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이명헌의 끝

전편 / 신현철의 시작



이명헌은 유한에서 시작했다.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오직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사실만이 위로가 되었다. 그건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운동에 전념하기 쉽지 않은 가정환경.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다는 현실. 그런데도 분수를 모르고 커져만 가는 사랑과, 열정과. 그리고 또, 또... 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외의 것들을 제 손으로 죄 끊어내고야 말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또한 언젠가 끝나리라 되뇌이는 일은 이명헌의 생에 무엇보다 중요했다. 정 견디기 힘들 때는 발작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 같은 고난에도 끝은 분명히 있었다. 그런 허황된 믿음만으로 명헌은 손쉽게 저를 통제할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유일한 패인이라면 그런데도 불구하고 알아줬으면 하는 사람이 생기는 일. 깨닫기 무섭게 꼭 불에 덴 사람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시간은 언제나 약이었다. 그 또한 언젠가는 빛이 바래고 희미해져, 뚜렷했던 특징도 잊힌다는 사실을 명헌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데도 울었던 건 어째서였을까. 벌써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명헌은 가끔 그 이유를 고민했다. 끝까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파트너의 자리에서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은 대충 눙치며 넘어가는 얼굴을 뒤로 하고 코트를 빠져나왔을 때 말이다. 묵직한 철문을 밀고 텁텁한 흙바닥을 밟기 무섭게 굵직한 눈물 줄기가 볼 위로 뜨거운 상흔을 남겼다. 걸음걸음마다 미련이 남아, 자칫했다간 다시 뒤를 돌 것만 같았다. 홀로 코트에 남겨진 신현철의 얼굴이 어떨지 궁금해 힘들었다. 의외로 마음이 여리니까 어쩌면 저처럼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고, 우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뒤통수가 다 근질거렸다. 그러나 그 이전에 명헌은 모든 걸 너무나 잘 아는 조숙한 어린애였다. 이 진득한 마음에도 분명 끝은 있겠지. 결국 모두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명헌이라고 해서 다를 건 하나도 없었다.

 

다소 침침한 마음으로 시작한 입시 준비는 원래 제 길이었던 것처럼 건드리는 족족 손에 붙어 금방 익은 것이 되었다. 명헌은 제가 예상한 대로 순조롭게 농구를 잊었다. 애초에 정해놓은 길을 번복해본 경험이 별로 없는 명헌은 그게 당연했고 모두의 예상과 달리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정작 부가적이라고만 생각했던 현철의 분한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져만 갔다. 선명함은 곧 고통이고 이명헌은 그를 외면한 대가로 꽤 오랜 시간 앓았다. 그게 불치의 병임을 인정하고서야 명헌은 뒤늦게 깨달았다. 제 첫사랑만큼은 무한하고, 그래서 언제까지나 지독할 현실이라는 것을.

 

가끔 지나치게 유명해진 신현철을 원망했다. 지울 수 있을 것이라 헛된 기대가 차오를 때면 신현철은 어김없이 저를 비웃듯 곳곳에 얼굴을 비추었다. 그것도 매번 조금씩 자라난 모습으로, 섣부른 실망조차 할 수 없게끔 대단한 사람이 되어서. 장학금을 주고, 기숙사제라기에 두말할 필요 없이 선뜻 입학한 대학의 좁은 기숙사에서 명헌은 거진 매일 NBA 경기들을 돌려봤다. 당연히 모두 현철의 경기였다. 팬이냐고 묻는 학교 사람들의 말에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라는 단어로 기만하는 건 모조리 실패했다. 그제야 명헌은 제가 한 번도 현철을 친구로 본 적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런데, 뭐. 그래도 그때까진 여전히 유한을 믿었다. 보답이 없는 일들은 그토록 쉽게 포기해오지 않았던가.

 

그런 와중에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대학 성적이 꽤 좋았다. 외국어는 자신 없었지만, 대우가 좋고 바깥으로 자주 나돌 수 있어 나름 외국계의 탈을 쓴 제법 유명한 기업에 입사했다. 제 복잡한 속 알맹이와 별개로 이명헌은 사회라는 이름의 코트와 꽤 잘 맞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중학교 시절의 자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매번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노력한 만큼은 건질 수 있었고 어느덧 버릇처럼 찾는 술 담배도 나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가끔 농구 이야기도 했다. 학교나 동기들에 대한 건 피했지만, 그냥 좋아하는 만큼 할 줄은 안다. 딱 그 정도. 잘 짜여진 의도는 사람들을 쉽게 속였다. 처음으로 사내 체육대회에 주전이 되어 출전했을 때였나. 신현철이 그 넓은 땅에서 mvp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에 돌아가서는 땀 범벅인 체육복을 대충 세탁기 안에 말아 넣고 침대에 누워 한참 울었다. 놀랍게도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다. 좋았다. 기뻤다. 제게 신현철이 그렇듯, 신현철 역시 저를 잊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았다. 그 또한 유한한 착각이겠지만.

