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 확장판 출시

자컾 서사에

글방 by 그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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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구트 꿈 백화점. 지구 각지의 잠든 생명체에게 그들이 원하는 좋은 꿈을 판매하는 이곳에서 일하는 1층 프런트 직원 페니는 평소처럼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함께 프런트를 담당하는 웨더는 페니 뒤에서 유명 꿈 제작자들의 신간 꿈을 선반에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유달리 여유로운 날이었다. 사람이 붐비는 편도 아니었고 이상한 부탁을 요구하는 손님도 없었다. 거기다 곧 퇴근 시간이었다. 편히 집에 갈 수 있겠네, 라고 페니는 생각했다.

슬슬 배가 고팠다. 마침 지나가는 손님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꿈을 들고 가고 있었다. 페니는 싱글벙글 웃으며 꿈을 품에 안고 가는 손님을 눈으로 좇고, 자연스럽게 오늘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채소는 하나도 없는 치킨샌드위치는 며칠 전에 먹어서 당기지 않았다. 돼지고기 카레를 집 가면서 사 먹을까? 부모님도 여행을 가셔서 집을 비운 차이니 피자를 사서 친구랑 맥주에 같이 나눠 먹어도 좋을 거 같은데. 페니는 어느새 피자의 기름지면서도 고소한 냄새와 짭조름한 맛을 되새기고, 거기다 치즈 크러스트를 추가할 때 친구와 나눠야 할 금액을 계산하고 있었다.

 

“저기.”

그러다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있음을 깨달은 뒤에야 페니는 몸을 크게 떨며 생각에서 벗어났다. 이미 몇 번이나 자신을 불렀는지 눈앞에 있는 손님은 불쾌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헉! 죄, 죄송합니다, 손님! 잠깐 다른 일을 하느라…….”

“알면 됐고요.”

말과는 달리 상대방의 얼굴이 풀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페니는 황급히 말을 이으면서도 마음 한편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생각을 없애지 못했다.

‘와. 이 사람 진짜 예쁘게 생겼다.’

자신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를 보면 미인이란 글자를 지우지 못하리라 페니는 확신했다. 볼에 있는 두 개의 점마저도 눈을 떼기 어려운 매력 요소가 되고 있으니. 신경질적인 표정마저도 아름다웠다. 그러다 너무 넋을 놓고 바라봤다는 자각에 페니는 눈을 꾹 감고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남자는 이러한 반응에 익숙한지 작게 콧방귀를 뀌는 것 외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고민하듯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가는 눈을 아래로 내리자, 붉은 눈 위로 속눈썹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언짢은 표정이 서서히 사라지자, 무언가를 고민하는 얼굴이 드러났다.

 

“이 백화점엔 모든 꿈이 다 있다던데. 그럼 혹시 기억을 지워주는 꿈은 있나.”

“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페니는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어떤 꿈이요…?”

“기억을 지워주는 꿈. 그게 어려우면 특정 기억만 나오지 않게 하는 꿈이라던가.”

“아. 그 기억만 나오지 않게…….”

“두 번 이야기했습니다. 이 백화점은 손님이 세 번 복창해야 꿈을 찾아주는 규칙이라도 있나?”

지금까지 다양하고 불가능한 꿈을 찾아달라는 손님을 만났으나 이건 또 처음 듣는 요구였다. 거기다 반말과 존댓말이 섞여 묘하게 빈정대는 말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 쉬웠다. 그러나 페니는 그런 부분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손님의 목소리가 불안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쳐 있었다. 불면에 허우적대는 사람 특유의 무기력이 느껴졌다. 페니는 손님의 얼굴을 차근히 뜯어봤다. 가는 눈 아래로 검은 다크서클이 내려와 있었다. 하루 지나가고 말 불면이 아님을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손님. 그런 꿈은 없어요. 꿈은 결국 손님들의 기억으로 제작되는 거라 특정 기억만을 제외한 꿈을 만드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렇게까지 잠에 고통받는 손님은 오랜만이었다. 거기다가 이 백화점에 처음 오는 손님이기에 더 신경이 쓰였다. 안타까움이 들었으나 만들 수 없는 꿈을 판매한다고 거짓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페니는 이 뒤에 올 말을 추측했다. 손님 중 대다수는 그래도 혹시라도 있는지, 비슷한 내용이라도 있는지를 애걸복걸하며 매달리곤 했다. 신입일 때는 달러구트 사장님이 해결해 주기도 했으나, 이젠 꿈 백화점에서 일한 지도 오래된 만큼 언제까지 그의 손을 빌리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이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조금은 알고 있고.

가장 난감한 경우는 손님이 화를 낼 때였다. 제대로 찾아보지도 않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 아니냐는 둥, 가장 크고 유명한 꿈 백화점이라고 해서 왔더니 있는 것도 없다는 둥 억지를 부리는 일도 드물게 있었다. 이러면 페니 혼자서 진정시키기도 어려울뿐더러, 다른 손님들에게도 방해가 되기에 해결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보통 이렇게 젊은 사람이 화를 내진 않던데. 페니는 상대방이 부디 정상적인 반응을 하기를 기도했다.

 

“하……. 그럼 됐고요.”

그러나 손님의 반응은 프런트에서 오래 일한 페니도 처음 겪은 모양새였다.

“아, 네?”

“여쭤나 본 거였으니 됐다고요. 기대하지도 않았고.”

체념이라는 단어를 지금 당장 설명하라면 이 사람을 가리키면 되겠다는 생각을 페니는 했다. 동시에 지금 이 사람에게 무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잠을 포기할 수도 있겠단 예감이 들었다. 고객 유치의 문제가 아니었다. 잠을 자지 않으면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었다. 기적을 바랄 수는 없었다. 기적 비슷한 희망이라도 손에 쥐어드려야 한다는 절박함에 페니는 급하게 꿈 카탈로그를 뒤적거렸다. 그러는 사이에 상대방은 인사 없이 자신을 흘긋 바라보고는 뒤를 돌아 백화점 밖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만요! 손님!”

페니는 프런트 밖으로 몸을 내밀면서 크게 소리쳤다. 다른 손님들이 자신을 흘긋거리는 게 느껴졌으나, 부끄러움을 애써 무시하며 페니는 프런트 밖으로 나가 손님에게 달려갔다.

“비슷한 꿈이 있긴 한데요!”

느린 걸음에 맞춰 한들거리던 긴 머리칼이 멈췄다.

“기억을 없앤다거나 그 기억만 나오지 않도록 꿈을 꾼다거나 하는 건 어렵지만…… 저 여기에서 나름 오래 일했거든요. 이 백화점에 모든 꿈이 다 있진 않지만, 정말 다양한 꿈을 만드시는 대단한 제작자분들이 별처럼 많으니까요. 손님께서 찾으시는 꿈도 분명 대체할 수 있을 거예요. 분명히요!”

