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카자

카페

10.

앞자리가 바뀌는 마법의 숫자. 카자미는 연말 카운트다운처럼 다가오는 나이를 특별하게 여겼다. 10살에는 갓 시작한 유도로 어린이 유도대회에서 우승했고, 20살은 성인식과 더불어 첫 여자친구를 사귀었다. 30살엔 특별한 남자를 만났고, 40살이 된 지금. 카자미는 카페 사장이 됐다.

정확하게 39살에 포와로를 인수했지만, 어찌 됐든 과거의 자신에게 ‘카자미 유우야는 40살에 경찰을 때려우치고 카페 사장이 된다.’ 라는 편지를 보내면 세상에서 가장 헛소리라고 여길 것이다. 이제 2년 차를 바라보는 카페 사장님은 작은 커피잔이 그려진 앞치마가 어색하기만 했다.

십여 년간 몸담아온 경찰 생활에 마침표를 찍을 만큼 그는 엉망이었다. 총알은 심장을 빗나가 팔을 뚫었고 목숨을 부지하는 대가로 허리를 다쳤다. 공안 공인 끈질긴 남자라는 별명답게 카자미는 삶에 만연해 있는 죽음에서 여느 때처럼 살아남았다. 하지만, 너덜한 몸으로 공안 신분을 유지할 수 없었다. 관리관은 그간 노고를 인정해 관리직으로 인사이동을 명령했다. 좌천이라기엔 승진이었고 목숨을 걸 필요도 없으니 자신의 처지에 알맞고 편한 처사였다. 이대로 은퇴까지 안락한 삶이 보장됐지만, 카자미는 제 손으로 안녕을 지켜야 적성이 풀리는 고집을 스스로 꺾지 못했다. 땀에 젖을 만큼 뛰어야 했고 두 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을 참고 현장에 서있어야 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기엔 두 다리가 멀쩡해서요. 카자미의 사직 사유였다. 사직서부터 포와로 인수까지 상황은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마치 카자미 인생에 미리 계획된 것처럼.

돌이켜보면 카자미 유우야 치고 섣부른 감이 없잖아 있었다. 퇴직금을 탈탈 털어 내자 그제서 정신이 들었다. 카페는커녕 커피의 ‘커’도 모르면서 어쩌자고. 자영업에 뛰어든 사람 중 일 년 내 폐업 확률을 찾아보고 짧은 머리를 부여잡은 것도 잠시, 늘 그랬듯 앞으로 인생을 걱정하기 보다 부딪히기로 했다.

폭풍같 은 점심시간이 지나면 포와로는 한가롭다.

포와로는 남녀노소 인기가 많았지만, 2층에 있는 모리 코고로 덕에 경찰 내 입소문이 자자한 카페였다. 거기에 카자미 유우야가 인수했단 소문을 들은 동료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경찰 생활을 허투루 한건 아니었던 것 같으면서 경찰과 떨어질 수 없 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도 덕분에 굶어 죽진 않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식사 도중 바쁘게 현장을 뛰쳐나가는 그들을 보며 카자미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빈자리에 한두 입 겨우 먹은 나폴리탄만 남아 ‘정의는 어디 가고 이 생활에 만족하는 거냐, 카자미 유우야.’하고 말거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총알은 심장을 빗나갔지만, 그는 지난 몇 년간 가슴이 뻥 뚫려 있었다. 서른 살, 인생을 흔들 만큼 강렬했던 남자가 사라졌기 때문이었을까.

물질도, 시간도, 사람도 변하기 마련이다. 세상에 ‘영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자미가 포와로에 온 건 딱 한 번. 기억을 더듬으면 끝에 후루야가 존재했다. 후루야는 포와로를 소중히 여겼다. 카자미에게 포와로는 상사가 신분을 숨기고 표적을 감시하기 위한 장소일 뿐이었다. 세 얼굴로 사는 바쁜 인생에 숨을 돌릴 시간은 필요하다, 후루야를 이해하는 시선에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다. 카자미가 연락책으로 임무를 수행할 때 외에 지나가지도 않는 곳. 그것마저 일정 거리를 지켰야 했다. 카자미가 포와로에 접점은커녕 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런 그가 포와로 안까지 들어간 날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날 카자미는 연락책이 아닌 손님이었다. 노을은 바래져 그늘이 되어 <closed>가 걸린 입구를 완벽히 가렸다. 가게가 닫혀야 들어울 수 있는 손님은 그늘에 삼켜지기보다 오히려 황금빛으로 물드는 남자를 두 눈으로 새겼다. 커피를 내리는 후루야가 팔을 움직이는 것만 봐도 즐거웠다. 자신에게 특별한 사람이 특별히 여기는 시간을 공유하자 감정이 전이 됐다. 코끝을 스미는 커피 향기와 쪼르륵 내려오는 물소리가 마음 어딘가를 간지럽혔다.

