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시에이/서식지
바나나피쉬 애시x에이지
주의사항 : 마지막권 및 외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에이지는 스스로가 그 도시를 사랑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되물었다. 아름답지만 삭막한 도시. 생명력이 넘치지만 동시에 잔인한 도시. 정글에도 법칙은 있기 마련이건만 충동으로 들끓는 도시에는 이론도 이성도 논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도시를 삭막하다고 하던가. 잔혹함과 충동과 욕망과 분노가 들끓는 정글 속 삐죽삐죽 솟아난 회색 나뭇가지의 잔영을 할퀴는 석양이 붉게 가라앉은 도시를 에이지는 언제고 하염없이 보곤 했다. 은색의 도요타는 시원하게 도로를 달렸다.
도시에 질리면 모두 자연을 찾게 된다니까.
에이지는 그 말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곤 했다. 에이지는 한동안 사람을 찍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 거리를 스쳐지나가는 무질서한 군중과 길거리의 노숙자, 이름모를 회사원, 택시안에서 지루한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먹는 운전수와 피곤에 절어 모자를 눌러쓴 경관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을 찍었기 때문일까. 안개가 자욱한 도시, 낡은 지하철 역사의 낙서들. 흐르는 누군가의 인생들이 새겨진 풍광을 조심스레 더듬고 지났을 뿐이다.
자연은 좋아. 인간하고는 또 다르거든. 하하, 나는 사람만 찍지만.
그렇네. 동료 사진작가 중엔 인간이 싫다고 자연만 찍는 녀석도 있어. 옐로스톤 공원에서 3일동안 노숙을 하면서 곰이 연어를 사냥하는 장면을 찍으려고 나무 위에서 먹고 자고 했다지? 깜빡 자고 일어나서 나무 아래로 내려왔는데, 손 두뼘만한 곰 발자국이 나무 아래에 잔뜩 찍혀있었다고 해. 정말 오싹한 일이지. 그렇게 산으로 흘러들어갔다가 부상을 입고 돌아온 적도 있어. 다리가 완전 부러져서 일년 내내 꼼짝없이 병원에 누워있어야했지. 그래도 그녀석 다 낫기도 전에 다시 산에 들어가버렸단말이야. 의사 선생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내게까지 전화를 하더군. 그쯤되면 중독이라 부를만 해. 야생동물들과 지낸다는 것이 쉬운건 아니지. 그래도, 그 드높은 산과 탁 트인 평원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신이여. 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온다고.
취한 이베씨가 두서없이 하던 말이 에이지는 귓바퀴에 남았다. 뉴 멕시코에서는 그렇게 뜨거운 태양이 하루종일 황야를 달궜는데, 애리조나에 들어오자 벌써부터 길가에 눈이 쌓이는 것이 보였다. 아메리카는 역시 넓다고 에이지는 생각했다. 일본도 오키나와에서 태양이 내리쬘때 훗카이도는 한창 추워지고 있긴 했지만 이정도로 주마다 극단적인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눈내리는 길을 달려 산을 한참 타고 올라가서야 에이지는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었다. 완전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짐을 꺼내는데, 아무래도 너무 욕심을 부렸던 모양이다. 트렁크를 한껏 젖히고 있던 것이 어딘가를 잘못 눌렀는지 갑작스럽게 셔터가 내려간다. 이건 손이 찧겠는걸! 하고 에이지가 눈을 질끈 감는데 예측했던 고통이 손등을 내려치지는 않았다. 에이지가 조심조심 눈을 뜨자, 어느새 다가온 금발이 살랑거리며 그의 눈앞을 스치고 있었다.
“조심해.”
해가 저무는 순간엔 세상이 고요해진다. 반짝이는 금가락에 붉은빛이 어른어른거린다. 에이지는 이베가 얘기해준 동료 카메라맨처럼 속으로 ‘신이여.’하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냈다. 아메리카에 이 땅에 사는 민족만큼이나 많은 신이 산다면 그 중 한명쯤은 에이지의 경탄을 들었을 법 하다.