남자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다 멈칫하고는, 아예 왼쪽으로 몸을 돌려 페니가 하는 말을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들었다.

 

“…대체라.”

“물론 손님께서 원하지 않으신데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요. 하지만 저희 가게는 모든 꿈값이 후불이고, 손님께서 꿈을 꾸신 뒤에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셨다면 저희도 꿈값을 받지 않아요. 그러니깐 한 번 꿔 보시기라도…….”

“아뇨. 그런 문제는 아니고.”

“그럼 어떤 문제가….”

“그냥.”

남자는 양손으로 긴 머리칼을 낮게 묶듯이 잡고선 아래로 천천히 빗었다. 엉킨 부분 없이 찰랑이는 백발은 백화점의 빛을 찬란하게 반사했다. 꼭 거대한 강의 표면 같다고 페니는 생각했다.

“대체할 수 있었으면 진작 했을 거 같아서.”

“네?”

“아닙니다. 아무것도. 어쨌든 뭔 꿈을 추천하시려고 바쁜 사람을 붙잡나 싶네.”

“아. 야스누즈 오트라라고 유명 꿈 제작자분이 만든 꿈인데요.”

페니는 가판대로 종종걸음을 해 전시된 꿈 중 하나를 빼 왔다. 꽤 고급스러운 포장이 된 상자에는 <타인의 삶-확장판>이라는 글씨가 멋들어지게 적혀있었다. 남자는 페니를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제작자분께서 이 ‘타인의 삶’이라는 꿈을 더 다양한 내용으로, 그리고 좀 더 다양한 시간대로 확장해 보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여러 샘플을 모아서 수정하고 추가한 뒤에 딱 오늘 정식 출시된 꿈이에요. 손님이 첫 꿈 구매자가 되시는 거고요.”

“호오.”

“제목처럼 타인의 시선이 되어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살아보는 내용의 꿈이에요. 원래는 유명 인사처럼 많은 분들이 알 법한 분들의 삶 위주로 제작이 됐는데, 이번에 새로 나온 확장판은 꿈을 꾸는 당사자의 주변인 눈으로 손님을 바라볼 수 있게 돼요. 예전에 그런 내용의 꿈 개인 제작을 저희 측에서 의뢰했는데 정말 좋은 반응을 얻었거든요.”

자세와 표정은 그대로이나, 남자의 가는 눈이 조금 더 가늘어지는 걸 페니는 놓치지 않았다.

“특정인을 선택할 순 없지만… 후기를 보면 자기랑 가깝고 친한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다고 해요. 가족이라던가, 오래된 친구라던가, 연인 같은 사이요. 나쁜 기억을 없던 일로 할 순 없겠지만… 좋은 기억을 회상할 수 있게 된다면 나쁜 기억도 금방 잊을 수 있을 거예요. 기억은 새로운 기억으로 덮고 회복할 수 있으니까요.”

“…주변 사람만 나온다고.”

“네! 그래서 샘플로 모집할 때도 정말 호응이 좋은 꿈이었어요. 올해의 꿈 그랑프리 상도 노릴 수 있다는 말도 나오고요!”

“그럼 한 놈밖에 없는데.”

 

남자의 말에 짜증이 느껴졌다. 사람 좋게 웃던 페니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 …혹시 나오실 것 같은 분이 불편한 관계신가요?”

“그건 아닌데. …맨날 얼굴 보는 놈하고 꿈에서까지 엮이자니 좀 그래서.”

남자의 말은 여전히 날이 가득했다. 쯧, 하고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는 소리도 들렸다. 상황을 모르는 누군가가 듣는다면 대화에서 언급되는 이를 싫어한다고 생각할 듯했다. 그러나 페니는 남자와 마주 보고 있었고 불쌍하게도, 잠들어 꿈 백화점에 온 손님들은 평소보다 더 솔직해지고 감정을 숨기지 못하곤 했다. 손님들에게 있어 이곳은 결국 자신의 본래 마음을 드러내는 공간이었다.

 

“…손님께선 그분을 많이 아끼시나 보네요.”

드러난 짜증 사이의 묘한 긍정적인 감정이 페니에게 느껴졌다. 페니는 상대의 한쪽 눈이 동공 없이 흐릿하단 걸 어렴풋이 눈치챘다.

“갑자기 뭔 헛소린지.”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이 꿈으로 드릴까요?”

“……네. 뭐, 줘보시던가. 꿈값은 후불이라 했죠. 카드 되나?”

“아뇨. 모든 꿈 판매업자들은 손님들의 감정을 값으로 받고 있습니다. 꿈을 꾸고 감정을 느끼시면 저희가 알아서 대금을 가져가니까요. 손님께선 그냥 편하게 주무시고 일어나시면 되세요.”

“아. 예.”

페니의 부드러운 어조에도 남자는 특별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고선 상자를 든 채 백화점을 나섰다.

 

 

“페니, 손님한테 꿈을 아주 열성적으로 팔던데?”

새하얀 손님이 가게 밖으로 완전히 나서는 걸 본 뒤에야 페니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가판대 정리를 마치고 프런트에서 일하던 웨더가 페니에게 다가왔다.

“웨더 아주머니. 죄송해요, 저 때문에 혼자서 프런트 일을 다 하셨죠…….”

“아냐. 네 덕분에 저 손님은 좋은 꿈을 꾸실 거니까. 나도 멀리서 그 손님을 봤는데 너무 지쳐 보이더라고. 딱 봐도 꽤 오랫동안 잠을 못 잔 거 같던데. 젊어 보이는 청년이 어쩌다 그리 됐는지…….”

“그렇죠? 거기다 찾으시는 꿈이 없다는 말에 금세 포기하시는 것도, 그만큼 자신의 일부도 포기하실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어떻게든 도움을 드리고 싶었어요.”

“잘생겨서 그런 건 아니고?”

웨더는 웃음기를 섞어 말했다.

“그, 그런 이유는 아녜요!”

“왜, 누가 봐도 예쁘게 생긴 얼굴이더만. 피부도 하얗고, 머리도 하얗고, 속눈썹도 길고. 다른 손님들 말 들어보니 유명한 사람인 거 같던데? 그 긴 머리가 그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도 난 처음 봤어. 그런 곱상한 얼굴은 취향이 아니긴 하지만 말이야.”

“물론 저도 보면서 잘생기셨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그런 이유만은 아니에요. 우선 저희 가게 손님이시잖아요.”

“그런 이유‘만’은 아닌 거면 그 이유도 있단 거네? 우리 막심, 불쌍해서 어쩌나.”

“막심 씨랑은 아무 관계도 아닌데요!”

“정말? 저번 주말에 같이 밥도 먹었다며.”

“그건 그냥 도와주신 거에 대한 답례로…!”

