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카자

후루카자 전력 모음

https://twitter.com/FURUKAZA_180min 님 감사합니다


#후루카자 전력 180분 '허기' / 야식은 계란과 우동



#후루카자 전력 180분 '첫눈' / 첫 눈


할머니는 하늘이 흐려지면 카자미를 불렀다. ‘매해 첫눈이 오면 너희 할아버지랑 결혼하게 해주세요, 라고 빌었지. 호호.’ 하고 웃으시며 과자를 손에 쥐어주셨는데 카자미는 어떤 과자였는지, 무슨 맛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대신 할머니의 수줍은 얼굴만 남아 카자미 유우야는 매해 첫눈이 오는 날엔 두 손바닥을 맞대고 눈을 꼭 감았다.

‘가족이 행복하게 해주세요, 엄마아빠가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과자를 많이 먹게해주세요, 키가 쑥쑥 자라게 해주세요, 옆반 아츠미쨩이랑 짝궁이 되게 해주세요, 키시모토랑 첫키스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소원이 나이만큼 차곡차곡 쌓일 무렵, 할머니의 첫사랑은 그녀가 오랫동안 변하지 않는 사랑과 구애를 했기 때문이고 자신이 가진 큰 키는 유전적인 영향이 컸으며 아츠미쨩과 짝꿍이 된 것은 부모님이 아츠미네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부탁했기 때문인 것을 알았다. 소원은 운이 아닌 자신의 노력으로 이뤄야하는 이치를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어른이 된 후에도 첫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소원을 빌었다.

후루야는 핸드폰을 어깨와 턱에 사이에 끼웠다. 찻통의 뚜껑을 열다 ‘ 첫눈이 올때가 됐죠?’하고 물음에 잠시 행동을 멈췄다.

“첫눈?”

-이제 슬슬 올때가 됐는데요. 작년은 딱 오늘 날짜에 왔다고요.

“아, 네가 자고 있을 때였지?

-역시 기억하고 계시네요. 일어나니 다 녹아 있었죠.

빈 머그컵에 마른 가루를 정량 담고 찻통을 정리했다. 핸드폰을 바로 잡아 불편한 자세를 고쳤다. 후루야가 속을 세고 있던 타이밍-제로-에 맞춰 주전자가 끓는 소리를 낼 무렵, 그는 통화에 방해되지 않게 한발 미리 불을 껐다. 덕분에 요란한 비명을 질러야할 주전자는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숨이 죽었다. 주전자를 기울이자 좁은 통로에서 물이 일정량 쏟아지며 뜨거운 김을 뿜어냈다. 통화에 방해되지 않게 행동을 제한했는데, 카자미는 작은 소리를 놓치지 않고 “뭐 드시고 계세요?”하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차 한 잔 마시려고 했어.”

-또 매실다시마차인가요? 요새 잠 못 드시는건가요?

“그런거 아냐. 오랜만에 마시고 싶어서.”

-...가끔 후루야 씨에게 공감하기 힘들어요.

“마시다 보면 꽤 맛있어. 게다가 매실다시마차는 비타민이...”

-예예. 알겠습니다. 누가 보면 매실다시마차 판매원인줄 알겠다고요.

옛날같으면 후루야의 말을 견뎠을 텐데, 이제는 능청스럽게 적당히 끊어낼 줄 알았다. 부하의 성장에 후루야는 하하, 웃으며 뜨거운 찻잔은 후 불고 한모금 마셨다. 입안부터 바다기운이 스치며 속까지 따뜻하게 데워줬다.

“그나저나 너, 눈을 좋아하지도 않잖아.”

-어릴 땐 꽤 좋아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어요.

“지금은 아니지.”

-어른이 되어서 눈 좋아하는 사람 있을까요? 차 막히죠. 도로는 질펀하죠. 녹으면 더럽죠. 애매하게 오면 애매하게 오는대로, 많이 오면 많이 오는대로 별로라고요.

“난 좋아해. 내릴 때도, 녹을 때도. 뭐. 녹으면 불편한게 사실이지만.”

-예... 후루야 씨는 불호가 별로 없으신 편이잖아요.

“그런데 첫눈에 집착하는 편이란 말야?”

-...집착이라뇨.

“4년 전은 네가 오사카로 출장갔고, 3년 전은 아주 잠깐 내려 회의 마쳤을 때 기온이 올라가 금방 녹았지. 2년 전은 네가 수술 중이었고, 작년은 자고 있었지.”

