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카자

녹는점

💘명탐정코난 10기 42화(티빙 기준)에서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어서오세요. 

딸랑, 맑은 소리와 다르게 알바생은 심드렁한 얼굴로 인사한다. 인사말은 자동화가 안 되는 걸까. 알바생은 껌을 쩍쩍 씹으며 스마트폰만 보고 있다. 기본적인 응대를 기대하기 힘든 모습이라 그에게 스파이초코를 물으면 아앙? 그딴 걸 나한테 묻는데? 묻어줄까? 죽을래? 할 것 같아 카자미는 내부를 둘러본다. 

카운터 오른편에 <사랑하는❤발렌타인 초콜릿 모음❤ 그에게 사랑을> 플랜카드를 발견하고 반대편 섹션으로 간다. 일부러 한 바퀴 빙 돌아 에너지 음료와 편의점 도시락, 캐러멜을 집어 마지막으로 이벤트 섹션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 매대를 기웃거리는 남성. 여자에게 초콜릿을 받을 일 없어 보이기 딱 좋다. 그래서 순수하게 초콜릿을 사러 온 사람은 억울할 수밖에. 

애인 있습니다. 그렇지만 애처럼 상대에게 선물을 바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게다가 오늘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요.

카자미는 속으로 변명 아닌 대답을 하며 카운터로 가는 척, 매대 근처에서 걸음 속도를 늦춘다. 경찰 경력을 살려 매대를 재빠르게 훑는다. 역시 없다. 14일은 이제 4시간 남짓 남았다. 일부러 인적이 드문 동네를 찾아왔는데. 하늘이 어둑해지기 시작하자 카자미는 초조함을 느꼈다. 이쯤 되면 한정물량이 다 빠졌을 것이다. 

2월 1일부터 전국에 판매한 스파이 초코 발렌타인 한정판은 CM부터 호평이었다. 오키노 요코와 모리 코고로가 모델로 발매 전부터 화제였는데, 판매 일주일 만에 최대 판매량을 달성했다. 단순히 모델 덕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도, 다섯 가지 맛으로 출시한 스파이 초코는 밀크와 섞은 시럽이 스파이처럼 숨어 진한 초코와 잘 어우러졌다. 

카자미는 딸기스파이 맛을 선호했다. 그래서 14일만 판매하는 오키노 요코 한정 스파이 초코도 딸기맛으로 살 계획을 세웠지만, 이제는 구할 수만 있다면 아무렴 좋았다. 새벽부터 편의점만 15곳을 들렸고 딸기는커녕, 포장지 구경도 못했다. 이대로 본청에 들어가면 오늘내로 나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카자미가 한아름 들고 온 물건을 알바생은 무료하게 바코드를 찍는다. 삑, 삑 바코드를 찍은 소리와 딱, 딱 껌이 이에 마찰하는 소리가 엇갈린다. 

“천구백팔십 엔. 봉투는.”

알바생은 기계보다 더 규칙적으로 껌을 씹었다. 

“저기….”

고민하다 말을 걸자 그를 치켜본다. 노골적으로 귀찮은 존재 취급받고 있지만, 카자미는 안경을 슥 올리고 당당하게 말했다.

“오키노…. 요코 스파이 초코는 품절입니까?”

알바생은 얼굴을 삐딱하게 기울인다. 여전히 껌을 요란하게 씹다가 풍선을 크게 불었는데, 빵! 하고 터지는 소리가 마치 빨리 계산하고 꺼져, 라는 것 같아 민간인과 마찰을 일으켜선 안 되는 카자미는 조금 긴장했다. 이곳에서 청사까지 가지 않은 편의점은 한 군데. 아마 없을 것이다. 

“잠만.”

조용히 물러나 계산해 달라고 할 참이었다. 알바생은 스캐너를 내려놓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금방 나온 그의 손에는 오키노 요코가 있다. 카자미는 믿을 수 없어 안경을 고쳐 썼다. <발렌타인데이 스파이초코 - 오키노 요코 발렌타인데이 한정 포토카드판> 이라고 적혀있는 걸 분명히 확인한다. 알바생은 상자에 프린트된 얼굴이 오키노 요코인지 알게 뭔지, 무심한 얼굴로 점선을 따라 상자를 부욱- 찢었다. 요코의 맑은 얼굴을 점선을 아슬하게 비껴갔다. 