웨더의 짓궂은 웃음에 페니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래그래, 알겠어. 어서 퇴근하렴. 수고했다, 오늘도.”

“정말…… 네, 저는 퇴근해 볼게요. 아주머니도 고생 많으셨어요.”

페니는 뜨끈해진 볼을 손등으로 식히며 가방을 챙겼다. 저녁으로 뭘 먹을지에 대한 고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자드키엘의 삶이 그에게 다정한 적은 없었다. 이것은 비단 그가 겪어온 일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그의 곁에 잠시라도 머물렀던 사람들도 의미하는 문장이었다. 가족부터 친구를 자처했던 머저리들, 사랑으로 자신을 ‘고쳐’보겠다던 인간들,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파트너 만족도 검사에서 최악만을 표기하며 교체를 요구했던 동료들까지.

그렇기에 그의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은 자신이었고, 신경 써야 할 이 또한 자신뿐이었다. 부모라고 다를 리 있겠는가. 그들의 손에서 사랑이란 낭만적인 단어는 언제나 존재한 적 없었으니. 제 배우자가 크리쳐에 중상을 입자 거의 20년 만에 처음 찾아와 했던 말이 돈 좀 달란 거였으니 말 다 하지 않았나. 뿌리부터가 잘못된 이에게 친절과 다정을 베풀 바보는 없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자드키엘의 부모가 사망한 지 일주일이 되었다. 그리고 저주처럼 그의 꿈에는 부모가 등장했다.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윽박지른다거나, 시험 점수가 조금만 떨어져도 죽어 마땅할 놈으로 매도한다거나, 뺨을 때린다거나, 그 모든 걸 두 눈으로 보고서도 분노도 말림도 감정도 없이 제삼자처럼 군다거나 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어떤 꿈의 내용에서건 그들은 멀찍이서 자드키엘을 바라봤다. 움직이지도 숨을 쉬지도 않은 채로. 눈만 부릅뜬 채.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으면서. 그렇기에 자신도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건데. 그런 주제에 죽은 뒤에도 끈질기게 따라와 자신의 속을 긁어대는 꼴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자드키엘은 그 쌓인 분노를 아무 곳에나 터뜨리기 시작했다. 무차별 폭격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모두가 자드키엘 블란쳇을 피하고 미워하고 경멸하며, 종국엔 자신과 연을 끊고 나쁜 인간으로 매도되어야 익숙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한테 무엇을 기대한 건지,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단 거 몰랐는지 따위를 보여주며. 그렇게 몇 안 됐던 얄팍한 인간관계마저도 자드키엘은 스스로 무너뜨렸다. 그래, 이번에도 단 한 사람만은 제외되었다.

 

“자드키엘.”

“뭐.”

“너, 괜찮은 거야? 정말로?”

따라서 자드키엘의 의문은 결국 아이작이었다.

“뭔 개소리야.”

“화내는 건 그렇다 쳐도,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거 같아서. 아침에 일어나서 네 방 지나가는데 앓는 소리가 계속 들리더라고. 어제 너 현실 왜곡도 제대로 못 했잖아. 잠 부족해서 그런 거 같은데. 아냐?”

“…….”

“문 열면 네가 싫어할 거 같아서 그냥 지나가긴 했지만… 요즘 스트레스 받고 있는 거면 내가 충무영 쪽에 연락해서 심리상담 예약해 놓을게.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면 내가 가이딩 하고.”

“니가 그걸 왜 신경 쓰는데.”

“신경 써야지. 난 네 지정인도자잖아.”

“그러면, 썅, 인도자로 신경만 쓰면 되지 니가 뭐가 된다고 이러쿵 저러쿵 입을 놀려?”

“그야 네 동료잖아. 동료로서 난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일이 힘드니까 일 외에 다른 걸로는 힘들지 않기를 바란다고.”

“…허.”

“그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

 

생의 궤도와 그 우주가 아예 다른 사람, 아마 충무영 소속 동료로 만나지 않았더라면 서로 지나칠 일도 없었으리라 자드키엘은 자주 생각했다. 그러나 삶은 끝까지 자신을 가만두지 않았고, 그는 결국 아이작과 가혹할 정도로 얽히고설키며 죽어가다 결국 살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작이 일방적으로 붙잡은 채 놓지 않았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인생이 박복한 사람은 그와 엮이는 사람들의 삶도 팍팍하게 만든다던가. 제 삶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으나 자드키엘은 그 말을 굳이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굳이 아이작은 계속 자신의 곁에 머물렀다. 불편했다. 그러면 여기 살지 말고 나가라고 윽박지르면 될 것을, 자드키엘은 도무지 그 말을 뱉지 못했다.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를 때도 있었건만 결국 소리를 울려 상대에게 그 말을 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저놈과 연관 되면 이상하리만치 내 맘대로 언행할 수 없었고, 자드키엘은 그것이 늘 불쾌했다.

 

자드키엘은 이따금 아이작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언제나 자신과 가까워지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와 나 사이에는 몰이해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강을 반절쯤 건넌 아이작은 더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몸이 잠긴 채 자신을 보며 웃었다. 물 밖에 앉아 젖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나를 보며.

결국 자드키엘은 아이작의 말에 제대로 된 답을 하지 않은 채 집 밖을 나서 차에 올라탔다. 충무영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제 동료이자 동거인과 한 마디의 대화도 하지 않았다.

 

“넌.”

그날 늦은 저녁 자드키엘은 자신도 의도하지 않은 운을 띄웠다. 둘이 쓰기엔 과도하게 큰 식탁 위로 두 사람이 먹기엔 조금 과한 양의 음식이 차려졌다 전부 사라진 흔적이 가득했다.

“응, 자드키엘?”

설거지하던 아이작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봤다.

“…뭐야. 너 부른 거 아냐.”

사실은 맞았다. 그러나 물소리와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크리쳐를 죽이는 착괴갑사이자 자드키엘의 유일한 인도자인 그는 감각이 예민했고,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주저가 없었다.

“이 집에 너랑 나밖에 없는데 네가 귀신을 부른 게 아니라면 나를 부른 거 아닐까?”

귀신같은 소리를 한다고 핀잔을 줘 봤자 결국 자신이 아이작을 무심코 불렀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아 자드키엘은 침묵을 선택했다. 침묵하는 사람을 억지로 추궁하는 놈도 아님을 알아서 그런 것도 있었다. 아이작은 자드키엘을 바라보다 소리 내어 작게 웃었다. 수도꼭지에서 흐르던 물을 끈 뒤 입을 열었다. 꾸준하게도 정 많고 낮고 조곤조곤한 목소리였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뭐든, 언제든 편하게 해. 네 말이면 언제든 들어도 괜찮아.”