-후루야 씨 기억력은 가끔 무섭습니다.

“오사카는 눈 안온다고 울었잖아.”

-울지 않았습니다!”

발끈한 그의 모습이 그려져 후루야는 시원하게 웃었다. 빈 컵을 개수대에 올려놨다. 시간은 벌써 자정을 지났고, 잠자리에 들어야하는데 시간이 깊어질수록 통화를 끊기 어려웠다. 연애란 그렇다. 통화를 끊거나 상대를 헤어지고 찾아오는 정적은 그리움을 동반했다. 텅빈 기분을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일까, 후루야는 시간을 확인하고 마지노선을 정했다. 벌써 아쉬움이 밀려왔다. 소등을 마친 그가 미련처럼 침대에 걸터앉아 괜히 자신의 비상한 기억에 문을 두드렸다. 연락책이 된지 얼마 안된 카자미가 서로에게 선을 긋고 최소한의 연락만 하던 시절이었다. 후루야의 부탁으로 부랴부랴 오사카로 날아간 날, 그 해의 첫눈이 왔다. 카자미에게 보고를 듣던 후루야가 무심코 “아, 눈이다.”라고 작게 말했었다.

“‘네에~? 눈이요? 지금 도쿄는 눈이 옵니까?’라고 했지. 아마?”

후루야는 목소리를 반톤 올려 상대를 흉내냈다. 몇번을 들어도 대사도, 목소리도 자신과 하나 비슷하지 않아 카자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카자미가 후루야 앞에서 풀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돌이켜도 바보같고 애같았기에 좋아하는 주제는 아니었지만, 이 얘기를 할때마다 후루야의 웃음이 공기 중으로 시원하게 퍼지는게 좋았다. 실제로 그날후로 보이지 않던 경계가 흐려졌다고 생각하기에 카자미는 이날을 썩 싫어하지 않았다.

-나참, 확실히 실망하긴 했지만요. 도쿄는 눈이 오냐고 물었지 그렇게까지 호들갑떨지 않았습니다.

“조금이 아니었는걸. ‘오사카는 해가 아직 한창이라고요.’하고 투덜대길래 눈을 무척 좋아하는 줄 알았어. 그 다음 눈 온다고 연락했을 때 심드렁하게 받아서 당황했지만.”

-일부러 연락 주신 건 감사했지만, 당시에 후루야 씨에게 온 연락은 급하거나 무거운 내용이었으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고요. 평소와 패턴이 달라 부랴부랴 받았더니 기껏한다는 소리가 ‘밖을 봐. 눈 와.’ 였으니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십니까?

“하하. 나야말로 돌아온 대답이 ‘그런가요.’라서 당황했다고.”

-그 해 눈이 대단했죠.”

“오사카에도 눈이 내내 내릴 정도였으니까. 그러고보니 네가 도쿄로 돌아오자마자 오사카도 눈이 내렸지.”

-일정대로 였다면 오사카에서 첫 눈을 볼 수 있었을텐데요.

“내가 불러서.”

-하루 급하게 돌아왔죠.

“왠지 미안한걸.

-첫눈에 목숨걸 것도 아니니까요.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후루야는 온 뒤로 벌러덩 누웠다. 평소와 다르게 침대를 가로질러 누운 탓에 매달린 등의 각도가 다르게 보였다. 목소리를 듣는 동안 곁에 있는 기분이 들었는데, 대화가 끊긴 잠깐이 현실을 일깨운다. 보고싶다. 후루야는 손을 뻗었다. 베개 맡에서 자고 있는 하로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하로는 인간의 무게를 느끼고 슬쩍 눈을 떴지만, 잠을 이기지 못했다. 귀찮지 않은지 몸을 틀어 배를 위로 내밀었다. 손바닥에 닿는 보들보들한 감촉으로 후루야는 공간의 허전함을 채웠다. 건너편에서 하품소리가 길게 났다.

“단지 그 해에 내리는 첫 눈이 좋은거야?”

-뭐...좋아...하냐고 물으면 좋아하는 건 아녜요.

“그럼?”

-비밀입니다. 제가 첫눈 보게되면 알려드릴게요.

“그래? 몇 년동안 못 듣겠네.

-그럴지도 모르죠.

