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님네 헬더가

[겐아엘] 우리 부모님 만나러 왔는데요?1

이안 헬더 전격 등장!

야마다 겐이치는 형사다. 정확히는 일본 경찰청 소속의 경찰이자 UGN에 협력하는 일리걸이다. 직업 하나만 있어도 일하느라 정신이 없을 현대 사회에서, 투잡, 그것도 하나는 표면상 드러낼 수 없는 직업을 영위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야마다 겐이치는 일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형사로, 레니게이드 관련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일리걸로 성실히 뛰어다니고 있다.

"또 애인한테 문자 왔어? 기분 좋아보이네?"

"예?"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겐이치가 고개를 들었다. 같은 부서 소속 선배인 카기가 히죽히죽 웃는 얼굴로 겐이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고 있잖아."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뭐 모처럼 칼퇴하는 날이니까~ 데이트라도 하기로 했어?"

겐이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프게 말을 돌려 두고두고 놀림을 받느니, 차라리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게 나았다.

"오늘 날씨도 좋은데 좋겠다."

"선배는 데이트 안 하십니까? 날도 좋은데."

"나는 처리할 일이 있어서 오늘 칼퇴는 무리네요~ 겐쨩 데이트 잘 하고 와~"

카기가 겐이치의 등을 떠밀자, 겐이치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다음에 데이트 할 것 같을 때 맞받아쳐서 말해봐야겠다. 짐을 챙긴 겐이치는 괜히 혼자 퇴근하는 게 멋쩍어져서 카기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저녁 꼭 챙겨 드시고요, 너무 늦게까지 하지 마시고 내일 같이 해요."

"내일 겐쨩 쉬는 날인데 출근하게? 데이트 한다고 정신 없구만? 마음은 고마워~어서 꺼지도록 해~"

훠이훠이 쫓아내듯 손짓하는 카기를 뒤로 하고 건물 밖으로 나온 겐이치는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선배의 말대로 날씨가 참 좋아서 괜히 기분이 좋아진 그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근처 단골 카페에서 그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겐이치가 사랑하는 연인, 아엘라스와의 동거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1년이 넘어간다. 집에 돌아가면 늘 함께 있을 수 있는 두 사람이지만, 이따끔 외출해서 함께 보내는 시간도 중요한 법이다. 주말에 함께 외출하는 것도 좋지만, 평일의 게릴라 데이트도 필요한 법. 공무원인 겐이치에 비해 운신이 자유로운 아엘라스가 겐이치의 퇴근 시간에 맞춰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는 일은 처음이 아니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평일 데이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성사 된 적이 없었다.

'긴급 출동이야, 다들 빨리 준비해!'

'꼭 이럴 때 일이 생긴다니까.'

겐이치가 짐을 챙겨서 퇴근할라치면 번번히 터지는 사건들. 눈물을 머금고 퇴근이 늦어질 것 같으니 기다리지말고 집에 가라는 문자를 보내며 무산된 데이트들을 돌이켜보면, 겐이치는 지금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상이 하하, 애인이랑 같이 살면 됐지 뭘 데이트까지 하려고 들어?하고 겐이치를 방해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겐이치는 기어코 해냈다. 사건이 생길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주어진 일도 다 처리하고 퇴근했으며 내일은 휴일이었다. 아엘라스와 뭘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낼까 생각하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몇 번이나 무산된 데이트에 더불어 늦은 시간에 퇴근해 집에 돌아가면, 아엘라스는 졸음을 참으며 겐이치를 기다리곤 했다.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는 말에 그를 꼭 끌어안아주며 갑자기 일이 생겨서 피곤했겠다며 토닥여주는 아엘라스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겐이치는 행복함 또한 느끼곤 했다.

나는 당신이 있어서 이렇게 행복한데, 당신도 내가 있어서 행복할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겐이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일단 아엘라스가 궁금해하던 영화를 봐야겠다. 예매해둔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으니까 카페에서 음료를 한 잔 마시고 대화를 나눠도 되겠다. 그 다음에는 선배가 알려준 인도 음식점에 가자. 향신료가 좀 강하다는 평은 있지만, 둘이 함께 새로운 경험을 하는 거니까 즐거울 것이다. 뭐, 아엘라스씨가 못 먹겠다고 하면 내가 다 먹으면 된다.