그래서 포와로 마스터가 가게를 내놓았단 소문을 들었을 때, 카자미는 붙잡아야 한단 사명에 강하게 사로잡혔다. 베이커 가에는 그간 많은 것이 존재했다 사라졌다. 탐정사무소에 사는 무서우리만큼 두뇌가 명석한 아이도, 좋아하는 카레집도, 후루야 레이도. 사라지지 않은 것은 그날 갖고 있는 카자미의 기억뿐이었다.

아침부터 습하더니 기어이 비가 내렸다. 슬슬 저녁이 다가오면 포와로 손님은 하나둘 자리를 떴다. 그래서 날씨가 좋지 않거나 하루종일 사람이 뜸한 날이면 일찍이 가게를 정리했다. 문패를 영업종료로 걸고 입간판을 안으로 들여 넣었다. 그새 물기를 맞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털었다. 재고와 주문할 품목을 체크한 뒤 머신과 주변을 정리한다.

나폴리탄이 뭐라도 해도 이 생활에 익숙해진 것은 최근이었다. 계약서 도장을 찍는 동안에도 마스터가 말릴 정도로 무모한 도전이었는데, 그런 무모한 인간을 두 손 놓고 볼 수 없었는지 결국 마스터는 귀향도 미루고 카자미를 도왔다. 짧지만 혹독한 훈련이 아니었으면 카자미는 진즉 퇴직금을 날려먹고 포와로 한쪽 구석에 거처를 마련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앞치마를 벗으려던 찰나, 문 위에 달아놓은 벨이 울렸다.

“죄송합니다만, 오늘 영업은….”

“끝났나요?”

닫힌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 덕에 곤란한 사람은 이쪽인데, 손님은 눈가를 살포시 찡그렸다. 듣기 좋은 목소리에 홀린 듯이 벗었던 끈을 다시 목에 걸었다.

“아뇨. 메뉴 보시고 천천히 주문하세요.”

“감사합니다.”

손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지 않은 매장을 천천히 둘러보고 가운데 자리 잡았다. 카자미가 메뉴판을 가지고 오는 동안에도 이곳저곳 눈길을 주더니 “좋은 가게네요.” 하고 처진 눈을 곱게 접어 웃어 보였다. 내부 인테리어도, 포와로 글자가 박힌 식기나 화분 하나까지 카자미 손길을 탄 것이 없었다. 인테리어 재능을 떠나 포와로는 포와로 그대로 두고 싶은 고집이 있었기에 칭찬을 듣고 내심 기쁜 마음이 들었다. 다만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보시고 주문해 주세요, 하고 상투적인 대답을 했다. 카자미가 몇 걸음을 뗐을 때였다.

“블랙커피 부탁드립니다.”

그 음성은 나긋하고 부드러워 현실감이 들지 않아서 뒤돌면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카자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짧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따끔함을 느끼고 뒤를 돌았다. 손님은 재킷을 벗다 시선을 느끼고 “생각보다 날이 춥지 않네요.” 하고 웃었다.

“방금 커피머신을 청소해서 십 분 정도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괜찮습니다.”

카자미는 실례합니다, 양해를 구하고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힐끔 본 시선에 손님 옆자리에 걸쳐둔 재킷이 들어왔다. 짙은 피부색과 서글서글한 인상에 어울리는 옅은 베이지색이었다. 어깨 부근은 잠깐의 비로 젖어있었다. 금빛 머리카락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지만 비 맞는데 익숙한지 개의치 않아 보였다. 그래서 카자미는 메뉴판을 제자리에 올려두고 깨끗한 수건을 집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머리라도 닦으세요.”

남자는 감사인사와 함께 이내 웃었다.

“핸드드립도 괜찮으실까요?”

“… 네. 그럼 그걸로.”