 

그러니까 이렇게 장황하게 풀어놓은 것은 분명히 이명헌 자신이 당황했기 때문이다. 낯선 땅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피부를 불쾌하게 간질였다. 그런데 실은 그런 것쯤이야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심각한 건 연고 없는 땅에서 발견한 커다란 플래카드였다. 제 이름이 말 그대로 대문짝만하게 쓰여있었다. 그 큼지막한 종이 뒤로 고등학교 시절과 다름없이 하얗고 둥근 머리가 비죽 보였다. 어정쩡하게 다가서자 그때보다 훨씬 더 큰 바람에 이제는 도저히 이명헌과 눈을 맞출 수 없는 위치에서, 신현철이 씩 웃었다. 안녕.

 

“마중 나오라는 이야기는 안 했는데, 삐뇽.”

“그러니까 말이다.”

“...집은 고마워.”

“별말씀을.”

 

태연한 반응에 저도 모르게 귀를 긁적이다 그냥 캐리어나 마저 끌었다. 다행히 신현철은 거기까지 손을 대진 않았다. 대신 배가 고프지 않냐고 물었다. 기내식을 먹긴 했지만 한참 전이라 좀 출출한 것도 같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신현철이 자주 간다는 미국식 중국집에서 이름도 모르는 요리들을 몇 개 나눠 먹었다. 짜고 매웠다. 이명헌은 그런 것들에 젬병이었고, 신현철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 까먹었나, 나름 고민했는데 실죽 웃는 낯을 보아하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고. 그러면 이명헌은 신현철 또한 저와 다를 바 없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고 싶은 모양이라고 수긍했다. 그럴 수 있지. 신현철의 집은 이명헌의 출장지와도 가까웠지만, 그보다 공항과 더 가까웠다. 순식간에 식사를 해치우고 그저 이끄는 대로 따랐더니 바로 집 앞이었다. 키를 쑤셔 넣는 단단한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자고 싶어졌다.

 

“피곤한데, 삐뇽.”

“아아. 미안. 먹지 말고 그냥 들어올 걸 그랬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내 방은 어디, 삐뇽?”

“저기. 치워놨다.”

 

성큼 앞서는, 그때보다 배는 커진 듯한 등. 불쑥 뜨거워진 목덜미를 긁적이며 마저 따라갔다. 쓸데없는 잡념보다야 이불도 세탁을 해놨으면 좋겠다는, 애먼 바람이 나았다. 다행히 방에 들어서며 흘깃 본 이불은 깨끗해 보였다. 만족스러움에 으음, 목 안을 울리는데 이곳저곳 건드리며 방안을 보다 쾌적하게 바꾸던 현철이 갑자기 뒤를 돌았다. 그리고 물었다. 명헌아.

 

“?”

“안아봐도 되냐?”

 

이런, 미친. 순간 헛헛한 등골 위로 어디서 솟은지 모를 식은땀이 주륵 미끄러졌다. 설마 진심인가 싶어 여전히 날카롭게 생긴 면상을 곰곰이 쏘아보는데 아무래도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그렇다고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명헌이 이내 옅은 한숨과 함께 캐리어 손잡이를 놓고 양팔을 넓게 벌렸다. 그러자 그리 어리지도 않으면서 갓 눈을 뜬 짐승처럼 다가온 현철이 그 품을 가득 끌어안았다. 꽤 묵직하게 달콤한 냄새가 났다. 향수인가. 비강을 파고드는 냄새를 조금도 놓치지 않으며 명헌은 또 이상한 가정을 머릿속으로 늘어놓는다. 이렇게 변했으니 어쩌면 유한은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따뜻했다.

 

“술 안 마셨는데도 하네.”

“뭐?”

“삐뇽.”

“... 삐뇽.”

“아, 좋네.”