자드키엘은 대답 없이 접시를 치웠다. 다시 물소리가 들렸고, 어느새 그는 등을 돌린 채 설거지를 재개했다. 언제나 그는 어리석을 정도로 상냥했다. 여전히도, 자신에게마저도.

 

사실 자드키엘도 알고 있었다. 아이작 로렌스라는 사람은 쉬이 사람과의 연을 끊는 인물이 아님을. 박애주의라는 허울 좋은 단어에 힘입어 그는 아무 인간에게나 멍청하고 무르게 구는 놈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도 그렇게 행동하리란 건 당연한 부분이었다. 웬만큼의 선을 넘더라도 지금까지 동료로서 함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그를 믿을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법적으로 중요한 관계로 운운하는 가족마저도 자신을 함부로 대했는데 제삼자라고 손 털어내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 아무에게도 기대하지 않는 게 마음 편했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넌 그래서 언제 나를 떠날 거지?

자신답지 않은 언행이라고 자드키엘은 조소했다. 그렇기에 그는 말을 입 안에서 굴리다 곧 지워냈다. 몰이해의 강을 없앨 방법은 없지 않은가. 당연히도.

 

 

자드키엘은 오늘도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새벽 3시 40분. 조금이라도 자야 임무가 발령돼도 무리 없이 출동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제 의사와 몸은 따로 놀고 있었기에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입을 다문 채 숨을 내쉬었다. 피곤했으나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꿈을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꿈을 두려워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자드키엘은 다리를 침대 위로 올린 뒤 무릎에 얼굴을 대고 팔로 다리를 감싸 안았다. 어둠 속에서 새하얀 속눈썹이 느리게 떨렸다.

 

눈을 반쯤 뜬 채 의미 없는 생각들을 흐리게 하고 흘려보냈다. 골반까지 와 제 등을 덮는 긴 머리칼이 무겁게 느껴졌다. 오른손으로 굳이 뒤로 넘긴 머리를 끌어와 늘이듯이 만졌다. 예전에는 푸석거리고 끝이 전부 상했으며 조금만 만져도 쉽게 엉켰는데, 아이작이 관리한 이후로는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윤이 나고 부드러워졌다.

머리를 기르라는 건 충무영의 지시였으나 관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게 전부 다 아이작 탓이었다. 긴 머리카락을 볼 때마다 신기해하고 가끔은 만지기도 했었다. 그러다 동거 후 자신이 머리카락을 만져주겠다고 말하며 결국 매일 헤어에센스에 빗에 별의별 짓을 하지 않았는가. 그거에 익숙해져 버려서. 사실 적당히 냅두다 귀찮아지면 원래 길이로 자르고 충무영에 한 소리 듣든 말든 신경도 안 쓰려고 했는데. 그 자식이 머리카락을 만져주면 그러면 아주 조금은 기분이 나아져서. 그래서.

 

자신의 긴 백발을 노려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방을 나서 짧은 복도를 손으로 짚으며 걷다 2층 계단을 오르고, 끄트머리에 조금 열린 방문을 가느다란 손끝으로 밀어냈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잠든 이 특유의 눅눅한 공기가 볼을 타고 느껴졌다. 자드키엘은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밖과 안 사이의 그 모호한 경계에 서서 고개를 돌려 잠든 아이작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은 그처럼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남의 이부자리를 살피고 머리칼을 정돈하는 재주는 없었다. 그저 먼 곳에서 바라보며 그의 잠을 뺏어가고자 할 뿐.

자드키엘은 팔짱을 낀 뒤 문틀에 몸과 머리를 기댔다. 아주 작게 숨이 들어가고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은 여전히 고요했고 세계는 자신을 집어삼킨 채 여전히 굴러가고 있었다. 살아가야만 했다. 눈꺼풀이 서서히 무거워져 자드키엘은 다시 방문을 원래대로 닫아놨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고 작은 창고 방을 지나가 1층 가장 안쪽, 빛이 들지 않는 짧은 복도 끝의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혼자 쓰기엔 지나치게 넓고 깔끔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주 천천히 숨이 자드키엘의 몸 안으로 오갔고, 서서히 미동도 없어졌다.

 

 

시야가 높았다. 그러나 남자는 이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겨울이라기엔 따뜻하나 봄이라기엔 묘하게 서늘한 바람과 더불어 주변이 시끄러웠고, 곳곳에서 울음소리나 안도의 비명이 들리기도 했다. 주변을 둘러보자 곳곳이 반파된 건물과 산산이 분해된 크리쳐의 잔해, 이곳저곳이 더러워진 사람들의 무리가 있었다. 아. 내가 저들을 구했구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사람들이 무어라 수군대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자신에게 다가왔다. 여전히 떨쳐내지 못한 두려움과 살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절절한 감사가 담긴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올려다봤다. 피와 검댕이 잔뜩 묻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상대방은 그런 손을 멈추기 위해서인 듯 가슴께에 두고선 다른 손으로 꾹 쥐었다. 목소리의 끝이 요동치고 있었다.

“저기, 조선부대 소속 갑사님 맞으시죠…? 구해주셔서 정말, 정말로 감사합니다. 크리쳐가 너무 많아서 정말 무서웠거든요. 제 친구도 구해주셨고…… 걔 진짜 두 분께서 안 오셨으면 죽었을 거예요. 진짜 너무 감사해요…….”

 

남자는 순간 호흡하는 법을 잊었다. 감사를 말하는 생존자의 얼굴은 여름의 따가운 빛과 섞여 아플 정도로 반짝였다. 그의 얼굴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안도감의 빛이 들었다. 그런 그가 살아있었다. 다른 이들도, 자신들의 존재 유무도 몰랐을 이마저.

남자도 모르지 않았다. 충무영에서 일하며 자신은 많은 걸 잃었었다. 기억이 온전하지 못했고 가족과 동료, 자신의 믿음, 박애의 이유마저 잊어버렸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시작은 구할 수 있었던 일가족을 자신이 못 구했기 때문이었다. 힘이 약해서, 내려치는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어서, 그래서 잠시 휘청였던 사이에 크리쳐의 공격으로 건물이 무너져 내려서. 그런 일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 허락한 ‘착괴갑사 개량실험’마저도 불완전해 가족에도 상처를 주고 말았다. 오만함을 품을 수 없었다. 자신은 생명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이였다.

 

그런데도 이 일을 그만둘 생각조차 못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있어서 누군가는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안도할 수 있었고, 결국 내가 여전히도 당신들의 생을 사랑할 수 있게 되니까. 이 감정을 알고 두 눈으로 목격한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중독과도 비슷한 문제였다. 아이작은 제 일에서 이 순간을 가장 애정했다. 어쩌면 이 순간만을 애정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닙니다.”

남들보다 확연히 낮고 살짝 작은 목소리였다.