대화가 끊겼다. 후루야는 일부러 이어나가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카자미가 소리를 낼만큼 하품을 한다는 건 무의식 중에 나온 상태였다. 그만큼 잠이 오지만, 인사도 못할만큼 까무룩 잠들지 않는 이상 카자미는 먼저 전화를 끊지 않았다. 후루야는 공안으로 대기하는 습관인건지, 연인으로 저와 같은 아쉬움인지 알고 싶었다. 후루야는 두번째 하품을 듣고 몸을 돌렸다. 그래봤자 자신의 방과 어둠을 품은 창뿐이었다. 어디에도 보고싶은 이는 없는데. 몸을 웅크린 순간, 그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 눈이다.”

-...에이. 무슨...예에에? 진짜요? 거짓말? 예? 진짜?

우당탕 요란한 울림이 귓가를 타고 들어왔다. 한밤 중에 조심성없이 창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거짓말, 진짜잖아. 와, 하는 감탄을 끝으로 고요함이 흘렀다. 그는 몇 년만의 첫눈을 맞이하고 있는 걸까. 한 번도 첫눈을 바라보는 카자미를 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4년을 넘게 그를 바라봤지만, 아직 후루야에게 카자미 유우야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후루야는 일어나 베란다로 갔다. 문을 열자마자 강풍이 밀려왔지만, 슬리퍼를 신고 난간 앞에 섰다. 카자미가 느끼고 있을 순간을, 후루야는 들이마셨다. 매서운 겨울 공기에 코끝이 시려웠다.

-눈 보여요?

“아하하. 당연하지.”

손을 내밀어 카자미에게 보일리 없는 증명을 했다. 하얀 부스러기들이 소리없이 손바닥에 안착하자마자 열을 이기지 못하고 자취를 감췄다. 금방 손이 축축해졌지만 후루야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후루야 씨도 소원 비세요.

“소원?”

-첫눈을 보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대요.

“아하...”

-반응이 왜그래요?

“네가 그런걸 믿으니까 좀 놀라워서.

-믿지는 않아요.

“그래?

-그래도 첫눈이란 조건과 소원이라는 행위는 꽤 낭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왜 아무말이 없으신거에요.

“첫눈에 낭만을 느끼는 네게 놀라고 있는 중이야.

-저도 누구에게 말한 건 처음이네요. 뭐,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어릴때 할머니랑 같이 살았는데 첫눈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셨거든요. 이제는 뭐, 습관같은거라고 할까요.

첫눈을 기다린 낭만있는 사람치고 무덤덤한 목소리라 후루야는 조금 웃었다. 웃음이 새어 나왔는지 전화너머 “아.”하고 짤막한 대답이 들렸다. 놀리려던 의도는 아니었다. 귀여워서 그랬어, 라는 진심을 전하고 싶어도 ‘다 큰 어른에게 귀엽다니요.’하는 볼멘소리와 함께 이상한 표정일게 뻔했다. 이상한 표정 안에는 조금의 쑥쓰러움이 담겨있지만, 후루야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슨 소원을 빌었어?”

-알려드릴거면 눈이 아니라 후루야씨에게 빌었겠죠.

“혹시 알아? 내가 이뤄줄수도 있잖아.”

부자가 되게 해달라거나 세계평화가 찾아와 일을 그만두거나 철야가 줄어들게 할 수는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카자미가 놓친 오키노 요코 콘서트 티켓정도는 이뤄줄 수 있었다. 이르게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낭만적인 순간을 돋보이게 해줘도 좋을 것 같아 계획을 변경했다.

-그러니까...

카자미는 대답을 할 생각인지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니까, 를 두 번 더 말할정도로 그는 머뭇거리고 있어서 애가 타는 건 후루야였다.

-후루야 씨가.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빌었습니다.

난간을 넘어 들어온 눈이 후루야 주변에도 서서히 쌓여갔다. 이 세상에서 내 행복을 빌어주는 건, 이제 너 밖에 없을거야. 농담과도 같은 말을 후루야는 순간적으로 치미는 감정에 차마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고마워.”

후루야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내 일그러트리길 반복했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정하지 못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릴 뿐이었다. 카자미 유우야가 보고싶어요, 라는 소원을 눈송이 사이사이에 묻었다. 눈이 현기증만큼 아득하게 오는 밤이었다.


#후루카자 전력 180분 ‘신뢰’ / 배는 따끈해


“이 녀석, 기다려!”

단호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위협은 느껴지지 않았다. 말 한마디로 적을 만들던 카자미 유우야가 물렁하게 느껴지는 건 상대가 작은 생명체라서 그럴까.