 

좋은 만큼 짧은 포옹이었다. 팔을 조심스럽게 푼 현철이 이내 방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어디에 무엇을 두면 좋을지 일러주었고, 사실 네 맘대로 써도 된다는 허락까지 덧붙였다. 급히 구한 집이라 그렇게 좋지 않다는 말에는 다소의 수줍음이 묻어있었으나, 회사에서 구해준다고 했던 싸구려 모텔보다야 훨 나은 선택지라 명헌은 그대로 말을 아꼈다. 피곤할 테니 집 구경은 나중에 시켜주겠다기에 뭘 더 보여줄 게 남았던가, 궁금했지만 그 역시 목구멍 뒤로 꿀떡 넘기고 말았다. 그럴 시간은 아마 없을 것이다.

 

 

괜히 한 달이나 기간을 끊어 보내준 게 아닌 만큼 매일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았다. 동기들은 이 김에 관광이나 두루 하고 돌아오라는 속 편한 소리를 했었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일,일,일. 오죽하면 제일 오래 머문 장소가 차 안이 아닌가 할 정도였다. 차량을 지원해준다기에 의아했는데 웬걸 없으면 큰일 나니까 어련히 딸려 준 것이었다. 그래, 이 정도면 금방 녹초가 될 만도 한데 오히려 오기 전보다 훨씬 괜찮았다. 마음은 물론이고 몸까지 편한 건 다 신현철 덕분이었다. 아무리 비시즌이라고는 하지만... 명헌도 간만에 쉬는 날이었는데 아침 식사를 챙기는 건 또 신현철이었다. 그것도 저는 생수통만 한 물병에 프로틴 쉐이크인지 뭔지를 벌컥거리면서 이명헌 몫으로 내놓은 접시가 지나치게 풍성했다. 떨떠름하게 포크를 들다 말고 명헌이 입을 열었다.

 

“운동선수들은 내조가 중요하다던데.”

“응?”

“넌 그런 거 필요 없겠다, 삐뇽.”

“그거 그냥 살림 봐주시는 분이 준비해두신 거 차리기만 한 건데.”

“내 걸 따로 부탁할 필요는 없어.”

“...”

“아침 안 먹은 지 꽤 됐으니까, 삐뇽.”

 

그래도 잘 먹을게. 그릇 위로 포크를 놀리자 멀뚱히 서 있다 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현철이 쯧, 혀를 찬다.

 

“그래, 아침은 안 먹게 됐고.”

“...”

“말 정 떨어지게 하는 건 여전하고.”

“...?”

“저번에 보니까 담배도 시작한 것 같고. 그리고 또?”

“뭐?”

“그리고 또 뭐가 변했는데.”

 

접시에 고정했던 시선을 떼어내고 눈을 맞추자, 의외로 별 유감없는 얼굴의 현철이 웃고 있었다.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없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입가의 호선이 조금 더 깊어졌다.

 

“오, 그것도 아직 안 변했네. 생각할 때 버릇.”

“별...”

“여전히 재밌네, 이명헌.”

“... 농구는 이제 안 좋아하고.”

“...”

“...”

 

그 순간 머릿속에 빨간 불이 반짝, 켜졌다. 적당히 끝낼 때는 아는 것은 명헌의 큰 장기였다. 맥을 강제로 끊어 놓아야 할 때, 공통된 약점만큼 괜찮은 무기는 없다. 현철에게 더는 별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 명헌이 짐짓 태연한 척 다시 포크를 들었다. 굳이 따지자면 일식파고, 실은 맛에 무감한 편인데 이 아침 식사는 꽤 괜찮았다. 차리기도 간단해 보이고. 그리하여 집에 돌아가면 소시지 같은 거나 좀 사둘까,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시원한 목 넘김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들고 있던 병을 내려놓은 현철이 목을 뚝뚝 꺾으며 웃었다. 옛날 같았으면 누구 하나 묻으러 가냐고 물어봤을 텐데, 다 큰 이명헌은 이제 이럴 때 장난치지 않는 법을 알았다. 생각보다 더 많은 게 달라졌다는 걸 신현철은 모를 것이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난 이제 그런 걸로는 상처 안 받는데.”

“...”

“쓸데없이 공격적인 것도 여전하네. 새삼 반갑다, 명헌아.”

“실패, 삐뇽.”

“아침 안 드신다더니 한 그릇 뚝딱한 것 봐.”

“... 맛있다.”

“그래, 이 솔직한 새끼야.”

 

이명헌 역시 붕 뜬 시간의 공백만큼 달라진 신현철을 알지 못할 것이다. 가벼운 패배감이 발가락에 닿아 문득 그 끝이 간지러웠다. 아는지 모르는지 텅 빈 접시를 제 쪽으로 끌어다 싱크대 안으로 밀어 넣던 현철이 아, 짧은 단말마를 냈다. 그러더니 커피 마시겠냐는 듯한 단조로운 어투로 그런다.

