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E, LIAR
(찐검조)라이조디
정신을 차리고 보니 9시였다. 조디는 9시를 애매모호한 시간이라 불렀다. 누군가에게 저녁일 수도, 밤일 수도 있는 시각을 넋 놓고 바라보다 차 키와 서류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피곤에 절은 눈으로 차를 몰고 오십 분 남짓 달리면, 길가에 24시간 패밀리 레스토랑이 나왔다. 모든 게 엉망진창일 때 찾는 곳이었다. 형광색 간판과 전등이 지탱하고 있는 가게를 보고 조디는 매서운 얼굴을 풀었다.
전등이 잊을만하면 깜빡였다 정신을 차렸다. 사장이나 직원이나 고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 곳에 들리는 주된 손님은 화장실이나 긴히 떼울 끼니를 필요로 하는 운전자뿐이라 전등에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근한 인사 없이 자리에 앉아 바나나 팬케이크와 밀크 쉐이크를 시켰다. 웨이트리스는 메뉴를 적는 일보다 껌을 씹는 일에 더 집중했다. 종종 메뉴가 다르게 나와도 조디는 한 번도 컴플레인을 걸지 않았다. 그녀는 주방과 멀리 떨어진 안쪽 자리에 주로 앉았다. 서류를 올려놓고 수첩에 글씨를 적고, 긋기를 반복한다. 무언가 풀리지 않는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을 때 음식이 나왔다.
팬케이크를 다 먹을 동안 여덟 명의 손님이 들어왔다 나갔다. 그 중 한 남자가 조디의 맞은 편에 앉았다. 허리춤까지 기른 흑색 머리카락은 창백한 얼굴과 대조적이었다. 조디에게 작업 거는 것치고 너무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조디가 제 앞을 허락한 건 처음이라 웨이트리스는 카운터에서 잠시 그들을 구경했다.
남자는 커피 한잔을 주문하고 난잡한 테이블을 찬찬히 살폈다. 바닐라 쉐이크라니, 의외로군. 단 음식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상대는 얼굴을 들지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녀를 말없이 지켜보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조디였다. 뭘 원하지? 그녀는 팔짱을 끼우고 딱딱한 등받이에 기댔다. 꽤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오랜만이야, 엠마."
"협상이라도 바라나?"
날카로운 목소리를 듣고도 남자는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목적인 것처럼 조디의 푸른 눈을 응시했고, 조디는 지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신경을 갈라놓은 건 웨이트리스였다. 남자는 제 앞에 놓인 무늬가 까진 커피잔을 한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협상이라… 그것도 좋겠는 걸."
남자는 퍽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떡였다.
“정정하지. 협상은 없어.”
조디는 최대한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 것치고 초조하게 펜 끝으로 테이블을 몇 번 쳤다. 잠깐이었다. 이내 짓이긴 입술을 되돌리고 서류에 시선을 파묻었다. 신경질적으로 종이를 넘기는 조디와 달리 남자는 다리를 꼬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셨다. 상대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자, 금세 따분해졌는지 말끔히 면도 된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어지러운 서류 사이에서 제 사진이 있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빼곡하게 타이핑한 글자를 훑다 한 부분을 툭툭 쳤다.
“아카이 슈이치.”
“뭐?”
“모로보시 다이가 아니라 아카이 슈이치라고.”
길쭉한 손가락이 <CODE NAME : RYE(Moroboshi Dai)>를 가리켰다. 짧은 시간 동안 조사를 많이 했군. 조디 스털링이라고 했던가? 정보 수집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던데. 칭찬하는 말을 듣고도 조디 얼굴에 부끄럽거나, 기뻐하는 내색은 찾을 수 없었다.
“알아. Mr. 슈이치.”
이만 가줬으면 좋겠는데. 조디는 커다란 안경을 벗어 미간을 꾹 눌렀다. 질리도록 읽은 서류보다 일주일 만에 만난 라이에게 피곤함을 느꼈다. 이건 반출 가능한 서류라고. 진짜 정보는, 라고 설명을 덧붙일 생각도 없지만, 이 정도는 그도 알 것이다.
라이는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슈이치라…, 길게 제 이름을 곱씹고는 깊은 한숨을 뱉었다. 막 안경을 쓰고 펜을 움직이던 조디는 잠시 동작을 멈췄다. 귓가에 뱉던 익숙한 감각이 떠올랐다. <엠마.> 가짜 이름을 부르는 음색은 낮고 조용했지만, 제 몸을 달아오르게 하기 충분했다. 괜히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귀를 만지다 황급히 손을 뗐다. 라이는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일본 이름은 앞이 성이고, 뒤가 이름이지. 무표정했던 얼굴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슈라고 불러.”
“슈?”
둘이 있을 때는. 그 말을 듣고 하! 조디는 기가 찬웃음을 흘렸다. 지금 착각하고 있나 본데, 앞으로 우리가 만날 일은 없어. 부러 입꼬리를 뒤틀고 명백한 비웃음을 날렸다. 취조실이라면 모르겠지만. 조디는 라이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서류철에 끼워 넣었다. 라이는 신경 쓰지 않고 <슈이치>는 당신이 발음하기에 어려운 것 같군, 한마디를 덧붙일 뿐이었다.
“그래서 찾아온 진짜 이유가 뭐야? 속여서 미안하다 사과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자수하러 온 것은 더욱 아니겠지.”
“속인 건 당신도 마찬가지잖아.”