“저희가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너무 그렇게… 감사하게 여기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나오는 말은 재미없기 그지없었다. 이렇게까지 창의력이 없는 사람이 아닌데. 부끄러움과 벅차오름은 언제나 하고 싶은 말마저 생각나지 못하게 했다. 남자는 자신의 답답함에 총과 연결된 어깨끈을 꾹 쥐었다.

“그래도요. 저기, 실례되지 않는다면 혹시 사진이라도, 아니면 싸인이라도…!”

“죄송합니다. 그건 어렵습니다.”

“앗… 한 번만이라도 괜찮은데…….”

“안 됩니다. 아무리 제가 가면을 안 쓰고 전투한다고 해도 연예인은 아니라서-”

“일 혼자 다 끝났나 봐? 생존자들이랑 노가리나 까고.”

 

부드러운 미성에도 숨겨지지 않는 비아냥과 아니꼬움이 느껴졌다. 남자는 마치 당연하단 듯이 목소리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돌리고 놀라는 게 느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충무영을 안다면 그를 모를 수 없었다. 가면을 쓰지 않은 하얀 낯빛에 새빨간 눈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자드키엘. 왔어?”

빛과 겨울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 이라고 남자는 은연중에 생각했다. 단순히 외형적 요소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제 눈에 그는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눈에 띄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유를 묻는다 해도 쉬이 답할 수는 없었다. 동료고, 자드키엘로 인해 자신이 그의 지정인도자가 되었으며, 그런 전무후무한 사건 뒤에도 같이 여러 전투를 하며 그가 자신에게 먼저 동거를 제안하기까지 했으니. 제아무리 박애적인 성향이라 해도 자신은 일개 사람이기에, 다른 동료들보다도 그가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인정했다. 생활 습관부터 삶을 보는 방식까지 다 다른 건 큰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쪽은 어때? 거기도 다 반파됐으려나.”

“당연한 소리를 하네. 크리쳐가 그렇게 많았는데 거기라고 멀쩡했을 리가 없잖아. 생각이 그렇게 짧아서야.”

“사람이란 게 기대를 할 수도 있는 거지. 생존자들이야 네가 다 구했을 테고.”

“뻔한 소리를 언제까지 할 건지. 사람들 인솔이나 얼른 해. 난 한 대 피울 거니까.”

“하하. 알겠어. 쉬고 있어, 자드키엘. 고생했어.”

자드키엘은 귓바퀴를 새끼손가락으로 긁다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자신이 선물해 준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남자는 생존자 무리를 인솔하고 인원수를 확인하면서도, 바깥을 보며 하얗게 피어오르다 뭉게뭉게 사라지길 반복하는 연기와 동료의 먼 모습을 한 번씩 눈과 기억에 담았다.

늦은 오후의 진한 노란빛이 남자의 새하얀 얼굴과 길게 푼 머리칼, 그리고 청회색의 긴 도포와 검은 방탄복 위로 드리워졌다. 가느다란 손목과 팔에 그림자가 져 더욱 조각처럼 날카로워 보였고, 흰 연기 사이로 그의 붉은 눈이 천천히 반쯤 닫혔다. 매캐한 담배 냄새가 났다. 햇빛을 태우는 냄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눈 위로 아른거리는 그 모습을 깜빡이며 지웠다. 생존자 인솔을 전부 끝낸 남자는 자드키엘에게 가까이 다가가 핸드폰을 꺼내고선 카메라에 그의 모습을 담았다. 다른 동료들에게도 그랬듯이.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망막에 담긴 그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드러내기 위해 조금씩 더 신경 쓰며.

 

 

눈을 감았다 떴다. 남자의 눈에는 CCTV 특유의 묘하게 질 나쁜 화질이 보였다. 인도자가 가이딩을 진행할 때 사용하는 방 안에서 자드키엘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인물과 자드키엘이 마주 앉아 대화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두툼한 헤드셋에서 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처음에는 애정을 연기하다 곧이어 돈이 필요하다는 본심을 드러냈고, 그것을 거절하자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화를 냈다. 자드키엘은 처음에는 가만히 듣다 이윽고 대꾸하고, 결국 상대를 조소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의 목소리에 분노가 느껴졌다. 어머니라고 부를 수 없는 사람을 향한 켜켜이 쌓인 분노도 보였다. 여기에서 대화를 계속 이어가는 건 절대 좋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충무영 직원에게 헤드셋을 넘긴 뒤 대여 기간이 끝났다고 말하는 상대방과 소리 없는 화면을 번갈아 바라봤다. 남자는 진심으로 자드키엘이 걱정스러웠다.

 

장면은 물 흐르듯 바뀌었다. 딱 봐도 부르는 게 값일 호텔 식당에서 자드키엘은 와인 한 병을 혼자 다 마셨다. 자신이 말릴 수도 없었고 말리기도 어려웠다. …사실 이미 한 번 말렸다가 들을 필요 없는 욕을 먹기도 했고. 새빨갛게 달아올라 고개를 휘청이던 자드키엘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왜. 너도 내가 불쌍해?”

갑자기? 혀를 안 씹는 게 다행일 정도로 자드키엘의 발음은 뭉개지고 있었다. 남자는 놀라움을 마음 한편에 숨긴 뒤, 소스에 버무려진 고기를 썰어 입에 넣으며 담담히 말한다.

“뭐가.”

“와안-벽한 우상 취급받는, 히끅, 아름답고 강하기까지 한 자드키엘 블란쳇의 어두운 과거사를 안 기분… 말이야. 차아암 좋겠다. 허어?”

저 친구 생각보다 주량이 약하군. 남자는 20도가 넘는 도수의 와인 라벨을 보며 말을 돌렸다. 저 와인 맛있었는데. 나는 한 모금 먹고 나머지는 자드키엘이 다 먹은 건 좀 아쉽네.

“내가 들었을 거라 생각해?”

“당연하지, 새꺄. 내가 호-구로 보이나…….”

자드키엘이 손을 들어 웨이터에게 와인을 더 시키려 했다. 남자는 다급히 그의 손을 잡고 주문을 취소했다. 평소엔 서늘하다 느껴질 정도로 낮던 그의 손이 꽤 뜨거웠다. 와인을 먹어 열이 오른 듯했다.

“주문은 나중에 할게요. 죄송합니다. …이봐, 자드키엘. 내가 널 동정할 거라 생각하는 이유가 있나?”

“뭘 그딴 걸 다 묻냐….”

그가 휘청거리는 손으로 물이 든 잔을 들어 바닥에 흘리기 시작했다. 물이 쏟아져 식당의 대리석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분명 몇 모금 마실 양만 있었음에도 잔 속의 물은 끊임없이 쏟아지고 그 줄기가 굵어져, 어느새 찰방거릴 정도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직감했다. 그는 제 말을 조금도 믿고 있지 않으며, 자신의 진심과 진실을 보여주지 않으면 이 식당을 침수시키리란 걸.