여전한 미소로 손님은 잠깐의 침묵을 보였다. 어떤 사인인지 감이 오지 않았지만, 카자미는 이유를 묻거나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물을 끓이는 동안 원두의 무게를 정확하게 쟀다. 주전자를 움직여 필터를 적셨다. 유리면에 필터가 달라붙자 그 안에 원두를 털어 넣고 손으로 가볍게 쳤다. 가루가 흔들리며 표면이 평평해졌다. 일차적으로 물을 고루 적셨다. 옅은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며 뜸을 들일 때면 카자미는 눈을 떼지 않았다. 정확하게 진한 커피 향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그는 잠시 넉을 놓았다. 이곳에서 단 한번 맡았던 냄새는 어느새 향수가 되었다. 같은 공간이란 공통점이라 가능한 걸까. 약 일분정도의 그리움이 지나면 새로이 물을 붓는다. 커피에 박학한 마스터 덕분에 제법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하나 대충 배우는 법 없는 성격 덕분이기도 했다.

카자미 씨, 커피 내리는 것도 꽤 어울리네요. 공안 발령 시점부터 저를 잘 따르던 부하를 떠올렸다. 개업하고 동료들이 한 번씩 들렸지만, 정작 오랫동안 같이 일한 부하만은 찾아오지 않았다. 부하는 마스터가 떠나고 혼자 가게를 오픈하고 한참 뒤였으니 일 년 여만에 뒤늦은 개업축하 화분과 함께 나타났다.

“제가 오래 모신 상사가 뜬금없이 커피를 판다고 했을 때 제 속이 얼마나 뒤집어졌는지 아세요?”

“내가 커피를 파는 거랑 네 속이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있죠! 보세요! 카자미 씨와 제일 오래 일한건 접니다. 카자미 씨가 현장에 없다고 해도 당신 능력은 여기서…!”

격양된 목소리를 삼키고 카자미가 내리는 커피를 보란 듯이 노려봤다. 카자미 사직을 누구보다 말렸던 부하였고, 카자미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했다. 그래서 그가 개업을 축하하는 연락을 보내거나 따로 찾아오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았다. 떠나간 이의 상실을, 카자미는 잘 알고 있어 그저 부하가 제게 쏟아내는 불만을 그저 들어주고 있었다.

“월급쟁이가 가게 한다고 했다 말아먹는 비율이 꽤 되시는 거 아시죠? 카자미 씨 얼굴이랑 카페랑 어울리지도 않는다고요. 지나가다 애도 울리신 적 있잖아요. 카자미 씨가 말을 걸어서 유치원 애들 산책 길에 단체로 울었던 거 잊으셨어요? 포숑포숑이라니 카페 이름이 뭐 이래요? 젊고 발랄한 사장이 할거같은 카페 이름이잖아요.(포와로라고 정정해 줬지만, 포로리나 포와로나 거기서 거기라고요, 라는 대답을 들었다.)”

부하는 카자미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말도 안되는 말을 늘어놓았다. 처음 카자미 밑으로 배정됐을 땐, 앳된 얼굴로 ‘일이 너무 많아요 카자미 씨….’ 우는 소리도 겨우 하던 친구였다. 그런데 어느새 옛 상사의 면상을 들먹이며 볼멘소리 하는 모습을 보자, 새삼 세월이 실감 났다. 주문한 커피를 앞에 놓자 쉴새없이 움직이던 입을 다물었다. 잠시 그를 지켜봤지만, 마실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카자미는 미처 치우지 못한 자리를 정리했다. 설거지를 다 하고 돌았을 때 부하는 어느 새 코트를 챙겨 들고 있었다. 그는 카페에 들어올 때처럼 코끝이 빨개서 카자미는 무심코 히터가 꺼졌는지 확인했다.

“카자미 씨가 그만둔 날부터 분했어요. 누구보다 몸 바쳐 일한 사람인 걸 제가 잘 알잖습니까. 실언한 부분이 있었다면 용서해 주세요. 그럼 가보겠습니다.”

당장 뛰쳐나갈 것처럼 꾸벅 인사한 부하는 말과 다르게 머뭇거렸다.

“커피 맛이 감동적이었거나 살면서 제일 맛있던 것도 아니었어요. 애초에 저는 커피가 써서 못 마신단 말이에요. 그런데 카자미 씨가 커피 만드는 모습 보니까 당신 성격에 얼마나 진지하게, 또 노력했을지 보여서 잡질 못하겠어요. 아, 젠장. 앞치마는 왜 어울리시는 건데요. 진짜 가볼게요.”

