본신을 꽁꽁 숨긴 채 응성을 주시하고 있었다. 번들번들 빛나는 청옥색 눈동자가 무덤 위를 떠도는 잉걸불 같았다.

어째선지 응성은 문을 오래 열어두어선 안될 것 같단 느낌을 받았다. 뒷걸음질 쳐서 나가고픈 마음을 억누르고 어두운 공간에 완전히 두 발을 들인 그가 문을 닫자 침실은 다시금 밀실이 되었다. 하지만 전처럼 완전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맑은 물에 섞여든 이물질이라도 되는 것처럼 노려보는 눈빛을 마주하며 응성은 어색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단풍이었다.

“…어떻게 들어왔지? 군사들이 주위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을 텐데.”

단풍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음울하게 들렸다. 응성의 귀에는 그게 꼭 짜증을 내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 불락(不落)의 영역은 무슨. 담 넘어 들어오는 단명종 하나 못 막을 정도로 허술하더만.”

“무모한 짓을.”

순찰을 돌던 자들이 응성을 발견했다면 지체없이 죽이려 들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침입자를 다루는 손속에 자비가 없는 시기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친우인 응성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단풍이 한숨을 내쉬었다. 염증 어린 그 반응에 응성은 더 참지 않고 쏘아붙였다.

“그러길래 누가 사람 연락도 무시하고 잠적하랬나? 만나기 어려운 사정이 있으면 미리 얘기를 해야 할 것 아냐. 그랬으면 나도 굳이 내 귀한 시간이랑 아까운 기물 써가며 여기까지 발품 팔진 않았을 거라고.”

“경황이 없었어.”

응성은 제 팔짱을 꼈다. 단풍은 변명을 하지 않는 자였다. 그런 그가 여유가 없었다고 하면, 정말 없었던 거다. 응성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어디가 아픈 거냐?”

“아픈 건 아니지만… 연린(硏鱗)이 끝나기 전까지는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 어려워.”

“연린?”

단풍이 설명할 말을 고르는 동안 응성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졌다. 밤바다 위로 퍼뜩 튀어오른 물고기를 발견한 것처럼, 꿈틀거리는 꼬리를 포착한 눈이 그 윤곽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평소 단풍이 비디아다라의 자태를 드러낼 때면 그 뿔과 꼬리가 에테르 물질처럼 환하게 빛나곤 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푸르스름한 비늘은 빛나는 법을 잊은 것처럼 시들어 있었다. 소용돌이처럼 둥글게 말린 꼬리는 전에 본 것보다 훨씬 길고 거대했다. 꼬리에서 배로 이어지는 자리에 솟은 두 다리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는데, 응성은 그것을 한참 노려보고서야 다리가 아닌 물결임을 깨달았다.

참방…. 응성이 한 발 앞으로 다가가자 발 아래에서 가벼운 파문이 일었다. 석재를 깐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허물을 벗는 거다.”

“보통은 그걸—”

“탈린 또는… 탈피라고 부르지.”

<탈피>는 비디아다라 또는 선주의 법령을 어긴 범죄자에게 내려지는 형벌이다. 응성은 과거에 지나가듯 들었던 단풍의 설명을 떠올렸다. 비디아다라가 용의 후예라고는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신체적 특징은 단명종과 크게 다를 게 없어서, 실제로 이런 변태 과정을 거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호기심에 이끌려 발등이 물에 잠기는 것도 아랑곳않고 제게 접근하는 응성을 단풍은 막지 않았다.

“자주 일어나는 일인가?”

“그렇지는 않아.”

몸에 큰 부상을 입었다가 수복했을 때, 음운의 힘을 무리하게 운용했을 때 등…. 기력에 손상이 갈 만한 일을 겪고 나면 으레 연린 현상이 일어났다. 단풍은 이 현상이 쌀자루에서 상한 알갱이를 솎아내는 작업과 비슷하다고 보았다. 흐르지 않는 물은 고여서 썩기 마련이니 억지로라도 활로를 터야 한다.