 

“내가 범죄자라도 되나 봐? 다아- 캐물어지게? 내애가, 워낙에 잘나가지고 약점 하나 잡히면 가십거리로 몇 달은 씹히는데. 그 정도도 눈치를 못 채겠냐고. 이 등신아.”

“너도 남이 널 판단하는 걸 싫어하잖아. 나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서 그래.”

그러나 남자가 누구보다 잘한다고 자랑할 수 있는 건 괴력도 크리쳐 처치나 사격도 아닌, 자신의 진심을 상대에게 전하는 일이었다. 남자는 반쯤 풀린 자드키엘의 붉은 눈을 바라봤다.

“확실하게 말하자면, 나는 널 동정한 적 없어. 지금 여기서 네가 힘을 이용해 내 속을 파헤쳐도, 자백제를 사서 먹여도 내 대답은 똑같아.”

“하… 지랄한다… 지랄해….”

자드키엘은 물잔을 손에 쥔 채로 등받이에 풀썩 기댔다. 물은 어느새 무릎 근처까지 차올랐다. 발이 시렸다.

“앞으로도 너의 개인사에 대해 언급하지도 않을 거고, 그걸 약점 거리로 삼지도 않을 거야.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래…… 그렇겠지. 니가 그것밖에 할 게 더 있겠냐…….”

“진심이야.”

몇 번의 공방이 더 이어졌다. 남자의 말과 마음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물은 무릎에서 더 차오르지 않았고, 자드키엘의 취기도 더 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자신에겐 한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덜덜 떠는 입술과 몸을 티 내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남자는 마지막 말을 이었다.

“…뭐가 더 추가됐든 동료로서 내 판단은 바뀌지 않아.”

그제야 자드키엘이 자신을 바라봤다. 휘청거리는 몸으로 식탁이 흔들릴 정도로 팔을 올리더니 손으로 턱을 괴었다. 새빨간, 동공이 없는 오른쪽 눈이 마치 시각이 있는 것처럼 자신을 쏘아붙였다.

“아. 그으러셔어. 너 잘났다.”

“그래, 나 잘났지. 그래서 여기까지 왔는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착괴갑사에게 주어지는 출입용 마패를 드러냈다.

“너도 마찬가지고.”

 

그제야 그가 잔을 놓았다. 쨍그랑, 유리컵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식당은 언제 물이 찼냐는 듯 평화롭고 따뜻해졌다. 자드키엘은 무어라 웅얼대며 의자에서 미끄러져 반쯤 눕듯이 앉았다. 그제야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가는 허리를 안아 부축해 식당 밖으로 나갔다.

멋대로 닿는 게 싫었는지 그는 빠져나가려 버둥거렸으나 언제나 이성보단 취기가 더 강한 법이었다. 이내 그는 남자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숨을 겨우 뱉고 쉬기를 반복했다. 알코올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였다. 좋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마냥 싫은 냄새도 아니었다. 제 몸에 기대서도 비척거리던 자드키엘이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남자는 가볍게 그의 허리와 다리를 안아 받쳐 들었다.

문득, 그의 발그레해진 이마에 얼굴을 맞댄 뒤 살아줘서 고맙다는, 잘 살아서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수고했다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남자는 결국 하지 않았다. 자드키엘이 불쾌해할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진심마저도 쉽게 동정으로 오해하는 아이니까. 너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왜곡하지 않을 때, 그 순간에 그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 순간이 언제인진 몰라도 자신은 그 순간 이후에도 계속 그의 곁에 동료로 있고 싶었다.

 

 

장면은 다시 바뀌었다. 남자는 전투복을 입고 크리쳐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비리면서 쿰쿰하고 기분 나쁜 단내가 섞인 크리쳐의 피 냄새가 지천에 퍼져 있었다.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냄새에 남자는 도포 소매로 코를 가렸다 떼어냈다. 아무래도 크리쳐 집단에서 내전이 벌어진 듯했다. 그 정도라면 지능도 인간과 비슷한 개체로 이뤄졌단 뜻이겠지. 자신 혼자서는 이 무리를 상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자드키엘. 현실 왜곡으로 여기 주변에 방벽을 좀…….”

…그러나 협업해 줄 동료의 상황이 영 좋지 않아 보였다.

“명령하지 마. 알아서 할 거야.”

자드키엘이 평소보다 더 날 서게 말했다. 손을 휘저어 땅을 치솟게 해 방벽을 만들었다. 낮은 보폭으로 동태를 살피기 위해 방벽으로 갔으나, 아이작이 보기에도 솟아올라진 방벽은 그 강도가 약해 보였다. 벽의 끄트머리가 파스스 부서지는 게 남자의 눈에도 훤히 보였다.

“…자드키엘. 방벽 조금만 더 단단하게 해줄 수 있을까?”

“시끄러워. 말 걸지 마.”

“아니, 이거 조금만 건드려도 무너질… 어.”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크리쳐가 치면서 방벽이 무너져 버렸다. 얼굴과 몸 위로 쏟아지는 흙을 치울 새도 없이 크리쳐의 공허 같은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

“망할.”

“이, 인가아아안!!!”

“자드키엘! 뒤로 빠져, 우선 내가 앞에서 처리할 테니까!!”

 

그 뒤의 전투는 전투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수준이었다. 개싸움이라는 단어가 더 맞겠지. 결과는 승리였으나 과정에서 너무 많은 피해를 입었기에 원래라면 문책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크리쳐 제거랑 인명구조 끝냈잖아. 고생했어, 자드키엘.”

그런데도 남자가 그에게 화내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음주 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라는 아주 어이없는 이유로 자드키엘의 부모가 죽었다. 그나마 사람이나 차를 친 게 아니라 가로등에 박고, 안전벨트도 안 한 채로 즉사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래.”

어쨌든 그 사망 통보를 받은 이후로 자드키엘은 쭉 저 상태였다. 묘하게 멍하고, 별것 아닌 일에도 짜증을 내고, 일에도 집중 못 할 때가 있고. 심지어 자기 능력인 현실 왜곡마저 불안정하게 나올 때가 있었으며, 그게 지금이었다. 남자는 입 안에서 나오는 침을 휴지에 뱉었다. 아무래도 근육이 파열됐는지 왼쪽 팔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이 상태로 운전했다간 자신도 골로 갈 수 있겠지. 아이작은 대리기사 컨택 어플로 근처에 운전해 줄 사람을 찾았다.

남자는 여전히 표정을 구기고선 주변을 멍하니 보는 자드키엘을 응시했다. 평소에도 그의 옆모습엔 외로움과 공허가 담겨 있었으나, 지금은 거기에 다른 감정도 섞여 있는 것만 같았다. 제아무리 부모의 자격이 없던 이들이라도 자신과 연관된 사람의 사망이 달가울 리는 없지 않은가. 거기다가 그들에게 사과도 받지 못했으니 찝찝하기 그지없는 죽음이었고. 자신은 그가 아니기에 모든 것을 다 해결해줄 순 없었다. 그걸 자드키엘이 원하지도 않을 테고. 그래도 남자는 그에게 무엇이라도 더 해주고 싶었다.