“그만, 그만! 앉아! 앉으라고!”

하로는 ‘앉아, 기다려’ 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진작에 익힌 영리한 아이였다. 상황을 분별하여 상대가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는 눈치까지 있어 하로에게 절절매는 카자미를 후루야는 빤히 바라봤다. 몇 시간 전에 용의자를 놓친 부하들에게 ‘정신 차리지 않고 뭐 하는 거냐.’ 버럭 화를 내던 박력은 어디가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개 하나 어쩌지 못하고 있고 있다. 자신을 보는 후루야는 개의치 않은지 카자미는 ‘하하, 이녀석.’하고 육포를 머리 위로 드는 데 집중했다. 하로는 넘치는 에너지로 카자미에게 달려들었다. 집요하게 달려들다 인내심에 한계가 온건지 결국 캉! 캉! 하고 날카롭게 짖었다. 카자미는 쉽게 백기를 들었다. 하로는 육포를 물자마자 뒤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달려가 숨었다. 육포를 얻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으르릉, 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지만, 카자미는 동그란 입구로 슬쩍 보이는 흰 엉덩이에 눈을 떼지 않았다.

“놀리는 것도 적당히 해. 아무리 하로라도 물 수 있다고.”

“하하, 그러게요. 전에 후루야 씨랑 마술을 선보였다 집요하게 당했었죠. 아는데, 그렇지만, 귀엽단 말이에요.”

카자미가 귀여워하는 마음을 익히 알기에 후루야는 더 이상 주의를 잇지 않았다. 하로를 애타게 굴었던 것도 방금 먹은 간식이 오늘 카자미가 줄 수 있는 마지막이었다. 고생해서 얻은 것치고 순식간에 해치운 하로는 카자미 곁으로 돌아왔다. 카자미는 하로를 향해 양손을 펼쳤다. 동그랗고 촉촉한 코가 허공에 몇 번 움찔거리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좀 전까지 ‘앉아, 기다려.’라는 말에 엉덩이를 붙이는 척 들을 생각도 안 하더니, 시키지 않아도 카자미 앞에 철퍼덕 앉아 혀로 입가를 정돈했다. 아무리 카자미라도 후루야 앞이라면 몰래 간식을 줄 수 없다. 이 한치없는 규칙 앞에 둘은 눈빛을 교환했다. 아쉬운 건 카자미도 마찬가지라 손을 뻗었다. 자그마한 머리통에 닿기 전, 하로는 미리 귀를 한껏 젖혔다. 솜사탕을 만지는 것보다 더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그게 썩 마음에 드는지 하로는 이내 몸을 돌려 바닥에 드러누웠다. 앞발을 들고 배를 훤히 드러낸 채로.

멈췄던 손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섯 손가락이 부지런히 옅은 털을 북북 쓰다듬었다. 살랑살랑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만큼 카자미의 입꼬리도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리고 생명체를 향해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하하, 후루야 씨. 멍멍이가 졸린가봐요.”

카자미가 터트린 웃음에 하로가 슬쩍 눈을 떴다. 그말이 아니었다면 후루야도 주어진 평화에 좀 더 게으름을 부렸을 텐데. 후루야는 하루가 저물어가는 현실을 마주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서랍이 열리는 소리에 하로가 몸을 일으켰다. 후루야가 혀를 차며 ‘하로, 양치해야지.’ 하고 명확하게 불렀기에 영리한 강아지는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겼다. 제 집에(제로의 집행인 아님) 들어가기도 전에 한팔에 냉큼 들렸다.

인간의 양다리에 갇히자, 반항해도 소용없는 것을 깨닫는다. 얌전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인간도, 개도 잠들기 전 양치질을 하는 것은 잠들기 전 해야 할 수순이기에, 카자미도 자리를 정리했다. 하로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게슴츠레 눈을 뜨고 끙끙대며 카자미를 바라봤지만, 카자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루의 마무리는 소등이었다. 후루야는 티셔츠를 훌렁 벗으며 새삼 자신의 삶에 새로 정립된 시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조수석에서 잘만 자던 사람은 절대 후루야와 같은 침대를 쓸 수 없다고 우겼다. 몇 번이나 바닥을 고집하더니 이젠 후루야가 들어오기 전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후루야는 제 몫을 침범한 긴 다리를 슬쩍 무릎으로 밀었다. 순순하게 물러났지만, 이번엔 카자미가 이불을 덮은 건지, 던진 건지 모를 모양이 신경 쓰였다. 초여름이라 해도 새벽이 깊어지면 기온이 쌀쌀했기에 지나치지 못하고 다시 정돈하기로 했다. 끝자락을 잡아 들자 가벼운 무게가 스르륵 몸을 스쳤다. 그러자 카자미가 드러났다. 그는 하얀 티셔츠가 가슴께까지 올라가 훤히 배를 보이고 있었다. 처음 훌렁 벗고자는 상사를 낯설어하더니, 그도 별반 차이없다고 생각하며 후루야는 천을 크게 들어 침대에 맞게 펼쳤다.