하지만 제 의지와 관계 없이 껍질이 벗겨지는 일 자체를 수치로 여기는 고리타분한 장로들은 연린을 일족의 영역 밖으로 유출되어선 안 될 비밀로 간주했다. 연린 중인 몸을 외부인에게 보이는 행위는 벌거벗은 속살을 내놓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일이라고 말이다. 노친네들이 그런 식으로 구니 뭣 모르는 어린 비디아다들도 그것을 금기로 받아들였다. 그러니 외부인인 5전사가 응성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그나저나… 이 녀석하고 접촉해도 괜찮은 건가?’

불현듯 든 의문에 응성이 걸음을 멈췄다.

생물학에는 달리 흥미가 없지만 기본적인 상식 정도는 있다. 허물을 벗은 직후 가재나 게의 껍질은 깨끗하지만 물렁하다. 비디아다라의 종을 굳이 따지자면 갑각류보다 파충류에 가깝긴 한데…. 지금 제 상태는 빈말로도 깨끗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절벽을 타고 올라 궁내로 들어오기까지 땀을 잔뜩 흘린 데다, 손에는 수트를 벗다가 묻은 기름때와 먼지가 가득하다. 단풍의 입장에서는 병균의 온상이라 판단해도 할말이 없는 상태였다.

긁어 부스럼 만드는 짓은 안 하는 게 좋겠지. 그렇게 판단했을 때 단풍의 커다란 꼬리가 그를 향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꼬리는 순식간에 응성의 전신을 옭아맸다.

“뭣—”

“쉿.”

먹이를 잡아채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움직임으로 응성을 제 품에 끌어온 단풍이 손을 들어 그의 입을 틀어 막았다. 단풍의 피부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미끈거렸다. 빈말로도 좋다고 하기 어려운 감촉에 응성이 소스라쳤다.

“단풍 님.”

문 밖에서 들리는 진주지킴이의 목소리에 응성은 다른 의미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다가오는 발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는데 어느 틈에…. 단풍은 부러 꼬리를 움직여 응성이 낸 소음을 덮었다.

“무슨 일이냐.”

단풍이 부름에 응답하자, 진주지킴이가 황송하다는 듯 말했다.

“동관에서 소속 불명의 기계를 발견했습니다. 추격자들을 보냈으니 곧 신변을 확보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단풍 님께서 연린 중이시라는 정보가 밖으로 흘러나간 듯 싶은데, 안전을 위해 호위의 수를 지금보다 늘리는 편이….”

“그럴 필요 없어.”

“하지만—”

“별궁에 이 이상 인원을 동원하면 오히려 불필요한 이목을 끌게 될 거다.”

진주지킴이가 잠시 침묵하다가 옳은 말씀이십니다, 하고 맞장구를 쳤다. 응성이 기침이 나오는 것을 참으려고 코를 씰룩거렸다. 단풍은 맞닿은 몸을 한층 강하게 끌어안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물러가라. 진주지킴이는 더 토달지 않고 등을 돌렸다.

“후….”

복도가 조용해지자 단풍이 길게 숨을 뱉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입을 막은 그의 손을 떨쳐낸 응성이 잘게 재채기를 했다. 그리고는 단풍에게 물었다.

“너, 넌 춥지도 않냐?”

순식간에 뼛속까지 침투한 추위에 턱이 잘게 떨렸다. 단풍이 진주지킴이를 상대하는 동안 응성은 그가 내의도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등에 닿은 몸은 딱딱하고 찼다. 더위니 추위니 하는 것을 잘 타지 않는 체질임은 알지만 상태가 걱정되었다. 응성은 단풍의 가느다란 손목을 쥐고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운 것을 흉내내어 맥박까지 재어 보았다. 너무 느리고 희미했다. 당장 멈춰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추워.”

단풍이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온기를 좇는 본능 탓인지 끌어안은 몸을 놓기 싫었다. 허리와 양 정강이를 강하게 옥죄는 힘에 압박감을 느낀 응성이 황급히 말했다.

“윽, 뼈, 뼈 부러지겠어. 힘 좀…!”

“네 몸은 따뜻하군.”

“이게 정상이라고.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꼭 이렇게 축축하고 추운 곳에서 허물을 벗어야 하는 거냐? 없던 병도 걸리게 생겼구만.”