 

“자드키엘.”

“뭐.”

“오늘은 밖에서 밥 먹을까? 내가 살게.”

“…갑자기?”

“맨날 집에서 먹었잖아. 밖에서도 먹어야지. 어떤 거 먹을래?”

“……몰라. 아무거나.”

“그렇게 얘기하지 말고. 마침 저녁 좀 지난 시간이니까 사람도 별로 없을 거야. 나도 괜찮은 식당 찾아볼게.”

대리기사가 왔다. 아이작은 자드키엘을 뒷좌석으로 안내한 후 조수석에 앉아 충무영으로 가기를 부탁했다. 백미러로 뒤를 흘끔 봤다. 유리에 이마를 기댄 채 멍하니 밖을 흘려보는 자드키엘이 보였다. 이 정도로까지 신경 쓰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동료고, 그 이전에 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를 아끼게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지금 당장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자드키엘은 침대에서 눈을 떴다. 머릿속에서 백화점이라는 단어가 잠시 생각났으나, 그 단어는 금세 모음과 자음으로 흐트러지고 망가져 눈처럼 녹아 없어졌다. 시간을 확인하기엔 암막 커튼에 햇빛이 가려져 어두울 뿐이었다. 곧이어 알람이 울렸다. ‘임무’라는 글자가 알림 화면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자드키엘은 알람을 끈 뒤 늘어지게 하품하며 방 밖으로 나갔다. 아이작이 눈에 보였다.

“일어났어?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은 무슨…..”

이렇게 짜증 낼 건 아님을 알았다. 하지만 자도 자도 피곤한 걸 나보고 어쩌란 걸까. 아이작은 그러든지 말든지 자신을 보며 예의 그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바보 같은 놈. 자드키엘은 이유 없이 밀려오는 화를 애써 참아냈다.

“충무영에서 임무 연락 왔어. 최근에 핵 발아해서 다른 조선부대가 처리한 곳인데, 우리가 순찰을 돌아야 한대.”

“그 핵 조진 놈들은 뭐하고.”

“전투하다 많이 다쳐서 입원했다더라. 요즘 핵을 없애도 지능이 높은 크리쳐들이 핵 부순 곳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인다더라고.”

“다 알아. 한 말 또 설명하지 마.”

사실 몰랐다. 며칠 전에 충무영에 가서 설명을 들었던 거 같긴 한데, 흘려들어서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아이작은 제 말에 특별히 대꾸하지 않고 자신에게 쉐이크를 내밀었다. 안 먹으면 배고플지도 모른다는 말과 함께. 귀찮아서 안 먹겠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타이밍 나쁘게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자드키엘은 군말하지 않고 쉐이크를 받아먹었다.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핵이 파괴됐다 해도 떠났던 사람들이 금세 돌아오진 않았다. 이곳저곳에 찢어진 핵 조각과 며칠 만에 썩어 문드러지는 크리쳐의 시체, 폐허가 된 도시의 살풍경은 아포칼립스라는 단어로도 설명이 부족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드키엘에게 큰 감흥을 일으키진 않았다. 그는 그저 총을 단단히 메고선 주변을 둘러볼 뿐이었다. 그 모습은 아이작과는 상이했다. 눈빛에는 여러 생각이 지나가는 게 뻔히 보였으나, 최대한 그 감정을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럴 터였다. 그 우직하고 바보 같은 놈은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에 더 집중하곤 했으니.

 

유달리 날이 좋았다. 자드키엘은 자신보다 한 발짝 앞선 아이작이 오늘따라 거슬렸다. 분명 어딘가에서 저 놈의 무언가를 봤었는데, 이 기시감이 어디서 있던 건지 도무지 기억나 먹지를 않았다. 상황을 봐서는 크리쳐도 나오지 않을 거 같았고, 나온다 해도 아이작이 알아서 하겠지. 자드키엘은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 하염없이 아이작을 노려봤다. 제 시선을 눈치챈 아이작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돌아봤다. 내 얼굴에 뭐 묻었냐는 쓸모없는 말도 덧붙여서.

“……그냥.”

아. 생각났다. 꿈으로 인한 기시감이었다. 꿈에서 아이작 로렌스가 되었던가. 그의 시야로 사람들을 보고, 자신과 함께하고, 멋대로 나를 판단했었다. 그 꿈처럼 그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되든 짜증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자드키엘은 공연히 아이작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아야. 왜, 왜? 갑자기 왜 때려?”

“그냥 좀 때렸다. 어쩔래.”

“군화로는 차지 마. 단단해서 아프단 말이야.”

“지랄.”

이제야 조금 기분이 풀리는 것 같았다. 자드키엘은 이죽거리며 아이작보다 앞서 걸었다.

 

어느덧 정오가 되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특이 사항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곳으로 크리쳐가 모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근처 공터에 앉아 두 사람은 불을 붙이고 군용 식량을 데워먹었다. 퍽퍽하고 지루한 맛을 으적거리며 자드키엘은 아이작을 쏘아봤다. 그는 밥을 먹으면서도 무전기로 충무영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핵이 발아했던 지역의 어느 지역까지 확인했으나 현재 크리쳐는 확인 불가, 나머지 지역 순찰 후 다시 보고하겠음, 특이 사항 발견 없음, 생존자 현재 확인 불가……. 불필요할 정도로 주변을 꼼꼼히 확인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혹시나 모를 생존자나 사망자의 유해를 확인하고 싶었던 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놈이었다. 꿈속 내용도 마찬가지고.

눈이 마주쳤다. 무전을 끝낸 아이작은 자신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안경 너머 연분홍과 붉은 눈에 제 얼굴이 비쳤다. 꿈에서 느꼈던 아이작의 감정이 얕은 파도로 밀려 제 발치에 닿았다. 사람들을, 그리고 자신을 하나의 보석처럼 보던 그 눈. 자신을 향한 걱정과 위로와 순수한…… 동료애 그런 거. 상상만 해도 소름 돋네. 자드키엘은 손으로 팔을 비볐다. 아이작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야. 아이작 로렌스.”

또다시 이름으로 운을 띄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실수가 아닌 자신이 의도한 부름이었다. 자드키엘은 담뱃갑을 꺼내 하나 남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응, 자드키엘.”

당황한 표정이 사라지고 평소와 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모두에게 친절하며, 사람만 있으면 언제든 행복해질 수 있는 것처럼 구는 멍청한 놈.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신 뒤 아이작에게 닿지 않도록 천천히 입 밖으로 흘려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손에 쥔 라이터의 붉은 큐빅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넌 언제 내 곁을 떠날 거지.”