도망치듯 나갔기에 배웅을 한다거나 들려줘서 고맙다는 흔한 말을 놓쳤다. 빈자리에 비어있는 커피잔을 보고 카자미는 웃음을 터트렸다. 부하가 우는 모습이 귀여워서도 아니었고, 칭찬을 받고 안심한 자신 때문이었다.

인생에 정답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포와로는 인생계획에 없었다. 그래서 마스터가 떠나고 비로소 혼자가 되자 불안이 들었다. 카자미는 실패한다고 좌절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선택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뜻밖의 인물에게 칭찬을 받자, 카자미는 새삼 지난 시간을 지탱해 준 사람을 상기시켰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이게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가끔은 저를 칭찬해 주던 사람이 그리울 때마다 이게 다 당신 때문이라고요, 하고 닿을 리 없는 핀잔을 줬다.

포트를 내려놨다. 남들이 보기에 자신이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카자미는 알리가 없었다. 어떤 표정인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지, 무서워 보이는지. 자세는 어떤지. 상대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가운데로 모여드는 물길을 바라보다 문득, 필터 안쪽이 손님의 재킷색과 같다고 느꼈다.

포와로는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켰지만, 내부 상태나 테이블, 의자까지 쉽게 바꾸지 못하는 제품도 새것처럼 깨끗하거나 관리가 잘된 상태라 사람들이 포와로를 아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카자미는 포와로의 많은 것을 그대로 두고 싶었다. 나무의자처럼 손볼 수 있는 것은 직접 관리했고, 낡은 식기는 새것으로 바꾸며 일부러 포와로 로고를 그대로 새겨 넣었다.

매일 보는 커피잔인데, 트레이에 올려두니 낯설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냉장고를 열었다. 보관 용기를 몇 개 꺼내 접시에 내용물을 차근차근 담았다. 스펀지케이크 위에 생크림을 얹고, 딸기조각과 블루베리로 장식했다.

손님은 책을 읽고 있었다. 문고판 크기의 책은 한 손에 읽기 편하게 반으로 접혀있어 제목은 보이지 않았다.

“주문하신 커피 드리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데 유리잔이 흔들려 받침에 자잘하게 덜그럭거렸다. 그제서 카자미는 자신이 손을 덜덜 떨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순간 손님을 살폈는데, 남자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대신, 디저트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자 의아하게 카자미를 바라봤다.

“오늘 점심 메뉴로 팔았던 건데, 몇 개 남아서요. 괜찮으시다면 드셔보세요.”

“감사합니다.”

쓸데없는 호의일지도 모르지만, 손님은 싫은 내색 없이 되려 기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필요하신 것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하는 흔한 멘트도 잊고 돌아섰다. 매장 안엔 빗소리와 가끔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카자미는 마감을 마쳤던 매장에서 할 일을 찾다 창밖을 바라봤다.

손님과 단 둘이 있는 것도 처음이 아닌데, 참 이상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데, 책 넘기는 소리가 나면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잔을 내려놓을 때면 그가 옆자리에 있는 것마냥 맑은 소리가 선명했다. 매장이 이렇게 좁았던가, 의아함이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느린 숨처럼 책 넘기는 소리만 이따금씩 들렸다. 고요하고 일정해서, 편안하고 그리운 기분이 들자, 카자미는 졸고 있었다.

눈을 뜬 건 똑똑, 하는 가벼운 울림 때문이었다. 푸른 눈동자가 가까이 보이자 카자미는 잠에서 덜 깬 탓인지 잠시 넋을 놓았다.

“돈만 두고 가려다, 일어나시면 놀라실 것 같아서요.”

“괜, 괜찮습니다.”

그는 버릇처럼 황급히 일어났다. 언제 잠든 건지, 아득하게 느껴졌다. 손님의 시선이 그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눈높이까지 따라왔다.

“사, 사백팔십 엔입니다.”

손님이 오백 엔을 내밀자 카자미는 카운터에서 이십 엔을 꺼냈다. 입엔 맞으셨나요, 맛있게 드셨나요, 다음에 또 오세요, 그런 흔한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님은 카자미를 재촉하지 않았다.

“원래 커피에 우유를 넣어 마시는데요. 비가 오는 데다, 핸드드립은 본연의 맛을 느끼고 싶으니까요. 선택을 잘한 것 같아요. 그리고 메뉴에는 베이커리가 없었는데, 반숙케이크 맛있었어요. 시트 안에 커스터드 크림이 꽤 달았지만, 시트와 잘 어울렸어요.”