“정말 많이도 넣었네.”
애시는 트렁크에 가득 든 짐을 끌어냈다.
“그거 좀 무겁...”
“어?”
“아냐. 아무것도.”
에이지는 애시의 근력이 자신과 같으리라고 착각한 자신이 얼간이였음을 깨달았다. 카메라 장비에 무거운것만 잔뜩 든 보스턴백이 애쉬의 손에 쉽사리 번쩍 들렸다. 애시는 그것만으로도 손 힘이 남아도는지 짐가방 하나를 더 들어올렸다. 에이지의 손에는 결국 옷가지에 세면도구가 든 보스턴백이 하나 남았을 뿐이다. 에이지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애시의 등을 잠깐 멍하니 봤다. 한 중턱의 석양에 애시의 그림자가 길게 진다. 애시가 잠깐 걸음을 멈칫 하고는 호텔의 정문에서 뒤돌았다. 조금 쑥쓰러운 듯한 그의 녹색 눈동자가 안오고 뭐해? 혹은 이 호텔이 아니었나? 하는 듯해 에이지는 허둥지둥 기다리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가방 속에 카메라를 넣어둔걸 방금 후회했다. 엘토바의 멋진 건축물을 배경으로 하고, 애시를 찍었어야 했는데.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한참이나 늦었지. 호텔 로비에서 키를 받아 방으로 올라가는 동안 애시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목재로 지어진 아늑한 객실엔 소나무 향으로 가득했다. 에이지는 베이지색 침대커버를 쓸어보며 애시의 동향을 살폈다. 애시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장시간의 운전에 지쳐 결국 샤워를 하고 나오자 애시는 천연덕스럽게 안경을 끼고 침대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매번 애시가 책을 읽을때마다 에이지는 애시는 별스러운 것에 다 관심을 가진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정치, 경제부터 해서 군사에 본초학과 생물학까지... 읽어봤자 무슨 내용인지도 파악하기 어려운 에이지에게 애시는 여전히 형님은 코믹북으로 공부를 계속 해야지. 하고 놀리곤 했다. 그 대신이라면서 애시는 일본어를 공부한다며 일본의 만화를 몇권 사서 읽었다. 이번에 가져온 책은 일본 만화책은 아닌 모양이다. <The Machine that Changed the World>... 또 여전히 모를 책을 읽고 있군. 머리에 수건을 감싸고 에이지는 얌전히 애시 곁에 걸터앉았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다.
“화났어?”
예상과 달리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애시였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하나, 하고 난감해하는 에이지의 일본인적인 망설임을 애시는 단칼에 잘라냈다. 선타를 당한 입장에서 에이지는 허둥지둥 “아니야! 아니야 그런게...”하고 되려 부정하게 되었다.
“너야말로, 내가 풍경사진 찍으러 왔다면서 내내 너만 찍어서 신경쓰였던거 아냐?”
“글쎄...”
너야말로로 시작하는 역공에 애시는 이제 슬그머니 웃음을 머금고는 딴소리를 했다.
“차가 새거였지. 올해 새로 도요타가 북미에 내놓은 아리스토GS300인가. 그런 작은 차로 용케도 북미의 절반을 횡단했네.”
피식 웃으며 안경을 벗고 덮은 책 위에 올리는 모습에 에이지는 그만 전의를 잃었다.
“그래 맞아. 차에도 관심이 있는지 몰랐는걸.”
“거리에선 차 종류도 잘 알아둬야지. 도난품들이 언제 어떻게 흘러들어올지 모르고, 이런걸로 사기치는 녀석들도 있거든. 그리고 관심 없을 수 없지. 도요타 입장에서는 새로운 도전일테니까.”
“일본 중공업의 빠른 성장은, 중공업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미국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미국은 플라자합의를 통해 달러 강세에 대해 메스를 가했다. 독일의 마르크화보다, 엔화는 더 타격이 크리라 예상된다. 노보루 대장성대신은 일본에 미국이 항복했다고 선언했지만 이것은 오히려 일본의 완벽한 외교적 패배로 엔화 절상 이후 일본의 중공업의 버블은 붕괴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럼에도 5년, 길게는 8년간 호황을 유지할만한 동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제와서 뭐야. 그걸 다 읽었어?”
