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게이트3

[아스타브] Rotten love

“…아직도 날 사랑해?”

Kate Bk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296142/

https://youtu.be/XisPyCdVmoo?si=rv8omfMTdbQWv2ZK

문득 시릴 정도로 강렬한 빛이 눈을 파고들었다. 오랜만에 숨을 쉬는 듯했다. 가슴이 무겁고 갈비뼈가 답답했다. 호흡을 담은 폐가 크게 부풀수록 기침이 날 것만 같았다. 눈살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리니,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미안, 잠깐 편지를 확인한다는 게…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볼품없는 변명을 둘러댔다. 이윽고 방이 밤처럼 어두워졌다. 그제야 창가에 선 그가 보였다. 그는 두터운 커튼을 양손 가득 움켜쥐고, 등을 돌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아스타리온?”

채 여며지지 않은 커튼의 틈새로 빛이 쏟아졌다. 그는 찬란한 빛줄기 속에서 나를 외면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낯선 풍경이었다. 역광이 심한 탓에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의 기분이 개 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죽는 얼굴로 사정을 해야 이쪽을 봐주겠어. 격통이 치미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려 팔을 굽혔다. 손바닥 아래로 눌리는 침대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푹신했다. 제대로 환자 대접을 받고 있네.

“…잠깐, 뭐 하는 거야? 억지로 일어나지 마. 아직도 피가 안 멈췄다고.”

“뱀파이어 스폰의 몸은 조금 더 튼튼할 줄 알았는데.”

“장난해? 아무리 신이라 해도 단검 3개가 가슴에 쑤셔 박히면 죽어.”

“게일에게 물어봐야겠는걸….” 눈치 없는 농담.

“하, 아주….”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이번엔 타이밍이 좋았다.

“…사과는 적어도 피가 멈춘 후에나 해.”

그는 한숨을 쉬며 제 이마 위로 입술을 눌렀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매끄럽던 피부는 다 어디로 가고, 사흘 밤낮 수절이라도 한 듯한 얼굴이었다.

“얼굴이 안 좋네.” 키스를 돌려주려 했으나 아스타리온은 고개를 돌렸다.

“뿐이겠어?”

“왜, 그래도 안 죽었잖아.”

“아까부터 자꾸 예쁜 말만 지껄이는데, 제대로 싸워보고 싶은 거면 말을 해. 달링.”

“…그런 거 아니야. 다 괜찮잖아. 나도 일어났고, 당신도 멀쩡하고….”

“그으럼, 다 괜찮지. 나를 노리고 기어들어 온 웬 쥐새끼가 널 칼로 쑤시긴 했지만 말이야!”

“방심했어.”

“다음에도 방심했다는 말로 끝날 줄 알아? 넌 예전부터 도저히 세상물정이라곤 몰랐지. 이 상황을, 아니, 네가 어떤 새끼를 선택했는진 알고 있는 거야? 네가 돕고,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그 의식에 몇 명의 목숨이 갈아 넣어졌는진 알고 있던 거지? 아, 그것도 다 괜찮은 범위 안에 드는 건가?”

차라리 사랑한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게 더 솔직할 텐데.

“아스타리온.”

“…할 말 있으면 해.” 그는 죽어도 먼저 사과하지 않았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가 손등을 축축하게 적셨다. 그대로 그의 뺨을 감싸 문지르니, 흰 피부 위로 비리고 붉은 자국이 남았다. 그의 눈썹이 어린애처럼 아래로 축 처졌다. 당신은 언제나 빙 둘러 말하고, 난 언제나 불필요할 정도로 직설적이지. 이런 우리가 서로에게 꼭 맞아떨어진단 건 운명의 장난일 거야.

“난, 나는….”

“난 여전히 너를 사랑해.”

“…….”

“끔찍한 사실 하나 알려줄까?”

“…그래.”

“내가 내리는 모든 선택의 이유가 당신은 아니야. 난 당신을 지독하게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신념이나 가치관을 바꿀 정도로 미치진 않았어.”

“…참 달콤한 말이네, 달링.”

“그냥 내가 그 정도로 최악의 인간이라서 그래. 난 당신에게만 다정해. 애초부터 그 스폰들의 목숨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어. 언젠가 당신이 말했지, 나 같은 사람은 또 없을 거라고. …맞아. 당신에게 두 번 다시 나 같은 사랑스러운 괴물은 없을걸.”

그는 아무 말 없이 몸을 기울여 이불 위로 얼굴을 묻었다. 얼마 안 있어 뭉개진 단어가 띄엄띄엄 이어졌다.

“…아직도 날 사랑해?”

“그래. 난 아직도 당신을 사랑해.”

“내일은?”

“내일의 당신을 사랑하겠지.”

“지금은?”

“비겁한 당신을 사랑해.”

“…….” 그는 말없이 긴 숨을 내쉬었다.

“아스타리온, 당신은 어때?”

“…달링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중이야.”

“발더스 게이트를 구한 영웅이 얼마나 제정신이겠어.”

“응, 좋아 죽겠네.”

“사랑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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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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