 

“나도 해도 되냐? 공격.”

“... 지금 하면 파울. 뿅.”

 

미지는 명헌을 불안하게 한다.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포옹까지야 괜찮지만, 이 이상의 침범은 사양이었다. 그래서 칫, 다소 유치한 소리를 내며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이는 신현철도 달갑지는 않았다. 뭐, 그때보단 시간 많으니까. 하마터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간이 뭐가 많은지 물어볼 뻔했다. 다행히 묻지는 않았고 현철도 그 이상 도발하지는 않았다. 이명헌의 첫사랑은 여전히 사려 깊다.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그건 또 변하지 않았다. 다행인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불행하기도 했다.

 

 

그 뒤로도 현철은 많은 것을 물었다. 제가 없던 시간의 명헌에 대한 것이기도 했지만, 간혹 오래전에 떠나온 고향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대체로 사소하고 생활감 넘치는 질문들이었다. 전철 표 값이라던가, 요즘 괜찮은 프랜차이즈는 어디인지. 고등학교 때 외출 나가면 자주 가던 가게는 아직 남아있는지. 그런 것들. 여력이 닿는 대로, 또는 내키는 대로 대답해주거나 입을 꾹 다물고 나면 기분이 이상했다. 어차피 신현철에게는 다 끝난 시대의 잔상일 뿐이다. 끝난 일에 좀처럼 시선 주는 법이 없는 명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그러다 정해진 출장 기간의 반쯤 지났을까, 늦은 밤 소파에 늘어져 남은 서류를 들여다 보다 막 운동을 마치고 들어온 현철에게서 그간 쏟아내던 질문의 진짜 의도를 들었을 때 하마터면 소파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현관에 쌓여있던 우편물을 갈무리하며 걸어들어오던 현철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아, 확정됐네, 프로리그. 곧 시작될 시즌 이야기인 것 같아 서류 위의 표에나 마저 시선을 주었다. 정리가 왜 이렇게 됐지, 삐뇽. 이제는 이명헌 뻗어있는 소파 위에 제법 자연스럽게 그 큰 몸을 구겨 앉게 된 현철이 소파 옆 탁자에 우편물들을 내려놓더니 음, 짧게 침음했다. 이명헌이 흔치 않게 펄쩍뛴 것은 바로 다음 말 때문이었다. 명헌아. 왜.삐뇽. 나 다시 들어간다. 어딜. 국내로. 툭, 떨어뜨린 서류가 가슴 위로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눈앞의 가림막이 사라지고 보인 현철의 옆얼굴이 태연했다.

 

“휴가?”

“아니고.”

“그럼?”

“프로리그 생긴다네. 오퍼 온 지 꽤 됐고, 슬슬 마음 정해야지 싶어서.”

“아...”

“놀랐네, 이 새끼.”

 

아, 왠지 속 시원하네. 털어놓듯 말하는 현철의 목소리가 홀가분했다. 무슨 말로 받아쳐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질 만큼 산뜻한 음정이었다. 이명헌은 오직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사실만을 믿는다. 그건 제 일만이 아니라 타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위로는 체질이 아니었다. 성큼 다가온 끝 앞에 절뚝대는 사람들에게 명헌이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곤, 원래 다 언젠가는 끝나기 마련이니까요. 그게 전부였으므로. 그런데 차라리 그런 말이라도 낼 수 있는 상황이 훨씬 낫다는 걸 지금 막 깨달았다. 신현철에게도 분명 끝은 있을 테고 새삼 모르는 사실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현철의 일이었다. 그러니 정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제멋대로 입을 다물면 그만인데.

 

“저번에 내가 그랬잖냐, 앞으로 시간 많다고.”

“발은... 만지지 말지? 삐뇽.”

“당황도 하네.”

“... 저번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현철,”

 

넌 좀...

 

“수법이 후져... 삐뇽.”

“야, 이건 진짜 상처 받는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근데 어쩔 수 없지. 경험이 적어서 말이다.”

 

첫사랑이 전부라서. 그런 것치고는 덤덤한 몸짓으로 잡고 있던 맨발을 끌어다 발등 위에 그대로 입을 맞춘다.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있다 당한 봉변에 등위로 잘은 소름이 끼쳤다. 이명헌은 끝을 믿고, 그래서 이별에 강하다. 끝난 것은 여태 돌아본 적이 없는데, 실은 그건 곧 시작에 약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무언가 시작되려는 소리가 요란했다. 꼭 코트 위로 추락한 공이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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