그러니까, 그 꿈에서처럼 네가 사랑해 마지않는 인간의 축에 정말 나도 있는 건가? 문득 눈이 부셔 자드키엘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햇빛 아래서도 불꽃은 환하게 타올라 불티를 이곳저곳에 뿌려댔다. 머리 위로 바람 한 겹이 불었다.

“…내가 네 곁을 왜 떠나?”

그리고 돌아온 답은 당연하게도 예상했으나 동시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자드키엘은 눈을 제대로 뜬 뒤 아이작을 올려다봤다. 안경 너머로 기분 나쁜 듯한 반눈이 동그랗게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질문에 답을 한 것이 아닌, 그런 질문을 왜 하느냐는 의문 그 자체를 보이는 표정이었다. 자드키엘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러다 표정이 풀리고 다시 모닥불을 바라봤다. 아. 담배가 맛이 없었다. 얼마 피우지도 않은 장초를 바닥에 짓이겨 껐다. 유달리 하늘이 하얗도록 푸르러 그는 눈을 감고 바람 빠지듯이 웃었다.

“그러던가.”

 

 

 

 

페니는 한 손님에게서 꿈값이 지불됐음을 확인한 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컴퓨터로 그 내역을 보고 있었다.

“페니, 네 눈빛 때문에 컴퓨터가 망가지겠다.”

웨더는 그런 페니를 못 말린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웨더 아주머니, 하지만 볼 때마다 너무 기분 좋은걸요. 이 손님이 정말 걱정됐는데, 저 덕분에 좋은 꿈을 꾸시고 잠도 푹 주무셨다는 거잖아요.”

페니는 그런 말을 하며 다시 컴퓨터의 화면을 확인했다. 여러 개의 알림 이력 중 하나가 특히 페니의 눈에 크게 들어왔다.

‘손님께서 요금을 지불했습니다. ‘타인의 삶-확장판’의 값으로 안도감이 소량, 신뢰감이 소량, 설렘이 소량 도착했습니다.’

“이것 보세요. 어제 이 꿈을 사가신던 분 중에 단골로 기록되지 않은 분은 그 하얀 머리에 붉은 눈을 하신 분밖에 없었는걸요? 분명 꿈에서 좋은 기억을 찾으신 걸 거예요. 이제는 잠도 잘 주무시겠죠?”

“글쎄다. 손님들의 삶은 우리가 예측하긴 정말 어려워서 말이야. 그래도, 네 말 대로 오늘만큼은 정말 좋은 밤을 보내신 거 같구나.”

 

두 사람은 어느새 싱글벙글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가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두 사람은 동시에 출입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동시에 페니는 백화점으로 들어온 손님을 한눈에 알아봤다.

“아, 그!”

“누구신지.”

“앗. 손님께선 저희를 기억하지 못하시죠? 타인의 삶-확장판의 꿈을 판매한 백화점 1층 프런트 직원 페니라고 해요. 오늘은 좋은 꿈을 꾸신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페니는 새하얀 머리칼에 새하얀 피부, 붉은 눈에 긴 속눈썹과 오른쪽 볼에 두 개의 점을 가진 남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타인의 삶… ……아. 어젯밤에 꾼 그 꿈.”

“네, 그거요! 어떠셨나요, 좋은 기억을 찾으셨나요?”

“기억이라. 아뇨. 전부 다 이미 아는 거라서.”

그 말에 여전히 생글생글 웃던 페니의 표정이 굳었다.

“네, 네? 그러…셨어요?”

“네. ……뭐, 그래도.”

손님의 표정이 서서히 풀렸다. 길고 새하얀 속눈썹이 붉은 눈 위로 반쯤 내려오다 멈췄다. 남자는 긴 머리칼을 손으로 묶듯이 만지며 희미하게 웃었다.

“괜찮겠다 싶어서. 이대로 살아도.”

그 모습이 정말로 행복해 보여, 페니는 순간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봤다.

“아무튼 나쁘지 않은 꿈이었고, 다른 층에도 꿈이 많을 테니 둘러보고 고민이라도 해보던가 하죠.”

“……네! 편하게 둘러봐 주세요, 손님!”

“말 안 해도 알아서 합니다. …맞다. 그리고.”

가게 안으로 더 들어가려던 손님은 걸음을 멈췄다. 그 뒤 왼쪽으로 몸을 돌려 페니를 봤다.

“여기에 혹시, 키랑 덩치 크고 피부랑 머리 색 어둡고 눈 색 짝짝이에 얼굴에 흰 주근깨 있는 남자도 오나?”

“글쎄요, 저희 가게 오시는 손님들이 많다 보니 한 분 한 분의 인상착의를 전부 다 기억하기는 어려워서요. 혹시 그분께 전하실 말이 있을까요? 기록 해뒀다가 그 손님께서 오시면 저희가 전해드릴게요.”

“아뇨. 됐고. 그냥 오는지나 궁금해서.”

남자는 진심으로 거절하는 모습을 보이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페니는 그 손님을 조금 더 눈으로 좇다가 다시 프런트로 돌아왔다.

 

“너무 그 손님한테 진심인 거 아니니, 페니? 정말로 손님을 좋아하게 되면 곤란해. 절대 안 되는 일이야. 알지?”

웨더가 약간은 걱정이 느껴지는 어조로 말했다.

“당연히 알죠, 아주머니. 그냥… 편안해지셨다는 게 느껴져서 그래요. 앞으로도 좋은 꿈을 꾸실 거 같고. 단골손님이 되실까요? 눈꺼풀 저울을 구매해 둬야 하려나.”

“글쎄다. 우선은 한 번 두고 보자꾸나. 어이쿠, 손님이 오셨네. 어서 오세요, 손ㄴ… ……어머.”

인사를 하던 웨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가게로 들어온 손님을 바라봤다. 페니도 같이 인사를 하기 위해 손님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멍하니 봤다.

“네, 좋은 밤입니다. 이곳은 낮인 거 같지만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다른 사람들보다도 확연히 낮고 조금은 작은 목소리. 머리 하나는 훌쩍 넘게 큰 키와 큰 덩치. 확연하게 색 차이가 나는 연분홍색과 붉은색의 눈. 탁한 갈색 피부와 차콜색 머리. 그리고, 뚱해 보이는 눈 아래로 하얗게 수놓아진 주근깨까지. 남자는 잠에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그저 가게와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직원들을 어색하게 번갈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 아뇨! 다른 손님께서 손님 얘기를 방금 하고 가셨거든요.”

“제 이야기를요?”

“네. 손님을 정말 많이 아끼시는 거 같더라고요.”

페니는 그를 올려다보며 크게 미소 지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원하시는 꿈이 있다면 언제든지 얘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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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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