몸 한쪽 면에 닿은 체온이 느껴졌다. 하로가 발에 기대 자던 면적과 확연히 다른 것을 느꼈다. 그 존재에 후루야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가 훤히 드러내 준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카자미가 허락한 마음만큼, 무한히.

웅크린채 하나 밖에 없는 이불을 제쪽으로 한껏 끌어당겨 잘도 잤다. 느리게 들이쉬고 내뱉는 숨소리가 카자미가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들려주고 있었다. 후루야가 이불을 들춰 몸을 집어 넣자 고집스럽게 천자락을 잡았다. 시간위에 쌓은 경험으로 후루야가 난처해야할 시기는 이미 지났다. “이봐.” 한 소리를 했을 뿐인데, 끙끙대는 소리와 함께 힘을 푼다. 스르륵 스르륵 풀려오는 천자락을 공평하게 나눠 덮자 옆에서 다시 한번 몸을 움직었다. 엉덩이를 슬금슬금 내밀더니 후루야 다리께에 살을 찰싹 붙였다.

(이것도 카자미가 인터넷으로 구입했다 교환한 제품이었다. 처음에 구입한 제품은 누가봐도 하로가 들어가기에 작은 사이즈였다. 카자미는 자신이 멋대로 구입해놓고 ‘하로가 살이 찐건가요?’ 말하고는 눈으로 마치 후루야 탓을 하고 있었다.)


#후루카자 전력 180분 ‘희생’ / 마지막 식사


“북위 35도 41분 39초, 동위 139도 45분 29초.”

목적지에 다다른 그는 중얼거렸다. 상호를 확인하고 메시지 삭제를 눌렀다. <1건의 메시지가 삭제되었습니다.> 안내를 확인함과 동시에 가게 문을 밀었다. 훅 끼치는 향신료 냄새가 침샘을 자극해서 혀 밑부터 식욕이 솟구쳤다.

“죄송하지만, 지금 자리가 없어서... 합석이라도 괜찮으시겠어요?”

종업원은 안타까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합석도 괜찮습니다.”

도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카레 집이기에 이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아니, 애초에 좌표가 찍힌 문자를 받은 순간부터 기다리거나 다른 가게를 가는 선택지는 없었다. 흔쾌한 대답을 듣고 직원은 주변을 둘러보고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더운 날에 맞춰 흰 셔츠 소매를 말아 올린, 정장 차림의 남자는 외근을 나온 직장인처럼 보였다. 남자는 직원이 다가오자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자 사회 때에 물든 직장인이라기 보다 갓 취업한, 혹은 취업 준비생인 느낌도 제법났다. 상냥한 웃음에 직원은 안도하며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인사했다. 이 자리로 오세요! 카자미에게 신호를 보냈다.

‘또...’

정말 기묘한 상황이었다.

후루야 말에 의하면 이 카레집은 오픈 3~40분 전부터 대기 줄을 선다고 했다. 그런 인기있는 가게를 카자미는 남들처럼 대기해서 먹은 적이 없었다. 후루야 문자를 받는 날은 운 좋게 합석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고, 자리는 항상 후루야가 앉은 자리였다. 지금까지 세어본 결과 열 개 남짓한 테이블에 후루야와 합석할 확률은 100%였다.

이 기이할 정도 높은 확률에 카자미가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했다. 후루야는 카자미가 오기까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러니 직원에게 어떤 신호를 보낼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직원에게 언질을 주었거나 직원이 ‘관계자’란 가설까지 세웠지만, 자리를 안내하는 직원은 매번 바뀌었다.

타인처럼 자리에 앉고 메뉴판을 집었다. 항상 주문하는 카레는 동일했다. 이 메뉴판은 메뉴를 정하는 용도보다 가리는 용으로 사용됐다.

