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게이트3

[발더게3] 48개의 지옥

"만일 캐릭터들이 접속하지 않는 플레이어를 기다린다면?" __ 게일, 섀도하트, 할신, 윌과 아스타리온

https://youtu.be/N6BQ1CeR-tY?si=Cqy401EwCraTeBNd

야영지는 여느 때보다 소란스러웠다. 텐트는 꼭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역장 폭탄처럼 부글거렸다.

수많은 피해자와 희생자를 낳은 케더릭 토름과의 전투가 끝난 날이었다. 이 전례 없는 행군에 모두가 몸과 마음이 지친 때였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만약 그들이 겪고 있는 일이 소설로 출판된다면, "고블린이 적은 수준"이라는 평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일리시드에게 납치당해 그들의 숙주가 됐어. 하지만 내부 스파이의 도움을 받아 오히려 그들을 역으로 치기 위해 모험을 떠났지.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모든 게 삼악신의 선택받은 자들이 꾸민 음모라서, 이젠 그들을 해치우러 가고 있어." 우스갯소리로 들어도 고약한 말이라 인상을 찌푸릴 법한 말이다. 다 클 대로 큰 어른들이라면 말 다 했지. 그들 모두는 달오름탑에만 오른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얻을 줄 알았다. 일리시드 종족의 거나한 목표는 차치하고서라도, 당장 제 뇌에 박힌 올챙이 정도는 처리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일인가? 삼악신의 선택받은 자, 사라진 줄 알았던 고대의 유물, 심보가 고약한 여신의 신전에다가... 뭐? 절대자의 군대가 어디로 행진을 해? 일 보 전진해도 이 보 후퇴할 것이 분명한 이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저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이 사실이 그들 모두를 끔찍한 우울감 속으로 밀어넣었다.

어쨌든, 복잡한 생각은 도움이 되지 않으니 대충 접어버려야 했다. 어디서 주워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술병을 비우고, 지긋지긋한 침낭에 몸을 쑤셔 넣은 후 애써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날 밤. 천재 위저드조차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보아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등골이 바짝 설 정도로 세게 뺨을 후려쳐봐도 눈을 뜨지 않았다. 심지어는 모닥불을 쑤시던 부지깽이를 가까이 가져다 대도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꼭 동화 속의 공주님 같네!” 진심을 숨기기 위해 던져진 농담은 때가 좋지 않았다. 누구의 말을 빌리자면 “어딘가 망가진 것들이 모인” 캠프는 구심점이 되어준 단 한 사람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최악의 방식으로 망가져 갔다.

게일은 벌써 20시간 가까이 책 따위를 들여다보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손가락 사이로 위브를 정신없이 이동시키는가 하면, 시도 때도 없이 미스트라의 이름을 불러대며 “제발”, 혹은 “이번만” 따위의 애원을 했다. 하지만 오만한 위브의 여신이 무엇을 위해 그를 도와주겠는가? 잠에 빠져버린 저 인간은 게일 데카리오스라는 귀중한 신봉자를 맹목의 그늘에서 앗아간 자다. 자애를 베풀어 그 심장을 터트려 제게로 떨어지면 용서를 내리겠다는 전언을 보내두었더니, 인간의 사랑놀이에 빠져 뒤로 한 발 물러서지 않았나. 미스트라는 오히려 저 인간이 아예 죽어 게일 데카리오스가 다시 한번 절벽 끝에 내몰리길 바랄 것이다. 그래야지만 그녀의 계획이 궤도 위에 안착할 테니까.

지옥은 네 칸 더 깊어지고, 꼬박 하루가 흘렀음에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불쌍한 섀도하트. 그녀는 내내 꿇어앉은 채로 정신을 잃은 이의 곁을 지켰다. 색이 변한 머리가 꼭 백발노인의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길을 잃은 상태였다. 제 손으로 여신의 창을 던져버린 게 고작 열흘 전의 일이었다. 그녀의 인생은 이 깨어날 생각이 없는 멍청이로 인해 송두리째 변했다. “나는 네가 원하는 걸 하길 바라.”라는 천진난만한 말 한마디로 제게 감히 신을 배신하게 했으면서! 하루아침에 죽어버리는 (수상쩍지만 목소리만큼은 끝내주게 섹시한 위더스의 말을 빌리자면, "죽지는 않았소") 게 말이나 되냐는 말이다. 어떠한 시련에도 꺾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푸르른 눈동자는 순식간에 시들고 말았다. 그 누구도 이 지경까지 그녀를 몰아세운 적 없었다. 이제 그녀는 누구에게 기적을 청해야 할까?