“안 그래도 욕실에서 몸을 풀 생각이었어…. 네가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늦춰진 거지.”

“그거 미안하게 됐네.”

전혀 미안하지 않은 투로 말한 응성이 단풍의 손을 밀어내고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하반신을 휘감은 꼬리는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응성은 황당해하며 물었다.

“이봐, 뭐하잔 거야?”

“….”

“게으름 피우지 말고 얼른 움직이라고. 이 망할 꼬리도 좀 풀고. 나까지 얼어죽게 만들 셈이냐?”

그제야 꼬리가 스르르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응성이 자유롭게 운신할 틈은 없었다. 응성의 오금 아래로 팔을 끼워넣은 단풍이 그대로 몸을 일으킨 탓이었다. 갑자기 몸이 공중으로 불쑥 떠오르는 느낌에 기함한 응성이 단풍의 어깨에 매달렸다. 단풍의 머리가 까마득한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솟았다.

“뭐…, 뭐야?”

꼬리가 평소보다 더 길어 보인다는 생각은 했지만, 용체가 이 정도까지 커진 상태일 줄은 몰랐던 응성은 당황했다. 꽉 잡으라고 말한 단풍이 상체를 허청허청 흔들며 욕실로 향했다. 또아리가 풀리고 길게 늘어진 옷자락처럼 이어진 몸뚱이와 꼬리가 물에 잠긴 바닥을 쓸며 움직였다. 그가 떠나고 난 자리에는 베일 같은 얇은 허물만이 남았다.

주위가 어두워서 천만다행이다. 잘 보였으면 멀미 났겠어…. 전라 상태의 용인에게 난로 취급을 받으며 옮겨지는 와중에도 응성은 그런 생각이나 했다.

“왜 나까지 끌고 가는 건데? 목욕 정돈 혼자 하라고.”

“어차피 지금은 못 나가. 감시가 더 심해졌을 거다. 밤까지 기다려야 해.”

“뭐? 아까 네가 사람 늘릴 필요 없다고 했잖아.”

“내 명령보다 자기 판단을 우선하는 자야. 연린을 겪느라 정신이 없으니 명령 한 번 어긴대도 별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냥 자르고 다른 놈 앉히지?”

“진주지킴이의 인선은 내가 아니라 군사의 권한이라서.”

“그것 참… 엿 같군.”

성인 열댓 명은 포용하고도 남을 넓이의 욕탕에서는 따뜻한 수증기가 올라왔다. 욕탕 바닥에 내장된 열선이 주기적으로 물을 데워주고 있어 언제 들어가도 갓 채워 넣은 것 같은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탈의할 틈은 좀 주든가. 지체 않고 욕탕에 입수한 단풍 때문에 옷이 다 젖어버린 응성이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옷은 입고 있는 게 나을 성 싶었다. 아무리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지낸 친구라고 해도 홀딱 벌거벗고 욕조까지 들어가 끌어안는 건 좀.

“따뜻한 술은 없나?”

지금 상황도 충분히 기묘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대신, 응성은 실없는 질문으로 제 관심의 방향을 틀었다. 단풍은 눈을 감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차가운 숨결이 응성의 목 뒤를 간지럽혔다. 몇 번 더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엷고 공허한 메아리만 돌아왔다. 어지간히도 피곤했던 모양이다. 응성이 소통을 포기하고 입을 다물자 욕실 안이 조용해졌다.

똑, 또옥, 똑….

단풍의 머리카락과 욕실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수면과 부딪히며 불규칙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응성의 등과 닿은 가슴이 균일하게 오르내렸다. 팔뚝과 허리를 붙잡은 손가락 또한 미지근하게나마 생기를 되찾은 것이 느껴졌다. 응성은 그 미세한 변화에 안도하며 팔다리를 편하게 늘어트렸다. 답지 않게 몸을 쓴 후유증인지 순식간에 잠기운이 몰려왔다. 그는 저항하지 않고 수마에 몸을 맡겼다.

오래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고른 숨소리가 실타래처럼 엮였다. 줄곧 별궁 처마를 적시던 빗줄기도 멎었지만, 응성이 그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응성 감기 걸렸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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