걸음은 어느덧 카페에 다 달았다. 처음으로 제 시간에 오게 된 지라 감회가 새로웠다. 커다란 통창 너머로 티스푼으로 커피잔 안을 휘휘 젓는 아엘라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좀 더 보고 싶어서 들어가지 않고 기다리자, 문득 고개를 든 아엘라스가 겐이치의 모습을 발견했는지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보였다. 겐이치는 마주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 순간, 누군가 겐이치의 오른손을 붙들었다. 겐이치는 흠칫하며 제 손을 붙은 이를 황급히 돌아보았다. 스스로도 의문이 들었다. 왜 내가 반응이 이렇게 늦었지? 퇴근했다고 긴장이 풀어졌나?

붉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남자였다. 역광 때문에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겐이치 정도의 체격을 가진, 성인 남자.

순간 역광이 가시면서 겐이치의 눈에 들어온 남자의 얼굴을 본 겐이치는 두 눈을 크게 뜰 수 밖에 없었다. 묘하게 익숙한 얼굴, 누군가와 겹쳐보이는 익숙한 웃음. 멀리 갈 것도 없이, 그것은 가게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겐이치를 의아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는 그의 연인과 닮아있었다.

단 하나 아엘라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푸른 색이 아닌 잿빛 눈동자. 그것은 겐이치의 것과 같은 색이다. 남자가 입을 연 것은 겐이치가 그것을 눈치챘을 때였다.

"안녕, 겐아빠."

겐이치가 반응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나온 아엘라스가 소리쳤다.

"아빠라니 그거 무슨 소리야 겐군?! 애 아빠였어?!! 어떻게 나를 1년이나!"

"아, 아엘아빠도 안녕."

아무래도 오늘의 데이트도 성사되지 못 하리라.

***

자기들을 아빠라고 부른 의문의 남자-라기엔 겐이치와 아엘라스를 반반 섞어놓은 듯 생긴-를 집으로 데려온 겐이치와 아엘라스는 일순 후회했다. 물론 두 사람이 사람 하나 제압할 능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당황해서 다짜고짜 집으로 데려오는 건 너무 위험한 일 아니었나? 아니 그치만.

"친척이십니까?"

"아니, 난 친척 같은 거 없는데?"

"하지만 저렇게 닮았는데......."

"아니 잘 봐, 머리색은 나랑 같지만 저 묘하게 딱딱한 인상이랑 잿빛 눈동자, 누가 봐도 겐군을 닮았잖아!"

혼란스러워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남자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아빠들...."

"저 좀 당황스러운데 그 아빠라는 호칭이..."

"너 누구야? 누군데 겐군을 아빠라고 불러?"

말을 고르던 겐이치를 뒤로 하고 아엘라스가 매섭게 물었다.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시무룩해진 것 같았다. 겐이치를 닮은 잿빛 눈동자가 힘없이 저를 보자 아엘라스는 어쩐지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안 헬더입니다."

헬더. 아엘라스 헬더. 이안 헬더. 아엘라스의 입이 딱 벌어졌다. 겐이치는 역시 친척이신 걸까, 하고 생각했지만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아엘라스와 같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두 분이 제 아버지들 되십니다."

"......"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에게 남자는 믿을 수 없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빠들 만나러, 미래에서 왔어요."

***

야마다 겐이치와 아엘라스 헬더는 연인 사이다. 내꺼인듯 내꺼아닌 내꺼같은 너~같은 썸 타는 기간이 지난하긴 했지만 고백을 했고, 승낙을 받아 당당하게 연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된 것도 이젠 옛날 일이었다.

야마다 겐이치와 아엘라스 헬더는 사귄다. 벌써 1년 가까이 동거 중이고 연인 사이의 스큅십은 A부터 Z까지 다 진행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연애 전과 달리, 두 사람의 연애는 평온하고 무탈했다. 안 맞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맞춰 갈 줄 알았다. 무엇보다도, 겐이치는 아엘라스를, 아엘라스는 겐이치를 아주 많이 좋아했으니까. 겐이치가 아엘라스에게 감추는 비밀이 있기는 했지만, 서로를 향한 애정만큼은 감추지 않았다. 겐이치는 자신이 아엘라스를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것을 실감할 때마다 행복했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열성적이지는 않았으나, 은은하게 안온한 사랑이었다.

마냥 좋았다. 아엘라스와 함께 일어나는 아침이, 나란히 앉아 책을 읽거나 서로에게 기대어 졸게 되는 시간이, 창 밖의 밤하늘을 구경하는 게,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 까지도.

겐이치는 언제까지고 제 비밀을 감출 수는 없을 것이었다. 이따금 죽음의 위기에 그를 처하게 하는 일이었지만 시민과 세상을 구하는 일에서 손을 놓을 수도 없다. 아엘라스와 함께 살아가기로 한 이상, 말하게 되겠지. 그렇게 고백하고 아엘라스가 받아들여준다면, 그때는 청혼을 해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두지 않겠노라, 함께 살아가자고 애원하자.