“사건번호 3321. 마무리되었습니다. “

“수고했어. 저는 치킨 카레 중간 매운맛으로 주세요.”

“전 비프카레 불맛으로요.”

“저희 식당 불맛은 자극이 굉장히 센데, 괜찮으시겠어요?”

“문제없습니다.”

직원이 메뉴판을 거둬가자 비로소 남자의 얼굴이 드러난다. 웃음과 걱정이 함께 담긴 미소가 슬며시 슬쩍 창 너머로 고개를 돌려 웃음을 가렸다. 비프 카레 매운맛을 처음 먹은 날, 혀와 위장에 호되게 당했지만 카자미는 다른 메뉴를 시킨 적이 없었다. 카자미가 입술이 퉁퉁 불어 눈물을 찔끔 흘리는 모습을 반복하자 후루야도 걱정하기보다 제 부하의 고집불통을 즐겼다.

“그나저나 오랜만이네요.”

“오늘로 딱 반년 됐지. 카레가 먹고 싶었는데, 네가 생각났어. 그래서...”

생각났다니. 후루야는 제법 낯간지러운 대사를 툭 하고 뱉을 줄 알았다. 카자미는 이제 비난이나 칭찬에 적당히 반응할 줄 아는 나이가 됐다. 하지만 생각났다느니, 보고 싶었단 말엔 대처가 어려웠다. 머쓱하게 뒤통수를 매만졌다. 뒤에서 에어컨 바람이 불어와 땀으로 젖었던 머리카락이 금세 차가워져 있었다.

“그야 그동안 <그쪽>일로 바빴으니까요. 이제와서 하는 얘기지만, 마음 졸였습니다. 무사히 마무리 되어 다행입니다.”

“네가 고생 많았어.”

“저보다 <그쪽>에 잠입해 있던 후루야 씨가 더 고생 많으셨죠. 그래서 말입니다.”

카자미가 머뭇거리자 낯선 이와 합석한 사람답게 창 너머만 바라보던 후루야가 고개를 돌렸다. 몇 년간 후루야의 오른팔로 지내며 하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다. <그쪽>으로 넘어갔던 후루야가 긴 잠입을 끝내고 돌아오자, 카자미는 마지막을 예감했다.

“...제 역할은 여기서 끝인가요?”

어줍잖게 돌려 말해도 그는 눈치가 좋아 알아들을 것이다. 하지만, 카자미는 후루야에게 듣고 싶었다. 제로의 오른팔은 후루야가, 혹은 카자미가 원한다고 해서 지속되는 것이 아니기에 듣는다고 달라질 일은 없었다. 나라에서 목숨과 사명으로 이어준 사이였다. 상부에서 끊으면 더 이상 제로에게 연락할 수도, 볼 수도 없었다. 카자미 유우야에게 후루야 레이는 어느새 특별한 존재가 되었기에, 기나긴 시간동안 불안감에 존재했던 <후루야 레이의 마지막>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욕심부리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실례합니다. 주문하신 치킨 카레 중간 매운맛 하나와 비프카레 불맛 하나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흐름을 갈라놓았다. 하지만, 카자미는 제 앞에서 흔들린 눈망울이 이내 포커페이스로 돌아오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카자미는 그것으로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오지 않았고, 두 사람은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다.’ 만으로 이 질문과 대답은 가치가 있었다. 카자미는 제 앞에 서빙되는 음식을 빤히 보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르는 시간이었기에.

“잘 먹겠습니다.”

평소보다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수저를 들기 전에 먼저 백색 락교를 접시에 올렸다. 접시에 락교가 한움큼 자리를 차지해도 카자미는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한눈에 봐도 잘 익은 감자에 손을 대자 손끝이 따끔할 정도로 뜨거웠다. 예상한 일이지만, 뜨거운 감도에 카자미는 감자에서 손을 뗐다. 저와 같은 루트를 따라가야할 사람은 미동이 없었다. 이 사람도 나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똑같지는 않아도, 모서리만큼 비슷할지 모르는 마음을 추측했다. 그러자 어딘가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것으로 카자미는 됐다.

카자미는 일부러 카레를 한술 떠 입에 넣을 때까지 후루야는 미동이 없었다. 식사 앞에 카자미만큼 진지한 남자가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있자 카자미는 ‘설마 후루야 씨 우시는 건 아니겠지?’ 하고 걱정이 들었다.