“채워놓는 거 깜빡함.”

“한 박스 다 주세요.”

알바생이 턱을 까딱 움직여 포스기 옆을 가리켰다. 

알바생의 귀에 주렁주렁 달린 피어싱만 보면 사회 질서 따위 지킨적 없을 것 같은데, 매장 방침은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 돼. 카자미는 자기반성을 하며 검지 손가락 하나만 펴서 의사를 밝힌다. 알바생은 스캐너를 들어 초콜릿을 찍고 건성으로 이천사백팔십 엔, 이라고 말했다.

딸기맛이다.

운이 좋았다. 일에 집중하지 않은 알바생 때문에 편의점 점장은 고생할지 모르지만, 덕분에 카자미는 원하는 물건을 얻었다. 스파이 초코 CM송에 맞춰 몸이 절로 좌우로 흔들린다. 어떤 카드가 나올까. 저도 모르게 핸들을 손가락으로 툭, 툭 치고 있었다. 기대감에 찬 손길이었다.

카자미가 청사로 돌아와 얼마 뒤, 부하들이 겉옷을 챙겼다. 카자미 씨는 식사 안 하세요? 하고 같이 나가자는 의사를 밝혔으나 카자미는 서류에서 눈을 떼며 책상에 둔 편의점 도시락을 가르켰다.

“오늘은 간단하게 먹으려고.”

“사건 조사 때문인가요? 그럼 저희도 도시락을 사 오겠습니다.”

“그 건은 오후에 조사가 끝났어. 어쩌다 도시락이 생겨서 말이지. 오늘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을 테니 식사하고 와.”

식사까지 부하에게 눈치줄 생각이 없다. 오늘 내로 들어가기 글렀으니 차라리 식사시간만큼은 편하게 챙겼으면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부족하시면 연락 주세요. 그 집 포장도 되거든요.”

부하들을 보내고 양팔을 위로 뻗어 기지개를 켠다. 도시락을 제 앞에 두고 편의점 봉투에서 일회용 젓가락을 꺼내며 안을 살핀다. 오늘 편의점 15군데를 돌아다니며 구입한 에너지 드링크, 음료, 컵라면, 과자 등이 쌓여있다. 컵라면을 하나 꺼낼까, 고민하다 도시락 유통기한이 짧은 것을 떠올리고 생각을 접는다. 

도시락은 차갑지 않았고 데워야 하는 메뉴가 아니라 바로 뚜껑을 열었다. 잘 먹겠습니다. 작은 인사를 한 그가 잠시 고민하는데, 젓가락을 가지런히 내려놓고 가방에서 스파이초코를 꺼낸다.

스파이초코 오키노 요코 한정판은 발렌타인데이 한정 사진과 사인 카드, 그리고 스파이초코 팬미팅 티켓이 들어 있다. 한정의 한정인 셈이다. 팬미팅은 콘서트나 공식 이벤트와 별개로 스파이초코를 발매한 우라이 제과 측에서 개최해서 아주 희귀성 높았다. 즉, 돈을 내고도 못 가는, 운에만 맡겨야 하기에 자신이 당첨될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일말의 희망은 마음에 존재했다.

조심스레 상자를 뜯자 은박지와 상자 사이에 흰색 포장지가 보인다. 카자미는 포장지를 위로 들어 형광등에 투과해본다. 종이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한치의 투명함도 허락하지 않는다.

좋아.

고개를 끄덕이고 비장하게 포장지를 뜯었다. 지이익, 종이 포장지가 갈라지는 소리에 카자미는 꿀꺽, 침을 삼켰다. 알록달록 하트 배경과 스파이초코 로고가 중앙에 박혀있는 종이가 나왔다. 그리고 카드를 뒤집었다.

“왜 네가 모리 탐정 사진을 갖고 있는 거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머문다. 익숙하게 미형의 외모가 절로 떠오르는 음색에도 카자미는 멍하게 넋을 놓고 있었다. 후루야가 청에 불쑥 나타나 줄곧 제 뒤에 있었던 마냥 말을 걸어도 카자미는 놀라지 않았다. 