애시는 낯뜨거운듯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일본 내수는 점차 하락하고 있으며 미국 내에서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단순한 ‘적대의식’이 아닌 일자리라는 현실적 문제와 맞물린다. 이를 타개하기위해서는 공장 이전 전략이 가장 유효할 것이다. 미국 내수시장에 대한 일본의 공격적 투자를 통해...”
“그만, 알았어.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자.”
“하하, 부끄러워할 것 없잖아. 다 들어맞았는걸.”
“경제 석학들이라면 예전에 다 예측했어.”
“MIT의 제임스 교수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그렇게 말하고 애쉬는 <The Machine that Changed the World>의 표지를 톡톡 두드렸다. 굉장한 베스트 셀러가 된 책이지만 1년 후 일본 자동차공업의 버블이 터진다는 미래는 예측하지 못했다. 미래예측이라는 것은 쉬운게 아니다. 하지만 애시는 이정도는 아는 녀석들은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뒷세계 녀석들은 일본증권엔 조만간 발을 빼는게 좋다고 했지. 위대한 소통가께서, 세계 재무장관들을 불러모아 한방 먹일 계획이라고 했거든.”
“그런 말이 있었구나.”
애시가 이야기하는 거리의 세계는 여전히 에이지에게는 별세계와 같았다. 그 역시 애시와 함께 스트릿 사람들을 만나고 심지어 총성이 오가는 한복판에서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봐 왔음에도, 애시가 들려줄때면 그곳이 역시 그의 세계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에 찌든 일본에 너무 오래 살아온 탓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역으로 애시는 어땠을까 하고 에이지는 생각했다. 어쩌면, 애시가 일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미국에 머무는 쪽이 더 애시에게 좋은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신 그녀석은 낡아빠진 미니로버를 몰고 다니면서, 도요타 신형 차라니. 좀 과보호라고 생각하는데.”
“으음~ 부정하진 않을게. 하지만 덕분에 이렇게 멀리까지 왔잖아.”
그런걸 신경쓰고 있었구나. 묘하게 신을 신경쓰는 애시의 말에 결국 에이지는 웃고야 말았다. 그 웃음에 안심한듯 애시는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창문을 열자 새까맣게 물든 밤과 유성우가 쏟아질듯한 밤하늘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밤의 차가운 공기에 에이지의 입에서 김이 다 나올 정도였다. 에이지는 순수하게 대단해, 하고 감탄했다. 뉴욕의 밤하늘은 이렇게 별이 많지 않았다. 꺼지지 않는 불야성, 낮과 밤의 제국은 지상의 불빛으로 가득해 욕망으로 동이 틀때까지 불타올랐고, 해가 떠오르고 지는것과 무관하게 자신만의 열기로 지상을 태웠다. 깊은 숲속에서 내쉬는 숨은, 도시에 내린 밤과 달랐다. 까맣게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번쩍이는 번갯불이 튀었다 사라졌다. 에이지는 충동적으로 저 깊은 숲 안쪽으로 뛰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대를 짚고 도약을 하는 것은 하나의 충동이다. 달려나가는 순간 자신의 본능에 몸을 내맡기고 있는 힘껏 뛰어오른다. 몸이 붕 뜬 순간 쏟아지는 태양빛과 하늘, 그리고 구름. 결심과 충동이 일치할때 비로소 그 진공상태의 순간이 존재하는 법이다. 어둠속에서 반짝이는 녹색 빛에 에이지는 자신의 눈앞에 뛰어올라야 할 벽이 있어 달려야 한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그걸 막은 것은 곁에서 느껴지는 차분한 호흡이었다.
“쉿.”
다시한번 녹색의 불꽃이 튄다. 천천히 점멸하는 빛을 에이지는 응시했다. 예전에도 이렇게 손을 마주잡은 적이 있었다.