엠마, 아니 이제 스털링 요원이라고 불러야겠지? 라이가 투덜대며 담배를 꺼냈다. 연기를 뱉고 이내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아침까지 나랑 섹스하던 상대가 내 머리통을 날리러 온 FBI요원이라니, 상상도 못했어.”
당신을 보고 얼마나 놀랐냐면, 목표물을 한 방에 죽이지 못했다고. 잇새에서 자조적인 웃음과 연기가 새어 나왔다. 그런데도…. 거침없는 그가 어울리지 않게 대답을 망설였다. 처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가락 사이에 피우지 않은 담배가 끝까지 타들어 갔다. 라이는 열기를 감지하고 재떨이에 천천히 필터를 짓눌렀다. 속이 탔다.
“당신이랑 하고 싶어서.”
“뭐?”
절대 라이를 쳐다보지 않겠다고 다짐한 조디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눈에 황당함이 가득했다.
“한 번은 내가 정말 퀸스에 사는 잭이었으면 했지.”
진심이야. 그리고 처음으로 눈까지 휘어 웃는데,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이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조디는 넋 놓고 라이를 바라보다 제 얼굴에 열기를 느꼈고 이내 골칫덩어리라도 본 것처럼 손으로 이마를 짚어 얼굴을 가렸다.
“그날 총을 맞은 건 의원이 아니라 당신인가 보군.”
“당신에게 잠깐 잡혀주는 계획도 짜봤어.”
“필요 없어. 우리 FBI는 당신과 조직을 하나도 남김없이 잡을 거야.”
하하. 드물게 라이가 큰 소리로 웃었다. 비웃음 하나 없었지만, 조디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기 충분했다.
“글쎄… 당신들은 절대 날 찾을 수 없어.”
“그건 두고 봐야지.”
조디는 처음으로 라이를 똑바로 바라보고 웃었다. 엠마에게 볼 수 없던 눈빛. 푸른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자신감 찬 목소리를 듣고 라이는 만족감을 느꼈다. 라이플의 반동이 자신의 몸을 흔들고 총알이 목표물에 박힌 순간, 그 짜릿함과 같았다. 엠마, 당신이 이렇게 재밌는 사람인 줄 알았다면 진작 당신을 납치했을지도 몰라. 처음으로 던진 농담은 먹히지 않았다.
라이는 품에서 펜을 꺼냈다. 유리잔 밑 코스터를 빼내 숫자를 적었다. 잔에 맺혀있던 물기가 축축이 젖은 탓에 글자가 번졌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엔 진짜 번호야. “
이걸 전해주러 왔어. 그녀는 제 앞에 놓인 코스터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종이를 모아 각각 서류철에 분류했다. 무작위로 펼친 것치고 나름 규칙성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라이는 그녀의 빠른 손놀림은 물론이고, 일주일 만에 이 정도의 정보를 모은 데 진심으로 감탄했다. 젊은 나이에 본부장 자리에 앉은 이유가 있었다.
“거짓말쟁이.”
“그러는 당신도.”
“아코디언 연주가라며.”
위에 있는 전등이 대여섯 번 깜빡였다. 백 프로 거짓말은 아냐. 예전에 연주한 적이 있어. 그러는 <엠마> 당신은 요가 강사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따지면 나도 한 달에 두 번은 요가 클래스에 나간다고. 온화한 엠마와 달리 퉁명스럽고 차가운 말투였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
“뭐지?”
“정말 의도적으로 접근한 게 아니었어?”
라이는 잠시 고민했다. 1주일 전 현장에서 조디와 만나지 않았다면, 물 밑에서 활동하는 자신을 들킬 일도 없었다. 그만큼 지난 6개월 동안 엠마 로렌스에게 빠져있었다.
“진심으로 몰랐어. 나도 하나만 묻지.”
“나도 마찬가지야.”
조디는 말을 가로챘다. 대답에 납득을 한 건지, 서로 말이 없었다. 처음으로 같은 얼굴이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복잡한 표정으로 라이는 담배를 피웠고 조디는 입술을 깨물고만 있었다. 먼저 움직인 건 조디였다. 제게 내밀어진 코스터를 구겨 바닥에 휙 던졌다. 라이의 얼굴에 웃음은 예전에 사라졌지만, 거절 의사를 보고도 기분이 상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럼 연락 기다리지. 조디.”
조디는 가방에서 새로운 서류를 꺼냈을 뿐이었다. 한 페이지를 읽고, 또 읽었을 때 아마 라이의 차인 듯 멀리 엔진소리가 크게 울렸다 사라졌다. 같이 있던 남자가 계산하고 갔어요. 웨이트리스가 밀크쉐이크 한잔을 놓자, 그때까지 자신이 입술을 못살게 굴고 있는걸 알았다.
엉클대니에서 10년 넘게 일했다는 웨이트리스는 의외의 면이 있었다. 시종일관 무관심한 얼굴과 다르게 바닥이 조금이라도 더러운 모습을 참지 못했다. 손님이 음료를 쏟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와서 바닥을 닦았다. 이번에도 따분한 얼굴로 허리를 굽혀 구겨진 종이를 주우려 하자 조디는 차가운 목소리로 놔두세요. 제 거에요, 하고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조디는 평소 단 음식을 즐기지 않았다. 밀크쉐이크에 꽂힌 빨대를 놔두고 컵에 입을 댄 채로 쉐이크를 꿀꺽꿀꺽 삼켰다. 골이 울릴 만큼 차가웠지만,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고개를 꺾어 마지막까지 털어 넣었다. 이번엔 제 위의 전등이 깜빡였다. 조디는 엉클대니에 처음 온 것처럼 전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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