“카자미.”

또박또박 이름을 부르지만, 제 부하는 미동이 없다.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남의 남자 사진을 빼앗다시피 뽑아 앞뒤로 살펴본다. 차례로 책상에 편의점 도시락과 뜯긴 초콜릿 포장지가 눈에 들어온다. 모리 탐정이 오키노 요코와 광고를 찍었다며 일주일 내내 떠들던 장면이 떠올랐다.

“흐응, 오키노 요코와 모리 코고로가 모델인 초콜릿이란 말이지. 발렌타인 데이 오키노 요코 포토카드 한정판이라…. 편의점 도시락이 각각 다른 브랜드인걸 보아 최소 두 군데는 들렸다는 얘기고, 봉투는 드링크와 간식거리가 한가득이야. 편의점에서 가득 물건을 산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정확한 추리를 내놓았지만 카자미는 별다른을 보이지 않는다. 삐죽한 머리가 잔뜩 얽힌 정수리를 내려다보다 다시 카드에 집중한다. 카드 안은 파이프를 물고 페도라를 눌러써 고독한 분위기를 내는 모리 탐정이 있다. 오늘 아침에 본모습과 판이했다.

“사실…. 조금은 기대했습니다….”

후루야의 인내가 점점 떨어질 때, 기막히게 카자미가 입을 연다. 목소리엔 허탈하다 못해 공허함이 느껴졌다.

“팬미팅에 당첨되면 옷을 사러 가는 상상은 해봤습니다만, 그게 아니어도 요코쨩 포토카드는 하나쯤 갖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의자가 빙글 돌아간다. 카자미는 축 처진 어깨로 후루야를 올려다본다. 매일 경직되어 치켜 올라간 눈은 흐트러져 있고 눈가가 촉촉하다. 이봐. 그런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지 말라고. 후루야는 지난밤이 생각나 미간을 절로 찌푸렸다. 괜히 헛기침을 했지만, 후루야의 생각을 아는지 카자미는 어깨를 더 축 늘어트렸다. 

“그렇다고 모리 탐정이 나올 것까진 없잖아요. 포토 카드 중 오키노 요코 사진이 10종에 모리 탐정은 1종이라고요. 게다가 오키노 요코 한정판이라면서 왜 모리 코고로 사진을 넣는 건가요? 네에? 저는 초콜릿 산다고 새벽부터 15군데를 돌았다고요. 물론 일은 전부 처리했습니다. 18시 50분에 요청하신 추가 자료도 확보해서 정리했으니 출력 후 갖다 드리겠습니다. 이건 팬에 대한 우롱이고 기만입니다. 네에? 그렇죠, 후루야 씨?”

한 번 말문이 터지니 쉼 없이 불만을 쏟아낸다. 적당히 상사의 눈치를 보며 동의를 구하는데, 정작 후루야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가는 모습은 보지 못했는지 한숨을 푹 쉬고 후루야 손에서 포토카드를 가져온다. 의자를 원위치로 돌려 서랍 어딘가에 모리 코고로를 넣었다. 남의 얼굴을 함부로 대하는데 마음이 걸렸지만, 수사 자료도 아닌데 갖고 있기도 뭣해 적당한 타이밍에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래. 기만이네. 카자미.”

“그렇죠? 후루야 씨라면 분명 이해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나무젓가락이 반으로 갈라지며 딱, 소리를 냈다. 순간, 사무실 공기까지 변화하는걸 느끼며 정신이 들었다. 후루야 씨라 왜 동의 해 줄거라 생각했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발렌타인 데이에 다른 여자의 사진이 있는 초콜릿을 구한다고 새벽부터 온 도쿄를 돌아다니는 수고를 하면서 애인 초콜릿은 사 오지 않은 거지? 게다가 다른 남자 얼굴 보고 한숨 쉬며 한탄하는 건, 애인에 대한 기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아.”

카자미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눈을 깜빡였다. 

발렌타인 데이. 