“겁에 질리면 안돼.”
애쉬는 그때 에이지에게 총 쏘는 법을 가르쳐줬다. 방아쇠를 쥐는 순간부터 공이치기가 뇌관을 울리는 순간에 오는 진동을 감쇄하는 법까지. 에이지는 아직도 능숙하게 깡통을 맞추지는 못한다. 누구도 애시처럼은 될 수 없지. 애시는 예리한 감각으로 먼 거리에서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추곤 했다.
“야생 동물이 여기까지 내려오는건 드문 일인데.”
“이건...”
“무슨 동물인지까진 나도 모르겠는걸.”
“배가 고팠을까?”
“그랬다면 불행한 일이지. 사람 사는데 내려온 동물들은 사살되거든.”
‘사살’이라고 말하는 애쉬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여전히 그 표정에서 에이지는 비감悲感을 읽어냈다. 누구보다 정확한 솜씨로 적을 죽일 줄 알지만 동시에 애시는 누구보다 살인에 민감하고 예민하다. 다른 누가 들어도 ‘그 애시가?’하고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반응하겠지만 에이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애시는 감정없는 기계가 아니다. 살인마도 아니고, 이 세계를 좌지우지하고 싶어하는 야심찬 악마도 아니며, 자신의 정원을 거닐며 생사를 주관하고 심판을 내리는 신조차 아니다. 그는 차라리 신의 정원을 자유롭게 거니는 피조물에 가까웠다.
“동부에선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남부나 서부쯤 되면 총은 기본이지. 마운틴라이온이 뛰어내려서 마당을 덮치는 일도 자주 있어. 총은 잘 가지고 있지?”
“그야...”
“여전히 전처럼 깡통도 못맞추고?”
“애시! 언제적 이야기야?!”
“하하하!”
애시는 여전히 소년처럼 웃었다. 깜빡이던 녹색의 불빛은 소리없이 사라져 있었다.
“긴장했어?”
“전혀!”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에이지는 짐짓 토라진듯 말했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애시는 부드럽게 고개를 내려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따듯한 귀가 에이지의 뺨에 닿았다. 살랑거리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에이지 역시 그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무게감과 무게감이 서로 맞닿는다. 애시 역시 그에게 기대고 있엇다.
“그래, 넌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
이런 말을 할 때의 애시는 더없이 달콤한 목소리를 한다. 에이지는 곁눈질 하지 않고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도 그의 얼굴 표정을 그려낼 수 있었다. 걱정스러운 듯 하면서도 어쩔 수 없네 하고 말하는 것 같은 부드러운 눈빛을 에이지는 손에 잡힐 것처럼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에이지는 종종 그렇게 애시와 함께 밤을 새곤 했다. 서서히 해가 떠오르는 새벽. 그 어둠도 아니고 빛도 아닌 눈부신 시간에 에이지는 애시에 대해서 생각하곤 했다. 애시, 어쩌면 네가 일본에 오지 않고 내가 여기에 머무는게 올바른 해답일지도 모르겠다. 에이지는 애시가 평화로운 일본에서 재출발을 하기를 바랐다. 야생동물에게는 저마다의 서식지가 있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지만 애시는 야생동물이 아니라 사람이니. 새로운 환경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신분으로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결국 그에게 어울리는 곳은 바로 이 드넓은 아메리카였을까. 눈이 부셔 무릎에 얼굴을 파묻자, 밤새 그의 등 뒤를 받쳐주던 애시가 장난스럽게 그의 등을 두드렸다.
“이제 일어나, 에이지. 잠꾸러기 다 됐군.”
“밤 샜어.”
“아니. 졸았어. 중간부턴 완전 눈 감고 있었다고. 내가 샤워하는 것도 몰랐지?”
“그랬어?”
“자자, 조식은 베이컨 에그라고 했어. 오랜만에 일식이 아닌걸 먹겠는걸.”
애시는 제법 활기차보였다. 애시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애시의 고향은 아리조나가 아니라 뉴욕주인데, 애시는 고향에 돌아온 사자처럼 쾌활하기 짝이 없어보였다.