그렇게 생각만하고 있었더랬다.

"나랑....아엘라스씨가 당신 아버지라고요..."

"네!"

"입양한 것도 아니고?"

"입양한 것처럼 보여요? 어딜봐도 두 분을 섞어놓은 얼굴인데?"

겐이치는 혼란에 빠졌다. 그것은 아엘라스도 마찬가지지만 요점이 달랐다.

"진정해, 겐군. 우리 둘 다 남자인데 어떻게 친아들이 있을 수 있겠어?"

겐이치는 그제야 좀 진정했다. 겐이치와 아엘라스는 둘 다 남자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했다고 하지만 남자끼리 어떻게 아이를 낳는단 말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음, 아직 서로 모르는 거 같으니까 아엘아빠, 이쪽으로."

이안이 겐이치의 귀에 닿지 않게 아엘라스의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이안의 속삭임이 길어질 수록 아엘라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안이 맞죠?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엘라스가 조금 굳은 얼굴로 말했다.

"겐군....이 사람...우리 아이 맞는 것 같아."

"아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했길래 아엘라스씨까지 헛소리를....."

전 아엘라스씨를 사랑하지만 지금 헛소리하십니다. 같은 표정을 하는 겐이치에게 이안이 이번에는 겐이치 차례라는 듯이 다가와 귓속말 했다.

"야마다 겐이치. 오버드. 일리걸. 신드롬은 블랙독이고, 코드네임은 이지스 불릿. 아엘 아빠한테 청혼하려고 사둔 반지를 일년 넘게 겨울 코트 주머니에 보관중."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겐이치의 얼굴을 보며, 이안이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더 필요해요?"

겐이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엘라스를 바라보았다. 겐이치도 비밀이 있듯이, 아엘라스도 비밀이 있을 것이다. 겐이치만큼 심각한 비밀은 아닐테지만. 이안이 겐이치에게 말한 것처럼, 아엘라스에게도 아엘라스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언급했을 것이다.

"내가 두 분 정보 빼내거나 한 건 아니에요. 두 분이 저한테 말해준 거지."

거실 소파에 털썩 소리를 내며 앉은 이안이 구석에 있는 산세베리아 화분을 보고 반갑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때부터 있었다더니 진짜네~

"저한테 옛날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시거든요."

"......"

"뭐, 너무 이르게 왔다는 생각은 해요. 아직 서로 모르는 게 많을 때일 줄은 몰랐지."

"설명이 좀 필요합니다만...."

"겐아빠는 알텐데요?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겐이치가 뭔가 말하려는 듯 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오버드라는 게 존재하고 레니게이드 관련 사건사고가 즐비한 세상에서, 이런 일이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뭐, 제가 생긴 과정에 대해선 두 분이 설명해주셨는데, 지금 말하기는 좀 그렇고."

"그러니까, 미래에서 왔다고?"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겐이치는 어떤 얼굴을 해야할지 몰라 오른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미래에서 온, 아엘라스씨와 내 아이.

아엘라스와 겐이치를 반씩 닮은 점도, 겐이치만 알고 있을 비밀을 아는 것도 저 말대로라면 가능하다. 남자끼리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는 문제는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오버드가 있는 세상이다. 미래에는 있을 수 있는 일일지도 몰랐다. 겐이치로서는, 믿을 수 없으면서도 믿고 싶었다. 얼마나 달콤한 이야기인가.

"아엘라스씨, 정말 친척 아니십니까?"

"아니야. 나도 혼란스러운데....우리 아이 맞는 것 같아."

".......그렇,군요."

겐이치가 가라앉은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라고 했지요. 당신은 우리를 만나러 미래에서 왔다고, 하면 자의라는 겁니까? 어떤 사고에 휘말린 게 아니고?"

"네. 정확히 말하면 건강하게 살아있는 겐아빠 모습을 좀 보고 싶어서."

"그게 무슨 말이야?!"

건강하게 살아있는 겐이치의 모습. 이안의 말이 진짜라면, 이안이 온 미래의 겐이치는 아마도-

"아엘아빠는, 내가 몇 살일 것 같아요?"

겐이치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아엘라스는 이해했다는 듯이 입을 다문다. 잔잔하게 웃는 잿빛 눈동자가 노래하듯 말을 잇는다.

"나는 그냥, 정말 지금의 두 분이 만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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