기억하고 있으면서 잊고 있었다. 삼십 평생 발렌타인 데이는 이벤트의 이벤트가 있는 날이지 카자미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적이 없었다. 받아본 적도 없고 준 적도 없다. 또, 변명을 하자면 발렌타인 데이는 기본적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받는 날이고 카자미는 자신이 평생 남자와 사귈 줄 몰랐다.

서랍 안도, 당장 책상 위에도 있는 게 초콜릿이지만, 카자미도 눈치가 있다. 이런 걸 줬다가 아무리 후루야라도 관계를 다시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 저, 그게, 후루야 씨. 죄송합니다. 제가 살면서 발렌타인 데이에 뭘 받아본 적이 없어서요. 그래서 생각을 못했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시간을 주시면 기한 내로 초콜릿을 사 오겠습니다.”

흘러내리지도 않은 안경테를 잡아 콧대로 올린다. 당황하면 나오는 카자미의 버릇인데 왼손으로, 오른손으로 번갈아가며 올리는 걸로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눈치를 살피며 그를 올려다보자 내려다보는 눈빛이 서늘하다. 이렇게 혼난 적이 언제더라. 등골은 서늘한데,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실책을 자책하며 슬쩍 고개를 내린다.

“자.” 

후루야 손에서 상자가 툭, 하고 상심한 소리를 내며 책상에 놓인다. 손바닥 상자는 한 귀퉁이에 녹색 리본이 예쁘게 묵여 있었다. 

“이건…?”

“초콜릿이야. 비록 네가 좋아하는 ‘오키노 요코 한정’ 초콜릿과 비교도 안 되겠지만. 적어도 너를 생각하며 만들었어.”

“후루야 씨가 직접요?”

“…그래.”

카자미가 소중하게 상자를 들었다. 선뜻 뜯지 못하고 귀퉁이를 매만지는 모습에 미안함이 가득하다.

“전 준비한 것도 없는데…”

“됐어. 네게 뭘 받자고 만든 것도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저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은 처음 받아봅니다. 뜯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요.”

특별할 것 없는 하얀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방금까지 풀이 죽어있다 투덜대고 당황했으면서 금방 수줍음과 기쁨으로 가득 찬다. 저게 뭐라고 한참 상자를 어루만지고 있자, 후루야는 상자를 뺏었다. 어어? 줬다 뺏는 게 억울한지 눈을 크게 뜨고 팔을 뻗지만, 후루야가 하는 일이라고 선뜻 나서지 못한다.

리본을 풀어 상자를 열고 9구 가운데 자리한 하트모양 화이트 초콜릿을 꺼내 입에 쏙 넣는다. 짙은색의 눈동자에 망연자실이 차올랐다. 후루야는 피식 웃으며 허리를 숙여 그의 턱을 잡고 입술을 맞대자, 카자미는 기습적인 행동에 놀라 몸을 크게 튕긴다.

입 안 온도에 코팅된 표면은 금방 물러졌다. 후루야가 그를 내려다보자 시선을 피해 좌, 우로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보다 입을 조심스레 연다. 열린 안으로 혀로 초콜릿을 넘기자 순순히 받아놓고 낯선 존재에 빳빳하게 굳었다.

입 안부터 혀를 샅샅이 매만질 때마다 달달한 풍미가 혀를 감싼다. 후루야는 카자미에게 몸을 밀착해 의자로 깊게 밀어 넣는다. 바르게 앉은 다리 사이로 무릎을 강제로 밀어넣자 순순히 다리를 벌렸다. 안을 헤집을수록 달콤함이 점점 녹아드는 걸 느낀다. 목 깊은 곳부터 울리는 애타는 신음을 들으며 후루야는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이 만든 열이 모서리 어딘가 녹였다. 이윽고 그의 안에 새콤달콤한 액체가 팡하고 터지자 후루야는 미련 없이 카자미에게서 떨어졌다. 헐떡이는 그를 두고 후루야는 자신의 정장을 바르게 정리했다. 

“이걸로 받은 셈 칠게.”

애초에 그가 뭘 준비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카자미는 후루야가 입 안에 남은 흔적을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후루야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눈을 접어 웃었다. 처음 맞은 발렌타인 데이에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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