그랜드캐니언은 관광지인지라 언제나 사람으로 붐빈다. 에이지는 조식을 마치자마자 애시와 함께 장비를 챙겨 산을 올랐다. 카메라 장비를 짊어지고 산에 오르는건 고된 일이었지만, 그만큼의 상쾌함도 있었다. 지금까지 북미를 횡단하며 스쳐지나온 수많은 지점들... 실망스러웠던 곳도 있었고, 감탄했던 곳도 있었지.
“에이지, 봐.”
애시의 목소리에 에이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떠오르는 태양 빛이 한 눈에 담지도 못할만큼 거대한 계곡을 비추고 있었다. 협곡의 솟아오른 단층에 붉은 빛이 감돌았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장엄함에 에이지는 숨을 들이켰다. 강렬한 계곡의 바람이 애시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는 웃으며 손을 들어올려 머리카락을 쓸어넘긴다. 에이지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애시를 찍었다. 아무래도 그는 신이 만든 것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을 카메라에 담고 싶은 욕망이 강한 것 같다.
“또 나를 찍는구나.”
에이지는 그 말에 대꾸하는 대신 애시에게 좀 더 위쪽을 봐달라고 주문했다.
“자연스러운 사진이 좋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바람이 흐트러트린 머리카락을 쓸어올려 정리하는 눈빛은 더없이 강렬하고도 고전적이었다. 이 순간의 장엄함을 담아두고 싶어, 홀린듯 셔터를 누를 수 밖에 없다.
에이지는 자신이 애시를 만난 뉴욕이란 도시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를 상처입힌 곳을 미워하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카메라에는 신이 만들어낸 가장 장엄한 피조물이 담겼다. 화면 속에 다시 없을 그 순간을 담으며 에이지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무언진지 다시금 생각했다. 도시, 자연, 거리, 사람.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순간을 화면에 담고 싶을 것이다. 에이지는 각도를 위해 좀 더 절벽에 다가갔다. 계곡 아래에서부터 바람이 밀려올라온다. 강렬한 바람에 머리카락부터 안경까지 흔들려 휘청거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삼각대를 놓고 카메라를 들었다.
나는 그 도시를 사랑하는 것일까?
그가 담은 화면 안엔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를, 또 하늘을, 지상을, 바람을, 저 먼 지평선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는 애시가 있었다. 에이지는 카메라 앵글을 조정했다. 요즘은 견딜 수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도망치듯 자연을 찍겠다며 돌아다닌 것일지도. 그 도시를 바라보면 바라볼 수록, 그 안에 애시의 흔적들이 있다. 도보블럭에, 쓰레기통에, 벽면에 쓰인 낙서에 어딘가 애시가 지나쳤던 흔적들과 그의 숨결과 눈빛이 카메라 안에 잡혔다. 에이지는 순간을 포착해 그의 흔적을 발견했다. 빛이 쏟아지는 이 산에도 결국 애시가 잡힌다면, 그는 끊임없이 사진 속에 애시를 사로잡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셔터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바람은 점점 강렬해졌다.
“에이지!”
애시의 목소리에 에이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두세걸음만 더 걸었으면 발을 미끄러져 저 밑의 계곡으로 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바람에 휩쓸려 떨어지지 않을 거리에서 에이지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먼 계곡을 응시했다. 바위 틈에서, 녹색 눈과 마주친 듯한 기분이 들어 에이지는 버릇처럼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뉴욕으로 돌아가자.”
그건 내가 할 말인데, 하고 애시가 말했던 것 같다.
*
“에이지! 너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아리조나까지 다녀오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산을 한번 찍어보고 싶었어.”
신의 울화통 가득한 목소리에는 언제나 초연한 에이지도 몸을 움츠릴 수 밖에 없었다. 신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화를 내면서도 에이지가 뭔가를 찍었다는데에 관심을 가지곤 했다.
“그래서, 이번엔 뭘 찍었는데.”