“그, 메뉴는….”

예전 포와로에서,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새파란 시선이 그를 한참 응시하다 “늦게까지 있어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카자미는 아닙니다, 말도 결국 하지 못하고 그에게 20엔을 내밀었다.

손님이 남기고 간 다정만이 자리에 머물렀다. 실체 없는 다정함을 미련처럼 바라보다 카자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지막 손님을 받기 전처럼, open 글씨가 카자미를 향해 있었다. 비가 전보다 요란하게 오고 있었다. 아, 우산.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트레이를 들고 마지막 자리로 간다. 누군가 존재했던 흔적이 테이블 위에 남아있었다. 비어있는 커피잔을 보고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빗물이 폐에 꽉 차오른 것 같이 명치가 따끔하고 답답했다.

찻잔을 들었다. 이번엔 더 확실하게 식기가 요란히 흔들렸다. 손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 겨우 잔을 내려놓았다. 카자미는 무너진 적이 없었다. 소중한 동료가 죽었을 때도, 사랑하는 이가 사라졌을 때도, 본인의 부상과 현실을 마주했을 때도. 그래서 무너지지 않게 테이블을 짚었다. 몸을 지탱하고 숨을 몰아쉬자 기다렸다는 듯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10년. 카자미는 40살이 되어 다시 전환점을 만들었다. 포와로는 자신이 소중하게 여긴 이가, 소중하게 생각한 곳이었다. 그래서 사라지지 않게 지키고 싶었다. 그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지만, 변해가는 베이커 거리를 중 돌아올 수 있는 장소가 하나쯤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인생은 맞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지만, 다정하게 물렀던 온기는 카자미의 선택이 옳았다고 얘기해주고 있었다.

“다행이야.”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을 때였다. 문가에 달린 종소리가 요란하게 짤랑여 카자미는 팔로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오늘 영업 끝났습니다.”

“왜!”

외침을 듣고 놀라 뒤를 돌자 방금까지 머물렀던 손님이 성큼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차분한 미소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유려한 얼굴은 빗물과 감정에 푹 젖어 있어 카자미는 눈을 여러 차례 껌뻑였다. 그 바람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왜 모르는 사람 취급해?”

“에?”

“네가 표정도, 말투도 전부 모르는 사람처럼 굴잖아.”

“그, 그야, 후루야 씨가 모른 척하시니까….”

“네가 포와로를 운영한다는 소리 듣고 믿기지 않아서, 조심스러웠을 뿐이라고. 그런데, 네가 눈길 하나 주지 않아서 나는.”

격양된 소리가 점점 줄어들어 목소리가 흔들렸다. 후루야의 손이 카자미의 양팔을 붙잡았다. 꽉 잡힌 부분만이 뜨겁게 젖어 비로소 현실적인 감각을 일깨웠다.

“나는…. 나는 네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조마조마했다고.”

남자는 점점 일그러지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불안함을 터트리자 고개를 숙였다. 카자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자 익숙한 포와로 앞치마가 시야를 채웠다. 괜찮은 거야? 고요한 물음은 주체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카자미는 남자를 받지도, 밀어내지도 못한채 가만히 서있었다. 입을 연 것은 한참 뒤였다.

“후… 후루야 씨….”

나직한 목소리를 듣고 후루야가 고개를 들었다. 둘의 시선이 얽혔을 때였다.

“애초에 당신이 손님으로 들어오셨으니까요! 저한테 뭐라고 하실 건 아니잖습니까? 저야말로 후루야 씨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 줄 알고 맞춰 드린 거라고요!”

카자미는 줄곧 말하지 못했던 몫까지 한바탕 쏟아냈다.

“그리고 제가, 제가 얼마나….”

후루야의 놀란 모습을 보니, 시원하면서도 그 얼굴이 그리웠단 것을 깨닫고 말았다. 뒤이어 제 안에 차곡차곡 쌓아놨던 감정이 밀려와서인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기에 어떤 말을 먼저 말해야 할지, 복잡했다.

“카자미.”

후루야는 팔을 둘러 그를 감싸 안았다. 부름을 듣고 카자미는 입을 다물었다.

“다녀왔어.”

한마디에 카자미는 긴 시간 전하지 못한 말을 모두 잊고 말았다. 다만, 빗물에 젖은 체온은 한결같이 따뜻해서 카자미는 자신이 살아온 40살 또한 특별해진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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