어라? 후루야 씨가 운다고?

걱정과 다르게 후루야는 수저를 들고 맞춰 식사를 시작했다. 그 모습엔 눈물이라고 비치지 않아 카자미는 당황을 숨길 수가 있었다. 익숙해지지 않는 매운맛은 언제나 자극적이라 카자미는 매번 도전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우물우물 씹을수록 매운맛이 침샘을 자극했다. 반쯤 먹었을 땐 혀가 얼얼해서 카레집에서 대화라고는 후루야의 일방적인 독백과도 같았다.

그래서 “이쪽은 아직 네가 필요해.”라고 했을때 대답할 수 없을만큼 혀가 뻣뻣해진 상태였다.

“카자미, 네 덕에 제로로 있을 수 있어 언제나 감사하고 있어.”

물을 마실까 손을 쥐락펴락 움직였지만, 연이은 간지러운 말을 상대할 수가 없어 실례를 범할 수가 없단 핑계로 침만 꼴깍 삼켰다. 매운맛으로 벌게진 카자미와 다르게 후루야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평화로운 모습이었기에 그 입에서

“그래서 부탁 하나 해야겠어.”

라는 말이 나왔을 때, 카자미는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저지른 일에 책임질 사람이 필요해. 내부 정보를 유출하고, 증거를 조작할 수 있는 사람. 현재 <그쪽>에 얽힌 사람들에게 죄를 묻기 위해서 표면적으로 비어있는 구멍을 메꿔야 해. 너도 알다시피 나라를 위한 일이었지만, 과정에서,”

“위법 작업을 책임질 적임자...입니까?”

“....그래.”

카자미는 긍정도 하지 않고 묵묵히 수저를 들었다. 무지갯빛 삶을 예상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일>의 결말이 이런식일 줄은 몰랐다. 자신이 수년간 정의를 위해 쌓은 시간이 결국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화살을 맞을 만큼 제로는 값어치가 있는 것인지 고민하고 싶었지만, 어느새 바닥난 백색 락교에 생각을 뺏기고 말았다.락교통 뚜껑을 열자 바로 옆에 이 가게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매운 맛 카레 홍보 전단이 눈에 들어왔다. <죄의 불맛! 그 매운 맛, 크리미널 하고도 길티!> 글자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부에서 그렇게 결정했군요.”

“지금 당장 대답하라는 건 아니야.”

“언제까지 결정하면 될까요?”

제 주제에 결정이라니, 꽤 건방진 대답이었다.

“이 가게를 나가기 전까지.”

입안을 락교로 달랜 뒤, 카자미는 남은 카레를 비워내는 데 열중했다. 죄를 삼킬 때마다 목구멍이 따끔했다.

“물론 네게 어떤 결과가 주어져도 내 쪽에서 지킬 방법을 최대한 모색하고 있어. 네가 희생한 값은 상부에서도 그냥 지나치지 않을 거야. 네게, 나를 지켜준 보답만큼은 제대로 하고 싶어.”

자신을 생각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지금 어떤 얼굴인지 궁금했지만,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카자미는 시선을 내려 카레에만 집중했다.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흘끔 시선을 돌린다는 게 후루야의 접시였다. 그는 접시에 락교를 덜기는 커녕, 카레는 몇 수저 뜨지 못했다. 식사는 제대로 챙기라고 잔소리 하던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후루야가 주문한 카레는 아마 저대로 머무를 것이다.

카자미는 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 식사를 끝마치고 서야 카자미는 물을 마셨는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 벌컥벌컥 마시는 찬물은 도전을 완수했다는 희열을 느끼게 했다. 그렇지만 카자미는 수저를 내려놓고 후루야의 그릇을 반히 바라보고 있었다. 에어컨 바람에 좀 더 일찍 식은 카레 표면에 옅은 막이 주름지고 있었다.

“후루야 씨.”

“...응.”

“그 감자... 안 드실 건가요?”

후루야는 잠시 당황한 듯 보였다. 움직이지 않고 둘 사이에 적막을 던져놨다. 그는 그릇을 카자미 앞으로 내밀었다. 처음처럼 김은 나지 않지만, 감자는 잘게 부서지며 숨기고 있던 열을 내뿜었다. 그 온도는 죄의 맛으로 한껏 달궈진 입 안을 헐어버리기 충분했다. 그 맛은 매운 기를 가시기는커녕, 더욱 지옥에 빠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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