“봐.”
“그랜드 캐니언이군.”
“굉장하지? 바람에 날려가는 줄 알았어.”
“농담같지 않으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
신은 에이지의 팔뚝을 흘끔 보며 말했다. 에이지는 최근들어 말랐다. 신은 자신이 커졌기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에이지는 내성적이긴 했지만 활동성만큼은 왕성했다. 행동력도 대단해서 대담무쌍하게 뭔가를 결정하면 혼자서 쓱쓱 진행해버리곤 한다. 여전히 그런 경향은 어디 가지 않았고 그 역시 어느정도 키가 컸지만...
10년 전쯤의 에이지는 좀 더 대지에 땅을 붙이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뿌리는 지상에 있었고 그렇기에 그는 공중에 떠오르는 순간 그 찰나의 진공상태가 주는 부양감에 순수하게 몰입했다. 그러나 지금의 에이지는 사진을 통해 찰나에 영원을 부여하고자 하며, 그런 에이지는 어딘가 지금이 아닌 시대를 부유하고 있는 것 같다.
신은 과거 에이지를 찍은 이베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신은 그 아름다운 찰나의 사진을 보고 무시무시하게도, 지금 에이지가 옛날처럼 장대높이뛰기를 하지 않는 것을 감사히 여겼다. 지금 그렇게 높이 뛰어오른다면, 그는 다시는 지상에 착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진을 정리하는 에이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어 신은 안절부절 못하며 사진에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하나같이 사람은 없이, 오직 풍경만이 찍혀있었다. 자연다큐카메라맨으로 전향하기로 정말 마음을 굳힌것일까?
“에이지, 개인전 사진은 이것들로 쓸거야?”
“음. 그러기엔 완성도가 좀 떨어지지. 이건 감을 정리하려고 찍은거야. 개인전 사진은 <뉴스위크>에 게재했던걸 위주로...”
“뉴스 위크 사진들을 쓴다고? 너 드디어 결심을 했구나?”
에이지는 신의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그의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사진을 정리하던 에이지는 아, 하고 짦은 경탄을 냈다.
“이건 잘 찍었네.”
신 역시 사진을 보고 감탄했다. 크게 인쇄하면 아주 대단한 화면이 잡힐 것 같은 형형색색의 붉은 빛으로 물든 계곡의 여명의 순간은 유채화만큼이나 강렬하고 화려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에이지는 사진의 한 점을 가르켰다.
“여기 찍혔어.”
“이게 뭔데?”
신은 에이지를 대신해 컴퓨터에 연결한 메모리를 크게 확대했다. 고화질의 사진을 크게 확대하자, 계곡의 비탈길에 얼룩덜룩한 점이 보였다.
“야생동물인가본데... 마운틴라이온? 아니. 재규어인가.”
좀 더 크게 확대하자 점박이인 몸이 드러났다. 그녀석은 녹색 눈을 반짝이며 햇빛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어디, 좀 더 크게 찍혔다면 GDT(독일 자연 사진협회)에 제출해도 됐겠는걸. 그런데, 그랜드 캐니언에도 재규어가 살던가?”
“그녀석과 만났어.”
신은 에이지가 그렇게 다정하게 웃는건 참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재규어라면 최상위 포식자니, 잘 살겠지.”
그렇게 말하고 신은 잠시 에이지의 표정을 살폈다.
“그래.”
차분하게 사진을 바라보는 에이지의 얼굴은 전보다 밝아보여, 신은 안도했다. 그리고 안도하는 자신이 참을 수 없어져 그대로 몸을 일으켜 “잠시 신문사에 다녀올게.”하고 문을 나섰다. 그렇게 신이 나서는 동안에도 에이지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내내 그 아름다운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1990년대 느낌을 넣고싶어 무리하다가 정작... 내용이... 중간에 함뜨도 넣고 싶었는데 넘 졸리네요
아무튼... 애시는 에이지랑 함께 있다... 에이지가... 그의 영혼이... 곁에 있을거라고 했던 것 처럼......
안녕~~~!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