아침이 지나 정오가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테니얼과 대화해보겠다며 사라졌던 할신이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그림자 저주의 영향은 아닌 것 같소. 하지만...." 표정만 보아도 이어질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굳이 말을 맺지 않고선 섀도하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치유 마법을 쏟아부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피부 위로 아로새겨진 잔 상처들만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출 뿐이었다. 덕분에 그는 여행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멀끔해 보였다. 우리 모두 올챙이 따위에 감염되지 않았다면 이런 얼굴로 서로를 마주했겠지. 어쩌면 아주 만날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할신은 인상을 찌푸리며 거듭 마른세수를 했다. 거칠고 큰 손바닥 아래로 이목구비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숲조차 답을 모르는 문제를 한낱 자신이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혹시 그도 속이 병든 나무처럼 이러다 풀썩 쓰러져 썩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볼썽사납게 굽어진 등 위로 고약한 생각이 쌓였다.

점심때가 훌쩍 지난 늦은 오후, 웜 건널목을 정찰하러 갔던 윌이 복귀했다. 그는 절대자의 군대로 인해 발생한 난민들과 불주먹 용병대가 정신없이 얽혀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도시의 추악한 면을 마주했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당장 입에 넣을 것을 구걸하고 있었다. 처참한 광경이 윌 레이븐가드의 정의감을 파고들었다. 그는 몸을 낮춘 채 그림자 속에 숨어 온갖 소리를 들었다. 아이가 배고프다며 훌쩍이는 소리, 다리가 아프다며 칭얼거리거나 제 부모를 찾아 흙바닥 위를 헤매는 소리, 개가 낑낑거리고 어른이 탄식하는 소리, 사람을 밀어내고 밀쳐내어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소리... 윌 레이븐가드는 꼬리에 불이 붙은 황소처럼 야영지로 돌아왔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제 텐트에 틀어박혔다. 도시의 영웅인 제 아버지는 삼악신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은 아비규환 속에서 신념을 잃고 악에 매도당했다.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해. 내가 도와줄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신만만하던 목소리가 필요했다. 그는 너무나도 지쳤다.

마지막까지 텐트를 지키고 있던 건 아스타리온 뿐이었다. 그는 쿠션에 등을 기대고 책장을 넘기며 여유롭게 잔을 기울였다. 죽은 건 아니고, 깊이 잠든 거나 다름없는 상태라니 곧 일어나지 않겠어? 손을 잡고 곁을 지켜준다니 다정하기도 해라. 내 몫까지 안부 전해줘. 문장 끝에는 윙크를 붙이기까지 했다. 짜증날 정도로 완벽한 에티튜드였다. 하지만 모두가 정신이 팔린 상황이 아니었다면, 분명 누군가는 그가 꼬박 40시간이 넘도록 얇은 책 한 권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을 것이다. 아스타리온은 미친듯이 불안했다. 저 멍청이가 영영 눈을 뜨지 않으면 (제법 완벽해보였던) 제 계획이 무너지는 것도 모자라, 카사도어에게 꼬리를 밟힐 수도 있었다. 여차하면 이곳을 버리고 도망가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어디까지, 또 언제까지? 게다가 언젠간 이 야영지도 카사도어에게 발각되고 말 텐데, 제 흔적이 짙게 남은 저 인간은 사지의 피가 다 빨리는 것도 모자라 시체마저도 처참히 유린당하고 버려질 것이 분명했다. 그냥 버리고 가면 되잖아. 뱀파이어 스폰이 달콤하게 속삭였지만, 아스타리온은 종이 한 장 넘기지 못한 채 깊게 잠든 인간의 숨소리만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게일의 헛소리가 길어지고, 섀도하트의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고, 할신의 한숨, 윌의 고단함과 아스타리온의 신경질이 최악에 치달을 때쯤... 거짓말처럼 그가 눈을 떴다. *오, 이런. 라리안이 놓친 버그가 발생한 모양이네요. 다중우주를 분리한 벽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쪽으로만 열려야 하는 통로가 양방향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이젠 모두가 제 목소리를 듣고 있네요. 자신이... 게임 속 캐릭터라는 걸 인지하기 시작했어요. 더 큰 문제가 발생해 세이브 파일이 사라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겠네요. 그래요, 그편이 좋겠네요. F8을 눌러요,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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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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